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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의 삶- 어제와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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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하 [note] 쪽지 캡슐

2003-05-08 ㅣ No.3867

출처 : 삼토신학회

 출처 : 삼토신학회  

 

평신도 삶, 어제와 오늘 / 박명진

 
 

 

 
작성자 : 이창희 쪽지 회원정보
작성일 : 2002-02-01 오후 10:30:50 No. 4 조회 : 14
평신도 삶, 어제와 오늘 / 박명진


1. 비복음적인 한국의 상황

오늘의 한국은 우리말도 제대로 못하는 코흘리개 시절부터 영어 과외를 받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을 정도로 무서운 사회이다. 자라면 자랄수록 살아남기 위해 익혀야 할 기술적 과제는 많기만 하다. 인성 교육, 도덕 교육 부재니 하지만, 오직 합격에 목숨을 걸고 있다시피 하는 학부모들에겐 현실성 없는 공허한 이론으로만 들릴 뿐이다. 그러니 남을 배려할 틈은 전혀 없어 보인다. 이웃집 친구도 때로는 사촌 형제도 내가 넘어야 할 적이 된다.

왜 그럴까? 비좁은 땅덩어리에 너무 많은 인구,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인구의 도시 집중, 우리 민족의 입신양명형 출세지향주의, 가족이기주의 등 진단 방법에 따라 다양한 원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를 종합적으로 심도 있게 분석해 낼 능력은 없다. 다만 신앙인의 관점에서 내가 알고 있는 복음의 빛으로 판단해 볼 뿐이다.

걱정과 불안의 강도는 어떤 시대든 장소든 바로 그 자리에 서 있는 자에게 가장 크게 다가올 것이다. 이 말은 어떤 시대나 공간을 막론하고 항상 위기 상황은 항상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살고 있는 바로 그 자리가 복음 선포의 자리이고, 복음화의 장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한국의 비인간적이고 비복음적인 상황과, 이를 극복하여 복음적 상황으로 바꾸어야 할 일차적 책임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다고 하겠다. 한국 최대의 종교는 그리스도교로 인구의 4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가톨릭은 인구 구성 비율과 상관없이 한국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파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까지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는 사랑을 보여 주셨고, 교회는 그러한 사랑이 죽음을 넘어서는 참다운 생명임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겠다고 모인 공동체이다. 참다운 신앙인이란 예수님의 모습대로 오로지 세상 법칙이 아닌 하느님께만 순종하고,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의 현실은, 심하게 말해 그리스도교는 전파되었으나 복음의 메시지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복음적 삶이 제대로 실천되지 않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복음의 빛대로 사는 참된 그리스도인은 많으리라 믿지만 일반의 삶의 자리에서 만나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앞서 말한 그리스도의 빛을 발견하기란 그리 흔한 게 아니다. 대부분 자신이 교회임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세상을 복음화하는 데 앞장서기보다는 나와 내 가족의 구원과 안녕을 추구하기 위한 개인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 평신도의 자리

2. 1. 평신도와 비평신도
우리말로 평신도로 번역하는 laicus를 계급적인 측면으로 인식하면 거부감이 들지만, 기능적인 면에서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대부분의 평신도들은 신학적인 문제, 제도적인 측면의 교회에 대해 전문가인 사제보다 문외한인 것은 당연하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전문적으로 신학을 공부할 기회를 갖기 어려우며 또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평신도는 세속에 살면서 세속 일에 파묻혀 사는 이들이므로 대부분의 평신도들은 자기 능력과 주어진 여건에 따라 세상살이에 필요한 공부를 하고 기술을 익혀서 이를 바탕으로 먹고산다. 사제도 이 세상 밖에서 살지는 않으므로 세속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세속 일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소위 복잡다단하고 세분화된 현대 사회에서 자기 생계에 직접 관계되는 문제는 평신도들처럼 많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사제는 세속에 대해서는 특수한 신분이다. 사제를 포기하고 평신도로 돌아오지 않는 한 이들의 세상에 대한 태도는 평신도들처럼 보편적일 수 없다. 삶의 자리가 엄연히 다르다는 이야기이다. 다만 세상살이라는 것이 주님 손아귀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므로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답게 복음 정신에 비추어 충고도 하고 때로는 질책하고 항의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들의 말을 반성적으로 수용하더라도 직접 변화시키는 존재는 엄연히 평신도들이다. 가정과 일터와 이웃은 평신도의 일차적인 삶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제도상의 교회에서는 지적인 면이나 주도권이라는 측면에서 문외한 노릇을 할지언정 세상 삶에서는 평신도들이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계층과 차별을 인정하면서도 다양성을 지녔지만 모두 간택된 하나뿐인 백성이 교회라고 이해한다. 교회는 사제나 수도자만의 것이 아니라 평신도를 포함한 모두의 것이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공간이 제도적인 교회의 테두리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문외한이라는 의미까지 파생된 laicus라는 말은 억울할 게 없으며, 평신도의 분명한 역할과 사명을 일깨워 준다는 점에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제는 신자가 있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비록 교회의 구조가 사제 위주로 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신도들이 책임을 모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대부분 사제들이 독점하고 있는 신학이 신앙 생활에 도움을 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문맹인 사람도 모범적인 신앙 생활로 성인까지 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하느님께 관해서 알 만한 것은 하느님께서 밝히 보여 주셨기 때문에 너무나도 명백합니다."(로마 1,19)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우리는 양심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음성과 비록 이질적인 문화 배경과 지난날의 시간대에 씌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들을 귀 있는 자들은 성서의 말씀을 알아듣기 때문이다. 사제들이 평신도의 삶에 상당한 영향을 주지만 결국 신앙은 매순간 나의 결단이다. 하느님께서는 성령의 불씨를 아무 차별 없이 우리 모두의 마음에 심어 주셨지만, 자유까지 주셨으므로 불길을 지피고 안 지피고는 우리 몫이다.

2. 2.빛과 소금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받는 순간부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사명을 받는다. 그런데 평신도 가운데 빛과 소금은 사제나 수도자의 몫이고, 평신도는 빛을 받고 짠맛을 섭취해야 할 존재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평신도에게 자신을 태우고 녹여야 하는 빛과 소금이 되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일 수도 있다. 신앙과 생활의 분리가 단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러나 신앙이 실생활에서 구현되는 것이라면 빛과 소금도 제도적인 교회에서만 필요한 게 아니다. 온 세상을 밝혀야 하고 모든 이를 부패하지 않게 하려면 수많은 빛과 소금이 필요하다. 성직자나 수도자도 세상에 영향을 주지만, 결국 세상 속에 살며 세상의 성화에 직접 책임을 지는 게 평신도이다. 또한 제도적인 교회에서도 사제나 수도자만 평신도를 향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사제가 되고 수도자가 되었다 해도 인간에 불과한 그들은 부족할 수밖에 없다. 지식이나 맡은 역할이 미미한 게 평신도라 할지라도 증거하는 삶을 통해 성직자나 수도자를 각성, 분발시켜야 할 책임도 있는 것이다. 교회는 사제나 수도자들만이 아니라 평신도를 포함한 그리스도인 모두가 함께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3. 평신도가 복음화해야 할 자리

이 자리는 이 어려운 현실 속에서 평신도들이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살펴보는 시간이다. 먼저 생각해 볼 문제는 평신도 사도직을 여러 각도에서 논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도적인 교회의 테두리에 국한시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오늘날의 평신도 가운데 많은 이들이 '신앙 따로 생활 따로'라는 말을 들으며 산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의 생활에 비추어 보면 이 말들은 일견 맞는 말일 수도 있다.

주일 미사 참여도나 본당 활동에 대한 열성도가 판단 기준의 전부라면 '발바닥 신자'라는 말도 억울할 게 없다. 물론 상당 부분 성사 생활을 잘하고 본당 활동에 열성적인 사람을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노력하는 이로 보는 것은 잘못이 아니며, 본당 활동 역시 평신도 사도직 수행에 중요한 몫이다. 그러나 삶의 주무대가 세상살이인 평신도의 사도직 활동 범위를 본당이라는 공간적 틀에 국한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세상의 복음화는 세속에 파묻혀 사는 평신도들의 몫인데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책임을 사제들에게 전가하려는 평신도들이 있다. 우민화(愚民化)의 표본인 한국 가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난 지 30년도 넘었건만 아직도 사제와 평신도를 목자와 양떼로만 인식하고 있다. 교회의 중요한 의사 결정에 평신도들은 참여할 자격이 없고 그저 사제들의 결정에 따라야만 한다. 사제들은 신자들을 양산하는 데만 관심이 있지 이들의 질적 수준을 높이고, 세상 복음화의 주체로 성장시키는 데에는 무관심하다.

평신도는 여전히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아닌 미숙아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제도적 교회뿐 아니라, 세상 복음화를 위해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 불의하고 부정한 사회를 복음화하는 것이 평신도들이라 하지만 이런 여건이므로 세속 일에도 평신도들이 아닌 사제들의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편, 지난날과 현저히 달라진 시대 상황을 이유로 들기도 한다. 과거 한국의 평신도들은 대부분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다. 조선 시대의 사상적 지주였던 유교는 조선 말기에 이르러 더욱 심해진 신분상의 질곡과 서민들은 현실적으로 실천하기 어려운 예도에 빠져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기보다는 고통을 주는 굴레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등장한 가톨릭은 민초들에게 그야말로 복된 소식이었다. 이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에게는 가난하고 학대받는 처지가 영원한 행복의 보증수표였다. 오로지 하느님 나라, 곧 새하늘 새땅에 대한 기대로 꽉차 있었다. 그래서 순교까지 하면서 자기 신앙을 지켰지만 오늘의 현실은 다르다. 노력만 하면 얼마든지 잘살 수 있다는 것이다. 현세적 삶에서 만족을 추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에게 세상의 복음화가 절실하지 않다. 결국 신앙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3. 1. 모든 판단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인의 판단 기준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한다. 모든 일은 복음 말씀에 비추어 '예'와 '아니오'가 분명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 알려진 정치가들이 얼마나 말을 쉽게 바꾸고 얼버무리는가? 당면한 상황을 합리화하지만 실제는 자기 목적과 이익 때문이라는 것은 모든 국민이 다 안다. 다만 인간적인 측은지심으로 그냥 보아줄 뿐이다.

어찌 정치가들뿐이랴? 그리스도인 기업가들도 별로 다를 게 없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고 기업을 키워 나가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워 온갖 부정과 비리에 '아니오' 하지 않고 '예'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아니 한 발 앞서가기 위해서는 복음 말씀보다 세상 원리를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봉급쟁이인 공무원, 회사원들 역시 자기 이익을 위해 부정에 동조하거나 앞서기도 하고, 현재의 위치를 위해 선후배 동료를 짓밟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예외가 아니다.

오늘날 도저히 밝은 앞날이 올 것같지 않은 경제 위기의 근원이 부정한 권력에 빌붙어 경제 구조를 불의하게 왜곡시킨 재벌 총수에게만 있을까? 그들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그들의 충실한 주구(走狗) 노릇을 한 이들 중에 가톨릭 신자가 있다. 초등학교 자치회만도 못한 부끄러운 정치 현실이 제 어리석은 줄 모르고 날뛰던 대통령들에게만 책임이 있을까? 그들 주변에는 반드시 그리스도인, 이름난 가톨릭 신자들이 있다.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살벌한 분위기인 일터 한가운데에도 가톨릭 신자는 있다.

배움의 전당인 학교에도 불의를 가르치는 가톨릭 신자 교사가 있고, 이에 편승해서 이익을 챙기는 학생 중에는 가톨릭 가정이 출산하고 기른 아이도 있다. 이는 오늘날 한국 가톨릭의 상층화, 중산층화와 무관하지 않다. 최소한 자기의 앞가림은 하는 중산층 이상의 계급에서는 하층민의 질곡을 제대로 알지 못할 뿐더러 대부분 관심도 없다. 함께 잘살아 보려는 공동체 의식을 찾아보기 어렵고, 자기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급급한 게 현실이다.

결국 이들의 신앙은 개인적인 신앙에서 발전하지 못하고 다른 이들을 위한 사랑의 구체적 실천, 즉 세상의 복음화 실현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하면, 이들에게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기대가 실질적으로 없는 것이다. 아니 하느님은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내맡기고 그분의 뜻에 순종해야 할 존재라기보다 내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다인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지 2000년이나 지났고, 세계로 보나 우리 나라로 보나 최대 종교는 그리스도교이건만, 오늘도 여전히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에 의해 계속 못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있어야 한다.

마더 데레사나 비록 무명이어도 그녀 못지 않은 산 성인들이 이 혼탁한 이 세상을 정화시키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들이 교회 일반을 반영하지 않는 것은 마치 위대한 독립 운동가 안중근 의사가 천주교 신자라 해서 일제 시대에 천주교가 독립 운동에 앞장선 게 아닌 것과 같다.


3. 2. 가 정
일반 사회이든 교회든 가장 기초 단위는 가정이다. 가정이 흔들리면 사회가 혼란스럽게 되고 사회가 혼란스러우면 국가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교회 역시 건강해질 수 없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사회는 위기에 처해 있는 가정이 많다. 학자들은 이 위기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원인을 진단하며, 효과적인 치유책과 프로그램들을 개발해 내고 있다.

그런데 가정 내의 모든 불화와 갈등은 가족 구성원 상호간에 사랑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다. 이를 복음의 빛으로 보면 결국 하느님이 아닌 내가 모든 판단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각자가 자기 자아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이 자아가 부딪힐 때면 이를 쉽게 조정 극복하지 못하고 감정의 상처까지 입게 된다.

오늘날은 개인의 자유를 바탕으로 한 인권 신장과 자아 개발을 우선시하는 사회이다. 각 개인의 인권 신장과 자아 개발을 도모하는 것은 결코 탓할 것이 못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아직 열린 사회로 가는 길목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건전한 자아가 형성되어 있지 못한 이에게는 자아와 이기심이 혼동되기 쉽다.

자기의 자아가 중요한 만큼 다른 이의 자아를 존중하지 않기 못하기 때문에 자기의 생각과 다른 상대에게는 쉽게 적대감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족 구성원 모두의 인권과 자아가 존중되려면 상호간의 믿음과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투쟁적인 자세를 갖게 되어 대립과 갈등을 유발하고 심한 경우에는 가족이 해체되는 불행을 겪기도 한다. 이 가족에 대한 믿음과 사랑은 하느님께 근거를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식의 믿음과 사랑이 되어 상대 의사에 반하는 자기 주장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기 쉽다. 서로 사랑하는 가정의 구성원은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성장시킬 수 있기 때문에 솔직할 수 있고 어떤 역경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극복해 나간다.

우리 속담에 "아비에게 사랑 받지 못한 딸은 지아비에게 사랑 받지 못하는 지어미가 되고 지아비에게 사랑 받지 못한 지어미는 아들에게 사랑 받지 못하는 어미가 된다." 무서운 말이다. 어찌 딸과 아내와 어머니뿐이랴? 가족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이다.

어린이의 자아를 가장 구체적으로 성장시켜 줄 수 있는 존재는 결국 부모이다. 참된 자아를 존중하는 가정에서 생활하지 못한 어린이는 자기 자아도 남의 자아도 존중할 수 없게 된다.
요즘 우리 나라 평신도들 가운데는 신앙 교육이 사제나 수도자, 주일학교 교사들의 손에 의해 주일학교에서나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 현대는 교육을 체계화하였고 제도화하였다. 이런 면에서 주일학교는 필요하다.

그러나 지식을 배제해서는 안 되지만 신앙은 삶 자체이다. 어린이에게 가장 영향을 주는 것은 부모이다. 부모가 믿는 이답게 살지 못한다면 주일학교 교육은 지식 교육으로 머무를 가능성이 크다. 사제나 수도자, 주일학교 교사가 부모의 몫까지 맡을 수는 없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 부모 밑에서 자라면 사랑이 어색하고 공허한 개념으로 박히고, 참다운 신앙인으로 살아가지 않는 부모 밑에서 자라난 어린이가 훌륭한 신앙인이 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어느 정도 영향을 주고 체계화하는 것은 사제, 수도자, 교리 교사가 한다 해도 먼저 씨앗을 뿌리고, 체계화한 것을 삶 속에 실재화하는 것은 부모의 몫이다.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기도의 의미와 필요성을 제대로 깨닫고 생활화한 부모 밑에서 자라지 못한 어린이들은 기도 자체가 어색한 행위이기 쉽다.


3. 3. 이 웃
오늘날 시골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도시민들은 일터와 삶의 자리가 떨어져 있다. 일터에서 만나는 이웃과 보금자리에서 만나는 이웃이 다른 경우가 많다. 이웃이 다양해졌다는 것은 여러 공통 분모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도 된다.

그래서 한결같은 태도를 취하기는 어렵고, 모두에게 똑같이 대할 수 없다 보니 가옥 구조 때문이 아니더라도 자신을 쉽게 드러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바로 이웃집 사람이 자기 집 정원수보다 못한 경우도 생길 것이다. 더구나 다종교 국가인 한국은 대화를 시도하기는 하지만 대립하는 경우가 더 많아 이웃이 서로 화합하는 데 도움보다는 장애를 초래하는 경우가 더 많다.

선조들은 대부분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다. 비록 외따로 떨어져 살아도 교우들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일터와 이웃이 일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부터 교우들끼리 모여 마을을 이룬 곳도 있지만, 비신자들이 전부인 마을에 혼자 들어가 이웃을 모두 입교시킨 곳도 많았다. 그래서 그들은 생계와 신앙 생활이 함께 이루어졌다.

그들도 갈등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비록 가톨릭으로 개종하였으나, 그들 심성에는 유교적 덕목인 인내와 관용이 있었고, 농경 사회에서 생존하는 데 중요한 요건인 공동체 정신이 있었으므로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개화기 이후 한국 사회는 서구의 물질 문명에 커다란 혜택을 받아 제도나 생활 환경은 서구화하였지만, 우리의 의식 세계는 혼돈에 처해 있다. 잘못된 이기주의와 물질주의가 판을 칠 뿐 전통적인 동양의 종교도 서구에서 들어온 그리스도교도 우리의 완전한 정신적 지주 역할을 못하고 있다. 해결책을 제시하는 이는 많아도 현실화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예수님은 기다리지 않으셨다. 언제나 찾아가셨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반긴 것만은 아니다. 박대는 물론 모욕까지 당한 적이 더 많았다. 그러나 결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었다. 굳게 닫혀 있을수록 더 세게 두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확신이 없다. 그저 망설이고 있을 뿐이다.


3. 4. 일 터
오늘날의 일자리는 옛날에 비교해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다양해졌고 한치도 앞을 볼 수 없을 만큼 변화가 극심하며 잠시 한눈을 팔다가는 도태되기 쉬운 극심한 경쟁 사회이다. 구조적 모순과 강자의 횡포는 복음 말씀보다 더 위력이 있다.

온갖 불의와 부정을 마주해야 하는 현실에서 갈등하는 그리스도인, 포기하는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이라는 자각마저 잊고 사는 이도 있다. 그래서 한 개인의 신앙 생활로 그치고 마는 공간이 되기 쉽다. 정당하게 살기 위해 개선하고 싶지만 누구나 쫓겨날 각오로 투사가 될 수도 없고 순응하자니 양심에 걸린다. 또 옳지 않은 줄 알지만 이왕 누리는 특권을 놓치고 싶지 않다.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확실하게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 신앙이란 한 인간의 행동 윤리에 절대적 가치 기준을 제공하는 정신으로 나타나야 한다. 신앙인에게는 자기 직업을 통하여 사회 공동체에 필요한 역할을 제공하고, 이로써 하느님의 창조 사업을 계승한다. 직업의 역할 속에서 세상의 악인 불의와 부정과 폭력을 거슬러 하느님의 선과 정의와 양심을 증거해야 한다. 옛날의 일터든 오늘의 일터든 결국 인간들이 모여 있는 곳이며, 상황이 달라졌다고 해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방법에만 있지 않다. 신념과 자세가 더 중요하다. 복음 말씀대로 사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또 바보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짜 바보는 잠시의 안존과 유지를 위해 악과 불의에 굴복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영생은 고사하고 결코 그 자리마저 오래 붙어 있을 수 없다. 배교자들이 처음에는 환대를 받았지만 이용가치가 다 되면 가차없이 내팽개치던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세상의 법은 시대에 따라 변하고 그 법에 의해 버림도 당하지만, "하느님 아버지는 변함도 없으시고 우리를 외면하심으로써 그늘 속에 내버려두시는 일도 없을"(야고 1,17) 것이다.
그냥 놓아두면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 내가 먼저 변해야 한다.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높은 지식도 권력도 재물도 아니다.

오직 하느님과 다른 이들 앞에 겸손해지는 것이다. 겸손한 사람만이 복음의 빛을 자기의 전 존재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 복음의 빛으로 사는 사람만이 자기 가정을 성가정으로 만들고, 그냥 옆집 식구나 일터의 동료를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형제로 변화시킬 수 있으며, 나아가 밝은 사회, 꿈이 있는 나라를 이룩하는 주춧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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