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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하느님의 구원의지와 인간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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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희 [diroop] 쪽지 캡슐

2000-03-05 ㅣ No.3020

몇년전 책에서 읽었던 글입니다. 피정을 하면서 문득 이글이 떠올라 여러분도 보시라고 올립니다. 같이 등록하는 자료는 아래글의 HWP문서 입니다.

(읽기에는 HWP화일이 더 좋은거 같네요...)

가끔 심심하시면 토끼홈페이지에도 들러주시고요.

http://myhome.thrunet.com/~diroop

 

하느님의 구원의지와 인간의 자유

                                                       정태현

 

이번 호에는 ’신학자들의 십자가’라고도 불리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와 인간의 자유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 이 문제를 철학이나 신학의 논리로 접근하면 ’십자가’처럼 고통스럽고 어렵게 느껴지겠지만, 성서에 나오는 메시지 그대로 풀이하면 그렇게 어려운 문제도 아니다.

 

질문 1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와 아담이 그것을 먹는 것은 자유 의지를 표현한다고 생각하는데 맞는가? 결국 자유 의지 때문에 언젠가는 하느님을 거역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는 뜻인 것 같다. 생명 나무 열매는 무슨 뜻인가?

 

대답 1 위의 질문은 아래와 같이 다듬고 정리할 수 있겠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당신의 명을 어길 것을 뻔히 아시면서, 왜 그 나무를 낙원에 만들어 놓으시고 그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하셨는가? 그분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분이라면,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실 텐데, 왜 우리로 하여금 처음부터 영원히 낙원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배려하시지 않으셨을까?"

우선 이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 지난 호에 밝힌 대로 창세기 1-3장에 나오는 창조와 낙원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지어낸 이야기임을 상기시키고 싶다. 이 이야기들은 세상의 기원과 인간의 삶에 대한 신학적 답변을 고대 근동의 신화와 설화를 이용하여 시하고 있다. 곧 세상은 하느님에게서 나왔고 자연의 부조화와 인간의 비참한 삶은 인간이 저지른 죄의 결과이다. 그리고 죄의 근본은 인간이 하느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하느님 없이 자기 자신을 위한 구원과 멸망의 주체가 되려는 데 있다.

  따라서 실낙원 이야기를 바탕으로, 어떻게 선하신 하느님께서 인류의 첫 조상이 나무 열매 하나 따먹은 것을 문제삼아 인류 전체를 불행하게 만드실 수 있는가? 하고 따지는 일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인간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선하심과, 인간이 겪는 행이나 고통 사이에 드러난 갈등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그대로 남는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무엇인가? 성서의 증언대로 라면 그 목적은 사람이 구원과 행복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이 하느님의 뜻과는 달리 왜 이 세상에는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은가? 하느님께서는 인류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인간이 고통을 받지 않고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실 수는 없으셨을까? 여기에 인간의 자유가 큰 주제로 떠오른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당신 모습대로 만드셨다."(창세1,27)는 말씀은 사람에게 지성과 자유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는 뜻이다. 이 세 가지 속성은 다른 동물들과 인간을 뚜렷하게 구분하는 특징이 된다. 지성이 높으면 그만큼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폭이 커지고, 자유를 많이 가지면 사랑을 그만큼 깊고 크게 실천할 수 있다. 인간은 높은 지성을 이용하여 어떤 동물보다 자유롭게 살아간다. 또한 인간은 폭넓은 자유를 바탕으로 어떤 동물보다 더 크고 고귀한 사랑을 보여줄 수 있다.

  하느님에게서 자유롭게 창조된 사람은 하루 종일 행복에 겨워 웃기만 하는 인형이 아니다. 인간은 하느님에게 거역할 수 없고 언제나 행복해질 수밖에 없는 꼭두각시가 아니다. 인간의 삶에 행복 이외의 다른 가능성이 전혀 없다면, 그는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를 것이다. 불행의 체험이 없다면 어떻게 지금의 처지가 행복한지를 느낄 수 있겠는가? 인간에게 자유가 주어졌다는 것은, 그에게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행복을 찾을 가능성과 더불어 하느님을 거부하고 스스로 불행해질 가능성도 함께 주어졌다는 뜻이다.

  나에게 사랑하는 애인이 있다고 하자. 그 애인이 나만 보면 얼빠진 사람처럼 열에 들떠 사랑의 감정만 드러내는 데 열중한다면, 처음에는 기분 좋게 그를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나중에는 지겨워질 것이다. 상대방에게 화낼 줄도, 미워할 줄도, 불평할 줄도 모르는 인은 상사병이라는 중병을 앓고 있는 환자이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상사병 환자로 만들지 않으셨다.

  진정한 자유가 없으면 진정한 사랑도 있을 수 없다. 나를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갈 수 있었는데도 나를 선택해 준 나의 배우자! 나의 약점과 잘못에 실망하고 떠나 버릴 수도 있었는데 떠나지 않고 참아 준 나의 애인! 상대방에게 나를 선택하지 않을 가능성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는 그가 나를 선택해 준 사실에 더욱 큰 감명을 받을 것이다. 자유를 행사할 여지가 크면 클수록, 사랑의 깊이와 폭이 더 크게 드러난다.

  구약성서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를 다룬 책이다. 하느님께서는 여러 민족들 가운데 이스라엘을 자유로이 선택하시고 이 민족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시고자 온갖 정성과 사랑을 다 쏟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에게 이토록 큰 정성과 사랑을 쏟으시는 하느님을 수없이 배반하였다. 그들의 배반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엄청난 고통을 당하시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자유를 박탈하시어 당신께 거역할 줄 모르고 순종만 하는 로봇으로 그들을 바꿔 놓지는 않으셨다. 만일 그러셨더라면 그분께서 마음 고생을

덜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났더라면 그것은 당신의 중요한 속성 가운데 하나를 부정하는 결과가 되었을 것이다. 곧 하느님께서는 자유로우신 분이고, 그분의 모습대로 창조하신 인간도 자유롭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부정하게 된다.

  하느님의 중요한 속성인 이 자유는 사랑의 능력과 불가분의 관계를 이룬다. 남편이 아내에게 자신을 사랑하는 일 이외의 아무것도 용인하지 않으면, 그 부인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 되고 부인은 숨이 막혀 점차 사랑의 능력을 잃게 될 것이다. 의처증이 있는 남편은 부인의 사랑을 강요하다 오히려 그 사랑을 잃게 된다. 의부증이 있는 아내도 마찬가지이다. 하느님은 결코 의처증 남편이 아니다. 우리가 당신을 저버리면 화를 내시고 괴로우시겠지만, 그럴지라도 우리에게 사랑을 강요하시지 않고 스스로 자유롭게 결정하여 당신을 사랑해 주길 바라신다. 여기에 하느님의 비극이 있다. 당신께서 사랑으로 창조하신 피조물에게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그에게서 사랑과 배신을 동시에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철학이나 신학으로는 설명하기 힘들지 모르겠지만, 성서의 저자들은 여러 가지 인간의 감성적 표현을 이용하여 별 어려움 없이 거리낌없이 드러낸다. 이처럼 하느님의 사정을 인간의 사정에 비추어 설명하는 성서 저자들의 문학적 기법을 의인화라고 한다.

  이처럼 자유는 사랑에 필수적 전제 조건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당신만을 사랑하여 행복해질 수밖에 없는 꼭두각시로 만들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는 의처증 환자가 아니시며, 우리가 상사병에 걸리기를 바라 시지도 않는다. 우

리 삶의 매 순간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서 당신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자유로운 결단으로 당신을 사랑해 주기를 바라신다.

다음으로 중요한 문제는 행복과 고통과 사랑의 관계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신다면 왜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셨을까? 이 질문과 관련하여 사람들이 오해할 수 있는 명제가 하나 있다. "행복이란 고통이 없는 상태이다."라는 것이다. 행복과 고통은 정반대 개념이 아니다. 행복의 반대는 불행이지 고통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고통을 당하면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때로는 사랑을 위하여 고통을 감수하기로 마음을 정할 수도 있다. 인도의 마더 데레사 수녀는 죽어 가는 거리의 사람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느끼게 하려고 조국 유고를 떠나 캘커타의 빈민가에서 온갖 어려움을 감내하고 있다. 그렇다고 데레사 수녀를 행복과 거리가 먼 여자로 여기는

사람은 없다.

  하느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 때문에 숱하게 속을 끓이시고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으셨다. 전지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피조물로 인하여 과연 고통과 마음의 상처를 받으실 수 있는가? 철학이나 신학의 관점에서 접근하면 이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어렵겠지만, 사랑의

관점에서 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당신을 사랑해 주고 당신이 제시하신 생명의 길을 걸으며 행복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분에게서 받은 자유를 잘못 사용하여 그분을 배반하고 죽음의 길을 선택하여 불행에 빠져들었다. 하느님의 고통은 두 가지 사실 때문에 생겨났다. 하나는 당신이 손수 선택하신 백성이 당신을 배반했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셨고, 다른 하나는 그 백성이 잘못의 대가로 벌을 받으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셨다.

  우리는 여기서 고통이 사랑과 함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랑은 고통을 수반한다. 사랑에 인간의 자유가 전제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 한복판에는 인간의 자유라는 변수가 자리잡고 있어서, 언제나 진정한 사랑을 배신할 수 있는 가능성이 도사리고 있고 이 때문에 사랑이 고통을 낳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사랑과 고통의 부정적인 함수 관계이지만, 긍정적인 함수 관계도 있다. 사랑은 고통 안에서 또는 고통을 통하여 더욱 강렬하게 드러난다. 흔히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자식을 위하여 당하는 부모의 고통에 정비례한다.

  아무도 고통 그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느님도 싫어하신다. 사람이시며 동시에 하느님이신 예수께서도 십자가 처형 전날 올리브산

에서 기도하실 때, 당신의 아버지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마르14,36)하고 기도하셨다. 여기서 잔은 성서적 표현으로 고통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이처럼 싫어하신 고통을 왜 받으셨을까? 그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고통이 사랑을 통해서 찬란한 보석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하느님으로서 당신이 사랑하시는 인간의 고통에 동참하심으로써 당신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드러내시기 위해서였다.

  사랑을 위하여 또는 사랑 때문에 고통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 고통 가운데서 사랑이 더욱 강렬하게 드러난다는 사실,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통에 기꺼이 동참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사랑을 드러낼 수 있다는 사실들은 고통과 사랑의 함수 관계를 설명해 준다.

이제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분이라면,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실 텐데, 왜 우리로 하여금 처음부터 영원히 낙원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배려하시지 않으셨을까?"

  행복이란 무엇이고 구원이란 결국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위에서 하느님 편에서나 인간 편에서나 행복이 필연적으로 공통의 문제와

직결된 것이 아님을 밝혔다. 행복이란 사랑의 결실이다. 고통을 당하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 고통도 없고 사랑도 없는 곳은 낙원이 아니라 지옥이다. 그런 상태에 있는 인간은 삶을 지루하고 지겹게 느낄 뿐이다. 사랑만이 인간의 행복을 보장해 준다.

인간의 구원이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의 생명에 온전히 동참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 사랑에는 자유가 필수 전제조건이다. 진정한 자유가 없이는 진정한 사랑도 없다. 실낙원 이야기와 이스라엘과 하느님 사이의 사랑 이야기는 사랑과 자유와

고통의 함수 관계를 생생하게 설명해 준다.

  결론으로 말하자면, 자유와 사랑과 고통과 행복의 관계를 올바로 이해하면, 하느님께서 왜 당신 사랑의 상대역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자유를 주시어 그 결과 양편 모두가 고통을 겪게 하셨는지 깨닫을 수 있을 것이다.

첨부파일: Chu.hwp(9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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