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꼭필독] 사랑하다(to love)라는 동사의 정의 외. 가해 부활 제6주일 온라인 주일전례성경공부/영어성경공부 묵상 자료 <가부활6주일> 773_love 1242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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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3 ㅣ No.2051

 

[내용 보강 일자: 2023년 5월 11일] 

게시자 주 1: (1) 오늘의 전례성경공부/영어성경공부 묵상 동영상게시자 주 2 다음에 있습니다. 본글의 인터넷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51.htm 에 접속하면, 본글 중에서 제시되고 있는 출처 문헌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의 인터넷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q&a.htm 에 접속하면, 본글의 제목이 포함된, "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제공의 모든 게시글들의 제목들의 목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i) 2006년 12월 16일에 개시(開始)하여 제공 중인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날마다 영어 매일미사 중의 독서들 듣고 보기, 그리고 (ii) 신뢰할 수 있는 가톨릭 라틴어/프랑스어/영어 문서들 등은,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손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  (PC용, 날마다 자동으로 듣고 봄) [주: 즐겨찾기에 추가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m (스마트폰용) [주: 네이버 혹은 구글 검색창 위에 있는 인터넷 주소창에 이 주소 입력 후 꼭 북마크 하십시오] 

 

(2)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341.htm <----- 필히 시청 요망

 

"KF94 마스크 미착용, 착용 시의 커다란 차이점을 잘 보여주는 실험 동영상들 - 오미크론 출현 이전인 2021년 10월 14일에 확보한 자료들임" 제목의 졸글에 추가된 중요한 방역 수칙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자 주 2: [첫 공지 일자: 2022년 7월 17일(다해 연중 제16주일)]

(1) [PC 혹은 노트북의 경우] 바로 아래의 제(2)항에 제시된 이들 제1독서, 제2독서, 그리고 복음 말씀 본문들을 눈으로 읽으면서 이들을 또한 귀로 듣고자 할 경우에는 다음과 같이 하십시오: 바로 아래의 주소를 클릭하면, New American Bible (NAB)에서 발췌된 오늘의 영어 전례성경 본문(즉, 제1독서, 제2독서, 그리고 복음 말씀)들을, 화답송 등과 함께, 청취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이어지는 제(2)항 으로 이동하여 안내대로 하십시오.][원 출처: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http://ch.catholic.or.kr/pundang/4/cbs/Cycle_A/Easter/a_east_6_mp3 <----- 여기를 클릭하라  


[스마트폰의 경우] 바로 아래의 제(2)항에 제시된 이들 제1독서, 제2독서, 그리고 복음 말씀 본문들을 눈으로 읽으면서 이들을 또한 귀로 듣고자 할 경우에는 다음과 같이 하십시오:
(i) 위의 주소를 손가락으로 살짝 누르고 가만히 있으면 가지게 되는 작은 메뉴판 한 개에서, 다른 브라우저로 열기를 선택하십시오. 그런 다음에, (ii) 사용 중인 스마트폰에 이미 열려있는 본글의 브라우저를 찾아서 거기로 이동한 후에, 바로 아래의 제(2)항에 있는 주소를 누르면, 이들 제1독서, 제2독서, 그리고 복음 말씀 본문들을 눈으로 읽으면서 이들을 또한 귀로 들을 수 있습니다.

 

2006년 12월 10일(다해 대림 제2주일)부터 지금까지 바로 아래의 제(2)항에 안내된 English Bible Study 까페[가톨릭 교회의 말씀전례에 따른 영어 성경공부 자료실]에서 필자가 지속적으로 전달 제공해온 자료이므로, 여기에 진작에 올려드릴 수도 있었으나, 혹시라도 거부감을 가지는 분들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 그동안 그러지 않았던 것인데,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2)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바로 위의 제(1)항에서 듣게 되는 NAB에서 발췌된 영어 전례성경 본문들 등을 또한 눈으로 직접 읽을 수 있습니다:

http://club.catholic.or.kr/community/asp/club/attboard/read.asp?type=attboard&schcode=pundang4biblestudy&seq=8&id=1260 <----- 또한 필독 권고   

 

이것도 또한 여기에 진작에 올려드릴 수도 있었으나, 혹시라도 거부감을 가지는 분들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 그동안 그러지 않았던 것인데,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3) 바로 위에 제(1)항제(2)항 제공의 정보들을 반복적으로 꾸준히 함께 활용하면, 영어 듣기 및 읽기 능력 향상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상, 게시자 주 2 끝) 

[이상, 2023년 5월 11일자 내용 보강 끝]       

 

가해 부활 제6주일 온라인 주일 전례성경공부/영어성경공부 묵상 자료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동영상 청취 주소: http://pds.catholic.or.kr/Archives/300/1/gnattboard/2839/4/가해부활제6주일.mp4 <-----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가해 주일 전례성경공부/영어성경공부 묵상 동영상 목록: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113.htm  

동영상 교재: 가톨릭 교회의 말씀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가해I, 가톨릭출판사, 2007년.

동영상 교안(敎案)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51.htm

 

 

시작 기도: 대성호경, 주님의 기도

 

이 십자성가 표적(表迹)으로써, (이마 위에 +)

우리의 주님이신 천주께서는 (입 위에 +)

우리의 원수들로부터 우리를 구하소서. (가슴 위에 +)

성부와 (이마 위에 손끝을 찍음) 

성자와 (배 위에 손끝을 찍음) 

성령의 이름으로. (왼쪽 어깨 위에 손끝을 찍은 후에 그리고 곧바로 직선으로 이동하여 오른쪽 어깨 위에 손끝을 찍음)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들을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가부활6주일> 가해 부활 제6주일  

 

요한 복음서 14,15-21; 사도행전 8,5-8.15-17; 1베드로 3,15-18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lerus/homilies/a_east_6.htm <----- 필독 권고

[주: 교황청 성직자 및 수도자들을 위한 홈페이지 제공]

(발췌 시작)

Connection between the readings 

 

독서들 사이의 연결

 

This last Sunday of the Easter season prepares and in a certain way anticipates the feast of Pentecost. The liturgy presents Jesus promising the Spirit, the same Spirit who raised him to life, and who, in Jesus’ name, the Apostles communicate to the baptized Samaritans. "I shall ask the Father and he will give you another Advocate to be with you forever," Jesus promises in the Gospel. In his First Letter, St. Peter says: "In the body [Christ] was put to death, in the spirit he was raised to life" (second reading). And St. Luke in the Acts of the Apostles presents Peter and John, who "prayed for the Samaritans to receive the Holy Spirit" (first reading).

 

부활 시기의 마지막 주일(*)은 성령강림 죽제를 준비하고(prepares) 그리고 어떤 구체적인 방식으로 예상합니다(anticipate). 이날 전례는 예수님께서 성령을 악속하심을 제시하는데, 이분은 그분을 생명 쪽으로 일으키셨던,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도들이 세례를 받은 사마리아인들에게 나누어 준(communicate) 바로 그 동일한 성령이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라고 예수님께서 오늘의 복음 말씀에서 약속하십니다. 성 베드로는 자신의 첫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육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 (제2독서). 그리고 성 루카는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와 요한을 제시하는데, 그들은 내려가서 "사마리아인들이 성령을 받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제1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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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여기서 부활 제6주일을 부활 시기의 마지막 주일이라고 부른 것은, 지역에 따라, 다음 주일에, 부활 제7주일 대신에, 주님 승천 대축일(승천 목요일)을 이동하여, 주님 승천 대축일로 경축할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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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ctrinal message

 

교리 메시지


In the history of salvation there is a harmonious succession of events in the action of the Father,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 that is always for the benefit of man’s salvation. The Father is the origin and source of every saving plan. In his love for man he sends his Son to redeem him and to restore his filial condition. Once the Son has fulfilled his mission on earth, the Spirit is sent to accompany man on his pilgrimage in this world toward the Father. Today’s liturgy presents to us the promise Jesus made to the disciples that he would send them the Holy Spirit, so that he would always be with them. Why does Jesus Christ make them this promise? So that the disciples do not feel they are orphans, since Jesus was about to go to his death and to return to the Father’s house. Jesus says to them: "I will not leave you orphans; I will come back to you" (Gospel), not in person, but through his Spirit.

 

구원(salvation)의 역사에는, 사람의 구원이라는 혜택을 항상 위하는 성부의, 성자의 그리고 성령의 행동(action)에 있어 사건들의 어떤 조화로운 연속이 있습니다. 성부께서는 모든 구하는 계획(every saving plan)의 원천(origin)이고 그리고 출처(source)입니다. 사람(man)에 대한 그분의 사랑(love) 안에서 그분께서는 그를 속량하기(redeem) 위하여 그리고 [아담과 하와의 원죄의 결과로 파기된] 그의 자녀의 조건을 회복시키기/복구하기(restore) 위하여 당신의 아드님[즉, 성자]을 보내십니다. 일단 당신의 아드님께서 땅 위에서 바로 이 당신의 사명/임무(mission)를 구현하시자, 성령께서, 이 세상에서 성부 쪽으로 향하는 사람의 순례(pilgrimage) 동안에, 사람을 동반하도록(accompany) 하고자 보내지십니다. 오늘의 전례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하셨던, 당신께서 성령을 그들에게 보내실 것이라는, 그리하여 그 결과로 당신께서 언제나 그들과 함께 있을 수도 있도록 하시고자 하는, 약속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약속을 왜 하셨을까요? 그리하여 그 결과로 사도들이,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조만간 당신의 죽음 쪽으로 그리고 성부의 집 쪽으로 되돌아갈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고아들이라고 느끼지 않도록 하고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몸소(in person)가(*1) 아니라 당신의 성령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복음 말씀)

 

[내용 추가 일자: 2023년 5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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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역자 주: 초벌 번역 시에 "in person"을 "인격적으로"로 번역하였던 것을, 전후 문맥 안에서, "몸소"로 바로잡습니다.

[이상, 2023년 5월 11일자 내용 추가 끝]

The Holy Spirit, promised by Jesus, is first and foremost the Paraclete, that is, the comforter, the advocate, the giver of life and enlightenment in the faith. The disciples and the early Christians have a special experience of the powerful and illuminating presence of the Spirit at Pentecost. He is also the Spirit of Truth, of God’s revelation to man, with whom God illumines all human existence and gives it its true meaning and raison d’être. This truth was fully accepted by the disciples, proclaimed, confessed and also defended before the "falsehood" of the world, attacks by the falsity of the human heart and mind. Moreover it is the Spirit who gives life, who raises Jesus to life (second reading) and who enlightens Christians who believe in the Gospel, like the inhabitants of Samaria (first reading). The Spirit of God’s life, that life that, like the burning bush seen by Moses at the foot of Mount Sinai, continued to blaze and was never burnt up. Lastly, the Holy Spirit is the promoter of evangelization, both of the Jews and of the Samaritans and pagans. For this reason, commentators on the Acts of the Apostles, usually speak of three "Pentecosts," that of the Jews in Jerusalem (Acts 2), of the Samaritans in Samaria (Acts 8), and of the pagans in Cesarea by the sea (Acts 10). With the receiving of the Spirit, evangelization and the proclamation of the Gospel gathered momentum and more and more new members joined the community of believers in Christ. In this way the Spirit was to make the words of Jesus come true: "Anybody who loves me will be loved by my Father, and I shall love him and show myself to him."

 

예수님에 의하여 약속된 성령은 첫 번째로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변호자(Paraclete), 즉, 위로자이시고(comforter), 보호자이시며(advocate), 그리고 신앙에 있어 생명(life)과 영적인 지식 혹은 통찰력(enlightenment)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제자들과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강림일에, 힘이 있고(powerful) 그리고 조명하는(illuminates), 성령의 현존이라는 어떤 특별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또한 진리의 영(the Sprit of Truth)이시고, 사람 쪽으로 하느님의 계시의 영(the Spirit of God's revelation)이신데, 그분과 함께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존재(human existence)를 조명하시어(illuminates) 그리하여 이 인간 존재에 그 참된 의미 및 있음(being, 有)의 이유(raison d’être)를 제공하십니다.(*2) 바로 이 진리는 제자들에 의하여 충만하게(fully) 받아들여졌고, 선포되었으며, 고백하게 되었고 그리고 또한, 이 세상의 "거짓의 상태(falsehood)"가 인간의 심장(heart)마음(mind)의 거짓(falsity)을 통하여(by) 공격하는 면전에서, 옹호되었습니다. 더구나 생명을 주시는 분, 예수님을 생명 쪽으로 일으키신 분(제2독서) 그리고, 사마리아의 거주자들처럼(제1독서), 이 복음 쪽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인 지식 혹은 통찰력을 주시는(enlightens) 분은 바로 이 성령이십니다. 하느님의 생명으로 구성된 성령께서는, 시나이 산의 기슭에서 모세가 보았던 불타는 떨기나무처럼, 계속하여 타올랐으며 그리고 결코 전소되지 않았던 바로 그 생명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령께서는, 유다인들 그리고 사마리아인들 및 이교도인(pagans)들, 이들 둘 다에 대한, 복음화(evangelization)의 촉진자이십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사도행전의 주석자들은 새 개의 "성령 강림"에 대하여, 즉, 예루살렘에 있는 유다인들에 대한(사도행전 제2장), 사마리아에 있는 사마리아인들에 대한(사도행전 제8장), 그리고 지중해변가에 있는 카이사리아에 있는 이교도인들에 대한(사도행전 제10장) 바로 그 성령 강림에 대하여, 보통 말합니다. 성령의 받아들임과 함께, 복음화와 복음의 선포는 가속도가 붙었으며 그리하여 더욱더 새 구성원들이 그리스도 쪽으로 믿는 자들로 구성된 공동체(the community of believers in Christ)에 합류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성령께서는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의 말씀들이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진리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요한 복음서 14,21ㄴㄷ).

 

[내용 추가 일자: 2023년 5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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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번역자 주: 바로 이 대단히 중요한 요약과 관련하여,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719항은 다음과 같은 유관 내용을 명쾌하게 가르치고 있다는 생각이다:

 

출처: https://www.vatican.va/archive/ENG0015/__P5J.HTM 

(발췌 시작)

1719 The Beatitudes reveal the goal of human existence, the ultimate end of human acts: God calls us to his own beatitude. This vocation is addressed to each individual personally, but also to the Church as a whole, the new people made up of those who have accepted the promise and live from it in faith.

 

1719 [마태오 복음서 5,3-10에 기술된] 진복팔단/참행복(the beatitudes)들은 인간 존재의 목표, 인간 행위(human acts)들의 궁극적인 끝(end)을, [한 개의 계시 진리로서] 다음과 같이 드러내고 있습니다(reveals): 하느님께서 우리들을 당신의 고유한 참행복(beatitude) 쪽으로 부르고 계신다. 바로 이 소명(vocation)은 인격적으로(personally) 각 개인 쪽으로 말해지고 있으며, 그리고 또한, 이 소명을 이미 수용하였으며 그리하여 신앙 안에서 이 소명에서 출발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들로 구성된 새 백성(the new people)인, 한 개의 전체로서 교회 쪽으로 말해지고 있습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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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2023년 5월 11일자 내용 추가 끝]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오늘의 전례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학습하기 위하여,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합시다.

 

오늘의 복음 말씀인 요한 복음서 14,15-21 중에서

 

출처: http://maria.catholic.or.kr/bible/read/bible_read.asp?menu=bible&m=2&n=150&p=14

(발췌 시작)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21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상, 발췌 끝)

 

A.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27.htm <----- 필독 권고

[제목: 빈도수가 높은 성경 용어들; 게시일자: 2020-01-24]

(발췌 시작) 

672 love 사랑, 애덕

  84 loves

  58 lover 

(이상, 발췌 끝)

 

B.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35.htm  <----- 전문 필독 권고

[제목: 사랑/애덕의 정의(definition) 외 [토미즘_학습안내] [성경용어_사랑] [교리용어_사랑]; 게시일자: 2008-03-12]

(발췌 시작)

바로 위에서 지적한 바에 대한 더 자세한 말씀을 드리기 위하여, 예를 들어, 요한 복음서 14,15; 14, 21, 그리고 14,23 - 24 말씀들의 논리적 구조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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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요한 복음서 14,15-21 은 가톨릭 교회 전례력에 있어 가해 부활 제6주일 복음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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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복음서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diligitis, 즉, to value or esteem highly[높게 존중하거나 혹은 존경하다]) 계명을 지킬 것이다."
 
(NAB 요한 복음서 14,15)
"If you love me, you will keep my commandments."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은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의 집합에 포함된다"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이 말씀의 논리적 구조는 "p implies q"인데
 
(여기서 p = "나를 사랑함", q = "내 계명을 지킴"),
 
예수님께서는, 논리적으로 "~p implies ~q" 구조의 표현을, 더 나아가, "p if and only if q" 구조의 논리적 동치 표현을, 다음과 같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복음서 14,21)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diligo, 즉, to value or esteem highly[높게 존중하거나 혹은 존경하다]) 사람이다."
 
(NAB 요한 복음서 14,21)
"Whoever has my commandments and observes them is the one who loves me."
 
따라서, 
 
요한 복음서 14,15 와 14,21 을 결합하면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당신을 사랑하는(diligo, 즉, to value or esteem highly[높게 존중하거나 혹은 존경하다]) 자와 동일하다"는 이 중요한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어지는 다음 다음의 구절에서,
 
너무도 분명하게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더 말씀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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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복음서 14,23)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diligitis, 즉, to value or esteem highly[높게 존중하거나 혹은 존경하다]) 내 말을 지킬 것이다."
 
(NAB 요한 복음서 14,23)
"Whoever loves me will keep my word."
 
(요한 복음서 14,24)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non diligit)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을 것이다."
 
(NAB 요한 복음서 14,24)
"Whoever does not love me does not keep my w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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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요한 복음서 14,23-29 는 가톨릭 교회 전례력에 있어 다해 부활 제6주일 복음말씀입니다.
-----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들로부터, 우리는 다음의 논리적 동치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자 if and only if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diligo, 즉, to value or esteem highly[높게 존중하거나 혹은 존경하다]) 자.
 
여기서, if and only if 는 왼편과 오른편의 문장들이 논리적으로 서로 동치(equivalence)임을 나타내는 논리학 분야의 표준 표현 방식입니다.
 
이것을 더 추상적으로 요약하여 간략하게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계명을 지킴 if and only if 그리스도인의 사랑/사랑의 행위(Christian love)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결론)
[사도 요한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가르쳐 주셨던 사랑의 정의(definition)]:
 
(2-1-1) 
사랑[(Christian) love, charity, caritas, agape, ahabà, 애덕]은 새 계약(New Covenant)에 대한 충실(fidelity)을 말한다.
 
더 나아가, 다음의 말씀은,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와의 통공(communion, 친교, 하나됨)에 대한 말씀이라, 매우 유의미할 것입니다.:
 
(요한 복음서 15,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이상, 발췌 끝)

 

C.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86.htm  <----- 전문 필독 권고

[제목: 하느님의 사랑의 정의(definition)에 대하여; 게시일자: 2011-07-21] 

(발췌 시작)

5. 다음은 Modern Catholic Dictionary 에 주어진 "love(사랑하다)"에 대한 설명입니다:
 
(발췌 시작) 
LOVE

To will good to someone. Also to please someone, either by sharing with that person what one possesses or by doing what someone wants. Basically there are two kinds of love. The love of concupiscence, or self-interested love, means that another is loved for one's own sake as something useful or pleasant to the one who loves. The love of friendship means selfless love of another for that person's own sake, for his or her good, to please him or her; it is the love of benevolence.
 
사랑하다(LOVE, amor)
 
어떤 이(someone, 즉, 자기 자신 혹은 다른 이)(*1)에게 선을 의도하고자 함(to will good to someone)을 말합니다. 또한 어떤 이를, 자신이 가진 바를 바로 그 자와 함께 나눔으로써 혹은 어떤 이가 원하는 바를 행함으로써 둘 중의 하나에 의하여, 즐겁게 함(please)을 말합니다. 기본적으로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두 종류의 사랑이 있습니다. (i) [감각을 수행하는 욕구(the sensitive appetite, 즉 감각 욕구) 안에 있는, 따라서 정(情, passions)들 중의 하나인] 사욕편정(偏情, concupiscence)(*2)에 기인하는 사랑(the love of concupiscence) 혹은 이기적인 사랑(self-interested love)은 다른 자가, 사랑하는 자에게 유용한 혹은 즐거움을 주는 어떤 것으로서, 사랑하는 자 고유의 목적을 위하여, 사랑을 받게 됨을 의미합니다. (ii) [이성적 욕구(rational appetite), 즉, 의지(the will) 안에 있는, 따라서 결코 정(情, passions)들 중의 하나일 수가 없는] 우의(友誼)에 기인하는 사랑(the love of friendship)은 다른 이에 대하여, 바로 그 자 고유의 목적을 위한, 그자 혹은 그녀의 선(good)을 위한, 그자 혹은 그녀를 즐겁게 하고자 하는, 이기심이 없는 사랑(selfless love)을 의미하며, 그리하여 이 사랑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가 정의하는(defines) 우의(友誼, friendship), 즉, "상호호혜적 우의(友誼)"의 시작인] 선의(善意)에 기인하는 사랑(the love of benevolence)입니다.(*3)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5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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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역자 주: 여기서 말하는 "어떤 이(someone)""자기 자신(himself)" 혹은 "다른 이(another)" 를 말한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글은 다음에 있으니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36.htm <----- 필독 권고
[이상, 2015년 5월 17일자 내용 추가 끝]

[내용 추가 일자: 2012.12.17]
(*2) 번역자 주: 현재까지 국내의 가톨릭계에서 사용중인, 영어로 "concupiscence"로 번역되는 라틴어 단어 "concupiscentia"의 번역 용어인 "慾偏情"대단히 심각한 번역 오류이다. 이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주소를 클릭한 후에, 제2-2-4항제2-2-5항반드시 필독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295.htm <----- 필독 권고
[이상, 2012.12.17일자 내용 추가 끝].

[내용 추가 일자: 2023-12-25]
(*3) 번역자 주: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바로 이 우의적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을 위하여 권고하는, (i) 7개의 물적 자선들, 즉, "형애긍지행 7단" 그리고 (ii) 7개의 영적 자선들, 즉, "신애긍지행 7단"에 대하여, 학습할 수 있다. 또한 필독을 권고드린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형신애긍지행14단의_성경_출처들_2974.htm <----- 필청/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형신애긍지행14단의_성경_출처들_및_실천_사정들_3003.htm <----- 필청/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153.htm <----- 필독 권고   

 

[이상, 2023-12-25일자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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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위의 제5항의 설명에 의하여, 만약에 우리가 이 설명의 문헌적 출처를, 즉 모두가 신뢰할 수 있는 가톨릭 신학적 출처를 정확하게 알 수만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그리고 실천하셨던 "사랑/사랑하다"에 대하여 더 나은 이해를 하게 되겠습니다.
 
질문 5: 위의 제4항에 주어진 "사랑(love)"에 대한 설명의 출처가 어디일까요?
 
지금까지 제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바로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55-1274년)의 저술인,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입니다.
 
6. 다음은,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신학 대전 Ia, q20, a2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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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시작)

Article 2. Whether God loves all things?

 

제2조. 하느님께서 모든 사물들을 사랑하시는지?

 

Objection 1. It seems that God does not love(amet) all things. For according to Dionysius (Div. Nom. iv, 1), love(amor) places the lover(amantem) outside himself, and causes him to pass, as it were, into the object of his love(amatum). But it is not admissible to say that God is placed outside of Himself, and passes into other things. Therefore it is inadmissible to say that God loves(amet) things other than Himself.

 

Objection 2. Further, the love(amor) of God is eternal. But things apart from God are not from eternity; except in God. Therefore God does not love(amat) anything, except as it exists in Himself. But as existing in Him, it is no other than Himself. Therefore God does not love(amat) things other than Himself.  

 

Objection 3. Further, love(amor) is twofold--the love, namely, of desire(concupiscentiae), and the love of friendship(amicitiae). Now God does not love(amat) irrational creatures with the love of desire(amore concupiscentiae), since He needs no creature outside Himself. Nor with the love of friendship(amore amicitiae); since there can be no friendship with irrational creatures, as the Philosopher shows (Ethic. viii, 2). Therefore God does not love(amat) all things.

 

Objection 4. Further, it is written (Psalm 5:7): "Thou hatest all the workers of iniquity." Now nothing is at the same time hated and loved(amatur). Therefore God does not love(amat) all things.

 

On the contrary, It is said (Wisdom 11:25): "Thou lovest(diligis) all things that are, and hatest none of the things which Thou hast made." 

 

이와는 달리,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diligis)(diligere, 즉, to value or esteem highly[높게 존중하거나 혹은 존경하다])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지혜 11,24(25)) 라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I answer that, God loves(amat) all existing things. For all existing things, in so far as they exist, are good, since the existence of a thing is itself a good; and likewise, whatever perfection it possesses. Now it has been shown above (Question 19, Article 4) that God's will is the cause of all things. It must needs be, therefore, that a thing has existence, or any kind of good, only inasmuch as it is willed by God. To every existing thing, then, God wills some good. Hence, since to love(amare) anything is nothing else than to will good to that thing, it is manifest that God loves(amat) everything that exists. Yet not as we love. Because since our will is not the cause of the goodness of things, but is moved by it as by its object, our love(amor), whereby we will good to anything, is not the cause of its goodness; but conversely its goodness, whether real or imaginary, calls forth our love(amorem), by which we will that it should preserve the good it has, and receive besides the good it has not, and to this end we direct our actions: whereas the love(amor) of God infuses and creates goodness.

  

저는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존재하는 사물들 모두를 사랑하십니다(loves, amart). 이는 존재하는 사물들 모두는, 그들이 존재하는 한, 선(good)하기 때문인데, 왜냐하면 한 사물의 존재 그 자체가 한 개의 선(a good)이기 때문이며, 그리고 한 사물이 어떠한 완미(完美)(perfection)를 소유하고 있든지 간에 또한 마찬가지(likewise)[번역자 주: 즉, 한 개의 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위에서(질문 19, 제4항) 하느님의 의지가 모든 사물들의 원인임을 이미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물은, 오로지 그것이 하느님에 의하여 의도되는 한, 존재(existence)를, 혹은 선(good)의 어떤 종류를, 가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then) 존재하는 각 사물에 하느님께서는 어떠한(some) 선을 의도하십니다(will). 따라서, 어떤 사물을 사랑하는 것(to love, amare)은 바로 그 사물에 선을 의도하는 것(to will good) 이상의 어떤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하느님이 존재하는 모든 사물을 사랑하시는(loves, amat) 것은 명백합니다.(*1)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듯이(*2)아닙니다. 왜냐하면(because), 우리의 의지[번역자 주: 즉, 우리의 이성적 욕구(rational appetite)]는 사물들의 선함(goodness)의 원인(cause)[번역자 주: 즉, 하느님의 의지]이 아니고, 이 원인의 대상을 경유하여서 처럼(as by its object) 이 원인에 의하여 움직여지므로(since),(*3) 바로 그것[번역자 주: 즉, 바로 이 움직임]에 의하여 우리가 임의의 사물에 선을 의도하는 우리의 사랑(love, amor)은 이 사물의 선함의 원인이 아니며, 거꾸로(conversely), 실제이든 혹은 상상이든지간에, 이 사물의 선함이 우리의 사랑(love, amorem)을 [번역자 삽입: 심장(heart) 안쪽에] 야기시키는데(calls forth),(*2) 바로 이 사랑에 의하여 [번역자 삽입: 이 야기됨 직후부터] 우리가 [번역자 삽입: 부수적으로(accidentally)] 의도하는(wills) 바는, 이 사물이 마땅히(should) (i) [번역자 삽입: 장차 우리의 concupiscence에 관련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한 것(the good)들을 유지하고(preserve), 그리고 (ii) 그 위에(besides) [번역자 삽입: 장차 우리의 amicitia에 관련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선한 것(the good)들을 받아들이며(receive), 그리고 바로 이러한 끝/목적지(end) 쪽으로 우리가 우리의 행동(actions)들을 향하게 하는(direct)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달리 [번역자 삽입 concupiscence가 전혀 없는] 하느님의 사랑(love, amor)은 선함(goodness)을 주입하며(infuses) 그리하여 선함을 창조합니다(cre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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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역자 주: 아담과 하와에 의하여 범해진 "원죄(original)"의 결과로 그 이후부터 우리에게는 이들로부터 물려받는 "concupiscence"가 있게 되므로, 따라서, 왜냐하면 하느님은 아무런 형이하학적 감각 기관들을 가지고 있지 않으시기 때문에, 바로 이 "concupiscence"가 하느님께 전혀 없음을 반드시 기억하도록 하라.

 

(*2) 번역자 주: 바로 이 문맥 안에서 말해지고 있는 우리가 하는 사랑을, 정의에 의하여(by definition), "원초적 사랑(primal love)"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3) 번역자 주: 바로 이 문장이, 이 "원초적 사랑"의 원인이 "concupiscence"가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음에 반드시 주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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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ly to Objection 1. A lover is placed outside himself, and made to pass into the object of his love, inasmuch as he wills good to the beloved; and works for that good by his providence even as he works for his own. Hence Dionysius says (Div. Nom. iv, 1): "On behalf of the truth we must make bold to say even this, that He Himself, the cause of all things, by His abounding love and goodness, is placed outside Himself by His providence for all existing things."

 

Reply to Objection 2. Although creatures have not existed from eternity, except in God, yet because they have been in Him from eternity, God has known them eternally in their proper natures; and for that reason has loved them, even as we, by the images of things within us, know things existing in themselves.

 

Reply to Objection 3. Friendship cannot exist except towards rational creatures, who are capable of returning love, and communicating one with another in the various works of life, and who may fare well or ill, according to the changes of fortune and happiness; even as to them is benevolence properly speaking exercised. But irrational creatures cannot attain to loving God, nor to any share in the intellectual and beatific life that He lives. Strictly speaking, therefore, God does not love irrational creatures with the love of friendship; but as it were with the love of desire, in so far as He orders them to rational creatures, and even to Himself. Yet this is not because He stands in need of them; but only on account of His goodness, and of the services they render to us. For we can desire a thing for others as well as for ourselves.

 

Reply to Objection 4. Nothing prevents one and the same thing being loved under one aspect, while it is hated under another. God loves sinners in so far as they are existing natures; for they have existence and have it from Him. In so far as they are sinners, they have not existence at all, but fall short of it; and this in them is not from God. Hence under this aspect, they are hated by Him.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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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은, 위에 우리말로 번역된 부분에 대하여,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의 약 600여 개에 달하는 각 문항(Questions)들에 대한 "압축된 바꾸어 말하기"Paul J. Glenn 몬시뇰(1893-1957)의 저서: "A Tour of the Summa (신학 대전 여행)"에서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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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God loves all existing things, that is, things that have positive being. For these things exist by God's will, that is, by his love. To love a thing is to will the thing and to will good to it. God wills the existence, essence, and perfections of existing things; hence he loves these things. God's love is not like human love which is attracted to things by the good it finds in them; God's love causes the good in things.

 

2. 하느님께서는 존재하는 사물들, 즉, 실재하는 있음(positive being)을 가진 사물들,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이는 이러한 사물들이 하느님의 의지에 의하여, 즉 당신의 사랑에 의하여,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물을 사랑하는 것은 그 사물을 의도하는 것이며 그리고 그것에 선(good)을 의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본질인 존재를, 그리고 존재하는 사물들의 완미(完美)(perfections)들을 의도하시며(wills), 그리하여 그 결과 당신께서는 이러한 사물들을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God's love)은, 사물들 안에서 발견하는 선(the good)에 의하여 사물들로 끌려가게 되는, 인간의 사랑(human love)비슷하지(like) 않은데, 이는 하느님의 사랑은 사물들 안에 있는 선한 것(the good)들의 원인(cause)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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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다른 한 편으로, 향주 삼덕들 중의 하나인 애덕(charity, caritas, Christian love, agape, 아가페,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참 뜻은 결국에,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인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복음서 13,34)
 
에 있어서의 "사랑/사랑하다" 의 의미로 귀착되는데, 지금까지의 학습을 통하여, 이제 "이 하느님의 사랑"의 신학적 의미를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질문 5. 그러면,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사랑의 행위(the love of God)"는 언제 우리에게 주입될까요(infused)?
 
바로 세례 때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성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확언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5,5)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대다수의 우리들이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데에 있으며, 이 글은 이 무지(ignorance)를 멀리 쫒아내기 위한 목적으로 마련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학습한 바를 하느님의 인류 구원 의지의 드러내심 안에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7-1.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피조물들을 선하게 하고자 의도하시는 "하느님의 의지"를 말한다.
 
7-2. 피조물들은, 아담과 하와의 원죄(original sin) 이후로, 이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애초의 선의 완미(完美)(perfection) 상태를 상실당하였다. 즉 악(evil = 선의 결핍)이 세상에 들어왔다.
 
7-3.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들을 사랑하시기에(loves),  피조물들이 상실당한 선을 회복하는 것을 당신께서 의도하시기에(wills), 창세기 3,15에서의 말씀을 시작으로 하여 구약 성경에 기록된대로, 당신의 인류 구원 의지를, 인격 사이의 계약(covenant)의 형식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약속하셨다.
 
7-4. 하느님께서는, 피조물들을 그들 본래의 순수함(the purity of its origins)으로 회복시키고자, 당신의 인류 구원 의지를 세상 안에서 구현하시고자, 신약 성경의 네 복음서들에 기록되어 있듯이, 당신의 외 아드님(성자, the Son of God)를 세상에 보내셨으며[여기를 클릭하여,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2336항의 첫 문장을 참조하라], 성자께서는 당신의 공생활 중에 당신의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복음서 13,34)
 
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
 
7-4-1. 따라서 강생하신 성자이신,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명하신 바로 이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 즉 하느님 의지의 첫 번째 움직임을 말하므로, 옛 계약의 율법들 모두를 완성시키는 유일한 사랑이다.
 
7-4-2. 따라서 바로 "이 사랑을 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대로 상대방을 선하게 하여 그리하여 상대방이 선(good)의 완미(完美)(perfection)에 이루도록 도와주는, 서로 주고 받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를 실천함을 말한다.
 
또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1766항(<--- 클릭하십시오)"사랑하다(to love)"를 다음과 같이 정의(define)하고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이(someone, 즉, 자기 자신 혹은 다른 이)의 선을 의도하는(will) 것이다"(*)

"To love is to will the good of someone (himself or an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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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 대전 I-II, q. 26 a. 4, c: Ed. Leon. 6,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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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2-1. 특히 이 사랑은, 죄인들을 포함하여, 누구라도 그리 어렵지 않게 실천할 수 있음에 크게 주목하라.
 
[이상, 내용 추가 끝]

(이상, 발췌 끝)

 

D.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36.htm  <----- 필독 권고 

[제목: 번역오류: 우리말본과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766항 [번역누락]; 2015-05-17]

 

E.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47.htm <----- 필독 권고 

[제목: 번역 용어인 사랑하다(to love, amo) 라는 동사의 의미; 2015-07-02]

 

F. 여기를 클릭하면, <----- 필독 권고

예수님께서 행할 것을 새 계명으로 명령하신, 향주삼덕들 중의 애덕(Charity)을 정의할(define) 때에 사용되는 개념인"하느님의 사랑(God's love)", 즉 "그리스도 사람들의 사랑(Christian love)"정의(definition)에 대한 글들을 읽을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concept_of_love.htm]

 

G.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767.htm

[제목: 만천유고 의 십계명가 는 천주성교실록 에 수록된 조전천주십계 를 노래한 것이다; 게시일자: 2017-01-31]

(발췌 시작)

3-3. 다음은, 바로 위에 발췌되어 나열된, "천주성교실록", "천주십계장"에 제시된, "십계명(A)"의 각 항 전부 혹은 각 항의 시작 부분의 졸번역입니다. 이어지는 글에서, "트리엔트 교리서"에 수록된 기준/표준(norm, standard)인 "십계명"과의 정밀한 양식/형식 비교 및 내용 비교를 위하여 필수적이라 생각되어 마련하였습니다: 

 

(졸번역 시작) 

[제1계 전문, 제1계에 대한 설명 및 문답 발췌 시작]

或曰尊言第一面碑文,惟奉敬天主之事,乞詳示。答曰內有三條事情。

 

혹은 이르기를, 공경하는 말씀의 제1면 비문이 천주의 일을 오로지 받들어 공경함에 대한 것이라는데, 부디 상세하게 일러주실 것을 간청하나이다. 답하여 이르기를, 그 안에 세 조항의 형편들 혹은 까닭들(事情)이 [다음과 같이] 있나니라.

 

第一條要誠心奉敬一天主,不可祭拜別等神像(여기까지가 제1계명 본문임).

 

제1조, 한 분이신 천주를 반드시 정성을 다하여 받들어 공경하여야 하며, 여러 종류의 신상(神像)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절하는 행위를 허락하지 않노라.(*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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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번역자 주: 

(1) 위의 제2-3항에 안내된 "트리엔트 교리서(즉, 로마 교리서)에 수록된 "십계명"제1계명에서 "strange gods" 로 번역된 표현이 "천주성교실록"에 수록된 "천주십계"의 제1계에서, "偶像(우상)" 대신에, "神像(신상)"으로 번역되었음에 주목하라.

 

(2) 다른 한편으로, "偶像(우상)"이라는 번역 용어는 1814년에 와서 개신교 측 성경에서 처음으로/최초로 사용되기 시작한 번역 용어임을 확인하는 글은 다음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766.htm <----- 필독 권고

 

(3) "천주성교실록"에 수록된 "천주십계"의 제1계가 두 개의 단락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히 두 번째 단락에서, 소위 말하는 "신상(神像) 숭배"를 금한다는 명령이 명기되어 있음에 반드시 주목하라. 왜냐하면, "신상(神像)"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행위의 허망(虛妄)함이 또한, 위의 제1-1항에 안내된, 우리말 노리 "십계명가"의 두 번째 단락 중의 "꼭두각시 나무신막"이 언급되는 부분에서, 첫 번째 단락에서 지적한 잡다한 미신 행위들을 종합하여 속(屬, genus)적으로 지적하는 형식으로, 서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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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 제1계에 대한 비 문답식 설명 시작함) 

若依此誡而行,則是奉敬天主。世人皆知敬其親長,然敬天主當勝於敬親長之禮。何則天主甚是尊大,勝於親長。是以當誠敬也。違犯此誡者,不敬天主,一也。不信天主事情,二也。愛其親長及夫百般財物,有甚於愛敬天主者,三也。如守此誡,不得敬天地日月,及諸鬼神,夜夢不祥,吉凶有兆,尋擇日辰,占卜卦術等事。(여기까지가 제1계에 대한 비 문답식 설명 전문임).

 

이 계에 의거하여 행함이 곧 천주를 받들어 공경함이니라. 세상 인간들 모두는 그 친족 어른(親長)들을 공경하여야 함을 알고 있는데, 그런데 천주에 대한 공경이 친족 어른들에 대한 공경의 예(敬親長之禮)(*1)보다 마땅히 더 뛰어난 것이니라.(*2) 왜냐하면 천주께서는, 집안 어른들보다 더 뛰어남에 있어, 그 존대(尊大)가 깊고 두텁기(甚) 때문이니라. 바로 이것으로써 [천주를] 마땅히 정성을 다하여 공경하여야 하니라.(*3) 이 계를 위범하는(어겨서 죄를 짓는) 행위는, 천주를 공경하지 않음이 그 하나이고, 천주의 형편들 혹은 까닭들(事情)을 믿지 않음이 그 둘이며, 그리고 그 친족 어른들 및 온갖 재물(돈이나 그밖의 온갖 값나가는 물건)들을 사랑함이 천주를 사랑하고 공경함보다 더 깊고 두터운 행위에 있음이 그 셋이니라. 마땅히 이 계를 준수하여, 천지일월(천체로서 운행 중인 해와 달) 및 여러 귀신들을 공경함, 밤꿈의 상서롭지 못함, 길흉이 있다는 점괘, 일진(날의 육십갑자)을 찾아 택함, 점을 쳐서 길흉을 예견함 및 점치는 방법 등의 일들을 손에 넣지 말아야 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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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역자 주: 바로 이 친족 어른들에 대한 공경의 예(敬親長之禮)조상에 대한 제례(祭禮, 즉, 제사의 예)를 말함에 반드시 주목하라.

 

(*2) 번역자 주: 바로 이 문장은, 전후의 문맥 안에서, 조상에 대한 제례(祭禮, 즉, 제사의 예)불허하거나 혹은 금지하지 않음을 의미함에 또한 반드시 주목하라.

 

(*3) 번역자 주: 더 나아가, 조상에 대한 제례(祭禮, 즉, 제사의 예)불허하거나 혹은 금지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직전 문장에 곧바로 이어지는 바로 이 문장에서, "조상에 대한 제례(祭禮, 즉, 제사의 예)"가, 제1계의 첫 문장에서 허락하지 않는다고 명기한, "여러 종류의 신상(神像)에게 제사를 지내고 절하는 행위"에 포함되지 않음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음에 반드시 주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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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 제1계에 대한 문답식 설명의 시작함) 

或曰 不信天主事情,謂之違誡。何也。答曰 此中違誡有三罪:世人既識天主,而有真經,不肯受教者,罪之一也;不信天主十二條事情,罪之二也;信從別法教門,謂能升天,不須天主真經救其靈魂,罪之三也。或曰 過愛財物、親長,甚於愛敬天主,何可謂之違誡乎。答曰 此中有一罪,如人怨恨天主使己有貧難、疾苦,有罪也。何也天主似乎父師,父責其子,師責其徒,只欲使之守善進德。是以不當怨恨也。

 

혹은 이르기를, 천주의 형편들 혹은 까닭들((事情))을 믿지 않음을 이 계를 어김이라고 일컫는데, 왜 그러한지요? 답하여 이르기를, 이 위계에 세 가지 죄들이 있나니, 세상 인간들이 천주와 진경(참된 경전, 즉 성경)이 있음을 [그들의 지성(intellect)/마음(mind)이] 인지하나[Credere Deum et Credere Deo], 그러나 [그들의 심장(heart)/의지(will, 즉, rational appetite) 안쪽으로 천주와 진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임[Credere in Deum]을 거부함이 이 죄들 중의 하나이고, 천주의 열두 조항 형편들 혹은 까닭들(事情)(즉, "사도신경"의 열두 조항들)(*)을 믿지 않음이 이 죄들 중의 둘이며, 그리고 다른 방법의 가르침의 요령을 믿고 따르면 하늘에 능히 오를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모름지기(사리를 따져 보건대 마땅히) 천주와 진경이 그들의 영혼(soul)들을 구하지 못한다 함이 이 죄들 중의 셋이니라. 혹은 이르기를, 재물들과 친족 어른들을, 천주를 사랑하고 공경함보다 깊고 두텁게, 지나치게 사랑함이 무슨 이유로 위계라고 가히 일컫는지요? 답하여 이르기를, 거기에 하나의 죄가 있는데, 천주께서 몸소 빈궁의 어려움, 질병의 고난[즉, 형이하학적 악(physical evils들]을 있게 하셨다고 인간들이 원망하고 한탄함에 이르게 되니, 죄가 있는 것이니라. 왜냐하면, 아버지가 그 아들을 꾸짖고, 스승(teacher)이 그 제자를 꾸짖듯이, 천주께서는, [마태오 복음서 23,8 및 유비에 의하여(by analogy)] 아버지 및 스승과 유사하여, 다만 그들로 하여금 [윤리적(moral)] 선(good)[즉, 의로운 행위들]을 준수하도록 하고 [윤리적(moral)] 덕(virtue) 쪽으로 나아가도록 함을 욕망하실(desire)뿐이니, 바로 이것 때문에 [천주를] 원망하고 한탄하는 것은 부당하기 때문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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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다음의 시작 부분에 있는 파란색의 굵은 글자를 클릭하면 "천주성교실록" 제11장 전문을 읽을 수 있다:

 

천주성교실록_11_해석인당성신천주사실장_37-42 (<---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계리사독 = 그리스도] [액격륵서아 = 에게레이시아, ecclesia, 즉, 교회] [(2016년 12월 25일) 주: 이 장에서, 사도신경을 구성하는 12개 문장들 및 각 문장에 대한 해설이 제시되고 있음.] [주: "그리스도(Christo)"라는 라틴어 성경 용어의 중국어 음역 용어인 "계리사독"이 제28쪽에서, 강생하신 성자(the Son of God)의 이름으로서, 사용되고 있다. 이 음역 용어는, 여기를 클릭하면 직접 확인할 수 있듯이,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칠극"의 저자인] 디에고 데 판토하 신부님(1571-1618년)의 유고(遺稿)인 "방자유전"에서 "계리사독" 그대로 사용되고 있고, 그리고 또한, 여기를 클릭하면 직접 확인할 수 있듯이, 쥬리오 아레니 신부님(1582-1649년)에 의하여 1635년에 초간된 저서인 "천주강생언행기략"에서도 "계리사독"이라는 음역 용어가 그대로 사용되고 있으나, 그러나, 여기를 클릭하면 직접 확인할 수 있듯이, 엠마누엘 주니오르 디아스 신부님(1574-1659년)에 의하여 1636년에 초간된, 한문본 "성경직해"의 앞 부분에서는 "계리사독"을 사용하다가, 이 동일한 책의 중간 부분에서부터 "기리사독"으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아는 한, 최초로 바뀜. 그리고, 바로 이 변경된 음역 용어의 최초 사용 이후에, 예를 들어, 여기를 클릭하면 직접 확인할 수 있듯이, 중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었던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의 장 바쎄 신부님(1662-1707년)의 유고인 신약 성경 루카 복음서 2,11에서 "구세주자" 라는 번역 표현이 사용되고 있는데, 장 바쎄 신부님께서는, 성경 본문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위에서 언급된 예수회 소속의 신부님들의 기존의 전통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그리스도" 라는 용어를 "기독"으로 번역하였음을 알 수 있음. 그리고 여기를 클릭하면 직접 확인할 수 있듯이, 중국에 파견되었던 예수회 소속의 안토니오 드 푸아로 신부님(1735-1813년)에 의하여, 중국의 예수회가 실제적으로 해산되었던 1775년 후부터 번역 작업에 착수하여 1790년 경에 중국어로 번역이 완료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신성경"의, 루카 복음서 2,11에서(주: 신약, 구약을 포함하는 "고신성경" 전체의 중국어 번역 작업은, 여기를 클릭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1790-1805년 사이에 완료되었다고 함), "구세자, 즉 주"이라는 번역 표현이 사용되고 있음. 그러므로, 이와 같이 중국의 가톨릭 교회 내에서 1584년 경부터 1700년대 말까지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그리스도(Christo)"라는 동일한 라틴어 성경 용어의 등가의 음역 용어들인 "계리사독", "기리사독", 그리고 이 음역 용어의 약어인 "기독"의 사용 과정에서 혹은 사용 이후에, "그리스도교(Christianity)"라는 용어가 한문 문화권에서, 등가로 번역된 "기리사독" +(plus) "교", 즉, "기리사독"라고 불리는 대신에, 약자로 줄여서 "기교"라고 널리 불리게 되었음을 [어떤 새 개념의 도출을 위한 어떤 추상화 과정(an abstraction)이 아니고 그 역 방향을 말하는, 기존의 개념들로부터 한 개의 개별화/특정화 과정(a particularization)에서 적용하게 되는] 연역적 추론(deductive reasoning)에 의하여 그리 어렵지 않게 결론내림. 따라서, 한문 문화권에서 사용되고 있는, 과거에 음역된 혹은 차용 번역된 그리스도교 용어들의 출처, 기원 등을 모르고 있거나 혹은 굳이 알고자 하지 않는 일부 개신교측에서, 자신들만을 지칭하는 고유한 번역 용어인 것으로 대단히 잘못 알고 있는 용어가 바로 "기교"임을 구체적으로 확인하였다(문화 장벽과 언어 장벽 등의 전달 장애에 기인하는 심각한 인식 오류). 이 지적과 함께 또한, 개신교측에서 중국 선교/전교(mission)/복음화(evangelization)가 처음 시작된 시기가 19세기 초(영국 출신의 로버트 모리슨 목사)이었고 또 로버트 모리슨 목사가 1810년 대에 들어와 신약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여 1814년에 출판할 때에,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글에서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듯이, 위에서 말씀드린 장 바쎄 신부님(1662-1707년)의 신약 성경 유고(遺稿)에 많이(heavily) 근거하였음을 반드시 기억하도록 하라. 특히 개신교 목회자들께서 이 지적의 글을 꼭 읽을 것을 강력하게 권고드린다. 그리고 또한,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한문 문화권의 한 변방(邊方)인 일본의 문헌들에 의존하였기에 심각한 수준의 추정 오류(error)가 있는, 논문[제목: ‘그리스도’와 ‘기독(基督)’의 어원]의 저자와 이 논문의 독자들도 또한 이 지적의 글을 꼭 읽어야 할 것이다.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을 또한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66.htm] [주: 제30쪽에서, 라틴어 "Ecclesia"에 대응하는 번역 용어로서  "천주교회"라는 번역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 그리고 이 라틴어 용어가 "천주교회"로 번역된 이유는 여기서 이 라틴어 용어가 말하는 바는 마태오 복음서 16,18에서 예수님께서 "내 교회" 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것을 말하기 때문임.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의 글은 다음에 있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68.htm 그리하여 "교회"라는 번역 용어가 여기서 사용되고 있음. "천주교회(the Church)"가, 어느 한 지역에만 오로지 속하는 개별교회/지역교회(Particular Church)아니고, 모든 지역 교회들을 포함하는 "총교회[즉, 보편 교회(Universal Church)]"라고 불리는 이유가 제시되어 있음. 천주의 가르침이 "성교(holy teaching)", "공교(catholic teaching)"라고 불리는 이유가 제시되어 있음. (2017년 7월 11일) 주: 바로 앞의 문장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더 자세한 내용의 2017년 2월 20일자 졸글에 따라, 수정되었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770.htm] [(2016년 7월 13일) 주: "삼위일체", "계리사독",  "성신" "강생", "동정녀", "마리아", "성모", "성모마리아", "고난", "인성", "고성기(寄)"(즉, 고성소), "영보"(즉, 림보), "원조아당" "부활", "성도", "공심판", "천주대전", "액격륵서아" (즉, Ecclesia)" "천주교회", "심판", "통공", "성교", "총교회", "상통", "연죄소", "원죄", 다음의 부분이 각판본의 사본에 훼손되어 있음: 一則,凡人誠心信道,入教之時懺悔宿過,然後領受聖水,則天主盡赦其舊惡矣。"참회", "숙과", "영수성수" (즉, 세례를 받음), "입교", "육신부활", "상생", 등의 용어들이 "천주성교실록" 내에서 대부분 최초로/처음으로 혹은 계속 사용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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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제1계 전문, 제1계에 대한 설명의 문답 발췌 및 졸번역 끝]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G: "형이하학적 악"(physical evil)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을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32.htm <----- 필독 권고

 

H.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791.htm <----- 전문 필독 권고 

[제목: 번역 용어들인 명오(明悟) 와 영명(靈明) 의 정의(definitions)들 [capax Dei]; 게시일자: 2017-03-25] 

(발췌 시작)

[...]

 

(iii) 그리고 이들 사이의 관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the image of the Trinity in the soul

spirit (신(神) = 영(靈)) > intellect (명())(*1) > memory (함()) 

                                                            understanding (오())

                            > spirit's   intellectual   appetite (욕())

                                       

즉,


spirit (신(神) = 영(靈))

     > spirit's intellect [영명(靈明), 즉, 지성](*2) 

          > spirit's intellect's memory (영명함 = 명함 = 기함(記含)/기억)

             spirit's intellect's understanding (영명오 = 명오(明悟)/오성(悟性)) 

     > spirit's intellectual appetite/spirit's will (영명욕 = 명욕 = 애욕(愛慾)/의지)

 

[내용 추가 일자: 2018년 1월 12일]

-----

(*1) 게시자 주: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낱글자 ""이, 중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었던 예수회 소속의 신부님들 사이에서, "intellect(지성)"에 대응함에 대하여서는, 아래의 제2-4항제2-5항을 꼭 읽도록 하라.
 

(*2) 게시자 주: spirit's intellect [영명(靈明), 즉, 지성]의 두 개의 구성원(elements)들인, 영(spirit)의 능력(faculties/powers)들인 "기함""명오"는, 마태오 리치 신부님(152-1610년)"천주실의", 앙퐁소 바뇨니 신부님(1566-1640년)"수신서학" 등에서, 신조어 "(영재)"로 불리고 있음.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의 글[제목: 영재(靈才) 라는 신조어 한문 교리 용어의 출처와 의미에 대하여 [capax Dei]]은 다음에 있으니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885.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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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2018년 1월 12일자 내용 추가 끝]

 

[내용 추가 일자: 2017년 3월 30일] 

여기서, 영명(靈明) = 영의 지성; (피조물의 경우) 영을 지니게 된 지성,

                영명함 = 영의 지성의 기억; (피조물의 경우) 영을 지니게 된 지성의 기억, 

                영명오 = 영의 지성의 "이해"/"오성"; (피조물의 경우) 영을 지니게 된 지성의 "이해"/"오성", 

                영명욕 = 영의 "지성의 욕구"/"의지"; (피조물의 경우) 영을 지니게 된 "지성의 욕구"/"의지".

[이상, 2017년 3월 30일자 내용 추가 끝]

 

[...]

 

1-3. 다른 한편으로, 다음은, 국내에서 사용 중인, 한자자전에 주어진 설명입니다:

 

출처: http://hanja.naver.com/word?q=%E4%B8%89%E5%8F%B8

(발췌 시작)

三司 (3사)

 

① 영혼(靈魂)의 세 가지 관능(官能). 명오(明悟), 기함(記含), 애욕(愛慾) .

(이상, 발췌 끝)

 

[...]

(이상, 발췌 끝)

 

I. 따라서, "사랑하다(to love, amore)"라는 동사는 "애욕(愛慾)/의지/뜻/지성의 욕구(rational appetite, will)의 동사형 파생어"이고 그리고 이 동사의 전통적 그리스도교 교의 신학적 의미(meaning)/정의(definition)는 위의 제B항에 발췌된 바에 있습니다

 

질문 1: "사랑하다"의 반대 개념은 무엇을 또한 수반할까요?

 

질문 1 에 대한 답변: "사랑하다"의 반대 개념은 위의 제G항에 발췌된 십계명들 중의 제1계명에 대한 설명에서 말하고 있듯이, "원망(怨望)하다", 즉, "못마땅하게 여기어 탓하거나 불평을 품고 미워하다"[주: 표준국어대사전]를 수반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또한 가르치신 "하느님을 지극히 사랑하라"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하느님을 원망(怨望)하지 말라"는 의미를 수반합니다.

 

한문 문화권에 없는 개념인, 당사자의 이해타산과는 무관한, "정의(justice)"의 한 개의 종적인(special) 개념인, 그리고 또한 한문 문화권에 없는 개념인, "경의/존중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piety)"이라는 개념의 한 개의 종적인(special) 개념인, 따라서, "효(filial piety)"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의 내용과 그 방향성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만약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부모를 더 많이 사랑하게 되면, 중심 이동이 되지 못하여, 자신이 부모에게 성심/성의를 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부모에게 발생한 질병, 몸의 죽음 등의 형이하학적 악(physical evils)들에 대하여, 자신이 성심/성의를 다하였다는 생각이 과도할수록, "하늘(heaven)이 어떻게 나에게 이러실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리하여 그 결과, 더욱 더 자칫 하늘(heaven)/하느님을 더 많이 원망(怨望)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러한 종류의 원망(怨望)을 야기하는 "효(filial piety)"는 결코 순효(純孝)가 아닐뿐더러, 오히려 과도한 효(inordinate filial piety)이며, 따라서 자신의 영혼과 가족 중의 다른 구성원들의 영혼을 해치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또한 가르치신, 심지어,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원수를 원망(怨望)하지 말라"는 의미를 수반합니다. 왜냐하면, "원망(怨望)하다"가 지속되는 한, 용서하지 못하게/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왜냐하면, "원망(怨望)하다"가 지속되는 한, 유,무형의 폭력의 형태로, 계속하여 보복하기/복수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어떠한 경우에도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을 행사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오늘의 제1독서인 사도행전 8,5-8.14-17:

 

일곱 식탁봉사자들 중의 한 명인 스테파노의 순교(6,8부터 제7장 전체) 이후에, 예루살렘에서 퍼져 나가게 되는 거룩한 말씀의 전파에 대한 내용들 중의 하나: 사마리아 지역에서 발생한, 또한 일곱 식탁봉사자들 중의 한 명인, 필리포스의 이야기.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a_east_6.htm  <----- 필독 권고

(발췌 시작)

14-17. Here we see the Apostles exercising through Peter and John the authority they have over the entire Church. The two Apostles proceed to confirm the disciples recently baptized by Philip: we may presume that in addition to laying their hands on them to communicate the Holy Spirit, the Apostles made sure that they had a correct grasp of the central points of the Gospel message. At this time the Apostles constituted the spiritual center of the Church and took an active interest in ensuring that the new communities were conscious of the links--doctrinal and affective--that united them to the mother community in Jerusalem.

This passage bears witness to the existence of Baptism and the gift of the Holy Spirit (or Confirmation) as two distinct sacramental rites. The most important effects Christian Baptism has are the infusion of initial grace and the remission of Original Sin and any personal sin; it is the first sacrament a person receives, which is why it is called the "door of the Church".

There is a close connection between Baptism and Confirmation, so much so that in the early centuries of Christianity, Confirmation was administered immediately after Baptism. There is a clear distinction between these two sacraments of Christian initiation, which helps us understand the different effects they have. A useful comparison is the difference, in natural life, between conception and later growth (cf. "St. Pius V Catechism", II, 3, 5). "As nature intends that all her children should grow and attain full maturity [...], so the Catholic Church, the common mother of all, earnestly wishes that, in those whom she has regenerated by Baptism, the perfection of Christian manhood be completed" ("ibid.", II, 3, 7).

"The nature of the Sacrament of Confirmation," John Paul II explains, "grows out of this endowment of strength which the Holy Spirit communicates to each baptized person, to make him or her--as the well-known language of the Catechism puts it--a perfect Christian and soldier of Christ, ready to witness boldly to His resurrection and its redemptive power: 'You shall be My witnesses' (Acts 1:8)" ("Homily", 25 May 1980). "All Christians, incorporated into Christ and His Church by Baptism, are consecrated to God. They are called to profess the faith which they have received. By the Sacrament of Confirmation they are further endowed by the Holy Spirit with special strength to be witnesses of Christ and sharers in His mission of salvation" ("Homily in Limerick", 1 October 1979). "This is a sacrament which in a special way associates us with the mission of the Apostles, in that it inserts each baptized person into the apostolate of the Church" ("Homily in Cracow", 10 June 1979). 

 

In the Sacrament of Confirmation divine grace anticipates the aggressive and demoralizing temptations a young Christian man or woman is likely to experience, and reminds them of the fact that they have a vocation to holiness; it makes them feel more identified with the Church, their Mother, and helps them live in accordance with their Catholic beliefs and convictions. From their formative years Christ makes them defenders of the faith. 

(이상, 발췌 끝)

 

오늘의 제2독서인 1베드로 4,15-18:

 

성 베드로가 말하는, 박해(persecution)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접근: 희망(hope, 망덕).

 

 

󰌛 3분 복음/교리 묵상

 

CCCC 155. 어떠한 방식으로 하느님의 백성은 사제, 예언자 그리고 왕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세 가지 기능들에 함께 하는지요?

CCC 783-786

http://ch.catholic.or.kr/pundang/4/a_east_6_c783.htm
 
세례를 받은 자들이 영적 희생제물(spiritual sacrifices)들을 봉헌하기 위하여 성령에 의하여 축성되는(consecrated) 한, 하느님의 백성은 그리스도의 사제 직무(priestly office)에 참여합니다(participate in). 신앙(faith)이라는 초자연적 감각(supernatural sense)과 함께 그들이 바로 이 신앙에 끊임없이(unfailingly) 충실하고 그리고 이 신앙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를 깊게 하며 그리고 이 신앙을 증언할 때에, 그들은 그리스도의 예언자 직무(prophetic office)에 있어 함께 나눕니다(share in). 우주의 왕으로서 당신 스스로를 모든 사람들의, 특히 가난한 자들과 고통 받는 자들의, 봉사자(servant)로 만드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함으로써, 하느님의 백성은 봉사(service)라는 방법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직무(kingly office)에 있어 함께 나눕니다(share in).

 

CCCC 156. 어떠한 방식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까?
CCC 787-791, 805-806

http://ch.catholic.or.kr/pundang/4/a_east_6_c787.htm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에 의한 밀접한 방식으로 당신의 충실한 백성을 당신 자신과 한 몸이 되게 하십니다(unites).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그리스도 쪽으로 믿는 자들은, 그들이, 특히 성체성사(Eucharist) 안에서,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사랑/애덕(charity) 안에서 그들 사이에 한 몸이 됩니다. 그들은 교회라는 하나의 몸을 형성하는데, 바로 이 교회의 일체(unity)는 그 구성원들과 그 기능들의 다양함 안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마침 기도: 성모송, 영광송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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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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