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납동성당 게시판

지금도 나를 일으키는 스물네살 순교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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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숙 [clarap75] 쪽지 캡슐

2003-09-05 ㅣ No.1755

내가 만난 가톨릭 (가톨릭 다이제스트) -차 동엽 신부

 

 

 

 

 

 

 

 

 

 

“언제 어디서 누구를 통해서 어떤 식으로 들려올지 모르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사제로 살겠다.”
사제 서품을 받을 때 나는 이렇게 결심하였고 되도록이면 그대로 살려고 노력했다.
나의 삶에 실질적으로 ‘가톨릭’이라는 단어를 연결시킬 수 있는 ‘신앙’의 불을 지핀 것은 개신교 네비게이토 선교회 형제들이었다.
나는 서해 남양만 어귀의 작은 공소에서 유아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본명이 노벨또라는 것만 알았을 뿐 성호도 제대로 그을 줄 모르는 수준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로 이사와 대학을 들어가기까지 우리 집안은 뚜렷한 이유도 없이 전원 냉담 상태에 있었다.
서울 공대 1학년 교양과정 2학기 초 어느 날 나는 관악캠퍼스 솔밭 그늘 아래에서 친구가 소개해 준 영문과 선배로부터 난생 처음 그리스도교 신앙입문 교육을 받았다.
선배는 노트에 십자가 도해를 그려놓고 인간, 죄, 십자가, 구원 등의 글자를 써가며 명쾌하게 ‘복음’을 설명해 주었다. 나는 그것에 대해 특별한 반감이나 이의가 없었기에 얼떨떨 하지만 기꺼이 수긍하였다. 마침내 선배의 권유와 안내로 ‘예수님 영접기도’라는 것을 바쳤다. “예수님, 이제껏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왔사오나 이제부터 구세주요 주님으로 모시오니 당신 자녀로 삼아주시고 영생의 은혜를 누리게 하시오며… …”하는 식으로.
다음 날부터 나는 네비게이토 선교회 멤버가 되었다. 모르는 이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이 선교회는 한마디로 ‘신앙 특공 전도단’이라 할 수 있다. 그룹모임, 선배와의 1대1대화, 규칙적인 성서묵상, 선교 훈련 및 실습 등 알찬 양육과정으로 몇 달 새에 나의 가슴에는 점점 신앙의 싹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령께서는 나의 마음에 가톨릭교회에 대한 뿌리의식을 강하게 자극하였다. 곧바로 나는 내 발로 당시 집에서 가장 가까운 성당이었던 사당동 천주교회를 찾아가 청년회에 가입하였다. 성가대, 주일학교 교사 등 주어지는 대로 활동하며 점점 가톨릭 성서모임의 성서공부에 맛들여갔다.
3학년 말까지 나는 공개적으로 양다리를 걸쳤다. 내가 성당을 다니고 있는 사실을 알면서도 네비게이토 형제들은 나를 환영하였다. 핵심 조직에서는 빼주었지만 모임에는 계속 초대하였다. 그 형제들에게서 받은 것, 배운 것은 25년이 지난 지금도 내 기억에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그것은 삶을 관통하는 복음정신과 하느님께 대한 철저한 의탁과 헌신으로 압축될 수 있다. 내 신앙의 선배요 스승으로서 그들은 가톨릭 사제인 내 마음속에 살아있다.
1980년 5·18이 터지고 휴교령이 내려졌을 때쯤이었을 것이다. 정릉 영원한 도움의 수녀회에서 서인석 신부님의 예언서 강의가 있었다. 사회 불의와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을 향한 야훼 하느님의 애타는 마음, 예언자를 불러 토설하시는 불같은 말씀들, 호소· 협박· 회유를 반복하며 당신 백성을 희망의 미래로 이끌고 가시고자 하시는 야훼의 한결 같은 사랑, 불리움 받은 예언자들의 기구한 운명들… 점점 고조되고 있는 신부님의 강의는 절망과 좌절에 빠진 당시 정치적 현실에서 분명 빛이었다.
과장 없이 표현 하거니와 정릉 언덕을 내려오는 나의 가슴에는 뜨거운 불덩어리가 타고 있었다. 이것이 무엇인가 싶어서 가슴을 만져보기도 했다. 그냥 뜨거웠다.
이 뜨거움이 나의 눈을 멀게 했다. 기계 설계학이라는 전공에 전혀 재미를 못 느끼게 했다. 성에 차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진로를 고민하던 나는 해군 O.C.S장교 72차에 지원하여 중위계급을 달고서 몇 달 지난 1982년 11월 쯤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결심을 하고나니 마음에 일던 태풍이 잠잠해지는 듯했다.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 이후 나는 봉급을 털어 닥치는 대로 신앙서적을 읽어댔다. 그때 신앙서적을 구입하려면 꼭 명동의 성바오로 서원을 가야만 했다. 갈 때마다 양손에 한보따리씩 들고 왔다. 양도 양이었지만 질적으로도 매우 유익했던 책이 많았다. 서적들을 통해 빠져 들어간 신앙의 맛은 꿀맛이었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신앙에는 신 맛, 쓴 맛, 매운 맛 나아가 형언 못할 묘한 맛 등 다양한 맛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 때는 정말로 꿀맛이었다. 아마도 하느님께서 젖먹이 같은 나를 무럭무럭 키우시느라고 그렇게 안배하셨던 것 같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책으로 오경웅 박사의 「동서의 피안」과 「내심낙원」, 김홍섭 판사의 「무상을 넘어서」를 꼽고 싶다. 이 책들을 통해서 나는 가톨릭 신앙의 폭과 깊이를 접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내 인생의 고비에서 마다 결정적인 도움을 나는 책을 통해서 얻었다. 거기서 훌륭한 신앙인을 만났고 하느님을 만났다.
사제가 된 후 유학생활을 마치고 강화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한지 1년 만에 나는 심한 B형간염 증세로 쉬어야 했다. 약간 호전 기미가 보이자 나는 1년 6개월간의 병가를 청산하고 1999년 7월 고촌성당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곳은 본래 김포본당 소속의 고촌공소가 있는 자리였다.
그곳에서 나는 그를 만났다. 그는 약 50년 전 고촌의 토박이들에게 신앙의 씨앗을 뿌렸던 송해봉 세례자 요한이었다. 가정방문을 할 때 토박이 신자들은 하나같이 그의 말을 하였다. 모두가 그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그를 통해 신앙을 얻게 된 사실을 자랑스럽게 회상하고 있었다. 도대체 그가 어떤 사람이었기에 50년이 지난 까마득한 사실을 사람들은 그토록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나는 그곳에서 살아가면서 점점 알게 되었다.
한마디로 그는 열혈 신앙인이었고, 탁월한 교사였고, 수덕생활의 모범이었다. 그는 1950년 어느 날, 동네사람들에게 가톨릭 신앙을 전파한 죄로, 고작 스물네살 청년의 나이로 고촌 천둥고개에서 순교했다. 그는 시성되지 않은 무명의 성인(聖人)이었다. 나는 고촌에서의 사목활동에서마다 그의 ‘전구’가 가져다준 은총을 강하게 느꼈다.
그것도 잠시 나는 다시 교구장님의 명을 받고 ‘사목연구소’ 설립 책임을 맡게 되어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여러 장소를 물색하던 끝에 양곡본당 소속 누산리공소를 개조하여 자리를 잡았다.
며칠 후 앞집에 살고 있던 현 인천 가톨릭대 총장신부님의 어머님께서 연구소에 마실을 오셨다. 이런 저런 얘기 중에 어머님께서 “혹시 송해봉 세례자 요한을 알고 있느냐?”하며 질문을 해오셨다. “아니, 어떻게 그분을 아시죠?”하는 나의 반문에 어머님께서는 “바로 이 공소가 송해봉 선생께서 고촌공소에 기거하시면서 자주 교리를 가르치러 왔던 곳이고 6·25때 공산당을 피해 잠시 피신해 있던 곳입니다.”하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송해봉 세례자 요한의 ‘총각귀신(?)’이 나타난 기분이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얼마나 묘한 인연인가! 그의 열정과 한이 서려있는 두 곳, 고촌공소와 누산리공소와 한번은 초대 주임으로 또 한번은 연구소자리로 연속해서 인연을 맺다니! 이것을 나는 지금도 송해봉 세례자 요한의 전교열심을 높이 산 하느님께서 누군가를 통해서 그의 정신을 기리고 대물림하도록 주도하신 섭리라고 믿는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보통의 열성은 보통의 일밖에 못한다. 봉건사상에 젖고 유도(儒道)사상에 박히고 미신숭상에 젖은 삼천리강산의 동포의 무리를 진리의 성신으로 성화시키기 위해서는 보통이 아닌 초자연적 열성과 예수성심에 취한 열성으로 피눈물의 희생과 고통을 극복하는 정신이어야 한다.(중략) 너 성인 성녀 되기를 먼저 원하라. 그리고 변변하지 못한 성인 성녀 되기를 원치말고 완전한 성인성녀 되기를 원하라.”(필자의 근간 「가톨릭 신자는 무엇을 믿는가」 참조)
그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신앙의 활력을 얻는다. 사도직 활동을 위한 ‘엔돌핀’이 솟구친다.
물론 그 밖에도 나는 많은 스승과 은인들을 만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화려한 이력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삶의 터에서 묵묵히 선행을 하는 사람들이며, 쉬지않고 묵주알을 돌리는 사람들이다. 모두가 작고 이름없는 성인들이다. 숨어 제몫을 다하는 이들이 내 주변에 있기에 나는 가톨릭 신부라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비엔나 유학시절 보좌로 일하던 본당 신부와 작별 기념(1996)

신학교 4학년(1987) 독서직을 받고. 왼쪽부터 강윤희 신부, 조호동신부, 오경환교수 신부
다섯번째가 필자, 그 양쪽이 나중에 평신도의 길을 택한 손광섭 , 최정근

인천교구 사목연구소 소장, 인천 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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