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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 글자의 의미에 대한 전공 교수님들의 견해들 외.. 799_justice [교리학습_의로움] [교리학습_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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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6 ㅣ No.836

 
+ 찬미 예수
 
다음은 지난 주에 전공 교수님들께 문의하여 알게 된 내용들입니다.
그리고 제가 추가적으로 확인한 내용들입니다.
 
 
[
내용 추가 (추가일자: 2009년 3월 10일)
 
한학을 전공한 분들(사제들 포함)에게 지금까지 문의한 바로는, 그런 개념은 義에 없다고 합니다. 이 정의의 개념은, 예를 들어, 구약 성경 중의 레위기 19,15 이전에 이미 있었기에, 이와 같은 근거 자료의 제시 없이, 한자 문화권이 이 정의의 개념을 인지한 것이 지중해 문화권보다 "천 년은 더 되었다" 혹은 "더 오래 되었다"고 단정적으로 주장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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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자 주: 이 문제에 대한 결론에 도달하려면, 우선적으로, 義 글자가 사용된 한문 문장으로서, 기록된 시기가 적어도 기원전 1200년 이전(즉 적어도 기원전 13세기 이전)인, 한문 문장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義 글자를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정의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를 검토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지금부터 약 3200년 전에 義 글자가 사용된 한문 문장은 없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이를 위하여, 우선적으로, 다음의 확인을 하여야 하겠다.. 하는 생각입니다. 이는 후한(後漢)의 허신(許愼)에 의하여 저술된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글자의 뜻을 설명하기 위하여 인용하는 여러 문헌들 중에 가장 오래된 문헌이 주역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i) 주역(周易, 易經)의 8괘(卦) 및 64괘들 중에 義 글자는 없습니다. (이미 확인 하였습니다).
(ii) 괘사(卦辭)에 義 글자가 사용되고 있는지, (괘사 중에 없다는 것을 이 글에서 확인합니다).
(iii) 효사(爻辭)에 義 글자가 사용되고 있는지, (효사 중에 없다는 것을 이 글에서 확인합니다).
(iv) 주역 본문 중의 공자님의 말씀에 義 글자가 사용되고 있는지,
(v) 그리고 주역의 십익(十翼)들 중에 義 글자가 사용되고 있는지를,
 
순서대로 찾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 이렇게 찾아 보아야 하느냐 하면, 주역 중의 어느 한문 문장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는지가, 그 최초 사용 연대를 추정하는 데에 상당히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고: 주역의 괘사(卦辭)를 기록한 사람은, 주나라를 세운 무왕(武王, ? ~ 기원전 1043년?)의 아버지인, 문왕(文王, ? ~ 기원전 11세기경?), 그리고 주역의 효사(爻辭)를 기록한 사람은, 문왕의 형제이며 무왕의 삼촌인, 주공(周公)으로 배웠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주역의 본문 중에서 이 괘사들과 효사들에 대한 주석을 공자님(기원전 552-478년)께서 다셨기에, 공자님이 주역의 마지막 저자라고 배웠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십익(十翼)의 저자(들)는 공자님이 아니라고 배웠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주: 무려 28년전에 배운 것에 대한 기억이라, 재확인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이 기억에 대한 사실 확인 결과는 아래의 제 1-1항에 있으니,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내용 추가일: 2009. 03. 12]
1.
다산 정약용 선생의 여유당전서에 실린 주역사전(周易四箋)[주: 실제로 컴퓨터를 사용하여 검색시에 사용한 파일은 주역사전에 토를 단 책인 "주역사전구결"임]에서, "뜻"과 "올바름"을 의미하는 義 글자를 제외하면서, 義 글자를 사용하고 있는 문장 중에서 유의미한 문장 한 개를 지인의 도움으로 찾게 되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중천 건(乾)괘를 설명하는, 십익(十翼) 중의 하나인, 문언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利者義之和也
 
이 구절에서 義 글자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하여, 언제, 어디에 살고 있는, 누가, 이 구절에 대하여 어떠한 해설을 하였는지 및 해설의 내용을 찾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용 추가일: 2009.03.16]
2.
그런데 다음의 홈페이지에 실린 주역(Book of Changes)의 본문을 검색하면, 문언전에 있는 위의 구절이 검색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문언전을 주역의 일부로 인정하지 않고 있음 때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주: 이에 대한 전공 교수님 한 분의 설명은 아래에 있습니다):
 
 
직접 이 검색 결과를 살펴보시면 알 수 있겠습니다만, 단전(彖傳) 상·하편, 상전(象傳) 상·하편, 계사전(繫辭傳) 상·하편의 거의 대부분 문장에서 "뜻"의 의미로 義 글자를 사용 중인 것을 알 수 있으며, 이와는 다르게 "올바름"의 의미로 사용한 경우들이 또한 십익의 일부분인 이들에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 검색 결과에 의하면, 주역의 괘사(卦辭) 혹은 효사(爻辭) 중에는 義 글자가 전혀 사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용 추가일 2009.03.15]
1.
동양문헌을 전공한 원로 교수님(A)의 말씀에 의하면, 주자(朱子, 朱熹)께서 문언전()을 자신의 저서인 주역본의(義)편입/편집하였다고 하며, 그 시기는 12세기이며, 송[남송] 시대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주역을 연구하였던 중국의 한학자들이 주자님께서 문언전을 주역에 편입한 것을 비난하는 글들이 이에 대한 증거로 꽤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한 문언전의 문체는 주역의 다른 글들의 문체와 상당히 다르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교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義 글자에 대한 그러한 개념이 대한화자전에 용례로서 언급이 없으면, 한문 문화권에 없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이 대자전은 정말로 엄청난 양의 방대한 양의 문헌적 출처에 근거한 용례들을 제공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언전이 주역에 편입/편집된 것이 12세기 정도이거나, 혹은 더 나아가 문언 중의 利者,義之和也란 표현이 주역의 일부분이 된 시기가, 적어도 공자님께서 태어나시기 13년전(기원전 565년경) 보다 이전이라고 하더라도, 만약에 그러한 義 글자의 해석이 12세기쯤에 문헌상으로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다면, 중국은 그 시기 이전부터 이미 지중해 문화와의 교류를 해 왔을 것이므로, 지중해 문화권의 justice의 정의(definition)를 학습을 통하여 배워, 12세기 이후부터는 이 義 글자의 해석을, 228년에 살해당한 로마 제국의 법학자인 울피아누스의 정의(definition)를 참고하여, "(자신이 포함된) 각자의 몫"으로 해석하였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입니다.
 
[내용추가4 날짜: 2009.03.17]
다음의 내용에 의하면, 주자님께서 어떠한 작업을 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朱子는 易經을 연구하여 易經의 철학적 중요성을 인정하였을 뿐 아니라 그 예언적 속성을 믿었습니다. 그의 周易의 集註라고 할 ?周易本義?에 그 철학적 의미의 설명과 동시에 周易의 본연적인 예언적 구실을 복구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朱子는 紀元 前後 以來의 과오를 삭제해 匡正하고 古本에서 十翼을 떼어 냈습니다.
 
위 내용은 다음의 논문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이상, 내용 추가4 끝].
 
[내용 추가3 날짜: 2009.03.16]
1-1. 위의 제1항에서의 다음 언급
 
"주자(朱子, 朱熹)께서 문언전()을 자신의 저서인 주역본의(義)에 편입/편집하였다고 하며, 그 시기는 12세기이며, 송[남송] 시대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주역을 연구하였던 중국의 한학자들이 주자님께서 문언전을 주역에 편입/편집한 것을 비난하는 글들이 이에 대한 증거로 꽤 남아 있다"
 
에 대한 추가 설명을, 다산 정약용 선생님께서 주역사전 중에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약용 선생님은, 주역사전에서 문언()의 근거를 " 문언이 중국 고대의 자서 ( 字書 )로 이아 (爾雅)나 설문( 說文 )과 같은 종류로 주로 역에 대해 주서 ( 註釋 )로, 공자가 태어(공자 출생-양공 22년에 출생)나기 13년전 (양공 9년, 기원전 552 + 13 = 565년경)에 목강 (穆姜 )이 이미, 이후에 문언(文言)의 글(詞 )로 실린, 글을 언급하고 계십니다.
[: 사실 목강은 문언이라는 언급이 아니라 주역(周易)이라고 언급하고 있음을 다음의 한문에서 확인할 수 있음] 
 
다음의 발췌문은, 정약용 선생님의 추가 설명의 근거가 사실임을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
 
우선 아래의 제5항의 발췌문을 보아주십시요. 파란색칠을 한 부분을 근거로 하여 다음의 자료을 찾아 낼 수 있었습니다:
 
春秋, 襄公九年,
......
穆姜薨於東宮,始往而筮之,遇艮之八,史曰,是謂艮之隨,隨其出也,君必速出,姜曰,亡,是於周易,曰,隨元亨利貞,咎,元,體之長也,亨,嘉之會也,利,義之和也,貞,事之幹也,體仁足以長人,嘉德足以合禮,利物足以和義,貞固足以幹事,然故不可誣也,是以雖隨●咎,今我婦人而與於亂,固在下位,而有不仁,不可謂元,不靖國家,不可謂亨,作而害身,不可謂利,棄位而?,不可謂貞,有四德者,隨而無咎,我皆無之,豈隨也哉,我則取惡,能無咎乎,必死於此,弗得出矣。
......
 
출처: 春秋, 襄公九年, 穆姜薨於東宮 ... (클릭하십시요)
  
 ----------
 
따라서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이 지적은, 문언이 흔히  공자가 주역에 대해 붙인 주석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문언은 적어도 공자님께서 태어나시기 이전에 이미 문장으로 주역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파악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지적이 있는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주역사전의 해당 구절 바로 다음에는, 어떠한 과정을 거쳐 문언이 공자님께서 붙인 주석이라고 잘못 알려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정약용 선생님의 설명이 또한 주어져 있습니다.
 
[내용 추가6, 날짜: 2009.03.19]
다음은 이 설명입니다:
 
史記의 孔子世家와 及漢書의 儒林傳에 竝列之於十翼하니 蓋孔子께서 引用文言하여 以爲易傳이어늘 而後之儒者遂認孔子所作이니 謬矣니라.
 
위에서 현토 및 구결은 (1981-1984년 동안에 제가 가르침을 받았던) 함재 김재홍 선생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함재 김재홍저 주역사전구결, 제76쪽 참고]. 이 구절에 대한 저의 졸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마천이 저술한) 사기의 공자세가와 (반고가 저술한) 한서의 유림전에서 열 개의 날개로 나열하였으니, 그리고 공자님께서 문장의 어구(文言)를 인용함을 두고서 역전(易傳)이라 불렀던 것이어늘, 그러나 후대의 유생들이 드디어 공자님의 작품이라 인식하니 착오를 하였음이라.
[이상 내용 추가6 끝].
----------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을 우리가 안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포함한) 각자의 몫"이라는 주자님의 주석이 있기 이전에, 문언전의 이 구절에 대한 이러한 해석이 언제 최초로 있었는지는, 여전히 모르고 있습니다.
 
아래의 제2항에서 언급된 내용을 참고하여, 유학의 4가지 기본 덕들인 "인, 의, 예, 지"를 구체적으로 정립한 시기가 송 나라 말기 경인 주자님 시기라고 할 때에, 다른 문헌적 증거가 나올 때까지는, 이와 같은 주자님의 해석이 최초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참고입니다만, 제가 1988년부터 소장하고 있는, 1924년에 독일인 Richard Wilhelm이 독일어로 번역한 주역을 Cary R. Baynes가 다시 영어로 번역한 주역의 영어 번역본(1987년판, 저서명: The I Ching or Book of Changes)의 중천 건괘에 주어져 있는 설명 중에서 다음의 설명이 흥미롭습니다. 단 괄호 안의 글자는 이해를 돕기 위하여 해당 글자들을  제가 삽입한 것입니다:
 
Another line of speculation goes still further in separating the words, "sublime(원)", "success(형)", "furthering(이)", "perseverance(정)," and parallels them with the four cardinal virtues in humanity(인,예,의,지). To sublimity, which, as the fundamental principle, embraces all the other attributes, it links love(인). To the attribute success are linked the mores(예), which regulate and organize the expressions of love and thereby make them successful. The attribute furthering is correlated with justice(의), which creates the conditions in which each receives that which accords with his being, that which is due him and which constitutes his happiness. The attribute perseverance is correlated with wisdom(지), which discerns the immutable laws of all that happens and can therefore bring about enduring conditions. These speculations, already broached in the commentary called Wen Yen, later formed the bridge connecting the philosophy of the "five stages (elements) of changes," as laid down in the Book of History(Shu Ching, 서경, 書經) with the philosophy of the Book of Changes, which is based solely on the polarity of positive and negative principles.
 
참고: 위에서 영어로 설명하고 있는 justice에 대한  파란색칠을 한 설명은, "자신이 포함된 각자의 몫"으로, 울피아누스가 정의한 justice의 정의(definition)와는 "자신의 포함 여부" 때문에, 상당히 차이가 난다는 생각입니다. 위의 영문은 문장 중에 speculation이라고 언급함으로써 이 부분이 번역자인 Wilhelm의 추측임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래의 (독일어본으로부터 영문으로 번역한 번역자의) 주석 (7)을 또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위의 영문본 주역에서, 문언전에 있는 해당 문장의 번역
(주: 소장 중인 영어본 주역의 제376page에 있음)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래에서 해당하는 한문 구절을 굵은 글씨로 제가 표시하였으며, 이 다음에 이어지는 파란 글씨 구절이 바로 영어 번역문입니다:
 
元者,善之長也,亨者,嘉之會也,利者,義之和也,貞者,事之幹也
 
a) 1. Of all that is good,  sublimity is supreme. Succeeding is the coming together of all that is beautiful. Furtherance is the agreement of all that is just. Perseverance is that foundation of all actions.
 
그런데, 이것이 포함된 해당 문언전의 구절들(a 1)에 대한 다음의 설명에서, 여기서의 just가 무슨 뜻인지에 대한 독일인 Wilhelem의 설명이 다음과 같이 주어져 있으나,
 
Here the four fundamental attributes of the hexagram are related to the four cardinal virtues of Chinese ethics. Sublimity is correlated with humaneness, success with the mores, furtherance with justice, and perseverancw with wisdom.(7)
 
이 설명에 대한 (독일어본으로부터 영문으로 번역한 번역자의) 주석에서, 이 설명은 주역에 없으므로, 독일어로 주역을 번역한 Richard Wilhelm의 해설이라는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7) [In the German rendering, these correlations are stated in four sentences so printed that they appear as a passage from the Wen Yen(문언). Actually they do not occur in Wen Yen. It is to be assumed therefore that they are part of Wilhelm's comment on a 1.].
 
Wilhelm이 이러한 해설을 한 것에 대한 저의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1) Wilhelm이 주역본의에 실린 주자님의 "각자의 몫"이라는 해설을 직접 읽었거나,
(2) 중국인 선생으로부터 이러한 주자님의 해설을 전해 들었거나, 아니면
(3) 자신이 이미 독일에서 교육을 통하여 배워 알고 있는 "justice"에 대한 지중해 문화권의 개념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君子體仁足以長人,嘉會足以合禮,利物足以和義,貞固足以幹
 
a) 2. Because the superior man embodies humaneness, he is able to govern men. Because he brings about the harmonious working together of all that is beautiful, he is able to unite them through the morses. Because he furthers all beings, he is able to bring them into harmony through justice. Because he is persevering and firm, he is able to carry out all actions.
 
The four fundamental attributes of the Creative are likewise the attributes necessary to a leader and ruler of men. In order to rule and lead men, the first essential is to have humane feeling toward them. Without humaneness, nothing lasting can be accomplished in the sphere of authority. Power that infulences through fear works only for the moment and necessarily arouses resistance as a countereffect.
    On the basis of this conception, it follows that the mores are the instrument by which men can be brought into union. For nothing binds people more firmly together than deeply rooted socail usages that are observed because they appear to each member of society as something beautiful and worth striving for.
     Wherever it is possible to construct a framework of mores in which each person feels content, it is easy to unify and organize the masses. Furthermore, as the foundation of social life there must be the greatest possible freedom and the greatest possible advantage for all. These are guaranteed by justice, which curtails individual freedom no more than is absolutely necessary for the general welfare. Finally, to reach the desired goals, there is the fourth requisite of wisdom, manifesting itself by pointing out the established and enduring paths that, according to immutable cosmic laws, must lead to success.
 
君子行此四德者,故曰「乾:元、亨、利、貞」。
 
 a) 3. The superior man acts in accordance with these four virtues. Therefore it is said: The Creative is sublime, successful, furthering, persevering.  
 
d) 1. ... (初九에 대한 문언전 설명의 번역이라 생략함).
 
d) 2. ... (九二에 대한 문언전 설명의 번역이라 생락함.
 
Here the attributes are again summed up in pair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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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Wilhelm이 그의 독일어 번역본의 서문에서 이미 밝혔듯이, 일단 그가 독일어로 주역 전문을 번역한 후에, 이것을 다시 중국어로 재번역하여 내용 검토를 하였다고 하는데, 바로 이러한 과정을 거침으로써, 직역 번역(그리고 그 내용 전달)에 만전을 기하였다는 생각입니다:
 
The translation of the text was made after detailed discussion. Then the German version was retranslated into Chinese and it was only after the meaning of the text had been fully brought out that we consider our version to be truly a translation.
 
교회 문헌들의 번역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을 위하여 이것을 말씀드립니다만, 우리말 번역 시에 우리도 또한 이런 과정을 염두에 두고서, 직역 번역에 만전을 기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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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제가 1980대부터 소장하고 있는 Ralph Gun Hoy Siu (1917 – 1998)의 책(제목: The Portable Dragon, The Western Man's Guide to the I Ching, MIT Press, 1973년판)의 중천 건괘에 대한 설명에는 다음의 구절이 있습니다:
 
The over-all judgment: creativity comes from awakening and directing men's higher natures, which originate in the primal depths of the universe and are appointed by Heaven. To achieve the high status, the superior leader displays benevolence(인), harmony in all that is right(의), complete propriety(예), and perseverance(지) in correc behavior.
 
바로 이 구절 다음에는, 묵상용 글로서, King Hammurabi, Babylonian (기원전 1955-1913년)의 (금석문) 기록이 이어지고 있는데, 이 기록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끝나고 있습니다:
 
...
 
I wrote my precious words on my stela,
and in the presence of my status as the king of justice
I set (it) up in order to administer the law of the land,
to prescribe the ordinances of the land,
to give justice to the oppressed.
KING HAMMURABI, BABYLONIAN(B.C. 1810 추정- B.C. 1750 추정)
 
참고: 문언의 최종 형성 시기에 대한 고찰은 다음의 글을 참고하십시요:
 
상, 문언의 형성 시기 (클릭하십시요)
 
[이상 내용 추가3 끝]
 
 
2.
그리고 위의 원로 교수님이 아닌 다른 전공 교수님(B)의 말씀에 의하면,
 
利者義之和也
 
에 和 글자의 사용으로 보아 이 문장은, 나를 배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태까지 이 교수님이 학습하고 연구해 온 바에 의하면, 한문 문화권에서는 나를 배제한 정의(justice)의 개념은 자신의 기억에 전혀 없으며, 아마도 이를 뒷받침할 문헌을 찾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동양의 한문 문화권에는 지중해 문화권과는 달리, 항상 나와 상대방과의 사이의 인간 관계를 대전제로 하고 있기 떄문이라고 합니다. 즉, 상대가 없으면 인간 관계가 성립하지 않으므로, 이 인간 관계의 상대로서 "나"가 없는 것은 한문 문화권에서는 아예 생각조차 할 수도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학의 4가지 기본 덕들인 "인, 의, 예, 지"를 구체적으로 정립한 시기가 송 나라 말기 경인 주자님 시기라고 말씀하시면서, 따라서 유학 이외의, 예를 들어, 노자 사상에서 義 글자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도 살펴보면 좋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3.
(갑골)문자학을 전공한 교수님(C)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義 글자는 갑골문에 나오고 있으며, 왕이 하늘과 대화하는 과정에 등장한다고 하며, 설문해자는 분서갱유 이후 한나라에 남아 있던 주역을 인용하고 있어 설문해자의 글자에 대한 해석의 폭이 좁다고 합니다. 그리고 갑골학이 1895년 이후로 처음으로 학문적으로 다루어지게 되었기에, 설문해자는 "갑골문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고 하며, 설문해자는 금석문(즉, 비문)에 대한 해설에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義 글자에서 "양" 아래에 위치한 "아" 글자는 무기를 뜻한다고 하며, 문자학 분야의 용례를 담은 자전들 몇 개를 들여다 보아도 "나를 포함하지 않은 각자의 몫"이라는 용례는 없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나중에라도 별도로 시간을 내어 이런 의미의 용례가 있는지를 집중적으로 찾아 보실 생각이라고 합니다.
 
4.
다른 전공자 교수님(D)의 말씀에 의하면, 11세기경인 송나라 시기에 도달하면 비로소 義 글자에 대하여, 공정(公正)을 언급하는 해설이 자전에 용례로서 등장하며, 16세기에 이르면 공익성(公益性)을 언급하는 해설이 자전에 용례로서 처음 등장하고 있다고 하면서, 저에게 팩스로 본인이 참고한 자전의 사본을 보내 주셨습니다..
[주: 이 자료는 설명시에 간자체를 또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대만 포함)에서 출판한 자전으로 생각됨].
 
5. 
[내용추가2: 2009.03.16]
다음은 주자님의 주역본의

周易本義

南宋〕朱熹注

중의 중천 건(乾)괘에 대한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언전 본문(그리고 이 부분에 대한 주자님의 주석)입니다. 중간의 빨간색칠 한 부분에서, 其分[(자신이 포함된) 각자의 몫]을 주자님께서 주석 중에 언급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文言》曰:元者,善之長也,亨者,嘉之會也,利者,義之和也,貞者,事之幹也

長,丁丈反。下「長人」同。幹,古旦反。此篇申《彖傳》、《象傳》之意,以盡《乾》、《坤》二卦之蘊,而餘卦之說,因可以例推雲。元者,生物之始,天地之德,莫先於此,故于時?春,於人則?仁,而?善之長也。亨者,生物之通,物至

於此,莫不嘉美,故于時?夏,於人則?禮,而?美之會也。利者,生物之遂,物各得宜,不相妨害,故于時?秋,於人則?義,而得其分之和。貞者,生物之成。實理具備,隨在各足,故于時?冬,於人則?智,而??事之幹。

幹,木之身而枝葉所依以立者也。

君子體仁足以長人,嘉會足以合禮,利物足以和義,貞固足以幹

以仁?體,則無一物不在所愛之中,故足以長人。嘉其所會,則無不合禮。使物各得其所利,則義無不和。貞固者,知正之所在而固守之,所謂知而弗去者也,故足以?事之幹。

君子行此四德者,故曰「乾:元、亨、利、貞」。

非君子之至健,無以行此,故曰「乾:元、亨、利、貞」。此第一節,申《彖傳》之意,與《春秋傳》所載穆薑之言不異,疑古者已有此語。穆姜稱之,而夫子亦有取焉,故下文別以「子曰」表孔子之辭。蓋傳 者欲以明此章之?古語也。

 

출처 1 : http://arts.cuhk.edu.hk/~hkshp/cclassic/songming/ZhouYiBenYi.htm (클릭하십시요)

출처 2: 周易本義 및 해설에 대한 일본어 번역이 있는 자료 (클릭하십시요)

 

[이상 2009.03.16 내용추가2 끝] 

 

[내용추가5 날짜: 2009.03.17]

다음은 문언전에 나오는 "其分"을 "(자신을 포함한) 각자의 몫"으로 주자님께서 주석으로 설명을 하고 있는 부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는, 인권(human rights)에 관한 논문(제목: A Role for Chinese Philosophy in the Promotion of Human Rights)입니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께서는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第三個美德「義」是給每人他應該受的尊重,等於人權詞彙的非?視或平等?念。

 

http://www.hfu.edu.tw/~lbc/BC/9th/Paper/1A-2.pdf (클릭하신 후에 제 9쪽 내용을 참고하십시요)

 
특히 이 논문은   "其分"을 "(자신을 포함한) 각자의 몫"으로 설명을 한 분이 주자님이라고 인용하고 있는데, 이러한 인용 자체가 바로 이러한 해석을 문헌적으로 최초로 제시하셨던 분이 바로 주자님이라는 것을 뒷받침할 것입니다. 즉, 한문 문화권의 경우에 있어서는, 12세기경에 와서야 비로소 주자님의 주석에 의하여 "(자신을 포함한) 각자의 몫"이라는 개념이 등장하였음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이, 예를 들어, 한화대자전과 다른 자전들에도 용례로서 전혀 실리지 않았는데, 이것은 이 개념이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한문문화권에서 義 글자의 주된 의미로 자리잡지 못하여 왔음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들로부터, 우리는 다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우리민족을 포함한 한문 문화권에는 적어도 12세기까지 없었던 개념이 바로 지중해 문화권의 정의(justice) 개념이었다는 잠정적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2) 그리고 주자님께서 자신의 주역본의 중천 건괘 문언의 각주로서 말씀하고 계시는 바로 이 "(자신을 포함한) 각자의 몫"은, "자신을 포함하지 않은 다른 이들의 몫"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지중해 문화권의 정의(justice)의 개념과는 동일하지 않은 개념임을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3) 특히 주자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 다산 정약용(1762-1836년) 선생님의 "주역사전"에서도 해당 문언전 구절을 설명하실 때에 주자님의 이러한 해석을 언급하지 않고 있는 점에 비추어 볼 때에, 지중해 문화권의 정의(justice)의 개념에 대하여 정약용 선생님께서 모르고 계셨을 뿐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18세기에 이르기까지도, 한문 문화권에 제대로 소개되지도 않았을 수 있다는 잠정적 결론을 내리게 합니다.
 
[이상, 내용추가5 끝]. 
 
 
참고: 위의 전공 교수님들께서는, 작년부터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지중해 문화권에서의 justice의 정의와 한문 문화권에서의 義 글자의 정의를 비교/대조하려는 저의 노력에 상당한 관심을 보입니다. 이 비교와 관련된 한문 문헌적 근거를 찾아 주실 것을 부탁을 드렸는데, 다들 상당한 관심을 보이면서 별도의 시간을 내어서라도 나름대로 잘 챙겨 보겠다고 합니다. 이 분들의 지금까지 및 앞으로의 협조에 대하여 깊이 감사드리면서, 추후에라도 다른 내용을 알게 되면 이 글에 추가할 생각입니다.
 
작성자: 소순태 마태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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