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2008년~2009년)

십자가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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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온균 [gsbs] 쪽지 캡슐

2008-11-30 ㅣ No.615

미사를 드리는 제대 뒤(위)에는 대개 커다란 십자가가 걸려 있다.
그게 없으면 제대 위에 조그만 십자가가 놓여 있다.
우리는 그렇게 미사를 십자가 아래서 드린다.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장면이지만
조금만 더 꼼꼼하게 생각해보면
그 장면은 끔찍하기 그지없다.
피 흘리며 사투를 벌이고 있는 한 사람을 십자가 위에 매달아 놓고
그 아래서 미사를 드리는 우리가 잔인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저 십자가에
내 부모 내 형제 친척이 매달려 있다면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 달려 있다면
그래도 나는 그 아래서 평온하게 미사를 드릴 수 있을까?
나를 구원해 달라는 이기적인 기도를 바칠 수 있을까?
마음이 심란할 때나 괴로울 때 불안하고 고통스러울 때
왜 하필이면 저 십자가 아래 모여들어 우리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가?

십자가는 무시무시한 곳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자
그를 따르던 무리들도 무서워 다 도망쳤던 곳이다.
하지만 그 십자가는 도망쳤던 제자들이 다시 모여 들게 한 곳이다.
그 이후 그리스도인들은
괴로울 때나 힘들 때 저 십자가 아래로 모여와
그 아래 무릎을 꿇고 기도하게 되었다.
저분으로부터 위로를 얻고자 한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저토록 비참하게 처형된 분에게
위로를 얻겠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다시 저 끔찍한 십자가 아래로 모여들게 하였을까?
십자가에 감추어 있는 비밀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그냥 한 인생의 종말을 알리는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남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한 생명을 선포하는 사건이었다.
이 단순한 진리는 사실 우리 인간의 삶 안에 감추어 있다.
우리가 우리를 낳아주신 부모를 기리는 것은
그들이 단순히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분들의 삶에는 자식을 위한 희생의 피와 땀이 감추어 있기 때문이다.
자식들이 존재하는 것은 그들의 희생이 있기 때문이다.
희생이 그들에게 생명과 사랑을 선사하였다.
십자가의 희생은 일상의 이런 진리를 일깨워준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신처럼 남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기를 바라신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사랑하라는 그분의 말씀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나를 희생하듯이 너희도 서로를 위해 희생하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사랑은 희생에서 느껴온다.
스승이 돌아가실 때 제자들은 이 일상의 진리를 어슴푸레하게만 느끼고 있었다.
그들이 도망친 것은 그분처럼 희생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당신의 몸을 희생으로 바쳤을 때
그 죽음을 보며 이제 제자들은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 아래 무릎을 꿇는다면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온 인류를 위해 희생하고 싶은 마음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 복수를 하고 싶은 사람들도
자기 마음 속 깊은 곳에 내려가면
희생해야겠다는 마음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이 재물과 명예와 가문에 대한 욕심으로 짓눌려 있을 뿐이다.

우리가 오늘
십자가 아래 무릎을 꿇는다면
십자가 아래서 미사를 드린다면
이 희생심을 느끼며 살기 위해서이다.
어슴푸레하지만 그 희생이 사랑임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가 십자가 아래 무릎을 꿇는 것은
사랑을 느끼며 사랑을 하기 위해서이다.
보복심이 일어나는 곳에 희생이 일어나게 하라.
주님 저들을 용서하소서.  

                                                             이제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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