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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창조, 새 아담, 새 하와 라는 용어들의 신학적 의미 [교리-용어_새창조] [_새아담] [_새하와] _recapitulation 1242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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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16 ㅣ No.1460

 

질문:

갈라티아서 6,15에서 성 바오로는 갑자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실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여기서 "새 창조"는 어떤 의미인지요?

--------------------

 

당부의 말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글들은 어떤 특정인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하여 마련된 글들이 결코 아니기에, 다음의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1) 지금까지 필자의 글들을 읽고서 필자에 대한 "분노(anger)" 혹은 "질투(envy)"를 가지게 된 분들은, 혹시라도 그분들께 "걸림돌(stumbling block)"일 수도 있는, 많이 부족한 죄인의 글들을 더 이상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2) 그리고 위의 제(1)항의 당부의 말씀을 읽고도 굳이 이 화면의 아래로 스스로 이동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의 아래의 본글을 읽는 분들은, 필자에 대한 "분노(anger)"와 "질투(envy)" 둘 다를 가지지 않을 것임에 동의함을 필자와 다른 분들께 이미 밝힌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3) 그리 길지 않은 인생 여정에 있어, 누구에게나, 결국에, "유유상종[類類相從, 같은 무리끼리 서로 사귐 (출처: 표준국어대사전)]"이 유의미할 것이라는 생각에 드리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답변:

 

+ 찬미 예수님!

 

1. 들어가면서

 

1-1. 우선적으로, 여기를 클릭하면, NAB(New American Bible) 본문 전체에서 "a new creation(새 창조)"라는 표현이 2코린토서 5,17갈라티아서 6,15에서만 단 두 번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게시자 주:
(1)
그러나 "새 창조"라는 표현은, "새 번역 성경"의 경우에 갈라티아서 6,15에서만 단 한 번 사용되고 있고, 그리고 "주석 성경 신약" 2코린토 5,17에는 다음과 같은 주석이 주어져 있습니다: 


(발췌 시작)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집니다." 로 옮길 수도 있다.
(이상, 발췌 끝).
(이상, 게시자 주 끝).

 

[내용 추가 일자: 2013년 10월 20일]

(2) " 창조(new creation)" 에서의 "새(new)" 라는 형용사는, 시간적 순서에 있어 새로움을 나타내는 그리스어 "neos" 에 대응하는 차용 번역 용어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질(quality)에 있어서의 우수함을 나타내는 그리스어 "kainos" 에 대응하는 차용된 번역 용어입니다.

 

출처 1: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다해-I" (출판사: 가톨릭출판사, 엮은이: 소순태) 부활 제5주일 제2독서(요한 묵시록 21,1-5ㄱ)의 제1절에 대한 해설 및 각주.
출처 2: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59.htm

 

(3) 읽을꺼리 한 개: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다해 부활 제5주일 제2독서(요한 묵시록 21,1-5ㄱ)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은 다음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c_east_5.htm

[이상, 내용 추가 끝].

 

1-2. 다음은,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다해 사순 제4주일 제2독서(2코린토 5,17-21)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2코린토 5,17의 해설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c_lent_4.htm

(발췌 시작)
16-17. "Even though we once regarded Christ from a human point of view": Paul seems to be referring to knowledge based only on external appearances and on human criteria. Paul's Judaizing opponents do look on things from a human point of view, as Paul himself did before his conversion. Nothing he says here can be taken as implying that St Paul knew Jesus personally during his life on earth (he goes on to say that now he does not know him personally); what he is saying is that previously he judged Christ on the basis of his own Pharisee prejudices; now, on the other hand, he knows him as God and Savior of men.

 

16-17. "비록 우리가 한 때 육(flesh)에 따라 그리스도를 알았지만(주: NAB의 해당 본문의 번역임)": 바오로(Paul)가 오로지 외면적 모습에만 근거한 그리고 인간적 기준들에만 근거한 지식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바오로의, 유다주의자, 반대자들은, 바오로 몸소 자신의 회심(conversion) 이전에 그러하였듯이, 어떤 인간적 관점(a human point of view)으로부터 사물들을 정말로 바라봅니다.  (그는 이제 그가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을 계속하는데) 그가 여기서 말하는 어떤 것도 성 바오로가 땅 위에서 자신의 삶 동안에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알았음을 암시하는 것으로서 받아들여질 수 없으며, 그리고 그가 말하고 있는 바는 이전에 그가 자신 고유의 바리사이의 편견들에 근거하여 그리스도를 판단하였으나, 그러나 이제, 다른 한편으로, 그가 그리스도를 하느님 및 사람들의 주세주로서 안다는 것입니다.

 

In v. 17 he elaborates on this contrast between before and after his conversion, as happens to Christians through Baptism. For through the grace of Baptism a person becomes a member of Christ's body, he lives by and is "in Christ" (cf., e.g., Gal 6:15; Eph 2:10, 15f; Cor 3:9f); the Redemption brings about a new creation. Commenting on this passage St Thomas Aquinas reminds us that creation is the step from non-being to being, and that in the supernatural order, after original sin, "a new creation was necessary, whereby (creatures) would be made with the life of grace; this truly is a creation from nothing, because those without grace are nothing (cf. 1 Cor 13:2) [...]. St Augustine says, 'for sin is nothingness, and men become nothingness when they sin'" ("Commentary on 2 Cor, ad loc.").

 

제17절에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세례를 통하여 발생하는 것으로서, 자신의 회심 이전과 이후 사이에 있는 바로 이러한 현저한 차이(contrast)를 상세히 설명합니다. 이는 세례의 은총을 통하여 한 인격(a person)은 그리스도의 몸의 한 구성원이 되어, 그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며 (예를 들어, 갈라티아 6,15; 에페소 2,10 및 15와 이어지는 절; 코린토 3,9 및 이어지는 절을 참조하라), 그리고 이 속량(the Redemption)은 창조(a new creation)를 초래합니다(brings about). 바로 이 절에 대하여 주석하면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는 우리에게 다음을 상기시킵니다: 창조는 있지 않음(non-being)으로부터 있음(being)으로의 단계이며, 그리고 초자연적 질서에 있어, 원죄(original sin) 이후, "바로 그것에 의하여 (피조물들이) 은총의 삶으로 만들어질(would), 새 창조(a new creation)는 필요하였으며, 그리고 바로 이것은 진실로 무(nothing)로부터의 창조인데, 왜냐하면 은총 없는 자들은 아무 것도 아니기(nothing) 때문입니다(1코린토 13,2 참조). [...]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는 '이는 죄가 무의 상태(nothingness)이기 때문이며,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이 죄를 지을 때에 무의 상태(nothingness)가 된다' 라고 말합니다" [("Commentary on 2 Cor, ad loc.").]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1-3. 그리고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갈라티아서 6,15다해 연중 제14주일 제2독서(갈라티아 6,14-18)에 포함되며, 갈라티아서 6,15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은 다음에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c_ot_14.htm <----- 필독 권고

 

2. 사실, 이 "새 창조" 라는 그리스교 신학 용어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용어들에는

 

"새 아담" = "둘째 아담" <----- 예수님에 대한 칭호(title) 

 

 

"새 하와" <----- 성모님에 대한 칭호(title)

 

가 있습니다.

 

3. 특히 그리스도교의 오랜 전통인 성모공경(상경지례)은, 성모님에 대한 이 칭호의 그리스도교 신학 근거로 알려져 있습니다.

 

4. "새 창조(new creation)"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개시되었음, 이들 용어들의 그리스도교 신학적 의미/정의(definition), 그리고 이들이 그리스도교 교회의 역사 안에서 언제쯤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는지에 대한 글들은 다음에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238.htm <----- 필독 권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new_Adam.htm (새 아담)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new_Eve.htm (새 하와)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recapitulation_
of_St_Irenaeus.htm
(리옹의 성 이레네오의 총괄복귀)

 

5. 특히 다해인 올해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학습하여야 하는 "신앙의 해"인데, 창세기 3,15에 대한 그리스도교 고유의 해석인 원복음에 근거한 이들 용어들의 신학적 의미는, 교회 일치를 위한 공의회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1992년에 초판 발행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주: 라틴어 정본은 1997년에 발행됨]에서,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그리스도교 초기 교회 시절의 가르침인 "리옹의 성 이레네오의 총괄복귀" 개념을 회복하여 제시하고 있는, 중요한 주제들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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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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