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계동성당 게시판

홍신부님 강론(8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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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경

2002-08-02 ㅣ No.4581

오늘은 마태복음 4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집트로 피난가시는 아기예수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대목을 놓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하느님이 전능하다면서 어떻게 아기 예수를 이집트로 피난을 보낼수가 있는가.

하느님이 나서서 헤로데를 막을수가 있었을텐데 왜 그렇게 안하고 아기 예수를 이집트로 피난을 보냈는가.

그런데 거기에는 세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느님께서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면서까지 당신 뜻을 이루려고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보통 신앙 생활 하면서 기적을 참 많이 바랍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기적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것이 성서 곳곳에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원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거절하시는 대목들이 자주 나옵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싫어하셨던 것이 폭력적인 기적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사람들로부터 홀대를 받고 화가나서 예수님께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하늘에서 벼락을 치게 할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안된다--고 하십니다.

또 당신 수난을 예고하셨을때 베드로가 나서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니까,

그때도 예수님은 거절을 하십니다.

왜 그러신 것일까요.

여러분의 예를 들어봅시다.

어머니들이 집에서 아이들에게 규칙을 정했습니다.

집에서는 이렇게 이렇게 생활을 해라-- TV는 몇시에서 몇시까지 봐라--

그런데 이렇게 정해놓고, 나는 엄마니까-- 하고는 하루종일 TV보고 또 나는 엄마니까 니들은 공부해도 나는 여성잡지 보면서 연예인 스캔들에나 관심갖고.....

이렇게 한다면 애들이 그 엄마를 존경할까요?

절대 존경하지 않습니다.

야단치면 속으로 그러지요. ’자기도 잘 못살면서 그래---’

엄마가 애한테, 니가 공부하면 나도 같이 공부하겠다-- 그래야 존경을 합니다.

네가 TV를 적게 보면 나도 적게 보겠다--

규칙을 같이 지켜야지만 존경을 받을 수가 있는데,

너는 지키고 나는 안 지키겠다-- 그러면 그때부터 권위가 없어집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한테 너희는 자연계의 법칙을 지키라고,

그런데 나는 초자연적으로 살겠다-- 한다면

더이상 존경을 받지 못합니다.

이집트로 아기 예수를 피신시킨데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하느님의 뜻이 숨어 있습니다.

 

두번째,

하느님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은총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를 데리고 도망가는 이집트는 타향이었습니다.

고향에서의 직업,친척,친구 다 버리고 두 부부가 아기 예수만 데리고 이집트로 간 것입니다.

가서 뭘 먹고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냥 건너 갔습니다.

그러니 그 도망가는 길이 얼마나 마음이 힘들었겠어요.

그런 상황속에서 하느님이 두분에게 주신 은총이 있습니다.

무슨 은총을 주셨죠?

왜 하필 하느님은 마리아와 요셉을 이집트로 보내셨을까요?

이집트하고 이스라엘하고 어느나라가 더 잘사는 나라입니까?

어느 나라가 더 큰가요?

이집트는 세계4대문명의 하나이고, 파라오라고 하는 왕들이 대를 이어 통치를 했고,

그 통치구역이 굉장히 넓었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실 별볼일 없는 민족이었습니다.

히브리 라는 말은, 하피루, 즉 거렁뱅이들 이라는 뜻입니다.

이집트는 대국이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떠돌이들 이었던거지요.

떠돌이들이 이집트에 가서 몸담아서 살다가 그중에서 제일 출세한 사람이 요셉이었던 겁니다. 재상이 되었죠.

이집트는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에 문명이란 이런것이다..라는 것을 가르쳐준 나라입니다.

그 이집트로 마리아와 요셉을 보내신 이유가 뭘까요.

공부하라고 보내신 겁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깡촌 사람들이었습니다.

글을 배웠는지 안 배웠는지도 잘 모르는 깡촌사람들이었어요.

더군다나 요셉같은 경우는 도시의 전문적인 목수가 아니라

아무거다 다 고치는 그냥 시골 목수였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부모님이 지나치게 무식하면 곤란했던 거지요.

세상을 보는 눈이 그렇게 넓지 못하면 아기 예수를 키우는데 지장이 있을까봐

하느님이 이집트로 유학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렇게 힘든 방법으로 이집트에 간 마리아와 요셉은 거기서 무엇을 봤을가요.

이스라엘에서 보지 못했던 문명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깨어서 돌아왔습니다.

가는 길은 도망치는 길이었고 최악이었지만,

하느님이 마리아와 요셉에게 주신것은 그 최악의 것을 넘어서는 은총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다급한 상황이 되면 하느님이 우리를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울며불며 매달립니다.

매달리며 기도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내가 지금 잃어버린 것을 돌려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시는 것은

지금것 말고 다른 것을 주시고자 할때  꼭 어려움을 주신다--

라는 것이 신학적인 정석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내 미성숙함 때문입니다.

그저 그냥 내가 잃은 것만 다시 돌려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만약에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면서

매일같이 하느님을 원망하고 울고 불고 하면서 살았다면

이집트에서 무엇을 배웠을까요.

아무것도 못 배웠을겁니다.

하지만 마리아와 요셉은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서 뭔가를 배워가지고 왔지요.

뭔가를 배워가지고 왔다는 증거가 어디서 나타나는가 하면,

예수님이 12살이 되어서 성전에서 율사들과 함께 토론을 벌이던 일이 있었지요.

마리아와 요셉이 길을 가다보니 아이가 없어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아기 예수를 야단을 쳣습니까?

안 쳤습니다.

저애가 뭔가 큰일을 할만한 애일거야-- 라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게 바로 이집트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아기 예수의 진가를 알아본것입니다.

부모님들이 삶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아이의 존재의미도 같이 모릅니다.

부모님들이, 내가 사는 삶은 왜 이렇게 지지리도 복도 없어-- 이러면

자신의 자식들도 똑같이 지지리 복도 없게 만들어버립니다.

내가 아는 것 만큼 자식을 키웁니다.

본당을 예로 들어볼까요.

본당 신부가 우울증에 걸려 있어요.

나같은게 천당 갈 수 있을까.. 나같은걸 하느님이 사랑하실까....

맨날 이생각만 한단 말이죠.

그럼 이 신부가 강론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중에 누가 구원받을 사람이 있단 말입니까!"  이런식으로 하게 되겠지요.

자기 혼자 우울증 걸리는게 아니라

신자들을 전부 우울증 환자를 만들어버립니다.

어려움속에서 의미를 찾는 사람이 있고

어려움속에서 나만 어렵다고 징징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똑같은 어려움들 겪는데

한 사람은 이게 무슨 의미일까... 하고 의미를 찾는데,

다른 한 사람은 왜 나만 이런 어려운 일을 당해야 돼-- 하고 징징거립니다.

어느쪽이 얻고, 어느쪽이 잃는게 많을까요.

징징거리는 사람들은 잃는게 많습니다.

우울증에 걸린 분들은 얻는게 없어요.

잃어버리는게 너무나 많습니다.

 

세번째,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상대나 견딜수 없는 상황은 잠시 피하는 것이 좋다--

우리는 가끔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이나 상황을 감수하려는 만용을 부릴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만용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지혜는 ’피하라’는 것입니다.

중국 병법에서도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것이 바로 삼십육계입니다.

싸우다 안되면 도망가는 것이지요.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이 내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피해야합니다.

길을 피해가는 것은 비겁한 것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이집트로 피신하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도 거기 머물러 있었다면

가족이 다 몰살을 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피한다는 것이 비겁한 것이 아닙니다.

지혜입니다.

 

요약을 해보지요.

하느님은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는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하느님은 은총을 주신다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은 피하자

이것이 이집트로 피신간 아기 예수님이 주는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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