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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4일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Maranatha! Alleluia! - tai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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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4-08-03 ㅣ No.1858



축일: 8월 4일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San Giovanni Maria Vianney Sacerdote
Dardilly, Francia, 8 maggio 1786 - Ars-sur-Formans, Francia, 4 agosto 1859
Saint John Mary Vianney
Also known as : Curé of Ars, Jean Baptiste Marie Vianney, Jean Marie Baptiste Vianney, Jean-Baptiste Vianney, John Baptist Vianney, John Vianney
Born : 8 May 1786 at Dardilly, Lyons, France
Died : 4 August 1859 at Ars, France of natural causes
         interred in the basilica of Ars
Venerated : 26 July 1896 by Pope Leo XIII
Beatified : 8 January 1905 by Pope Saint Pius X
Canonized : 31 May 1925 by Pope Pius XI
Giovanni = il Signore è benefico, dono del Signore, dall'ebraico(=God is gracious)
Third Order Franciscan,  본당 사제의 수호 성인

 

 

프랑스 리옹 근교에서 태어난 성 요한 비안네(1786-1859년)는

큰 어려움을 극복한 뒤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벨레 교구의 아르스 본당을 맡으면서

열심한 설교와 고행과 기도와 선행등 놀라운 방법으로 본당을 쇄신하고 발전시켰으며

프란치스코 3회원으로서 뚜렷한 명예를 심어 주었다.

그는 고해성사와 영적지도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사람들이 사방에서 몰려와 그의 영적 권고를 경건히 듣곤 하였다.
-재속프란치스코회 지침서에서
 

 

*영국 산업혁명:1760~1830년, 프랑스 대혁명:1789년(1787~99년)




프랑스 혁명으로 불안정한 시기에 리용 교외 시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비안네 성인(1786-1859년)은

정상적인 초등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였으며,
바리에르의 소신학교에서 철학을(1811년),리용의 대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으나(1813년),

라틴어 때문에 퇴학당하였습니다.(1814년)
그러나 18세 부터 시작되었던 에퀼리의 신부 아베 발레의 지속적인 개인교수와 특별 시험 주선으로

1815년 그레노블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그는 사제직을 수여받지 못할 정도로 신학교 성적이 부진하여 장래를 기약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어떤 자격보다도 훌륭한 신심과 좋은 의지를 참작한 교회가 그를 사제로 서품함으로써

한 성인의 탄생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3년동안 아베 발레 신부의 보좌신부로 있은뒤,

1818년 주민 230명의 한적한 시골인 벨레 교구 아르스의 주임사제로 부임하여
여기서 죽을 때까지 40년 동안이나 일하며 열심한 설교와 고행과 기도와 선행 등 놀라운 방법으로

본당을 쇄신하고 발전 시켰다.
단순한 설교와 충실한 고해신부로 이름이 퍼져나가,

마침내 조용한 시골을 프랑스 전역으로부터 연 2만여명에 이르는 고해자들이 고해성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만여 명의 사람들이 들이닥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고해성사와 영적 지도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사람들이 사방에서 몰려와 그의 설교를 경건히 듣곤 하였다.

그는 하루에 열 여덟 시간이나 고백소에서 지냈고

그의 설교는 단순하지만 심금을 울리는 내용이었다.
영적 권고와 충고에 있어서는 간단 명료하였고, 신심이 흘러 넘치는 직설적인 설교를 하였다.

그는 순례자들의 소란, 끊임없는 고해성사 요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 그는 과로로 운명하였다.
그의 동료 사제들은 그를 오해하여 "무식하고 지나치게 열성적인 허풍쟁이"라고 힐난했으나

그의 주교는 "저 신부만큼 모든 사제들이 미쳤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옹호하였다고 한다.
성인은 단지 세 번 아르스를 떠났는데, 그 모두가 수도원을 잠깐씩 다녀오는 것이 전부였다.
1929년 교황 비오 11세께서 그를 본당 사제의 수호성인으로 선언하였다.


이름의 뜻은 God is gracious(하느님은 자비롭다)이다.



당신은 자신이 참으로 이 세계에 속한 사람이라고 느끼는가?

다른 세계나 다른 시간에 속한 존재라고 생각한 적은 없는가?
’아르스의 성자’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는 "우리의 집은 천국에 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호텔에 투숙한 여행객과도 같으며

길을 떠나자마자 항상 천상의 집을 그리워하는 존재이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가 이 세상에 있지 않다는 한 가지 증거는

우리의 정의와 공평에 대한 내적인 감각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더 이상 죽음과 고통이 없으며 정의가 다스리고 모든 것이 공평한 세상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면

우리가 어떻게 공평과 정의에 대해 알 수 있겠는가?

우리의 영혼에는 천국을 가리키는 나침반이 하나씩 들어 있다.
칠흑 같은 망망대해에서도 나침반의 바늘을 보고 뱃머리를 결정할 수 있듯이,

마음속에 간직한 나침반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 우리의 길을 인도한다.
그 나침반을 잃지 않는 한 우리는 진정한 집을 향해 하고 있음을 믿어도 좋을 것이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회홈에서www.ofmconv.or.kr)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의 교리 지도에서
(Catechisme sur la priere: A.Monnin, Esprit du Cure d’Ars, Paris 1899, pp.87-89)

기도와 사랑은 고귀한 과업이다.

자녀들이여, 그리스도인의 보화는 지상에 있지 않고 천상에 있음을 생각하십시오.

따라서 우리 생각을 우리 보화가 있는 곳으로 향해야 하겠습니다.
기도와 사랑은 사람의 고귀한 과업이요 의무입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사랑은 이 지상에서 누리는 행복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일치 외에 다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순수하고 또 하느님과 일치된 마음을 지닌 사람은

위안을 받고 감미로움으로 충만해지며 놀라운 빛으로 눈부시게 됩니다.
이 긴밀한 유대 안에서 하느님과 영혼은

녹아 합치된 두 자루의 초와 같아 아무도 그것을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미소한 피조물과 하느님의 이 결합은 지극히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행복은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행복입니다.

우리는 기도 드릴 자격을 잃은 자가 되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심으로 우리가 당신과 대화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 기도는 하느님이 지극히 기뻐하시는 향기 입니다.

나의 자녀들이여,

여러분의 마음은 작지만 기도는 그마음을 넓혀 주어 하느님을 사랑 할 수 있는 능력을 베풀어 줍니다.
기도는 천상을 미리 맛보게 해주고 천상에서 무언가 우리에게 흘러내리게 해줍니다.

감미로움을 남겨 주지 않는 기도는 없습니다.
기도는 마치 영혼에 흘러내리는 꿀과 같아 모든 것을 달게 해줍니다.

잘 바치는 기도에서 고통은 마치 햇빛을 받는 눈처럼 녹아 버리고 맙니다.

기도는 또 한 가지 특성을 지닙니다.

기도는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보이게 해주고

너무도 큰 즐거움을 가져다 주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해줍니다.
내 얘기를 한번 들어 보십시오. 내가 브레스의 본당 사제로 있을 때

한번은 동료 사제들 대부분이 앓아 눕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긴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그 여행 중 자비로운 하느님께 계속 기도했습니다.

분명히 말씀 드리지만 그때 나에게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자비로운 하느님께 온전히 헌시하여 물 속에 있는 고기처럼 기도 속에 완전히 파묻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헷갈림이 조금도 없습니다.


나는 그런 거룩한 영혼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릅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꼬와 성녀 콜레트는

우리 주님을 뵙고 사람끼리 서로 이야기하듯 그분과 대화했습니다.
 
한편, 얼마나 자주 우리는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또는 무엇을 청하고자 하는지 생각지도 않고 성당에 나오는지요!
우리가 어떤 사람을 방문하러 갈 때 무엇 때문에 가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비로운 하느님께 흡사 이렇게 말하려는 듯합니다.
"내가 당신께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것은 한두 마디뿐입니다. 빨리 좀 가게 해주십시오......"
나는 자주 이런 생각을 합니다.

즉 우리 주님을 예배하러 나올 때 우리가 산 신앙과 완전히 순수한 마음으로 청한다면

청하는 것을 모두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게시판676번.1403번.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 축일:9월17일.게시판644번.1369번.
*성녀 콜레타 축일:2월7일,게시판938번.1606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이상을 가진 사람은 장애를 극복하며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일도 과감하게 실행한다.
요한 비안네는 이상을 가진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는 사제가 되기를 원했으나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에 신학 공부를 잘 해낼 수가 없었다.

이상을 가진 사람은 장애를 극복하며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일도 과감하게 실행한다.
결국 라틴어 강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으로 신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나 사제가 되고자 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 그는 개인 교수를 찾았다.
책과의 오랜 투쟁 끝에 요한은 마침내 사제가 되었다.

불가능한 행위를 필요로 하는 상황들이 항상 그를 따라다녔다.
요한이 주임 신부로 있던 아르스 본당에는 편안한 생활에 젖어 신앙에는 무관심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의 이상은 "일부 악마들은 오로지 기도와 단식으로만 쫓아 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엄격한 단식과 짧은 수면을 통해 자신을 이끌어 갔다.
그는 카타리나 랏사뉴와 베네딕타 라르데트와 함께 소녀들을 위해 섭리의 집을 설립했다.
그들은 이 섭리의 집을 만드는 데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하느님께서 도와 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요한 비안네의 뛰어난 점은 고해 신부로서의 업적이다.

겨울에도 그는 하루에 11,12시간 동안 성사를 주었고, 여름철에는 하루에 16시간씩이나 고해 성사를 주었다.
만일 그가 사제의 사명에 헌신적이 아니었다면

매일매일 자신을 아낌없이 주는 그런 일은 결코 견디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곧잘, 하고 싶었으나 할 시간이 없어 하지 못한 일들을 하기 위해 은퇴를 기대한다.
그러나 요한 비안네는 신부는 은퇴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짐에 따라 신자들에게 봉사하는 시간은 더욱 늘어났다.
그는 수면 시간을 짧게 가졌고 자주 마귀의 방해를 받았다.

이상을 가진 사람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가 항상 넘치는 힘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물질적 안락에는 강한 애착을 가지면서도 종교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이

우리 시대의 보편적인 현상인 것 같다.

만일 외계에서 온 사람이 우리를 관찰한다면,

그는 우리가 목적을 향해 가고 있는 순례자라고는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 비안네는 항상 목적을 가지고 여행을 한 사람이었다.




요한 비안네 신부는 전례적인 기도를 권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개인적인 기도는 여기저기 흩어진 밀짚과도 같다.

만일 당신이 그것에 불을 붙인다면 조그마한 불꽃이 일어날 것이지만
밀짚을 다발로 모아서 불을 붙인다면 하늘로 치솟는 기둥 같은 큰 불꽃이 일어날 것이다.

공동 기도는 이와 같은 것이다."



구약성서에 "하느님은 성인들 사이에서 기적을 행하신다"하신 말씀은 모든 성인 성녀를 일컬은 말이지만,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에게는 특히 적중되는 말씀이다.

그는 1786년 5월 8일 프랑스의 리용 근교인 다르딜리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농업을 생업으로 하는, 재산은 별로 없었으나 부지런하고 성실한 부부였다.
아버지는 가난한 사람, 특히 어려운 길손을 받아들이기를 매우 좋아했는데,

그런 손님 중에는 성 베네딕토 라브르도 끼어있었다.

요한 비안네는 이런 훌륭한 부모를 모신 넷째 아들이었다,
그의 부모들은 다른 독실한 신자와 마찬가지로 심히 근심했으며

특히 신부가 없어 미사참여와 영성체를 마음대로 하지 못함을 비통하게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비안네는 열 한살이 되어 첫 고해를 하고 그 2년후에 첫영성체를 했다.

그는 일찍부터 신부가 되고자하는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해 학비를 조달할 길이 없음을 알고

부모에게 그런 뜻을 전하지도 못하고 매일 매일의 양을 치며 농가의 자녀로서 할 일을 다하며 지냈다.

그는 어떠한 일이든지 다 잘했다. 그러나 신부가 되고가 하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고 날로 더 커갔다.
그래서 그는 17세 되는 때 용기를 내어 부모에게 그 뜻을 표명했다.

물론 부모들의 기쁨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공부를 하기에는 경제적인 여건이 넉넉하지 않아,

그로부터 2년간을 더 집안 이을 돌보는데 소일했다.
그러자 하느님의 안배로 에쿨리 마을의 바레이 신부가 그 자신이 가난한 시골 신부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공부 시켜주기로 했다.
이리하여 비안네가 그 신부 밑으로 가게 된 것은 1805년이었다.

*성 베네딕도 라브레 축일: 4월16일,인창동성당게시판 1714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바레이 신부는 손수 비안네에게 필요한 학문을 가르쳤다.
그런데 이 성인처럼 열심한 신부가 가장 정신을 차려 가르친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속죄로서 고행을 하는 것이었다.
요한이 침식을 가리지않고 공부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 후 베리오르 소신학교에 입학했으나, 거기서도 역시 성적은 좋지 않았다.
이해력은 있으나 기억력은 매우 부족했다. 교사들은 그의 성적이 불량하므로 그를 퇴학시키기로 했지만

그의 두터운 신앙심과 품행의 단정함은 전 학우의
모범이 되었으므로 재학하도록 한 것이다. 그 후 요한은 불요 불굴의 정신으로 공부를 해

겨우 신학부에 진급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그의 소망인 사제 서품을 받게 되었다.

신부가 된 그는 그의 은사인 바레이 신부의 보좌가 되었다.

바레이 신부는 이미 연로해 때때로 병석에 눕게 되었으나 여전히 엄격한 고행의 생활을 계속했다.
그는 은사와 더불어 무엇이든지 하고, 은사에게 무엇이든지 배우려 했으며,

은사는 제자에게 한 가지라도 더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 두성인의 공동생활은 오래 계속되지 못했으니,

즉 그가 부임한 지 2, 3개월이 되자마자 은사 바레이 신부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영원히 세상을 하직했기 때문이다.
그 후 비안네 신부는 아르스의 주임 신부로 임명되었다.

아르스는 작은 마을인데, 주민들은 다 신자이지만 대개가 냉담하여 판공성사도 보지 않는 형편이었으며,
주일이 되어도 성당에 나오지 않고 예사로 밭에 나가서 일을 하며 세상 쾌락만을 찾는 것이었다.
이 젊은 신부는 이러한 본당 형편에도 조금도 낙심치 않고 오로지 하느님께 의탁했다.
얼마 안되어 그의 친절, 그의 자애심, 그의 훌륭한 행실은 자연히 모든 사람의 마음에 큰 감명을 주게 되었다.

그의 덕에 경탄하게 되고 이어 그의 훈계를 명심하는 자들이 되었으며

그처럼 냉담하던 자들이 차차 신앙심이 깊어져 성실한 신자가 되었다



그들에게 회개의 은총을 주기 위해 비안네 신부는 얼마나 열심히 기도를 하고

얼마나 많은 고행을 하며 초인간적 활동을 했을까?
그의 존엄한 속죄 생활은 증인이 없으면 믿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그는 끊임없이 단식재를 지키며 감자만으로 식사를 했다.
딱딱한 침대에 담요 한벌, 그 나머지는 성당의 장식을 하든가 빈민에게 희사하던가 했다.
그러한 성스러운 신부의 활동은 곧 근방에 알려지게 되고 나중에는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소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성사를 보기 위해 먼 곳에서도 사람들이 모여왔다.

그들 중에는 신앙에 대해 실망한 자, 마음의 고민으로 위로가 필요한 자,
오랫동안 성사를 보지 않고 방탕한 생활로 대죄중에 있는 자들도 무수했지만,

성인 신부를 만나고 난 후부터는 모두 기쁜 마음으로 돌아갔다.

비안네 신부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의 빛으로 사람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는 은혜를 받았다.
사람들이 어려워서 말을 못하는 것까지 들여다보며

그는 매일 장시간 동안 고해성사를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떤 날은 15시간, 17시간씩 고해 성사를 주는 일도 있었으며

그에게 성사를 보는 사람은 1년에 평균 2만명에 달했다.
그 지방의 기후는 여름에는 매우 덥고 겨울에는 매우 추웠다.
이러한 일기에도 불구하고 비안네 신부에게 성사를 보고자 하는 신자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혹은 2,3일 동안 줄을 지어 기다리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요한 비안네는 이런 많은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면서도 그의 엄한 고신 극기의 생활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수년 동안 그의 마음을 혼란시키려는 악마의 유혹을 당했다.

그 외의 다른 시련도 닥쳐왔다. 즉 그를 허무맹랑하게 악평하는 투서를 몇 통 받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평상시와 같이 모든 사람들을 동등하게 대하는 태도를 조금도 변치 않았다.

그는 매일 솔직하고 유효한 설교를 하며 충실히 자기 의무를 이행했다.
그러한 생활과 활동은 정말로 하느님의 특별한 도움이 없이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런 것을 알게 되자 불신한 자들도 많이 회개했고 그를 조소하던 자들도

그의 성덕에 감동되어 신덕을 굳게 했다.



요한 비안네는 이렇게 부단한 고행과 활동의 생활을 보내기를 41년간,

1859년 7월 29일엔 열 일곱 시간이나 고해 성사를 주고 성당에서 나오자
"나는 이제 그만이다!"하고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의 건강은 다시는 회복될 수가 없었다.
그는 5일 후에 임종했는데, 감격의 눈물을 머금고 노자성체를 영하고

신자들에게 강복을 주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주교가 왔을 때 그는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2, 3시간 후에 숨을 거두었다.

그는 과로로 운명한 것이었다.
교황 비오 10세는 그를 복자위에,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성인품에 올렸고 본당 사제의 수호 성인으로 선언했다


             

사랑의 기도 

             - 성 요한마리아비안네(1786-1859)사제
                      

저의 하느님, 하느님을 사랑하나이다.
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오로지 하느님만 사랑하기를 바라나이다.   

한없이 좋으신 하느님, 하느님을 사랑하나이다.
한 순간이라도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사느니보다
하느님을 사랑하다 죽기를 더 바라나이다.   

저의 하느님, 하느님을 사랑하나이다.
하느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기쁨을 누리고자
오직 천국만을 그리나이다.   

저의 하느님, 하느님을 사랑하나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따스한 위로가 없기에
저는 지옥이 두렵나이다.   

저의 하느님,
순간순간마다 제 혀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어도
심장이 고동칠 때마다 제 마음이
주님을 사랑한다 말하기를 바라나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며 고통 받고, 고통 받으시는 하느님을 사랑하며,
어느 날 하느님을 사랑하다 죽는 은총을,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느끼며 죽는 은총을 허락해 주소서.  

제 인생 막바지에 다가갈수록
하느님을 향한 제 사랑을 더하고 채워 주소서. 
   


 

요한 비안네 신부님의 말씀 (성시간 묵상)   

1. 기도를 잘 하기 위해서 말을 많이 할 필요는 없습니다.
감실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그분께 마음을 열며
거룩하신 하느님이 그곳에 계시기 때문에 한 없이 기뻐하는 것,
이것이 가장 훌륭한 기도입니다.   

2. 기도는 향기로운 장미꽃입니다마는
그 향기를 맡으려면,
순수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3. 사랑의 불로 타버린 십자가는 가시나무처럼 불에 던지면
타서 재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가시는 딱딱하지만 재는 부드럽습니다.
고통을 이겨내기는 힘이 들겠지만
이겨내기만 하면 벅찬 환희를 느낄 것입니다. 
  

4. 십자가가 어디서 오는지 아예 생각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당신에게 증거 할 방법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사제의 해: 성 요한마리아비안네 선종 150주년을 맞아 베네딕도 16세교황께서
2009년6월19일 예수성심대축일부터 2010년 예수성심대축일까지 사제의 해를 선포하셨다).





Acte d'amour du Saint Curé d'Ars

Je vous aime,
ô mon Dieu,
et mon seul désir
est de vous aimer
jusqu'au dernier soupir de ma vie.

Je vous aime,
ô Dieu infiniment aimable
et j'aimerais mieux
mourir en vous aimant
que de vivre un seul instant
sans vous aimer.

Je vous aime,
ô mon Dieu,
et je ne désire le ciel
que pour avoir le bonheur
de vous aimer parfaitement.

Je vous aime,
ô mon Dieu,
et je n'appréhende l'enfer
que parce qu'on n'y aura jamais
la douce consolation de vous aimer.

O mon Dieu,
si ma langue ne peut dire
à tout moment que je vous aime,
du moins je veux
que mon cœur vous le répète
autant de fois que je respire.

Ah, faites-moi la grâce
de souffrir en vous aimant,
de vous aimer en souffrant
et d'expirer un jour
en vous aimant
et en se sentant
que je vous aime.

Et plus j'approche de ma fin,
plus je vous conjure
d'accroître mon amour
et de le perfectionner.

Ainsi soit-il!











♬03. Maranatha! Alleluia! 마라나타 알렐루야 - taize


 

update 2006.8.4.

 

 

*2003년8월4일. 게시판1302번에 올린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의 자료가 안보여서 다시 올렸습니다.

*2009년6월19일 예수성심대축일부터 2010년 예수성심대축일까지 사제의 해를 맞이하여 기도문과
성화를 덧붙었습니다.


 

 







 

 


 



 

 

 

 

 

 

 

San Giovanni Maria Vianney Sacerdote
4 agosto 
Dardilly, Francia, 8 maggio 1786 - Ars-sur-Formans, Francia, 4 agosto 1859


Giovanni Maria Vianney nacque l'8 maggio 1786 a Dardilly, Lione, in Francia. Di famiglia contadina e privo della prima formazione, riuscì, nell'agosto 1815, ad essere ordinato sacerdote.Per farlo sacerdote, ci volle tutta la tenacia dell'abbé Charles Balley, parroco di Ecully, presso Lione: lo avviò al seminario, lo riaccolse quando venne sospeso dagli studi. Giovanni Maria Vianney, appena prete, tornò a Ecully come vicario dell'abbé Balley. Alla morte di Balley, fu mandato ad Ars-en-Dombes, un borgo con meno di trecento abitanti. Giovanni Maria Vianney, noto come il curato d'Ars, si dedicò all'evangelizzazione, attraverso l'esempio della sua bontà e carità. Ma fu sempre tormentato dal pensiero di non essere degno del suo compito.Trascorreva le giornate dedicandosi a celebrare la Messa e a confessare, senza risparmiarsi. Morì nel 1859. Papa Pio XI lo proclamerà santo nel 1925. Verrà indicato modello e patrono del clero parrocchiale. (Avvenire)

Etimologia: Giovanni = il Signore è benefico, dono del Signore, dall'ebraico

Martirologio Romano: Memoria di san Giovanni Maria Vianney, sacerdote, che per oltre quarant’anni guidò in modo mirabile la parrocchia a lui affidata nel villaggio di Ars vicino a Belley in Francia, con l’assidua predicazione, la preghiera e una vita di penitenza. Ogni giorno nella catechesi che impartiva a bambini e adulti, nella riconciliazione che amministrava ai penitenti e nelle opere pervase di quell’ardente carità, che egli attingeva dalla santa Eucaristia come da una fonte, avanzò a tal punto da diffondere in ogni dove il suo consiglio e avvicinare saggiamente tanti a Dio.


Ascolta da RadioVaticana:
   Ascolta da RadioRai:
   Ascolta da RadioMaria:
  

Guardando al Santo Curato d’Ars, ovvero a san Giovanni Maria Vianney viene da pensare ai versi pronunciati nel salmo 117: «La pietra scartata dai costruttori è divenuta testata d'angolo», parole riprese da Gesù e riportate dagli evangelisti Matteo, Marco, Luca, negli Atti degli Apostoli e nella prima lettera di san Pietro.
Ebbene, ciò che Cristo Signore aveva riferito a se stesso in quanto Figlio di Dio non riconosciuto come tale, può essere applicato ad alcuni santi, fra i quali il patrono dei parroci, don Giovanni Maria Vianney, che sicuramente divenne sacerdote più per volontà divina che per volontà umana, scartato come fu, e a più riprese, da professori ed esaminatori.
Su di lui sembra non puntare nessuno. Soltanto un sacerdote crede in questo giovane, che pare proprio non avere talenti e capacità: è l’abbé Charles Balley (1751-1817), parroco di Écully, presso Lione.
Proprio ad Écully, l’11 febbraio 1778 Matteo Vianney (1753-1819) aveva sposato Maria Beluse (1753-1811); dalla loro unione nacquero sei figli che secondo l’uso devozionale di allora furono consacrati alla Vergine Maria prima ancora della loro nascita. Giovanni Maria nacque a Dardilly, dove aveva preso dimora la famiglia Vianney, verso la mezzanotte dell’8 maggio 1786, tre anni prima dello scoppio della Rivoluzione Francese. Fu battezzato il giorno stesso e prese il nome del fratello minore di suo padre.
«Appena questo figlio prediletto cominciò ad osservare gli oggetti esterni, la pia madre fu lieta di indicargli il crocifisso e le immagini religiose, che ornavano le pareti della casa, e, quando le piccole braccia poterono appena muoversi fuori dalle fasce, cominciò a guidare la manina incerta dalla fronte al petto e dal petto alle spalle: il bambino ne prese presto l’abitudine». Fin da piccolo fu educato a frequentare la chiesa parrocchiale. Le celebrazioni liturgiche lo affascinavano così tanto da imitarle e ripeterle una volta tornato a casa. Quando conduceva al pascolo il bestiame, spesso lasciava ai compagni la custodia degli animali per correre dietro un cespuglio a recitare il santo rosario ed era felice di entrare in una chiesa quando sentiva suonare la campana. Il bambino imparò ben presto anche a venire incontro alle necessità dei bisognosi, prendendo esempio dai suoi genitori, che lavoravano senza risparmiarsi la campagna, riuscendo a condurre una vita tranquilla e con generosità sfamavano ogni giorno molti poveri, non prima di averli invitati a recitare una preghiera.
«I piccoli non conoscono quella debolezza che si chiama rispetto umano», riferisce François Trochu, che compilò scrupolosamente una biografia in occasione della canonizzazione del Curato d’Ars, avvenuta il 31 maggio 1925. Infatti, in qualunque luogo si trovasse, in casa, in strada, nel giardino, Giovanni Maria «benediceva l’ora» cioè, seguendo l’esempio di sua madre, ogni volta che sentiva suonare le ore, incurante della presenza di altre persone, sospendeva l’attività che stava compiendo, faceva il segno della Croce, recitava l’Ave Maria e ripeteva, a chiusura, il segno della Croce. Questa consuetudine perdurerà lungo tutto l’arco della sua esistenza. La madre di Giovanni Maria, sua prima catechista, fu la prima ad avvedersi  della bellezza della sua anima. «Vedi, mio Giovanni se le tue sorelle o i tuoi fratelli offendessero il Signore, ne avrei grande pena, ma la pia pena sarebbe maggiore ancora, se lo offendessi tu!».
Molti anni dopo, quando qualcuno si feliciterà con lui per aver avuto così presto il gusto della preghiera e dell’altare, egli risponderà, sempre con profonda commozione: «Dopo che a Dio, lo devo a mia madre, tanto ella era buona! La virtù passa facilmente dal cuore della madre nel cuore dei figli… Un figlio che ha avuto la fortuna di avere una buona madre, non dovrebbe mai guardarla, né pensare a lei, senza commuoversi fino al pianto!».
Nel gennaio del 1791 entrò in vigore nel lionese la Costituzione civile del clero. Don Giacomo Rey, parroco per 39 anni di Dardilly, aveva prestato giuramento scismatico; ma in seguito, dopo aver riconosciuto la sua colpa, prese a celebrare la Santa Messa in una casa privata, a causa della persecuzione giacobina, poi si ritirò a Lione ed infine si stabilì in Italia. Il 7 luglio 1803 giunse al suo posto un nuovo parroco, don Giacomo Tournier (1769-1806), anch’egli compromesso con il regime di Parigi. In perfetta buona fede, la famiglia Vianney continuava ad assistere alla Santa Messa. Fu la figlia di 12 anni, Caterina, ad accorgersi che qualcosa non funzionava: le prediche di don Tournier non ricordavano per nulla quelle di don Rey. Nelle sue omelie tornavano con insistenza i nomi di «cittadino», «civismo», «costituzione» e spesso criticava i suoi predecessori. In chiesa si videro volti nuovi, mentre i fedeli più zelanti cominciarono ad allontanarsi dalla parrocchia. Caterina Vianney pose la questione ai suoi familiari: dove andavano a Messa i buoni cattolici? I genitori approfondirono il problema, scoprendo che i preti sani avevano rifiutato il giuramento e proprio per tale ragione erano stati cacciati, ma subivano anche pesanti persecuzioni ed erano costretti a fuggire per non finire sotto la ghigliottina. Tutti i sacerdoti che avevano rifiutato il giuramento erano esposti al pericolo di essere arrestati e giustiziati entro ventiquattro ore, senza possibilità di appello. Coloro che avessero denunciato questi preti avrebbero avuto un compenso di cento franchi, mentre coloro che li avessero ospitati e protetti avrebbero subito la deportazione secondo le leggi del 24 aprile, 17 settembre e 20 ottobre 1793. La famiglia Vianney, incurante degli evidenti pericoli in cui incorrevano, prese ad ospitare in casa propria i preti refrattari, dove potevano anche celebrare le Sante Messe.
Il 1793 è l’anno del Terrore e a Lione il sangue scorre a fiumi, nella Place des Terreaux la ghigliottina lavora senza tregua. Giovanni Maria cresce in questo clima oppressivo, di violenza feroce contro l’innocente, ma anche in una casa dove si mantiene salda la fede in Cristo. Diventa apostolo e catechista fra i suoi coetanei. Organizza processioni e, mentre in tutta la Francia sono state proibite le cerimonie religiose, il ragazzo guida i coraggiosi compaesani, che seguono una croce fabbricata semplicemente con due bastoni, recitando il Rosario e cantando. A nove anni, eccetto gli elementi di religione, non conosce quasi nulla della scienza umana. Sua sorella Caterina gli ha insegnato l’alfabeto ed egli sa leggere appena un libro di preghiere.
A Dardilly la scuola, a causa della furia rivoluzionaria, era stata soppressa. La contraddizione era palese: da una parte la legge del 19 dicembre 1793 esigeva che tutti i fanciulli di sei anni almeno, o di otto al più tardi, frequentassero obbligatoriamente le scuole pubbliche per tre anni di seguito; dall’altra, veniva concesso a pochi di aprire una scuola, con l’obbligo di prestare giuramento al Regime, che garantiva il certificato di civismo. Inoltre, venivano interdetti maestri religiosi e preti. Tuttavia era diffusa la scarsità di pedagoghi giacobini e per tali ragioni la piccola scuola di Dardilly fu chiusa.
Nel 1799, all’epoca del secondo Terrore, Giovanni Maria ricevette la prima comunione, che venne amministrata in una camera della casa della famiglia Pingon di Écully, dove viveva il marchese Claude de Jouffroy d’Abbans (1751-1832), inventore del battello a vapore. Il colpo di Stato del 18 brumaio dell’anno IV (9 novembre 1799) portò Napoleone (1769–1821) al potere e, quindi, i sacerdoti refrattari fecero ritorno alle loro chiese, perciò anche don Balley rientrò a Écully.
Giovanni Maria ha ormai 20 anni e le sue manifestazioni sono decisamente di carattere ascetico. Preghiera, penitenza, meditazione. A tavola mangia quasi sempre solo la minestra, chiedendo che venga scodellata senza burro. Spesso trascorre il tempo in chiesa oppure nella canonica di Écully insieme al curato don Balley, il quale lo prende fin da subito in grande simpatia: vede qualcosa in lui che altri non scorgono. In canonica si accosta agli studi, ma fin dal principio manifesta grandi difficoltà. Con la penna in mano diventa lento e imbarazzato: la sua intelligenza è rimasta arrugginita per troppi anni. Mesi e mesi di sforzi che risultano vani, inefficaci. Con tenacia e volontà si concentra sui libri, ma le difficoltà sono enormi, tanto da sembrare insormontabili. Prega, si mortifica e, troppo poco nutrito, s’indebolisce sempre più. Un giorno il parroco lo rimprovera: «Giovanotto sta bene pregare e far penitenza, ma bisogna anche mangiare e non rovinarsi la salute».
È proprio in questo tempo che Giovanni Maria sperimenta una dolorosa e forte crisi vocazionale, provando un netto disgusto per i libri. Con la mente rivede i suoi cari, l’amata casa di famiglia, i campi paterni… ha nostalgia dell’aratura della terra, della semina, della mietitura del grano. Fra l’altro il padre di Giovanni Maria Vianney è decisamente contrario all’ordinazione del figlio, che lo reclama in famiglia per impiegarlo nelle mansioni rurali.
Il giovane afferma con amarezza a don Balley di voler far ritorno alla dimora paterna; ma il suo maestro di fede e d’intelletto si dimostra assai rattristato nell’udire quelle intenzioni, perciò non cede e cerca di spronarlo perché ha piena fiducia nelle potenzialità del suo allievo. I libri continuano ad essere il martirio di Giovanni Maria, il terribile ostacolo alla realizzazione della sua vocazione e secondo la sua stessa confessione «non poteva cacciare nulla nella sua povera testa» oppure «sono come gli zeri, valgo soltanto se vicino ad altre cifre». Cosciente del pericolo, decide di ricorrere all’intervento divino facendo un voto: si sarebbe recato a piedi fino al santuario di La Louvesc, presso la tomba  di san Francesco Regis (1597–1640), l’apostolo del Velay e del Vivarais, il sacerdote della Compagnia di Gesù, che, predicando il Vangelo e amministrando il sacramento della penitenza per monti e per villaggi, si adoperò senza sosta per rinnovare la fede cattolica nell’animo degli abitanti.
È il 1806. Da Écully al villaggio di La Louvesc distano circa cento chilometri. Magro come un anacoreta, ma comunque in forze, Giovanni Maria parte. Durante il suo pellegrinaggio viene scambiato per un fannullone, un vagabondo e subisce minacce, rischiando di venire denunciato ai gendarmi. Bussa alle porte per essere sfamato, ma raramente trova ristoro e allora si nutre di erba che trova lungo il cammino e beve acqua di fonte. Privo di proteine e vitamine, cade nella denutrizione e nello sfinimento, tanto che è stordito, eppure prosegue il suo andare,  a volte in compagnia di qualche tozzo di pane, ricevuto in elemosina.
Finalmente giunge al santuario, situato a 1.100 metri di altitudine fra le montagne dell’Haut-Vivarais. È stremato, ma felice. Si dirige subito alla tomba di san Francesco Regis e implora la grazia di imparare sufficientemente il latino, tanto da poter accedere agli studi teologici. Si confessa da un padre gesuita del santuario e gli rivela anche il suo voto. Il religioso gli commuta l’impegno preso: anziché attendere l’elemosina degli altri lungo il cammino di ritorno, avrebbe dovuto lui compierla. Dirà più tardi: «Ho sperimentato la verità della parola della Scrittura: val più dare che ricevere”», aggiungendo: «Non consiglierei mai a nessuno di fare il voto di mendicare».
I libri di studio non gli diedero più la nausea, ma a 24 anni era al livello di uno studente di 15. Ottenne la grazia da Dio, ma non dall’ordinamento militare. Infatti i seminaristi vennero dispensati dal servizio nell’esercito perché il cardinale Joseph Fesch (1763 – 1839), che aveva cresimato Vianney e che era in ottimi rapporti con Napoleone, suo nipote, ottenne da lui che tutti gli studenti ecclesiastici, iscritti nelle liste ufficiali della sua diocesi, fossero esentati dall’arruolamento, come coloro che erano già stati ordinati sacerdoti. Ci furono quattro eccezioni e fra questi seminaristi anche Giovanni Maria Vianney. È probabile che don Balley avesse omesso di segnalare all’arcivescovo che il suo chierico continuava a studiare, oppure, come seconda ipotesi plausibile, potrebbe esserci il fatto che i vicari generali avessero dimenticato di farlo iscrivere fra gli studenti dei seminari. Don Balley, allarmato, andò a fare le dovute rimostranze, ma non ci fu nulla da fare: non poteva essere considerato seminarista uno studente tardivo come Vianney, alloggiato in una casa di contadini, che riceveva lezioni in una canonica; inoltre il suo nome non figurava neppure nella lista ufficiale rilasciata dall’autorità diocesana…
Non restava che obbedire. Giovanni Maria entrò come recluta in una caserma di Lione, ma fu presto colto dalla febbre. Venne ricoverato all’ospedale, poi, convalescente, non riuscì a presentarsi in tempo all’ufficio del capitano per la partenza verso la frontiera della Spagna, dove era stato destinato il suo reparto. Entrò così a far parte della lista nera dei disertori e come tale venne ricercato per qualche tempo, fino all’amnistia: Napoleone, vincitore sull’Austria, aveva accordato la grazia in occasione del suo secondo matrimonio con l’arciduchessa Maria Luisa (1791 – 1847). Fu così che Gian Francesco Vianney di 20 anni, con atto notarile e dietro il versamento di 3.000 franchi, parte dell’eredità del fratello Giovanni Maria, prese il suo posto nell’esercito e venne incorporato nel 6° reggimento.
Aveva 26 anni quando don Balley ritenne che era giunto il momento di provare l’inserimento nel Seminario minore di Verrières, presso Montbrison, per il corso di filosofia della durata di una anno, per poi essere ammesso al Seminario maggiore di Sant’Ireneo a Lione. Ma immediatamente prese a circolare la disistima nei suoi confronti. Per questo giovane, che amava il nascondimento e non otteneva risultati soddisfacenti, nessuno provava interesse. Ed ecco la pagella di quel 1812: Lavoro: bene; Scienza: molto debole; condotta: buona; carattere: buono. Con queste valutazioni riuscì, comunque, ad entrare nel Seminario di Lione (1813-1814).
Ma i nodi vennero subito al pettine e nel consiglio docenti si diceva: «Capisce male il latino e lo parla ancora peggio», fino ad arrivare alla decisione: «Sarebbe il caso che il giovane se ne tornasse a casa e utilizzasse il suo tempo in modo più sensato. La vita sacerdotale non fa per lui. Restando qui sprecherebbe il suo e il nostro tempo». Giovanni Maria Vianney, colui che sarebbe stato proclamato da Pio XI, nel 1929, «celeste patrono di tutti i parroci dell'universo» e da Benedetto XVI, nel 2009, «di tutti i sacerdoti del mondo», venne espulso dal Seminario.
Affinché riuscisse a indossare la talare, è stata fondamentale tutta la tenacia dell’abbé Charles Balley: gli ha fatto scuola in canonica, l’ha avviato al seminario, lo ha riaccolto quando è stato sospeso dagli studi per incapacità e, dopo un altro periodo di difficile preparazione, è riuscito a farlo ordinare sacerdote nella città di Grenoble.
Spinto da don Balley, Giovanni Maria prosegue, nonostante gli insuccessi e le sconfitte. Ma la posta in gioco è troppo alta. Dirà il 13 agosto 1815: «Oh! Che cosa grande è il sacerdozio! Il sacerdozio non lo si capirà bene che in cielo… Se lo si comprendesse sulla terra, si morrebbe, non di spavento, ma di amore!...».
Ha scritto Benedetto XVI nella «Lettera per l’indizione di un anno sacerdotale in occasione del 150° anniversario del dies natalis del Santo Curato d’Ars» (16 giugno 2009):
«Ci sono, purtroppo, anche situazioni, mai abbastanza deplorate, in cui è la Chiesa stessa a soffrire per l’infedeltà di alcuni suoi ministri. È il mondo a trarne allora motivo di scandalo e di rifiuto. Ciò che massimamente può giovare in tali casi alla Chiesa non è tanto la puntigliosa rilevazione delle debolezze dei suoi ministri, quanto una rinnovata e lieta coscienza della grandezza del dono di Dio, concretizzato in splendide figure di generosi Pastori, di Religiosi ardenti di amore per Dio e per le anime, di Direttori spirituali illuminati e pazienti. A questo proposito, gli insegnamenti e gli esempi di san Giovanni Maria Vianney possono offrire a tutti un significativo punto di riferimento: il Curato d’Ars era umilissimo, ma consapevole, in quanto prete, d’essere un dono immenso per la sua gente».
Nessuna posizione umana è comparabile a quella del sacerdote: «Un buon pastore, un pastore secondo il cuore di Dio, è il più grande tesoro che il buon Dio possa accordare ad una parrocchia e uno dei doni più preziosi della misericordia divina». Sul sacerdozio non riusciva a capacitarsi della grandezza del dono e del compito affidati da Dio a una creatura umana: «Oh come il prete è grande!... Se egli si comprendesse, morirebbe... Dio gli obbedisce: egli pronuncia due parole e Nostro Signore scende dal cielo alla sua voce e si rinchiude in una piccola ostia...».
Spiegando ai suoi fedeli l’importanza dei sacramenti, l’abbé Vianney affermerà: «Tolto il sacramento dell'Ordine, noi non avremmo il Signore. Chi lo ha riposto là in quel tabernacolo? Il sacerdote. Chi ha accolto la vostra anima al primo entrare nella vita? Il sacerdote. Chi la nutre per darle la forza di compiere il suo pellegrinaggio? Il sacerdote. Chi la preparerà a comparire innanzi a Dio, lavandola per l'ultima volta nel sangue di Gesù Cristo? Il sacerdote, sempre il sacerdote. E se quest'anima viene a morire [per il peccato], chi la risusciterà, chi le renderà la calma e la pace? Ancora il sacerdote... Dopo Dio, il sacerdote è tutto!... Lui stesso non si capirà bene che in cielo». Continua Benedetto XVI nella sua Lettera: «Queste affermazioni, nate dal cuore sacerdotale del santo parroco, possono apparire eccessive. In esse, tuttavia, si rivela l’altissima considerazione in cui egli teneva il sacramento del sacerdozio. Sembrava sopraffatto da uno sconfinato senso di responsabilità […]. Senza il prete la morte e la passione di Nostro Signore non servirebbero a niente. È il prete che continua l’opera della Redenzione sulla terra... Che ci gioverebbe una casa piena d’oro se non ci fosse nessuno che ce ne apre la porta? Il prete possiede la chiave dei tesori celesti: è lui che apre la porta; egli è l’economo del buon Dio; l’amministratore dei suoi beni... Lasciate una parrocchia, per vent’anni, senza prete, vi si adoreranno le bestie... Il prete non è prete per sé, lo è per voi”».
Finalmente il 13 agosto del 1815, a 29 anni e tre mesi, dopo indicibile fatica, poté salire all’altare e compiere il primo sacrificio eucaristico. Da bambino, quando era ancora accanto all’amata madre, egli affermava: «Se fossi prete, vorrei conquistare molte anime», quelle anime lo stavano attendendo.
Tornò a Ecully come vicario dell’abbé Balley, ma quest’ultimo, vecchio prima del tempo, morì nel 1817 dopo essersi confessato con il caro allievo, il figlio prediletto. Ricevette da lui il viatico, l’estrema unzione e gli ordinò di prendere gli strumenti di penitenza, mormorandogli all’orecchio: «Tieni, figliolo, nascondili. Se scoprissero questi arnesi dopo la mia morte, crederebbero che io ho già scontato i miei peccati e mi lascerebbero in Purgatorio fino alla fine del mondo». La disciplina e il cilicio di don Balley vennero ereditati, e quindi utilizzati, dall’abbé Vianney, il quale custodì con devozione gli oggetti appartenuti al suo maestro e padre spirituale, anche un piccolo specchio, «perché aveva riflesso il suo volto».
Ora,  per la diocesi di Lione, si poneva il problema di dove collocarlo. Era vacante una minuscola cappellania (neppure parrocchia) di Ars del dipartimento dell’Ain, a 35 chilometri a nord di Lione. Gli abitanti erano 230. Non valeva la pena “sprecare” un sacerdote per una realtà così piccola e situata in un punto che la diocesi considerava una sorta di Siberia, un luogo dimenticato dal mondo. Tuttavia, c’era quell’ “ignorante” pretino di 32 anni da sistemare. L’onorario previsto era di 500 franchi, concessi annualmente dal Comune.
Il 9 febbraio 1818 l’ “inutile” ministro di Dio si mise in cammino e, trovato un ragazzo per la via, gli domandò l’indicazione per il villaggio che doveva raggiungere, promettendogli, come evoca, ricordando le parole pronunciate dal santo, il «Monument de la Rencontre» di Ars: «Io ti mostrerò il cammino del cielo».
Era stato «preavvertito dal Vescovo che avrebbe trovato una situazione religiosamente precaria: “Non c’è molto amor di Dio in quella parrocchia; voi ce ne metterete”. Era, di conseguenza, pienamente consapevole che doveva andarvi ad incarnare la presenza di Cristo, testimoniandone la tenerezza salvifica: “[Mio Dio], accordatemi la conversione della mia parrocchia; accetto di soffrire tutto quello che vorrete per tutto il tempo della mia vita!”, fu con questa preghiera che iniziò la sua missione. Alla conversione della sua parrocchia il Santo Curato si dedicò con tutte le sue energie, ponendo in cima ad ogni suo pensiero la formazione cristiana del popolo a lui affidato. Cari fratelli nel Sacerdozio, chiediamo al Signore Gesù la grazia di poter apprendere anche noi il metodo pastorale di san Giovanni Maria Vianney!». Benedetto XVI non propone a modello, dunque, la pastoralità moderna, bensì quella della Tradizione e si potrebbe affermare la stessa considerazione per la liturgia, come ha avuto modo di spiegare molto bene nella sua autobiografia, ma questo è un altro tema. Prosegue il Pontefice: «Ciò che per prima cosa dobbiamo imparare è la sua totale identificazione col proprio ministero. In Gesù, Persona e Missione tendono a coincidere: tutta la sua azione salvifica era ed è espressione del suo “Io filiale” che, da tutta l’eternità, sta davanti al Padre in atteggiamento di amorosa sottomissione alla sua volontà. Con umile ma vera analogia, anche il sacerdote deve anelare a questa identificazione. Non si tratta certo di dimenticare che l’efficacia sostanziale del ministero resta indipendente dalla santità del ministro; ma non si può neppure trascurare la straordinaria fruttuosità generata dall’incontro tra la santità oggettiva del ministero e quella soggettiva del ministro. Il Curato d’Ars iniziò subito quest’umile e paziente lavoro di armonizzazione tra la sua vita di ministro e la santità del ministero a lui affidato, decidendo di “abitare” perfino materialmente nella sua chiesa parrocchiale: “Appena arrivato egli scelse la chiesa a sua dimora... Entrava in chiesa prima dell’aurora e non ne usciva che dopo l’Angelus della sera. Là si doveva cercarlo quando si aveva bisogno di lui”, si legge nella prima biografia». In chiesa il tempo scompariva, come lo spazio, lì guardava il buon Dio e «Dio guarda me…».
Quando giunse ad Ars il 13 febbraio 1818 trovò un paese immerso nella solitudine, isolato, quasi inaccessibile, anche a causa della quasi impraticabilità delle strade. Gli abitanti, infatti, non si allontanavano quasi mai da lì, «essendo del resto selvatici per natura».
Ad Ars Vianney si diede subito da fare, trovando l’appoggio nella contessina Maria Anna Colomba Garnier des Garets (1754-1832) di 64 anni. La Rivoluzione, nonostante fosse nobile, non l’aveva catturata. Il prete venuto da Dardilly non pretendeva di cambiare il mondo, ma quel minuscolo paese, che Dio gli aveva affidato. Si assicurò perciò la cooperazione delle famiglie migliori per perfezionare i buoni, richiamare gli indifferenti, convertire i peccatori. Dinanzi all’opera da intraprendere si sentiva debole e insufficiente, ma abbattendo l’orgoglio spalancò le porte alla forza misteriosa della Grazia, che inondò la sua anima e il paese di Ars, per il quale offrì tutto se stesso, sottoponendosi a durissime penitenze. Per diverso tempo dormì al piano terra con pavimento e muri umidi e senza materasso poiché lo regalò ai poveri. Contrasse nevralgie facciali molto dolorose e di cui soffrì per 15 anni. Gli fu allora detto di salire nella sua camera, ma lui scelse il solaio. Non ebbe mai per il suo «cadavere», come chiamava il proprio corpo, alcuna pietà.
Per cibarsi usava spesso la marmitta, divenuta leggendaria: in essa cuoceva patate per una settimana e le mangiava fredde, a volte ricoperte di muffa. Di tanto in tanto si faceva cuocere un uovo nella cenere calda oppure impastava un pugno di farina con acqua e sale, preparando i cosiddetti «matefaims» del Curato d’Ars. D’altra parte non aveva cessato di cibarsi di erba. Di tutta fretta mangiava quel poco-niente e beveva un bicchiere d’acqua. Proverbiali erano poi i suoi digiuni, di cui faceva uso per scacciare il peccato dalle anime. Affermava: «Questa specie di demoni – dice il Vangelo – non si scaccia che col digiuno e la preghiera» (Mt 17,20). Rivelerà: «… il demonio fa poco conto della disciplina e degli altri strumenti di penitenza. Ciò che lo sbaraglia è la privazione del bere, nel mangiare e nel dormire. Niente il demonio teme di più e quindi nulla è più gradito a Dio! Quando ero solo, e lo sono stato per otto o nove anni, potendo fare un poco a mio piacimento, mi è capitato di non mangiare per diversi giorni… Allora ottenevo da Dio tutto ciò che volevo per me e per gli  altri» e, con commozione, «Ora non è la stessa cosa. Non posso stare a lungo senza magiare; non riesco più a parlare… Ma come ero fortunato, quando ero solo! Comperavo dai poveri i pezzi di pane che erano stati loro offerti; passavo una buona parte della notte in chiesa; non avevo tanta gente da confessare come ora… E il buon Dio mi faceva grazie straordinarie…».
Utilizzò l’istruzione religiosa per debellare l’ignoranza e cristianizzò, evangelizzò, catechizzò, lanciando una vera e propria crociata contro la bestemmia, il lavoro festivo, le osterie e i balli. Le persone andavano a confessarsi sempre più frequentemente da lui e sovente, come accadrà anche al confessionale di Padre Pio da Pietrelcina, l’abbé Vianney non le assolveva se non vedeva il pentimento.
Tutti gli obiettivi che si era posto al suo ingresso nel villaggio furono raggiunti, riuscendo anche a sopprimere le osterie, dispensatrici di vizi e miseria. Quando, più tardi, forestieri, fedeli o semplicemente curiosi arriveranno in massa ad Ars, san Giovanni Maria Vianney non si opporrà  all’apertura di attività commerciali come gli alberghi. L’ordine, pur con una presenza massiccia di pellegrini, regnerà sovrano. Gli antidoti dell’abbé Vianney al malcostume, al malaffare, allo sciupio della vita erano: messe quotidiane, sacramenti, catechismo, vespri, preghiere, letture devote, rosario, processioni, rogazioni, così si realizzò la restaurazione spirituale ad Ars, che andò di pari passo con quella materiale.
Aveva per il peccatore tenera compassione, ma ciò non gli impediva di essere senza misericordia verso il peccato, di fronte al quale diventava rigidissimo e tuonava, spiegando che esiste una santa collera che viene dallo zelo «con cui dobbiamo sostenere gli interessi di Dio». La sua santa collera veniva non dal temperamento mite, bensì dal senso del dovere religioso, avendo assunto l’abito sacerdotale ed essendo divenuto, a pieno titolo, Alter Christus.
La cappellania diventò parrocchia nel 1821 e Vianney inziò l’opera di restauro della chiesa. Inoltre, nel 1824, aprì una scuola e un orfanotrofio per ragazze, chiamato «Providence». Le giovani erano tante, circa 60, e il cibo, un giorno, iniziò a scarseggiare. Vianney pregò e il granaio si riempì: la cosa singolare è che il poco grano vecchio rimasto si distingueva dai chicchi nuovi. Ci fu carestia a causa della siccità e la farina era rarissima, ma il mediatore di Dio, con la preghiera, moltiplicò anche quella.
Tormentato dal desiderio di solitudine e di meditazione, sognava il giorno in cui avrebbe potuto ritirarsi nell’amata casa «Providence» per stabilire un’adorazione perpetua. Ma i disegni erano ben diversi.
Dopo cinque anni Ars non era più Ars. Come affluenza di persone sembrava divenuta una metropoli. I forestieri rimanevano stupiti e meravigliati quando vi giungevano: il comportamento degli abitanti era esemplare. Ad essi il curato aveva raccomandato di recitare l’Angelus tre volte al giorno, perciò quando i tre colpi di campana si diffondevano nella valle, tutti si fermavano: gli uomini si scoprivano il capo, le donne giungevano le mani e tutti pregavano.
Violente furono le persecuzioni diaboliche ai danni del Curato d’Ars, che sarà nominato esorcista. Il maligno, che lui chiamava «grappino», lo pedinò per circa trentacinque anni, dal 1824 al 1858 e non gli permetteva di riposare. Rovesciava le sedie, scuoteva i mobili e ripeteva: «Vianney, Vianney! Mangiapatate!, Ah! Non sei ancora morto!... Un giorno ti avrò». Grugniti di orso, latrati di cane…Vianney pregava e faceva penitenza, non mangiava e non dormiva e un giorno il «grappino», sconfitto, non tornò più a molestarlo.
La fama di santità percorse tutta la Francia e anche oltre. Il santo si schernì sempre dall’essere l’autore di prodigi, guarigioni e miracoli, attribuendo tutto all’intercessione di santa Filomena (III-IV secolo), martire dell’antica Roma, di cui la chiesa di Ars conservava una reliquia.
Tuttavia quella fama di santità urtava parecchi ecclesiastici, che non potevano credere in un sacerdote “ignorante”, spesso considerato addirittura pazzo. A tali illazioni monsignor Alexandre Raymond Dévié (1767 – 1855), vescovo di Belley, rispondeva: «Signori, io auguro a tutto il mio clero un granellino di questa follia».
Dall’età di 11 anni desiderava vivere in solitudine, ma non gli fu permesso; rimase 41 anni curato delle anime di Ars, contro la sua volontà, sottomettendosi a quella di Dio. Un giorno disse: «Non è per la fatica che costa… Ciò che spaventa è il conto che si deve rendere a Dio della vita di curato […] non sapete che cosa voglia dire passare da una canonica al tribunale di Dio». Tre volte tentò la fuga da Ars, ma fece sempre ritorno nel luogo dove Dio l’aveva chiamato ad operare.
I suoi sermoni sono un capolavoro di dottrina e di teologia. Siamo di fronte a un predicatore straordinario. Si prepara le prediche meglio che può, poi le studia. Ma quando le espone, parla con tanta convinzione, con tanto ardente amore per Dio che coinvolge e travolge gli uditori. Parecchi testimoni hanno raccontato che, nonostante la sottile voce del santo, l’assenza di microfoni, l’assembramento delle migliaia di persone nella e presso la chiesa, non impedivano alla Grazia di manifestarsi ugualmente e molti si convertirono senza neppure sentirlo.
Un avvocato anticlericale andò ad Ars sperando di ridere a spese di quello strano prete, in realtà tornò a casa convertito: agli amici che gli chiesero che cosa avesse visto ad Ars, egli rispose che aveva incontrato Dio in un uomo.
Le sue benedizioni, le sue prediche, il suo carisma si estendono ormai per ogni dove; in moltissimi vogliono raggiungere Ars, tanto che tutta l’Europa viene qui rappresentata.
Nel 1835 don Vianney risente ancora delle penitenze giovanili: nevralgie facciali e mal di denti impressionanti. Fino al 1843, nonostante la mole di lavoro a cui deve attendere, non ha accanto a sé nessun coadiutore, ma dopo questa data monsignor Devie raccomanda i parroci di Rancé e di Savigneux di aiutarlo nelle diverse funzioni del suo ministero.
Proprio in quell’anno Vianney fu in punto di morte a causa di una pleuro-polmonite, d’altra parte già due anni prima, sentendosi sfinito e prossimo alla morte, aveva fatto testamento, nel quale «lasciava alla terra il suo corpo di peccati e consegnava la sua povera anima alle Tre Persone della SS. Trinità».
Fu un martire del confessionale: arrivò a starvi anche 18 ore al giorno. Benedetto XVI, sull’esempio di Vianney, invita a rimettere al centro delle preoccupazioni pastorali la confessione, il sacramento che rigenera e riporta alla vita l’anima fatta per la libertà della Verità e non per la menzogna e la prigionia del peccato, che getta nelle tenebre la persona, serrandola in una gabbia di male. E se l’anima è torturata, tutto l’equilibrio psicofisico è turbato e compromesso. Scrive ancora il Santo Padre nella sua Lettera: «Sconsiglia ai suoi parrocchiani la danza. Eppure le danze del suo tempo sono meno immorali e scandalose di certe danze di oggi: le sue parrocchiane ci vanno coperte e con le gonne lunghe. Chissà che cosa direbbe di certi balli del nostro secolo! Eppure nega l’assoluzione a chi non promette di astenersi da certi balli. Alcuni gli rispondono che andranno in un’altra chiesa dove non avranno difficoltà a farsi assolvere. A questi risponde: “Se altri preti vi vogliono aiutare ad andare all’Inferno, che se ne prendano la responsabilità”».
Era il mese di marzo del 1850 quando uscì un libro del suo amico, il venerabile fratel Gabriele Taborin (1799-1864), fondatore dei Fratelli della Sacra Famiglia, dal titolo: L’Angelo conduttore dei pellegrini di Ars. Quando Taborin gli fece dono del volume, l’abbé Vianney rimase profondamente addolorato, poiché si trattava di un lavoro encomiastico nei suoi confronti. «Ma come avete potuto ingannarmi così?», disse turbato , «Vi credevo incapace di fare un libro cattivo. Non voglio assolutamente che quest’opera sia conservata o divulgata in alcun modo. Bruciatela immediatamente! Vi rimborserò io le spese della stampa». Di fronte all’interdetto Taborin egli aggiunse, pensando sempre di essere un asino che aveva scambiato il suo «raglio per un nitrito»: «Il vostro libro è buono farà senz’altro del bene. Ma bisogna togliere tutti quegli elogi menzogneri che avete messo all’inizio. Come avete potuto farmi simili lodi. A me, che non sono che un povero peccatore, il più ignorante dei preti. A me che forse un giorno sarò sconfessato! Gli altri parroci fanno del bene. Io non faccio che tele di ragno, e se anche essi non lo dicono, comunque lo pensano». Il suo disappunto non venne preso in considerazione e il Vescovo di Belley diede l’autorizzazione alla distribuzione del volume. Il commento del Curato d’Ars fu: «Appena una croce mi lascia, eccone subito un’altra pronta a sostituirla» e non autografò neppure una copia.
L’abbé Vianney  trascorre tutta la sua giornata e la sera in chiesa: all’altare, sul pulpito, in confessionale. Spesso la notte non trova riposo, a causa delle molestie sataniche, che si fanno sentire anche di giorno, come quella mattina del 24 febbraio 1857. Mentre il curato si trovava in sacrestia, alcuni fedeli, che si trovavano nella canonica, videro uscire le fiamme dalla sua stanza. Corsero per andarlo ad avvisare. Egli, che già indossava i paramenti sacri e stava per iniziare a celebrare la Santa Messa, senza scomporsi disse: «Quel villano d’un grappino!... Non ha potuto prendere l’uccello e così brucia la gabbia». Così dicendo trasse di tasca la chiave della porta per dare la possibilità ai parrocchiani di spegnere l’incendio. (Ancora oggi sono visibili le tracce del fuoco su diversi oggetti). Ma grande fu lo stupore quando i soccorritori videro, aprendo la porta, che le fiamme si erano fermate davanti al reliquiario di legno che don Vianney teneva sul cassettone e che conteneva oltre cinquecento reliquie di santi, raccolte nel corso degli anni.
 Fra i tanti doni straordinari di don Vianney c’era quello del discernimento degli spiriti, cioè l’intelligibilità delle anime che gli permetteva di scrutare i cuori e rivelare anche ciò che i penitenti non osavano dire oppure li illuminava sui pericoli della coscienza e sulle tentazioni. Giorno, notte, sempre, senza soste… nulla lo poteva fermare di fronte alla liberazione del peccato. Soffriva di emicranie paurose dentro il confessionale, gelido d’inverno, una fornace d’estate, eppure proseguiva, incurante di sé.
Venivano pagati i poveri per tenere il posto in coda ai più abbienti. Don Vianney non faceva mai distinzioni fra i fedeli, usando lo stesso atteggiamento, come faceva anche san Giuseppe Cafasso (1811-1860), sia per i meno fortunati che per le persone illustri. Una volta un ricco signore si lamentò a gran voce perché era costretto, per confessarsi, a rispettare la fila come gli altri. Con passo deciso si avviò al confessionale, superando tutti gli astanti, e con arroganza disse: «La settimana scorsa, io, sono stato a pranzo con l’imperatore!», allora l’abbé Vianney spuntò fuori e rispose: «E io pranzo tutti giorni con Nostro Signore!». Arguto e pungente, il Curato rispondeva sempre a tono, come quella volta che si rivolse in questi termini ad un pellegrino scettico, il quale gli aveva domandato se vedeva davvero il diavolo: «Sì, e anche adesso!».
Incoraggiava alla comunione frequente, affermando che non tutti coloro che si avvicinano all’altare sono santi, ma i santi sono fra coloro che si comunicano spesso. Un giorno un’indemoniata gli gridò: «Quanto mi fai soffrire… Se sulla terra ci fossero tre persone come te, il mio regno sarebbe distrutto».
Unito costantemente a sorella povertà, amava i paramenti sacri ricchi e preziosi, gli arredi della chiesa belli e nobili. Affermava che «niente è troppo bello per Dio» e agì di conseguenza abbellendo la chiesa, il campanile, il coro, le cappelle Jean-Baptiste nel 1823, Ecce Homo nel 1833, Sainte Philomène nel 1837 Per tutta la vita accoglierà con riconoscenza donazioni e favori di benefattori aristocratici e potenti, sempre destinati ad abbellire la chiesa o la «Providence».
Incontrandolo ci si convertiva o si consolidava la fede che si aveva, cercando di perfezionarsi, ma gli stessi preti rimanevano scossi e rileggevano la propria vocazione alla luce della vita, della pastorale, delle parole del Curato d’Ars. Spiegava il patrono dei parroci: «La causa della rilassatezza del sacerdote è che non fa attenzione alla Messa! Mio Dio, come è da compiangere un prete che celebra come se facesse una cosa ordinaria!» e prese l’abitudine di offrire sempre, celebrando, anche il sacrificio della propria vita: «Come fa bene un prete ad offrirsi a Dio in sacrificio tutte le mattine!». Il cuore, il centro della vita del prete è l’Eucaristia, ma tale deve essere anche per il laico, come afferma nel sermone pensato per la sesta domenica dopo Pentecoste: «Quale gioia per un cristiano che ha la fede, che, alzandosi dalla santa Mensa, se ne va con tutto il cielo nel suo cuore! ... Ah, felice la casa nella quale abitano tali cristiani!... quale rispetto bisogna avere per essi, durante la giornata. Avere, in casa, un secondo tabernacolo dove il buon Dio ha dimorato veramente in corpo e anima!. . .».
Nel 1836 si organizzò un servizio di vetture fra Ars e Trévoux, tre volte alla settimana e divenne quotidiano fra Ars e Lione nel 1840. Due carrozze omnibus furono poi ulteriormente approntate, per due volte al giorno, con la linea Parigi-Lione. Il numero dei pellegrini giunse ad ottantamila all’anno, contando solo coloro che si servivano di mezzi pubblici.
Con decreto dell’11 agosto 1855 Napoleone III promosse l’abbé Vianney nell’ordine imperiale della Legion d’Onore, con il grado di cavaliere, titolo che assume un’inevitabile vena umoristica sulle spalle spigolose e fragili del curato, il quale, quando era diventato canonique, aveva immediatamente venduto, a vantaggio dei poveri, la mozzetta che gli avevano consegnato. Un giorno si sentì dire: «Signor Curato, tutte le potenze della terra vi offrono decorazioni. Quindi Dio non mancherà di decorarvi in Cielo» e lui, seriamente: «È questo che mi fa paura! Guai se alla morte mi presentassi con queste bagatelle, e dovessi sentire Dio che mi dice: “Vattene! Hai già ricevuto la tua ricompensa”». Allora, quando seppe che la croce di cavaliere non aveva alcun valore commerciale, altrimenti l’avrebbe venduta per i suoi poveri, la restituì al mittente.
Morì, sfinito, ma senza agonia, il 4 agosto 1859 alle 2 della notte. Il campanile di Ars emise i rintocchi funebri e venne imitato dai paesi di Savigneux, Misérieux, Toussieux, Jassans-Riottier. Dopo le esequie, il suo corpo, per consentire l’ultimo saluto dei  fedeli, rimase esposto in chiesa dieci giorni e dieci notti.  Papa san Pio X lo ha proclamato beato l'8 gennaio 1905; mentre il 31 maggio 1925 è stato canonizzato da Pio XI. Nel centenario della morte, il 1° agosto 1959, il beato Giovanni XXIII gli ha dedicato un’enciclica, Sacerdotii Nostri Primordia, additandolo a modello dei sacerdoti.
Nel 1986, il venerabile Giovanni Paolo II, nel bicentenario della nascita del santo, andò in pellegrinaggio ad Ars, dedicandogli la tradizionale lettera che indirizzava ogni giovedì Santo a tutti i sacerdoti. Lascia scritto il Papa: «Sulla strada del rientro dal Belgio a Roma,  ebbi la fortuna di sostare ad Ars. Era la fine di ottobre del 1947, la domenica di Cristo Re. Con grande commozione visitai la vecchia chiesetta dove San Giovanni Maria Vianney confessava, insegnava il catechismo e teneva le sue omelie. Fu per me un'esperienza indimenticabile. Fin dagli anni del seminario ero rimasto colpito dalla figura del parroco di Ars, soprattutto alla lettura della biografia scritta da Mons. Trochu. San Giovanni M. Vianney sorprende soprattutto perché in lui si rileva la potenza della grazia che agisce nella povertà dei mezzi umani. Mi toccava nel profondo, in particolare, il suo eroico servizio confessionale. Quell' umile sacerdote che confessava più di dieci ore al giorno, nutrendosi poco e dedicando al riposo appena alcune ore, era riuscito, in un difficile periodo storico, a suscitare una sorta di rivoluzione spirituale in Francia e non soltanto in Francia. Migliaia di persone passavano per Ars e si inginocchiavano al suo confessionale. Sullo sfondo della laicizzazione e dell'anticlericalismo del XIX secolo, la sua testimonianza costituisce un evento davvero rivoluzionario.
Dall'incontro con la sua figura trassi la convinzione che il sacerdote realizza una parte essenziale della sua missione attraverso il confessionale, attraverso quel volontario "farsi prigioniero del confessionale"».
Il Cuore incorrotto dell’abbé Vianney è custodito in un reliquiario donato, in occasione del centenario della beatificazione, dalla parrocchia di San Giovanni Maria Vianney (località Borghesiana) di Roma al Santuario di Ars. L'opera, in bronzo argentato, è stata fusa nella fonderia dei laboratori della Domus Dei di Albano su progetto dell'artista Alessia Bernabei di Roma. Il reliquiario è stato ideato prendendo spunto da una frase tratta dalle omelie del Curato: «Il cuore dei santi é saldo come una roccia tra i flutti del mare», e rielabora il  portale della Cappella del Cuore di Ars, trasformandolo in un tempietto, edificato sopra una roccia, che si erge tra le onde del mare.


Autore: Cristina Siccardi

unti bibliografici su Santo Curato D'ars a cura di LibreriadelSanto.it

Siccardi Cristina, Semplicemente fratello, San Paolo Edizioni, 2010 - 176+16 pagine
Farinelli Giuseppe, Allora non è pane! Vita di san Giovanni..., Ares Edizioni, 2010 - 360 pagine
Falcone Emanuele F., Omelie del santo curato d'Ars, Vivere In, 2010 - pagine
Fortunati Alessandro, Cambiare si può se ci sono i santi. Il..., Tau Editrice, 2010 - 64 pagine
Tognetti Serafino, Ho visto Dio in un uomo. Santo curato D'Ars, Shalom, 2010 - 416 pagine
De Domenico Elisabeth M., La vita del santo curato D'ars, Paoline Edizioni, 2010 - pagine
Innocente Feliciano, San Giovanni Maria Vianney, Elledici, 2009 - 48 pagine
Rita Pomponio, Il Curato D'Ars, Libreria Editrice Vaticana, 2009 - pagine
Blanc Pierre, Santo Curato D'Ars. Diventare santi ogni..., Gribaudi, 2009 - pagine
Stanzione Marcello, San Giovanni Maria Vianney, Edizioni Segno, 2009 - 140 pagine
Ballestrero Anastasio, Il cuore del curato d'Ars, Elledici, 2009 - 192 pagine
Stanzione Marcello, Trecentosessantacinque giorni con il curato..., Gribaudi, 2009 - pagine
Monnin Alfred, Spirito del curato d'Ars, Ares Edizioni, 2009 - 224 pagine
Alfred Monnin, Il Curato D'Ars, Guerrino Leardini, 2009 - 287 pagine
Joulin Marc, Il santo curato d'Ars, Paoline Edizioni, 2009 - 128 pagine
Altri suggerimen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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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2010-09-18

 

 

 

San Giovanni Maria Vianney Sacerdote
4 agosto - Memoria 
Dardilly (Lione, Francia), 8 maggio 1786 - Ars-sur-Formans (Ain, Francia), 4 agosto 1859

Giovanni Maria Vianney nacque l'8 maggio 1786 a Dardilly, Lione, in Francia. Di famiglia contadina e privo della prima formazione, riuscì, nell'agosto 1815, ad essere ordinato sacerdote. Per farlo sacerdote, ci volle tutta la tenacia dell'abbé Charles Balley, parroco di Ecully, presso Lione: lo avviò al seminario, lo riaccolse quando venne sospeso dagli studi. Giovanni Maria Vianney, appena prete, tornò a Ecully come vicario dell'abbé Balley. Alla morte di Balley, fu mandato ad Ars-en-Dombes, un borgo con meno di trecento abitanti. Giovanni Maria Vianney, noto come il curato d'Ars, si dedicò all'evangelizzazione, attraverso l'esempio della sua bontà e carità. Ma fu sempre tormentato dal pensiero di non essere degno del suo compito. Trascorreva le giornate dedicandosi a celebrare la Messa e a confessare, senza risparmiarsi. Morì nel 1859. Papa Pio XI lo proclamerà santo nel 1925. Verrà indicato modello e patrono del clero parrocchiale. (Avvenire)

Etimologia: Giovanni = il Signore è benefico, dono del Signore, dall'ebraico
 
Contro la sua volontà di farsi prete sembra congiurare l’universo intero: la famiglia povera, il padre ostile, la Rivoluzione che scristianizza la Francia; poi Napoleone lo chiama soldato e lui diserta per non dover servire l’uomo che ha imprigionato papa Pio VII (lo salva il fratello François, arruolandosi al posto suo). Diventa infine prete a 29 anni nell’agosto 1815, mentre gli inglesi portano Napoleone prigioniero a Sant’Elena.
Ma i suoi studi sono stati un disastro, e non solo per la Rivoluzione: è lui che non ce la fa col latino, non sa argomentare né predicare... Per farlo sacerdote c’è voluta la tenacia dell’abbé Charles Balley, parroco di Ecully, presso Lione: gli ha fatto scuola in canonica, l’ha avviato al seminario, lo ha riaccolto quando è stato sospeso dagli studi. Dopo un altro periodo di preparazione, l’ha poi fatto ordinare sacerdote a Grenoble.
E Giovanni Maria Vianney, appena prete, torna a Ecully come vicario dell’abbé Balley, che però muore nel 1817. Allora lo mandano vicino a Bourg-en-Bresse, ad Ars, un borgo con meno di trecento abitanti, che diventerà parrocchia soltanto nel 1821.
Poca gente, frastornata da 25 anni di sconquassi. E tra questa gente lui, con un suo rigorismo male accetto, con la sua impreparazione, tormentato dal sentirsi incapace. Aria di fallimento, angoscia, voglia di andarsene...
Ma dopo alcuni anni ad Ars viene gente da ogni parte. Quasi dei pellegrinaggi. Vengono per lui, conosciuto in altre parrocchie dove va ad aiutare o a supplire parroci, specie nelle confessioni. Le confessioni: ecco perché vengono. Questo curato deriso da altri preti, e anche denunciato al vescovo per le “stranezze” e i “disordini”, è costretto a stare in confessionale sempre più a lungo.
E ormai ascolta anche il professionista di città, il funzionario, la gente autorevole, chiamata ad Ars dai suoi straordinari talenti nell’orientare e confortare, attirata dalle ragioni che sa offrire alla speranza, dai mutamenti che il suo parlare tutto minuscolo sa innescare.
E qui potremmo parlare di successo, di rivincita del curato d’Ars, e di una sua trionfale realizzazione. Invece continua a credersi indegno e incapace, tenta due volte la fuga e poi deve tornare ad Ars, perché lo aspettano in chiesa, venuti anche da lontano.
Sempre la messa, sempre le confessioni, fino alla caldissima estate 1859, quando non può più andare nella chiesa piena di gente perché sta morendo. Paga il medico dicendogli di non venire più: ormai le cure sono inutili. Annunciata la sua morte, "treni e vetture private non bastano più", scrive un testimone. Dopo le esequie il suo corpo rimane ancora esposto in chiesa per dieci giorni e dieci notti. Papa Pio XI lo proclamerà santo nel 1925.
Autore: Domenico Agasso

 

 

 


JOHN MARY VIANNEY
Also known as
Cure of Ars; Jean Baptiste Marie Vianney; Jean Marie Baptiste Vianney; Jean-Baptiste Vianney; John Baptist Vianney; John Vianney
Memorial
4 August
Profile
Farm hand who in his youth taught other children their prayers and catechism. Ordained in 1815, though it took several years study as he had little education, was not a very good student, and his Latin was terrible. Assigned for a while to Ecully. In 1818 he was assigned to the parish of Ars, a tiny village near Lyons, which suffered from very lax attendance; he began visiting his parishioners, especially the sick and poor. Spent days in prayer, doing penance for his parishioners. Gifted with discernment of spirits, prophecy, hidden knowledge, and working miracles. Tormented by evil spirits, especially when he tried to get his 2-3 hours of sleep each night. Crowds came to hear him preach, and to make their reconciliation because of his reputation with penitents; by 1855 there were 20,000 pilgrims a year to Ars. Spent 40 years as the parish priest.
Born
1786 at Dardilly, Lyons, France
Died
4 August 1859 at Ars, France of natural causes
Name Meaning
God is gracious; gift of God
Canonized
1925
Patronage
archdiocese of Dubuque Iowa; confessors; archdiocese of Kansas City Kansas; priests
Readings
All our religion is but a false religion, and all our virtues are mere illusions and we ourselves are only hypocrites in the sight of God, if we have not that universal charity for everyone - for the good, and for the bad, for the poor and for the rich, and for all those who do us harm as much as those who do us good.

Saint John Vian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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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people would do for God what they do for the world, what a greatnumber of Christians would go to Heaven.

Saint John Vian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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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either belong wholly to the world or wholly to God.

Saint John Vian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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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tell you that you have less to suffer in following the Cross than in serving the world and its pleasures.

Saint John Vian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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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cannot please both God and the world at the same time, They are utterly opposed to each other in their thoughts, their desires, and their actions.

Saint John Vian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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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must always choose the most perfect. Two good works present themselves to be done, one in favour of a person we love, the other in favour of a person who has done us some harm. Well, we must give preference to the latter.

Saint John Vian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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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should consider those moments spent before the Blessed Sacrament as the happiest of our lives.

Saint John Vian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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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little children, reflect on these words: the Christian's treasure is not on earth but in heaven. Our thoughts, then, ought to be directed to where out treasure is. This is the glorious duty of man: to pray and to love. If you pray and love, that is where a man's happiness lies.

Prayer is nothing else but union with God. In this intimate union, God and the soul are fused together like two bits of wax that no one can every pull apart. This union of god with a tiny creature is a lovely thing. It is a happiness beyond understanding.

My little children, your hearts, are small, but prayer stretches them and makes them capable of loving God. Through prayer we receive a foretaste of heaven and something of paradise comes down upon us. Prayer never leaves us without sweetness. It is honey that flows into the souls and makes all things sweet. When we pray properly, sorrows disappear like snow before the sun.

Some men immerse themselves as deeply in prayer as fish in water, because they give themselves totally to God. O, how I love these noble souls!

How unlike them we are! How often we come to church with no idea of what to do or what to ask for. And yet, whenever we go to any human being, we know well enough why we go. And still worse, there are some who seem to speak to the good God like this: "I will only say a couple of things to you, and then I will be rid of you." I often think that when we come to adore the Lord, we would receive everything we ask for, if we would ask with living faith and with a pure heart.

from the catechetical instructions by Saint John Mary Vian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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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ayer is the inner bath of love into which the soul plunges itself.

Saint John Vianney

 

 

 


St. Jean-Baptiste-Marie Vianney
Curé of Ars, born at Dardilly, near Lyons, France, on 8 May, 1786; died at Ars, 4 August, 1859; son of Matthieu Vianney and Marie Beluze.

In 1806, the curé at Ecully, M. Balley, opened a school for ecclesiastical students, and Jean-Marie was sent to him. Though he was of average intelligence and his masters never seem to have doubted his vocation, his knowledge was extremely limited, being confined to a little arithmetic, history, and geography, and he found learning, especially the study of Latin, excessively difficult. One of his fellow-students, Matthias Loras, afterwards first Bishop of Dubuque, assisted him with his Latin lessons.

But now another obstacle presented itself. Young Vianney was drawn in the conscription, the war with Spain and the urgent need of recruits having caused Napoleon to withdraw the exemption enjoyed by the ecclesiastical students in the diocese of his uncle, Cardinal Fesch. Matthieu Vianney tried unsuccessfully to procure a substitute, so his son was obliged to go. His regiment soon received marching orders. The morning of departure, Jean-Baptiste went to church to pray, and on his return to the barracks found that his comrades had already left. He was threatened with arrest, but the recruiting captain believed his story and sent him after the troops. At nightfall he met a young man who volunteered to guide him to his fellow-soldiers, but led him to Noes, where some deserters had gathered. The mayor persuaded him to remain there, under an assumed name, as schoolmaster. After fourteen months, he was able to communicate with his family. His father was vexed to know that he was a deserter and ordered him to surrender but the matter was settled by his younger brother offering to serve in his stead and being accepted.

Jean-Baptiste now resumed his studies at Ecully. In 1812, he was sent to the seminary at Verrieres; he was so deficient in Latin as to be obliged to follow the philosophy course in French. He failed to pass the examinations for entrance to the seminary proper, but on re-examination three months later succeeded. On 13 August, 1815, he was ordained priest by Mgr. Simon, Bishop of Grenoble. His difficulties in making the preparatory studies seem to have been due to a lack of mental suppleness in dealing with theory as distinct from practice -- a lack accounted for by the meagreness of his early schooling, the advanced age at which he began to study, the fact that he was not of more than average intelligence, and that he was far advanced in spiritual science and in the practice of virtue long before he came to study it in the abstract. He was sent to Ecully as assistant to M. Balley, who had first recognized and encouraged his vocation, who urged him to persevere when the obstacles in his way seemed insurmountable, who interceded with the examiners when he failed to pass for the higher seminary, and who was his model as well as his preceptor and patron. In 1818, after the death of M. Balley, M. Vianney was made parish priest of Ars, a village not very far from Lyons. It was in the exercise of the functions of the parish priest in this remote French hamlet that as the "curé d'Ars" he became known throughout France and the Christian world. A few years after he went to Ars, he founded a sort of orphanage for destitute girls. It was called "The Providence" and was the model of similar institutions established later all over France. M. Vianney himself instructed the children of "The Providence" in the catechism, and these catechetical instructions came to be so popular that at last they were given every day in the church to large crowds. "The Providence" was the favourite work of the "curé d'Ars", but, although it was successful, it was closed in 1847, because the holy curé thought that he was not justified in maintaining it in the face of the opposition of many good people. Its closing was a very heavy trial to him.

But the chief labour of the Curé d'Ars was the direction of souls. He had not been long at Ars when people began coming to him from other parishes, then from distant places, then from all parts of France, and finally from other countries. As early as 1835, his bishop forbade him to attend the annual retreats of the diocesan clergy because of "the souls awaiting him yonder". During the last ten years of his life, he spent from sixteen to eighteen hours a day in the confessional. His advice was sought by bishops, priests, religious, young men and women in doubt as to their vocation, sinners, persons in all sorts of difficulties and the sick. In 1855, the number of pilgrims had reached twenty thousand a year. The most distinguished persons visited Ars for the purpose of seeing the holy curé and hearing his daily instruction. The Venerable Father Colin was ordained deacon at the same time, and was his life-long friend, while Mother Marie de la Providence founded the Helpers of the Holy Souls on his advice and with his constant encouragement. His direction was characterized by common sense, remarkable insight, and supernatural knowledge. He would sometimes divine sins withheld in an imperfect confession. His instructions were simple in language, full of imagery drawn from daily life and country scenes, but breathing faith and that love of God which was his life principle and which he infused into his audience as much by his manner and appearance as by his words, for, at the last, his voice was almost inaudible.

The miracles recorded by his biographers are of three classes:


first, the obtaining of money for his charities and food for his orphans;
secondly, supernatural knowledge of the past and future;
thirdly, healing the sick, especially children.
The greatest miracle of all was his life. He practised mortification from his early youth. and for forty years his food and sleep were insufficient, humanly speaking, to sustain life. And yet he laboured incessantly, with unfailing humility, gentleness, patience, and cheerfulness, until he was more than seventy-three years old.

On 3 October, 1874 Jean-Baptiste-Marie Vianney was proclaimed Venerable by Pius IX and on 8 January, 1905, he was enrolled among the Blessed. Pope Pius X proposed him as a model to the parochial clergy.

[Note: In 1925, Pope Pius XI canonized him. His feast is kept on 4 Aug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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