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연중 제16주일(나해) 마르 6,30-34; ’21/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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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1-07-06 ㅣ No.4719

연중 제16주일(나해) 마르 6,30-34; ’21/07/18







 요즘 우리가 사는 지구상의 곳곳에서는 자연재해와 인재라고까지 하는 사건 사고로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에도 가끔 재해의 현장에서 아버지가 자식을 끌어안고 자신의 몸을 방패 삼아 자신은 죽고 아이는 살렸다는 소식도 심심치 않게 들립니다. 그런가 하면, ‘동물의 왕국같은 다큐멘터리를 보면, 먹을 것을 달라고 입을 벌리는 새끼들의 입속에 어미 새가 어렵게 구한 먹이를 입에서 잘게 자르고 녹여 하나씩 넣어 주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자식을 아끼고 돌보는 부모들의 모습은 당연한 것 같기도 하지만,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왜 이렇게까지 자식을 위해 희생할까? 아마도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부모에게, 자녀를 하느님 대신 돌보고 양육하라고 맡기셨는가 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실 때 피조물들을 가족 체계로 묶어 창조하시고, 피조물들이 가족 체계를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도록 설계하신 듯합니다. 특별히 다음 주 제1회 조부모와 노인의 날을 맞으며 생각에 잠겨봅니다.

 

피조물인 사람과 동물에게 있어서, 그 자녀들은 먹여 살리고 돌보아야 하는 짐일까?

아니면, 부모에게 있어서, 자녀는 세상을 살아가는 의미요 보람이기까지 한 선물일까?

 

부모에게 있어서 자식은 늘 걱정거리요, 최우선의 관심사입니다. 부모님은 언제 어디서나 늘 자녀를 생각하며, ‘혹시 어디 가서 밥이나 제대로 먹고살고 있을까?’ ‘어디 가서 누군가에게 맞고 살지는 않을까?’ ‘어디 가서 자신의 몫은 제대로 하면서 살고 있을까?’ ‘어디 가서 자신의 역할을 인정받고 힘차게 살고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노심초사하는 존재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그런 면에서 예수님을 기르시고 보호하신 아버지 성 요셉을 기억하며, 올 한 해를 아버지의 마음으로라는 희년의 주제로 잡으신 바 있습니다.

 

천주교회법은 혼인 서약은, 이로써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그 본연의 성질상 부부의 선익과 자녀의 출산 및 교육을 지향하는 평생 공동 운명체를 이루는 것인 바, 주 그리스도에 의하여 영세자들 사이에서는 성사의 품위로 올려졌다.”(10551)라고 밝힙니다.

 

만일 부모가 자녀를 낳아 기를 수도 있고, 안 낳고 안 기를 수도 있는 것으로 여긴다면, 우리의 인생은 피곤하고 비참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도 부모에게는 이른바 취사선택의 대상이었을 것이라는 아찔한 순간을 여러 번 겪어왔을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상점에서 물건을 사듯이 취사선택하게 된다면, 우리의 인생은 그저 하나의 상품이요, 역할과 도구로서 취급되고 말 것입니다.

 

자녀라는 존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아버지 하느님의 거절할 수 없는 특별한 은총의 선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부모의 상황과 여건에 따라 자녀의 출산과 양육을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자녀가 부모 배 속에서 태어나기 이전이나 어미 배 속에 있을 때나 세상에 나온 다음에도 살면서 조금 더 가난해지거나 어려워지면 언제든지 버릴 수 있거나 처리할 수 있는 상황과 맞닥뜨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부모나 자녀에게 또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는 인간계의 인간 서로에게 있어 인간 서로는 위협이 될 수 있는 원수요 비극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한번 이런 질문도 던져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을 만드신 아버지 하느님께는 세상이 짐일까 선물일까? 어쩌면 세상을 처음 만드실 때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세상 만물을 창의적으로 설계하고 진행해 나갈 때처럼 신이 나지 않으셨을까?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는 기쁨,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생명을 세상에 내어놓는다는 커다란 기쁨과 행복에 가득치 계시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우리 천주교회 교리는 삼위일체의 하느님께서 서로 사랑하셔서 그 사랑이 넘쳐흘러 세상을 지어내셨다고 선언합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세상과 생명을 나누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만들고 나서 물건이 아닌 피조물이 살아가면서 벌이는 일들을 보면서 어떤 마음이 드셨을까? 성경 저자들은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만드시고 나서,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창세 6,5-6)라고 밝힙니다.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들과 하늘의 새들까지 쓸어버리겠다.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스럽구나!”(7) 라고 하시며, 특별히 마음에 든 노아를 제외하고는 물로 벌하십니다. 그렇지만, 벌을 내리신 후에 살아남은 노아의 제사를 받으시면서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그 향내를 맡으시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셨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 땅이 있는 한 씨뿌리기와 거두기,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않으리라.’”(창세 7,21-22)

이렇게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 화를 내시기도 하셨지만, 늘 하느님께서 화를 내신 것을 후회하시고 인간에게 자애를 베풀어 오셨습니다. “너희가 이 땅에 그대로 머물러 살면, 내가 너희를 세우고, 부수지 않겠으며, 너희를 심고, 뽑지 않겠다. 내가 너희에게 내린 재앙을 후회하기 때문이다.”(예레 42,10)

 

결국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말처럼,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벌하고자 하시는 훈육의 방법을 후회하시고 사랑으로 희생하는 방법을 쓰십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세상 창조 때에 심어 주신 거룩한 마음을 놓쳐 버리고 악의 유혹에 빠져 악의 노예가 되어 버린 사람들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사람을 죄악에서 건지시기 위해 아들 예수님을 보내 주십니다.

 

아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그야말로 물불을 안 가리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복음을 선포하고, 병자를 고쳐 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시는 데 총력을 기울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주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고쳐 주시느라 밥을 먹을 겨를조차 없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돕는 제자들을 쉬도록 하실망정, 예수님께 다가오는 이들을 짐으로 여기시거나 귀찮아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마르 6,31)

 

예수님께서 잠시 잠깐만이라도 조금 쉬시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났지만, 사람들은 육로도 달려서 거기까지 쫓아왔습니다(32-33절 참조). 그때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 쫓아온 이들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셨을까? 우리라면, 짐으로 여길만할 정도였겠건만,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절박하면 이렇게까지 매달릴까?’ 하는 안쓰러움으로 측은지심을 품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34) 이 마음이 아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식에게 아낌없이 퍼붓는 부모님의 마음, 그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대신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사도 성 바오로는 예수님의 이 모습을 바라보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에페 2,14) 라고 선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차별과 구분의 장벽을 없애시고, 모든 율법 조문을 예수님의 몸으로 바치신 사랑의 희생으로 폐지하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16-18)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아버지 하느님과 주 예수님의 사랑으로 그득 차게 하시어, 우리가 이 한 생을 참으로 기쁘고 행복하게 살며,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이끌어 주시기를 간구하며, 이웃과의 사랑 어린 희생과 봉사를 살아갑시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르 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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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6주일 꽃꽂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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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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