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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신부 등의 복사였던 이의창李宜敞의 영세명/세례명은 라틴어 이름 Venantius의 직역 음역인 베난시오 일 수가 없었다 1242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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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1 ㅣ No.2039

 

게시자 주: (1) 본글의 인터넷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39.htm 에 접속하면, 본글 중에서 제시되고 있는 출처 문헌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의 인터넷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q&a.htm 에 접속하면, 본글의 제목이 포함된, "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제공의 모든 게시글들의 제목들의 목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i) 2006년 12월 16일에 개시(開始)하여 제공 중인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날마다 영어 매일미사 중의 독서들 듣고 보기, 그리고 (ii) 신뢰할 수 있는 가톨릭 라틴어/프랑스어/영어 문서들 등은,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손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  (PC용, 날마다 자동으로 듣고 봄) [주: 즐겨찾기에 추가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m (스마트폰용) [주: 네이버 혹은 구글 검색창 위에 있는 인터넷 주소창에 이 주소 입력 후 꼭 북마크 하십시오]    

 

(2) 이번 글에 서술된 바는,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2017년 3월 중순부터 4월 말 기간 동안에 독자적으로 개발한, 따라서 그 저작권(著作權, Copyright)이 필자에게 있는, Data Mining 기법을 적용한, "AI 기반, 한시(漢詩) 표준 해석법 [A Standard Method of Interpretation of Chinese Poems(漢詩), Based on AI(Artificial Intelligence)]"에서 사용하고 있는 방법을, 또한 사용하여 분석하고, 이 분석의 결과에 따라 도출된 바들/결론들입니다.

 

1. 들어가면서

 

1-1. 성 김대건 신부 등의 복사였던 이의창李宜敞의 영세명/세례명은 라틴어 이름 Venantius의 직역 음역인 베난시오 일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라틴어 세례명 "Venantius"(베난시오; 프랑스어: Venant; 이탈리아어: Venanzio)의 한문 음역 단어가, 다음의 파란색칠을 한 굵은 글자들을 클릭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요즈음은 "委南爵"(위남작)이나,

 

"Venantius" "南爵" <----- 여기를 클릭하여 필히 확인하라. 

 

그러나 이의창이 [유아] 영세/세례를 받았을 19세기 초반의 시절에는 "南爵"(문남작)이었음을, 초판 및 개정판 둘 다의 한문본 "성년광익", 하, 5월 18일에서 실증적으로(positively)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2. 따라서, 무슨 말씀인고 하면, 1874년에 프랑스어 원문이 출판된 달레 신부님(1829-1878년)의 저서인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사" 프랑스어 원문 Vol 2, 제309쪽부터 실려있는, 1846년 음력 7월 26일자로 새남터에서 참수당한 김대건 신부님의 1846년 양력 8월 26일(음력 7월 5일)자 라틴어 서한프랑스어본 본문제310쪽에서 오로지 두 번만 사용된 표현인, "Véran"(*1)을, 20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천주교회의 교회사 연구자들이 언뜻 "베란" 혹은 이와 등가인(equivalent) 음값으로 읽고서, 전혀 다른 한 개의 세례명인 "베난시오"(Venantius)라고 추정한 것은, 바로 위의 제1-1항에서 지적한 명백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교회사 연구자들의 무지(ignorance) 때문에 발생한, 터무니 없는 억측이라 아니 지적할 수 없습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20년 7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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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시자 주: (1) 설상가상으로, 심지어 이 표현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추가적으로, 실증적으로(positively) 확인한 바에 의하면, 프랑스 남부 지중해 해변의 이탈리아 반도 가까이에 위치한 프로방스(Provence) 지역에서 제한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그러나 당시에 중국 본토에 전달된 가톨릭 보편 교회의 한문본 전례력에 그 축일이 없는 따라서 당시의 한문본 문화권 안에서 태어나 성장한 중국 및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이 전혀 알 수 없었던, 한문 문화권으로부터 대단히 먼 곳에 위치한 프랑스 프로방스 지역의 한 명의 성인(Saint)의 이름인, 프랑스어 세례명인 것으로 입증/고증 된다.

 

(2) 이에 대하여서는, 아래의 제3-1항을, 각주들을 포함하여, 천천히 여러 번 읽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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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2020년 7월 21일자 내용 추가 끝]

 

왜냐하면, 이의창(李宜敞)(*2)이 영세/세례를 받았던 시기인 19세기 초반, 즉, 1800년대 초반의 우리나라 조선의 신앙의 선조들이 인지할 수 있었던 세례명들 중의 하나는, 요즈음처럼 라틴어 세례명 "Venantius" (프랑스어: Venant; 이탈리아어: Venanzio)의 우리말 직역 음값 "베난시오"결코 아니였고, 우리나라 조선의 신앙의 선조들이 18세기 후반부에 이미 입수하여 학습하였던, 그리하여, 그때부터 적어도 19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영세명/세례명을 선정할 때에 영세명/세례명으로 선정할 성인들의 행적을 알기 위하여 학습하였을 한문본 천주교 문헌들 중의 하나,(*3) 그리스도교 성인들의 전기(傳記, Biography)인, 드 메야/마이야 신부님에 의하여 저술되어 1738년에 초간된, 한문본 "성년광익", 5월18일에 명기되어 있는, 이 라틴어 세례명의 중국어 음역 이름 "文南爵"(문남작)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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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게시자 주: (1) 이의창의 실제 한문 이름이 "李宜敞"(이의창)인 것은, 바로 이 한문 이름이  이의창의 후손들이 지니고 있는 광주 이씨의 족보(A)에서 "李宜敬"(이의경)의 친동생으로서 명기된 그의 한문 이름인 것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내용 추가 일자: 2020년 7월 4일] 

(2) 그러나 성 김대건 신부님의 1846년 문초 기록에서 그는 "李宜昌"으로 지칭되고 있고 그리고, 소위 말하는, "남보"에 포함되어 있는 광주 이씨 족보(B)에는 "李宜敬"(이의경)의 친동생으로서 "李宜敞" 혹은 "李宜昌"이라는 이름 자체가 없는데, 이것은, (i) 심문 과정에, 해당 심문의 직접 대상이 아닌, 다만 주된 심문 대상인 김대건 신부님의 주변 인물들 중의 한 명의 이름의 우리말 음값이 "니의창"임 듣고서, 기록자가 이 음값을 낼 수 있는 한자 낱글자들을 사용하여, 우리나라 조선의 왕조실록과 문초 기록들 중에 통상적으로 사용되었던, 이두 표기로서 "李宜昌"이라고 기록하였기 때문일 것이고, 그리고 또한, (ii) 예를 들어, 이벽 성조의 경우에도 그러하였듯이, 광주 이씨 양반 집안이 "李宜敞"(이의창) 때문에 조선 왕조로부터 화를 당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회피하기 위하여, 천주교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자의 본성명인 "李宜敞"(이의창) 자체를 족보에서 아예 삭제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3) 천주교가 박해를 받고 있던 당시의 시기에 양반 가문의 신자가 천주교 신앙 생활을 유지한다는 것은, 조상 제사를 거부하여야 하였고, 그러나 우리나라 조선의 양반 가문의 경우에 조상 제사를 거부하는 자손은 자신이 양반이라는 신분을 스스로 포기한 것에 해당하기 때문에, 해당 양반 집안이 조선 왕조로부터 장차 입을 수 있는 화를 면하기 위하여서라도, 천륜을 두고서 "천륜이 없다"라고 주장하면서 해당 집안의 족보에서 그 이름을 뺌으로써 그자의 이름이 집안 족보에서 삭제된 사례들은, 예를 들어, "남보"에 실린 일부 양반 집안의 족보들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알고 있다. 

 

(4) 그러므로, 자신의 이름이 족보에서 이미 삭제되었음을 알고 있거나 혹은 조만간 삭제될 것임을 예상하고 있는 양반 집안 출신의 천주교 신자인 자가, 죽음에 임박한 시기에 받게 된 심문 과정에서 자신의 뿌리/신분/정체성(identity)을 밝힐 때에 당사자가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가능한 그리고 유일한, 일은, 예를 들어, (i)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혈족으로서 집안 족보에 그 이름이 장차 계속 남아있을 것이 분명한, 친형 혹은 친동생 등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이라고 밝힘으로써, (ii) 친형제와 마찬가지인 매우 가까운 벗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이라고 밝힘으로써, 혹은 (iii) 친형제와 마찬가지인 매우 가까운 벗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그 무엇을 밝힘으로써, 등의 방법으로, 자신의 죽음 이후의 시기를 살아가는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뿌리/신분/정체성를 밝히는 것 이외의 다른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5) 그러나 바로 위의 제(4)항에서 지적한 경우에 처하더라도, 왜냐하면 생존해 있는 대단히 가까운 벗인 지인의 이름 혹은 대단히 가까운 벗인 지인의 이름을 밝히면 해당 지인이 또한 조선 왕조로부터 화를 면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예를 들어(i) 이미 세상을 떠난 자, (ii) 박해 때문에 타향에서 숨어서 사느라 오랫동안 친가족들과 떨어져 살아온 고령인 자신보다 나이가 더 많아서 세상을 이미 떠났을 것으로 생각되는, 친형 등의 가까운 혈족들 중의, 연로한 자, 혹은 (iii) 이미 심문 기관에 체포되어 곧 죽임을 당할 것이 예상되는 자, 등등 중의 하나의 경우에 해당하는 자의 이름을 밝혔을 것임은 대단히 자명하다는 생각이며, 그리고 이러한 경우들 중의 일부는, 예를 들어, 1801년 신유 박해의 심문 기록들이 담긴, "추안 급 국안", 권25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알고 있다.

[이상, 2020년 7월 4일자 내용 추가 끝]

 

[내용 추가 일자: 2020년 7월 7일]

(*3) 게시자 주: 여기에는, 마태오 리치 신부님의 "천주실의"; 판토하 신부님의 "칠극"; 알퐁소 바뇨니 신부님의 "성모행실", "성인행실"; 주니오르 디아스 신부님의 1636-1642년 초판 "천주강생성경직해"; 롱고바르디 신부님 등의 "수진일과" 중의 "성인호칭기도"; 드 메야/미이야 신부님의 "성경광익", 1738년 초판 "성년광익" 등이 포함된다는 생각이다.

 

특히, 이들 한문본 천주교 문헌들 중에서 "文南爵"(문남작)이라는 중국어 음역 이름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수진일과, 속권2(1659년 이후), 영첨례표(永瞻禮表), 4월1일에 처음으로/최초로 등장하고, 그리고 1738년 초판 "성년광익", 하, 5월18일에 등장한다고 알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선적으로, 예를 들어,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최근에 들어와 필자에 의하여 작성된, 한문 문화권 천주교회 성인명 음역 대조표(Table)를 또한 참조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한문문화권_천주교회_성인명_음역어_대조표.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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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질문 1: 여러분들 생각에, 1800년대 초기의 우리나라 조선에서, 중국어 음역 이름 "文南爵"(문남작)중역(重譯) 음역(secondhand transliteration)인 우리말 음값이 "베난시오"일 것같은지요???

 

질문 1에 대한 간략한 답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그동안 확인한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 조선에서 1795년 시점의 중국어 음역 이름 "文南爵"(문남작)중역(重譯) 음역(secondhand transliteration)인 우리말 "표준(standard, norm)" 음값은, (i) "운난쟈오",즉, "우난쟈오"(ii) 이와 등가의 음값, 혹은 (iii) 이 음값으로부터 파생되는 음값인 것이었지, 결코 "베난시오"가 아니었습니다.

 

1-4. 위의 제1-1항, 제1-2항, 그리고 제1-3항에서 지적한 바가 왜 대단히 중요한가 하면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즉, 과연 누구가 "이의창"인지?를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는 한국 천주교회사의 유관 문헌들 중에서 실증적으로(positively) 파악하고자 할 때에, 만약에 "이의창"의 세례명이 "베난시오"임을, 예를 들어, 왜냐하면 프랑스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의 어떤 신부님께서 "보감" 등에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참 진리이라고 굳게 믿으면, 세례명이 "베난시오"가 아닌 사람들 모두를 획일적으로 배제하는 문제, 즉, 극히 비 논리적이고 따라서 비 합리적인 사고에 있어서의 커다란 장애(stumbling block)가 연구자들의 의식의 흐름을 방해하는 문제가 발생하여, 그 결과, 연구자들이 "이의창"이라는 이름과 관련될 수도 있는 자들 쪽으로 할 수 있는 연상(association)의 폭을, 거의 무의식의 상태에서, 스스로 대폭 축소시키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1895년에 초간된 "치명일기"에 기록된 1866년과 그 이후 거의 10년 이상 지속된 대단히 참혹한 병인 박해 순교자들의 우리말 이름들 중에는, "이의창"이라는 이름 중의 두 낱글자가 등장하는 우리말 음값 이름인 "이의셩", 즉, 통상적으로 세례명이 차지하는 자리에 "량"이라는 한자 낱글자로 보이는 글자 한 개가 포함되어 있는, "이 량 의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냐하면 "이의셩", 즉, "이 량 의셩"의 세례명이 "베난시오"아니고 "량"이기 때문에[주: 대단히 잘못된 판단임], 그동안 교회사 연구자들이 혹시라도 "이 량 의셩""이의창"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추정/추측 자체를 전혀 할 수 없게 되었을 것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무엇 쪽으로의 연상(association to something)인 생각/추청/추측 자체가 전혀 되지 않으면, 어떻게 이러한 생각/추정/추측 자체를 최대한 실증적으로(positively) 뒷받침하는, 혹은 실체적 진실로서 상당하게 뒷받침하는, 근거 문헌들이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찾아보려고 도대체 나설 수가 있겠는지요??? 그렇지 않는지요?

 

그러니까, 상상(imagination)을 할 수 있는 자들 중에서만 오로지 연상(association)을 할 수 있는 자들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러나,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사에 있어, 1880년대 중반 혹은 그 이후에 처음으로/최초로, 아무런 근거없이, 제시된 "이의창"의 세례명이 "베난시오"이라는 주장에 의하여 형성된 고정 관념이, 작금에 이르기까지, 교회사 연구자들의 자유로운 사고에 있어, 무의식에서 의식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상상조차 할 수 없게 해 버리는 결정적인 판단 장애를 야기시키는 커다란 장애물(stumbling block)이었기 때문에, 따라서 "이의창"이 누구인가?라는 답변에 접근하게 하는 그 무엇 쪽으로 합리적인 연상(reasonable association to something) 자체를 전혀 할 수 없게 하였다는 생각입니다.

 

1-5. 심지어, 1845년과 이 해를 전후하여 몇 년 동안 김대건 부제/신부님의 복사들로서 지척에서 도와드렸던 세 명의 가(哥)들 중의 한 명"이의창"임은 국내의 교회사 연구자들이 이미 파악하여 알고 있는, 심지어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증되는, 역사적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김대건 부제뿐만이 아니라, 이들 세 명의 이가(李哥)들 중의 두 명이 변성(變姓, 성을 바꿈) 혹은 변명(變名, 이름을 바꿈)을 하였음도 잘 알고 있는, 심지어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증되는, 역사적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만약에 이들 세 명의 이가(李哥)들 중의 나머지 한 명인 "이의창"도 또한 변성[變姓, 성을 바꿈, 예를 들어, 이들 세 명 중의 한 명인 현석문의 경우] 혹은 변명[變名, 성은 그대로 사용하고 이름을 바꿈: 예를 들어, 이승훈의 손자인, 이들 세 명 중의 한 명인, 이재의의 경우]을 하였을 것임을 도대체 연상하지 못하였다면, 많이 부족한 죄인인, 일천한, 따라서 기존의 우리나라 천주교회 교회사학 연구자들에 비하여 선입관이 별로 없는, 필자로서는 전혀 납득할 수 없습니다. 

 

게시자 주 1-5: (1) 이어지는 항들에서는, 우선적으로, 위의 제1-3항에 필자가 제시한 질문 1에 대한 상세한 답변 등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2)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글/논문에서, 위의 제1-4항제1-5항에서 지적한 바에 이어서, "이의창"이라는 이름 중의 두 낱글자가 등장하는 우리말 음값 이름인 "이의셩", 즉, 통상적으로 세례명이 차지하는 자리에 "량"이라는 한자 낱글자로 보이는 글자 한 개가 포함되어 있는, 1895년에 초간된 "치명일기"에 기록된 순교자 "이 량 의셩"이 이 바로 "이의창"임을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증/입증하도록 하겠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40.htm <----- 작성 중이나 또한 필독 권고

[이상, 2020년 7월 7일자 내용 추가 끝]

 

2. 유관 사료 분석 I

 

2-1. 우선적으로, 우리나라 조선에 선교사로 파견된 프랑스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의 신부님들에 의하여 천주교회의 기도서 등의 문헌들이 우리말로 본격적으로 번역되기 시작한 시점이, 따라서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 안에서 한글 전용이 개시된 시점이, 우리말본 "천주성교공과"가 초간된 시점인 1863년경인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의창이 [유아] 영세/세례를 받았을 19세기 초반의 시절은, 왜냐하면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이 중국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신부님들에 의하여 한문으로 번역된 한문본 천주교 문헌들에 또한 전적으로 의존하였던 시기이기 때문에, 1863년보다 이전의 시기에, 특히, 우리나라 조선에 프랑스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의 신부님들이 처음으로 입국한 시기인 1836년보다 이전의 시기에,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 안에서 사용된 영세명/세례명은, 우리말로 직역 음역(literal transliteration)된 세례명이 아니라, 예를 들어, 드 메야/마이야 신부님의 한문본 "성년광익"에 수록된 方濟各(방제각, 즉, 방지거) 등과 같은, 한자로 음역 표기된 세례명이었음은, 대단히 분명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위의 제1-1항에서, "Venantius"(베난시오, 프랑스어: Venant; 이탈리아어: Venanzio) 의 한문 음역 단어가, "南爵"(문남작)이었음을, 초판 및 개정판 둘 다의 한문본 성년광익, 5월18일에서 실증적으로(positively)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예를 들어, 드 메야/마이야 신부님의 개정판 한문본 "성년광익", 하, 5월18일 문남작 치명, 제50b-51b쪽에서 발췌한 바입니다:

 

(발췌 시작)

 1738년이후_개정판_성년광익_하_5월18일_성_문남작치명_제50b-51a쪽

1738년이후_개정판_성년광익_하_5월18일_성_문남작치명_제51b-52a쪽.jpg

 

게시자 주: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바로 위에 발췌된 바를 크게 확대하여 읽을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669-1748_모이리악_드_메야/1738년이후_개정판_성년광익_하_5월18일_성_문남작치명_제50b-51b쪽.htm 

(이상, 발췌 끝)

 

(이 글의 결론 1) 바로 이 음역 이름 "南爵"(문남작)이 요즈음의 음역 이름 "委南爵"(위남작)의 이전 표기이고 그리고 "委南爵"(위남작)에 대응하는 라틴어 이름이 "Venantius"(베난시오)임은, 위의 제1-1항에서, 필자에 의하여, 실증적으로(positively) 입증/고증되었음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게시자 주 2-1: (1) 요즈음 우리가 말하는 "그레고리오"는 라틴어 "Gregorius"직역 음역(literal transliteration)된 우리말 음값은 분명합니다만, 예를 들어,  다음에 발췌된 바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574-1659_엠마누엘_주니오르_디아스/1636_천주강생성경직해.htm

(발췌 시작)

권2_40_3왕래조후제6주일_164-170 (<---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Sixth Sunday after Epiphany, 마태오 복음서 13,31-35(1969년에 개정된 지금의 전례력에 있어, 매년 연중 제17주간 월요일 복음 말씀)] [주: (번역 오류) 영어로 "kingdom of heaven"으로 번역되는 표현이 여기서 "천국자"로 번역되었는데, "자" 글자가 중국어로 번역 과정에서 추가되지 말았어야 함. 그리고 이 명백한 번역 오류는, 여기를 클릭하면 가지게 되는 "국립중앙도서관 국가전자도서관" 화면 제공의 우리말본 "성경직해"(1938년 출판) 자료에서, 원문 보기 > vol : 권 1, 본문 제184쪽에서 "천국"으로 이미 바로잡아져 있음] [(2017년 1월 6일) 주: 서리아 = 시리아; 라마 = 로마].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오른쪽에서 일곱 번째 열(column)부터 읽도록 하라.

(이상, 발췌 끝)

 

 "성 그레고리오"에서 "그레고리오"주니오르 디아스 신부님의 한문본 전례 성경인 한문본 "천주강생성경직해", 권2, 3왕래조후 제6주일, 잠에서, "額我略"(액아략)으로 번역되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질문 1: 그런데, 여러분들 생각에, 우리나라 조선의 임금인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 생존 시기에 우리나라 조선에 전달되어, 심지어 사도제자마저도 읽었음이 이미 실증적으로 입증된, 바로 이 한문본 "천주강생성경직해" 일부분의 우리말 번역본이 포함되어 있는, "셩경직해광익", 3왕래조후 제6주일, 잠에서 번역된 이름 "額我略"(액아략)이 어떠한 우리말 음값으로 번역이 되었을 것 같은지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을 판단의 기준/잣대로 적용하여, "그레고리오"일 것으로 생각하시는지요???

 

(1)-(i) 만약에 여러분들이, 다음에 발췌된, 국립중앙도서관, 국가전자도서관 제공의 1938년판 "성경직해" 권1, 3왕래조후 제6주일, 잠을 들여다 보면, "그레고리오"임이 틀림 없습니다:

 

(발췌 시작)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오른쪽에서 네 번째 열(column)부터 읽도록 하라.

(이상, 발췌 끝)

 

(1)-(ii) 그리고 또한, 만약에 여러분들이, 다음에 발췌된, 국립중앙도서관, 국가전자도서관 제공의 1897년판 "성경직해" 권2, 3왕래조후 제6주일, 잠을 들여다 보면, "그레고리ㅗ", 즉, "그레고리오"임이 틀림 없습니다:

 

(발췌 시작)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오른쪽에서 두 번째 열(column)부터 읽도록 하라. 

(이상, 발췌 끝)

 

질문 2: 따라서, 위의 두 개의 용례들을 보고서, 여러분들께서는, 이들에 근거하여, 연대순에 있어 더 옛날의 우리말본 "셩경직해광익", 3왕래조후 제6주일, 잠에서도 또한 마찬가지로, "그레고리오" 혹은 이와 등가인 우리말 음값으로 번역이 되었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것인지요???

 

지금드린 질문 2와 관련하여, "1897년 이전의 시점에 발생한 그 무엇이 과연 무엇이었을까?"에 대하여 여러분 스스로 알아차리기 위하여, 바로 아래에 발췌된 바와 바로 위에 발췌된 바를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도록 하십시오.

 

(1)-(iii) 다음은, 2019년 2월 어느날, 필자가 직접 사진 촬영하여 마련한 대단히 중요한 자료들에서 발췌한 바인데, "셩경직해광익", 3왕래조후 제6주일, 잠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발췌 시작)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오른쪽에서 네 번째 열(column)부터 읽도록 하라.

(이상, 발췌 끝)

 

그리고,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額我略"(액아략)이 라틴어 "Gregorius"의 음역 단어임을 알게 된 것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 수 있는 졸글[제목: 성년광익(聖年廣益) 및 編者 미상의 성년광익 둘 다의 출처 한문본 문헌들에는 알퐁소 바뇨니 신부님의 천주성교성인행실 이 포함된다; 게시일자: 2018-08-25]에서 이미 수행 완료한 정밀한 분석 과정에서 였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49.htm <----- 필독 권고

 

(2) 그런데, "額我略"(액아략)이 라틴어 "Gregorius"의 음역 단어이고 그 음값이 "기이고리오"이며 그리고 이 발음이 중국의 사천(四川, Sze-chuen) 지방(province)을 포함하는 중국의 방언 발음임을,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별도의 졸글에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2020년 4월 11일(토) 부활성야 미사 실시간 동영상 청취 직후에, 필자가 아는 아는 한 처음으로/최초로,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증/입증하였으니, 본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께서 반드시 필독하실 것을 강력하게 요청드립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42.htm <----- 필독 권고 

 

(3) 지금까지 위의 제(1)항에서 함께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창한 바들로부터, 우리는 다음의 결론들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2) 바로 위의 제(1)-(iii)항에 발췌된 바가 포함된 "셩경직해광익"은, 위의 제(1)-(i)항제(1)-(ii)항에 발췌된 바가 포함된 "셩경직해광익"들보다 더 오래된 필사본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왜냐하면, 제(1)-(iii)항에 발췌된 바가 포함된 필사본에서 라틴어 "Gregorius"의 직역 음역(literal transliteration)이 아닌, 중역(重譯) 음역(secondhand transliteration)인 우리말 음값 "에오랴ㅗ"가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이 글의 결론 3) 바로 위의 제(1)-(iii)항에 발췌된 바가 포함된 "셩경직해광익"은, 1836년에 우리나라 조선에 처음 입국한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의 신부님들이 한글 전용의 기도서 등을 마련하기 이전의 시기의 필사본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이 글의 결론 4) 중국 남부의 내륙 지방인 사천 지역에서 적어도 몇 년 이상 머물지 않았기 때문에 그 지역 방언에 익숙할 수가 없는 프랑스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의 사제로서 우리나라 조선에 파견된 신부님들은, 예를 들어, 한문본 기도서들인 "천주성교일과""수진일과", 혹은 "천주경과" 등에 수록된 성인 호칭 기도 등을 통하여, "額我略"(액아략)이 라틴어 "Gregorius"의 음역 단어인 것은 쉽게 알아차렸을 것이나, 그러나, 위의 제(1)-(iii)항에 발췌된 "셩경직해광익"의 특정 부분의 우리말 번역자처럼, 바로 이 읍역 단어의 음값이, 중국 사천 지역의 방언 음값으로 거의 직역 음역(literal transliteration)이 된, "기이고리오"인 것은 알아차릴 수 없었을 것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이 글의 결론 5) 1856년 11월 9일자로 다블뤼 주교님이 프랑스 파리 외방 선교회 홍콩 대표부의 리부아(Libois) 신부에게 요청한 물품 목록에, 천주교회의 성인들의 전기(傳記, Biography)인, "Cheng-nien-koang-i"(성년광익)이 있다고 알고 있는데, 다블뤼 주교님께서 이 한문본 "셩년광익"을 요청한 주된 이유는, 한글 전용을 알차게 수행하기 위하여, 그 당시까지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이 지속적으로 열독해 왔던, 1790년대 혹은 그 이전에 이미 우리말로 번역된 "셩경직해광익"의 내용을 더욱 충실하게 하고 또 이 책에 많이 포함되어 있는, 예를 들어, 중국어로 번역된 "額我略"(액아략) 등과 같은 번역 단어들을, 재차 우리말 음값 "에오랴ㅗ" 등으로 중역(重譯) 음역(secondhand transliteration)을 하지 않고, 원 라틴어 단어들로부터 우리말 음값으로 매우 정확하게 직역 음역(literal transliteration)을 하여야 하는 필요성 때문이었을 것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4) 특히, 위의 제(1)-(iii)항에 발췌된 바가 포함된 "셩경직해광익"은, 2011년에 서강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문학 박사를 취득한 조한건 신부님의 박사 학위 논문[제목: 성경직해광익의 연구]에서 비교 분석된 "셩경직해광익"의 여섯 종류의 필사본들과는 다른 출처를 가지는, 필자가 아는 한, 2005년 1월 경에 국내 및 국외의 여러 대학교 도서관들에 그 사본이 이미 제공된, 그리고 위의 제(1)항에서 이미 실증적으로(positively) 입증/고증하였듯이, 1836년 이전의, 어쩌면 179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는, 매우 오래된 "셩경직해광익"의 필사본입니다.

(이상, 게시자 주 2-1 끝) 

 

[내용 추가 일자: 2020년 7월 4일] 

2-2. 바로 위의 게시자 주 2-1에서, 라틴어 세례명 "Gregorius"의 중국어 음역 용어인 "額我略"(액아략)의 경우에, (i) 한문본 천주교 문헌들 중의 하나로서 우리나라 조선에 전래된 것이 분명한, "천주강생성경직해" 중의 이 음역 용어의 용례 파악과, (ii) 바로 이 중국어 음역 용어의 우리말 음값이 무엇이었는지 등을 실증적으로(positively) 들여다본 것처럼.

 

이번 항에서는, 라틴어 세례명 "Venantius"의 해당 중국어 음역 용어인 "南爵"(문남작)의 경우에, (a) 한문본 천주교 문헌들 중의 하나로서 우리나라 조선에 전래된 것이 분명한, "천주강생성경직해" 중의 이 음역 용의 용례 파악과, (b) 바로 이 중국어 음역 용어의 우리말 음값이 무엇이었는지를 또한 실증적으로(positively)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2-2-0. 1738년에 초간된 드 메야/마이야 신부님의 한문본 "성년광익", 하, 5월 18일 첨례일에 경축되는 "文南爵"(문남작)에 대하여, 이분이 어떠한 분인지에 대하여, 즉, 무슨 말씀인고 하면,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신부님들에 의하여 저술되어, 한문본 "성년광익"의 초판이 간행된, 1738년 이전에 중국에서 출판된 한문본 천주교 문헌들인, 1630년대에 출판된 "수진일과"에 수록된 "성인 호칭 기도문", 1618년에 초간된 판토하 신부님의 수덕서인 "칠극"의 본문, 혹은 1636-1642년에 초간된 주니오르 디아스 신부님의 "천주강생성경직해" 등의 본문 중에, 그리고 심지어 1740년에 초간된 드 메야/마이야 신부님"성경광익" 본문 중에,  "文南爵"(문남작)의 이름이 거명되거나 혹은 이분의 이름이 거명되면서 이분의 가르침들이 수록되어 있을만 한 교부 혹은 교회의 박사인지 등, 이 분의 정체성(identity)에 대하여 함께 고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들여다본 바에 따라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리자면, 이분은 전혀 그러한 정체성을 가진 분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독자들께서도 아래에 제공된 이분의 전기(傳記, Biography)를 읽고서, 필자가 내린 바와 같은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는지 스스로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2-2-0-1.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1738년에 초간된 드 메야/마이야 신부님의 한문본 "성년광익", 하, 5월 18일 첨례일에 경축되는 "文南爵"(문남작)에 대한 전기(傳記, Biography) 전문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669-1748_모이리악_드_메야/1738_성년광익_하_5월18일_성_문남작치명_제141a-143b쪽.htm <----- 필독 권고 

 

다음의 바로 위에 안내된 주소에서 발췌한 의 첫 부분입니다:

 

(발췌 시작)

1738_성년광익_하_5월18일_성_문남작치명_제141a쪽.jpg

(이상, 발췌 끝)

 

(본문 첫 부분부터 우리말 졸번역 시작)

성 운난쟈오/우난쟈오(文南爵)(*)는 이탈리아 나라 출신의 사람인데, 15세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인식하도록 설명하고 권고하였습니다(講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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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여기서 "南爵"(문남작)"운난쟈오"/"우난쟈오"로 음역 번역한 이유는, 1780년대부터 1800년대 초반부에 우리나라 조선의 신앙의 선조들이 이 이름을 우리말 음값으로 음역할 때에 의존하였을 것이 분명한, 우리나라 역관들이 중국어 구어체 교재로서 사용하기 위하여 마련되어 출판되었던, 당시의 북경 관화 발음 혹은 당시의 북경 지역 중국어 방언이 담겨있는1795년에 출판된 "중간노걸대언해"에 수록되어 있는 한자 낱글자들의 중국어 음값들을 충실하게 따른 것이다. 이에 대하여서는 아래의 제2-2-2항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

 

지방관이 [이것을] 듣고 알게 되자(聞知), 붙잡아 포획하기 위하여 병사들을 파견하였는데, 성인께서는 즉시 스스로 가서 투도/출두(投到)하셨으며, 토신(土神)은 기껏해야 이미 사망하여 썩어 문드러지는 사람으로 존재할뿐임과 사마(邪魔)는 남의 이름을 빌려 속이고 해칠뿐임을 선언하셨습니다(聲明).

 

다른 사람들이 세상에 있으면서 행하는 바가 심히 불합리하나, 어찌하여 주님께서 천지만물을 다스리시는 유일하신 참 주님이 되시고 사람마다 마땅히 공경함을 가히 볼 수 있는지를 논하셨는데, 이 가르침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지방]관이 즉시 병사들에게 [인체에 형구를 가하는] 형벌을 시작할(動刑) 것을 명하여, 볼기를 쳐 거의 죽게 되었을 때에, 한 명의 천사가 쇠사슬들을 끊어버리고 모든 병사들을 쫓아 내몰아 버렸는데, 몰래 한 명의 병사가 가다가 다시 돌아와, 성인을 꺼꾸로 묶고 높이 솟게 동여맨 후에 불로써  태우고 익혔으나 ...

(이상, 우리말 번역 끝)

 

2-2-0-2.

2-2-0-2-1.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1856년 이후에 출판된 개정판 드 메야/마이야 신부님의 한문본 "성년광익", 하, 5월 18일 첨례일에 경축되는 "文南爵"(문남작)에 대한 전기(傳記, Biography) 전문을 읽을 수 있는데, 바로 위의 제2-2-0-1항에 안내된 전기(傳記, Biography)의 기술과 동일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669-1748_모이리악_드_메야/1738년이후_개정판_성년광익_하_5월18일_성_문남작치명_제50b-51b쪽.htm 

 

2-2-0-2-2.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바로 위의 제2-2-0-2-1항에 안내된 전기(傳記, Biography)의 우리말 번역문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669-1748_모이리악_드_메야/1856년이후_개정판_성년광익_우리말본_하_5월18일_성_문남작치명_제67b-71b쪽.htm  

 

그런데, 이 번역문의 제목과 첫 문장에는, (i) 우리나라 조선에서 1795년 시점의 중국어 음역 이름 "文南爵"(문남작)중역(重譯) 음역(secondhand transliteration)인 우리말 "표준(standard, norm)" 음값인 "운난쟈오",즉, "우난쟈오", (ii) 이와 등가의 음값, 혹은 (iii) 이 음값으로부터 파생되는 음값 대신에, 위의 제1-1항에서 이미 말씀드린 "委南爵"(위남작)의 우리말 음값인 "위난시오"가 명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이에 대하여 아래의 제3-5항에서 자세하게 말씀드리겠지만, 이 우리말본 "성년광익" 자체가 1890년대 말 혹은 1900년대 초에 마련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조선에서 1795년 시점의 중국어 음역 이름 "文南爵"(문남작)중역(重譯) 음역(secondhand transliteration)인 우리말 "표준(standard, norm)" 음값이 "운난쟈오", 즉, "우난쟈오"인 것은, 아래의 제2-2-2항에서 실증적으로 고증/입증하도록 하겠습니다.

 

2-2-0-2-3.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위의 제2-2-0-1항제2-2-0-2항에 안내된 "文南爵"(문남작)의 전기(傳記, Biography)와 비교하면서 읽어볼 만한 내용을 담은, 이분의 영어본 전기(傳記, Biography)를 읽을 수 있습니다:

 

출처: https://sanctoral.com/en/saints/saint_venantius_of_camerino.html 

(발췌 시작)

May 18

Saint Venantius of Camerino

Martyr
(† 250)

 
Saint Venantius of Camerino

 

Saint Venantius, born at Camerino in Italy, during the persecution of Decius was taken into custody at the age of fifteen years as a Christian who was preaching Christ to others. His history is one of the most miraculous in the annals of the early martyrs.

 

Having learned that he was about to be arrested, he presented himself to the governor of Camerino, Antiochus, at the city gates, and said to him that the lives of the gods were filled with every kind of crime, that there was only one God, whose unique Son had become a man to deliver his fellow humans from the tyranny of sin. When it was found impossible to shake his constancy either by threats or promises, he was condemned to be scourged, but was miraculously saved by an Angel. He was then burnt with torches and suspended over a low fire that he might be suffocated by the smoke. The judge's secretary, while admiring the steadfastness of the Saint, saw an Angel robed in white, who stamped out the fire and again set free the youthful martyr. This man proclaimed his faith in Christ and was baptized with his whole family. Shortly afterwards he won the martyr's crown.

 

Venantius was summoned to appear before Antiochus. Unable to make him renounce his faith, the governor cast him into prison with an apostate soldier, who strove in vain to tempt him. Antiochus, furious, then ordered his teeth and jaws to be broken and had him thrown into a furnace, from which the Angel once more delivered him. The Saint was sent to a city magistrate to be condemned, but this judge after hearing his defense of Christianity, fell headlong from his seat and expired, saying, The God of Venantius is the true God; let us destroy our idols.

 

When this circumstance was told to Antiochus, he ordered Venantius to be thrown to the lions. These brutes, however, forgetting their natural ferocity, crouched at the feet of the Saint. Then, by order of the tyrant, the young martyr was dragged through a heap of brambles and thorns and retired half-dead, but the next day he was cured; God had manifested the glory of His servant once more. On behalf of soldiers who had dragged him outside the city over stones and rocks, and were suffering from thirst, the Saint knelt on a rock and signed it with a cross; immediately a jet of clear, cool water welled up from the spot. This miracle converted many of those who beheld it. The rock remained imprinted by his knees and was placed in a church in Camerino, where it still remains.

 

The governor finally had Venantius and his converts beheaded on the same day, in the year 250. The bodies of these martyrs are kept in the same church at Camerino. The Acts of Saint Venantius' martyrdom have been carefully studied and declared authentic by the Church.

 

Reflection. Love of suffering marks the most perfect degree in the love of God. Our Lord Himself was consumed with the desire to suffer, because He burnt with the love of God. We must begin with patience and detachment, and eventually we shall learn to love the sufferings which conform us to the Passion of our Redeemer.

 

Les Petits Bollandistes: Vies des Saints, by Msgr. Paul Guérin (Bloud et Barral: Paris, 1882), Vol. 5; Little Pictorial Lives of the Saints, a compilation based on Butler's Lives of the Saints and other sources by John Gilmary Shea (Benziger Brothers: New York, 1894).

(이상, 발췌 끝)

 

질문 2: (i) 바로 위에 안내된 의 한문본 전기와 졸번역, (ii) 아래의 제2-2-0-2-2항에 안내된 우리말 번역문, 그리고 (iii) 아래의 제2-2-0-2-3항에 발췌된 영어본 전기를 읽어보았을 때에, 여러분들 생각에, 이분이,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신부님들에 의하여 저술되어, 한문본 성년광익의 초판이 간행된, 1738년 이전에 중국에서 출판된 한문본 천주교 문헌들인, 1630년대에 출판된 "수진일과"에 수록된 "성인 호칭 기도문", 1618년에 초간된 판토하 신부님의 수덕서인 "칠극"의 본문, 혹은 1636-1642년에 초간된 주니오르 디아스 신부님의 "천주강생성경직해" 등의 본문 중에, 그리고 심지어 1740년에 초간된 드 메야/마이야 신부님"성경광익" 본문 중에,  "文南爵"(문남작)의 이름이 거명되거나 혹은 이분의 이름이 거명되면서 이분의 가르침들이 수록되어 있을 만한 교부 혹은 교회의 박사일 수도 있을 것 같은지요???

 

(이 글의 결론 18) 

질문 2에 대한 답변: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1636-1642년에 초간된 주니오르 디아스 신부님의 "천주강생성경직해"제외하고,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이에 대하여 확인한 바를 여러분들도 또한 구체적으로 볼 수 있고 그리고 "칠극"과 "성경광익"의 경우에는 우리말 번역본들도 출판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 어렵지 않게 직접 확인할 수 있는데, 결코 그럴 수가 없었음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한문문화권_천주교회_성인명_음역어_대조표.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669-1748_모이리악_드_메야/1740_성경광익.htm <----- 또한 필히 확인하라  

 

그리고, 더 나아가, 

 

(이 글의 결론 19) 1636-1642년에 초간된 주니오르 디아스 신부님의 "천주강생성경직해" 본문 중에서도 "文南爵"(문남작)의 이름이 거명되거나 혹은 이분의 이름이 거명되면서 이분의 가르침들이 수록되어 있는지 여부를 필자가 또한 확인하였으나, 찾아볼 수가 없었음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이어지는 제2-2-1항에서, 이러한 결론을 도출하게 된 과정에 대하여 추가적으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상, 질문 2에 대한 답변 끝)

 

2-2-1. 1700년대말에 이르면, 우리나라 조선의 신앙의 선조들이 롱고바르디 신부님과 후배 신부님들에 의하여 마련된 "수진일과" 중의 "성인호칭기도문"주니오르 디아스 신부님의 "천주강생성경직해"드 메야/메이야 신부님"성년광익", "성경광익" 등을 입수하여 학습하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20년 7월 21일]

2-2-1-1.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주니오르 디아스 신부님의 "천주강생성경직해"의 전문을 읽을 수 있는데,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상당한 시간을 투입하여 확인한 바에 의하여, "천주강생성경직해"의 본문 중의 각주들 및 "잠"에서 "文南爵"(문남작)이라는 세례명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574-1659_엠마누엘_주니오르_디아스/1636_천주강생성경직해.htm

 

다들 잘 아시겠지만, 어떤 그 무엇이 있음을 입증하는 어려움과 어떤 그 무엇이 없음을 입증하는 어려움은 동일한 수준의 어려움이 아닌데, 무엇보다도 먼서 필자가 상당한 시간을 투입하여 "천주강생성경직해"의 본문 중의 각주들 및 "잠"에서 "文南爵"(문남작)이라는 세례명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2-2-1-2.  그레서. 과연 이 성인이 "천주강생성경직해"의 본문 중의 각주들 및 "잠"에서 신약 4복음서의 구절들에 각주들 혹은 주석들을 제공할 만한, 학덕을 갖춘 분인지를 파악하기 위하여, 위의 제2-2-0항에서 이미 제시한 유관 사료, 즉, 한문본 "성년광익"에 수록된 이분, 즉, 라틴어 이름 "Venantius"(베난시오)의 성인전의 본문 분석을, 심지어 앞 페이지는 우리말로 번역까지 하면서, 진행하였던 것인데, 그러나 이 분석의 결과로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내린 결론은, 이 분은 그러한 일을 수행할 만한 학덕을 갖춘 분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2-2-1-3.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가톨릭 보편 교회 교도권에서 수용한 훌륭한 저서들을 남긴, 소위 말하는, 라틴어로 저술 작업을 한 라틴 교부(Latin Fathers of the Church들과 그리스어로 저술 작업을 한 그리스 교부(Greek Fathers of the Church)들의 목록을 들여다볼 수 있는데, 그러나 250년 경에 순교한, 이름이 "Venantius"(베난시오)인 분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21.htm <----- 여기를 클릭하여 필히 확인하라 

 

따라서, 성 "Venantius"(베난시오)"천주강생성경직해"의 본문 중의 각주들 및 "잠"에서 신약 4복음서의 구절들에 각주들 혹은 주석들을 제공할 만한, 가톨릭 보편 교회 교도권이 수용한, 훌륭한 저서들을 남긴 분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2-2-1-4. 1636-1642년"천주강생성경직해"를 저술하여 출판한 주니오르 디아스 신부님1630년대에 기도서인 "수진일과"의 개정 작업에 참여하셨으며,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이 기도서의 본문과 그리고, 그 저자가,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필리푸스 쿠플레 신부님(1624-1692년)인, 1659년(마카오 도착 년도) 이후 그러나 1692년 이전에 추가된 속권2(즉, 부록2)들 읽을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559-1654_니콜라스_롱고바르디_et_al/수진일과.htm

 

참고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바로 위의 주소에 있는 "수진일과"에 포함된 기도문들의 저자들이 누구인지를 구체적으로 파악한 후에 기록으로 남겨 보관한 시점은, 아무리 늦더라도, 2018년 10월 22일이었습니다.

 

2-2-1-5. 그런데, 바로 이 축일표, 즉, 그 저자가 필리푸스 쿠플레 신부님(1624-1692년)인, "수진일과", 속권2, "永瞻禮表"(영첨례표)에서 "文南爵"(문남작)의 축일은, 다음에 발췌된 바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5월 18일아니고4월 1일입니다:

 

출처 1: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559-1654_니콜라스_롱고바르디_et_al/수진일과.htm

출처 2: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624-1692_필립푸스_쿠플레/영첨례표_in_수진일과_속권2(1659년_이후-1692년_이전)_제62a쪽.htm

(발췌 시작)

문남작(4월1일)_in_영첨례표_in_수진일과_속권2(1659년_이후_1692년_이전)_제65a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왼쪽에서 두 번째 열(column)의 첫 번째 줄의 마지막 부분을 보라. 이분이 주교였고 그리고 순교자였음을, 두 개의 부호들로써, 밝히고 있다.

(이상, 발췌 끝)

 

그리고 그 축일인 4월 1일 "文南爵"(문남작), 즉, "Venantius"(베난시오)는,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1738년에 초간된 "성년광익"에 수록되어 있지도 않으며,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669-1748_모이리악_드_메야/1738_성년광익_차례.htm

 

그리고 특히,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그 축일이 4월 1일 "Venantius"(베난시오)에 대하여서는, 박해 시절이었기 때문인지, 알려진 정보가 매우 적다는 생각입니다:

 

출처: https://www.catholic.org/saints/saint.php?saint_id=1936 

(발췌 시작)

St. Venantius

 

Feastday: April 1
Death: 255

 

Bishop and martyr. A prelate serving in Dalmatia, Croatia, he was executed during the persecutions of the Church by the Roman Empire. His relics were translated from Split (Spalato), Dalmatia, to the Lateran Basilica in Rome under Pope John IV (r. 640-642).

(이상, 발췌 끝)

 

따라서, 이번 항에서 고찰한 바와 위의 제2-2-0항에서 고찰한 바의 정밀한 비교/검토로부터, 다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20) 1630년대에 개정된 "수진일과", 속권2, "永瞻禮表"(영첨례표)에서 그 축일이 4월 1일인  "文南爵"(문남작)은 위의 제2-2-0항에서 이미 들여다본, 그 축일이 5월 18일인, "文南爵"(문남작)과 동일 인물이 아님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20년 8월 5일]

게시자 주 2-2-1-5: (1) 이 "永瞻禮表"(영첨례표)의 첫 단락의 첫 문장이 다음과 같은 기술로 시작함에 또한 주목하라:

 

(발췌 시작)

此表尃為人領洗所取聖人之名可記憶而感謝之

 

이 표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을 때에 가지는 바인 성인(聖人)들의 이름을, 가히 기억하고 감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為), 두루 알리니(尃), ...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2) 다른 한편으로, 예를 들어, 다음에 발췌된, 1811년에 작문된 "동국교우상교황서", 제14b쪽에, 성 정약종의 친자이고 성 정하상의 이복형인,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조카인, 복자 정철상의 세례명이 "加祿"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이 이름은 라틴어 세례명 "Carolus"의 중국어 음역 단어입니다, 그러나 1738년에 초간된 "성년광익"에는, "加祿"아니고, "嘉祿"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다만 "永瞻禮表"(영첨례표)에는  "加祿"으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에, 따라서, 정철상이, 대세로서, 세례를 받을 당시에 "永瞻禮表"(영첨례표)가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 신앙의 선조 제1세대에게 이미 전달되어 있었음이 실증적으로(positively) 입증/고증되며, 따라서,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 신앙의 초기에 속하는 1784년부터, 세례를 받는 자 혹은 세례를 대세로서 주는 자가 세례 전에 세례명을 선정할 당시에, 바로 이 "영첨례표"를 들여다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11_/동국교우상교황서.htm 

(발췌 시작)

가록加祿_Carolus_in_1811_동국교우상교황서_제14a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왼쪽에서 두 번째 열(column)을 보라.

(이상, 발췌 끝)

[이상, 2020년 8월 5일자 내용 추가 끝]

 

2-2-1-6.

2-2-1-6-1. 다음은,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부글리오 신부님(1606-1682년)에 의하여 1670년 경에 저술/편집, "미살경전"의 앞부분에 포함된, "주년각등첨례일"에서 발췌한 바인데, 그 축일이 4월 1일인 성인이, 미사 중의 경축과 관련하여 등급 미달 혹은 다른 이유 때문에"미살경전"에 포함된 당시의 한문본 보편교회 전례력에 포함되지 못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출처: 미살경전

(발췌 시작)

4월1일_축일인_베난시오는_축일표에_없음_in_주년각등첨례일_in_1670_미살경전_제14a쪽.jpg

(이상, 발췌 끝)

 

2-2-1-6-2. 다음은,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부글리오 신부님(1606-1682년)에 의하여 1670년 경에 저술/편집, "미살경전"의 앞부분에 포함된, "주년각등첨례일"에서 발췌한 바인데, 그 축일이 5월 18일인 성 "물난작", 즉, "Venantius"(베난시오)가, "미살경전"에 포함된 당시의 한문본 보편교회 전례력에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출처: 미살경전

(발췌 시작) 

5월18일_축일_베난시오(물난작)_in_주년각등첨례일_in_1670_미살경전_제15a쪽.jpg

(이상, 발췌 끝)

 

2-2-1-7. 이상, 이번 제2-2-1항에서 고찰한 바에 의항여, 다음의 결론들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20) 위의 제2-2-1항에서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증/입증되는 유관 사료들에 의하여, 주니오르 디아스 신부님께서 1636-1642년"천주강생성경직해"를 저술하는 동안에, 트리엔트 전례력에 따른 가톨릭 보편교회의 축일표인, "수진일과"속권2, 즉, 부록2 중의 "永瞻禮表"(영첨례표)를, 왜냐하면 이 표 자체가 이 책의 집필 기간 전 혹은 집필 기간 중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들여다 볼 수도 없었으며, 따라서, 라틴어 세례명 "Venantius"(베난시오)의 중국어 음역 단어 "文南爵"을 자체를 알지 못하였음을, 따라서, "천주강생성경직해" 본문 중에 성 "文南爵"라는 표현 자체가 등장할 수 없음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이 글의 결론 21) 1659년 이후부터 "미살경전"이 인쇄된 1670년 이전 사이에, 가톨릭 보편교회의 전례력이, 적어도 한 번 개정되었음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20년 8월 4일]

게시자 주 2-2-1-7: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1814년에 예수회의 재설립 혹은 복권 이후에 중국 본토의 예수회에 의하여 1823년에 출판된 개정판 "수진일과"/"천주성교일과"에 의하면, 왜냐하면, 이 기도서의 맨 마지막에 있는, 1824년부터 1847년까지 매년 양력 첨례일들이 명기된, "永瞻禮表"(영첨례표)에서 3월 20일 성 "若亞敬"(약아경), 즉,  "요아킴" 첨례일이 8월 15일 몽소승천, 즉, 성모승천 직후 주일로 이동되고(*) 그리고 9월 8일 "성모성탄" 첨례일이 추가되었기 때문에, "성년광익" 초판이 출판된 1738년 이후부터 1824년 이전 사이에, 가톨릭 보편교회의 전례력이 적어도 한 번 개정되었음이 또한 실증적으로(positively) 입증/고증된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624-1692_필립푸스_쿠플레/영첨례표_in_1823_수진일과_하권_제110a쪽.htm

 

특히, 위의 첨례표의 입문에서, 축일표에 따른 성인전인, 1738년에 초간된 드 메야/마이야 신부님"성년광익"이 또한 언급되고 있음에 주목하라.   

 

[내용 추가 일자: 2020년 8월 8일]

-----

(*) 게시자 주: 이 첨례일 이동 조치가 1738년교황 클레멘트 12세에 의한 결정이었음은, 아래의 게시자 주 3-5-4-5, 제(6)항에서 입증하고 있으니, 또한 참조하라.

-----

[이상, 2020년 8월 8일자 내용 추가 끝]

 

(이 글의 결론 22) 드 메야/마이야 신부님의 "성년광익" 초판이 출판된 1738년 이후부터 개정판 "수진일과"/"천주성교일과"이 출판된 1823년 이전 사이에, 가톨릭 보편교회의 전례력이, 적어도 한 번 개정되었음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이상, 2020년 8월 4일자 내용 추가 끝]

 

2-2-2.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드 메야/미이야 신부님에 의하여 저술되어 1738년에 초간된 한문본 "성년광익"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시점이 1784년 경 혹은 그 이전임은, 이미 널리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입니다.

 

따라서, 바로 이 "성년광익" 본문 중에서 등장하는 중국어로 음역 번역된 세례명 "文南爵"의, 우리나라 조선에서의, 중국어 발음이 무엇인지는, 당시의 우리나라 역관들이 중국어 학습서로서 사용하였던 책들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면, 이들 책들에 제시된 이 세례명을 구성하는 세 개의 낱글자들 각각의 발음을 실증적으로(positively) 확인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번 항에서는 1795년에 출판된 "중간노걸대언해"에 수록된 이들 낱글자들의 발음들이 무엇이었는지 고찰하도록 하겠습니다.

 

2-2-2-1. 다음에 발췌된 바로부터, 1795년에 출판된 "중간노걸대언해"에 수록된, 따라서 당시의 우리나라 조선의 역관들이 배웠던, 낱글자 "文"의 중국어 발음이 "운"이었음을 실증적으로(positively)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출처 1: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795_정조19년_역관용_중국어_교재/중간노걸대언해_건.htm  

출처 2: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795_정조19년_역관용_중국어_교재/중간노걸대언해_곤.htm

(출처 1로부터 발췌 시작)

난南_남_in_1795_중간노걸대언해_건_제44b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오른쪽에서 네 번째 열(column)을 보라.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2-2-2-1: 1765년에 출판된 "박통사신석언해"에 수록된, 따라서 다시의 우리나라 조선의 역관들이 배웠던, 낱글자 "文"의 중국어 발음이 또한 "운"이었음을 필자가 또한 이미 확인하였습니다. 

 

2-2-2-2. 다음에 발췌된 바로부터, 1795년에 출판된 "중간노걸대언해", 건에 수록된, 따라서 당시의 우리나라 조선의 역관들이 배웠던, 낱글자 ""의 중국어 발음이 또한 "난"이었음을 실증적으로(positively)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출처: 상동

(발췌 시작) 

난南_남_in_1795_중간노걸대언해_건_제44b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왼쪽에서 네 번째 열(column)을 보라.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2-2-2-2: 1765년에 출판된 "박통사신석언해"에 수록된, 따라서 당시의 우리나라 조선의 역관들이 배웠던, 낱글자 ""의 중국어 발음이 또한 "난"이었음을 필자가 또한 이미 확인하였습니다. 

 

2-2-2-3. 다음에 발췌된 바로부터, 1795년에 출판된 "중간노걸대언해"에 수록된, 따라서 다시의 우리나라 조선의 역관들이 배웠던, 낱글자 ""(씹을 작)의 중국어 발음이 "쟈ㅗ", 즉, "쟈오"이었음을 실증적으로(positively) 확인할 수 있는데, 바로 이 정보로부터, ""(작)의 중국어 발음이 또한 "쟈오" 혹은 이와 유사한 발음이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많이 부족한 죄인이 아는 한, 한자 낱글자는, 통상적으로, (i) 그 음값을 나타내는 부분과 (ii) 그 의미를 나타내는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낱글자 ""의 경우에, 그 음값을 나타내는 부분이 바로 낱글자 ""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상동

(발췌 시작) 

쟈오嚼_작_in_1795_중간노걸대언해_건_제36a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오른쪽에서 첫 번째 열(column)을 보라.

(이상, 발췌 끝)

 

[내용 추가 일자: 2020년 9월 10일]

그리고 다음에 발췌된 바는, 당시의 우리나라 조선의 역관들의 과거시험 교재들 중의 하나인, 1784년판 "맹자정음", 공손추 상, 권2, 제14a쪽[주: 제공처: 디지털 장서각]에서 발췌한 것인데, 당시의 우리나라 역관들이 알고 있었던 ""(작)의 중국어 발음(주: 북경 관화 발음)이 또한 "쟈ㅗ", 즉, "쟈오"임을 실증적으로(positively)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784년판_경서정음_목판본/장서각_소장/1874년판_맹자정음_권1_권2.pdf  

(발췌 시작)

쟈오_爵작_in_공손추_상_맹자정음_권2_1784년판_제14a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오른쪽에서 네 번째 열(column)을 보라.

[이상, 2020년 9월 10일자 내용 추가 끝]

 

2-2-3. 따라서, 바로 위의 제2-2-2항에서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찰한 바로부터, 다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23) 1795년 경에 우리나라 조선의 역관들이 학습하였던, 라틴어 세례명 "Venantius"의 중국어 음역 단어 "文南爵"의, 우리나라 조선에서의, 중국어 발음은, 라틴어 발음인 "베난시오"결코 아니었고, "운난쟈오", 즉, "우난쟈오" 혹은 이와 유사한 발음이었음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춯합니다.

[이상, 2020년 7월 21일자 내용 추가 끝]

 

3. 유관 사료 분석 II

 

3-1.

3-1-1. 다른 한편으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아는 한, 예를 들어, 프랑스어 명사(Nouns)들에는, 프랑스어 사람의 이름 혹은 프랑스의 한 동네 이름 Saint-Véran의 일부분 이외에는"Véran"이라는 단어가 없으며,

 

[2020년 7월 12일자 내용 추가 시작]

프랑스어 사람의 이름 "Véran"(베랑),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그 축일이 10월 19일인, Saint Veranus of Cavaillon (French: Véran, Vrain; Italian: Verano) (died c. 590)이 있습니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Veranus_of_Cavaillon 

(발췌 시작)

Veranus of Cavaillon

 

Bishop

Died: c. 590
Venerated in Roman Catholic Church
Feast: October 19
Attributes: episcopal attire

 

Saint Veranus of Cavaillon (French: Véran, Vrain; Italian: Verano) (died c. 590) was a French saint, with a cultus in Italy. He was born at Vaucluse and was bishop of Cavaillon.

 

In the early 11th century some of his relics were transferred from his place of burial to Orléans. In the 13th century most were transferred again, to Cavaillon Cathedral, which is dedicated to him, but some were sent to Albenga Cathedral in Liguria, where they are still preserved in a shrine.

(이상, 발췌 끝)

 

[2020년 7월 13일자 내용 추가 시작]

그리고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그 프랑스어 이름이 Véran인 주교(Bishop)이셨던, 그 축일이 10월 19일인, "베랑", 즉, 성 "베라노", 즉, 성 "베라누스", 즉, Saint Veranus of Cavaillon(카바이용의 성 베라노)에 관한 더 자세한 정보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자료 1: https://en.wikipedia.org/wiki/Roman_Catholic_Diocese_of_Cavaillon 

자료 2: https://en.wikipedia.org/wiki/Fontaine-de-Vaucluse 

자료 3: https://uk.luberoncoeurdeprovence.com/page/cathedrale-notre-dame-et-saint-veran---en+49068.html 

자료 4: https://www.google.com/maps/place/Cathedrale+Saint+Veran+Cavaillon/@43.8362686,5.0361421,3a,75y,90t/data=!3m8!1e2!3m6!1sAF1QipM3laTi6BwdDDAlTFUUtESnel80Zzg6QNIdN8w!2e10!3e12!6shttps:%2F%2Flh5.googleusercontent.com%2Fp%2FAF1QipM3laTi6BwdDDAlTFUUtESnel80Zzg6QNIdN8w%3Dw203-h114-k-no!7i5504!8i3096!4m15!1m7!3m6!1s0x0:0x0!2zNDPCsDUwJzI0LjAiTiA1wrAwMicyNC4wIkU!3b1!8m2!3d43.84!4d5.04!3m6!1s0x12b5f78ba480501b:0x8655ec14fc214c1d!8m2!3d43.8362681!4d5.0361425!14m1!1BCgIgAQ?hl=en 

자료 5: https://www.google.com/maps/dir/Cath%C3%A9drale+Notre-Dame-et-Saint-V%C3%A9ran+de+Cavaillon,+Place+Joseph+d'Arbaud,+Cavaillon,+France/43.9231,5.127/Cucuron,+France/@43.8469617,4.9566277,10z/data=!3m1!4b1!4m15!4m14!1m5!1m1!1s0x12b5f78ba480501b:0x8655ec14fc214c1d!2m2!1d5.0361421!2d43.8362686!1m0!1m5!1m1!1s0x12ca23014696aa69:0x40819a5fd8fc480!2m2!1d5.438812!2d43.773077!3e0?hl=en [주: 이 지도에서, Cucoron페레올 주교님의 출생지 고향임]

자료 6: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08-1853_페레올/History_of_Saint_Veranus_anchorite_at_Vaucluse_&_Bishop_of_Cavaillon.pdf  

 

자료 7: https://en.wikipedia.org/wiki/Fontaine_de_Vaucluse_(spring)#CITEREFVisite_virtuelle_du_gouffre 

자료 8: http://www.google.com/maps/place/Vaucluse+Spring/@43.9177765,5.1325791,3a,75y,90t/data=!3m8!1e2!3m6!1sAF1QipMR0qv2mrdp3ds_OveNRcNVizlK0NZJMyzLkqMZ!2e10!3e12!6shttps:%2F%2Flh5.googleusercontent.com%2Fp%2FAF1QipMR0qv2mrdp3ds_OveNRcNVizlK0NZJMyzLkqMZ%3Dw203-h152-k-no!7i4032!8i3024!4m15!1m7!3m6!1s0x12ca0b92cb7c9c2b:0xef77db2451741629!2s84800+Fontaine-de-Vaucluse,+France!3b1!8m2!3d43.922443!4d5.126884!3m6!1s0x12ca0beba036a6b5:0xe686ae25acc7a51a!8m2!3d43.9177769!4d5.1325786!14m1!1BCgIgAQ?hl=en <----- 아무리 바쁘더라도 꼭 살펴보라

자료 9: http://www.ssfv.fr/panorama/visite.html <----- 아무리 바쁘더라도 반드시 꼭 살펴보라

자료 10: https://www.beyond.fr/villages/fontvaucluse.html [주: 자료 9 샘(Spring)에 대한 설명]

(자료 10으로부터 발췌 시작)

Fontaine-de-Vaucluse


[...]

Dragon of the Pool

 

Long before the speleologists could venture into the pool, there resided a Coulobre, a fantastic creature like a Drac or Dragon, that haunted the pool. In the 6th century, Saint Véran, then the Bishop of Cavaillon, chased away the creature, which flew up over the Alps, crashing to its death at the village of St Véran. There, an stone image of the creature supports a pillar at the front of the St Véran village church.

(이상, 발췌 끝)

 

자료 11: http://www.avignon-et-provence.com/tourisme-provence/fontaine-de-vaucluse#.VvvAR_mj9AE  

출처 11-1: http://www.avignon-et-provence.com/tourisme-provence/fontaine-de-vaucluse#.VvvAR_mj9AE 중의 사진첩 

출처: https://www.avignon-et-provence.com/sites/default/files/styles/no-style/public/villes/contenu/05-eglise-fontaine-vaucluse_0.jpg [주: Eglise dans le village de Fontaine de Vaucluse]

(발췌 시작)

Eglise dans le village de Fontaine de Vaucluse

(이상, 발췌 끝)

자료 12: https://www.provenceweb.fr/e/vaucluse/fontaine/fontaine.htm 

출처 12-1: 위 교회 및 지역 풍경들을 담은 더 큰 사진들은 여기에:

http://www.planeteprovence.com/screens/84/fontaine-de-vaucluse/zoom.php?debut=7_g-fontaine-de-vaucluse.jpg 

자료 13: https://vialucispress.wordpress.com/2019/05/25/the-saint-a-dragon-and-petrarch-too-dennis-aubrey/ [주: 위 사진 중의 조각상의 큰 사진들 및 성당의 내부 사진들]

자료 14: https://www.youtube.com/watch?v=N-l7SMLSaRQ <----- 아무리 바쁘더라도 반드시 꼭 살펴보라

[주: 예를 들어, 이 동영상 07:00; 11:06; 13:52; 15:00 등에서부터, 위의 자료 10에 있는 알프스 산동네인 성 베랑 마을 소재 옛 교회의 두 개의 기둥들 사진들, 이 샘(Sprin)이 솟는 동굴 안에서 성 베랑이 자신의 발 아래에 이 샘에서 살고 있는 용(dragon)을 제압하는 성화, 위의 자료 11에 있는 Fontaine de Vaucluse 마을 소재 옛 교회 마당에 있는, 사람이 이 샘의 용(dragon)을 제압하는 모습을 새긴, 조각상의 확대된 모습 등을, 더 자세하게 볼 수 있음.]

 

그런데, 자료 2에 안내된 마을은, 그 프랑스어 이름이 Véran인, 그 축일이 10월 19일인, "베랑", 즉, 성 "베라노", 즉, 성 "베라누스", 즉, Saint Veranus of Cavaillon(카바이용의 성 베라노)의 탄생지 고향으로 알려진 Fontaine de Vaucluse인데, 이 마을은 특히,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님(1808-1853년)의 탄생지 고향 마을인 Cucuron으로부터 불과 46.3Km 떨어져 있음주목하십시오:

https://www.google.com/maps/dir/Cucuron,+France/43.9231,5.127/@43.8105115,5.0659986,50139m/data=!3m1!1e3!4m8!4m7!1m5!1m1!1s0x12ca23014696aa69:0x40819a5fd8fc480!2m2!1d5.438812!2d43.773077!1m0?hl=en 

 

그리고 바로 이 지리학적 사실을 주목하게 되는 이유는, 페레올 주교님(1808-1853년)은, 당시에 당시에 우리나라 조선 충청도 땅에 숨어 계시면서, 김대건 신부님의 1846년 양력 8월 26일자 라틴어로 기술된 옥중 서한의 수취인이셨고 또 이 서한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중국 마카오 소재 프랑스 파리 외방 선교회 쪽으로 1846년 11월 3일자로 발송한, 당사자이고, 그리고 바로 이 프랑스어본 서한 중에, 수호 성인으로서 선정된 "베랑"(Véran)을 가리키는, 프랑스인의 이름인 세례명 "Véran"이 두 번에 걸쳐, 동일한 인물을 지칭하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 바로 위에서 실증적으로(positively) 함께 고찰한 바로부터, 다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6) 바로 위의 자료 1자료 2 , 그리고 자료 3 제공의 정보들에 의하여, 김대건 신부님의 1846년 양력 8월 26일자 라틴어로 기술된 옥중 서한의 수취인이셨고 또 이 서한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중국 마카오 소재 프랑스 파리 외방 선교회 쪽으로 1846년 11월 3일자로 발송한 당사자이신 페레올 주교님께서는, 그 프랑스어 이름이 Véran"베랑", 즉, 성 "베라노", 즉, 성 "베라누스", 즉, Saint Veranus of Cavaillon(카바이용의 성 베라노)에 대하여 매우 잘 알고 계셨을 것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게시자주 3-1-1: (A) 다음에 발췌된 바는, 1795년부터 1880년의 기간 동안에 우리나라 조선에 입국한 성직자들의 입국 경로와 시점을 일목요연하게 모은 표(Table)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21-1846_김대건/1795-1880_방인_외국인_선교사_신부_주교_입국_경로.htm  

(발췌 시작)

(이상, 발췌 끝)

 

(B) 그리고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김대건 신부님께서 순교한 1846년 이전에 우리나라 조선에 입국한 프랑스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의 총 5명의 성직자들의 고향들과 그 프랑스어 이름이 Véran"베랑", 즉, 성 "베라노", 즉, 성 "베라누스", 즉, Saint Veranus of Cavaillon(카바이용의 성 베라노)의 탄생지 고향으로 알려진 Fontaine de Vaucluse과의 거리를 파악할 수 있는데, 페레올 주교님을 제외한 다른 분들의 경우에, 당시의 교통 사정을 감안할 때에, Fontaine de Vaucluse로부터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 태어나 성장한 분일수록, "베랑"(Véran)의 생애에 대하여 더 몰랐을 것임은 상당히 분명하다는 생각입니다:

 

(1) 모방 신부님(Maubant, 1803-1839년 기해 박해에서 순교, 1829, 1832)의 고향인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VassySaint Véran(성 베랑)의 고향으로 알려진 Fontaine de Vaucluse과의 거리는 자동차 길로 약 987Km 임:

https://www.google.com/maps/dir/Vassy,+Valdalli%C3%A8re,+France/43.9231,5.127/@45.4761494,1.076946,6z/data=!4m8!4m7!1m5!1m1!1s0x480a2d392a2458df:0xe15a4aba6fcf1e4e!2m2!1d-0.676814!2d48.852945!1m0?hl=en 

 

(2) 샤스탕 신부님(Chastan, 1803-1839년 기해 박해에서 순교, 1826, 1827)의 고향인 MarcouxSaint Véran(성 베랑)의 고향으로 알려진 Fontaine de Vaucluse과의 거리는 자동차 길로 약 130Km 임:
https://www.google.com/maps/dir/Marcoux,+France/43.9231,5.127/@43.8952262,5.1045834,183325m/data=!3m1!1e3!4m8!4m7!1m5!1m1!1s0x12cb845fc4c3b39f:0x40819a5fd97b1e0!2m2!1d6.280157!2d44.131286!1m0?hl=en

 

(3) 앵베르 주교님(Imbert, 1796-1839년 기해 박해에서 순교, 1819, 1820, 1836)의 고향인 MarignaneSaint Véran(성 베랑)의 고향으로 알려진 Fontaine de Vaucluse과의 거리는 자동차 길로 약 75Km 임:
https://www.google.com/maps/dir/Marignane,+13700,+France/43.9231,5.127/@43.67187,4.9110394,92006m/data=!3m2!1e3!4b1!4m8!4m7!1m5!1m1!1s0x12c9e622913566cf:0x40819a5fd970230!2m2!1d5.218332!2d43.4212739!1m0?hl=en 

 

(4) 페레올 주교님(Ferreol, 1808-1853년 서울에서 병사, ?, 1839, 1843)의 고향인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의 CucuronSaint Véran(성 베랑)의 고향으로 알려진 Fontaine de Vaucluse과의 거리는 자동차 길로 약 46Km 임:
https://www.google.com/maps/dir/Cucuron,+France/43.9231,5.127/@43.9019891,4.5587124,366609m/data=!3m1!1e3!4m8!4m7!1m5!1m1!1s0x12ca23014696aa69:0x40819a5fd8fc480!2m2!1d5.438812!2d43.773077!1m0?hl=en 

 

(5) 다블뤼 주교님(Daveluy, 1818-1866년 병인 박해에서 순교, 1841, 1844, 1857) 의 고향인 AmiensSaint Véran(성 베랑)의 고향으로 알려진 Fontaine de Vaucluse과의 거리는 자동차 길로 약 861Km 임:
https://www.google.com/maps/dir/Amiens,+France/43.9231,5.127/@46.803599,-0.8357612,1393117m/data=!3m2!1e3!4b1!4m8!4m7!1m5!1m1!1s0x47e78413d78b760b:0x40af13e816220e0!2m2!1d2.295753!2d49.894067!1m0?hl=en

(이상, 게시자 주 3-1-1 끝)

 

(C) 참고로, 위의 (A)항에 등장하는 성직자들 이후에, (i) 우리나라 조선에 선교사로 파견된 프랑스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의 나머지 성직자들의 고향들로부터 및 (ii) 1874년에 초간된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사"를 프랑스어로 집필한 달레 신부님의 고향으로부터, Saint Véran(성 베랑)의 고향으로 알려진 Fontaine de Vaucluse까지의 자동차 거리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위의 및 아래의 성직자들의 고향들 및 신상 정보들의 확인시에 참조한 사이트들:

https://www.irfa.paris/en/sitemap  

https://www.irfa.paris/fr/rechercher/search-meparchives?etat=Cor%C3%A9e&portal_type=FicheIndividuelle&form.submitted=0 [주: 우리나라에 파견된 성직자들의 Biographies]

http://www.catholic-hierarchy.org/ 

 

메스트르 신부님(Maistre, 1808-1857년, 1832, 1840, Entremont, 402Km)

장수 신부님(Jansou, 1826-1854년, 1850, 1851, Tarn, 354Km)

베르뇌 주교님(Berneux, 1814-1866년 병인 박해에서 순교, 1837, 1840, 1854, Sarthe, 829Km)

프티니콜라 신부님(Petitnicolas, 1828-1866년 병인 박해에서 순교, 1852, 1853, Vosges, 632Km)

푸르티에 신부님(Pourthie, 1830-1866년 병인 박해에서 순교, 1854, 1855, Tarn, 354Km)

페롱 신부(Feron, 1827-1903, 1850, 1856, Orne, 926Km; 대원군의 친부 묘를 도굴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한 후에 본국으로 소환되었으나, 그러나 1900년 경에 시복재판 증인으로 조선에 재 입국하였고 금경축 행사를 명동 대성당에서 가졌다고 알고 있음)

랑드르 신부님(Landre, 1828-1863, 1853, 1858, Gers, 465Km)

조안노 신부님(Joanno, 1832-1863, 1857, 1858, Côtes-d'Armor, 1,139Km)

리델 주교님(Ridel, 1830-1884, 1857, 1860, 1869, Loire-Atlantique, 956Km); 1881년에 중풍 때문에 결국에 프랑스로 돌아가 그곳에서 선종)

칼레 신부님(Calais, 1833-1884, 1860, 1860, Meurthe-et-Moselle, 664Km; 1869년 이전에 건강이 나빠져 프랑스로 귀국 후 그곳에서 선종)

오메트르 신부님(Aumaitre, 1837-1866년 병인 박해에서 순교, 1862, 1862, Charente, 736Km)

위앵 신부님(Huin, 1836-1866년 병인 박해에서 순교, 1861, 1864, Haute-Marne, 568Km)

볼리외 신부님(Beaulieu, 1840-1866년 병인 박해에서 순교, 1864, 1864, Gironde, 615Km)

도리 신부님(Dorie, 1839-1866년 병인 박해에서 순교, 1864, 1864, Vendée, 906Km)

브르트니에르 신부님(Bretenieres, 1838-1866년 병인 박해에서 순교, 1864, 1864, Saône-et-Loire, 368Km)

 

-----> 달레 신부님(Claude Charles dallet, 1829-1878, Langres, 521Km) [주: 1874년에 프랑스어 원본의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사" 책 초판 출판]

 

블랑 주교님(Blanc, 1844-1890, 1866, 1867, 1882, 백규삼(白圭三). Doubs, 486Km); 1876년에 조선에 입국하였으며 1878년에 리델 주교에 의하여 보좌주교로 임명됨)

드게트 신부님(Deguette, 1848-1889, 1872, 1876, 최동진(崔東鎭). Manche, 1,038Km)

두세 부주교님(Doucet, 1853-1917, 1876, 1877, 정가미(丁加彌). Savoie, 366Km)

로베르 신부님(Robert, 1853-1922, 1876, 1877, 김보록(金保祿). Haute-Saône, 574Km); 블랑 부주교에 의하여, 29세였던 1882년시복 재판의 기록 서기로 임명됨)

뮈텔 주교님(Mutel, 1854-1933, 1877, 1877, 1890, 민덕효(閔德孝). Haute-Marne, 568Km); 뮈텔 신부님은, 블랑 부주교에 의하여, 28세였던 1882년 4월 26일에 시복 판사로 임명되고 5월 11일부터 시복 재판이 개정됨)

 

-----> [주: 시복 재판이 거의 마무리되어가던 1885년부터 1901년 사이에, 달레 신부님의 프랑스어 원본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사"가 우리나라에 파견된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의 선교사 신부님들에 의하여 우리말로 번역되었다고 하며[최석우 신부], "죠션성교사긔"라는 제목으로 "보감"/"경향잡지"에 게재되었음] 

 

리우빌 신부님(Liouville, 1855-1893, 1878, 1878, 유달영(柳達榮). Meuse, 684Km)

 

쿠데르 신부님(COUDERC Vincent, 1859-1892, 1884, 1884, Aveyron, 300Km)

조스 신부님(Jean-Baptiste JOSSE (1851-1886, 1876, 1881, Loire-Atlantique, 948Km)

르메르 신부님(LE MERRE Louis, 1858 - 1928, 1886, 1886, 이유사(李類斯, 루수). Manche, 1,030Km

프와넬 부주교님(POISNEL Victor, 1855 - 1925, 1879, 1881, 박도행(朴道行), Manche, 1,030Km)

베르모렐 신부님(VERMOREL Joseph, 1860 - 1937, 1887, 1887, 장약슬(張若瑟). Rhône, 272Km)

[이상, 2020년 7월 13일자 내용 추가 끝] 

 

3-1-2.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 프랑스어 이름이 Véran"베랑", 즉, 성 "베라노", 즉, 성 "베라누스", 즉, Saint Veranus of Cavaillon(카바이용의 성 베라노)은,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성 "베라노", 즉, 성 "베라누스"이지, 그 축일이 5월 18일인 성 "베난시오"(St. Venantius)와 동일 인물이 결코 아닙니다:

http://maria.catholic.or.kr/sa_ho/list/list.asp?menugubun=saint&Orggubun=101&ctxtOrder=++name1%2Cgaladaym%2Cgaladayd+&ctxtSearchNm=Veranus ;

https://www.catholic.org/saints/stindex.php?lst=V 

 

그리고, 특히, 그 프랑스어 이름이 Véran"베랑", 즉, 성 "베라노", 즉, 성 "베라누스", 즉, Saint Veranus of Cavaillon(카바이용의 성 베라노)는,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1738년에 초간된 드 메야/마이야 신부님"성년광익"에 포함되어 있지 않음에. 즉, 1738년 당시에 사용되었던 가톨릭 보편 교회의 전례력 상의 축일/첨례일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음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669-1748_모이리악_드_메야/1738_성년광익_차례.htm  <----- 여기를 클릭하여 반드시 확인하라

 

따라서, 바로 위에서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찰한 바로부터, 다음의 결론들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7) 왜냐하면, 예를 들어, 홍역, 천연두 등의 역병/전염병들에 의한 유아들의 사망률이 매우 높았던 과거의 시절에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및 전통에 따라,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원죄(the original sin)의 죄사함을 받게 하고자, 태어나자마자 해당 교우촌의 공소회장으로부터 유아세례를 받았을 것이 분명한,(*) 1813년 경에 출생한[주: 김대건 신부님의 "일성록" 심문 기록 참조]이의창의 세례명 선정 시에 그 부모들이 참조하였을, 성인들의 전기인, 1738년에 초간된 드 메야/마이야 신부님의 "성년광익"에 성 "베랑", 즉, 성 "베라누스", 즉, 성 "베라노", 즉, Saint Veranus of Cavaillon(카바이용의 성 베라노)가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또한 아래의 제3-4-4항에서 실증적으로 확인하듯이, 당시의 가톨릭 보편 교회 전례력 축일표에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이의창의 세례몀은, 프랑스어 세례명 "Véran"의 우리말 음역 음값인 "베랑"/"베란"일 수가 없음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

(*) 게시자 주: 유아세례(infant baptism)를 적극 장려하는 내용은 우리나라 조선의 신앙의 선조들 첫 세대에게도 전달되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이벽 성조"성교요지", 17,1-8에 명확하게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776.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784.htm <----- 필독 권고

[이상, 2020년 7월 12일자 내용 추가 끝]

 

(이 글의 결론 8) 따라서, "Véran"이라는 표현은, 김대건 신부님의 1846년 양력 8월 26일자 라틴어로 기술된 옥중 서한을 페레올 주교님이 읽고서 판독히는 과정에서 발생한 판독 오류의 한 결과로서,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사에 있어, 김대건 신부님의 1846년 양력 8월 26일자 옥중 서한의 프랑스어본 서한에서 처음으로/최초로 사용되기 시작하였음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2020년 7월 13일자 내용 추가 시작] 

3-1-3. 이번 항에서는, 김대건 신부님의 1846년 양력 8월 26일자 라틴어로 기술된 옥중 서한을 페레올 주교님이 읽고서 판독히는 과정에서 판독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 자체가 있었는 지에 대하여,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가능성과 관련하여 가장 커다란 문제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김대건 신부님1846년 양력 8월 26일자 라틴어로 기술된 제20번째 서한인 바로 이 옥중 서한은 사라지고 없고 다만, 페레올 주교님이 직접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작성한, "Véran"이라는 프랑스어 세례명이 두 번에 걸쳐 사용된, 김대건 신부님의 옥중 서한의 프랑스어본만이 전해내려오고 있는 데에 있습니다.

 

(가) 그래서, 부득불,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는 김대건 신부님1846년 음력 6월 8일자 라틴어로 기술된 제19번째 서한의 사본들 펼쳐봄으로써, 김대건 신부님1846년 양력 8월 26일자 라틴어로 기술된 제20번째 서한의 상태를 미루어 짐작하는 기회를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김대건 신부님1846년 양 음력 6월 8일자 라틴어로 기술된 제19번째 서한의 사본 전문을 읽을 수 있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21-1846_김대건/1846_김대건_신부_서신들/김대건_신부_19번째_서신(옥중_서신)_1846-06-08(음)_to_리브와_신부.pdf  

(발췌 시작)

김대건_신부_19번째_서신(옥중_서신)_1846-06-08(음)_to_리브와_신부_제1쪽_page-0094.jpg

김대건_신부_19번째_서신(옥중_서신)_1846-06-08(음)_to_리브와_신부_제2쪽_page-0095.jpg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3-1-3: 한지로 보이는 종이의 앞면과 뒷면에 김대건 신부님에 의하여 라틴어로 작성된, 제19번째 서한인, 1846년 음력 6월 8일자 위의 육필 서한을 직접 읽고 또 판독해 보고자 하는 연구자들께서는, PC 화면의 경우에, "상태 표시줄"에서 400% 정도로 확대하여 들여다보도록 하십시오.

 

필자의 경우에, 상당수의 라틴어 낱글자들을 올바르게 판독하는 것이 대단히 힘들었는데, 여러분들은 어떠한지요???

 

(나)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다음에 발췌된, 김대건 신부님에 의하여 라틴어로 작성된, 제18번째 서한을 들여다 보면, 이 18번쩨 서한의 경우에는 훨씬 쉽게 라틴어 낱글자들을 알아볼 수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21-1846_김대건/1846_김대건_신부_서신들/김대건_신부_18번째_서신(옥중_서신_아님)_1845-11-20_from_Seoul_to_리브와_신부.pdf  

(발췌 시작)

김대건_신부_18번째_서신(옥중_서신_아님)_1845-11-20_from_Seoul_to_리브와_신부_제1쪽_page-0092.jpg

 

김대건_신부_18번째_서신(옥중_서신_아님)_1845-11-20_from_Seoul_to_리브와_신부_제2쪽_page-0093.jpg

(이상, 발췌 끝) 

 

따라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하더라도, 여러 차례에 걸쳐 심문도 받고 하는 감옥 안에서 작성되다보니 작성 자체의 어려움 때문에, 위의 (가) 항에 발췌된 김대건 신부님의 제19번째 라틴어 옥중 서한과 거의 동일한 상태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김대건 신부님의 제20번째 라틴어 옥중 서한을 받아본 페레올 주교님께서 판독 과정에 아무런 판독 오류가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또 굳게 믿는 것은, 과도한 추정/신념(inordinate presumption/belief), 즉, 이성(reason)의 판단의 범위들을 넘어서는 추정/신념임을 아니 지적할 수 없습니다.

 

3-1-4. 이상, 위의 제3-1-1항제3-1-2항,에서 도출된 결론들 그리고 제3-1-3항에서 고찰한 바의 따름 정리(corollaries)들로서, 다음의 결론들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9) 애초에 이 판독 오류가 발생할 당시에, 위에서 말씀드린, 그 프랑스어 이름이 Véran"베랑", 즉, 성 "베라누스", 즉, 성 "베라노", 즉, Saint Veranus of Cavaillon(카바이용의 성 베라노)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던, 페레올 주교님께서 1846년 음력 7월 26일자로 새남터에서 참수당한 김대건 신부님의 1846년 양력 8월 26일(음력 7월 5일)자 라틴어로 기술된 옥중 서한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만약에 성 "Véran(베랑), 즉, 성 "베라노"1738년에 초간된 드 메야/마이야 신부님"성년광익"에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이미 알고계셨더라면, 이의창의 세례몀을, "Véran"(즉, 베랑)이라고 결코 판독하지 못하셨을 것임을, 그리하여 그 결과, 프랑스어 번역문 중에 그렇게 표기하지 못하셨을 것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질문 3: 페레올 주교님께서, 김대건 신부님1846년 양력 8월 26일자 라틴어로 기술된 제20번째 서한인 바로 이 옥중 서한 원본을, 비록 본인이 이 서한의 수취인으로 되어 있기는 하나 그러나 심지어 김대건 신부님처럼 본인도 언제 체포되어 죽임당할지 모르는 당시의 조선의 위급한 상황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계셨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잘 보존하기 위하여 중국 소재 프랑스 파리 외방 선교회로 보내지 않고, 굳이 본인이 직접 프랑스어로 번역한 후에 오로지 이 번역본만을 중국 소재 프랑스 파리 외방 선교회로 발송하였을까요?

[이상, 2020년 7월 13일자 내용 추가 끝]

 

따라서, 또한 다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10)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쓴 것이 분명한 김대건 신부님의 1846년 양력 8월 26일자 옥중 서한이, 만약에 프랑스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혹은 읽히는 과정에서 올바르게 판독되었더라면, 달레 신부님의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사 프랑스어 원문에서, "Véran" 대신에, (i) "Ni ran"( 랑) 혹은 "Ni rang"( 랑), 혹은 (ii) "Li ran"( 랑) 혹은 "Li rang"( 랑)으로, 표기되었을 것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왜냐하면, 달레 신부님의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사에서 "Véran", 20세기의 우리나라 천주교회의 교회사 연구자들이 1874년에 초간된 달레 신부님의 프랑스어 원문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사를 읽고서 또한 이미 그렇게 인지하였듯이, 이의창(李宜敞)을 지칭함이 분명하다면, 그는 당시에 김대건 신부님을 지척(咫尺)에서 도왔던 세 명의 가(哥)들 중의 한 명이었을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3-2. 그리고  바로 위의 제3-1-4항에서 필자가 제시한 (이 글의 결론 9)은, 판독 오류인 것이 분명한 "Véran"을 바로 잡는 과정에서, 예를 들어, 이 표현의 우리말 음값으로부터 가지게 되는 어떤 느낌(a feeling) 등에 근거하였을 수도 있는, "Venantius"직역 음역(literal transliteration) "베난시오"가 이의창(李宜敞)의 영세명/세례명일 수도 있다는 그야말로, 사고에 있어서의 중심 이동이 전혀 되지 않는, 따라서 자기 중심적인, 막연한 추측보다는, 당시에 김대건 신부님을 지척(咫尺)에서 도왔던 세 명의 (哥)들이 있었음을 잘 알고 있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한 개의 가능한 경우로서, 생각햘 수 있는, 따라서 그다지 어렵지 아니한, 합리적인, 추론(reasoning)의 한 결과임에 주목하십시오.

 

3-3. 그런데, 완전히 다른 한편으로,

 

3-3-1. "한국한자어사전", 권2, 제663쪽"文南"(문남)이라는 용어가 표제어로 수록되어 있는데, 이 용어는 "한어대사전"에는 표제어로 수록되어 있지 않는, 우리나라 조선의 고유한 한자 용어이며, 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 https://hanja.dict.naver.com/word?q=%E6%96%87%E5%8D%97&cp_code=1&sound_id=1 

(발췌 시작)

文南

 

1) 문관(文官)과 음관(蔭官)을 이르는 말. 文蔭.

《朝鮮仁祖實錄 44, 21年12月丙寅》

備局啓曰, 元孫入瀋時輔養官, 金堉一人……且兩大君在彼而無郞屬, 事體埋沒, 勿論文南, 差奉禮以遣之.

 

2) 문반(文班)의 음관(蔭官).

《經世遺表 3, 天官修制, 三班官制》

其材略可稱者, 別取十有二人, 爲禁軍之領……臣又按, 文南則別加庶流之窠十二, 武南則別加顯族之窠十二, 雖其所取不同, 亦所以參互比對, 燦然成文也.

(이상, 발췌 끝) 

 

3-3-2.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文南"이라는 표현이 한문 문화권의 방대한 한문 문헌들에서 사용되지 않아 왔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www.guoxuedashi.com/zidian/so.php?sokeyci=%E6%96%87%E5%8D%97&submit=&kz=11&cilen=0 

 

3-3-3. 따라서. 다음의 결론을 그리 어렵지 않게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11) 위의 제2-1항과 위의 3-3-1항에 발췌된 바에 의하여, 아무리 빠르더라도, 1836년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 신앙의 선조들은, 비록 드 메야/마이야 신부님의 "성년광익" 초판 및 개정판 둘 다의 하, 5월18일에, "Venatius"(베난시오, 프랑스어: Venant; 이탈리아어: Venanzio)에 대응하는 한자 음역 세례명인, "文南爵"(문남작)이 명기되어 있고 또 "성 문남작"에 대한 전기(傳記, Biography)를 읽었다고 하더라도, 왜냐하면, (i) "文南"(문남) 이 조선 왕조의 임금들로부터 어명에 의하여 벼슬/임명을 받아야만 하는 문반과 음관 관직 명칭들에 대한 통칭임을 다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심지어 (ii) ""이 벼슬/작위(爵位)을 의미하기 때문에, 천주교 신자가 아닌 자들이 빌미로 삼아 야기할 수 있는 왕권에 대한 월권의 문제에 말려들지 않기 위하여, "南爵"(문남작)을 영세명/세례명으로 감히 선정할 수가 없었을 것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이 글의 결론 12)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는, 1879년보다 이전의 시기의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 박해사 기록들에서, ["베난시오"아니라"Venatius"(베난시오)에 대응하는 한자 음역 세례명인, "文南爵"(문남작)이라는 영세명/세례명이 사용된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을 것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게시자 주 3-3-3: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논문은, 바로 위의 (이 글의 결론 9)를, 아무리 빠르더라도, 1801년에 이르기까지, 강력하게 뒷받침함을 알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cb/2010_18세기_말_조선_천주교회의_발전과_세례명.htm <----- 여기를 클릭하여 반드시 확인하라

 

다른 한편으로, 그러나,

 

(이 글의 결론 13) 1864년경에 초간되었다고 알려진 우리말본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 중에는 직역 음역(literal transliteration)이 된 영세명/세례명들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직역 음역(literal transliteration)이 된 영세명/세례명인 "Venatius"(베난시오)는, 아무리 빠르더라도, 우리말본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가 처음으로 도입되어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시점인, 따라서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 안에 한글 전용이 시작된 시점인, 1864년경 이후에 [혹은, 실제적으로 거의 희박할 것이지만, 더 엄밀하게, 프랑스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의 신부님들이 우리나라 조선에 처음으로 입국한 시점인 1836년 이후에], 영세/세례를 받은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의 영세명/세례명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3-4. 그러나 바로 위의 3-3에서 실증적으로(positively) 입증/고증된 바와는 달리, 다음에 발췌된 바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출처 1: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29-1878_달레/1874_권1_histoiredelgli01dall.htm [주: 권1]

출처 2: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29-1878_달레/1874_권2_histoiredelgli02dall.htm [주: 권2] 

(출처 2로부터 발췌 시작)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위에서 첫 번째 줄과 열한 번째 줄을 보라.

 

또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1784년에 초간된 달레 신부님의 프랑스어 원문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사" 본문 전체에 걸쳐 Véran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페이지는, 프랑스어본 김대건 신부님의 서한의 일부에서 바로 위에 발췌된, 권2, 제310쪽뿐이다.

(이상, 발췌 끝)

 

3-4-1. 달레 신부님에 의하여 저술되어 1874년에 초간된 프랑스어 원문의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사", 권2, 제310쪽에 수록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서한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담은, <자료집 제1집>, 1996 한국교회사연구소, 제363쪽에서, 프랑스어 원문 중의 "Mon domestique Véran""제 하인 베난시오"라고 오역하였고, 제364쪽에서는 달레 신부님의 1874년 초판의 프랑스어 원문의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사"에서 "Véran"로 판독된 표현에 대하여, 김대건 신부님의 바로 이 서한이 작문된 해인 1846년으로부터 무려 150여년이 지난 후인, 1996년경에 재 판독 작업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i) "Véran" 중의 낱글자 "r""n"으로 교체되었고 그리고 심지어 (ii) 이 표현 "Véran"의 끝부분에 낱글자 "t"이 임의적으로/작위적으로/의도적으로 추가되어, 최종적으로 "Vénant"로 판독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며, 그리고 바로 이 재 판독에 근거하여 1996년경에 우리말 재 번역 시에, 250년에 순교한 St. Venantius(프랑스어: Venant; 이탈리아어: Venanzio)의 프랑스어 세례명/영세명 Venant와 일치한다고 판단하여, 재 판독 과정에서 바로 위의 (i)(ii) 과정들을 거쳐 판독된 표현인 "Vénant"이, 드디어, 최석우 신부에 의하여 우리말로 "베난시오"직역 음역(literal transliteration)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러나,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1866년 병인 박해 이전에 우리나라 조선에 선교사로 파견된 프랑스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의 선배 신부님/주교님들로서, 예를 들어, 베르뇌 주교님처럼, 한문본 천주교 문헌들을 읽고 이해함에 능숙하였던 분들과는 달리, (i) 재 판독자로 알려진 프랑스인 배세영 마르셀 신부(파) (Rev . Mar cel Plis se, M.E.P.), 혹은 (ii) 바로 이 재 판독 작업에 참가한 다른 연구자가, 왜냐하면 필자에 의하여 위의 제2-1항, 제3-1항, 그리고 제3-3항에서 지적된 바들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부지불식 간에, 심각한 판독 오류를 야기하였다는 생각입니다. 

 

[2020년 7월 15일자 내용 추가 시작]

3-4-2. 그런데, 설사 필자에 의하여 위의 제2-1항, 제3-1항, 그리고 제3-3항에서 지적된 바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다음에 발췌된, 페레올 주교님의 육필 서신 중의 "Véran"가 등장하는  첫 번째 줄과 일곱 번째 줄을 판독할 때에, 판독 과정에서 위에서 필자가 지적한 실수를 범하는 자체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생각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08-1853_페레올/서한들/1846-11-3_제28번째_서한_육필_원문들/A-MEP_Vol.577_ff.0961-0965.pdf  

(발췌 시작)

Véran_베랑_in_첫_번째_줄_of_A-MEP_Vol.577_f.962.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첫 번째 줄의 두 번째 단어를 보라. "Véran"이 분명하다.

 

Véran_베랑_in_일곱_번째_줄_of_A-MEP_Vol.577_f.962.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두 번째 줄의 첫 번째 단어를 보라. "Véran"이 분명하다.

(이상, 발췌 끝)

 

바로 위에 발췌된 바를 정밀하게 들여다보면, 판독하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i) "Véran" 중의 낱글자 "r""n"으로 결코 교체될 수가 없고, 그리고

(ii) 이 표현 "Véran"의 끝부분에 낱글자 "t"결코 추가될 수 없음

 

매우 자명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는지요?

 

왜냐하면, (i) 라틴어와, 라틴어 표기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언어들인, 프랑스어, 그리고 독일어 등에서 알파벳 소문자 "r"의 필기체에 두 가지 표기가 있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고, 그리고 (ii) 필기체 소문자 "t"가 어떤 형태인지는 또한 위에 발췌된 사진들만 들여다 보아도 바로 확인이 되는데, 왜냐하면, 위에 발췌된 두 번째 사진에 있는, 일곱 번째 줄의 "Vé"로 시작하는 단어에 곧바로 이어지는 두 개의 필기체 단어들 m'avait tracé에서, 첫 번째 단어의 마지막 낱글자와 두 번째 단어의 첫 낱글자, 이들 둘 다가, 일정 높이 이상에서, 즉, 통상적인 하이픈(hyphen -)이 표기되는 높이보다 약 두 배 정도 더 높은 위치에, "수평선 -"을 가지고 있는"t"의 필기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위에 발췌된 두 번째 사진에 있는 일곱 번째 줄 중의 "Vé"로 시작하는 필기체 단어의 마지막 낱글자는, 명확하게, 낱글자 "n"의 필기체임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필기체 "t"의 경우에 필수적인, 일정 높이 이상에서, 즉, 통상적인 하이픈(hyphen -)가 사용되는 높이보다 약 두 배 정도 더 높은 위치에, "수평선 -"가, 현재 정밀하게 들여다 보고 있는, 위의 두 번째 사진 중에 등장하는 "Vé"로 시작하는 필기체 단어의 마지막 낱글자에서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따라서 알파벳의 필기체 표기들에서 자주 보게 되듯이, 단지 아름답게 장식하기 위하여(only for the purpose of decoration), 낱글자 "n"의 필기체의 끝부분을 윗쪽으로 일정 길이 이상, 아름답고 부드럽게, 들어올린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바로 이 "n"의 필기체의 끝부분, 즉, 윗쪽으로 일정 길이 이상, 아름답고 부드럽게, 들어올린 꼬리에 불과한 부분을 또 한 개의 별도의 낱글자 "t"로 판독한 행위는, 조작을 통한 사기 행위에 해당한다는 생각입니다.

 

3-4-3. 다른 한편으로, 한국 천주교회 수원교구 수원교회사연구소 의하여 2012년 12월에 초판 발행된, 수원교구 역사 총서 3 [프랑스어/라틴어 번역자: 최세구(R. Jézégou, 파리외방전교회), 엄윤숙, 이정운; 출판사: 하상출판사], "페레올 주교 서한", 28.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의 바랑 지도신부에게 보낸 서한, 제394쪽에는, 위의 제3-4-1항에서 내려진 결론을 배척하고, 위의 제3-4-2항에서 일천(日淺)한 필자에 의하여 도출된 결론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즉, 위의 제3-4-2항에 발췌된 페레올 주교님의 육필 서신 중의 첫 번째 줄과 일곱 번째 줄에 등잫아는  ""로 시작하는 사람의 이름을 판독할 때에, 두 경우들 모두에 있어 판독된 이름은, "nant" 결코 아니고"ran"입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23년 7월 14일] 

(발췌 시작)

Véran(분홍색으로_밑줄이_그어진_두 곳_모두_파리외방선교회_소속의_최세구(R. Jézégou)신부에_의하여_Véran으로_판독됨)_in_1846-11-3_제28번째_서한_판독_제394쪽.jpg

(이상, 발췌 끝)

 

그러나, 다음에 발췌된 바에서 확인하듯이, 바로 위에 발췌된 부분의 우리말 번역문(주황색으로_밑줄이_그어진_두 곳)에는 Véran을 두 곳에서 모두 (이의창) 베난시오로 번역하는 번역 오류가 있습니다:

 

(발췌 시작)

(이의창)_베난시오_번역오류(주황색으로_밑줄이_그어진_두 곳)_in_1846-11-3_제28번째_서한_판독(제394쪽)의_우리말_번역_제395쪽.jpg

(이상, 발췌 끝)

 

따라서, 위의 제3-4-1항제3-4-2항에세 구체적으로 확인하였듯이, 서울대교구 한국교회사연구소 측에서 수행한 페레올 주교님의 해당 육필 서간의 활자체 판독 시에, 이 서간을 판독하는 과정에서 일부 알파벳들의 임의적 및 작위적 교체 및 추가라는 두 번에 걸친 조작 행위들이 있었음을, 또다른 방식으로, 이번에는 실증적(positively) 방식으로, 확인하였다는 생각입니다.

[이상, 2023년 7월 14일자 내용 추가 끝]

 

3-4-4.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1847년 11월에 발행된, "전교회연보"(APF, The Annales de la Popagation de la Foi)에 실린, 페레올 주교님의 프랑스어 서한을 읽을 수 있는데, 이 서한에는 또한 페레올 주교님에 의하여 프랑스어로 번역된 프랑스어본 김대건 신부님의 제20번째 서한[주: 페레올 주교님께 발송한, 라틴어로 쓰인 옥중 서한들 중의 두 번째 서한이고 또 마지막 서한임]이 포함되어 있는데, 언뜻 들여다보면, 이 연보의 편집 과정에서, 특히, 프랑스어본 김대건 신부님의 서한 본문에서, 수호 성인으로서 선정된 "베랑"(Véran)을 가리키는, 프랑스인의 이름인 "Véran"이라는 세례명이 등장하고 있는 두 개의 문장들이 몽땅 삭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08-1853_페레올/서한들/APF_베랑_언급된_문장들이_삭제된_편집본/APF_제433-437쪽.pdf

 

그런데, 편집하는 과정에, 단순히 지면을 줄이기 위하여, 프랑스어본 김대건 신부님의 서한의 내용을 요약하는 과정에서 이들 두 문장들이, 별다른 이유 없이, 삭제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나, 그러나, 다음과 같은 중대한 이유들 때문에 이들 두 문장들의 삭제가 결정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즉, 

 

(A)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역 교회의 성인인 "베랑"(Véran, Veranus)의 경우에, 한문 문화권에 전달된 가톨릭 보편 교회의 전례력에서 10월 19일에 그 축일/첨례일을 가지고 있지 못함은, 예를 들어

 

(i)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1659년 이후에 그리고 1692년 이전에 마련되어, "수진일과"의 부록으로 포함되어 있는 쿠플레 신부님(1624-1692년)의 한문본 "永瞻禮表"(영첨례표), 직접 확인시 참고: 제68a쪽, 10월 18일, 성사로가;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559-1654_니콜라스_롱고바르디_et_al/수진일과.htm 

 

(ii)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1712년에 필사된, 쿠플레 신부님(1624-1692년)의 한문본 "천주성교영첨례단", 직접 확인시 참고: 제11a쪽, 성로가성사; 천주성교미살경전주보일기, 제69b쪽, 10월 18일, 성로가종도;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624-1692_필립푸스_쿠플레/1712년_필사본_천주성교영첨례단.htm  

 

(iii) 다음에 발췌 된, 1670년 부글리오 신부님(1606-1982년))"미살경전", 주년각등첨예일, 직접 확인시 참고: 제19b쪽, 10월 18일, 로가성사;

 

(발췌 시작)

10월19일_축일인_베랑(Veranus)은_축일표에_없음_in_주년각등첨례일_in_1670_미살경전_제19b쪽.jpg

(이상, 발췌 끝)

 

(iv)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축일 날짜들을 확인할 수 있는, 1738년에 초간된 드 메야/마이야 신부님(1669-1748년)의 한문본 "성년광익" [그리고 또한 (v) 1856년 이후에 개정된 "성년광익"]에서,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669-1748_모이리악_드_메야/1738_성년광익_차례.htm 

 

실증적으로(positively) 확인이 되는데, 지금 필자가 지적한 바로 이러한 사실들을 또한 잘 알고 있었을,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되거나 혹은 파견된 경험이 있는, 당시의 프랑스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의 성직자들은, 프랑스어로 번역이 된 우리나라 조선의 김대건 신부님의 옥중 서한 중에서 "Véran"이라는,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역의 전설적 인물인 "Véran"을 말하는, 세례명이 언급되고 있는 것 자체를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B) 다른 한편으로, 프랑스 전역의 천주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교회연보"(APF, The Annales de la Popagation de la Foi)의 편집자들이 생각할 때에, 용(dragon)을 제압한 분으로서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역에 널리 알려져 있는 전설적인 인물인  "Véran"의 이름이, 그러나 가톨릭 보편 교회의 전례력 안에 그 축일/첨례일을 가지고 있지 못한 분의 이름이, 프랑스로부터 멀고도 먼 곳에 위치한 우리나라 조선의 김대건 신부님의 옥중 서한 중에서 세례명으로서 언급되고 있음을, 프랑스 지역 천주교 신자들이 납득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을 것입니다.

 

(C) 더 나아가, 그러한 내용을 담은 우리나라 조선이라는 선교의 현장으로부터 온 페레올 주교님의 서한을 "전교회연보"에 게재하면, 다들 잘 알고 계시겠지먄, 그렇지 않아도 18세기말 경에 등장한 나폴레옹의 천주교회 탄압 때문에 프랑스 천주교회 교도권의 권위가 이미 많이 실추되어 있는 프랑스 국내의 현실 안에서, 페레올 주교님의 고향이 바로 이 전설의 진원지로부터 매우 가까움[주: 약 46Km 거리임]을 잘 알고 있는 그리고 천주교회의 교도권에 비협조적인 자들[주: 여기에는 프랑스 전역의 개신교회 신자들이 포함됨]에 의하여, 곧바로, 한 개의 악한 표양(scandal), 커다란 조롱꺼리로까지 전락하게 될 수도 있다고, "전교회연보" 편집자들이 판단하였을 것입니다.

 

3-4-5. 그러나, 바로 위의 제3-4-4항에서 지적된, "전교회연보"(APF, The Annales de la Popagation de la Foi)의 편집자들이 적극적으로 회피하고자 한 것으로 보이는, 문제점들 자체가, 달레 신부님에 의하여 1874년에 초간된 프랑스어 원본의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사" 책의 출판 및 보급에 의하여,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무슨 말씀인고 하면,

 

(i) 위의 제3-4항에 발췌된 김대건 신부님의 두 번째이고 마지막인 옥중 서한의 프랑스어 번역문과

(ii) 위의 제3-4-4항에 안내된 1847년 11월에 발행된, "전교회연보"(APF, The Annales de la Popagation de la Foi)에 실린 김대건 신부님의 두 번째이고 마지막인 옥중 서한의 프랑스어 번역문을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면서 읽은 중국 본토와 우리나라 조선에 선교사로 파견된 프랑스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의 선교사 신부님들은, 용(dragon)을 제압한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역의 전설적 인물인 "베랑"(Véran)의 이름이, 프랑스로부터 멀고도 먼 곳에 위치한 우리나라 조선의 김대건 신부님의 옥중 서한 중에서 세례명으로서 언급되고 있는 것 자체를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위의 제3-4-4항(B)항(C)항에서 필자가 지적한 문제점들을 알아차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상, 2020년 7월 15일자 내용 추가 끝]


3-5.

3-5-1. 심지어, 드 메야/마이야 신부님의 개정판 한문본 "성년광익"의 우리말 번역서인,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의 우리말본 "성년광익", 하, 5월18일 문남작 치명에서, "文南爵"(문남작)의 우리말 번역 표현이, 직역 음역(literal transliteration)인 "베난시오"인 것이 결코 아니고, 중국어로 음역된 "委南爵"(위남작)의 우리말로의 음역인, 따라서 중역(重譯) 음역(secondhand transliteration)인, "워난시오"인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의 결론 14) 따라서, 드 메야/마이야 신부님의 개정판 한문본 "성년광익"의 번역서인 우리말본 "성년광익"이 우리나라 천주교회 안에서 마련된 시점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천주교회 안에서 "베난시오"라는 직역 음역(literal transliteration)의 영세명/세례명이 사용되지 않아 왔을 수도 있음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3-5-2. 그런데, 드 메야/마이야 신부님의 개정판 한문본 "성년광익"의 번역본인,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의 우리말본 "성년광익", 하, 5월 4일성 아우구스티노의 어머니인 성 모니카 축일인데, 여기에 기술된 성 모니카의 전기(傳記, Biography)의 우리말 번역문의 시작 부분에서, 한문본 "셩년광익", 하, 5월 4일에서 기술된 "利未亞"(리미아, 즉, 리비아)가, "리미아" 대신에, 음역(transliteration)이 결코 아닌, 완전히 다른 단어인 "아프리가"로 번역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3-5-3.

3-5-3-1. 다른 한편으로, 요즈음 말하는 "아프리카" 대륙의 이름이, "利未亞"(리미아, 즉, 리비아)가 아니라, "亞非利加"(아비리가)로 번역된 것은, 다음에 발췌된 바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22-1893_Lobscheid/1866_englishchinesedi00lobsrich.pdf  

(발췌 시작)

(이상, 발췌 끝)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개신교회 선교사 귀츨라프(1803-1851년)의 협조자이기도 하였던, 직업이 의사이기도 하였던, 독일 개신교회 루터파 출신의 선교사, Lobscheid(1822-1893년)에 의하여 중국 홍콩에서 출판된 1866년판 "영화사전" 제35쪽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게시자 주 3-5-3-1: (1) 바로 위에서 안내된 Lobscheid(1822-1893년)"영화자전"의 중각판은, 1868년에 개시된 일분의 명치유신 이후에, 일본인에 의하여 증정(增訂)되어 1884년에 일본에서 출판되었기에, 그 이후 일본에 널리 보급되었을 것임에 또한 반드시 주목하라.

 

그리고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졸글[제목: 교파教派 는, 1886년 이후 1895년 이전에 일본에서 만들어진, 일본의 신도神道 용도의 신조어이다; 게시일자: 2019-12-03] 중의 제1-2-4항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16.htm <----- 필독 권고

 

(2) 바로 위에서 안내된 "증정 영화자전"이 우리나라에도 전달되어 개신교회 측에 의하여 많이 사용되었을 것임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졸글[제목: 신교新教, 구교舊教, 예수교耶穌教, 예수성교 등 용어들의 출처와 기원 및 무지 때문에 발생한 착오와 왜곡 등에 대하여; 게시일자: 2019-11-20]제2-12-4항에서 실증적으로 입증/고증하고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14.htm <----- 필독 권고

 

왜냐하면,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개신교 회"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고 있는데, 필자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Protestantism""개신교"로 번역한 첫 번째 사전이, 1866년판 "영화자전"아니라1884년에 일본에서 중각된 바로 이 "증정 영화자전"이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이상, 게시자 주 3-5-3-1 끝)

 

3-5-3-2. 다른 한편으로,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조선왕조실록", 순조32년(1832년), 7월 21일자 기록에, 1832년에 우리나라 서해안 고대도(古代島)에 잠시 들렀던, 개신교회 선교사 귀츨라프(1803-1851년)가 또한 타고 있었던, 영국 국적의 배에 대하여 조사한 바를 읽을 수 있는데, 요즈음의 "아프리카"를, "利未亞"(리미아, 즉, 리비아)로 부르지 않고, "亞非利加"(아비리가)라고 부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wa_13207021_004 

(유관 왕조실론 한문 본문의 우리말 번역문 발췌 시작)

홍희근이 홍주의 고대도 뒷 바다에 정박한 영길리국의 배에 대해 보고하다

 

[...]

교역하고 있는 나라는 우라파국(友羅巴國)·법란서국(法蘭西國)·아임민랍국(阿壬民拉國)·자이마미국(者耳馬尾國)·대여송국(大呂宋國)·파이도사국(波耳都斯國)·아비리가국(亞非利加國)·식력국(寔力國)·영정도국(伶仃都國)·대청국(大淸國)이며, 교린(交隣)하는 나라는 아라사국(我羅斯國)·법란치국(法蘭治國)·하란국(荷蘭國)·파려사국(波呂斯國)이라 하고, 영국(英國)의 지방은 구라파(歐羅巴)에 있는데 사람을 귀히 여기고 있으며, 지방이 또 아미리가(亞未利加)에 있는데 그 역시 크고 좋은 땅이고, 또 서흔경(西忻慶)에도 있어 섬들이 많으며, 아비리가(亞非利加)의 극남단(極南端)에 있는 호망(好望)의 갑(甲)은 수위(垂圍)의 속지(屬地)이고, 또 태평양의 남쪽 바다에도 영국에 소속된 허다한 미개(未開)한 지방이 있으며, 그 끝은 아서아주(亞西亞州)에 있는데 섬들이 많고, 또 흔도사단(忻都斯担)·고위(古圍) 각 지방도 모두 영국의 판도(版圖)에 들어왔다고 하였습니다. 최근에 중국에서 영국으로 소속된 미개한 지방으로는 익능부(榏能埠) 마지반부(馬地班埠) 마랍가부(馬拉加埠)·선가파부두(先嘉陂埠頭)라 하였습니다.

[...]

(이상, 발췌 끝)

 

3-5-3-3, 그러나 일찌기 1583년에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마태오 리치 신부님(1552-1610년)에 의하여 마련된 "곤여만국전도"에서 이미 사용되기 시작하여 그 이후 수백년 동안 한문 문화권에서 그야말로 널리 사용되어 온 "利未亞"(리미아, 즉, 리비아)라는 단어 대신에, 1807년에 들어와 비로소 처음으로 중국 본토에 파견된 영국인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 이후 개신교회 측의 선교사들이 도입한 "亞非利加"(아비리가)라는 단어를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도 또한 사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시기는, 일본의 제국주의자들에 의하여, 중국 명나라 말기에 마태오 리치 신부님 등에 의하여 시작된 예수회 소속의 신부님들에 의하여 중국 본토에 전달되어 정착의 단계에 있었던 "신학문""실학"을 배척하고 밀어내는, 일본의 "명치유신" 세력들이 추진한, 소위 말하는, 일본제국주의자들 주도의 "신학문"이 우리나라의 세속의 공교육 학교들에서 가르쳐지기 시작한 이후의 어느 시점임이 분명하다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다음의 결론들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15) 한국교회사연구소가 소장 중인 우리말본 "성년광익"은, 우리나라의 문호가 개방되기 이전의 시점인 1865년경에 우리말로 번역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문호가 개방된 이후의 어느 시점인, 따라서 아무리 빠르더라도, 1890년대 말 혹은 1900년대 초쯤 혹은 그 이후의 시점에, 우리말로 번역되었을 것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3-5-4. 이번 항에서는,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 안에서 언제부터 이의창의 세례명이, 라틴어 세례명 "Venantius"의 우리말 음값인, "베난시오"라고 최초로 잘못 불리기 시작하였는지를, 연대순에 있어 거슬러 올라가면서, 고찰하도록 하겠습니다.
 

3-5-4-1. 다음에 발췌된 바로부터, 1923년에 초간된 "회쟝직분", 부록, 5월 18일"베난"라는 직역 음역(literal transliteration)의 영세명/세례명이 있음을 실증적으로(positively)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923_회장직분/성인의_본명_첨례일_in_회장직분_부록_제1-20쪽.pdf   

(발췌 시작)

(이상, 발췌 끝)

 

3-5-4-2. 그런데,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1910년에 발행된, "경향잡지", "보감" 210호 제334쪽에 실린, 1874년에 초간된 달레 신부님의 프랑스어본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사"를 들여다본 우리나라 조선에 선교사로 파견된 프랑스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의 신부님들에 의하여 마련된, 우리말본 "죠션셩교사긔" 본문 중에서, 1846년에 백령도 근처에서 김대건 신부님께서 체포될 당시의 상황을 기술하면서 복사 "베난"라는 언급이 나오는데,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김대건 신부님의 복사, 즉, 하인(domestique, servant)은, 이의창임이 이미 잘 알려져 있으므로, 따라서 "죠션셩교사긔"의 바로 이 부분에서, 아무런 출처/근거의 제시 없이, 이의창의 영세명/세례명이 "베난"이라고 이미 대단히 잘못 기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출처: http://zine.cbck.or.kr/gallery/view.asp?seq=55492&path=070413223410&page=6&flip=0 

(발췌 시작)

(이상, 발췌 끝)

 

3-5-4-3.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바로 위의 3-5-4-2항에 그 유관 부분이 발췌된 "죠션성교사긔"는, 우리나라 조선에 선교사로 파견된 프랑스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의 프랑스 출신 신부님들이, 선배 신부인 달레 신부님의 1874년 초간 프랑스어 원문의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사"를, 1885년부터 1901년의 기간 동안에, 우리말로 번역한 것임을 알 수 있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1434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집필자: 최석우 신부; 집필년도: 1997년]

 

[내용 추가 일자: 2020년 7월 23일]

3-5-4-4. 이번 항과 이어지는 항들에서는, 라틴어 세례명 "Venantius"의 우리말 발음으로서, "베난", 즉, "베시오"가 아니라, "베시ㅗ", 즉, "베시오"라는 오류의 발음이 최초로/처음으로 등장하는, 1884년 4월 29일자로 개최된 시복 재판(재판관: 뮈텔 신부; 서기: 로베르 신부), 회차 72, 김성서 요아김의 증언을, 가능한 한, 정밀하게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위의 제3-5-4-2항에 제시된 바가 실증적으로(positively) 입증하듯이, 1884년 봄 김성서 요아김시복 재판에서, 니의창에 대한 증언이 결코 아니고, 김대건 신부님에 대한 증언 중에 주변 인물들 중의 한 명을 언급하변서, 지나가는 말 중에, "신부 복사는 니베시ㅗ ㅣ라"[즉, "니 베시오이라"]라는 언급이 단 한 번 있고 난 후인, 1885년부터 1901년 사이에, 달레 신부님1874년 초간 프랑스어 원문의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사"가 우리나라 조선에 선교사로 파견된 프랑스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의 프랑스 출신 후배 신부님들에 의하여 우리말로 번역되기 시작하였고, 바로 이 우리말 번역본이, 위의 제3-5-4-2항에서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보감", 즉, 1910년에 발행된, "경향잡지", "보감"에, "죠션성교사긔"라는 제목으로 게재된 기사 중에 "베난", 즉, "베시오"라는 표기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아는 한, 처음으로/최초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선적으로, 다음의 사실들에 주목합니다. 특히, 김성서 본인이 자신의 세례명이 "요아"아니고 "요아김"이라고 서명하였음에 또한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i) 김성서 요아김의 증언은, 니의창에 대한 증언이 결코 아니고, 김대건 신부님과 임치백에 대한 증언입니다.

(ii) 김성서 요아김의 나이가 고령인 77세 입니다.

(iii) 김성서 요아김의 증언 중에는, 니의창이라는 이름 자체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iv) 다만, 김성서 요아김의 증언 중에, "신부 복사는 니베시ㅗ ㅣ라"[즉, "니 베시오이라"]라는 언급이 단 한 번, 그것도 지나가면서 말한 문장 중에, 등장할뿐입니다.

 

따라서, 김성서 요아김의 증언의 초점은 김대건 신부님이었지, 니의창이 전혀 아니었음은 명맥하다는 생각입니다. 왜 이 지적을 드리는가 하면, 사진을 찍을 때와 마찬가지로, 제한된 지면과 시간 안에서 제시되는 주변 인물들에 대한 서술은, 주된 인물, 즉, 초첨이 맞추어진 인물에 대한 서술과 비교하였을 때에, 100% 모든 것이 정확하지 않은 경우들이 더러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 기록된 여러 민족들에 대한 족보들을 들여다보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김성서 요아김의 인척관게와 신분에 관한 기록은, 예를 들어, "성 김대건 신부의 체포와 순교" 책에서 그 본문들을 발췌 인용한 후에 우리말 번역까지 제시된, "해서문첩록" "우포도청등록", 병오 5월 25일 그리고 1884년 봄 시복 재판 증언 등에 기록되어 있는데, 김대건 신부님의 체포와 심문 과정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혼인에 의한 인척관계를 고려할 때에, 우리날 조선의 신분 사회 안에서 김성서 요아김은, 중인 신분도 아니고, 그 아래 신분인 평민, 혹은 그 아래 신분인 자들이 가졌을 직업인, 뱃사람/뱃사공이었습니다.[주: 김대건 신부님의 심문 기록 중에서는 김성서 집안과 혼인에 의한 사돈 집안의 사람 임성록을 두고서, 그 신분이 천함을 나타내고자, 한자 낱글자 "천할 천" 표현을 사용한 한 부분도 있음]. 따라서, 그 성장한 집안 환경과 신분, 그리고 직업 등의 이유 때문에 상당히 무식하였을 김성서 요아김77세라는 고령의 나이였던 1884년 봄 시복 재판 증언에서 밝힌 바는, 자신이 기록해서 보관하고 있는 어떤 자료에 의존하였다기 보다는, 그야말로, 본인의 기억에 주로 의존하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특히 증언자 김성서 요아김1884년 봄 시복 재판 당시의 나이, 그 성장한 집안 환경과 신분, 그리고 직업 등을 포함하는 그 시기의 생활 여건 등을 고려할 때에, 매우 고령인 77세인 시기인데, 이렇게 나이가 많은 고령자가 자신의 기억에 의존하여 밝힌 증언의 내용 전부가 실체적 진리들 및 역사적 사실들과 100% 일치할 것이라고 교회사 연구자들이, 심지어 귀납적 추론(inductive reasongin)을 하는 과정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믿고 또 더 나아가 무작성 신뢰하여 자신의 판단의 근거/기준/잣대로 삼는 행위는, 비록 김성서 요아김이 당시에 증언 선서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판단 과정에 심각한 오류를 불러들일 수 있기 때문에, 상당한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20년 7월 31일] 

예를 들어, 김성서 요아김1884년 봄 시복 재판 회차 72 증언의 본문 중에서, 77세의 매우 고령인 김성서는 증언의 직접 대상자인 김대건 소년이 "... 10여 세에 중국에 들어가 신품 공부를 바친 후..."라고 증언하였는데, 여기서 "10여 세"라는 김대건 소년의 나이를 말한 부분은,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명백한 오류이며, 이러한 오류가 발생한 이유는 77세의 매우 고령인 김성서가 자신의 기억에만 주로 의존하여 증언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른 예로서, 김대건 신부님의 행적에 대하여 김성서 요아김보다도 훨씬 많은 분량의 증언을 한, 당시의 삶의 여건 등을 고려할 때에 역시 73세의 매우 고령인 김방지거[즉, 김 프란치스코]1884년 봄 시복 재판 증언들에 있어서도, 주로 본인의 기억에 의존하다보니 바로 위의 예제(example)에서 지적한 바와 거의 동일한 종류의, 역사적 사실들과 일치하지 않는, 명백한 오류들이 발생하였다는 생각이며, 이에 대하여서는, 예를 들어,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김학렬 신부님의 논문[제목: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덕골; 게재 학술지: 수원가톨릭대학교, 이성과 신앙, 제68호, 2020년 여름호]의 제395쪽, 각주 제110)번을 반드시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82.htm <----- 필독 권고

[이상, 2020년 7울 31일자 내용 추가 끝]


[내용 추가 일자: 2021년 10월 28일 02:00]

또다른 예로서, 1884년 봄 기해, 병오 순교자 시복 재판 회차72에서, 김성서는 자신의 기억에 의존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는데, "김대건이 십여 세에 중국에 들어갔다"는 바로 이 증언은 명백한 오류입니다. [게지자 주: 바로 아래에 발췌된 바에서, 1930년 이후로 사용하지 않고 있는 "아래 아" 와 자음 "ㅅㄷ"은 , 부득불, 필자가 "ㅏ" 와 "ㄸ"로 교체하였습니다]:


(발췌 시작)

회차72_십여_셰에_즁국에_드러가_원문_영인본.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오른쪽에서 두 번째 열(column)부터 읽도록 하라.

 

회차72_십여_셰에_즁국에_드러가.jpg

 

"김대건 안더릐아 탁덕은 됴션 사람으로셔 십여 세에 즁국에 드러가 신픔 공부를 하고 맛찬 후에 됴션으로 도라왓시나 신부 아니 계신 때라 진심갈력하야 위험을 불고하며 됴션 교우를 다리고 젹은 배를 타샤 샹해로 드러가 고 쥬교와 안 신부를 뫼시고 도로 됴션 배를 타고 나오신지라."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바로 위의 자료들을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추가로 제시하는 주된 이유에는,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당시의 시복 재판 과정 및 절차에 대하여 무지할 것"이라는 과도한 의심(inordinate doubt)을 해 온 일부 연구자들에게 전혀 그렇지 않음을 지적하기 위함이 또한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씀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즉, 교회사학을 전공하신 교회사학자이신 김학렬 신부님께서 들여다보시는 모든 유관 자료들은 또한 제가 반드시 다 들여다보고 필자가 그 진위 여부를 독립적 및 독자적으로 모두 확인해 왔으니, 부디 과도한 의심들은, 지금부터라도, 그만 두기 바랍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이 부탁과 정중한 요청을 듣고서도 그만두지 않았다가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은 필자에 대한 과도한 의심(inordinate doubt)을 해 온 당사자의 몫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수가 있겠는지요???

(이상, 게시자 주 끝)

 

그러므로, "시복 재판 중에 제시된 모든 증언들에는, 왜냐하면 시복 재판의 절차의 엄밀성 때문에, 아무런 오류가 있을 수 없다" 확신하는 것 자체가, 그러한 생각을 하는 교회사학 연구자 당사자에게 경솔한 판단(rash judgment) 끝에, 논리적으로, 오류의 한 종류를 야기할 수도 있음에, 반드시 주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상, 2021년 10월 28일자 내용 추가 끝]

 

다른 한편으로, 바로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은, 고령의 증언자들이 자신의 기억에 주로 의존할 경우에 당사자의 증언들 중에서 발생하기도 하는 이러한 종류의 오류의 문제점들뿐만이 아니라,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본글에서 그동안 교회사 연구자들 몇 명이 자신들의 판단의 근거로 삼았을 것으로 보이는 바의 진위를 실증적으로(positively) 확인한 바에 의하면, 실제로, 이들 몇 연구자들에 의한 과도한 귀납적 추론(inordinate inductively reasoning)에 따른 판단 과정에서 또다른 종류의 심각한 오류들이 발생하였다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위의 (i)의 증언과 관련하여 본인의 이름을 사인한 글씨를 잘 살펴보면, 한문이 아닌 한글로 본인의 세례명이, 요아아니고, 요아이라고 기록하였는데, 그러나, 기록과 관련하여 납득하기 힘든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즉, 김성서는 중국인 유방제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데, 따라서, 아무리 적게 잡더라도 50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후인 1884년 봄인 시복 재판 시점에, 본인의 세례명으로 알고 있었을 세례명인, 라틴어 "Joahchim"의 중국어 음역 단어인 "若亞敬"(약아경)중역(重譯) 음역(secondhand transliteration)인, 우리말 음값 발음 "요아"을 밝히는 대신에"요아"이라고 밝힐 수 있었는지, 납득하기 힘듭니다.

 

게시자 주 3-5-4-4: 라틴어 세례명 "Joahchim"의 중국어 음역 단어인 "若亞敬"(약아경)중역(重譯) 음역(secondhand transliteration)인, 우리말 음값 발음이 "요아"임은, 이어지는 제3-5-4-5항에서 실증적으로(positively) 입증/고증하도록 하겠다.

 

왜냐하면, 김성서가 자신의 세례명을 사용하기 시작한 시점은, 라틴어 원 세례명 "Joahchim"의 우리말 음값 발음인 "요아"을 김성서 본인이 알 수가 없었던 시기인, 프랑스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의 신부님들이 우리나라 조선에 들어오기 이전인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유방제 신부가 우리나라 조선에 머문 기간이 1834-1636년인 것은 널리 잘 알려져 있으며, 따라서 유방제 신부는 우리말도 제대로 익히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모방 신부유방제 신부가 심지어 우리말을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고 기록으로 남겨 증언하고 있음도 또한 널리 잘 알려져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유방제 신부에 대한 기록, 김대건 신부님의 심문 기록, 1884년 봄 회차 71 및 회차 72 시복 재판 등에 기록된 김성서 요아김에 대한 기록들 모두를 들여다 보더라도,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과의 접촉도 극히 제한되었을 유방제 신부가, 하필, 김성서를 만나서, 심지어 그에게 우리말로 "그대의 세례명의 정확한 발음 음값이 요아이다"라고 알려주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3-5-4-5. 이번 항에서는, 라틴어 세례명 "Joahchim"의 중국어 음역 단어인 "若亞敬"(약아경)중역(重譯) 음역(secondhand transliteration)인, 우리말 음값 발음이 "요아"임을 실증적으로(positively) 입증/고증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적으로, 필자가 아는 한, 중국어 발음에서 받침, 즉, 종성으로서 "ㅁ"을 중국인들이, 우리 한국인들처럼, "m"의 음값으로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요아킴" 혹은 "요아김" 이라고 발음한 것은 한국어 발음이지, 중국어 발음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다음에 발췌된 바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1765년에 출판된 "박통사신석언해", 권2에 의하면, 당시의 우리나라 조선에서 발음하였던 낱글자 "敬"의 중국어 발음은, "경"아니고"깅"이었습니다:

 

출처 1: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765_영조41년_역관용_중국어_교재/박통사신석언해_권1.htm  

출처 2: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765_영조41년_역관용_중국어_교재/박통사신석언해_권2.htm  

출처 3: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765_영조41년_역관용_중국어_교재/박통사신석언해_권3.htm 

(출처 2로부터 발췌 시작)

깅敬_경_in_1765_박통사신석언해_권2_제37b쪽.jpg

(이상, 발췌 끝)

[이상, 2020년 7월 23일자 내용 추가 끝]

 

[내용 추가 일자: 2020년 7월 30일] 

다른 한편으로,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1883년 경 이전의 어느 시점에 이르러, 천자문 낱글자들 중에서 북경 관화 발음이 바뀐 낱글자들을 파악할 수 있는데, 낱글자 "敬"(경)북경 관화(mandarin) 중국어 발음"깅"에서 "징"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83_화음계몽/화음정속변이.htm  

(발췌 시작)

깅_to_징敬_경_in_화음정속변이_in_1883_화음계몽_제69페이지.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왼쪽에서 네 번째 열(column)을 보라.

(이상, 발췌 끝)

 

그래서 내친 김에, 과연 언제쯤에 낱글자 "敬"(경)관화(mandarin) 중국어 발음이, 중국 본토 내에서, "깅"[혹은, 약간 더 센 음값인 "킹"]에서 "징"[혹은, 약간 더 센 음값인 "칭"]으로 바뀌었는지를 좀 더 정밀하게 들여다 보았더니, 다음과 같았습니다:

 

3-5-4-5-(i).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1874년에 그 초판이 출판된, 사우엘 웰즈 윌리암즈에 의하여 출판된 "5방원음에 따른 중국 언어 음절 사전"에 수록된 "ching"(칭)이라고 발음되는 한자 낱글자들을 파악할 수 있는데, 여기에 "敬"(경)이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합니다. 바로 아래의 출처에서, 비록 "King"라는 소제목 아래에 있는 낱글자들이나, 각 낱글자의 실제 발음이 "ching"(칭)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음에 주목하십시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12-1884_Samuel_Wells_Williams/ching칭_발음의_한자_낱글자들_in_1874(명치7년)_사무엘_웰즈_윌리암즈_A_syllabic_dictionary_of_the_Chinese_lan_5방원음에_따라_제403-407쪽.htm <----- 필히 확인하라  

 

3-5-4-5-(ii). 그리고 다음의 출처 주소에 접속하면, 로버트 모리슨의 사후인 1865년에 개정된 그의 "5거운부 중영사전"에서 발췌된 유관 부분을 확인할 수 있는데,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782-1834_로버트_모리슨/Ching칭_발음의_한자_낱글자들_in_1865_로버트_모리슨_5거운부_p2_ch01_자전_제617-623쪽.htm  

 

다음에 발췌된 바인 이 사전의 본분 직전 공지에서, 비록 이들 낱글자들이 "King"라는 소제목 아래에 나열되어 있기는 하나, 북경 관화에서 모음 e와 i 앞에 있는 K의 음값이 "ch"라고 밝히고 있어, 각 낱글자의 실제 북경 관화 발음이 "ching"(칭)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음에 주목하십시오:

 

(발췌 시작)

G_changed_into_Ng_in_1865_5거운부_p2_ch01_자전_제ix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제3항을 보라.

(이상, 발췌 끝)

 

1850-1864년: 중국 남부 장강 지역에서 "태평천국의 난"이 발생함.

 

3-5-4-5-(iii). 그러나, 다음은 1822년에 초간된 로버트 모리슨의 "중영사전"에서 발췌한 바인데, 낱글자 "敬"관화(mandarin) 발음"king"(킹)임을 실증적으로(positively)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발췌 시작)

King敬_경_in_1822_로버트_모리슨_자전_p1_ch02_41st-119th_Radical_제272쪽.jpg

(이상, 발췌 끝)

 

3-5-4-5-(iv).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1819년에 초간된 로버트 모리슨"5거운부"의에 수록된 "King"(킹)이라는 발음을 지닌 낱글자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여기에 "敬"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782-1834_로버트_모리슨/King킹_발음의_한자_낱글자들_in_1819_로버트_모리슨_5거운부_p2_ch01_자전_제466-471쪽.htm  

 

게시자 주 3-5-4-5-(iv): 바로 위의 출처에 발췌된 바의 첫 부분을 확대하여 살펴보면, 1583년과 그 이후에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신부님들에 의하여 마련된 필사 사전(Manuscript Dictionary)에 제시된 낱글자 "敬"관화(mandarin) 중국어 발음이 또한 "깅"[혹은, 약간 더 센 음값인 "킹"(King)]이었음을, 화인할 수 있습니다.

 

          이상, 위의 제3-5-4-5항에서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찰한 바로부터, 다음의 결론들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24) 중국 북경 관화 발음에서, 낱글자 "敬"의 중국어 음값이 "깅"[혹은, 약간 더 센 음값인 "킹"]에서 "징"[혹은, 약간 더 센 음값인 "칭"]으로 최초로/처음으로 바뀌기 시작한 시점은 중국 남부 장강 지역에서 발생한 "태평천국의 난" 기간 1850-1864년이었음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따라서, 바로 위의 (이 글의 결론 24)의 한 개의 따름 정리(a corollary)로서 다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25) 우리나라 조선의 역관들을 통하여, 바뀌어진 낱글자 "敬"의 북경 관화 중국어 음값이 우리나라 조선에 처음으로/최초로 전달된 시점은, 아무리 빠르더라도, "태평천국의 난" 기간 1850-1864년 이후의 시점이었음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따라서, 1765년에 출판된 "박통사신석언해", 권2 및 바로 위의 (이 글의 결로 25)의 한 개의 따름 정리로서, 다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26) 1836년보다 이전인 김성서가 세례를 받았을 시기에, 우리나라 조선의 역관들을 통하여 우리나라 조선에 전달된 라틴어 세례명 "Joachim"의 중국어 음역 단어인 "若亞敬"(약아경)중역(重譯) 음역(secondhand transliteration)인, 우리말 음값 발음은. 라틴어 세례명의 우리말 직역 음값인 "요아아니었고"요아"아니었고"요아"이었음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게시자 주 3-5-4-5: (1) 김성서1884년 4월시복 재판에 증인으로서 증언하면서 남긴 자필 서명에서 "요아"아닌, 그리고 자신이 어릴 적부터 오랜 기간에 걸쳐 사용해온 것이 분명한 원래 세례명인 "요아"도 아니고, "요아"을 남긴 것은 반드시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김성서1884년 4월시복 재판에 증인으로서 증언하기 전 어느 시점에, 우리나라 조선에 선교사로 파견된 프랑스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의 프랑스인 신부님으로부터 자신의 세례명의 정확한 음값이, "요아"아니고, "요아"인 것을 알게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2) 혹시라도, 만약에 1884년 봄에 개최된 김성서시복 재판 증언 바로 직전에, 당시에 우리나라 조선에 선교사로 파견된 프랑스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 신부님 한 분이, 김성서가 증언한 문장의 총 분량이 다른 증언자, 예를 들어, 김 방지거의 증언 분량에 비하여 상당히 적은 것에 비추어 볼 때에, 김성서의 경우에 있어 증언할 때에 무슨 내용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을 수도 있다고 보이는, 무식하고 또 대단히 연로한 77세의 노인인 김성서에게, 예를 들어, "당신의 라틴어 세례명의 정확한 음값은 "요아킴"이니, 이번에 증언할 때에, 여태까지 알고 있었던 "요아깅" 대신에, 당신의 세례명 "요아킴"이라고 증언하도록 하라"는 등의 주문을 하였다면, 이것은 커다란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증언자는 과거에 발생한 특정 사건을 직접 눈과 귀로 목격하거나 혹은 전해 들은 바에 대하여 기억하고 있는, 오로지 자신의 고유한 경험 등에 근거하여, 그리고, 특히, 자신의 고유한 자유 의지의 자유로운 판단에 따라, 증언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20년 8월 8일]

(3) 다른 한편으로,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말 성인전인 "쥬년첨례광익", 권4, 성부 안나 셩모의 모친 본문 중에 성모님의 친부의 이름이 "요아김"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그러나 왜냐하면 이 책이 활판으로 인쇄되어 출판된 시점이 1885년이기 때문에, 김성서1884년 봄 4월 회차 72 시복 재판에서 김대건 신부님에 대하여 증언할 당시에, 자신의 세례명이 "요아김"이라고 표기됨을 "쥬년첨례광익", 권4, 성부 안나 셩모의 모친 본문을 읽고서 알게 되는 것은, 명백하게, 불가능하였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85년판_쥬년첨례광익/권3_셩부_안나_셩모의_모친_제40쪽.pdf  

 

(4) 그러나,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1865년 첨례표(즉, 소위 말하는 을축년 첨례표)1866년 첨례표(즉, 소위 말하는 병인년 첨례표)를 읽을 수 있는데, 이들 둘 다에서 성모님의 친부 "Joachim"의 축일이 양력 8월 15일 몽소승천 대축일, 즉, 성모승천대축일 직후 주일임을 확인할 수 있으며, 특히, 그 이름이, "요아"아니고, "요아"아니고, 우리말로 직역 음역된 "요아"이라고 명기하고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65_첨례표/을축년_첨례표_약현성당_서소문_순교성지_소장.jpg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66_첨례표/병인년_첨례표_절두산_순교성지_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_소장.jpg  

 

(5) 77세의 대단히 연로한 김성서1884년 봄 4월 회차 72 시복 재판에서 김대건 신부님에 대하여 증언할 당시에, 자신의 세례명이 "요아김"이라고 수결한 것은, 바로 위의 제(4)항제(3)항에서 실증적으로 고찰한 바로부터, 다음과 같은, 추가적인, 합리적인 추론(reasonable presumptions)들을 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i) 그 직업이 뱃사람/배사공이었던 김성서가 한글을 읽을 줄 몰랐고, 다만 자신의 귀로써 직접 전해 들은 것들의 기억에 주로 의존하였을 것이다.

(ii) 1884년 봄 4월 회차 72 시복 재판에서 김대건 신부님에 대하여 증언하기 이전의 시기에 주변의 지인들이, 위의 제(4)항에서 말씀드린, 당시의 "첨례표"에 근거하여, 자신의 세례명이 "요아"이라고 말해주었을 것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릴 때 세례받을 때, 부모가 지어준, 가슴속 깊숙히 지니고 있었던, 자신의 세례명 "요아"의 영향 때문에, 이 "새로운" 이름 "요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만 "요아"까지 받아들였을 것이다.

 

(6)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가톨릭 보편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양력 8월 15일 직후 주일이 성모님의 친부 "Joachim"의 축일로 정해진 것이 1738년교황 클레멘트 12세의 결정에 의하여서였음을, 영어 "가톨릭대사전"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출처: https://www.newadvent.org/cathen/08406b.htm 

(발췌 시작)

St. Joachim

 

[...]

 

St. Joachim was honoured very early by the Greeks, who celebrate his feast on the day following the Blessed Virgin's birthday; the Latins were slow to admit it to their calendar, where it found place sometimes on 16 Sept. and sometimes on 9 Dec. Assigned by Julius II to 20 March, the solemnity was suppressed some fifty years later, restored by Gregory XV (1622), fixed by Clement XII (1738) on the Sunday after the Assumption[졸번역: 교황 클레멘트12세에 의하여 성모승천/몽소승천(양력 8월 15일) 직후 주일/일요일로 고정되었으며(1738년)], and finally raised to the rank of double of the second class by Leo XIII (1 Aug., 1879).

(이상, 발췌 및 일부 문장 우리말 번역 끝)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 기술된 이유 때문에, 그리고 위의 게시자 주 2-2-1-7에서 이미 지적하였듯이, 따라서 1856년 혹은 그 이후에 개정된, 양력 축일 날짜에 따른, 한문본 "성년광익"에 성 요아킴의 성인전 자체가 수록될 수 없었음에, 반드시, 주목하라.

 

왜냐하면, 당시의 이분의 축일인 양력 8월 15일 직후 주일이, 왜냐하면, 통상적으로, 한 해의 날 수인 365를 7로 나누면 나머지가 1이기 때문에, 매년 동일하지 않고, 거의 7년을 주기로, 바뀌기 때문이다.

 

따라서, 또한 우리말 성인전인, 한문본 "성년광익"이 그 번역 대본인, "쥬년첨례광익"에도 성 요아킴의 성인전 자체가 수록될 수 없었음에, 반드시, 주목하라.

 

(7) 따라서, 바로 위의 제(6)항에서 지적한 바에 따라,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개정판 "가톨릭대사전""주년첨례광익"에 대한 기술 중의 유관 오류는 바로잡아져야 할 것이다:

http://blog.daum.net/oyt12/3776 <----- 어느 단락의 서술[들]이 바로잡아져야 할 지, 필히 확인 요

[이상, 2020년 8월 8일자 내용 추가 끝]

(이상, 게시자 주 3-5-4-5 끝)

  

3-5-4-6. 이번 항에서는, 김성서 요아김이 증언 중에 김대건 신부의 행적에 대한 증언이 결코 아니고, 다만 지나가면서 말한, 신부의 복사의 세례명이 "베시ㅗ"라는 언급이 명백한 오류임을, 또다른 더 근원적인 점에서부터 지적하도록 하겠습니다.  

 

3-5-4-6-(i). 김성서 요아김1884년 봄 시복 재판 증언 중에서 특히, 서해 뱃길을 알아보기 위하여 백령도에 나갔다가 체포된 김대건 신부님의 당시 상황에 대하여 증언하는 과정에서, 주변 인물들을 언급하는 지나가는 말 중에서, 김대건 신부님의 매우 가까운 인물인 복사로서, 단 한 번, 언급된 "신부의 복사 니베란시ㅗ"를 두고서, 일단, 세례명 "베란시ㅗ"는 제외하고, 국내의 천주교회 교회사 연구자들이 여기서 언급된 "니 아무개""니의창"을 말하는 것이 틀림이 없다는 결론을, 귀납적 추론(inductive reasoning)의 한 결과로서, 도출하였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바로 이러한 귀납적 추론(inductive reasoning)을 수행하였던 1990년대 당시의 교회사 연구자들이 자신들의 판단의 근거들로 삼았던 바들에는, 예를 들어, 김대건 신부님의 심문 과정에서 밝혀져 기록으로 전해오고 있는, 특히, 니의창의 세례명과는 전적으로 무관한, 다음의 사실들이 포함될 것입니다:

 

(a) 김대건 부제님을 소공동 집에서 모시고 있었던 자는 니의창이었음,

(b) 백령도로 뱃길을 알아보기 위하여 김대건 신부님을 모시고 나갔던 자는 니의창이었음, 그리고 

(c) 김대건 신부님께서 중국에 보내는 한문 서한을 한문 문장에 능한 필경사로서 작성한 자는 니의창이었음. 등

 

왜냐하면, 1801년과 그 이후에 계속된 우리나라 조선의 참혹한 천주교 박해의 시기에, 자나깨나 1년 365일, 거소에서나 혹은 출타 중에, 우리나라 조선에 계신 신부님의 신변 보호가 당시의 복사의 주된 임무들에 포함됨은 매우 자명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5-4-6-(ii). 그러나, 바로 위의 제3-5-4-6-(i)항에서 말씀드린 귀납적 추론 행위가 있을 때에, 1990년대 당시의 교회사 연구자들이 자신들의 판단의 근거들로 삼았던 바들에는,

 

(D) 라틴어 세례명 "Venantius"의 우리말 직역 음역 세례명 "베시오"가, 니의창이 생존해 있었던 당시의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서 이미 세례명으로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그러나 이에 대한 실증적(positive) 입증/고증 없이, 따라서, 막연한 추정(presumption)이 포함되어 있었음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교 세례명은 한문 문화권의 고유한 문헌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자명한 이유 때문에, 니의창의 세례 시점에 우리나라 조선에 전달되었을 유관 한문본 천주교 문헌들을 반드시 정밀하게 들여다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김성서 요아킴이 김대건 신부님에 대하여, 대단히 참혹한 그리고 긴 세월 동안에 계속된 병인 박해 이후에 처음으로/최초로 개시된, 1884년 봄 시복 재판에서 증언할 당시에, 달레 신부님의 프랑스어본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사"제외하고, 과연 다른 어떠한 유관 한문본 천주교 문헌들을 당시의 시복 재판 관련자들이 제대로 찾아볼 수 있었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당시 시복 재판 시기에 달레 신부님의 프랑스어본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사"가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사 관련 자료로서 유일한 자료였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며, 특히, 이와 같이, 교회사학 연구자들이 이 유일한 자료에 의존하는 정도가 더 심할수록, 과도한 귀납적 주론(inordinate inductive reasoning)의 결과로서 오류의 결론들을 도출 할 가능성은 더 증가할 것임에, 반드시 주목하여야 할 것입니다.

 

3-5-4-6-(iii). [교회사 연구자들의 필독 권고]
그런데, 완전히 다른 한편으로,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사 연구자들 모두에게 다음의 질문을 드립니다:

 

질문 4: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북경에 처음으로 진입한 1644년부터 만주어가 기존의 관화(mandarin) 중국어 음값에 점차적으로 상당한 변화를 야기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특히 중국어 자음에 있어 이러한 변화가 반영되기에 충분한 시간이 경과하였다고 볼 수 있는, 1680년대 이후 1870년대까지, 첫 글자가 라틴어 자음 "V", 프랑스어 자음 "V", 영어 자음 "V" 등의 지중해 지역 알파벳 낱글자 "V"로 시작하는 지중해 지역 단어들의 경우에, 이 첫 글자 자음 "V"가 나타내는 음값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관화(mandarin) 중국어 음값이 있었는지요???(*) 

 

[내용 추가 일자: 2022년 10울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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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i) 바로 이 질문의 시작 부분에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 볼 수 있는, 1680년대 이후"를 필자가 구체적으로 추가한 이유는, 중국 북경 지역을 주로 출입하였던 우리나라 조선의 역관들이, 중국에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에, 바로 이러한 관화(mandarin) 중국어 음값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하여 마련하여, 우리나라 조선에서, 1690년과 그 이후에 출판된 중국어 교재들에서 이 질문에서 지적한 음값의 변화를 실증적으로(positively)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다음에 발췌된 바들을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라:

 

(1629년에 초간된 예수회 소속의 트리고우 신부님의 "서유이목자"에서 발췌 시작)

van萬_만_in_음운경위총국_in_1629_서유이목자_권1_제66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왼쪽에서 네 번째 열(column)을 보라. 한자 낱글자 "萬"의 중국어 음값이 "van"임에 주목하라.

(이상, 발췌 끝)

 

(1684년 이전에 필사된 "한서자전"으로부터 발췌 시작)

_in_1684_vuan_한서자전_제179쪽_제445쪽_[이후의_관화발음_wan].jpg

 

게시자 주: 한자 낱글자 "萬"의 중국어 음값이 "vuan"("부 + 안", 즉, 요즈음의 우리말 맞춤법 표기를 사용하자면, "봔"에 가까운 발음)임에 주목하라.

(이상, 발췌 끝)

 

(1690년에 우리나라 조선에서 초간된 "역어류해"로부터 발췌 시작)

완萬_만_in_1690_역어류해_제26a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왼쪽에서 두 번째 열(column)을 보라.

 

우선적으로, 1690년에 이르면 한자 낱글자 "萬"의 중국어 발음 음값이, 1629년의 음값 "van"으로부터, "완"으로 바뀌었으며,  더 나아가, (a)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1690년 당시의 한자 낱글자 "萬"의 중국어 발음 음값 "완"의 왼쪽에 우리말로 표기되어 있는 중국어 음값이, (b) 1684년 이전에 필사된 "한서자전"으로부터 발췌된 한자 낱글자 "萬"의 중국어 음값 "vuan"("부 + 안", 즉, 요즈음의 우리말 맞춤법 표기를 사용하자면, "봔"에 매우 가까운 발음)에 대응하는 음값이며, 특히 왼쪽에 우리말로 표기되어 있는 바로 이 중국어 음값에 있어, 자음 음값의 변화, 즉, 'ㅂ'(v) 대신에, 'ㅁ'(m)이 이미 반영되어 표기되었음에 또한 주목하라. 

(이상, 발췌 끝)

 

(ii) 바로 위의 제(i)항에서 고찰한 북경 관화 발음 음값의 변화는, 예를 들어,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로버트 모리슨1810대에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듯이, 남경 관화 발음의 음값의 변화를 야기하였음에 또한 반드시 주목하라:

 

출처 1: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782-1834_로버트_모리슨/1815-1823_자전_in_남경_방언.htm 

(발췌 시작)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782-1834_로버트_모리슨/북경_관화_발음(Tartar_Chinese_Dilect)의_남경_관화_침투에_대한_1815년_로버트_모리슨의_지적_제x쪽_in_자전_p1_ch01_1st_40th_Radical_1815.jpg <----- 여기를 클릭하여 읽도록 하라

(이상, 발췌 끝)

[이상, 2022년 10월 14일자 내용 추가 끝]

 

질문 4에 대한 답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아는 한, 없었습니다. 이 답변에 대한 자세한 답변은 별도의 글에서 드릴 생각을 하고 있으며, 혹시라도 필자가 드리는 이 짧은 답변에 이의가 있으신 국내의 교회사학 연구자들께서는, 직접 유관 사료들을 찾아보는 수고를 하도록 하십시오.

 

게시자 주 3-5-4-6-(iii): 더 나아가, "1700년대 초반 이후 1870년대까지, 첫 글자가 다음의 지중해 지역 6개의 알파벳 낱글자들로 시작하는 지중해 지역 단어들의 경우에, 이 첫 글자 각 자음이 나타내는 음값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관화(mandarin) 중국어 음값이 있었는지요???"라는 질문 5에 대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답변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아는 한, 바로 위의 질문 4에 대한 답변과 마찬가지로, 없었습니다" 입니다: "B", "D", "Q", "V", "X", "Z". 이 답변에 대한 자세한 답변은 또한 별도의 글에서 드릴 생각을 하고 있으며, 혹시라도 필자가 드리는 이 짧은 답변에 이의가 있으신 국내의 교회사학 연구자들께서는, 직접 유관 사료들을 찾아보는 수고를 하도록 하십시오.     

 

따라서, 질문 4에 대한 답변으로부터, 다음의 결론들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27) 만약에 1990년대에 교회사학 연구자들이 위의 질문 4에 대한 답변을 알았더라면(가정법 과거 완료), 위의 제3-4-1항에서 지적한 연구 행위 중의 작위적/자의적/의도적 조작 행위, 즉, (i) "Véran" 중의 낱글자 "r""n"으로 교체하고 그리고 심지어 (ii) 이 표현 "Véran"의 끝부분에 낱글자 "t"이 임의적으로/작위적으로/의도적으로 추가하여, 최종적으로 "Vénant"로 판독하는 행위를 결코 시도조차 하지 못하였을 것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이 글의 결론 28) 만약에 1880-1890년대에 우리나라 조선에 들어와 선교사로서 활동하셨던 프랑스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의 프랑스인 신부님들께서 위의 질문 4에 대한 답변을 알았더라면(가정법 과거 완료), 위의 제3-5-4-2항에서 지적한 오류는, 즉, 달레 신부님의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사"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방생하게 된, 프랑스어 세례명 "Véran""베난"로 번역하는 오류는, 결코 발생할 수가 없었을 것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이 글의 결론 29) 만약에 1884년대에 봄에 개최된 회차 72 시복 재판을 주관한 재판관 뮈텔 신부님과 서기 로베르 신부님께서 위의 질문 4에 대한 답변을 알았더라면(가정법 과거 완료), 증언자인 김성서 요아김의 증언에 대하여, 김성서의 자필 서명에 곧바로 이어서, 또한 자필 서명들을 하지 않으셨을 것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이 글의 결론 30) 만약에 1884년대에 봄에 개최된 회차 72 시복 재판에서 증언한 77세의 나이 많은 노인인 김성서 요아김에게 니의창의 세례명이 "베시ㅗ"라고 기억을 상기시켜준 나이 50세 이상의 평신도 신자가 있었고 그리고 만약에 그자가 또한 위의 질문 4에 대한 답변을 알았더라면(가정법 과거 완료), 결코 김성서의 기억을 잘못 상기시키는 행위를 하지 못하였을 것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왜냐하면, 니의창이 세례를 받을 때에 주어졌을 세례명의 우리말 음값은, 1583년과 그 이후에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신부님들의 적응주의 문서 선교 방식에 따라 마련되어 우리나라 조선에 전달된, 드 메아/마이야 신부님에 의하여 저술되어 1738년에 초간된 "성년광익"주니오르 디아스 신부님에 의하여 저술되어 1636-1642년에 초간된 "천주강생성경직해" 등에서 등장하고 있는 성인들의 이름들, 즉, 중국어로 음역 번역된 이분들의 이름들 중의 한 개의 중역(重譯) 음역(secondhand transliteration)인 우리말 음값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의 결론 31) 만약에 1884년대에 봄에 개최된 회차 72 시복 재판에서 김대건 신부님에 대하여 증언한 김성서 요아김 자신이 위의 질문 4에 대한 답변을 알았더라면(가정법 과거 완료), 증언자인 김성서 요아김은, 비록 지나가는 말 중이라고 하더라도, "신부의 복사 니베시ㅗ"라는 언급을 결코 하지 못하였을 것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세례명 "요아깅"과 마찬가지로, 니의창이 세례를 받을 때에 주어졌을 세례명의 우리말 음값은, 1583년과 그 이후에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신부님들의 적응주의 문서 선교 방식에 따라 마련되어 우리나라 조선에 전달된, 드 메아/마이야 신부님에 의하여 저술되어 1738년에 초간된 "성년광익"주니오르 디아스 신부님에 의하여 저술되어 1636-1642년에 초간된 "천주강생성경직해" 등에서 등장하고 있는 성인들의 이름, 즉, 중국어로 음역 번역된 이분들의 이름들 중의 한 개의 중역(重譯) 음역(secondhand transliteration)인 우리말 음값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의 결론 32) 만약에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사" 를 프랑스어로 저술하여 1784년에 출판한 달레 신부님께서 위의 질문 4에 대한 답변을 알았더라면(가정법 과거 완료), 위의 제3-4항에 발췌된 바와 같이, 자신의 책 중에서 결코 "Véran"이라는 프랑스어 세례명을 명기하지 못하였을 것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이 글의 결론 33) 위의 제3-4-4항에서 이미 말씀드린, 1847년 11월에 발행된, "전교회연보"(APF, The Annales de la Popagation de la Foi)에 실린, 페레올 주교님의 프랑스어 서한에서 "Véran"이라는 프랑스어 세례명이 등장하는 두 개의 문장들이 삭제된 또다른, 독립적인(independent), 이유로서, 이 연보의 편집자들 중에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중국에 상당 기간 머물다보니 중국어에 능통한 프랑스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의 신부들로서 위의 질문 4에 대한 답변을 알고 계신 분들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음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이 글의 결론 34) 만약에 김대건 신부님에 의하여 라틴어로 기술된 제20번째 서한(두 번째 옥중 서한)을 읽고서 판독한 후에 1846년 늦가을에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중국 마카오 소재 파리 외방선교회 본부로 발송한 페레올 주교님께서 위의 질문 4에 대한 답변을 알았더라면(가정법 과거 완료), 위의 제3-4-2항에 발췌된 바와 같이, 자신의 서한 중에서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익히 잘 알고 있는 "Véran"이라는 프랑스 프로방스 지역의 프랑스어 세례명을 결코 명기하지 못하였을 것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이 글의 결론 35) 왜냐하면, 예를 들어, 홍역, 천연두 등의 역병/전염병들에 의한 유아들의 사망률이 매우 높았던 과거의 시절에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및 전통에 따라,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원죄(the original sin)의 죄사함을 받게 하고자, 태어나자마자 해당 교우촌의 공소회장으로부터 1813년 경에 출생한 니의창이 어린 나이에 세례를 받았을 시점은(*1) 프랑스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의 선교사들이 우리나라 조선에 입국하기 이전의 시기이기 때문에, 니의창에게 주어졌을 세례명의 우리말 음값은, 1583년과 그 이후에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신부님들의 적응주의 문서 선교 방식에 따라 마련되어 우리나라 조선에 전달된, 드 메아/마이야 신부님에 의하여 저술되어 1738년에 초간된 성인전인 "성년광익"주니오르 디아스 신부님에 의하여 저술되어 1636-1642년에 초간된 "천주강생성경직해" 등에서 등장하고 있는 그리스도교 성인들의 이름, 즉, 중국어로 음역 번역된 이분들의 이름들 중의 한 개의 중역 음역(secondhand transliteration)인 우리말 음값이었기 때문에, 위의 질문 4에 대한 답변에 제시된 바에 의하여, 결코 라틴어 세례명 "Venantius"의 우리말 직역 음역 음값인 "베난시오"일 수가 없었음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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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시자 주: (1) 유아세례(infant baptism)를 적극 장려하는 내용은 우리나라 조선의 신앙의 선조들 첫 세대에게도 전달되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이벽 성조"성교요지", 17,1-8에 명확하게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776.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784.htm <----- 필독 권고

[이상, 2020년 7월 30일자 내용 추가 끝]

 

[내용 추가 일자: 2020년 8월 5일] 

(2) 위의 게시자 주 2-2-1-5을 꼭 읽도록 하라.

[이상, 2020년 8월 5일자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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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위의 사료 분석의 결과들

 

지금까지 본글에서 실증적으로 고할한 사료 분석의 결과들로서, 다음의 결론들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4-1. (이 글의 결론 16) "베난시오"라는 우리말로 직역 음역(literal transliteration)이 된 영세명/세례명이 우리나라 천주교회 안에 처음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시점은, (i) 아무리 빠르더라도, 직역 음역(literal transliteration)이 된 라틴어 영세명/세례명들이 사용되고 있는, 우리말본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가 처음으로 도입되어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시점인, 따라서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 안에 한글 전용이 시작된 시점인, 1864년경 이후이었을 것임을 [혹은, 실제적으로 거의 희박할 것이지만, 더 엄밀하게, 프랑스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의 신부님들이 우리나라 조선에 처음으로 입국한 시점인 1836년 이후이었을 것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4-2. 우리나라 천주교회의 박해사 관련 문헌들을 참조할 때에, 본글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와 관련하여, 달레 신부님의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사"의 프랑스어 원문 초간이 1874년에 발행된 이후의 시기에 우리나라 천주교회 안에서 기록으로 남겨진, 예를 들어, "... 증언록" 혹은 "... 재판 기록" 등의 문헌들은, 바로 이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사" 본문 중에서 언급되고 있는 "Véran"이라는 표현을 읽은 국내의 천주교 신자(주: 여기에는,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파견된 프랑스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의 신부님들도 포함됨)들이, (i) "저의 하인 베랑"으로 이해하여, 예를 들어, "마당"에서 보듯이, 하인/종을 나타내는 순수한 우리말 접미사인 "-쇠""베란"이라는 결코 우리말이 아닌 한 개의 표현의 끝부분에 덧붙여, "베란쇠" 등의, 우리말도 아니고 서양말도 아닌, 정체불명의 이상한 표현을 만들어내어 사용하기 시작하였거나, 혹은 (ii) "Véran"이 "베난시오"를 말한다고 잘못 판단하여, 따라서, 달레 신부님의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사"에 기술된 바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 안의 천주교 신자 증언자들이, 예를 들어, (i) "이의창의 영세명/세례명이 "베란"이다" 혹은 (ii) "이의창의 영세명/세례명이 "베란"이다" 등으로 잘못 증언하였을 수도 있거나, 혹은 (iii) 증언자들의 증언이 기록되는 과정에서 기록을 담당한 분에 의하여 "베란쇠" 혹은 "베란" 혹은 "베란"  등으로 잘못 기록되었을 수도 있음에, 또한 반드시 주목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지금 지적한 바에 근거하여, 위의 제3-4항의 마지막 단락에서 필자가 구체적으로 지적한 바가 발생하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또한 하게 됩니다.

 

따라서. 다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17) 이의창의 영세명/세례명에 관한 한, 달레 신부님의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사"의 프랑스어 원문 초간이 발행된 1874년 이후에 제시된 우리나라 천주교회 안에서 기록으로 남겨진 "... 증언록" 혹은 "... 재판 기록" 등에서, 우리나라 조선에 프랑스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의 신부님들이 처음으로 입국한 시기인 1836년 이전에 [유아] 세례를 받은 것이 분명한 이의창의 영세명/세례명"베란쇠" 혹은 "베란" 혹은 "베란" 등이라고 언급된 것은 참고는 하되, 그러나 판단의 결정적인 근거 자료로 삼아서는 아니 됨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 안에서, 1874년에 초간된 프랑스어 원문의 달레 신부님의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사"가 우리나라 조선에 전달되기 전인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의 기간 동안에, 라틴어 세례명 "Venantius"에 대응하는 한자 음역 세례명 "문남작"의 우리말로의 중역 음역(secondhand transliteration)인 우리말 음값 세례명의 사용이 없었을 것임이, 위의 제2-1항과 위의 3-3에서 실증적으로(positively) 지적된 바들에 의하여, 강력하게 뒷받침되기 떄문입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20년 7월 30일]

4-3. 이제, (이 글의 결론 18)이 도출된 위의 제2-2항에서부터 (이 글의 결론 35)에 이르기까지, 별도의 시간을 내어서라도, "반드시 필독하도록" 하십시오. 아마도 교회사 연구자로서의 사고의 폭과 깊이가, 그리 어렵지 않게, 넓어지고 깊어질 수도 있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특히, 서해 뱃길을 알아보고자 김대건 신부님을 모시고 백령도에 나갔던 김대건 신부님의 복사 니의창이 사라진 이후의 시기에, 왜냐하면, 왜냐하면 1845년과 이 해를 전후하는 수 년간에 걸쳐 그가 김대건 신부님의 복사였기 때문에 천주를 향하고 또 가까이 다가가 섬기기를 마다하는 그의 지극한 신앙심(faith)에 미루어 보아, 혹시라도 그가, 수년 간에 걸쳐 가까운 교우들이었던 이재의현석문 그리고 자신이 그러하였듯이, 또다시 자신의 이름을 바꾸고서, 참혹한 박해 시절에 온갖 위험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사목에 전념하시는 신부님(들)을 지척에서 도와드리는 신앙 생활을 계속하였을 수도 있다는 합리적인 추정(reasonable presumption)을 할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나라 천주교회사 연구자는 한 분도 계시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본글의 시작 부분의 게시자 주 (2)에서 안내해 드린 연구 방법을 처음으로/최초로 도입하고 지속적으로 개선하면서 현재까지 사용 중인 한 명의 평신도로서, "반드시 필독하시라"는 권고를 강력히 드립니다.

[이상, 2020년 7월 30일자 내용 추가 끝]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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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업에 소요된 시간: 약 300시간 (여기에는 유관 사료들의 발굴 및 분석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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