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동성당 게시판

★ 예수를 만난 사람들 : 십자가 밑의 마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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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호 [austin] 쪽지 캡슐

2002-07-04 ㅣ No.9186

 

보세요,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줄 하나가 끊어짐으로써 다른 줄 하나가 이어지는 법인가? 한쪽 문이 닫힘으로 해서 다른 쪽 벽이 열리는 것인가? 한 생명이 죽음으로 하여 모든 생명이 사는 것일까? 예수는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낳은 나의 아들이었다. 나는 그의 어머니다. 그러나 끝내 예수는 나의 아들이 아니었다! 나는 아들을 떠나보낸 못난 어미요 서러운 여인이다. 아아, 그 날의 어둠 속에서 십자가에 높이 매달려 "목이 마르다!"라고 소리치는 아들의 모습을 하릴없이 바라보고 있던 나였다. 나는 아들을 위하여 대신 목이 말라주지도 못했고, 못박힌 손과 발의 아픔을 조금도 덜어주지 못했다. 쓸모없는 어미였다. 그런데도 그는 그 아픔 속에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도무지 무력하여 큰소리로 울지도 못하는 딱한 나를 내려다  보더니 마침 곁에 서 있는 요한을 턱으로 가리키며 "보세요,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고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이어서 요한에게 "형제여, 그대의 어머님이오." 하고 말하면서 여전히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 순간 막혔던 봇물이 터지듯이 눈물이 쏟아졌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감격의 물결이 나를 휩싸고 소용돌이 쳤다.

"알겠어요, 어머니?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이기는 겁니다. 끝내 이기고 마는 거예요!"

퉁퉁 부어오른 양쪽 뺨으로 흘러내리는 그의 눈물을 나는 보았다. 그는 그렇게 울면서 나에게 들리지 않는 말을 계속하고 있었다.

"당신은 나의 어머니, 영원한 나의 어머니십니다! 아무도 우리 사이를 떼어놓지 못해요. 어머니, 당신을 사랑합니다."

요한이 불처럼 뜨거운 손으로 나의 손을 움켜잡은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나도 그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러나 눈길은 나무에 매달린 그에게서 한순간도 뗄 수 없었다. 예수의 입가에 어렴풋한 미소가 어리는 것 같았다. 그와 함께 "다 이루었다!" 마지막 음성이 들렸고 그의 고개는 힘없이 꺾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나의 아들 예수를 세 번쯤 만난 것 같다. 어미와 자식이 한집안에 살면서 얼굴을 마주하는 일이야 수없이 되풀이되는 일이지만, 내가 기억하고 있는 아들 예수와 특별한 ’만남’은 세 번쯤 되는 것 같다는 말이다. 맨 처음의 만남은 그가 서른 살쯤 된 어느 날 갑자기 광야로 요한이라는 예언자를 만나러 가겠다는 말을 했을 때에 이루어졌다. 두 번째는 그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먼길을 찾아갔을 때 어느 집 대문 밖에서 이루어졌다. 사실 그때에는 얼굴도 마주보지 못했지만 그러나 만남은 분명히 만남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만남은 그 날 골고타 언덕의 십자가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그 속에 어쩔 수 없는 헤어짐을 잉태한 것일까? 나는 크게 세 번 아들을 만났고 그때마다 아들과 헤어졌다. 나를 만나는 아들 예수는 언제나 나를 떠나는 아들 예수였다.

 

이 세상 모든 어미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아들을 내 품에서 길러, 내 품으로부터 내어 보내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맨 처음 예수가 나의 곁을 떠나 광야의 스승을 찾아가겠다고 했을 때 나는 무슨 말로도 그를 붙잡아 둘 수 없겠다는 강한 느낌에 사로 잡혀서 다만 하늘에 떠 있는 흰구름을 쳐다보았을 뿐이다.… 나는 그가 어렸을 때 적부터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열심히 일을 하는 편이지만 나무를 깎고 다듬고 못질하는 그런 일에 몰입하여 자신을 잊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일을 하다 말고 잠시 쉬는 동안, 그 짧은 휴식 시간마다 무언가 강렬한 힘에 사로 잡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 같았다. 새벽 미명에 사람 없는 바위틈에서 기도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가끔 볼 수도 있었다. 나이는 성년이 되었지만 여자에 대한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같은 마을에 처녀가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남자가 장가들어 가정을 꾸미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보다 훨씬 더 귀중하고 다급한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예수는 한번도 입밖에 내어 말 한 적이 없었다. 아니, 적어도 집을 떠나기 전까지는 본인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가 요한을 만나러 광야로 가겠다는 말을 했을 때, 나는 마을의 다른 어머니들처럼 그를 말렸다.

"꼭 가야만 하니? 네가 집을 떠나면 나는 어떻게 살아나가란 말이냐?"

"어머니, 가야겠습니다. 내가 집을 떠나도 살아갈 일을 걱정하지는 마셔요. 들에 핀 꽃들을 봐요. 누가 일부러 가꿔주지 않아도 아버지께서 저렇게 길러주시지 않습니까? 어머니, 나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어요. 그 일을 하지 않으면 나는 살수가 없습니다. 내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이 나의 양식입니다."

"아버지의 일이라니? 돌아가신 네 아버지가 물려주신 이 일 말고 다른 일이 있느냐?"

"어머니, 나에게 일을 맡기신 그분은 태어났다가 죽는 그런 아버지가 아니십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시요, 또한 나의 아버지십니다. 그분이 나에게 명령하십니다. 이제 곧 집을 떠나 광야의 예언자를 찾으라고요. 내가 떠나면 어머니는 나 대신 아버지께서 돌봐주실 것입니다. 걱정마세요. 이땅에 태어난 사람은 마땅히 그분의 돌보심을 받아 살면서 또한 그분의 일을 해야 합니다. 나를 붙들거나 이 길을 막지 못합니다."

나는 힘없이 길을 비켜섰다. 그리고 사라지는 그의 등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나는 아들의 참모습을 비로소 보았던 것이다. 뱃속의 태를 열고 세상에 태어난 뒤 내 품안에 안겨 있을 때의 모습과는 다르게 그는 다시 한번 나의 낡은 태를 열고 드넓은 세상으로 걸어가는 신생아의 모습으로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나의 육신이 오래된 껍질처럼 메말라 마침내 부서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들 예수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광야를 향하여 당당하게 걸어가 마침내 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집안은 온통 텅 비어있는 것 같았다. 기둥이 무너진 듯, 벽에 구멍이 난 듯, 허전한 나의 마음을 채울 길이 없었다. 컴컴한 방구석에 앉아 나는 숨죽여 울었다. 눈물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려 목줄기를 적셨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떠나고 나자 나의 아들 예수는 내 가슴 깊은 곳에 정식으로 자리잡고 앉아 있어 한시도 나를 떠나지 않았다! 내가 가는 곳마다 예수는 거기에 있었고 언제나 다정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얼마 안 있어 고향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젊은이들 편에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을 수 없었다. 아무도 그를 보거나 그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람결에 아들의 소식이 들려왔다. 갈릴래아 호숫가 마을을 돌아다니며 어부들과 사귀는 가운데 하느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아무하고나 닥치는 대로 만나고 사귄다는 것이었다. 어떤 소문에 의하면 일곱 마귀 들렸던 여자를 깨끗하게 고쳐주고는 그 여자와 함께 산다고도 했다. 또는 세리들과 식사하고 문둥이들과도 어울려 다닌다고 했다. 어디서 그런 능력을 얻었는지는 모르나 온갖 귀신 들린 자들을 성한 사람으로 고쳐주고 몇 십 년씩 앓던 고질병도 고쳐준다고 했다. 때로는 사마리아 사람. 그것도 여자와 만나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는가 하면 그들의 마을에서 며칠씩 머물러 있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요컨대, 나자렛 태생인 예수라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놀라운 능력으로 기이한 일을 하면서 그동안 사람들이 지켜온 아름답고 질서정연한 습관을 마구 무너뜨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무지막지한 밑바닥 인생들이 그를 메시아인 양 따르며 미칠 듯이 좋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안식일 법을 어기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요, 부유한 자들을 면박 주며 가난한 자들을 부추기는 언설을 틈 있을 때마다 되풀이하고, 세상을 뒤집어엎을 최후의 날이 임박했다고 외쳐댄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소문의 결론은 아무래도 그가 돌아버린 것 같다는 데로 귀결되었다. 돌지 않았다면 악마의 두령인 베엘제불에게 사로잡혀 있는 게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악령을 호령하여 쫓아버릴 수도 없거니와 하느님의 신성한 법을 그렇게도 자신만만하게 범할 수가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사람도 나무도 살지 않는 뜨거운 사막에서 오랫동안 단식을 했다더니 마침내 머리가 돌아버린 것 같다는 그런 소문도 들려 왔다. 어떻게 내가 그냥 집에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아들이 있는 곳을 찾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갈릴래아 지방 전역서 그는 이미 소문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없는 집 문 앞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 집안에 예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몰려든 사람들을 헤치고 그 안으로 들어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여자들에게는 육감이라는 것이 있다. 어쩐지 그를 쉽게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또는 그를 쉽게 만나면 안 될 것 같은 육감 때문에, 야고보를 집안으로 들여보내 어미가 밖에 있다고 이르게 하였다. 그들이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집안으로 들어간 뒤 조금 있자니 분명한 예수의 목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누가 내 어머니며 형제란 말이오? 여기 있는 여러분들,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곧 나의 어머니요 형제입니다!" 이어서 야고보가 창백한 얼굴로 나왔다. 나는 거기 더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내 귀에까지 들리라고 일부러 크게 말하는 예수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단호했다. 칼로 자르듯 도무지 사이를 두지 않고 하는 말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을 가슴에 안고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 몇 번이나 이런 말을 되뇌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다가 마침내 나는 예수가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 처형을 당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가 성전의 장사치들을 몰아내는 일에 앞장을 섰고 그 까닭으로 사제들의 미움을 사서 빌라도의 협조를 얻어 마침내 처형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문 밖의 어미를 두고 "누가 나의 어머니냐?"라고 소리치던 아들, 그래서 쫓겨나듯 그 자리를 떠나게 만들었던 아들이었지만, 나는 그를 끝내 버릴 수가 없었다. 나는 그의 어미였다! 그런데 죽어가는 마당에서 그는 나에게 이번에야말로 영원한 아들로서 다가와 뜨거운 손으로 나의 가슴을 파고들었던 것이다. 이윽고 숨진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그가 내 품에 안겨준 영원한 아들을 포옹했다. 그렇게 떠남으로써 그는 나에게 마침내 돌아왔고 그렇게 숨짐으로써 마침내 진정한 아들이 되었던 것이다. 아아, 그를 포기함으로써 나는 그를 낳았고 나에게서 떨어져 나감으로써 그는 나를 영원한 어미가 되게 하였으니, 자식을 잃은 모든 어미에게 하늘의 위로와 기쁨이 충만할진저. (요한 19,25~30)

 

이현주 지음, "예수와 만난 사람들"(생활성서사 출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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