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거룩한 교환 이란? 540_ [교회용어] [교리학습_통공교의] [성녀_글라라] [번역오류] [_계약] adopted |
---|
2012-04-18 ㅣ No.1193 질문: 오늘(4월17일 수요일) 매일 미사 교본 중 예물기도문에 "하느님, 이 거룩한 교환의 제사로, 한 분이시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과 저희를 하나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거룩한 진리를 마음으로 깨닫고 삶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 에서 거룩한 교환의 제사의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합니다. ---------- 답변: + 찬미 예수님! 1. 1-1. 우선, 예물 기도문 중에서 "제사"는 "미사 성제"를 말합니다. 그리고 "거룩한 교환" = "the sacred exchange" = "sacrum commercium" (라틴어) 이며, 그 의미는 다음의 문장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발췌 시작) God, as the Fathers say, worked the sacrum commercium, the sacred exchange: he took on what was ours, so that we might receive what was his and become similar to God.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vatican/hf_ben-xvi_hom_20070405_mc_en.htm (졸번역) 하느님께서는, 교부들이 말하듯이, 다음과 같은 거룩한 교환(sacrum commercium, the sacred exchange)을 달성하셨습니다: 우리가 당신의 것인 바를 받아들여 그리하여 하느님과 비슷하게 될 수도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당신께서는 우리의 것들인 바를 거두어들이셨습니다/떠맡으셨습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 참고: 위의 인용문은, 2007년 4월 5일 다해 성 목요일(Holy Thursday)에 거행되었던 성유 축성 미사(Chrism Mass) 중의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강론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1-2.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2011년 9월 25일 주일 Concert Hall, Freiburg im Breisgau 에서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강론 말씀에서 "Sacrum Commercium"에 대하여 또다시 말씀하신 바를 읽을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vatican/hf_ben-xvi_spe_20110925_cf_en.htm 2. 2-1. 다음은 위의 제1-1항에 있는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강론 말씀 중의 말씀을 다른 분이 우리말로 번역한 것인데, 저의 졸 번역과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정밀하게 비교/검토해 보시기 바랍니다: ----- God, as the Fathers say, worked the sacrum commercium, the sacred exchange: he took on what was ours, so that we might receive what was his and become similar to God. ----- ----- 출처: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발췌 시작) 하느님은 '거룩한 바꿈'을 하신 것입니다. (줄바꿈) 하느님은 우리가 하느님의 것을 받아 주님과 같아지도록 우리의 것을 받으셨습니다. (이상 발췌 끝) ----- 우선적으로, 이 번역은 직역 번역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위의 영어 원문은 가톨릭 보편교회의 핵심 가르침인 "통공 교의"를 언급하고 있으므로, 우리말 번역 시에 반드시 직역 번역을 하였어야 합니다. 아마도, 영어 원문에서 "the Fathers"가 "교부(Church Fathers)들"을 말함을 위의 번역문의 우리말 번역자가 인지하지 못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 때문에, 영어 원문의 첫 부분이, 즉 : (콜론) 이전의 부문이, 번역 과정에 우리말 번역자에 의하여 누락/변경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 (콜론)을 우리말 번역자가 자의적/임의적으로 "줄바꾸기"로 대체하였는데, 이러한 대체도 정확한 내용 전달을 훼손한다는 생각입니다. 영어 원문에 의하면 전달되어야 하는 핵심이 바로 "통공 교의"이기에, 위의 번역문 중의 핵심 문장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통공 교의"와 관련하여, 혹시 시간이 있으신 분들께서는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을 읽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129.htm <----- 필독 권유 2-2. 다음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위의 제1-1항에서 말씀드린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2007년 성 목요일 성유 축성 미사 중의 강론 말씀의 우리말 번역문에서 발췌한 해당 문장입니다. 또한 비교/검토해 보시기 바랍니다: ----- God, as the Fathers say, worked the sacrum commercium, the sacred exchange: he took on what was ours, so that we might receive what was his and become similar to God. ----- ----- 출처: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발췌 시작) 교부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거룩한 교환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것을 받아 주님과 같아지게, 주님께서는 우리의 것을 받으셨습니다. (이상, 발췌 끝) ----- 바로 위의 우리말 번역문은, 대체적으로 직역 번역을 잘 하였으나, 그러나, 영어 원문에서 "took on" 을 "받으셨습니다" 로 번역한 것은, "통공 교의"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기에, 많이 아쉽습니다. 대신에, "거두어들이셨습니다"/"떠맡으셨습니다"로 번역하였더라면, 그 내용 전달이 훨씬 더 좋았을 것입니다. 이 지적에 대하여 궁금한 분들께서는,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위의 제1-2항에 안내되어 있는,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또다른 강론 말씀에서 어떠한 설명을 추가적으로 하고 있는지 잘 읽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vatican/hf_ben-xvi_spe_20110925_cf_en.htm (발췌 시작) ... The Christ event includes the inconceivable fact of what the Church Fathers call a sacrum commercium, an exchange between God and man. The Fathers explain it in this way: we have nothing to give God, we have only our sin to place before him. And this he receives and makes his own, while in return he gives us himself and his glory: a truly unequal exchange, which is brought to completion in the life and passion of Christ. He becomes, as it were, a “sinner”, he takes sin upon himself, takes what is ours and gives us what is his. ... (졸번역) ... 이 그리스도 사건은 교부들이 한 개의 거룩한 교환(a sacrum commercium), 즉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한 개의 교환이라고 부르는 바인 상상도 할 수도 없는(inconceivable) 사실을 포함합니다. 교부들은 이것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드릴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못하며, 우리는 당신 앞에 놓을 우리의 죄만을 오로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And) 당신께서는 바로 이것을 거두어들이시어/받아들이시어(receive) 그리하여 당신 고유의 것으로 삼으시며, 이와 동시에 교환으로(in return) 당신께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당신 자신 및 당신의 영광을 제공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삶과 수난 안에서 완성에 도달하게 되는, 한 개의 참된, 동등하지 않은, 교환(a truly unequal exchange). 당신께서는, 말하자면, 한 명의 "죄인"이 되시어, 당신께서 죄를 스스로 거두어들이시고/떠맡으시고,(*) 우리의 것인 바를 취하시며, 당신의 것인 바를 우리에게 (교환으로) 제공하십니다. ... (이상, 발췌 끝) ----- (*) 번역자 주: "takes sin upon himself" 를 "죄를 스스로 거두어들이시다/떠맡으시다" 로 번역한 것은 다음에 있는 Merriam Webster's Learner's Dictionary에 주어진 설명을 따른 것이다: 출처: http://www.learnersdictionary.com/search/take take it upon/on yourself
: to do something that needs to be done even though no one has asked you to do it ? Thank you for taking it upon yourself to organize the meeting. ----- 3. 이제 남은 것은, 2007년 성 목요일 성유 축성 미사 중의 강론 말씀에서 "거룩한 교환(sacrum commercium, the sacred exchange, the holy exchange)"에 대하여 언급하시면서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 "교부들이 말하듯이" 라고 매우 간단하게 "거룩한 교환"에 대한 언급의 출처/근거를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인데, 이 파악이 생각보다도 많은 시간을 요구하였습니다. "거룩한 교환"이라는 용어가 전례문 중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매우 오래 전부터 가톨릭 보편 교회에서 사용해 왔을 것임을 우선적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만, 이 용어의 출처를 지금의 시점에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확인하려고 하였는데, 12세기의 자료/문헌까지 간접적 확인을 하는 데에, 벌써 상당한 시간을 요구하였습니다. 게시자 주: "거룩한 교환"에 대한 언급의 출처/근거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하여 어떠한 과정을 거쳤는지가 이 글의 제3항부터 제6항까지 대충 기록되어 있습니다. 3-1. 우선, 다음의 서술에 주목하십시오. 우리말 번역은 제가 한 것입니다: 출처: http://www.secondexodus.com/html/articles/covenantmorality.htm (발췌 시작) Covenant Morality 계약 윤리 by Martin K. Barrack "The Body of Christ!" "아멘!" These words precede the most holy act of man on earth, reception of the Sacrament of Holy Eucharist as part of God’s covenant family. 이들 표현들은, 하느님의 계약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영성체(reception of the Sacrament of Holy Eucharist)라는, 지상에서 사람의 가장 거룩한 행위에 선행합니다.
God’s Covenant Family 하느님의 계약 가족
A covenant is a sacred exchange of persons. In the Sacrament of Holy Matrimony, a man literally gives himself, all that he is and all that he has, to his wife. She gives herself, all that she is and all that she has, to him. And the two become one flesh. Gn 2:24 In the Sacrament of Holy Eucharist, Christ gives each of us His body, blood, soul and divinity. We give Him our body, blood, soul and humanity. He abides in us, and we in Him. Jn 6:56
계약(a covenant)은 인격들의 성스러운 교환(a sacred exchange of persons)을 말합니다. 혼배성사에서, 한 사람은 글자 그대로 자기 자신을, 즉 그인 바 모두를 그리고 그가 가진 바 모두를, 자신의 아내에게 내어줍니다. 그녀는 그녀 자신을, 즉 그녀인 바 모두를 그리고 그녀가 가진 바 모두를 그에게 내어줍니다. 그리하여 이 둘은 한 몸이 됩니다 (창세기 2,24). 성체성사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 각자에게 당신의 몸, 피, 영혼, 그리고 신성을 내어주십니다. 우리는 당신께 우리의 몸, 피, 영혼 그리고 인성을 내어드립니다. 당신께서는 우리 안에 머무르시며, 그리고 우리는 당신 안에 머무릅니다 (요한 복음서 5,56).
Christ for love of man came to earth, emptied himself of the open manifestation of His divinity to live a humble and exemplary life, died in excruciating pain on Calvary, and rose again to prove that He had truly redeemed us on the cross. Our heavenly Father eternally sees Christ on the cross, and us beneath receiving His body, blood, soul and divinity, a gift so dazzling in its generosity that the early Christians called the sacrament of His body and blood in Greek eucharistia, thanksgiving.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에 땅으로 오셨으며, 겸손하며 그리고 모범적인 삶을 사시고자 당신 자신에게서 당신의 신성의 공개적인 드러내심을 비우셨으고(emptied), 골고타 위에서 십자가 형벌의 고통 안에서 죽으셨으며, 그리고 당신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진실로 이미 속량하셨음(had redeemed)을 증명하기 위하여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의, 하늘에 계신, 성부께서는 십자가 위에 계신 그리스도를 영원히 보고 계시며, 그리고 그 아래에서, 그 관용에 있어 대단히 눈을 부시게 하여 그리하여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어로 eucharistia, 즉 감사(thanksgiving)인, 당신의 몸과 피의 성사로 불렀던, 한 개의 선물인, 당신의 몸, 피, 영혼 그리고 신성을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를 영원히 보고 계십니다.
We give ourselves to Christ by preparing ourselves for heaven in every moment of our lives, that we might remain part of His covenant family forever.
우리는, 우리가 영원히 당신의 가족 계약의 당사자로 남아 있고자, 우리의 삶들의 각 순간에 있어 하늘(heaven, 천국, 천당)을 준비함으로써 그리스도께 우리 자신들을 내어드립니다.
게시자 주: 위의 제3-1항에서 발췌 인용한 글이, 강생하신 하느님이시며 (죄 없으신)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죄많은 사람들 사이에 무엇인가를 교환(exchange)하고 있음에 대하어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2. 그리고 다음의 발췌문도 또한 위의 제3-1항에서 서술하고 있는 "계약(covenant)"의 정의(definition)를 대동소이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출처: http://www.scborromeo.org/papers/covenant.pdf (발췌 시작)
계약(a covenant)에 관하여 유일한 것으로 보이는 한 개의 흥미로운 것은 금전 그리고/혹은 재화들이 서명(hands)들을 반드시 교환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반드시 신체적으로(physically)가 아니라, 충실함(fidelity)에 있어, 사람들이 교환되는 것 같습니다. Hasting의 Bible Dictionary이 "계약(covenant)"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듯이:
"(T)hey pledge themselves in loyalty to one another. It differs from
"그들은 서로에 대한 충성 안에서 그들 자신들을 맹세합니다(pledge). 이
3-3. 다음은,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처럼 가톨릭 계약 신학을 전공한, 개신교로부터 가톨릭으로 개종을 한, 스코트 한 박사(Dr. Scott Hahn)의 글의 우리말 번역문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04.htm 그러나 제가 학습을 더 많이 하면 할수록, 저는 고대 히브리어의 경우에 있어, 그리고 성경에 있어, 혼인이 매춘과 크게 다른 만큼 계약(a covenant)이 계약(a contract)과 다름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계약(a contract)에 있어 그대는 소유 재산을 교환하나 이와는 달리 계약(a covenant)에 있어 그대는 인격(persons)들을 교환합니다. 계약(a contract)에 있어, 그대는 "이것은 자네의 것이고 저것은 나의 것이네" 라고 말하나, 그러나 성경은 계약(a covenant)에 있어 그대가 어떻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저는 당신의 것이며 그리고 당신은 저의 것입니다".(*) 심지어 하느님께서 우리와 계약을 맺으실 때에, 당신께서는, "내가 너희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며 그리고 너희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어를 학습한 이후로, 저는 사람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단어인 'Am 이, 글자 그대로, 친족(kinsman), 가족을 뜻함을 발견하였습니다.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며 아버지가 될 것이며, 그리고 너희는 나의 가족, 나의 아들들 및 나의 딸들, 나의 온 집안 사람이 될 것이다. 따라서 계약(covenants)들은 하느님과 가족을 이루는 친족 관계라는 유대(kinship bonds)들을 형성합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vatican/hf_ben-xvi_aud_20120104_en.htm (발췌 시작) Indeed, the Holy Pontiff says: “so that we may have recourse to that unutterable condescension of the Divine Mercy, whereby the Creator of men deigned to become man, and be found ourselves in his nature whom we worship in ours” (Sermon 8 on the Nativity: CCL 138, 139). The first act of this wondrous exchange is brought about in Christ’s humanity itself. The Word took on our humanity and in exchange human nature was raised to the divine dignity. The second act of the exchange consists in our real and intimate participation in the divine nature of the Word. St Paul says: “When the time had fully come, God sent forth his Son, born of woman, born under the law, to redeem those who were under the law, so that we might receive adoption as sons” (Gal 4:4-5). Christmas, therefore, is the feast on which God made himself so close to man as to share in his own act of being born, to reveal to him his deepest dignity: that of being a son of God. Thus the dream of humanity beginning in Paradise — we would like to be like God — is brought about in an unexpected manner not because of the greatness of man who cannot make himself God but because of the humility of God who comes down and thus enters us in his humility and raises us to the true greatness of his being. The Second Vatican Council said in this regard: “In reality it is only in the mystery of the Word made flesh that the mystery of man truly becomes clear” (Gaudium et Spes, n. 22); otherwise it remains an enigma: what does this creature man mean?
7-2. 이글에서의 마지막 전달로서,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2008년 9월 24일(수요일) 일반 알현 교리 교육 강론 말씀에서, 다음과 같은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 (개신교측 포함) 모두가 참고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에, 또한 전달해 드립니다: << 부 록 >> 러시아 작가 레오 톨스토이의 짧은 이야기 가운데 사제와 현자들에게 하느님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명령한 어떤 사나운 임금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현자는 이러한 임금의 요구를 들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들에서 막 돌아온 양치기가 사제와 현자의 과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양치기는 임금의 눈이 좋지 않아서 하느님을 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하느님께서 무엇을 하시는 분인지만이라도 알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양치기는 임금에게 “그 질문에 대답하려면 우리가 옷을 서로 바꾸어 입어야 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임금은 주저하면서도 기대하는 답이 너무나 궁금하여 양치기의 말대로 하였습니다. 임금은 양치기에게 자신의 왕실 예복을 주고 자신은 가난한 양치기의 남루한 옷을 입었습니다. 그러자 답이 나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일을 하신 분이십니다.” 사실 참된 하느님에게서 나오신 참된 하느님이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하느님의 호화로움을 벗어 버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필리 2,6 이하 참조). 교부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거룩한 교환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것을 받아 주님과 같아지게, 주님께서는 우리의 것을 받으셨습니다. 세례 때 일어나는 일에 관하여 바오로 사도는 정확히 옷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 3,27). 이러한 일이 세례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입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옷을 주시는 데 이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곧 우리는 그리스도와 실존적 친교를 이루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존재와 우리의 존재가 하나가 되어 상대방 안에 파고드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갈라티아서 2장 20절에서 자신의 세례를 설명하며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옷을 입으셨습니다. 사람이 지니는 고통과 기쁨, 배고픔과 갈증, 피로, 희망, 절망, 죽음에 대한 공포 등, 죽음까지를 포함하여 우리가 지닌 모든 걱정거리를 가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당신의 ‘옷’을 주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갈라티아서에서 단순히 세례라는 ‘사실’로 말한 것을 에페소서에서는 계속 수행해야 하는 과업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은 …… 옛 인간을 벗어버리고, ……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짓을 벗어 버리고 ‘저마다 이웃에게 진실을 말하십시오.’ 우리는 서로 지체입니다. ‘화가 나더라도 죄는 짓지 마십시오’”(에페 4,22-26 참조). 이러한 세례의 신학은 사제 서품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그리고 새로운 중요성을 띠고 다시 나타납니다. 세례를 통하여 ‘옷의 교환’, 운명의 교환, 그리스도와 새로운 실존적 친교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사제직에서도 교환이 이루어집니다. 성사를 거행할 때 사제는 그리스도로서(in persona Christi) 행동하고 말합니다. 거룩한 신비 안에서 사제는 자기 자신을 보여 주거나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분, 곧 그리스도를 위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사를 거행할 때, 사제는 사제가 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극적으로 보여 줍니다. 사제품을 받을 때 “예, 여기 있습니다.”(Adsum)라고 말함으로써 우리는 이것을 표현하였습니다. ‘제가 여기 있사오니 저를 도구로 써 주소서.’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셔서 …… 살아 있는 이들이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도록 하신”(2코린 5,15 참조) 분의 처분에 우리를 맡긴 것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처분에 맡긴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모든 사람을 위한’ 일에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하여 참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서(in persona Christi): 사제 서품식 때 교회는 사제에게 제의를 입게 함으로써 ‘새로운 옷’을 입는 현실을 눈으로 보고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교회는 이러한 외적인 행위를 통하여 내적으로 일어나는 일을 우리가 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내적 사건에서, 우리의 임무인 그리스도를 입는 일,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우리에게 주신 것처럼 우리를 그리스도께 바치는 일도 나온다는 것을 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입는’ 일은 거룩한 미사를 드릴 때마다 제의를 입는 것을 통해 되풀이되어 나타납니다. 우리가 제의를 입는 일은 단순히 외적인 일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가 우리의 직무를 받아들였을 때 “예.”라고 한 대답을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이는 세례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었고, 사제 서품으로 우리에게 새롭게 준 “더 이상 이전의 내가 아닌” 내가 되도록 요청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의를 입고 제단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은 미사에 참석한 사람들에게도 우리가 ‘다른 분의 몸이 되어’ 있음을 분명히 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제의가 변해 온 과정을 보면, 제의는 사제직의 의미를 표현한 심오한 상징입니다. 그래서 저는 형제 여러분에게 이 성목요일에 제의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사제 직무의 본질을 설명하고 싶습니다. 이 제의는 ‘그리스도를 입는’ 것의 의미, 곧 그리스도로서(in persona Christi) 말하고 행동하는 것의 의미를 정확히 나타냅니다. 전에는 제의를 입을 때마다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는 사제 직무의 모든 요소를 더욱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개두포에 관하여 먼저 이야기해 봅시다. 과거에는 이 개두포를 일종의 두건처럼 가장 먼저 머리에 썼습니다. 오늘날에도 수도회에서는 여전히 그렇게 합니다. 이는 합당한 미사 거행을 위한 감각과 생각의 절제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일상생활의 근심과 기대로 생각이 이리저리 흔들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당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우연히 눈과 귀를 사로잡는 것들에 감각이 이끌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선포된 말씀과 기도가 생각의 길잡이가 될 수 있게 하느님 말씀에 다소곳이 마음을 열고, 교회의 기도 안에서 묵상에 잠겨야 합니다. 우리의 한가운데 와 계신 주님께 마음을 향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올바른 거행 방식(ars celebrandi)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다면, 우리가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통하여 주님과 친교를 이루도록 사람들을 이끌 수 있습니다. 장백의와 영대로 표현된 기도문은 모두 같은 것을 지향합니다. 이 기도문들은 지저분하게 누더기를 걸치고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가 준 가장 좋은 옷을 상기시킵니다. 그리스도로서 전례에 참여할 때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 얼마나 먼지가 쌓여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주님만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옷을 주실 수 있고 우리가 주님의 식탁에서 미사를 거행하고 주님께 봉사하도록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기도문은 요한 묵시록의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선발된 144,000명이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귀한 것은 그들 자신의 미덕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은 그들이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묵시 7,14 참조). 어렸을 때부터 저는 이에 관하여 의문을 품곤 하였습니다. “피에 옷을 빤다면 그것은 절대로 희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 답은 이렇습니다. “‘어린양의 피’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우리의 더러운 옷을 희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사랑입니다. 우리의 어두운 영혼을 참되고 밝게 하는 것은 이 사랑입니다. 우리의 모든 어둠에도 ‘주님의 빛’으로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이 사랑입니다. 장백의를 입으면서 우리는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도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을 마음에 되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모든 죄보다 더 큰 것이기에 우리가 주님을 대신하고 주님의 빛을 증언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강론들에서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생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레고리오 교황께서는 그 구절에 대한 루카 전승과 마태오 전승의 차이를 지적하십니다. 루카 전승에서는 종말론적 혼인 잔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반면에, 그가 생각하기에는, 마태오에게서 전해져 내려오는 전승은 교회 전례와 삶 안에 깃든 이 혼인 잔치를 예고한다고 확신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그리고 사실 오로지 마태오 복음에서만,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게 되고, 그 사람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집니다. 이 대목에서 그레고리오 교황께서는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는 어떤 종류의 예복을 입어야 했습니까? 교회에 모인 모든 이가 세례의 새 옷을 받았고, 그렇지 않았다면 교회 안에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무엇이 부족하다는 것입니까? 이 밖에 어떠한 혼인 예복을 더 갖추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교황께서는 “사랑의 옷”이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런데 임금은 안타깝게도, 자신이 예전에 새 옷, 곧 재생의 흰옷을 주었던 손님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두 겹의 사랑의 자줏빛 옷을 입지 않은 사람들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 자체로 우리를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혼인 예복, 곧 사랑을 입지 않고서 어떻게 하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기를 바라겠습니까?” 하고 그레고리오 교황께서는 묻고 계십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의 마음은 어둡습니다. 복음에서 말하는 외적인 그림자는 마음의 눈이 먼 것을 반영하는 것일 따름입니다(「강론」(Hom.), 38,8-13 참조). 미사 거행을 준비하면서 우리가 이러한 사랑의 옷을 입고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속에서 모든 적의와 자만심을 없애 주시고 우리가 참으로 사랑의 옷을 입음으로써, 우리가 어둠이 아닌 빛의 사람이 될 수 있게 되기를 간청합시다. 마지막으로, 또한 제의에 대하여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의를 입을 때 드리는 전통적인 기도에서, 제의는 우리 사제들에게 지워진 주님의 멍에로 여겨집니다. 또한 이 기도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마태 11,29) 당신의 멍에를 메고 당신께 배우라고 당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가 주님의 멍에를 멘다는 말은 무엇보다도 그분에게서 배운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언제나 그분의 학교에 갈 채비가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분에게서 우리는 온유와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이 되시어 직접 보여 주신 하느님의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성인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고자 하셨던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의 응답에서 가장 중요하고 또 저에게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순명의 의미를 깨닫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한 당신 사랑을 보여 주신, 당신 자신의 고통을 바탕으로 우리가 모든 것을 판단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고통을 바탕으로 우리의 나약함을 가늠하시면서 우리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곧 우리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우리에게 합당한 은사가 무엇인지를 직접 아실 수 있으십니다”(「강론집」(Orationes), 30; 「신학 대담」[Disc. Teol.], 4,6). 우리가 주님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주님의 멍에를 메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더 잘 체험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기도드립시다. 아멘. 0 1,485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