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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가 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낸다??? - 로마 3,5-8 및 관련된 교회의 가르침 [성경공부] [교리학습] [_주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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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20 ㅣ No.1018

 
 
게시자 주:
 
4시간 이상을 들여 주신 질문에 대한 상당히 충실한 답글을 작성하였는데, 매우 유감스럽게도 글을 올리는 과정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다 지워져 버렸습니다. 다시 딥글을 작성하여하 하는데, 아까운 시간을 또 내어야 하니, 상당히 답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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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로마 3장 1~8절중에....

5~8절이 이해가 안가는데 잘 설명 해주실분 없나요?....

이떻게 말을 하고 있는지 하고....

그 말의 뜻을 알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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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 찬미 예수님
 
다음은 새 번역 성경의 로마서 3,5-8 전문입니다:
 
5 그런데 우리의 불의가 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낸다면,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인간의 방식으로 말해서, 하느님께서는 진노를 내리시므로 불의하시다고 해야 합니까?
6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야 하느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겠습니까?
7 나의 거짓으로 하느님의 진실하심이 더욱 돋보여 그분 영광에 보탬이 된다면, 왜 내가 여전히 죄인으로 심판을 받아야 합니까?
8 더 나아가서 “악을 행하여 선이 생기게 하자.”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어떤 자들은 우리가 그런 말을 한다면서 우리를 비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들은 합당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다음은 NAB 로마서 3,5-8 전문입니다:
 
5 But if our wickedness provides proof of God's righteousness, what can we say? Is God unjust, humanly speaking, to inflict his wrath?
 
(졸번역) 5. 만약에 우리의 사악함이 하느님의 의로움에 대한 증거를 제공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말해야 합니까? 하느님께서, 인간적으로 말하여, 당신의 진노를 과하기에 의롭지 않으시다는 것입니까?
 
Of course not! For how else is God to judge the world?
7 But if God's truth redounds to his glory through my falsehood, why am I still being condemned as a sinner?
8 And why not say--as we are accused and as some claim we say--that we should do evil that good may come of it? Their penalty is what they deserve.
 
 
 
주신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드림에 있어, 독자들의 이해를 또한 도와드리지 않으면 제가 드리는 답변을 이해하는 데에 필요 이상의 막연한 어려움을 느끼는 분들이 간혹 계실 것이 예상되어, 로마서 3,5-8에 대한 국내의 가톨릭측의 해설/주석들을 접하는 것이 어떠한 이유로 힘든 것인지에 대한 간략한 설명(제1항)로마서의 저술 당시의 주변 정황들 등에 대하여(제3항 앞부분) 또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1.
1-1. 제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로마서 3,1-20 은, 1969년에 개정 공포된,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따른 주일, 대축일, 그리고 주간 미사 중의 말씀 전례에서 발췌하지 않는 부분입니다.
 
여기를 클릭하면, 지금 말씀드린 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1-2. 그 이유는, 신학적으로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여서가 아니라, 내용적인 면에 있어 미사의 전반부를 구성하고 있는 말씀 전례 중에 제2독서 혹은 제1독서로 읽힐 정도로 사목적으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기를 클릭하면, 가톨릭 교회의 전례 중에 독서로 발췌하는 기준에 대한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1-3. 따라서, 로마서 3,1-20에 대하여 교황님, 주교님, 그리고 본상 사제들의 강론 말씀을 통하여 배우는 것도 아마도 거의 힘들 것입니다.
 
그리고, 예를 들어, 총 6권이 한 질을 이루는 저의 졸저서인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시리즈에도 로마서 3,1-20에 대한 해설은 없습니다.
 
2.
따라서, 가톨릭 교회의 전통 안에서 로마서 3,5-8 에 대한 해설을 찾아 보아야 하는데, 다음은 로마서 3,5-8 에 대하여 제가 직접 찾아 일부 혹은 전부를 들여다 본 자료들입니다. 제가 직접 찾아 들여다 본, 이 이외의 다른 자료들도 또한 말씀드릴 수 있으나, 로마서 3,5-8과 관련하여,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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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아래에 언급되는 자료들은 모두가 우리말 자료들이 아닙니다. 장차 성직자가 되고자 하는 분들과 그리고 현재 성직자인 분들께서도, 이미 인터넷의 공용 언어로 자리를 잡은 언어인, 영어로 기록된 자료들을 잘 찾아 읽을 수 있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합니다.
 
일단 영어로 된 자료를 찾아내면, 그 다음으로 원 언어인 라틴어, 그리스어, 혹은 히브리어 등으로 저술된 자료들을 찾아 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므로, 영어로 된 교회의 핵심 문헌들을 잘 찾아서 읽는 능력을 기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영어/한글 자판을 주로 사용하지만, 예를 들어, 지중해 지역에 살고 있는 그 지역의 가톨릭 교우들은 영어/한글 자판 대신에, 영어 및 자국어 자판을 사용하기에 이런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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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여기를 클릭하면, 교황청 소속의 성직자 (교황님, 추기경님들 포함)들 및 수도자들을 위하여 제공되고 있는 자료들 중에서, 로마서 2,17-3,8 을 인용하고 있는 자료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료들은 제가 글을 작성할 때에 참고하는 출처들이기도 합니다.
 
2-2. 특히 여기를 클릭하면,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St. John Chrysostom, 347-407년)의 로마서에 대한 강론을 읽을 수 있습니다. 상당히 긴 설명이 주어져 있으므로 시간이 있으신 분들께서는 차분히 읽고 묵상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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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2-3-1. 여기를 클릭하면, Bernadine a Piconio(1633-1709년)에 의한 로마서 3,1-20에 대한 주석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2-3-2. 여기를 클릭하면, Bernadine a Piconio(1633-1709년)에 의한 로마서 제1-9장로부터의 교리상의 부수 결과를 읽을 수 있습니다.
 
참고: 여기를 클릭하면, Bernadine a Piconio 신부/신학자(1633-1709년)에 대한 영어 가톨릭 대사전에 실린 소개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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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4-1. 여기를 클릭하면, 1895년에 출판된 Haydock's Catholic Bible Commentary 중에서 DRB 로마서 제3장에 대한 주석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2-4-2. 또한 여기를 클릭하면, 1895년에 출판된 Haydock's Catholic Bible Commentary 중에서 DRB 로마서 제3장에 대한 주석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위의 제2-3항에서의 제공 방식보다도 이 방식이 읽기에 훨씬 더 나은 것 같아, 또한 알려드립니다.
 
참고: 여기를 클릭하면, 라틴어 불가타 성경의 영어 번역본인 DRB(Douay-Rheims Bible) 에 방대한 주석들을 붙여, Haydock Bible 을 편집한 George Leo Haydock 신부/신학자(1774-1849년)에 대한 소개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필독을 권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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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로마서 제3장 본문들에 주어진, 1970년에 초판 발행된, NAB의 주석들만으로는 위의 질문에 대한 만족할만한 답변을 드리는 것이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시야를 조금 더 넓혀서 로마서 제1-6장에 걸친 NAB 주석들 자세히 들여다 보면, 로마서 제3장에 대한 주석들만 들여다보는 것보다 로마서 3,5-8에 대하여 훨씬 더 나은 이해를 할 수가 있는데, 이것은 아래의 제3항에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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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로마서 3,5-8에 대한, 1975년에 초판 발행된, 프랑스어 공동번역 성경인 TOB의 주석들 만으로는, 비록 간략한 주석들이 주어져 있기는 하나,이 주석들만으로는 위의 질문에 대한 만족할만한 답변을 드리는 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래의 제3항에서 주어질 설명과 함께 질문에 대한 답변의 일부로서 도움이 되므로, 로마서 3,6로마서 3,7-8에 대한 TOB 주석들의 영어 번역문 및 우리말 번역문을 올려드립니다. 이들 번역들은 제가 한 것이며, 평소에도 항상 말씀드려왔지만, 추후에라도 번역 오류가 발견되면 바로 잡아져야 할 것입니다:
 
3,6) La logique humaine conclut que Dieu ne peut frapper de sa colère un pécheur du fait que celui-ci contribue, par son péché même, à faire éclater la grandeur de la justice divine. Il faudrait alors en déduire que Dieu ne pourra plus être le souverain juge du monde. Comme cette conclusion est, selon l'apôtre Paul, irrecevable, il va de soi que les prémisses du raisonnement sont également entachées d'erreur. Le fait que le péché contribue à manifester la justice de Dieu n'empêche pas qu'il demeure soumis à la colère et au jugement de Dieu.
 
3,6) Human logic concludes that God cannot strike a sinner with his wrath due to the fact that this one contributes, by his sin, to make burst the greatness of divine justice. We will then have to deduce from it that God will not be able to be any more than the sovereign judge of the world. As this conclusion is, according to the apostle Paul, inadmissible, it goes without saying that the premises of reasoning are also tainted with error. The fact that sin contributes to demonstrate the justice of God does not prevent that it remains subjected to the wrath and to the judgement of God.
 
3,6) 인간의 논리는, 죄인이 자신의 죄에 의하여 하느님의 정의의 위대함을 터져 나오게 하는 데에 기여한다는 사실 때문에 하느님께서 죄인을 당신의 진노로 때릴 수 없다고, 결론 내립니다. 그리하면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최고의 심판관이 될 수 없음을 우리가 이것으로부터 [결론으로서] 연역하여야(deduce) 할 것입니다. 이러한 결론은, 사도 바오로에 따르면, 받아들일 수 없기에, 추론(reasoning)의 전제(premises)들이 또한 오류로 물들었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정의를 입증하기 위하여 죄가 기여한다는 사실이 그 죄가 하느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도록 남아 있음을 막지(prevent) 못합니다. 
 
참고: 다음은 로마서 3,6에 대한 "주석 성경"의 주석이라고 합니다. 위에 제가 한 직역 번역(literal translation)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비교/검토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래의 우리말 번역문의 경우에 있어, 첫 문장만 보아도, "주어"가 바뀌거나 혹은 상당히 모호해졌다는 생각입니다. 누구가 "그러한"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는 것인지요??? 인간 아니면 하느님??? 아래의 첫 문장의 우리말 표현과 관련하여서는, 위의 제1항 첫 부분에 있는 로마서 3,5의 우리말 번역NAB 로마서 3,5와 또한 비교/검토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래의 두 번째 문장의 주어는 누구인지요??? 제가 또한 제공해 드린 위의 영어 번역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래의 주석에 있어, 만약에 직역 번역을 하였다면, 아래의 우리말 번역문을 프랑스어로 역번역(reverse translation)을 하였을 때에, 위에 주어져 있는 프랑스어 원문과 거의 동일하게 되어야 할 것인데[직역 번역의 정의(definition)], 아래의 우리말 번역문이 "이 원칙"을 제대로 만족하는지 상당히 궁금합니다:
 
(註2)  인간의 논리에 따르면, 사람의 죄가 바로 하느님의 큰 의로움(또는, 정의)를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빛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죄인을 당신의 진노로 치실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고한 재판관이 되실 수 없다고 추론해야 할 것이다. 바오로에 따르면, 이러한 결론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므로 그러한 논증의 전체 조건들은 이미 오류에 빠져 있을 수밖에 없다. 설사 인간의 죄가 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데에 일조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느님의 진노와 심판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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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8) Allusions à des attaques de chrétiens judaÏsants contre l'évangile paulinien de la grâce. Ces deux accusations sont reprises et discutées en Rm 6,1 et 6,15.
 
3,7-8) Allusions to judaizing Christians' attacks against the pauline gospel of grace. These two accusations are taken back and discussed in Rm 6,1 and 6,15. 
 
3,7-8) 은총에 대한 바오로의 복음(pauline gospel of grace)에 반대하는 유다주의 그리스도인들의 공격들에 대한 암시들. 이들 두 개의 비난들은 로마서 6,1로마서 6,15에서 다시 택해져 논의됩니다.
 
참고 1: 다음은 pauline 단어에 대하여 Merriam Webster's Unabrigded Dictionary에 주어진 설명입니다:
 
pauline
 
Function: adjective
Usage: usually capitalized
Etymology: Medieval Latin paulinus, from Late Latin Paulus Paul died ab A.D. 67 Christian saint who was apostle to the Gentiles and author of several epistles in the New Testament + Latin -inus -ine

: of, relating to, or characteristic of the apostle Paul or his writings : conforming to Paul's teachings 
: 사도 바오로 혹은 그의 저술들과 관련이 된 혹은 사도 바오로 혹은 그의 저술들의 득징을 가진: 바오로의 가르침들에 일치하는
 
참고 2: 영어권에서는 pauline gospel 혹은 Paul's gospel(바오로의 복음) 이라는 "동일한" 표현을 이미 사용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래의 제3-2-4항에 있는 로마서 3,21-21에 대한 NAB 주석을 참고하십시오. "바오로의 복음"의 정의(definition)가 바로 이 NAB 주석에 주어있다는 생각입니다.
 
다음은 로마서 3,7-8 에 대한 "주석 성경"의 주석이라고 합니다. 바로 위의 말씀을 염두에 두면서, 아래의 우리말 번역문이 위에 제가 한 직역 번역(literal translation)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비교/검토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래의 번역은, 상당한 의역 번역(free translation)을 하였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또한 제공해 드린 영어 번역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래의 주석에 있어, 만약에 직역 번역을 하였다면, 아래의 우리말 번역문을 프랑스어로 역번역(reverse translation)을 하였을 때에, 위에 주어져 있는 프랑스어 원문과 거의 동일하게 되어야 할 것인데[직역 번역의 정의(definition)], 아래의 우리말 번역문이 "이 원칙"을 제대로 만족하는지 상당히 궁금합니다:
 
(註3) 7절과 8절의 말은 바오로가 선포하는 은총의 복음을 공격하는 (그리스도교를 유다교로 환원시키려는 일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과 같은) 적대자들의 “비방”을 시사하는 것 같다. 이 말은 6, 1과 6, 15에서 다시 다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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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러면, 위의 제2항에서 이미 말씀드렸듯이, 로마서 3,5-8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하여 NAB 주석들을 차분히 들여다 보도록 하겠습니다.
 
3-1. 우선적으로, 성 바오로가 로마인들에게 서간을 보낼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1-1. 다음은 총 6권으로 이루어진 저의 졸저서들인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출판사: 가톨릭출판사) 가해-I 대림 제2주일 제2독서(로마 15,4-9) 입문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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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인들에게 보낸 서신은 아마도, 사도 바오로의 세 번째 선교 여행의 끝 부분에 와서, 즉 기원후 58년 봄에 그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 바로 직전에, 코린토(Corinth)에서 작성되었을 것이다.
 
     로마서는 그리스도교 교리의 요약이 아니며, 사도 바오로의 마지막 유언(will)이나 증언(testament)도 아니다 - 심지어 이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사도 바오로의 폭 넓은 견해도 또한 아니다. 사도 바오로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 중 어떤 것(예를 들어, 교회, 성체성사, 부활)들은 로마서에 빠져 있다. 대신에, 이 서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good news) 안에서 이제 모든 사람들에게 제시되는 구원의 역사적 가능성에 대한 자신의 선교 소견(missionary reflections)에 대한 진술이다. 사람의 의화(justification)와 구원이 ‘율법에 따른 행위(deeds of the law)’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부의 사랑(love)이 아끼지(spare) 않았던 당신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faith)에 의하여 결정됨을 사도 바오로는 알고 있다(로마 3,28). 성부에 의하여 고안되었으며(conceived)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의하여 실현된, 인류 구원 계획의 결과들에 믿음을 통하여 사람은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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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다음은 총 6권으로 이루어진 저의 졸저서들인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출판사: 가톨릭출판사) 가해-I 대림 제4주일 제2독서(로마 1,1-7) 입문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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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오로는 이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서간(Letter to the Romans)’을 그가 설립하지 않았던, 심지어 아직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었던, 회중(a congregation)에게 써서 보냈다. 그는 지중해 지역에 있어서의 자신의 사도 직무(apostolate)가 끝났음을 의식하고 있었다. “예루살렘(Jerusalem)에서 일리리쿰(Illyricum)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완수한 후에”(로마 15,19), 그는 에스파냐, 즉 지금의 스페인(Spain)을 향하여 서쪽으로 바라보았다. ‘주교(bishop)’라는 단어는 그 어원이 그리스어로 ‘episkopos’인데, 이 말은 글자 그대로 “바라보는 자(overseer)”를 뜻함을 상기하라. 그는, 오랫동안 품어왔던 바람(desire)을 실현하기 위하여, 도중에(en route) 로마 교회(Roman church)를 방문하고자 마음을 먹었다. 서쪽을 향해 떠나기 전에, 사도 바오로는 마지막 한 가지 일에 함께 가야만(attend to) 하였는데, 즉 그가 설립한 이방인 교회들(Gentile churches)(로마 15,25; 1코린토 16,1)에서 모금된 헌금(collection)을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일을 직접(personally) 하여야 하였는데, 이것은 예루살렘의 유다인 그리스도인들로 이루어진 어머니 교회에, 이 예루살렘 공동체의 ‘가난한 이들’과 갈라티아(Galatia), 마케도니아(Macedonia) 그리고 아카이아(Achaia)의 이방인 그리스도교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연대성(the solidarity, 일체성, 단일성)을, 입증하기(manifest) 위함이었다.(*) 이 어머니 교회의 ‘영적인 축복들에 이미 함께 하여 왔음’을 이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깨달았기에(로마 15,27),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헌금 모금에 기부를 하였다. 그래서 코린토(Corinth)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나기 전에, 조만간 자신의 로마 교회 방문을 알리기 위하여 바오로는 로마 교회에 편지를 썼다. 성 바오로의 편지들에 있어 인사말은, 비록 약간의 변형들을 그가 실제로 사용하기는 하지만, 한 개의 표준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 양식의 세 가지 기본 구성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발신인의 이름, 수신인(addressee)의 이름, 그리고 인사말. 자기 자신을 밝힘에 있어, 바오로는 사도로서의 자신의 임무(his apostolic mission)를 설명하기 위한 표현들을 자주 추가하는데, 오늘 우리의 제2독서는 이러한 묘사들 중에서 가장 고상한 것 하나를 포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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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대성 원리(the principle of solidarity)’를 포함하여, 가톨릭 교회가 가르치고 있는 ‘사회 교리(social doctrine)’의 네 개의 원리들 및 ‘사회 교리’에 등장하는 핵심 개념들에 대한 정의(definitions)들은, (i) 본 해설서 시리즈의 나해-II 연중 제28주일부터 그리스도왕 대축일(연중 제34주일)까지의 ‘3분 복음/교리 묵상’들에 주어져 있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CCCC) 및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의 가르침들과, (ii) 특히 다음의 엮은이의 졸글들을 참고하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social_justice.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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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 따라서, 성 바오로가 로마서를 저술하였을 때에 그는 이미 세 번에 걸친 선교 여행을 거의 끝낸 다음이었으며, 그리하여 이 세번의 선교 여행들 중에 그는 소위 말하는 유다주의 그리스도교 신자들, 혹은 거짓 선생(false teachers)들에 의하여 지속적으로 왜곡과 비난을 받았으며, 그리고 심지어 그를 죽이려고 하는 유다인들에 의하여 엄청한 고난의 경험들도 이미 겪은 다음에 [주: 이러한 경험들은, 루카 복음서의 저자이기도한 시리아 출신의 이방인 의사인 성 루카에 의하여 63년 경에 기록된, 사도행전성 바오로의 다른 서간들에 담겨있다], 바로 이 로마서를 저술하였을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 바오로는 로마서 전반에 걸쳐, 유다인들이 모세 율법을 그 기준으로 삼아 알고 있었던 "의로움(the righteousness)" 및 "믿음(faith)"이라는 개념(concepts)들이 잘못되었거나 혹은 부족함을 매우 논리적으로 설명을 하는데, 유다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가릴 것 없이 우리 모두가 죄인들임을 지적하면서, 율법이 유다인들에게 주어지기 이전에 살았던 성조 아브라함의 믿음과, 하느님께서 그 의로움을 인정해 주셨던(로마 4,9), 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완성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faith in Jesus Christ)을 통하여, 즉 하느님의 외 아드님이신,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구속을 통하여 인류사에 매우 구체적으로 그리고 교계 제도적으로 드러나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느님의 의로움(the righetousness of God)이라는 초월적 개념들을 유다인들이 받아들일 것을 로마서에서 적극적으로 권고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3-2.
지금부터는, 로마서 3,5-8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NAB 주석들을 찾아 읽도록 합니다.
 
3-2-1. 여기를 클릭하면, 로마서 1,18-3,20 에 대한 다음의 NAB 주석을 읽을 수 있습니다:
 
[1:18-3:20] 바오로는 모든 인류가 절망적인 곤경에 처하여 있으며 그리하여 이 인류가 구하여지고자 한다면 하느님의 특별한 개입을 요구한다는 것을 보이고자 노력합니다.
 
[1:18-3:20] Paul aims to show that all humanity is in a desperate plight and requires God's special intervention if it is to be saved.
 
 
3-2-2. 여기를 클릭하면, 로마서 2,1-3,20 에 대한 다음의 NAB의 주석을 읽을 수 있습니다.
 
[2:1-3:20] 이방인들에 대한 자신의 일반적인 비난 이후에, 바오로는 특별한 계시에도 불구하고 유다인들이 하느님 앞에서의 도덕적 지위에 있어 어떠한 이로운 점도 향유하지 못함을 보입니다(로마 3,1-8). 인류 전체가 하느님 앞에서 이제 죄 있다고 선언됨과 함께(로마 3,9-20), 그러고 나서 바오로는 전체 문제에 대한 다음과 같은 해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믿는 이들 모두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나게 된 하느님의 속량 위업을 통한 구원(로마 3,21-30).
 
[2:1-3:20] After his general indictment of the Gentile, Paul shows that in spite of special revelation Jews enjoy no advantage in moral status before God (Romans 3:1-8). With the entire human race now declared guilty before God (Romans 3:9-20), Paul will then be able to display the solution for the total problem: salvation through God's redemptive work that is revealed in Christ Jesus for all who believe (Romans 3:21-31).
 
 
3-2-3. 여기를 클릭하면, 로마서 3,1-4 에 대한 다음의 NAB 주석을 읽을 수 있습니다:
 
[3, 1-4] 길게 이어지는 통렬한 비판 서법(書法)(diatribe)이라는 대중적인 문체(文體, style)와 어울려(in keeping with), 바오로는 모든 인류의 죄 많음에 대한 자신의 가르침이 이스라엘의 종교적 특전을 떨어뜨린다는 반대에 응답합니다.그는 유다인들이, 비록 자신들의 죄들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계시의 전달 수단으로, 비록 이 수단이 하느님에 대한 충성에 달려있기는 하나, 남아 왔음을 강조합니다.  
 
[1-4] In keeping with the popular style of diatribe, Paul responds to the objection that his teaching on the sinfulness of all humanity detracts from the religious prerogatives of Israel. He stresses that Jews have remained the vehicle of God's revelation despite their sins, though this depends on the fidelity of God.
 
 
3-2-4. 여기를 클릭하면, 바오로의 "복음"(Paul's "gospel")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로마서 3,21-31 에 대한 다음의 NAB 주석을 읽을 수 있습니다:
 
[3,21-31] 이들 절들은 바오로의 "복음"(Paul's "gospel")에 대한, 즉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의한 의화의 원리에 분명한 서술(a clear statement)을 제공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류를 그 절망적인 곤경으로부터 구출할 수단을 찾아 내셨으며, 이러한 하느님의 주도(initiative)를 나타내는 바오로의 용어가 하느님의 의로움(the righteousness of God)입니다(로마 3,21). 하느님의 자비는 죄 있는 자들에게 죄가 없다고 선언하시며 그리하여 그들을 죄가 없게 만드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율법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율법과는 떨어져, 그리고 인간들에 있어서의 어떠한 공로 때문이 아니라, 믿는 이들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해진 속량 덕택으로, 그들의 죄들에 대한 용서를 통하여(로마 3,21), 이것을 행하십니다.
 
[21-31] These verses provide a clear statement of Paul's "gospel," i.e., the principle of justification by faith in Christ. God has found a means of rescuing humanity from its desperate plight: Paul's general term for this divine initiative is the righteousness of God (Romans 3:21). Divine mercy declares the guilty innocent and makes them so. God does this not as a result of the law but apart from it (Romans 3:21), and not because of any merit in human beings but through forgiveness of their sins (Romans 3:24), in virtue of the redemption wrought in Christ Jesus for all who believe (Romans 3:22, 24-25). God has manifested his righteousness in the coming of Jesus Christ, whose saving activity inaugurates a new era in human history.
 
3-2-5. 여기를 클릭하면, 로마서 6,1-11 에 대한 다음의 NAB 주석의 첫 문장을 읽을 수 있습니다:
 
[6,1-11] 자신의 복음(the gospel)이 도덕적 해이를 조장한다는 비난에 대하여 자신의 복음을 옹호하기 위하여(로마 3,5-8을 참조하라), 바오로는 활기 넘치는 길게 이어지는 통렬한 비판 서법(書法)(diatribe)이라는 대표적인 문체(文體, style)로 자신의 의견을 나타냅니다.
 
[1-11] To defend the gospel against the charge that it promotes moral laxity (cf Romans 3:5-8), Paul expresses himself in the typical style of spirited diatribe.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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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결론)
따라서, 위의 제2항 및 제3항에서 함께 읽은 주석들에 의하여, 우리는 성 바오로가 (이어지는 3,21-31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자신의 복음(Paul's "gospel")이 도덕적 해이를 조장한다는 비난에 대하여, 로마서 3,5-8 에서 변증법(辨證法, dialectic) 표현으로 암시하면서,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있는 중임을 알게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참고: 여기를 클릭하면, 신약 성경의 경전들의 인간 저자들 중에서, 특히 성 바오로가, 로마서에서 변증법에 의거한 논증들을 많이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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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 로마서 3,5-8 에 대한 이러한 결론이 타당함을 확인하는 의미에서, 그리고 (2) 로마서 3,8 중의 다음과 같은
 
더 나아가서 "악을 행하여 선이 생기게 하자." 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는 바오로의 변증법(辨證法, dialectic) 표현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을 학습하기 위하여, 로마서 3,8에 대한 다음의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을 함께 읽고 묵상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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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의 반대자들은 선을 위하여, 즉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가 드러나게 되도록 하기 위하여, 악이 범해져야 한다고 그가 말하였다고 그를 비난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와전(訛傳, misrepresentation)이며, 이 사도는, 비록 그가 자신의 비난자들에게 대답하는 것을 여기서 그만두지는 않으나(**), 활기있게 물리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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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부분은 위의 제2-6항에 주어져 있는 TOB의 주석을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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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Paul's adversaries accuse him of having said that evil had to be committed for good, that is, God's truth and justice, to be made manifest. But this is a misrepresentation, which the Apostle energetically rejects, although he does not stop here to reply to his accusers.
 
성 바오로가 그리스도인은 선한 결과를 위하여 악한 방법들을 따라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데, 그렇게 말하는 것은 선과 악의 차이점을 흐리게 하는 것일 것이기 때문이며, 그리고 결과들이 수단들을 정당화한다고 주장하는 것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St. Paul is not saying that a Christian should follow evil ways for a good end: that would be to blur the difference between good and evil, and to argue that the ends justifies the means.
 
그리스도교의 도덕 가르침은 우리가 심지어 자신 혹은 다른 이들이 바로 그 행위에 의하여 상처를 입게 되더라도 올바르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데, 이는 결과들이 수단들을 정당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어떤 행동은 대상, 결과 그리고 여건들로 이루어진 그 구성 요소들 모두가 선함과 함께 오로지 충만하게 선할 수 있기 때문이며, 그리고 만약에 이들 요소들 중의 어느 하나라도 나쁘다면 그것은 나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도덕적으로 나쁜 행동은 어떠한 이유에서도, 심지어 언뜻 보기에 선한 이유에서도, 혹은 심지어 짐작컨대 선한 의향과 함께라고 하더라도, 행해질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잘못된 기준들을 사용하면서 행동한다고 하면, 그것은 사회의 법들과 관습의 기초를 위태롭게 하는 것을 뜻할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Contra mendacium, chaps 1 and 7 을 참조하라].
 
Christian moral teaching requires that one do right even if oneself or others are hurt by that action: the ends does not justify the means and an action can only be fully good with all its elements are good -- object, end and circumstances; and it will be bad if any one of these elements is bad. Therefore, no morally bad action may be done for any reason, even for an apparently good reason, or even with a supposedly good intention. If one were to act using wrong standards, it would mean undermining the laws and mores of society (cf. St. Augustine, Contra mendacium, chaps 1 and 7).
 
여건들에 호소함으로써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의 지속적인 성향에 직면하여, 교회의 교도권(the Magisterium of the Church)은 도덕적 처신에 대한 근본 기준들을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이미 상기시켰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올바른 의향을 가질 것을 우리에게 항상 원하시며, 그러나 바로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당신께서는 행동은 선한 행동이어야 [....] 한다고 또한 요구하십니다. 선한 결과를 성취하기 위하여 악을 행하는 것은 허락될 수 없습니다" [교황 비오 13세(Pius XIII), Address, 18 April 1952].
 
Faced with people's constant tendency to justify their actions by appealing to circumstances, the Magisterium of the Church has reminded us of the basic principles of moral behaviour: "God desires us always to have, above all, an upright intention, but that is not enough. He also requires that the action be a good action [...]. It is not permissible to do evil in order to achieve a good end" (Pius XIII, Address, 18 April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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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마지막으로, 위의 제5항에서 전달하고 있는 교회의 가르침이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CCCC)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본문에 어떻게 주어지고 있는지를 앍고 묵상하도록 합시다. 
 
출처: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다해-I (출판사: 가톨릭출판사, 엮은이: 소순태) 연중 제6주일 3분 복음/교리 묵상.
 
 
CCCC 367. 인간 행위(human acts)들에 대한 윤리의 근원들은 무엇인지요?
CCC 1749-1754, 1757-1758
 

인간의 행위(human acts, 인간 행위)들의 윤리(morality)는 다음의 세 개의 근원(sources)들에 의존합니다(depends on): 참된 선(true good) 혹은 외견상의 선(apparent good) 둘 중의 하나인 해당 행위의 선택된 대상(object); 행동을 하는 주체(the subject)의 의도, 즉 행위(act)를 행사하는(perform) 주체의 목적; 그리고 행위의, 행위의 결과(consequences)들을 포함하는, 상황(circumstances)들(엮은이 번역).

 
주: 교황청 홈페이지가 제공하는 영어 등의 외국어로 된 위의 CCCC 문항들 및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제공 우리말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의 해당 항목들은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 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http://ch.catholic.or.kr/pundang/4/c_ot_6_c1749.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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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CC 368. [인간의] 행위는 언제 윤리적으로 선한 것[즉, 선행(good works)]인지요?
CCC 1755-1756, 1759-1760
 

[인간의] 행위(an act, 즉, a human act)(*)는 그것이 그 행위의 대상(the object)의, 그 행위의 끝/목적(the end)의, 그리고 그 행위의 상황(the circumstances)들의, 선함(goodness)을 동시에 전제할(assumes) 때에만 윤리적으로 선합니다(morally good). 선택된 행위의 대상 그 자체만으로도(by itself), 심지어 그 행위의 의도(the intention)가 선(good)하다고 하더라도, 행위를 그 온전함에 있어(in its entirety) 손상시킬 수 있습니다. 악으로부터 선이 나올까 하여 악을 행하는 것은 적법하지 않습니다(not licit). 악한 끝/목적(an evil end)은, 심지어 행위의 대상이 그 자체로(in itself) 선하다고 하더라도, 행동(action)을 타락시킵니다(corrupts). 다른 한편으로, 선한 끝/목적(a good end)은, 만약에 바로 그 행위의 대상이 악하다면, 행위를 선하게 만들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결과가 수단들을 정당화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상황들이 행위를 하고 있는 자의 책임을 키우거나 혹은 줄일 수도 있으나 그러나 상황들이 행위들 자체의 윤리적 질(moral quality)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상황들은 그 자체로 악인 행위를 결코 선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엮은이 번역).

 
주: 교황청 홈페이지가 제공하는 영어 등의 외국어로 된 위의 CCCC 문항들 및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제공 우리말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의 해당 항목들은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 있다: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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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인간의 행위(human act)" 라는 대단히 중요한 가톨릭 그리스도교 신학 용어의 정의(definition)는 다음의 글 중의 게시자 주 1-1에 있으니 필독하라:
[이상, 2014년 10월 26일자 내용 추가 끝]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10월 28일] 

CCCC 369 항상 적법하지 않은(illicit) 행위들이 있는지요?
CCC 1756, 1761

그들의 대상 때문에, 그 자체들로 그리고 그들 스스로만으로(in and of themselves), 항상 적법하지 않은 어떤 행위들이 있습니다[예를 들어, 모독(blasphemy), 자살(homicide), 간통(adultery)]. 그러한 행위들을 선택함은 의지에 있어서의 어떤 무질서(a disorder of the will)를, 즉(that is), 그들로부터 혹시라도 가능할 수도 있는 선한 결과들에 호소함으로써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어떤 윤리적 악(a moral evil)을, 수반합니다(entails). (엮은이 번역).

 

주: 교황청 홈페이지가 제공하는 영어 등의 외국어로 된 위의 CCCC 문항들 및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제공 우리말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의 해당 항목들은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 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http://ch.catholic.or.kr/pundang/4/c_ot_6_c1755.htm
(이상, 발췌 끝).

[이상, 2014년 10월 28일자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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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업에 소요된 시간: 약 12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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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 록 > >
 
 
위의 본글을 읽으신 분들로서 시간이 있으신 분들은, 아래의 한줄답변들에서 요청한, 출처를 알 수 없는 주장들에 근거한, 다음의 개신교측의 해설이 위의 가톨릭 교회측의 해설들과 얼마나 많이 차이가 나는지 직접 비교/검토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위의 본문 중에서 언급되고 있는 바오로의 복음(Paul's gospel)은, 그리스도의 복음(the Gospel of Christ), 즉 하늘 나라의 도래(the coming of the Kingdom of Heaven)(cf. 영문본 LG 5)에 포함되어 있는, 하위 개념(a subordinate concept)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이라면 "이렇게 구분하여 불려지는 복음"들 사이의 뚜렷한 차이점 및 그들 사이의 존재하고 있는 인과적 종속 관계 등을 반드시 알고 계셔야 할 것입니다.
 
 
 
 
복음의 진의를 왜곡하는 궤변(로마 3:5~8) -일부 수정
 
작성자    번  호   4858
 
작성일   2011-02-18 오후 6:46:08 조회수   54 추천수   0
 
마무리 찾아봐도 아래 자료밖에는 없네요 ~~!
비록 개신교 "생명의 삶"에 있는 내용인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옮겨봅니다.
(하나님 -> 하느님으로 바꿨습니다)
 
(이하 인용문)
유대인의 실패가 하느님의 의로우심과 신실하심을 결코 폐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불의할수록 하느님의 의로우심은 더욱 극명하게 대조돼 나타납니다.  사람의 신실함이 하느님의 의로우심을 만나면 구원과 사랑의 결실을 맺습니다.  사람의 불의가 하느님의 의로우심을 만나면 진노의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하느님의 은혜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의를 회복시키시는 주권적 역사는 그분의 의로우심을 손상시키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나타난 하느님의 신실하심을 궤변으로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죄를 지어 하느님의 의로우심을 더욱 드러냈으니 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더 악해지는 것이 좋겠구나 ! "  그들은 이렇게 말하며 자신들이 이방 죄인들 처럼 심판받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궤변이요 책임회피요 억지에 불과합니다. /이상
 
 ㅇㅅㅇ ( (2011/02/18) : 생소한 단어가 많습니다. 그중에서 특히 개신교에사 아주 많이 흔하게 사용하고 있는 용어가 "신실(信實)하다"인데 그 뜻은 "믿음직하고 착실하다." (sincere, trustworthy, faithful)  
 
소순태 ( (2011/02/19) : [ "죄를 지어 하느님의 의로우심을 더욱 드러냈으니 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더 악해지는 것이 좋겠구나 ! " 그들은 이렇게 말하며 자신들이 이방 죄인들 처럼 심판받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 + 찬미 예수님! 개신교측의 해석을 퍼 오셨는데, 이 문장에 대한 출처도 또한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소순태 ( (2011/02/19) : 그리고 개신교측은 피조물인 마르틴 루터가 로마서를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만으로"라는 단어를 추가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믿음만으로" 라는 주장을 교리로 삼고 있기에, 특히 로마서의 해석이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해석과 달라, 가톨릭 신자들은 함부로 이러한 개신교측의 성경 해석에 동조하여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소순태 ( (2011/02/19) :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제4829번 글 (제목: 개신교 신자들 사이의 대화들 1)에 있으니 차분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ㅇㅅㅇ ( (2011/02/19) : ["죄를 지어 하느님의 의로우심을 더욱 드러냈으니 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더 악해지는 것이 좋겠구나 ! " 그들은 이렇게 말하며 자신들이 이방 죄인들 처럼 심판받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개신교의 로마서 해석이 전부 다 잘못된 것이니 “함부로” 인용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는 아니시겠죠 !! 위 原질문에 대한 답“만” 해주시고, 제가 퍼옮긴 글 내용중에서 잘못된 부분“만”을 지적해서 바로 잡아주시면 더욱 고맙겠습니다. 읽어보라 하신 글은 별도로 시간을 내서 읽어보겠습니다.  
 
소순태 ( (2011/02/19) : 로마서에서 바오로가 말하는 "믿음"을, "만으로"를 추가하여서는, "믿음만으로" 로 해석하는 개신교측의 해석은 가톨릭 교회에서 가르치는 "믿음"과는 크게 다릅니다. 그동안 제가 올려드린 "믿음(faith)"에 대한 글들을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소순태 ( (2011/02/19) : [그러나 복음에 나타난 하느님의 신실하심을 궤변으로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 이 주장의 출처도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긴 글의 일부를 발췌해온 매우 짧은 글에서 이렇게 출처 제시없이 주장만 하는 것은 그 주장의 의도를 글쓴이 이외에는 제대로 알기 힘들 것입니다.
 
소순태 ( (2011/02/19) : 위의 글과는 달리, 로마서 3,8에서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어떤 자들은 우리가 그런 말을 한다면서 우리를 비방하고 있습니다." 즉, "악을 행하여 선이 생기게 하자" 라는 말을 한 자가 바오로와 그 일행이라고 어떤 자들이 바오로와 그 일행을 비방하였음을 바오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ㅇㅅㅇ ( (2011/02/19) : "믿음만으로"와 원질문에 대한 필요한 답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출처"는 이미 밝혔는데 혹시 "~~궤변으로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유다인들 일부"로 보는 근거를 밝히라 하시는 것인가요 ?? 그렇다면 이런 것들을 포함하여서 전체적으로 천주교에서의 정통적인 질문자에 대한 답변을 올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가 인용해 올린 글은 "일부"가 아니라 "전체"이고, 가톨릭 주석 성경(신약)에서도 찾아보지 못햇습니다.  
 
 ㅁㅈㄱ ( (2011/02/19) : 개신교측 해석이랑 마르틴 루터랑 무슨 관계가 있다고 그리 생난리를 치는지... 개신교를 연 이 중엔 장 깔뱅도 있고 신학적 깊이 또한 마르틴 루터 뺨을 갈길 정도랍니다. 게다가 현대의 개신교 연구자들은 놀고 먹으며 주석하고 있는 줄 아나 본데, 전공도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은/못한 일개 평신자가 함부로 폄훼할 인사들이 아닙니다. 자기 말만 하고 빠지는 게 정상, 정도입니다.  
 
소순태 ( (2011/02/19) : ["출처"는 이미 밝혔는데 ] <----- 형제님께서 위의 본글에서 말씀하신 것은 "출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전달을 하셨으니, 제가 구체적으로 지적한 부분들의 출처를 또한 전달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ㅇㅅㅇ ( (2011/02/21) : "두란노서월" "생명의 삶" 출판부로 직접 문의해보시죠 ! 생명의 삶 2007.9월호 58쪽에 있는 해설을 옮긴 것이니 ~~~ 그리고 계속하여 "출처"만 밝히라 하시지 말고 소형제께서 갖고 계시는 "정답"을 올려주시죠 ~~! 그리고 제 질문에 대한 답도 주시기 바랍니다. "궤변으로 조롱하는 사람들이 유다인들 (일부)"이라는 것에 대한 "출처"를 물으신 것인지 질문했었습니다. 왜 그 "출처"가 그리 중요한지요 ~~~?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소형제의 "정답"은 무엇입니까 ?  
 
 ㅇㅅㅇ ( (2011/02/21) : 제가 인용한 책을 다시 보니 위 본문(인용문)중에서 옮기는 과정에서 큰 실수가 있었음을 발견했습니다. 위에 빨간색 부분이 누락이 되어서 엉뚱하게 본의를 크게 왜곡시켰습니다. 크게 혼란을 드려서 정말 미안합니다. 그리고 저는 정통 가톨릭신자이고, 내 주변의 일부 극성스런 개신교친구들의 잘못된 일부 궤변과 천주교비난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반박하는, 누구못지 않게 천주교를 자랑하는, 그러면서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는 단순한 믿음을 갖고 싶어하는 사람임을 밝힙니다.  
 
소순태 ( (2011/02/21) : 어제 저녁까지 제가 드린 질문들에 대하여 아무런 답변이 없으셔서, 약 4시간에 걸쳐 제가 답글을 마련하여 오늘 아침에 올렸는데, 올리는 과정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다 지워져 버렸습니다. 또다시 아까운 시간을 내어야 하니, 저로서도 답답합니다. 또 한 번 아까운 시간을 할애하여 작성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올려드리는 글은 원 질문을 주신 분께 도움이 될 것입니다만, "정답"이라고 제가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말씀에 대한 해석권은 교도권에만 있으므로, "정답"은 교도권에서 제시하는 것 만이 "정답입니다.
 
소순태 ( (2011/02/21) : 그리고 "출처"가 중요한 이유는, 글을 쓰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하는 주장의 근거를 스스로 만들어 제시하면서, 즉 가공의 근거를 스스로 만들어 제시하면서도, 독자들에게는 신뢰를 주기 위하여, "그런 방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드물게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출처를 밝혀 주십사고 요청을 한 부분들은 아마도 성경에는 없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만으로" 를 주장하는 개신교측에서 어떻게 성경 밖의 이야기를 들고 들어와 성경 본문의 해석을 하려고 하는지도 납득할 수 없습니다.
 
소순태 ( (2011/02/21) : ["출처"는 이미 밝혔는데 혹시 "~~궤변으로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유다인들 일부"로 보는 근거를 밝히라 하시는 것인가요 ??] <----- 그렇습니다.
 
소순태 ( (2011/02/21) : [ "죄를 지어 하느님의 의로우심을 더욱 드러냈으니 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더 악해지는 것이 좋겠구나 ! " 그들은 이렇게 말하며 자신들이 이방 죄인들 처럼 심판받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 그리고 이 문장에 대한 출처도 또한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소순태 ( (2011/02/21) : [그러면서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는 단순한 믿음을 갖고 싶어하는 사람임을 밝힙니다.] <----- 다음은, 마르틴 루터가 신약 성경에서 제거하려고 하였던 야고보서의 한 구절입니다: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됩니다.”(야고보 2,24).
 
 ㅇㅅㅇ ( (2011/02/21) : 주제가 이상하게 옆길로 새고 있는듯한데, "구원은 선행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은 인간에게 선행을 할 힘을 주시고 또 그렇게 하도록 부르신다 는 것이다. 선행만으로 구원될 수는 없지만 선행은 신앙의 실천이라는 얘기다.” (가톨릭+감리교 공동선언문) -->  
 
 ㅇㅅㅇ ( (2011/02/21) : “믿음”이 성령께서 주시는 것인지 “내 머리의 지식”에 의한 것인지의 차이겠죠 ~~~! 그것은 결국 “사랑의 실천”으로 표현(expressing)되느냐 아니냐를 보면 알게 되겠죠 !!! 내가 지향하는 것은 “머리”가 아닌 “성령”에 의한 “참 믿음”이고, “선행” 정도가 아니라, “죽음”까지도 불안해하지 않는 그러한 “믿음”이고, 내가 이곳에 드나들면서 공부를 하는 것도 “머리”를 채우겠다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찾기 위한 것입니다. “믿음”과 “실천”이나, “로마서”와 “야고보서”는 둘중 하나의 선택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둘 다가 모두 소중하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신앙”과 “신학”도 그랬으면  
 
 ㅇㅅㅇ ( (2011/02/21) : 좋겠습니다. 답변 쓰시느라 많은 시간 할애하시고 계시는 소형제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좋은 “가르침” 기대합니다. 다만 위 原질문에 대한 답변만을 부탁드립니다.  
 
소순태 ( (2011/02/21) : [내가 이곳에 드나들면서 공부를 하는 것도 “머리”를 채우겠다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찾기 위한 것입니다.} <----- 만약에 이러하시다면, 지금부터는 개신교측의 자료들은 아예 읽거나 참고하지 마십시오. 특히 형제님께는 이러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여태까지 이곳 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성경 묻고 답하기 게시판에 개신교 측의 자료들을 들고 오신 분들이 한 두 분 정도 계시는데, 그 중의 한 분이 바로 형제님이셨기 때문에 이러한 권고의 말씀을 드립니다. 대신에, 가톨릭 교회 교리서를 다섯 번 정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묵상하도록 하십시오. 아마도 성경 말씀에 대한 이해의 정도가 확 달라질 것입니다.
 
소순태 ( (2011/02/21) : 아래의 검색 기능을 사용하여, "송두석" 형제님께서 올려 주신 글들 중에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글들을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소순태 ( (2011/02/21) : 지금 글을 새로 작성하여 올리는 중인데,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지금까지 올린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18.htm
 
소순태 ( (2011/02/21) : 가톨릭측에 로마서 3,1-20에 대한 주석/해설을 구하는 것이 어려운 현실적 이유도 또한 말씀드리고 있으며, 그리고 특히 형제님께서 요청을 하시기에, 제가 평소에 자주 혹은 가끔 참고하는 자료들로서, 비록 영어로 된 자료들이기는 하나, 로마서 3,5-8에 대한 주석/해설들의 인터넷 주소들을 나름대로 엄선하여 알려드리고 있습니다.
 
소순태 ( (2011/02/21) : [좋은 “가르침” 기대합니다.] <----- 절더러 가르치는 자로 다른 분을이 크게 오해할 수 있는 이런 표현은 그만 해 주실 것을 꼭 부탁드립니다. 제가 해 드리는 것은 양질의 신뢰할 만한 자료들을 찾아 여러분들께 전달해 드리는 것인데, 이것을 절대로 제가 여러분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여러분들을 가르칠 권한이 교회로부터 주어져 있지 않으며, 저는 그러한 권한이 저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에 대하여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오니 제가 전달해드리는 자료들을 차분히 비교/검토하면서 읽고 묵상하여, 스스로 알아서 처신하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소순태 ( (2011/02/21) : 신학 박사 학위를 받지 않았고, 대신에, Ph.D. (Doctor of Philosophy) (철학 박사) 학위(Degree)를 받은 제가, 어떻게 감히 신학을 가르칠 수가 있겠는지요? 그렇지 않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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