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성 김대건 신부 등의 복사였던 이의창李宜敞은 치명일기 제354항 및 치명사적 권6 제45쪽 니 량 의셩 그리고 우포도청등록 29책 제836쪽 李秉敎와 동일 인물이다1242_ 진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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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3 ㅣ No.2040

 

1. 들어가면서

 

1-1.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김대건 신부님께서 갬재복 부제 시절부터 백령도 근처에서 체포되어 순교하실 때까지의 기간 동안에, 즉, 김대건 신부님께서 김재복 부제 시절에 우리나라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실 때부터, 신품을 받으신 중국 상해 방문 기간을 포함하여, 그 이후에 우리나라 조선에 재 입국한 후에, 우리나라 조선으로 입국하고자 하는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의 신부님들들의 입국 경로로 사용하기 위한, 중국 강남 지역과 우리나라 서해안 지역 사이의 뱃길을 확보하기 위하여 백령도 근처에 나갔다가 체포되실 때까지, 이승훈의 손자인 이재의, 그리고 현석문과 함께, 김재복 부제/김대건 신부님의 적극 협조자/복사로서, 줄곧 이분의 최측근 인물이었던 이의창의 세례명이 결코 "베난시오"일 수가 없음실증적으로(positively) 입증/고증하는 졸글[제목: 성 김대건 신부 등의 복사였던 이의창李宜敞의 영세명/세례명은 직역 음역인 베난시오(Venantius)일 수가 없다]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39.htm

 

1-2. 다른 한편으로, 김학렬 신부님께서는 최근에 들어와 이병교 레오가 이름을 바꾼 이의창임을 입증하는 글을, (i) 기존의 이의창 집안의 족보들, (ii) 이원순 교수가 제시한 남상철 집안의 족보, (iii) 병인박해 관련 심문 기록들, (iv) 뮈텔 주교님의 일기 등에 근거하여, 작성 중에 있으십니다.

 

1-3. 그런데 바로 위의 제1-2항에서 말씀드린 연구 작업이 시작된 배경을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즉, 다음의 주소들에 있는 세 편의 졸글/논문들을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작성하여 공개한 직후에,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90.htm <----- 필독 권고

[제목: 성교요지 2,15의 방개方蓋 라는 단어의 출처는 중국이 아니고 우리나라 조선의 악학궤범(樂學軌範, 1493년)이며 그 의미는 이 문헌 중의 그림(건고建鼓)이 나타내는 바이다; 게시일자: 2019-05-30]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91.htm <----- 필독 권고

[제목: 세 번(1863년, 1897년, 1910년)에 걸쳐 중국 상해에서 마틴(Martin)에 의하여 출판된 책 The Analytical Reader의 본문들의 비교 분석과 그 결과들; 게시일자: 2019-06-18]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96.htm <----- 필독 권고

[제목: 성교요지의 외유(外遊)(중국, 미국 등)의 실증적 증거(positive evidences)들; 게시일자: 2019-07-15]

 

교회사학 전공자로서 연구 활동에 전념 중인 김학렬 신부님께 이의창의 당시의 국내의 행적을 매우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아 주실 것을 필자가 간곡하게 요청드렸는데, 바로 위의 제1-2항에서 말씀드린 바에서 이의창에 관한 부분은, 이 요청에 적극적으로 부응하여, 작년 여름 이후부터 작금에 이르기까지 김학렬 신부님께서 수행한 연구 작업의 한 결과입니다. 실증적 입증/고증의 근거들인 유관 사료들의 발굴과 기존의 연구자들의 논문들에 대한 정밀한 비교/검토 및 분석에 엄청난 수고를 해 주신 김학렬 신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4. 본글에서는, 위의 제1-1항에서 안내해 드린 필자의 졸글/논문[제목: 성 김대건 신부 등의 복사였던 이의창李宜敞의 영세명/세례명은 직역 음역인 베난시오(Venantius)일 수가 없다; 게시일자: 2020-04-01]에 이어지는, 그러나 논증의 과정에 있어, 비록 김학렬 신부님께서 들여다본 동일한 유관 사료들을 들여다보더라도, 위의 제1-2항에서 안내해 드린 김학렬 신부님의 고증/입증 방법과는 다른, 독립적인, 접근 방식/방법으로, 그동안 국내의 교회사학 연구자들에 의하여 "치명일기" 354번 니 량 의셩이라고 알려진 이병교가, 사실은, 이승훈의 손자인 이재의, 그리고 현석문처럼, 이름을 바꾼 이의창임을, 김학렬 신부님께서 찾아주신 유관 사료들과 필자가 그동안 들여다본 유관 사료들에 근거하여, 실증적으로 입증/고증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또한 이의창의 수호 성인인 聖良(성량, Saint Leo)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에 대하여서 실증(實證)적으로 규명(糾明)하고자 합니다.

 

2. 유관 사료 분석 I

 

우선적으로, 이번 항에서 집중적으로 분석하고자 하는, 필자의 접근 방식/방법에 대하여 지금 생각하고 있는 바를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i) 1801년과 그 이후에 지속적으로 박해들이 발생해 온 참으로 어려운 여건들 속에서, 김재복 부제/김대건 신부님의 활동 시기부터 그 이후에 병인박해 시점에 이르기까지, 김재복 부제/김대건 신부님과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입국하신 프랑스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의 신부님들의 복사로서 활동한 최측근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포괄적 고찰; 

 

(II) 이승훈의 손자인 이재의, 그리고 현석문, 그리고 이의창에 있어, 특히 현석문과 이의창의 관계를 나타내는 결정적인 문구가 담긴 유관 문헌들에 대한 고찰;

 

(iii) 혼인 관계를 포함하는 형성된 친인척 인간 관계들에 있어, 이의창 집안 족보들, 남상철 집안 족보들, 그리고 이재의 집안 족보들이 제공하는 정보들이 총체적으로 제시하고 가리키는 방향성에 대한 고찰.

 

게시자 주: 이번 봄에 국내에 창궐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때문에, 생업과 관련하여, 이번 봄학기에 필자가 강의하는 모든 과목들을 동영상으로 녹화하여 제공하여야 하는 관계로, 본글의 작성이 예상밖으로 늦어지고 있습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23년 6월 26맇] 

2-1. 우선적으로, "일성록",병오 윤5월 23일자 문초 기록에는 이재영, 즉, 현석문의 자호(字號)인 호(號, 허물없이 쓰기 위하여 지은 이름)가 승(昇)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게시자 주: 김대건, 제126쪽에서, 자호(字號)는 자호(自號, 자신을 일컬을 때 사용하는 호칭)의 오기(誤記)이라는 생각임.

 

그리고 "우포청 등록", 기묘 4월 초1일자 문초 기록에는 이병교, 즉, 이 량의 자(字)가 경(敬) 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 두 사람의 호(號)에서 낱글자 (덕)이 공통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우연적일(accidental)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으나, 그러나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이들이 당시의 방인 사제들 혹은, 특히 조선인들과는 확실하게 다른, 높이 솟은 커다란 코, 피부 색깔, 눈동자 색깔, 머리 색깔, 그리고 체취, 즉, 몸에서 나는 냄새 등의 매우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자칫 발각되면 목숨을 잃게 되는, 서양인 신부님들을 지척에서 모시는 '양반 행세를 하는 복사'로서의 소임을 충실하게 수행하기 위하여, 비록 나이가 좀 차이남에도 불구하고, 형제적 우의(友誼, brotherly friendship)를 항구히 다짐하고자 동일한 낱글자 (덕)를 사용하여 각자의 호를 지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2-1-1. 우선적으로, 그 당시에 양반 혹은 중인 집안의 후손들로서 그 당시에 우리나라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하셨던 신부님들의 복사로 활동한, 가장 오래된 교우님들, 즉, 구(舊) 교우인 분들을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즉, 현재까지 알려진 역사적 사실들에 의하면, 

 

(i) 김대건 신부님의 복사인 이의창(1814-?년),

(ii) 현석문(1797-1846년),

(iii) 최형(1814-1866년), 그리고

(iv) 이재의(1808-1868년)

 

이렇게 네 분들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이의창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분들께서는 1868년에 이르면 모두 순교하고 이 세상에 계시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2-1-2.

2-1-2-1. 그리고『치명일기 354번 니 량 의셩에 대한 기술로부터, "이 량(良)""이병교"와 동일 인물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1-2-2. 그리고 다음은,『병인치명사적』 6권 (1925.11.20.), 46쪽에서 발췌 한 바입니다:

 

(발췌 시작)

[...] 안 주교(즉 다블뤼)ㅣ 처음 오실 제 복사하고, 여러 신부의 복사하다가, [...]

(이상, 발췌 끝)

 

따라서, 이병교다블뤼 신부/주교님의 복사를 하였다는 바로 이 증언은, 다음에 발췌된 당시의 우리나라 조선에서 사목하신 서양인 선교사들의 복사의 기준/자격을 정의한(defined) 다블뤼 신부/주교님의 기록들에 의하여, 이병교가 양반 집안 출신임과 그가 다블뤼 신부님의 복사를 처음으로 시작한 시기가, 아무리 늦더라도, 1848년 9월 이전이고, 그리고, 아무리 빠르더라도, 다블뤼 신부님이, 김대건 신부님과 페레올 주교님과 함께 라파엘호 배를 타고 서해를 건너, 우리나라 조선의 서해안 강경 지역에 도착한 날짜인 1845년 10월 12일 이후임을 알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i) 출처: 샤를 살몽,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 정현명 옮김, 대전가톨릭대학출판부, 2006, 279.

(발췌 시작)

“우리는 어디든지 양반 행세를 하며 다녔어. 우리가 가는 주막마다 방을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을 몰아내었지. […] 이렇게 하는 것이 불행한 만남을 피하고,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인걸. […] 조선의 양반들이 평소에 하는 대로 했어.”

(이상, 발췌 끝)

 

(ii) 출처: 샤를르 달레 원저,『한국천주교회사』 하, 안응렬 최석우 역주, 분도출판사, 1980, 173~175.

(발췌 시작)

“우리가 고통을 받는 것은 좀 능력이 있는 신자들이 부족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와 동행하기 위한 복사(服事)들을 두기도 힘이 듭니다. 사실 아무 복사나 신부를 인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수단이 있고 학식이 있고, 슬기롭고 이 일에 훈련을 쌓은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지금은 전혀 없다시피 합니다. 이런 사람 없이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어떤 주막에 발을 들여놓을 수도 없고, 조금만 길을 가려 해도 넘을 수 없는 장애물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특히 회장(會長, 즉 Cathechista)이 부족합니다. […] 서울에서는 신자들이 서로 알지 못한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그들은 박해 중에 밀고 되는 것을 피하려고 할 수 있는 대로 숨어 삽니다. 그래서 헌신적인 2,3명의 중개로만 서로 연락할 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때는 일체의 연락이 본의 아니게 끊어지게 됩니다.”

(이상, 발췌 끝)

 

(iii) 다음은, 출처: 다블뤼 문서 제8권, "다블뤼 주교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1848년 9월, 제111쪽에서 발췌 한 바인데, 바로 위의 제(ii)항에 발췌된 바의 원 출처일 것이라는 생각입다:

 

(발췌 시작)

특히 조금 유능한 교우들이 부족한 것이 무척 아쉽습니다. 그런 교우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어서 우리와 동반할 복사를 찾기도 무척 어렵습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부모님께는 생소하게 들리겠지만 실정이 정말 그러합니다. 복사를 구했다고 해도 우리를 안내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유능하고 숙달된 사람이 필요하니까요. 그런데 교우들 가운데 그런 사람이 전적으로 부족한 상황입니다. 그와 같은 조건을 갖춘 남자가 없으면 우리는 주막에 발조차 들여 놓을 수가 없으니, 그렇게 되면 우리가 어떻게 먼 길을 나서겠으며 또 가까운 거리일지라도 거기에 매우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데 어떻게 그 길을 갈 수 있겠어요. 한마디로 이 나라에서 여행하려면 그에 합당한 동반자를 얻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우리에게 우리가 찾는 몇 사람을 보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거기에다 회장들도요! 회장이라고 하니까 부모님은 우리 프랑스 지방에서 회장이나 설교자 역할을 맡고 있는 시골 세력가를 떠올리시겠지만, 이곳의 우리 회장을 그렇게 짐작하신다면 부모님이 이곳의 상황을 잘 파악하지 못하신 겁니다. 그 계층의 출신이 몇 명 정도 있기는 하지만, 그 숫자가 극히 적어요. 현재 상황으로는 교육을 받은 계층에서 입교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좀 괜찮은 교우들은 거의 모두가 구 교우들인데 그나마 박해가 일어날 때마다 그들 중 몇 명을 앗아가고 그들의 빈자리는 메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상, 발췌 끝)   

 

          다른 한편으로, 특히 위의 제2-1-1항에서 말씀드린 바에 관련하여, 이어지는 제2-1-3항, 2-1-4항, 2-1-5항, 그리고 제2-1-6항에 제시된 매우 중요한 사료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2-1-3. 남상철 집안의 족보, 남상철의 묘지명, 그리고 1893년 10월 30-31일 뮈텔 주교의 일기 등의 추가적 사료들 덕택으로, (i) 이의창의 광주 이씨 족보상의 친자 "이현교"(b1)남상철의 외조부이고, 그리고 남상철의 외조부는 또한 "이경빈"(b2)으로도 불리었으며, 따라서 남상철의 외조부로서 "이현교"(b1)"이경빈"(b2)은 사실은 동일 인물이며, 그리고 남상철의 외조부의 세례명이 "요한"임 등이 명확하게 확인되는데, 그 이유는 친가 및 외가 족보 상의 당사자의 친부와 친모 그리고 친조부와 친외조부 등은 각각 단 한 분뿐이기 때문에, 이들 (b1)(b2) 두 사람이 정확하게 동일 인물임이 실증적으로 입증됨을 또한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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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바로 이 부분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시청할 수 있는, 2021.10.28.(목), 천주교 수원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 주최의 제7차 심포지엄에서 김학렬 신부님께서 발표한 연구 논문[제목: 성 김대건 신부님의 복사 이의창 레오 순교자] 동영상 중의 필자의 요약을 또한 꼭 참조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296.htm <----- 필청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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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ii) 우포도청 등록 제29책 기묘년 4월 초1일 문초 기록에 의하면 이병교(자 덕경; 사호 량이)의 아들의 이름은 이경빈(景彬)(a)임을 알 수 있고 그리고 병인치명사적 6권 50쪽에 의하면 그(즉, 니량, 즉, 이병교)의 아들의 세례명은 요안(즉, 요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바로 위의 제(i)항에서 언급된 이경빈(a)과 바로 위의 제(ii)항에서 언급된 이경빈(b2) 이들 두 사람의 세례명 및 한자 성명 둘 다가 정확하게 동일함에 주목하십시오.

 

게시자 주 2-1-3: 그러나, 왜냐하면 이경빈(a)이경빈(b2)의 세례명 및 한자 성명 이들 둘 다가 정확하게 돟일하기는 하나, 그러나 혹시라도 이들이 동명이인일 수도 있기 때문에, 오로지 바로 위의 제2-1-3항에서 실증적으로 고찰한 바만으로부터 그들의 친부들인 이의창이병교가 정확하게 동일한 인물이라는 결론은 섣불리 도출할 수 없음에 반드시 주목하라. 그리고 바로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필자가 어떠한 내용의 입증(첫 번째 입증)을 기 제시하였는지는 바로 위의 게시자 주에 안내된 연구 발표 동영상을 꼭 청취하도록 하라.

 

2-1-4. 그런데

(A) 이의창이병교 이들 둘 다는, 많아야, 한  살 차이의 동년배이고[출처: (i) 포도청에서 김대건 신부의 서른 다섯 번째 진술: 이의창의 나이는 33세쯤(즉, 1814년생); (ii) 『우포도청등록』 29책 836: 이병교는 1879년에 67세(=1813생).; 『치명일기』 354, 이량 의셩.: 1879년에 65세], 그리고 또한

(B) 신유박해(1801년)로부터 13년이 경과한 1813년 혹은 1814년에 태어난 이병교이의창 각각은 한성(漢城) 서소문(소의문) 바깥 동네인 차동(車洞)[출처:『우포도청등록』 29책, 836]과 소의문 안쪽 동네인 확동(確洞)/확교(確橋)/확교동(確橋洞)[출처: 이기양과 그 자손들의 한성 본가(本家)는, (ㄱ) 추국일기, 신유년 3월 8일자, 282쪽, 上右 9열에서 확동(確洞)이라고 불리고 있고, (ㄴ) 사학징의 권2 203쪽(이총억 문초기록, 3월 8일자) 및 370쪽에서 확교(確橋)이라고 불리고 있는데, 이 동네는 또한 확교동(確橋洞)으로도 불렸음] 출신으로,(*1) 본가로부터 분가/이사 등을 고려할 때에, 이들 두 사람들은 동일한 소의문(서소문) 인접(도보로 10분 이내) 지역 출신입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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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시자 주: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근거 사료들을 들여다볼 수 있다:

 

출처 1: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01_추국일기/추국일기_각사등록78_해제_목차.htm [주: 필자에 의한 자료 확보 및 제공 개시 일자: 2019-12-07]

출처 2: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01_추국일기/추국일기_각사등록78_제8책_1801년(순조1년)_제1130쪽-1184쪽.htm [주: 필자에 의한 자료 확보 및 제공 개시 일자: 2019-12-07]

(출처 2로부터 발췌 시작)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14-1879_이의창_이병교/종합7_확동確洞_in_1801_추국일기_각사등록78_제8책_3월8일자_282쪽_red-circled.pdf 

(이상, 발췌 끝)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756-1819_이기경_et_al/1801_사학징의.htm [주: 필자에 의한 자료 확보 및 제공 개시 일자: 2018-09-10]
(발췌 시작)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14-1879_이의창_이병교/종합7_확교確橋_in_1801_사학징의_권2_203쪽(이총억_문초기록_3월8일자)_red-circled.pdf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14-1879_이의창_이병교/종합7_확교確橋_in_1801_사학징의_권2_370쪽_red-circled.pdf 
(이상, 발췌 끝)

 

(*2) 게시자 주: 다음의 주소에 저속하면, 김정호에 의하여 마련된 실측 지도에서, 소의문(서소문)이 그 중간에 위치한차동(車洞) 동네와 확교(確橋) 동네가 도보로 10분 정도의 매우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 고지도 > 서울지도, 즉, https://museum.seoul.go.kr/archive/archiveNew/NR_archiveList.do?ctgryId=CTGRY780&type=C

(발췌 시작)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14-1879_이의창_이병교/종합7_1846-1849_김정호_수선전도_목판본_H-TRNS-72656-780_red-circled.pdf  

(이상, 발췌 끝)

 

2-1-5. 그리고 다음은 병인치명사적 6권 (1925.11.20.) 제45-50쪽에서 발췌한 바인데, 다음과 같은 중요한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발췌 시작)

[...] [이병교, 즉, 이 량은] 안 주교(다블뤼)- 처음 오실 제 복사하고, 여러 신부의 복사하다가, 병인(1866)군난을 당하야 피하였더니, [...]

(이상, 발췌 끝) 

 

그러니까, 이병교(李秉敎), 즉, 이 량(良)은, 아무리 늦더라도, 다블뤼 신부님(1818-1866년)께서 김대건 신부님 및 그 일행과 함께 중국 상해를 출발하여 우리나라 조선에 서해 뱃길을 통하여 입국하였던 1845년 여름 그 시점 직후부터 1879년에 체포될 시기까지 계속하여, 방인 사제들 혹은 프랑스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의 프랑스인 신부님들 중의 어떤 분들(주: 여기에는 다블뤼 신부님과 드게뜨 최 신부님이 포함됨)의(*) 복사를 하였다고 이병교의 친아들이, 이병교(즉, 이 량)이 감옥에서 순교한 1879년 이후에, 증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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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여기서 말하는 프랑스인 신부님들이 몇 명인지를 구체적으로 그리고 매우 손쉽게 파악할 수 있는 표(Table)를 들여다볼 수 있다. 게시자주 3-1-1을 보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39.htm <----- 필히 확인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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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다음은,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 전기 자료집 제3집, 성 김대건 신부의 체포와 순교, 121쪽에서 발췌한 바입니다. 이기원은 이승훈의 친자 이신규입니다:

 

원문 출처: 일성록 병오(1846년) 윤5월 8일

(발췌 시작)

7) 이기원의 두 번째 진술

 

[...] "근래 양반으로 천주학에 이름이 있는 자는  거의 다 사망하였으니, 제 조카(이재용)과 (이)의창 외에는 아마도 다른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대건에게 물어보면 어찌 직고하지 않겠습니까?"

(이상, 발췌 끝)

 

따라서 위의 제2-1-1항에서 이미 말씀드린 이 네 분들 중에서, 이기양의 손자이며 이방억의 아들인 이의창제외하고, 나머지 세 분들 모두는 1869년에 이르기 전에 이미 모두 다음과 같은 각각 다른 죄목으로 순교를 하였다고 널리 잘 알려져 있습니다:

 

즉, 현석문의 경우에는 압록강을 건넜다는 월경(越境)의 죄목으로 1846년에 순교하였고, 이재의(즉, 이재용)는 김재복 부제/김대건 신부와 함께 중국 상해를 다녀온 모반부도죄(謀叛不道罪)라는 죄목으로 병인박해 초기 시절(1868년)에 순교하였으며, 그리고 최형도 또한 병인박해 초기 시절(1866년)에 순교하였음은, 널리 잘 알려져 있는 역사적 사실들입니다.

 

2-2. 그러므로, 지금까지 바로 위의 제2-1항에서, 구체적인 사료들에 의하여 입증/고증되는,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들에 근거하여 말씀드린 바로부터, 다음의 결론들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1) 위의 제2-1-3항에 의하여, 이병교이의창과 동일한 인물일 수도 있음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이 글의 결론 2)

(i) 위의 제2-1-3항에 말씀드린 사료들 및 그 친자 등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확인 및 증언되고 있는, 이의창의 친자의 한자 성명 및 세례명 둘 다와 정확하게 동일한 한자 성명 및 세례명을 가진 친자가 있는, 이병교(즉, 이 량)가, 추가적으로, 다음의 다수의 독립적인 조건(indipendent conditions)들,

 

(ii) 위의 제2-1-5항에서 확인하였듯이, 이의창의 나이와 이병교의 나이 차이가 한 살 정도로 거의 차이가 없음, 

 

(iii) 양반인 천주교 신자들을 우선적으로 철저하게 색출하여 참혹하게 처벌한 신유박해(1801년) 이후에, 비록 13년이 경과하였다고 하더라도, 천주교 신자인 자가 당시의 조선의 임금으로부터 벼슬을 받는 것이 매우 어려웠고, 예를 들어 관가의 지속적인 감시 및 생계의 문제 등으로 인하여, 한성의 소의문(서소문)이 그 중간에 위치한, 도보로 10분 정도의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병교가 태어난 차동(車洞) 동네와 이의창의 본가가 있었던 확교(確橋) 동네에, 이의창 및 이병교가 출생한 1813년경에, 거주하고 있던 양반 집안 출신의 천주교 신자들의 가옥들의 숫자는 극소수였을 것임,

 

(iv) 이의창1844년-1846년의 기간 동안에 김대건 신부의 복사였고 그리고, 제2-1-5항에 의하여 이병교가, 곧바로 이어서, 다블뤼 신부가 우리나라 조선에 처음 오실 제, 즉, 1845년과 그 이후인 특히 포졸들이 이의창을 찾아내지 못한 시기에, 다블뤼 신부의 복사였음,

 

(v) 더구나, 위의 제2-1-6항에 의하여, 위의 제2-1-1항에 나열된 나이가 많은 구 교우인 양반 혹은 중인 출신의 천주교 신자 네 분들 중에서 1879년까지 살아남은 분은, 살아남은 자의 이름이 무엇이든지간에, 아무리 많더라도, 양반 출신인 단 한 분뿐임, 그리고

 

(vi) 위의 제2-1-2항에 발췌된 다블뤼 신부복사의 자격 및 다블뤼 신부가 자신의 복사를 확보함에 있어 커다란 어려움을 겪었음으로부터, 양반 집안 출신인 이의창이 김대건 신부의 체포 이후 어느 시점에, 다블뤼 신부의 요청 및 페레올 주교의 승인에 의하여, 다블뤼 신부의 복사가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음

 

등을 충족시킴(satisfy)으로부터,

 

(vii) 바로 이 이병교가 사실은, 예를 들어, 이의창의 동료들인 이재의와 현석문이 자신의 이름들과 성도 바꾸기까지 하면서 활동한 사례들에서 볼 수 있듯이, '이름을 병교로 바꾼 이의창'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이상, 이 글의 결론 2 끝)

 

게시자 주 2-2: (1) 귀납적(inductive) 입증 방식에 의하여 도출된 바로 위의 (이 글의 결론 2)는 위의 제2-1-3항게시자 주에 안내된 동영상에 기 제시된 필자의 첫 번째 입증과는 다른, 즉, 동일하지 아니한, 그리고 추가적 및 독립적인 몇 개의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따라서 귀납적(inductive) 입증 방식에 있어 훨씬 더 정밀하게 개선된, 또 다른, 한 개의 입증(두 번째 입증)임에 주목하라.

 

(2) 따라서, 바로 이들 두 개의 귀납적(inductive) 입증들에 의하여, 이병교이의창과 정확하게 동일한 인물임은 더욱 더 명확하게 규명되었다는 생각이다.

(이상, 게시자 주 2-2 끝)

 

2-3. 다른 한편으로,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성 김대건 신부 등의 복사였던 이의창李宜敞의 영세명/세례명은 라틴어 이름 Venantius의 직역 음역인 베난시오 일 수가 없었다" 제목의 졸고[게시일자: 2020-04-01]를 읽을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39.htm <----- 필독 권고

 

따라서, (i) 바로 위의 주소에 안내된 필자의 선행 연구 결과와 (ii) 위의 제2-2항에 제시된 (이 글의 결론 2)에 의하여, 다음의 결론들을 따름정리(corollaries)들로서 도출합니다:

 

(이 글의 결론 3) 이의창의 세례명이 량(良, 즉, 레오, Leo)이었음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이 글의 결론 4) 이의창은 김대건 신부님께서 체포된 백령도 사건(1846년)에서 몸을 피신한 직후부터 자신의 이름을 "병교" 등으로 바꾸었을 것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이상, 2023년 6월 26일자 내용 추가 끝]

    

 

3. 유관 사료 분석 II

 

3-1.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주니오르 디아스 신부님(1574-1659년)에 의하여 저술되어 1636-1642년에 초간된 한문분 "천주강생성경직해" 중에, 聖良(성량, Saint Leo)이 등장하는 페이지들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습니다:

 

권2, 33b;

권4, 15b; 16b; 40a;

권5, 46b; 47b;49b; 53a;   

권6, 50a; 50b;

권7, 34b; 36b; 53b;

권8, 31b;

권9, 55a; 58b; 66a; 68b;

권11, 15a; 17a; 22a;

권13, 8a; 12a; 21b;

 

[내용 추가 일자: 2023년 6월 28일]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위의 각 페이지들을 직접 찾아서 읽을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574-1659_엠마누엘_주니오르_디아스/1636_천주강생성경직해.htm 

 

예를 들어, 권2, 33b, 즉, "천주강생성경직해", 권2, 제33b쪽에 있는 聖良(성량, Saint Leo)께서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2명의 종도들에 대하여 탄미(嘆美)하며 말씀하신 바를 찾아 읽어보려면, 바로 위의 주소에 접속한 후에, 다음에 발췌된 바로 이동하여 클릭하면 가지게 되는 새 화면에서, 제33b쪽을 들여다보면 됩니다, 왼쪽에서 두 번째 열(column)의 첫 번째 줄부터 읽도록 하십시오.

 

그러니까, 아래에서, 권2_30권2의 제30쪽부터 읽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바로 위의 주소에 있는 정보를 제공할 때에, 특정 페이지 쪽으로 효율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이미 반영시킨 접근 방도입니다:

 

(발췌 시작)

권2_30_3왕래조후제5주일_153-164 (<---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Fifth Sunday after Epiphany, 마태오 복음서 13,24-30(1969년에 개정된 지금의 전례력에 있어, 가해 연중 제16주일 복음 말씀)] [주: 성경 본문의 각주에서는 "천국" 이 지상의 성교회를 말한다고 하면서도 그러나 "잠" 에서, "천국" 과 "천당" 을 동일시하고 있는데 [즉, "교회(Church)"와 "천당(heaven)"과 "천국(kingdom of heaven)"을 동일시하고 있는데], 그러나 이러한 동일시는 예수 재림의 날 이전에 있어 그리스도교 신학적으로 명백한 개념 오류(error)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천당(즉, 하늘)" 에 머무르는 복받은 영혼(souls)들은 영원히 지복직관의 상태에 있으나(그리하여 천당에서 퇴출되지 않으나), 그러나 이와는 전혀 다르게, 지상의 가톨릭 교회 안에 존재하는 "천국", 즉, "하늘 나라" 안에 머무르는 자는, 예를 들어, 알게 혹은 모르게 죄를 짓자마자 즉시, 하늘 나라 안에 머무르는 상태(즉, 은총의 지위)를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하고, 하늘 나라 바깥으로 밀려나오게 되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 안에는 "밀" (즉, 교회 안에 있는 하늘 나라 안에 머무르는 자)과 "가라지" (교회 안에 머무르나 그러나 하늘 나라 바깥에 머무르는 자)가 섞여 있음에 유념하라. 그리고 "잠" 에서, "천국" 과 "천당" 을 동일시하고 있는 이 명백한 개념 오류여기를 클릭하면 가지게 되는 "국립중앙도서관 국가전자도서관" 화면 제공의 우리말본 "성경직해"(1938년 출판) 자료에서, 원문 보기 > vol : 권 1, 본문 제174쪽에서, 그러한 잘못된 동일시를 제거함으로써, 이미 바로잡아졌다는 생각임] [(2017년 1월 6일) 주: 제32쪽에 있는 각주에서, "대천신"의 역할에 대한 설명이 주어져 있고 이 천신이 "하품천신"이라는 설명이 있음. 제33쪽 각주에서, 향주삼덕들 및 사추덕들에 대한 언급과 향주3덕들에 대한 설명이 주어져 있음.][(2020년 6월 23일) 제32a쪽 "교중3급인(教中三級人)", 제39a쪽 "교중선우(教中善友)", "교중악우(教中惡友)", "교중악인(教中惡人)", "교중선인(教中善人)"]

(이상, 발췌 끝)

[이상, 2023년 6월 28일자 내용 추가 끝]

 

[내용 수정 및 보강 일자: 2023년 3월 7일] 

그런데, 한문분 "천주강생성경직해"의 본문에서 그 가르침들이 발췌되고 있는 그리스도교 신약의 시대의 성인들을 두루 살펴보면, 바로 이 聖良(성량, Saint Leo)거룩함(holiness), 즉, 애덕의 완미(perfection of charity)가, 다른 성인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탁월한 분이셨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게시자 주 3-1: 이어지는 글에서는, 한문분 "천주강생성경직해"의 본문에서 그 가르침들이 발췌되고 있는 聖良(성량, Saint Leo)으로 지칭되는 성인이 구체적으로 어느 분이신지에 대하여, 실증적으로(positively) 규명하도록 하겠습니다.

 

3-2. 바로 아래에 발췌된 바는 1659년 이후에 그러나 1692년 이전에 출판된 "수진일과"속권2에서 발췌한 축일표(즉, 영첨례표)인데, 성모영보일(3월 25일)로부터 제17일째인 4월 11일이 聖良(성량)의 축일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바로 이 聖良(성량) 다음에 작은 글씨로 쓰인, 가로줄이 세 개이고 세로줄이 한 개인 십자가 부호는 이 분이 大聖父(대성부, Pope), 즉, 교종/교황이었음을 나타냅니다:

 

출처 1: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559-1654_니콜라스_롱고바르디_et_al/수진일과.htm

출처 2: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624-1692_필립푸스_쿠플레/영첨례표_in_수진일과_속권2(1659년_이후-1692년_이전)_제62a쪽.htm

(발췌)

량(4월11일)_문남작(4월1일)_약아경(3월20일)_in_영첨례표_in_수진일과 _속권2(1659년_이후_1692년_이전)_제65a쪽.jpg

(이상, 발췌 끝)

 

그러나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만 오로지 의존하여서는, 이 분이, 예를 들어레오 1세 대교황인지 혹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聖良(성량)의 축일은, 성모영보축일(3월25일)후 17일째 되는 날인 4월 11일임을 확인할 수 있는데, 바로 이 聖良(성량)의 축일이 1712년의 필사본 "천주성교영첨례단"에서도 또한 4월 11일임을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확인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드 메야 신부님(1669-1748년)에 의하여 저술되어 1738년에 초간된 한문본 "성년광익", 하, 4월 19일, 聖良(성량) 교황 첨례일에, 聖良(성량, Saint Leo, 레오 9세 교황, 1002-1054년; 재위기간: 1049-1054년)의 성인전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1823년에 개정된 "수진일과"에서도 또한 4월 19일聖良(성량)의 축일임을 필자가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 성심 대축일이 가톨릭 교회의 보편 교회 전례력에 처음으로/최초로 도입된 1856년 직후에 개정된 개정판 "성년광익"에서도 또한 聖良(성량, Saint Leo, 레오 9세 교황, 1002-1054년; 재위기간: 1049-1054년)의 축일이 4월 19일임을 필자가 확인하였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예수 성심 대축일이 가톨릭 교회의 보편 교회 전례력에 처음으로/최초로 도입된 1856년 직후에 개정된 개정판 "성년광익"에서, 聖良(성량, Saint Leo the Great, 레오 1세 대교황, 400년경-461년; 재위기간: 440-461년)의 축일이 4월 11일임을 필자가 확인하였습니다.

 

3-3. 그런데, 바로 이 레오 1세 대교황의 성인전의 첫 부분에 기술된 바에 의하면, 성인전 저술가들이 레오 1세 대교황의 업적에 대하여 이 시기에 이르기까지 잘 모르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바로 이 기술에 미루어 볼 때에 다음을 알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즉,

 

(i) 4월 11일에 경축되었던 성인들 중에는, 1738년에 초간된 한문본 "성년광익", 에 기술된 瑟諾(성 제노, Zeno) 주교 뿐만이 아니라, 바로 이 레오 1세 대교황님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그러나 1738년에 초간된 한문본 "성년광익"의 번역 대본인 라틴어본 혹은 서양 언어본 성인전 저술가가 성 레오 1세 대교황님의 업적에 대하여 이 시기에 이르기까지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부득불, 1738년에 초간된 한문본 "성년광익", 하, 4월 11일에, 성 레오 1세 대교황님의 성인전을 제시하는 대신에, 瑟諾(성 제노, Zeno) 주교의 성인전을 제시하였으며, 따라서 

 

(ii) 바로 위에 발췌된, 1659년 이후에 그러나 1692년 이전에 출판된 "수진일과"속권2에서 발췌한 축일표(즉, 영첨례표)에서, 성모영보일(3월 25일)로부터 제17일째인 4월 11일에 경축된 聖良(성량)은, 가톨릭 교회의 유구한 역사에 있어 첫 번째 대교황님이신성 레오 1세 대교황 이셨던 것입니다.

 

[주: 가롤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성 레오 1세 대교황님의 경축일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기존의 4월 11일로부터 11월 10일로 이동되었다고 알고 있음.]

 

더 나아가, 이어지는 제(iii)항-제(v)항에서는, 4월 11일성 레오 1세 대교황님의 축일임을, 추가적으로, 실증적으로(positively) 입증하도록 하겠습니다.

 

(iii) 우선적으로,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역대 교황님들의 목록을 접할 수 있습니다:

https://www.newadvent.org/cathen/12272b.htm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성 레오 1세 대교황님 이외에, 성인품에 오르신 레오 이름의 교황님들의 축일들이 다음과 같음은 그리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maria.catholic.or.kr/sa_ho/list/list.asp?menugubun=saint&today=&today_tmp=&ctxtCommand=&ctxtLogOn=&ctxtSexcode=&ctxtChukday=&ctxtGaladay=&Orggubun=101&ctxtHigh=&ctxtLow=&ctxtChecked=Checked&oldrow=&curpage=1&ctxtOrder=++name1%2Cgaladaym%2Cgaladayd+&ctxtOrderType=&ctxtSaintId=&ctxtSCode=&ctxtSearchNm=%EB%A0%88%EC%98%A4&ctxtChukmm=&ctxtChukdd=&ctxtPosition=%EA%B5%90%ED%99%A9&ctxtCity=&PSIZE=20 

 

이상, 바로 위의 두 개의 주소들 제공의 정보들로부터, 다음의 목록을 마련하였습니다:

 

성 레오 1세 대교황(재위기간: 440-461년; 축일: 4월 11일(트리엔트 전례력), 11월 10일(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성 레오 2세 교황(재위기간: 682-683년; 축일: 7월 3일);

성 레오 3세 교황(재위기간: 795-816년; 축일: 6월 12일);

성 레오 4세 교황(재위기간: 847-855년; 축일: 7월 17일)

성 레오 9세 교황(재위기간: 1049-1054; 축일: 4월 19일)  

 

특히, 1738년에 초간된 한문본 "성년광익", 하, 4월 19일 에 제시된 성 레오 9세 교황님의 생평에서, 이분이 "聖師"(성사, 즉, 스승)에 포함되는 분이 아님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음에 주목하십시오.

 

(iv) 더 나아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라틴어 정본 1623년판 미사 경본(Missale Romanum)을 들여다볼 수 있는데, 바로 이 4월 11일성 레오 1세 대교황님의 축일로서 경축되고 있음, 그러나 4월 19일성 레오 9세 교황님은 경축되고 있지 않음, 이들 둘 다를, 실증적으로(positively)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375쪽을 보십시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Missale_Romanum_etc/1623_Missale_Romanum/1623_missaleromanumex00cath_4.pdf <----- 제375쪽의 왼쪽 여백에 적힌 날짜 11일도 또한 꼭 확인하라

(발췌 시작)

4월11일은_설_레오_1세_대교황_축일(375쪽).jpg

(이상, 발췌 끝)

 

(v) 또한,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라틴어 정본 1714년판 성무일도(Breviarium Romaum)을 들여다볼 수 있는데, 바로 이 4월 11일성 레오 1세 대교황님의 축일로서 경축되고 있음, 그러나 4월 19일성 레오 9세 교황님은 경축되고 있지 않음, 이들 둘 다를, 실증적으로(positively)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797쪽을 보십시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Missale_Romanum_etc/1714_Breviarium_Romaum/1714_bub_gb_Uw7fYZlo7k4C.pdf <----- 제797쪽을 꼭 확인하라

(발췌 시작)

4월11일은_성_레오_1세_대교황_축일(제797쪽).jpg

(이상, 발췌 끝)

 

그러므로, 지금까지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찰한 바로부터, 다음의 결론들을 도춣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5) 트리엔트 전례력에 있어, 4월 중에 축일을 가지는 레오라는 이름의 교황님들은 성 레오 1세 대교황님(4월 11일)성 레오 9세 교황님(4월 19일), 이렇게 단 두 분뿐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23년 7월 19일]

그런데, 라틴어 정본 1714년판 성무일도(Breviarium Romaum)에서 4월 11일성 레오 1세 대교황님의 축일로서 명기되어 있으며, 따라서 바로 이 성무일도에서, 성 레오 9세 교황님과는 크게 다르게성 레오 1세 대교황님이, 성 아우구스티노와 마찬가지로, 한 분의 "聖師"(성사, 즉, 스승)로서, 이 분의 가르침이 제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

(*) 게시자 주: (1)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성 레오 9세 교황의 생평을 읽을 수 있는데, 이 교황의 생평에는 이 교황이 "聖師"(성사, 즉, 스승)로 분류될 수 있는 내용이 없다는 생각이다:

https://www.newadvent.org/cathen/09160c.htm 

 

(2) 다른 한편으로,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서방 교회 안에서 교황님에 의하여 시성되지 않은 마지막 성인성 발테르(Walter, 1030-1099년)임을 알 수 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3208.htm

(발췌 시작)

1-3. 그런데, 다음에 발췌된 바에 의하면, 바로 위의 제1-2항에서 언급된 성 발테르(Walter, 1030-1099년)이 교황님에 의하여 시성되지 않은 서방 교회의 마지막 성인이라고 합니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Walter_of_Pontoise

(발췌 시작) 

He was canonized by Hugh the Archbishop of Rouen in 1153, and was the last saint in Western Europe to have been canonized by an authority other than the pope.[6][7] "The last case of canonization by a metropolitan is said to have been that of St. Gaultier, or Gaucher, abbat [sic] of Pontoise, by the Archbishop of Rouen, A.D. 1153. A decree of Pope Alexander III, A.D. 1170, gave the prerogative to the pope thenceforth, so far as the Western Church was concerned."[6]

 

그는 1153년에 Rouen의 대주교인 휴고(Hugh)에 의하여 시성되었으며 그리고 서 유럽에서  교황 이외의 어떤 권위에 의하여 시성이 된 마지막 성인입니다.[6][7 "어떤 대주교에 의한 시성의 마지막 경우는, 기원후 1153년, Pontoise의 수도원장인 St. Gaultier, or Gaucher[즉, 성 발타르(Walter0]의 시성이었다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서방 교회가 관련된 한, 기원후 1170년 교황 알렉산더 3세의 한 개의 교령은 그 이후부터 교황에게 이 특권[즉, 시성의 권한]을 주었습니다."[6]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이상, 발췌 끝) 

 

(3) 따라서, 위의 제(iv)항제(v)항에서 실증적으로(positively) 확인한 바에 의하여, 즉, 17세기의 미사경문 및 18세기의 성무일도가 사용되던 시기에 교황님에 의하여 시성되지 아니한 성 레오 9세 교황님(1049-1054년)이 미사경본 및 성무일도에 제시된 '보편 교회의 전례력에 그 축일이 없다는 한 개의 역사적 사실'로부터, 즉, '다만 해당 지역 교회의 성인이라는 역사적 사실'로부터, 이 교황님은, 비록 '교황님에 의하여 시성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보편 교회 전례력에 그 축일들이 등록된 성인들, 즉, 성품(holy creatures, 거룩한 피조물들)의 품급/반열에 포함된 분들, 중에서 특별히 선정되어 "聖師"(성사, 즉, 스승)들이라고 불리는 분들에 포함되는 분들인 성 아우구스티노, 성 레오 1세 대교황님처럼, "聖師"(성사, 즉, 스승)일 수가 없음을 확실하게 확인하였다는 생각이다.

 

(4) 그러니까, 보편 교회의 전례력에 그 축일이 있는 성인들은, 소위 말하는, 성품(holy creatures, 거룩한 피조물들)의 품급/반열에 있음응, 결코 잊지 말도록 하라.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성품성사라는 번역 용어는, 이단인 얀센주의를 한문 문화권에 전달한 성교절요의 용어인 신품성사보다는, 더 전통적이고 정확한 번역 용어인 품급성사로 회복/복원되어야 할 것이다" 제복의 졸고를 학습할 수 있다. 필독을 권고드린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3198.htm 

-----

[이상, 2023년 7월 19일자 내용 추가 끝]

 

따라서, 다음의 결론들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6) 1636-1642년에 그 초판이 출판된 한문본 "천주강생성경직해" 본문의 여러 장소들에서 여러 번에 걸쳐 그 가르침들이 발췌 인용되고 있는, 따라서 그 거룩함(holiness), 즉, 애덕의 완미(perfection of charity)가 매우 탁월한 분이신, 聖良(성량)은, 1623년 이전에 그 축일이 이미 4월 11일이셨던, 가톨릭 교회의 우구한 역사에 있어 첫 번째 대교황님이신, 특히, 반달족 등의 야만족들의 침략으로부터 당신의 훌륭한 가르침만으로 로마를 구해내심으로써 당신이 위대한 "聖師"(성사, 즉, 스승)이심을 널리 입증하셨고, 그리고 칼케톤 공의회(451년)를 성공리에 마무리하셨던성 레오 1세 대교황님(400년경-461년; 재위기간: 440-461년)이심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23년 7월 20일]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굿뉴스 서버 제공의 성 레오 1세 대교황님(400년경-461년; 재위기간: 440-461년)에 대한 성인전을 학습할 수 있습니다:

https://maria.catholic.or.kr/sa_ho/board/board_view.asp?menugubun=saint&ctxtSubMenu=basic&infogubun=info&orggubun=101&bbsgubun=pds&infoid=404&bbscount=11&page=1&id=52911&table=gnattboard 

 

그리고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굿뉴스 서버 제공의 현재 사용 중인 성무일도 독서기도들 중에서 성 레오 1세 대교황님의 설교 등에서 발췌된 바들을 학습할 수 있습니다:

 

(발췌 시작)

12월 17일 : letter : Epist. 31,2-3 (우리 화해의 성사)

12월 31일 : Sermon 6 : (주님의 탄생일은 평화의 탄생일입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 : Sermon 3 : (주님은 당신의 구원을 세계 만방에 알리셨습니다)
2월 22일 : Sermon 4 : (그리스도의 교회는 베드로의 굳건한 신앙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3월 25일 : letter : Epist. 28, ad Flavianum, 3-4 (우리 화해의 성사)
재의 수요일 후 목요일 : Sermon 6 : (단식과 자선을 통한 영적 정화) 
사순 제4주간 화요일 : Sermon 10 : On the Collections, V. (사랑이라는 선에 대해)
사순 제5주간 화요일 : Sermon 8 :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축복의 근원이요 모든 은총의 원인입니다)
부활 제6주간 목요일 : Sermon 2: (주님의 승천은 우리의 신앙을 북돋아 줍니다) 
연중 22주간 금요일 : Sermon 95 : A Homily on the Beatitudes, St. Matthew 5:1-9 [진복팔단] :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연중 22주간 토요일 : Sermon 95 : A Homily on the Beatitudes, St. Matthew 5:1-9 [진복팔단] : (그리스도의 나라의 복락)
연중 23주일 : Sermon 95 : A Homily on the Beatitudes, St. Matthew 5:1-9 [진복팔단] : (그리스도인의 지혜) 
연중 23주간 월요일 : Sermon 95 : A Homily on the Beatitudes, St. Matthew 5:1-9 [진복팔단] : (하느님의 법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크나큰 평화를 누릴 것이다) 
11월 10일 : Sermon 4 : (우리 직분의 특수한 성사) 
연중 34주간 월요일 : Sermon 92 : (상급은 사람의 업적에 따라 주어진다)  

(이상, 발췌 끝)

 

그리고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성 레오 1세 대교황님의 영어본 강론집 및 서한집들을 학습할 수 있습니다:

https://www.newadvent.org/fathers/3603.htm [주: 강론집]

https://www.newadvent.org/fathers/3604.htm [주: 서한집]

 

          그런데, 어쩌면 당연한 예상입니다만, 위의 제3-1항에 안내된, 성 량의 가르침이 발췌 인용된 "천주강생성경직해" 본문들을 들여다보면, 위에 안내된 현재 사용 중인 성무일도 본문에 발췌 인용된 성 레오 1세 대교황님의 가르침들에 포함되지 않는 성 레오 1세 대교황님의 가르침들이 "천주강생성경직해" 본문들에서 또한 발췌 인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그 주소가 바로 위에 안내된 성 레오 1세 대교황님의 영어본 강론집에서, 위의 제3-1항에 안내된, 성 량의 가르침이 발췌 인용된 "천주강생성경직해" 본문들에 대응하는 유관 부분들을 언뜻 찾아보았더니, 다음과 같았습니다. 다만, 성 량의 가르침이 발췌 인용된 "천주강생성경직해"(1636-1642년) 본문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성 레오 1세 대교황님의 영어본 강론집에 제시된 해당 강론과 자구적으로 그다지 잘 일치하지 않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본문의 전후 문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살고 있는 17세기 초반 당시의 한문 문화권 안에서 태어나 성장한 사람들을 위하여, 부득불, 의역(free translation)이 많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출처: https://www.newadvent.org/fathers/3603.htm [주: 강론집]

 

권2, 33b - https://www.newadvent.org/fathers/360382.htm; VI. Many noble martyrs have sprung from the blood of SS. Peter and Paul; 마지막 문장. 

권4, 15b; 16b; 40a;

권5, 46b; 47b;49b; 53ahttps://www.newadvent.org/fathers/360367.htm;  

권6, 50a; 50b - https://www.newadvent.org/fathers/360378.htm 

권7, 34b; 36b; 53b - https://www.newadvent.org/fathers/360349.htm  

권8, 31b;

권9, 55a; 58b; 66a; 68b - https://www.newadvent.org/fathers/360373.htm 

권11, 15a; 17a; 22a - https://www.newadvent.org/fathers/360382.htm 

권13, 8a; 12a; 21b - 진복팔단 https://www.newadvent.org/fathers/360395.htm 

[이상, 2023년 7월 20일자 내용 추가 끝]

 

(이 글의 결론 7) 1750년 이후인 18세기 후반부와 그 이후의 시기를 살은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의 신자들에 의하여, 한문본 "천주강생성경직해"가 저술된 1636-1642년 이후의 시기인 1592년 이후에 그러나 1692년 이전에 출판된 "수진일과"속권2에 제시된 당시의 가톨릭 보편 교회의 트리엔트 전례력인 영첨례표/축일표에 따라, 매년 4월 11일이 그 첨례일/축일로서 경축된 大聖父(대성부, Pope), 즉, 교종/교황이셨던 聖良(성량)은, 가톨릭 교회의 유구한 역사에 있어 첫 번째 대교황님이신, 바로 성 레오 1세 대교황님(Saint Leo the Great, 400년경-461년; 재위기간: 440-461년)이셨음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3-4. 다른 한편으로, 지금까지 위의 세 개의 결론들을 도출하는 데에 사용된 지식들의 거의 대부분을 전혀 알지 못하였을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의 신자들은 다음과 같이 이해하였을 가능성이 상당하였을 것입니다: 즉,

 

1750년 이후인 18세기 후반부와 그 이후의 시기에 중국 본토에서 출판된 한문본 "천주강생성경직해", 한문본 "성년광익"(1738년 출판) , 그리고 "영첨례표"가 부록으로서 제공되고 있는 한문분 "수진일과", 이들 셋 다를 입수하여 학습한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 신자들은, 왜냐하면 그 축일이 4월 11일聖良(성량, Saint Leo the Great, 레오 1세 대교황, 400년경-461년; 재위기간: 440-461년)의 성인전이 1738년에 초간된 한문본 "성년광익"에 수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예수 성심 대축일이 가톨릭 교회의 보편 교회 전례력에 처음으로/최초로 도입된 1856년 직후에 개정된 개정판인 한문본 "성년광익"에서 聖良(성량, Saint Leo the Great, 레오 1세 대교황, 400년경-461년; 재위기간: 440-461년)의 축일이 4월 11일임을 알게 될 때까지 약 1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한문본 "천주강생성경직해" 및 우리말본 "성년광익직해"에 그 가르침들이 발췌되고 있는 聖良(성량)이, 한문본 "성년광익"에 그 축일이 4월 19일이라고 표기된 聖良(성량, Saint Leo, 레오 9세 교황, 1002-1054년; 재위기간: 1049-1054년)인 것으로 잘못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3-5. 그런데,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 신앙의 제1세대에 속하는 이벽 성조, 권일신, 권철신, 이승훈 등의 양반 신분의 유학자들이 1784년 겨울에 서울 수표교 인근에 있는 이벽 성조의 자택으로 초빙을 받은 이승훈으로부터 대세(代洗)를 받기 위하여 필요한 자신의 세례명을 선택하고자, 한문본 "천주강생성경직해", 한문본 "성년광익"(1738년 출판), 그리고 한문본 "영첨례표"가 부록으로서 제공되고 있는 한문분 "수진일과", 이들 셋 다를 사전에 입수하여 정밀하게 학습하는 과정에서, 한문본 "성년광익"에 수록된 각 성인들의 이름 바로 아래에 표시된 "宗徒"(종도, 즉,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및 성 바오로와 성 바르나바), "聖史"(성사, 즉, 복음사가), "聖師"(성사, 즉, 스승), "顯修"(현수), "隱修"(은수), "敎宗"(교종, 즉, 교황), "主敎"(주교), "致命"(치명), "童身"(동신) 등의, 이들 성인들을 구분하는 소집단 표시들을 참조하였을 것이며, 그리고, 더 나아가, 이승훈으로부터 대세(代洗)를 받은 자들이 나중에 다른 이들에게 대세(代洗)를 줄 때에 참고할 자료로서 사용하기 위한 한 개의 기록으로서, 이들 소집단 표시들에 따른 한 개의 세례명 목록을 작성하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들 소집단들 중에서, 한문본 "천주강생성경직해"와 한문본 "성년광익"(1738년 출판), 이들 둘 다에 공통(common)으로 등장할 수 있는 성인들이 대부분 포함되는 소집단들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들여다본 바에 의하면,

 

"宗徒"(종도, 즉, 예수님의 열두 제자 및 성 바오로와 성 바르나바), 

"聖史"(성사, 즉, 복음사가),

"聖師"(성사, 즉, 스승),

"隱修"(은수),

 

등에 포함되는 분들로 파악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宗徒"(종도, 즉, 예수님의 열두 제자 및 성 바오로와 성 바르나바)와, "聖史"(성사, 즉, 복음사가)의 이름들 중의 일부를 1784년 겨울부터 1801년 신유 박해 이전의 시기에, 세례명으로서 선택되어 사용된 경우들은, 요즈음과 마찬가지로, 과거에도 많았을 것이 분명하므로, 이들 이름들이 어떤  변별력 있는 정보를 제공하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聖師"(성사, 즉, 스승)로 불리는 소집합에 포함되는 이름들 중의 어떠한 이름들이 1784년 겨울부터 1801년 신유 박해 이전의 시기에, 세례명으로서 선택되어 사용된 경우들을 들여다보는 것은 어떤 변별력 있는 유의미한 정보를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며, 다음은 그 결과입니다:

 

한문본 "천주강생성경직해" 본문에서 그 가르침들이 발췌 인용되고 있는 따라서 "聖師"(성사, 즉, 스승)로 불리는 소집합에 포함되는 대표적인 성인들의 이름들은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 암브로시오;

성 예로니모;

성 아우구스티노;

성 그레고리오 1세 대교황;

성 량(, 레오);

성 토마스 아퀴나스;

 

3-6. 그런데,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논문이, 통계적으로, 매우 강력하게 뒷받침하듯이,

http://ch.catholic.or.kr/pundang/4/cb/2010_18세기_말_조선_천주교회의_발전과_세례명_방상근.pdf

 

이들 성인명들 중에서 권철신의 세례명인 암브로시오를 제외하고,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 신앙의 선조들의 세례명들으로서 거의 채택되어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파악이 되고 있는데, 그 주된 이유는,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1790년경에 역관 최창현과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 신앙의 선조들의 제1세대에 포함되는 분들이 힘을 합쳐 "천주강생성경직해"의 부분들을 우리말로 번역하고 또 "성년광익"의 부분들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이들을 편집하여 우리말본 "성경직해광익"을 마련한 이후부터는, 특히 "천주강생성경직해"의 각 주일 및 첨례일의 "箴"(잠)의 내용들 대부분이 포함되지 않은 우리말본 "성경직해광익"을 주로 들여다보았지, "聖師"(성사, 즉, 스승)로 불리는 소집합에 포함되는 성인들의 가르침들이 각 주일 및 첨례일의 "箴"(잠)에 포함되어 있는 한문본 "천주강생성경직해"를 들여다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다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8) "良"(량)이 세례명 "Leo"(레오)의 음역(transliteration)이라는 사실을 심지어 최근까지 국내의 교회사학 연구자들까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던 사실을 또한 고려할 때에, 바로 이 세례명 "良"을 가지게 된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 신자의 경우에, 당사자 혹은 그의 아버지가 한문본 "천주강생성경직해" 및 한문본 "성년광익" 이들 둘 다를 직접 학습한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 신앙의 선조들의 제1세대에 속하는 분이었을 것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왜냐하면, 그러지 않고서는, "良"(량)이라는 세례명을 자신의 혹은 자신의 아들의 세례명으로서 선택하여 사용하는 것 자체가 매우 불가능하였을 것임을, 예를 들어,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논문이, 통계적으로, 매우 강력하게 뒷받침하기 때문입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cb/2010_18세기_말_조선_천주교회의_발전과_세례명_방상근.pdf

 

조금 더 구체적으로, 비록 한문본 "성년광익"에 그 축일이 각각, 3월 1일(주교), 4월 19일(교황), 그리고 9월 5일(부제)인 세 분의 聖良(성량)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바로 위의 주소에 있는 논문은 "良"이라는 세례명이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 안에서 1784년 이후 상당한 기간에 걸쳐 거의 사용되지 않았음을, 통계적으로, 매우 강력하게 뒷받침하기 때문입니다. 

(이상, 이 글의 결론 8 끝)

 

3-7. 다른 한편으로,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의 신자들이 한문본 "천주강생성경직해" 혹은 한글본 "성경직해광익"에 등장하는 聖良(성량)이 그 축일이 4월 11일聖良(성량, Saint Leo the Great, 레오 1세 대교황)임을 처음으로/최초로 알게 된 시점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트리엔트 전례력을 잘 알고 있었을, (i) 1795년에 우리나라 조선에 입국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님 혹은 (ii) 1834년과 그 이후의 어느 시점에 우리나라 조선에 선교사로 파견된 프랑스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의 프랑스인 신부님께서, 구체적으로 가르쳐준 시점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상, 2023년 3월 7일자 내용 추가 끝]

 

 

작성 중입니다

 

그리고, "사학징의", 제187쪽, 각주에도 ""(량)이라는 세례명 사용자가 명기되어 있습니다. 

참고 자료: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성인명이 "베란시오", 즉, "Verantius"인 성인은 없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catholicsaints.info/saints-v/ 

 

https://maria.catholic.or.kr/sa_ho/list/list.asp?menugubun=saint&today=&today_tmp=&ctxtCommand=&ctxtLogOn=&ctxtSexcode=&ctxtChukday=&ctxtGaladay=&Orggubun=101&ctxtHigh=w&ctxtLow=v&ctxtChecked=Checked&oldrow=&curpage=3&ctxtOrder=name1%2Cgaladaym%2Cgaladayd&ctxtOrderType=&ctxtSaintId=&ctxtSCode=&ctxtSearchNm=&ctxtChukmm=&ctxtChukdd=&ctxtPosition=&ctxtCity=&PSIZE=20 

 

 

이재의(李在誼)는 1868년 4월 외국인주교와 김대건신부를 국내로 인도해왔다는 죄목으로 다시금 체포되어 모반부도죄(謀叛不道罪)로 5월 28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5752 [단, 출생년도 등 일부 내용은 역사적 사실들과 다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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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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