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사순 제5주일(다해) 요한 8,1-11; ‘22/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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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2-03-19 ㅣ No.4979

사순 제5주일(다해) 요한 8,1-11; ‘22/04/03

 

벼는 익으면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죄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많아지나 보다. 아니 그 보다는 자신의 부족함과 부당함을 나이가 들면서 하나 둘 씩 깨닫게 되나 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를 잡아죽이려는 군중들에게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요한 8,7)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성서 기자는 "들은 이 말씀을 듣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하나 가 버리고 마침내 예수 앞에는 그 한가운데 서 있던 여자만이 남아 있었다."(9) 라고 전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11) 라고 하시면서, 그녀의 죄를 씻어주시고 사람들의 단죄와 학살로부터 해방시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 여자를 용서해주셨을까?

왜 예수님께서는 잘못한 사람에게 벌을 주지 않고 용서해주셨을까?

 

벌을 주면 일벌백계라고. 그것도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율법에 따라 돌로 쳐죽이도록 하면 사람들이 다시는 그런 죄를 저지르지 않을텐데. 오히려 자꾸 용서해 주니까 사람들이 죄를 지어도 되는 줄 알고 더 죄악만 심해지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되다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박히러 오시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 아닌 걱정마저 듭니다.

 

그런데 실제로 형행학자들의 연구를 보면 벌이 커진다고 범죄가 줄어둘자 않는다고 합니다. 사형제도를 만들고 공개적으로 사형을 시킨다고 해서 흉악범이 줄어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즉 형벌이 사람들의 기대와 예상과는 달리 범죄에 대한 예방효과가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요즘엔 정치가들이 국면전환용으로 형벌을 사회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 새로운 사회문제로 등장한다고 합니다.

 

그럼 벌로 다스리지 않으면 어떻게 인류를 다스릴 것인가? 하느님의 이 고민을 누가 알까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에 인간을 만드시고 당신 사랑을 나누고자 하셨다는 데, 거꾸로 이런 결과가 나오리라고 예상하셨을까?

하느님께서 인간을 죄악에서 구하시는 방법으로 용서를 택하셨습니다.

용서하지 않고서는 다른 방법이 없을까?

우리는 이 물음을 우리 개인의 상황에 비추어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용서를 해야 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첫째, 우리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이 무엇보다 괴롭습니다. 신자로서 사랑을 해야만 하는데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기에 괴롭습니다. 신자를 떠나서도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자신의 마음이 분노와 미움에 휩싸일 정도의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 괴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그를 만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내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오히려 내가 피하고 싶고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악에게 자신의 영혼을 빼앗겨 버렸기 때문입니다. 악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결국 분열과 고통뿐입니다. 나에게 악한 행동을 저지른 사람을 대항하여 내 안에 복수와 저주를 간직하면 결국 내 마음도 악에게 빼앗기는 것입니다. 악이 원하는 것은 마치 한 사람이 죄를 지어 모든 사람이 죄를 짓게 되고 죽음이 인간 세계에 들어온 것처럼, 악을 세상에 퍼트리고 악의 세력을 더 크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악에게서 내 마음을 되찾아 오기 위해서는, 내 마음을 악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벗어나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기쁨의 상황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상대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용서입니다.

 

하느님도 하느님이시기 위해서는, 사랑자체이신 당신 자신을 상하지 않기 위해서는 용서할 수밖에 없으십니다.

 

둘째,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그는 더욱 더 악의 세력으로 빨려 들어가고 그를 통해 악마는 더욱 더 세상을 악하게 꾸밉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결국 우리는 악의 세력이 창궐하는데 협력하는 공범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처사에 반발하며 떠난 사람이 전보다 더욱 더 비참해지고 악해진 것을 자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그를 악마에게 빼앗기기 싫어서 먼저 찾아가 화해하려고 하고 붙잡으려고 하면,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기보다는, 그는 마치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거나 아쉬워서 또는 자기가 잘나기라도 해서 우리가 수그리는 것처럼 생각하고 거꾸로 어긋나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나마 포기하면 그는 더욱 더 악의 나락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어떤 분들은 우리가 잘못해서 용서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그와 관계를 맺고 싶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용서하고 그에게 용서를 청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이것이 너무나도 안타깝고 그냥 둘 수 없는 일이기에, 당신 아드님의 목숨까지 바꿔가면서 우리를 악에게서 구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하는 당신의 피조물인 우리 인류가 악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이렇게 우리를 구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용서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12-15)

 

그러나 가끔 우리는 용서하기 힘들다고 하고, 용서가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밴댕이 속알지 같이 좁아터진 마음입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도 용서하시는 사람을 우리가 용서 못할 일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다 아시면서도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했다고 느끼고 억울하다고 하소연하는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갚아주시리라고 믿고 내 미움의 끈을 풀어야겠습니다. 우선 나부터 악의 고리사슬을 끊고, 주님의 사랑으로 회복될 수 있도록.

 

사도 성 바오로는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필립 3,8) "나는 이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또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칠 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드신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12)

 

주님께 돌아갑시다. 주님 사랑을 넘치고 넘치게 받을 수 있도록 다가갑시다.

내 분노와 미움의 감정을 주님 사랑의 감정으로 몰아내 주십사 청하면서 주님께 다가갑시다.

 

주님 사랑의 힘으로 나를 변화시켜 나를 짓누르고 나를 이용해서 악마의 나라를 만들려는 악을 쳐 이기고, 주님 부활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 주님께 나아갑시다.

 

그리고 주님에게서 떨어져나가고 나 자신도 괴로워지는 악의 세력에 휩쓸리지 않도록 다시는 죄짓지 맙시다. 그리고 어서 빨리 우리 죄를 인정하고 주님께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고백하고, 다시 죄 짓지 않을 은총을, 죄악의 세롁에 잡혀 있는 우리가 해방될 수 있는 은총을 성사를 통해 받읍시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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