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동성당 게시판

[퍼온글] 새천년 예수는 흑인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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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정 [ljkjustina] 쪽지 캡슐

2000-02-11 ㅣ No.2747

야곱의 우물 2월호에 실린 글인데요, 공감하는 바가 컸기에 나누고 싶어서 올립니다!


 

새 천년 예수는 흑인 여성

 

 

지난 12월 미국 가톨릭 출판물인 ’내셔널 가톨릭 리포터’에 의해 최우수 작품으로 선정된 새 천년 그리스도상 주인공은, 간소하지만 경건한 사제복을 입고 가시면류관을 쓴 여성 흑인의 형상을 하고 있다. 새 천년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가장 잘 나타낸 작품으로 ’민중의 예수’ 흑인 여성이 선택된 것이다.

 

알프스에서 탄생한 아기 예수?

지난 성탄 때 명동 성당에서 열린 송년 음악회는 참 훌륭했다. 북받치는 감동을 애써 삼가면서 아베 마리아를 부르는 여가수의 당당한 위풍을 보며, 빨리 여성 사제가 나와 저렇게 아름다운 미사를 올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뿜빠바바 나팔소리와 찰랑찰랑 종소리,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의 화음과 비발디처럼 생긴 멋진 신부님의 경쾌한 지휘, 아기 예수를 경배하고 성탄을 축하하는 오라토리오! 그리고 다 함께 고요한 밤 거룩한 밤도 신나게 불러 젖혔는데, 뭔가 자꾸 이상했다.

훌륭한 음악회를 다 보고 나오면서 문득 한 생각이었다. 지금 이 행사는 알프스 주변 마을의 겨울철 민속축제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대림절 기간 알프스 주변 나라들의 분위기였다. 성탄을 준비하는 교회 성가대의 합창 연습, 양떼를 모는 알프스 목동의 나팔소리, 종소리를 재현시킨 금속성의 맑은 울림, 여기저기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환상적인 불빛과 잣나무 가지.

그런데 베들레헴에는 아마 키 큰 잣나무가 없을 것이고, 그 위에 소복소복 쌓인 눈도 없을 것이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고 했던가?

 

예수님은 알프스 출신의 백인 남성?

우리가 어려서부터 익숙한 예수님의 모습이 있다. 남자치고는 퍽 곱고 말쑥하게 생긴 라틴 계열의 백인 남성. 창백하도록 하얀 피부에 가늘고 오똑한 콧날과 크고 깊은 눈, 그리고 갈색 머리. 교회 그림에서 익숙한 토실토실한 백인 아기의 곱슬거리는 금발. 이 곱슬 금발로 태어난 아기가 자라면 자연스레 갈색 머리털로 변할 것이다. 성모님은 또 어떠한가? 바비 인형처럼 귀엽고 깜찍하며 매끄러운 피부의 서양 처녀…

그 동안 우리에게 그리스도교는 어쩌면 우리보다 앞서고 부강한 서양 문물을 가장 친숙하게 맛볼 수 있는 현실이었는지 모른다. 그러한 현실이 막강하다 보니 예수님의 본래 모습은 서양 문화의 치장으로 죄다 가려진 면이 없지 않다. 예컨대 순결을 상징한다는 서양식 혼례 때 쓰는 면사포, 그걸 닮은 미사보가 곧 신심을 표현하는 천주교 신자의 상징인 듯 여겨지고, 이걸 안 쓴다고 나무라는 신부님들이 아직도 계신 듯 하다. 정작 서양 사람들은 성당에 들어갈 때 더 이상 미사보를 쓰지 않는데, 이러한 신부님들의 꾸짖음은, 바오로 사도의 영향을 떨치지 못한 채 여자를 보면 뭐든지 숨겨라, 가려라, 가라, 사사건건 꾸짖고 싶어하는 습성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도 백인 남성?

언젠가 미국에서 왔다는 수녀님의 강의 중에 ’당신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성으로 인식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필자를 혼란스럽게 했던 적이 있다. 성모님은 당연히 우리 모두의 어머니 같은 분으로 편안하게 떠오르지만, 하느님 아버지나 그 아드님이신 예수님은 아무리 사랑이시고 이해가 넓으셔도 왠지 몸가짐 하나라도 조심스러운 남성적 존재로만 느껴졌던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성으로 인식하라니…

이 문제를 한참 생각하다가 아하! 하는 깨달음이 왔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성으로 인식하는 체험은 여성들에게,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여 온전한 ’나’를 찾는 신앙의 전환점이다.

유럽에서 가끔 목격한 일인데, 제법 큰 성당의 14처에 등장하는 인물이 한결같이 아프리카 사람이었다. 자매 결연을 맺은 아프리카 어느 본당에서 재정적인 후원에 대한 보답으로 선물한 성화라는 설명이 달려 있곤 했는데, 아프리카의 산천을 배경으로 흑인 예수와 흑인 성모님이 등장하였다. 백인 남성은 곧 식민제국의 나으리였던 이들에게 이 점은 아마 한결 절박한 문제였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무라이 헤어 스타일의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으로 올라가시고, 시름에 잠긴 성모님이 기모노 차림이라면 한국인들은 과연 그 앞에서 신심을 일으키고 깊은 묵상에 빠져들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비유가 사날스러울지 모르겠지만 여성들은 사실 매일매일 그러한 생경함을 이중으로 겪으면서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쓸데없는 문화적 관습에 의해 자신의 존재가 하느님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 가능성이 무참하게 차단되고 마는 것이다.

 

아듀, 백인 남성 예수님!

새 천년 예수는 흑인 여성!

예수님이 부활 후에도 백인으로 그리고 남성으로 그려진다면, 우리들의 신앙체험은 늘 간접적이고 남의 제사에 얻어먹은 떡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왜 하필 흑인 여성인가?

인류 역사를 통해 훌륭한 가르침을 베푼 성인도 여럿이고 종교를 창시한 인물도 여럿이지만, 예수님처럼 삶의 시작과 끝을 통틀어 사회의 밑바닥 곤고한 민중들과 밀착된 삶을 택하신 분은 없다. 이는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받아들인 신자들에게 언제나 중요한 진리요 덕목이다.

국경없는 지구촌 시대, 그러나 아프리카는 재난과 기아의 땅이 되어버렸고,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그 땅에 먼저 희망과 기쁨을 주러 오실 것이다. 또한 마지막 식민지, 여성의 몸. 가난한 나라 가난한 여성은 제국주의 남성들이 정복을 꿈꾸는 최후의 식민지라 한다. 동시에 이들은 자신의 몸을 바쳐 어린이를 양육하고 땅을 지키며 끝까지 신성을 드러내는 존재이다. 그래서 이 시대 부활하신 예수님의 상징은 바로 흑인 여성인 것이다.

 

 

김재희(자유기고가 / 계간 ’if’ 편집위원 / 가톨릭여성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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