길음동성당 게시판

작가 김나미가 만난 푸른눈의 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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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섭 [hallahon] 쪽지 캡슐

2004-01-15 ㅣ No.3074

15일자 조선일보을 읽다가 길음동 교우들이 생각이 나서 올립니다

 

 

 

①꼰솔라따 수도회 박호 신부

"더 낮은 자리로… 서로 사랑하는 법 배워요"

 

  

 ▲ 박호 신부(가운데)가 아침 미사를 마친 뒤 공동체 식구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부천=황정은기자  

  

벼락부자를 꿈꾸는 사람이 너무 많아 로또 열풍으로 세상이 시끄러울 때 내 발길은 더 자주 수도원을 향한다. 경기도 부천, 역곡 전철역에서 내려 가톨릭대학 쪽으로 걷다보면 공사장 뒤로 오밀조밀한 빌라촌과 마주친다. 그중 한 집, 십자가도 달려있지 않아 수도원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4층 벽돌집에 신의 이름으로 모여 나눔을 실천하는 ‘푸른 눈의 은자(隱者)들’이 살고 있다.

이제 막 쉰 살이 넘은 박호 신부의 모습은 시골 총각 같다. 그 순박함에 마음이 끌려 매번 다시 찾곤 하는데 만날수록 동네 아저씨같이 격의 없는 소탈한 모습이 더욱 정겹다. 볼 때마다 “무엇이 저 사람을 저렇게 행복하게 할까?” 할 정도로 항상 환하고 밝아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유쾌지수가 올라간다.

 

꼰솔라따 수도회의 한국 지부장인 박호 신부님의 스페인 이름은 프란시스코 헤수스(Francisco Jesus), 보통은 프란시스코를 줄인 애칭 파코(Paco)라고 부른다. 박호는 파코를 우리말 발음 그대로 옮긴 것이다. 스페인 남부 휴양지 말라가 근처의 에스테포네 마을에서 1954년에 태어난 그는 대학에서 교육학을 공부하던 중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수도사가 되었다.

 

첫 대화 때 그는 “18년이나 살았어도 잘 못하지만 그래도 우리말만 하겠어요”라고 못을 박았다. 그의 우리말은 한국어다. 신부님이 이렇게 노력을 하는 데는 사연이 있었다.

 

“어느 날 신자 한 분이 고해성사를 하는데, 보속(補贖)으로 화살기도(짧게 여러 번 반복할 수 있는 기도)를 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화’라는 글자가 발음이 안 돼서 ‘자’로 나온 거예요. 화살이 자살이 된 거지요. 나중에 그 신자가 자살 기도는 어떻게 하느냐고 묻기에 많이도 웃었지요.”

 

이번 만남에 행운이 따랐는지 마침 티타임 시간이 되어 식탁으로 모이는 공동체 식구들 얼굴을 보게 되었다. 내 옆에 앉은 흑인 신부는 마사이족 계통의 키구주족, 그 옆의 신부는 루오족 출신이다. 식당에 걸려 있는 ‘최후의 만찬’ 속 예수도 아프리카 전통 옷을 입은 흑인이었다. 이 수도회의 전통( 박스 기사 ) 영향인가 싶다.

 

“기도를 통해 계속 하느님이 가리키는 곳으로 가고 있지요.” 박호 신부와 동료들이 실천하는 복음 전파와 봉사의 길은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향한다. 한국에 들어온 것은 1988년 1월.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서울지부가 생겼고 인천 만석동 달동네에서 봉사 활동을 시작했다.

 

박호 신부는 대화 중에 끊임없이 세 가지를 강조했다. 형제 같은 사랑으로 이루어진 공동체, 타 종교에 대한 이해와 포용, 항상 낮은 곳에 임하리라는 마음이다.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살 때 거기엔 형제 같은 사랑이 필수예요. 나 자신이 선택한 공동체라도 여기 모인 형제들은 내가 선택한 사람들은 아니지요. 오로지 하느님의 부르심이라는 ‘한 뜻’으로 모여 수도 공동체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아무리 ‘한 뜻’으로 모였다지만 그들도 인간이다. 같이 생활하는 일에 항상 사랑만 있을 수 있을까. 갈등과 반목, 불편은 없는지 물었다.

 

“‘서로 사랑하는 일’도 배워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면 남들도 서로 사랑하지 않겠어요? 하느님의 사랑이 그대로 드러나는 곳이 바로 공동체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면서도 눈앞의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되겠어요? 이것이 바로 수도예요.”

 

그렇다면 수도 공동체는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사랑하는 훈련소이자 밖에서 나눠야 할 사랑을 확인하는 자리인 셈이다. 수도는 형제를 사랑하는 일이고, 신부님에겐 그것이 바로 도 닦는 일이었다.

 

 

 

 

 

 

 

  

 ▲ 꼰솔라따 수도회 박호 신부  

  

꼰솔라따에는 다른 수도회에서 볼 수 없는 또 하나의 공동체가 있다. 타 종교와 나누는 대화의 장, 무신론자까지도 환영하는 ‘위로의 샘터’가 그곳이다.

 

“세계적인 종교가 모두 아시아에서 태어났지만 요즘 아시아는 물질주의에 빠져 깊은 영성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아요. 그러나 ‘잘 보면 보인다’고 하듯이 종교가 다르더라도 각자의 믿음으로 잘 보이는 지점에서 종교 간의 대화가 가능합니다.”

 

열린 공간으로 종교 간 대화의 장을 열기까지 남모르는 고충도 컸다. ‘내 종교’가 아니면 안 되는 사람들이 이 공간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탓이다. 그러나 3년 전 어느 날 아랫마을 사찰의 비구니 스님이 떡을 들고 찾아온 일을 계기로 ‘위로의 샘터’ 문이 열렸다. 최근 박호 신부는 유림, 원불교, 불교 각 종단 등의 문을 두드리며 대화에 참여하도록 하고, 스님을 모셔 정기적으로 참선도 한다.

 

박호 신부는 요즘 가장 힘을 쏟고 있다는 구룡마을 이야기로 말머리를 돌렸다. “서울에서도 가장 번화한 곳 한구석에 가난한 비닐하우스촌이 있어요. 양재동 구룡산 밑에 500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사는데, 학원에 못 가는 아이들이 많아 작은 공부방을 만들었어요. 우물도 파고 지난 여름에는 수도관 설치를 도왔어요. 한번 가 보세요. 서울에 그런 곳이 있다고 하면 안 믿을 겁니다.”

 

그랬다. 가서 눈으로 보았으나 믿기지 않았다. 하늘로 높이 솟은 타워팰리스가 바로 한눈에 들어오는 구룡마을 풍경은 흑백사진 속 6·25 전후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었다. 비닐하우스에 담요를 얼룩덜룩 덮었고, 언덕엔 커다란 쓰레기산이 생겨 있었다.

 

꼰솔라따 사무실은 쓰레기장 밑으로 영하의 날씨에도 온기가 없다. 바로 옆 공부방을 들여다보니 전날 구들장에서 물이 새어 나와 모두 젖었다며 선풍기로 이불을 말리고 있다. 매서운 추위 때문인지, 눈앞의 광경 때문인지 난 그만 서 있는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얼마나 하느님을 사랑하면 저렇게 일할 수 있을까. 반드시 선교가 목적으로 보이지도 않았고, 봉사라는 단어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것은 헌신이었다.

 

이 정도로 자신을 헌신하는 수도자에게 묻고 싶었다. 하느님 때문에 자신의 기질을 거슬러 본 적이 있었는지, 혹은 신부님 자신이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는 일을 하기도 했는지….

 

“하느님이 하지 말라는데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많아요. 너무 나약하지요. 나약하기에 형제들을 더 사랑할 수밖에 없어요”라고 말끝을 흐린다. 사랑하고픈 모든 형제들에게 전갈이 있다. “남의 눈에 신경 쓰지 말고 잠시 멈춰 양심이 내는 소리를 들어 보세요. 거기에 행복의 메시지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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