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북한관련

내 이웃을 버려 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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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태 [cosma] 쪽지 캡슐

2008-09-04 ㅣ No.8237

 
모든 계명의 중심인 이웃 사랑
"내 이웃을 버려 둘 것인가?" 이 말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보고도 외면하고 그냥 지나쳐 버릴 것인가 하는 뜻일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답은 말할 것도 없이 "그래서는 안 된다."일 것입니다. 이 문제는 결국 `이웃 사랑'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웃 사랑을 우리는 흔히 우리가 신자로서 닦아야 할 여러 가지 덕행 중 하나에 불과한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서적으로 보면 이웃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함께 계명 중에서도 가장 크고 가장 중심적인 계명입니다. 뿐만 아니라 첫째가는 계명인 하느님께 대한 사랑도 이웃 사랑의 실천 없이는 완성할 수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셨습니다. 이웃 사랑의 실천 없이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오로는 갈라디아서 5장 14절에서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이 한마디 말씀에 요약됩니다."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에서도 이미 이웃 사랑의 이 같은 성격이 지적되고 있지만 신약에서는 이웃 사랑이야말로 유일한 계명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강조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요한 복음 13장 34-38절에서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웃 사랑은 결코 여러 계명의 하나가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계명의 중심이요 완성이며 그 전부입니다. 이 이웃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본질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이것과 대립될 수도 없고 또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핑계 삼아 면제될 수도 없습니다. 이만큼 이웃 사랑은 믿는 이들에게는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하느님의 계명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이웃 사랑을 직접 간접,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서 이웃 사랑을 깊이 설명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조금 전에 들은 루가 복음 10장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바로 그것입니다(루가 10, 25-37).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
이제 이 복음을 순서대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어떤 율법학자가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고 그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에 예수님은 다시 반문하십니다. "너는 율법학자이다. 그러니 율법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 예수님이 이렇게 반문하시는 것은 당신을 시험해 보려는 율법학자의 속셈을 다 아시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그가 참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한다면 스스로 깊이 생각하고 답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율법학자는 바른 대로 답을 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이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사랑, 이웃에 대한 전적인 사랑으로써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정답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옳은 대답이다.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살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질문과 답에서 생명과 사랑이 `얼마나 깊이' 관련되어 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에서 "사람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얻는다 해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생명, 영원한 생명은 돈으로도 권력으로도 지식으로도 세상 어떤 것으로도 얻지 못합니다. 오직 사랑으로써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기서 "그대로 실천하라. 그러면 살 수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본시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삶은 기쁨도 의미도 없는 메마른 삶입니다. 참된 삶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참으로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기 위해 지녀야 할 근본 자세이며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 역시 바로 사랑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도 인간 상호간의 사랑입니다. 사랑에서 오는 존경, 상호 신뢰, 용서, 화해입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는 바리사이파 사람입니다. 언제나 자신이 옳다는 것을 남 앞에 드러내기를 원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러면 누가 제 이웃입니까?" 하고 예수님께 되물었던 것입니다. 이 질문에는 다시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는 속뜻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의 의견을 듣고 싶은 생각도 함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 사이에는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문제를 두고 견해의 차이가 상당히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본래 구약에서 율법상으로는 사랑의 계명이 이스라엘 종족은 물론이요 함께 사는 이방인들에게도 미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후기 유다교에서는 이웃의 개념이 많이 좁아졌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함께 사는 외국인 중에서도 하느님을 믿고 할례를 받는 사람에 한해서 이웃 사랑의 의무가 있는 것으로 해석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실천 면에서 더욱 이를 좁혀서, 같은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도 율법을 모르는 일반 백성은 천민시하여 이웃처럼 생각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늘 아침 미사 중 읽은 요한 복음 7장 49절에 보면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를 잡으려 보낸 성전 경비병들이 예수님 말씀에 탄복하여 잡아 오지 못하는 것을 보고서 "도대체 율법을 모르는 이따위 무리는 저주받을 족속들이다."라고 맹렬히 비난하고 있습니다. 성전 경비병들도 이렇게 무시했으니 일반 백성을 이웃으로 생각할 리는 만무했습니다. 더구나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복수해야 하는 원수에게는 전혀 이웃 사랑이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웃 사랑
아무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웃은 먼저 같은 핏줄, 같은 종교에 속하는 사람이요 같은 바리사이파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핏줄, 종교, 계층, 파벌은 누가 이웃인지 규정하는 중요한 척도였습니다. 그래서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 안에서도 본래의 율법 정신과 현실에서 실천의 괴리 때문에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서 상당한 의견의 차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런 사정 때문에 그 율법학자는 이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를 듣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는 이 질문에 대하여 한 비유를 들면서 답하셨습니다. 그것이 곧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는 길에서 강도를 만나 돈도 빼앗기고 심한 상처를 입은 채 길가에 버려져 있었다."는 말로 시작하셨습니다. 이 비유 전개에서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이 `어떤 사람'을 우리 이웃으로 내세우십니다. 생각해 보면 뜻 깊은 표현입니다. `어떤 사람', 예수님은 그의 국적, 그의 종교, 그의 계층, 신분, 그 어느 것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냥 `한 사람'입니다. `사람'인 한에 있어서 예수님에게는 이웃 사랑의 대상으로서 넉넉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한 사제가 그 길을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가 버렸습니다. 다음에는 역시 사제족에 속하는 레위 사람도 그 사람을 보고 지나가 버렸습니다. 이 두 사람은 다 같이 성전에서 하느님께 기도나 제사를 드리고 예리고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 것같이 보입니다. 예리고는 당시 사제족에 속한 사람들이 사는 고장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왜 강도당한 사람을 보고서도 피해 갔는지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겁이 나서 또는 귀찮아서 혹은 같은 화를 입을까 두려워서 등등 여러 가지로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들에게는 곤경에 빠진 사람을 보고서도 그를 돌보아 주어야겠다는 동정심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제나 레위같이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에게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드실 때에 내용뿐 아니라 용어 선택에 있어서도 깊은 의미를 두고 계십니다. 왜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강도를 만나 상처입은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쳐 버린 사람으로 하필이면 사제와 레위를 등장시켰습니까? 그냥 때마침 그 길을 가던 `어떤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 터인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사제와 레위라는 둘 다 신분이 뚜렷한 사람들을 등장시켰습니다. 또한 그것도 그들을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는 길목에 등장시킴으로써 그들이 성전에서 방금 하느님께 엄숙하고 경건한 제사와 기도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임을 연상시키고 있습니다. 사제와 레위라면 본시 누구보다도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요 또 방금 성전에서 하느님께 제사와 기도를 드렸던 사람들이라면 그 하느님이 무엇보다도 원하시는 사랑을 실천했어야 옳았습니다. 성서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전심 전력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마르 12, 33 참조). 아무리 훌륭한 기도를 바치고 제사를 바쳐도 그와 같은 예배 속에 담긴 정신, 곧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에서 사제와 레위를 등장시키고 또 그들이 강도당한 사람을 보고도 피해서 지나쳐 버린 사람으로 묘사하시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점을 지적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특히 그 당시의 사제, 레위, 율법학자 등,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빠져 있는 위선을, 신앙과 실천의 괴리를 지적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야고보 서간에 보면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하셨습니다. 또 사도 바오로도 고린토 전서 13장에서 사랑이 없으면 어떤 좋은 언변도 어떤 깊은 신학 지식도 산을 옮기는 큰 믿음도 심지어 큰 자선 행위나 영웅적 행위까지도 소용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 점을 예수님이 비유에서 간접적으로 지적하고 계십니다. 오늘날 우리 자신도 한번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점입니다. 우리도 성당에서 기도를 바치고 미사 성제를 열심히 봉헌하지만 이 비유의 사제와 레위와 같이 실생활에서는 얼마나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지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같은 반성은 우리의 신앙 생활의 본질이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반성입니다.

십자가로 이웃 사랑을 실천한 예수
이제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이웃 사랑을 참으로 실천한 사람을 등장시킵니다. 그런데 그는 사제나 레위는 물론 아니요 유다인도 아닙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사마리아는 먼 지방이요 예루살렘에 가까운 예리고에 사는 사제나 레위에 비하면 먼 길을 가는 사람일 뿐 아니라 유다 땅에서는 나그네입니다. 또한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다인들과 사이도 나빴고 하느님의 선민으로 자부하는 유다인들로부터 인종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이방인과 같이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사마리아 사람 하나가 그 길을 지나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돈도 빼앗기고 상처를 크게 입은 사람을 보고서 가엾은 생각이 들어 가까이 가서 친절히 위로하고 치료해 주었으며 그를 자기 나귀에 태워서 여관에 데려다 주었을 뿐 아니라 여관 주인에게 잘 부탁하고 돈을 지불했으며 만일 돈이 더 든다면 돌아오는 길에 그것까지도 다 갚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상처입은 사람을 현재의 곤경에서 구해 줄 뿐 아니라 그의 미래까지도 걱정하고 돌보아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사제도 레위도 유다인도 아닌 사마리아 사람을, 곧 나그네요 먼 길을 여행하는 사람을 등장시킨 것은 참으로 의미 심장합니다. 이 말씀은 오늘에 사는 우리에게 "어떤 사람이 참된 크리스찬이냐?" 하는 물음에 대한 시사요 그 답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성당에 잘 다니는 신자일지라도 또는 사제나 수도자일지라도 사랑의 실천이 없으면 그런 신분, 그런 위치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사랑을 참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면 그가 비록 사제나 수도자가 아닐지라도 회장이나 사목 위원이 아닐지라도 신자가 아닐지라도 그가 오히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요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누가 어떤 사람이 참으로 믿는 사람이냐에 대한 근본 문제 제기입니다. 크리스찬이란 어떤 사람이냐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자, 사제, 수도자인 신분이 헛되다는 말이냐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를 사제나 수도자로 불러 주신 하느님의 부르심의 은혜, 특히 우리 모두를 당신의 성자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 곧 그리스도를 닮아서 당신의 자녀가 되게끔 신자로 불러 주신 하느님의 그 은총과 자비를 생각하면 우리가 받은 신자로서의 신분, 사제나 수도자로서의 신분에 대해서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만큼 하느님으로부터 비할 데 없이 큰 사랑을 받고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는 온 세상을 향해서 우리의 처지를 자랑해도 좋고 큰 긍지와 자부심을 가질 만도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누구보다도 앞서서 참으로 하느님을 섬길 줄 아는 사람, 하느님의 뜻을 행할 줄 아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곧 사랑의 실천입니다. 우리가 만일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 신자 아닌 사람들보다도 못하다든지, 더욱이 입으로만 사랑을 말하고 행실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받았고 또 지금도 받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이요 우리의 신앙 생활은 위선이요 거짓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을 우리는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교회로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 참으로 이웃 사랑을 증거하고 있느냐,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인간은 본래부터 상처입은 존재
이 사랑의 증거는 그리스도의 현존의 증거입니다. 우리 서로간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그 무엇으로도 그리스도의 현존을 증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늘 주장하는 교회 쇄신이나, 특히 올해의 목표인 `하느님 백성의 일치'는 바로 이 사랑의 실천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또한 앞으로 4년 후에 맞이하게 되는 선교 200주년 기념도 이 점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비록 200주년에 우리가 외적으로 어떤 거대한 기념 행사를 할 수 없다손 치더라도 만일 우리 모두의 삶이, 한국 교회의 삶이 내적으로 이웃 사랑에 충만되어 있다면, 그 마음이 열려 있다면, 고통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다면, 함께 아파할 줄 안다면 그리하여 모든 사람, 특히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이 종교나 신념에 관계없이 이 교회에서만은 사랑과 자비의 따뜻한 손길을 느낄 수 있다면, 보호를 받고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다면, 그럼으로써 이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다면, 한마디로 이 교회의 모습 속에 모든 이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가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써 우리는 200주년을 기념하고 남을 뿐 아니라, 교회는 진실히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서 이 나라 안에 있어서 누룩이 되고 땅의 소금이 되며 세상의 빛으로 빛날 것입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 신자요 교회인 우리의 사명은,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써 이 땅의 모든 이의 눈물을 닦아 주는 데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마지막에 가서 "자,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는가?"라고 율법학자에게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 양식도 중요합니다. 이는 율법학자가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은 질문과 비교해 보면 생각의 중심이 다릅니다. 율법학자의 질문은 "나의 이웃은 누구입니까?"로서 `나'가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마지막 질문에서는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은 누구냐?"로 강도를 만난 사람, 곧 곤경에 처해 있는 사람이 중심입니다. 이것은 생각에 있어서 중요한 차이입니다. 사랑은 남을 중심으로 할 때 참사랑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사랑은 남을 위하면서도 자신을 앞세우기 쉬운 데 비해서, 남이 중심인 사랑은 진실로 봉사적이요 헌신적이요 몰아적인 사랑입니다. 남을 위해 자신을 조건 없이 내주는 사랑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율법학자는 이번에도 바른 답을 합니다.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그러자 예수님은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 이 하느님의 사랑을 한 번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우리 개개인도 인류 전체도 도대체 인간은 원죄 이후, 강도를 만나 상처입은 사람과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로 말미암아 본래부터 가졌던 좋은 것을 다 빼앗기고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사랑 없이는 구원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고독과 정신적, 육체적 병고, 삶의 고달픔, 그리고 죽음이 이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누가 인간을 이 깊은 상처와 죽음의 고해에서 건져 줄 수 있습니까? 인간은 자신의 이 실존적 고통에서 스스로를 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같은 인간을 다른 모든 이가 외면해도 외면하지 못하는 분이 계십니다. 곧 하느님이십니다. 신구약 성경 전체가 말하는 내용은 참으로 하느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에 대해서입니다. 이 인간의 상처를 고치고 그를 죽음에서 건지기 위해서 하느님이 얼마나 큰 자비를 베푸시는지를 말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서의 하느님은 이 인간의 이웃이 되어 주신 하느님이십니다. 이 인간의 친구가 되어 주신 하느님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은 이 상처받은 인간을 보시고 너무나 측은하게 생각하신 나머지 바로 당신 자신이 혈육을 취하시어 이 상처받은 인간과 같은 인간이 되어 세상 속에 인생과 역사 깊숙이 들어오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상처받은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이제 상처받은 인간의 친구, 이웃만이 아니라 그의 형제가 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더 깊이는 당신 자신이 상처받은 인간이 되심으로써 모든 상처받은 인간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배척당한 예수, 버림받은 예수, 드디어 십자가에 참혹히 죽은 예수가 바로 이 그리스도요 이 하느님이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는 길목에서 강도를 만나 상처를 입은 사람은 한편 이 수난의 예수를 상징하는 것도 같습니다. 그러기에 마태오 복음 25장 31절에서 46절에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굶주리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그들,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 중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기까지 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이 바로 나다. 그 굶주린 사람, 그 헐벗은 사람, 그 병고에 신음하는 사람, 그 옥고를 치르는 사람이 바로 나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는 것을 믿는 것과 같은 믿음으로 가난과 굶주림, 병고와 옥고 등 고통 중에 버림받고 배척당한 사람 안에 그리스도가 현존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믿고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중에 누가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버릴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 줄 안다면 우리는 누구도 감히 그를 외면하고 버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자주 이런 이웃을 보고도 외면하고 지나쳐 버립니다. 그들 속에 그리스도가 계시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네가 외면한 그가 바로 나다."라고 하십니다. "내 이웃을 버릴 것인가?"라는 이 질문은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를 버릴 것인가?"와 같은 질문입니다. 그것은 다시 우리는 "하느님을 버릴 것인가?"와 같은 질문입니다. 가난과 병고, 소외와 천시에 우는 이웃을 버리면 그것은 곧 그리스도를 버리는 것이요 하느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엔 나 스스로 나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 없이는 나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웃 사랑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하셨고,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가 6, 36)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하느님의 사랑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과 같은 사랑을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이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이것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가능할 뿐 아니라 바로 이것이 하느님이 인간을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신 목적이요 성자 그리스도를 사람이 되어 오시게까지 하시어 십자가를 지시고 구속하신 목적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이룩하기 위해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이 오심으로써 에제키엘서 36장 26절에서 예언되었듯이 우리의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 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 새로운 마음을 우리는 가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로마 5, 5). 이렇게 성령, 하느님의 얼을 받아서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이웃을 참으로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랑의 실천과 아울러 겸손되이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의 얼, 성령 앞에 여는 것입니다.

(1980. 3. 22. 명동 대성당)

 
 김수환 추기경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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