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북한관련

국정원 前직원이 국민께 드리는 글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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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수 [landpia21] 쪽지 캡슐

2008-09-02 ㅣ No.8199

 국정원 前직원이 국민께 드리는 글

# 미국에 망명을 신청한 국정원[당시 안기부] 前 직원 김기삼씨의 글 모음. 아래 이름 김기환은 필명.

■ 2003년1월30일 제1차 양심선언 - 김대중 노벨상 공작

국민 여러분께 드립니다.

저는 이 글을 통해, 가면 뒤에 가려진 김대중 정권의 醜惡(추악)하고 僞善적인 본모습을 국민 여러분
들에게 알리고자 합니다. 지난 5년간, 김대중 정권이 民族과 歷史 앞에 저지른, 지울 수 없는 犯罪行
爲를 저의 양심을 걸고 여러분에게 밝힙니다.

김대중이 '그토록 어처구니없는 대북 정책을, 그토록 오랜 동안 일관되게 잘못 추진한' 근본 이유는
노벨상에 대한 지독한 老慾 때문이었습니다. 김대중은 노벨상을 수상할 목적으로, 국가정보원을 동원
하여 해외 공작을 진행하는 한편, 북한의 김정일에게는 약 2조원에 달하는 뇌물을 제공하였습니다.

먼저, 김대중 정권이 국정원을 동원하여 벌인 노벨상 공작에 대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김대중의 노벨상에 대한 병적인 집착은, 지난번 최규선 게이트의 녹취록과 노벨상 공작 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는 바와 같습니다. 최규선이 공개한 '블루카펫 프로젝트'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그 보고서
가 실지로 거의 그대로 실행된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규선과 김대중의 노벨상 공작을 전담한
김한정이라는 인물은 둘 다 유종근 전 지사와 가까운 사이로, 이미 이전에 함께 이 일을 추진했던 것
으로 추정됩니다.

김대중의 노골적인 노벨상 욕심은, 그의 첫 인사에서도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1998년 2월, 김대중은
초대 의전비서관으로 권영민 주 노르웨이 대사를 내정했다가, 일주일만에 교체하는 헤프닝을 벌였습니
다. 김대중은 노벨상을 겨냥하고 권영민 대사를 의전수석에 내정했으나, 그가 대사 재임중 DJ의 노벨
상 수상을 방해한 사실이 확인되자 곧바로 낙마시킨 것입니다.

국정원이 노벨 평화상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꽤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국정원 해외조사국(1국) 동구
과 북구팀의 주 임무는 노벨상에 관한 업무입니다. 문민정부 시절에도 YS의 노벨상 수상에 대해 관심
을 기울였지만, 수상 가능성이 낮았기 때문에 DJ의 수상 저지에 주력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김
대중 정권의 초대 국정원장이었던 이종찬씨는, 부임 초부터 김대중의 노벨상 수상 공작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지난번 일요신문에 밝힌 바와 같이, 이원장은 YS 정권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활동했던 최종X 말레이시
아 공사를 소환, 조사하였습니다. 최종X 공사는 지난 1995년, 노벨상 활동을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최모 주 노르웨이 대사를 소환 조치하기까지 했었던 인물입니다. 이 일로 인해 한국과 노르웨이는 한
때 불편한 외교관계를 가지기도 했었습니다.

1998년 8월, 이종찬 원장은 비서실 산하에 대외협력보좌관이라는 부서를 신설하고, 김대중의 공보비
서 출신인 김한정이라는 인물을 특별 채용하였습니다. 김한정은 이원장에게 直報하면서 비밀리에 여
러 가지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지난번 최규선 게이트에서 마이클 잭슨 공연 유치와 관련하여 국정원
의 K박사로 거론되었던 자가 바로 김한정입니다.

그는 세계적인 음악가들을 초청, 휴전선에서 평화의 음악회 개최를 추진했는가 하면, 마이클 잭슨의
서울 공연에도 깊이 관여하였습니다. 또한 김대중의 햇볕정책과 민주 투사로서의 인생역정, 외환위기
극복 등을 홍보하기 위해 여러 책자를 발간하고 국제적인 세미나를 기획하기도 했습니다. 스웨덴과 노
르웨이 현지에서는 김대중의 인생역정을 美化한 김대중 傳記를 공금을 들여 북구어로 번역해 발간하기
도 하였습니다. 국정원의 스웨덴 파견관 이병X(정규 11기) 참사는, 1999년 초 계급정년으로 옷을 벗
게 되자 이러한 비리를 폭로하겠다며 소란을 부린 적도 있습니다. 그는 또한 김대중의 국제적인 신인
도를 높이기 위해 넬슨 만델라를 방한 초청하려 했으나, 만델라가 거액을 요구하는 바람에 불발로 그
치기도 했습니다. 그는 1999년 초, 북구와 유럽에 출장을 갔다오기도 하는 등 정열적으로 일했습니
다. 그러나, 국정원에서의 그의 활동은 오래가지 못하고 중단되었습니다. 1999년 5월 말, 이종찬 원장
이 갑자기 옷을 벗었기 때문입니다.

후임 천용택 원장은 어떤 연유인지, 김한정의 노벨상 공작 활동에 거부감을 표시하면서, 부임 일주일
만에 김한정을 퇴사시켰습니다. 아태민주지도자회의(FDL)로 돌아간 김한정은 사업을 계속 진행한 결
과, 1999년 7월, 김대중에게 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을 안겼습니다. 그리고 약 5개월 후, 김한정은
1999년 12월, 청와대 제1부속실장으로 파격적으로 영전되어 현재까지 김대중을 최근거리에서 보좌하
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김한정이란 인물에 대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그는 김대중의 최측근 심복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KINDS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하여, 몇 가지를 인용해 보면 다
음과 같습니다.

조선일보 2002년 8. 26일 기사에 의하면, 김한정은 김홍업에게 면회를 가서 필요한 물품을 전달해 준
다고 합니다. 한국일보 2002. 2. 25자 기사에 의하면, 김한정은 한화갑 고문에게 전화를 걸어 박지원
특보의 재기용에 대해 설명했다고 합니다. 중앙일보 2002. 1. 25자 기사에 의하면, 김한정 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자유롭게 의사를 개진하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월간중앙 2000. 3월호 기사에 의하면, 박지
원씨가 박선숙 공보비서와 함께, 김한정을 가장 아낀다고 합니다. 이희호는 김한정을 가르켜 "내 배에
서 안 나았지만, 내 아들"이라고 말할 정도로 각별한 신임을 표시한다고 합니다.

김한정은 경남 마산(창원)출신으로, 서울의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2년 서울대 국제경제학과에
입학하였습니다. 대학 재학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적이 있으며, 1980년대 후반부터 1992년 대
선까지 김대중의 공보비서로 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계속해서, 2000년도에 김한정이 청와대 제1부속실장으로 재임하면서 벌인 노벨상 공작의 주요 내용을
설명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김한정은 박경태 주 노르웨이 대사, 김남X 주 노르웨이 국정원 파견관, 그리고 국정원 1국 동구과 북
구팀 박노X 팀장에게 직접 지시하면서 일을 진행하였습니다. 김한정은 이 공작의 일환으로 노벨위 부
위원장이자 5인 심사위원회의 일원인 노르웨이의 스톨셋 주교를 비밀리에 방한 초청하기도 하였습니
다. 스톨셋 주교는 김대중의 노벨상 시상식에서 안내를 맡은 사람입니다.

또한 김한정은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동티모르의 라모스 호르타 주교에게 거액을 제공하고 김대중의 노
벨상 추천장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라모스 호르타 주교는 김대중의 노벨상 시상식에 초대된 사람입니
다. 김대중이 그동안 동티모르에 경제적인 지원과 더불어 상록수 부대를 파견하는 등 각별한 관심을
표시한 연유도 노벨상을 받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한 것입니다.

한편, 김한정은 노르웨이와 남아공에 해외 홍보관을 신설, 파견하여 현지에서 해외홍보 주력하기도 했
습니다. 노르웨이에 홍보관을 파견한 이유는 不問可知일터이지만, 남아공에 홍보관을 신설한 이유는
만델라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난 5년간, 이 정권이 "홍보공화국"이라고 비아냥을 받을 정도로 해
외 홍보에 치중한 이유도 바로 노벨상 때문인 것입니다.

지난 2000년 8월, 김한정은 노벨상 결정에 막후 영향력이 있는 보네비크 노르웨이 전 총리와 저명 음
악인 등 3명을 극비리에 방한 초청하였습니다. 이들 노르웨이 총리 일행은 국정원 담당 직원에 의해,
비밀리에 제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장으로 안내되었습니다. 그들은 감격적인 남북 이산가족 상봉
장면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직접 목격하고, 김대중을 예방한 후 노르웨이로 돌아갔습니다.

이들이 돌아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노르웨이의 인권상인 라프토상 수상 결정이 났고, 이어서 노벨
상 수상 결정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보네비크 전 총리는 지난 2002년 1월, 두 번째로 노르웨이 총리
가 된 후, 또 다시 방한하여 김대중의 극진한 환대를 받은 바 있습니다.

김한정의 이러한 공작활동을 보조한 자로 조준X란 인물도 소개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전
헌법재판관 조승형의 조카로, 김한정과 같은 시기에 이종찬 원장에 의해 특별 채용되어 대외협력보좌
관실에서 함께 근무했습니다. 그는 김한정의 노벨상 공작을 보조하다, 2000년 8월 국정원을 퇴사하였
으며, 현재는 아시아나 항공사에서 부기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2001년까지 김한정과 각별한 관
계를 유지했으나, 청와대를 자주 사칭하다가 경찰청 조사과(사직동팀)의 내사를 받기도 했다고 합니
다.

국정원에서 노벨상 공작은 흔히 "S"공작으로 일컬어졌는데, 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동구과 박노X
팀장과 김남X 노르웨이 파견관이 실무를 맡았습니다. 이러한 공작은 해외조사국(1국)의 최조영 국장
(정규 6기, 외대)과, 이영길 국장(정규 9기, 육사 26기) 재임 기간 중에 주로 이루어 졌습니다.

공작을 지휘했던 최조영 국장과 이영길 국장은 그 후 각각 주 쿠웨이트 대사와 핀란드 대사로 영전되
어 나갔습니다. 이영길 대사는 2001년 4월, 1국장에 부임한 지 8개월만에 해임되었기에, 특히 입을 막
아야 할 필요가 더 컸을 지도 모릅니다. 참고로, YS 정권에서 안기부 출신이 대사로 영전되어 나간 것
은 이병호 차장이 전 말레이시아 대사로 나간 것이 유일한 예입니다. 박노X 팀장(정규 17기)은 그 후
선배들을 제치고 선두주자로 동구과장으로 승진하였고, 현재는 서구과장으로 재임하고 있습니다.

지난 1998년, 김한정은 미국 뉴저지주의 럿거스 대학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하고 귀국할 당시 전세집
도 구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이종찬 원장은 그를 국정원의 安家 아파트에서 살도록 배려
해 주었습니다. 너무나 이례적인 특별한 대우였습니다. 지금 김한정은 집을 몇 채나 장만했을 뿐만 아
니라, 100억대 이상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청와대의 모든 돈줄을 그가 쥐고 있다고도 합
니다.

이어서 김대중이 노벨상을 수상할 목적으로 저지른 민족에 대한 반역 행위를 계속 설명 드리겠습니
다.
(이하의 내용은, 제가 신뢰할 수 있는 출처로부터 얻은 정보에 근거한 것이지만, 사실 여부를 모두 검
정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먼저 밝혀 둡니다.)

지난 1999년, 외환위기를 어느 정도 극복한 김대중은 자신의 업적과 경륜을 해외에 적극 홍보하면서
노벨상 수상 분위기 조성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1999년 7월, 김대중은 수상자 11명 가운데 6명이 노벨
상을 수상한 것으로 알려진 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을 손에 넣으면서 본격적으로 노벨상 사냥에 나섰
습니다. 김대중은 이제 남북관계에 어떤 획기적인 돌파구만 마련할 수 있다면, 노벨상을 목에 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입니다. 김대중과 김정일간의 은밀한 뇌물 뒷거래는 이러한 배경 아래 이루
어 졌습니다.

지난 1999년 말, 온 세상이 새 천년의 기대에 한창 들떠 있을 즈음, 김대중과 김정일은 극비리에 뇌
물 뒷거래 협상을 마무리지었습니다. 김대중이 북한에 제공하기로 한 뒷돈의 규모는 美貨로 15억 불입
니다. 인류가 뇌물이라는 개념을 발견한 이후 최고의 뇌물 액수이자, 앞으로 영원히 깨어지지 않을 기
록일 것입니다.

현대에서 이 뒷돈을 대었습니다. 지난 번 한나라당 엄호성 의원이 제기한 현대상선의 4,000억 원은
이 돈의 일부분일 것입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현대상선 대출금 일부가 정상회담 先金으로 건너갔
고, 대부분의 뇌물 잔금은 2000년 9월에서 12월 사이에 전달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난 2000년 3
월과 6월에 벌어졌던 현대의 왕자의 난은, 정주영이 이 돈을 대기 위해 그룹 전체의 지배권을 장악하
려는 시도였을 것입니다.

이 돈은 1,000만원권 수표 형태로 국정원에 넘겨졌고, 국정원은 주로 외교행낭을 이용하여 독일·프랑
스 등 6개 지부를 통해 이돈을 해외로 빼돌렸습니다. 행낭의 책임자는 처음에는 최조영 1국장이었다
가, 2000년 9월경부터는 박경탁 단장으로 바뀌었고, 실무자는 고강X 사무관이었습니다. 박경탁 단장
(11기, 목포 문태고)은 2001년 4월, 이 정권에서 최단기간 내에 국장으로 승진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
던 인물입니다.

박지원과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알려져 있는 그는, 국장이 된지 2년이 다 되가는 지금도 승진필요 최
소 년한을 채우지 못해 2급으로 있다고 합니다. 박국장의 이례적인 승진은 당시 시사저널에 기사화 되
기도 했습니다. 고강X 사무관(목포 문태고)도 그 후 팀장으로 승진하였습니다. 행낭 담당자가 승진하
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해외로 빠져나간 이 돈은 현지에서 주로 유로화로 환전되어 북쪽으로 전달되고, 이 수표는 다시 국내
로 반입되어 국내에서 현금화되었다고 합니다. 해외에서 유로화로 환전하는 일과, 수표를 再반입하는
작업에는 우리나라의 유로화 책임자가 관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 유로화 책임자는 한국계
유럽(프랑스 ?) 국적을 가진 40대의 여인으로, 하이얏트 호텔에서 장기 투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김대중, 정주영, 김정일이 직접 관여했을 것이며, 이들은 각각 김한정, 김정남, 정몽헌
을 대리인으로 내세웠을 것입니다. 박지원, 임동원, 이기호 등 지금까지 김대중 옆을 지키고 있는 인
사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이 일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청와대를 떠났다가도 다
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김대중은 대북 커넥션에 관련이 있는 인사는 배신
하지 못하도록 끝까지 그의 주위에 묶어두고 있는 것입니다.

김대중의 分身인 김한정 제1부속실장과 김정일의 아들인 김정남은 이 일을 협의하기 위해 일본 등지에
서 여러 차례 극비 접촉을 하였을 것입니다. 김한정과 김정남은 2000년 4월 10일 경, 남북정상회담 발
표를 전후하여 일본에서 만나 남북 뒷거래 협상을 최종 마무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이들은
2000년 10월과 12월, 노벨상 수상을 전후하여 일본에서 만나, 노벨상 단독 수상 문제 등을 협의한 것
으로 추정됩니다. 지난 2001년 5월 초, 김정남이 일본에 밀입국하다 체포되었을 당시에도, 김한정과
김정남은 일본에서 접촉하기로 약속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2000년 들어, 김대중과 김정일은 뒷돈 거래 협상을 대충 일단락 지으면서, 각본대로 본격적인 국내외
분위기 조성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김대중은 1999년 12월 말, 부임한 지 6개월 밖에 안된 천용택을 경
질하고, 임동원을 국정원장 자리에 앉혔습니다. 여담입니다만, 당시 천용택은 자기 부인(김아미)이 옷
로비 사건에 연루된 것을 무마시키려고 검찰 출입기자 몇 명을 국정원에 초대했었습니다. 그 자리에
서 그는 DJ의 대선자금 등 민감한 정보를 누설하는 촌극을 벌인 데다, DJ를 "김대중이가..."라고 부
른 게 일주일 후에 밝혀져 不敬罪로 잘린 것입니다. 천용택은 제가 겪어 본 국정원장 중 가장 자질이
저열한 자였습니다. 그는 김대업 義人(?)에게 5억 원을 주고 매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000년 1월, 김대중은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하고, 총선 후 제1당이 되고 나면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하겠
다고 처음으로 운을 떼었습니다. 2000년 2월, 김대중은 일본 도쿄방송(TBS)과의 특별 인터뷰에서 김정
일을 "識見 있는 지도자"라고 치켜세워 세상을 어리둥절하게 했습니다. 2000년 3월, 독일 방문한 자리
에서는 대규모의 대북 경제지원을 주 내용으로 하는 충격적인 '베를린 선언'을 발표하였습니다. 당시
이러한 발표는 미국과 사전교감 없이 이루어진 것으로, 클린턴 대통령과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결렬
한 분노를 샀었습니다.

이러한 국·내외 분위기 조성 작업과 함께, 김대중과 김정일은 2000년 1월부터 중국 등지에서 남·북
간 비밀회담을 추진하였습니다. 남쪽에서는 임동원 국정원장이 회담을 주도했고, 김보현 전략국장이
실무를 맡았으며, 서훈 경협1과장이 심부름을 하였습니다. 김보현 전략국장과 서훈 과장은 남북정상회
담 후, 각각 신설된 3차장과 남북회담조정관(이사관)으로 승진하여 지금도 현직에 있습니다. 북쪽에서
는 김용순 대남비서가 주도하고, 임동옥(춘길) 아태 제1부위원장이 실무를 맡고, 권민(호웅) 참사가
심부름을 하였습니다. 남북은 각각 박지원과 송호경을 얼굴마담으로 기용하였습니다. 지난 2000년 4·
13 총선 직전, 김대중은 극적으로 남북정상회담 합의를 발표했습니다. 당초 남북은 일요일 오후에 발
표하기로 합의하였으나, 김대중은 홍보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월요일 아침으로 발표시점을 늦추기도
했습니다.

김대중 정권이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한 의도는 자명합니다. 단기적으로는 4·13 총선에서 민주당을 제
1당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고, 중기적으로는 노벨 평화상을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보다 장기
적으로는 대북 관계 개선을 지렛대로 삼아 호남당의 한계를 탈피하고, 궁극적으로는 정계개편을 획책
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단기와 장기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노벨 평화상을 받는 데 결정적으
로 기여한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아마도 회칠한 가면 뒤에 숨겨진, 인자한 김대중의 악마적인 모습에 대해 믿지 않으려고 할
지 모르겠습니다. 적과 싸우기 위한 전략물자를 수송해야 할 국정원의 행낭이 적의 군자금을 보급하
는 통로로 이용되었다는 사실도 믿기 어려우실 줄 압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김정일은 김대중의 뇌물을 받아, 高爆장치 등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핵심 물자를
파기스탄, 카자흐스탄, 프랑스 등지에서 구입했습니다. 김정일은 또한 이 돈으로 카자흐로부터 40대
의 신예 미그기를 도입하였고, 러시아로부터 잠수함과 탱크 등 첨단무기를 구입하였습니다.

(이 지면을 빌어, 지난 서해교전시 장열하게 전사한 우리 해군 장병들의 명복을 빕니다.)

최근 벌어진 몇 가지 일은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북한이 작년부터 달러화 유통을 금지시키고, 유로
화로 결제수단을 변경할 수 있었던 것도 뇌물로 받은 유로화 덕택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북한은 그동
안 약세를 면치 못하던 유로화에 대해(2000. 8월, 30%절하) 우리보다도 훨씬 더 지대한 관심을 표명
해 왔습니다. 2000년도에 북한에 넘겨진 15억불 상당의 유로화는, 지금 현재의 환율로는 20억불 가치
로 평가 절상되어 있습니다.

최근 현대에 지원한 34조 원의 공적자금 중에서, 현재 2조원이 회수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었다고 합
니다. 현대상선은 주력 알짜배기 업종인 자동차 운반선 사업을 15억불에 매각하였습니다. 김대중이 북
한에 송금하기로 한 금액과 이러한 액수가 일치하는 것을 그냥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김대중은 국민의 血稅로 이루어진 공적자금을 현대에 지원하면서 현대로부터 리베이
트를 받아 챙긴 것입니다. 김대중은 리베이트의 일부를 자신의 호주머니에 넣었겠지만, 상당부분을 북
한에 賂物로 바치는 데 사용한 것입니다. 현대는 정부로부터 공적자금을 받아 북한에 지원하고, 북한
으로부터 금강산과 개성공단 독점사업권을 代價로 받은 것입니다. 북한은 현금을 받아 챙기고 위장평
화 생색을 내줌으로써, 김대중이 노벨상을 받도록 도왔던 것입니다.

북한의 대남 일꾼들이 한결같이 "현대는 절대로 망하게 하지 않겠다"고 외치고 있는 배경에는 이러한
커넥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대중이 大馬不死 대우그룹을 해체한 것과, 김정일이 "김우중이 가장
악질적이다"라고 언급한 것은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북한의 소위 대화일꾼들이 우리의 경제원조에 대
해 고마워하기는커녕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가 더 많이 주었다."고 강변하는 이유도 다름이 아닐 것
입니다.

김대중이 목에 건 자랑스런 노벨상은 실로 북한 동포들의 피눈물과 절규, 그리고 우리 국민들의 血稅
가 어루러져 응결된 結晶體인 것입니다. 지금 김대중은 殘雪같이 남아 있는 권력을 동원하여 자신의
과거 추악한 범죄흔적을 지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을 잠시 속일 수는
있을 것입니다. 몇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이지는 못
할 것입니다.

저는 지난 2년여간 찬바람 부는 현실 속에서 어렵게나마 국가정보원 직원의 명예를 걸고 외롭게 이러
한 일들을 추적하여 왔습니다. 비록 저는 이 모든 일들을 모두 검정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지 못했지
만, 제가 얻은 정보가 眞實에 가깝다고 확신합니다. 예전에 어느 분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외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깨어 있는 민족이라야 自由와 繁榮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믿습니다.

앞으로 實體的 眞實을 확인하는 작업은 국민 여러분들께 맡깁니다.

감사합니다.

2003년 2월, 전직 안기부 직원 김기환 드림


# 정보공개에 부쳐,

사랑하는 國家情報院 동료, 선·후배 여러분!

저는 오늘 전직 직원으로서, 우리가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保安을 위배하는 일을 저지르기로 결심했
습니다. 保安을 지키는 일보다는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더욱 우선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2년여 전, 회사를 나온 저는 이 정권의 위선의 가면을 벗겨내기 위해 혼자서 많은 煩悶의 나날들
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제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사실들을 알아 낼 수 있었고, 이제 국민
들과 함께 이 정보를 공유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오늘 저는 이러한 저의 결심에 대해 여러분의 이해를
구합니다.

國家情報院 동료, 선·후배 여러분,

저는 지난 5년간 여러분들이 당한, 그리고 앞으로 5년간 더 당할지도 모를, 말할 수 없는 처절한 고통
을 너무나도 잘 이해합니다. 2년여 전, 저는 "무릎꿇고 사느니 차라리 서서 죽겠다"며 퇴사를 결심했
지만, 그러한 선택이 과연 올바른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신이 없습니다.

저는 비통한 마음을 참고 인내하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을 존경합니다. 그리고 머지 않아 인고의 세월
을 참고 온 보람이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민족의 운명은 여러분들의 어깨 위에 달려 있습니다. 용기
를 가지시고 끝까지 살아남아 민족의 반역자들을 처단하시기 바랍니다.

저의 이 글로 인해 실명이 거론된 분들에게 송구스런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염치없지만 양해 있으
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 2003년2월15일 제2차 양심선언 - 임동원 前 국정원장 고정간첩설

국민 여러분께 다시 드립니다.

조국의 안보 현실이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처했습니다. 짙은 핵구름이 한반도 상공을 향해 빠른 속
도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민족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국민여러분,
깨어 나셔야 합니다.

어제 김대중 대통령은 대북 뒷거래에 대해 자기 나름의 해명을 내놓았습니다. 저는 인터넷을 통해 그
내용을 접하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예전에 "김대중은 뒤돌아서면 거짓말을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어제 김대중 대통령은 다시 한 번 우리들에게 '거짓말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
는 능력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 뻔뻔스러움에 아연할 따름이며, 영원히 구제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 차라리 동정심이 일어날 정도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만, 저는 남북정상회담 대가로 대북 뒷거래가 이루어졌으며, 그 금액은 미화
로 15억달러 라고 주장합니다. 김대중은 4.13 총선, 노벨상, 그리고 정계개편을 겨냥하고 남북 정상회
담을 추진했었습니다. 지난 5년간, 금강산관광 대금 등을 포함하여, 현대가 북한에 보낸 돈은 약 30억
달러에 달합니다. 특검을 통한 철저한 수사만이 이러한 뒷거래를 확실히 밝혀낼 수 있을 것입니다. 진
실규명을 위한 국민 여러분들의 의지가 절실히 요구되는 때입니다.

저는 지난 번 국민 여러분들께 드리는 편지에서, 이 악마적 정권의 위선의 가면 뒤에 숨겨진 김대중
의 참모습을 보여 드렸습니다. 이번 편지에서 저는, 이 정권에서 소위 "햇볕정책의 전도사" 라고 불렸
던 임동원씨의 가면을 벗겨, 그의 진면목을 국민 여러분께 보여 드리고자 합니다.

사실 그 동안 임동원씨에 대해 세간에 수많은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출신 배경이 어떻다든지, 6.25
전쟁 중의 행적이 어떻다든지, 육사 입학시 거물 간첩 최덕신이 신원 보증을 섰다든지 등 여러 말들
이 많았지만, 저는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재론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제가 국정원에서 재직하면서
직접 보고 들었던, 그러나 언론에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을 중심으로 임동원씨의 의심스런 행적에 대
해 국민 여러분들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물론, 이번에도 판단은 전적으로 국민 여러분들의 몫
입니다.

저는 이 악마적 정권이 들어서고 난 후, 언제부터인가 '우리 나라의 권력 핵심에 북한의 고정 간첩이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김정일 같은 교활한 자는 남쪽의 심중을 정확히
꿰뚫어 보지 않고서는, 절대로 남북대화에 응해 오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
는 오랫 동안, '만약 간첩이 있다면, 과연 누구일까?' 하고 혼자서 남몰래 이 문제를 고민해 왔습니
다. 제가 내린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임동원이 간첩일 것이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지난해 6월 서해사태시, 임동원씨는 북한의 무력도발을 "우발적인 사태" 라고 예단하면서, 김정일의
지시와 개입을 부정하였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대북 첩보에 의하면, 김정일은 지난 1999년 6월 서해교
전 후, 북한 해군사령관에게 "1년간의 시간을 줄테니, 반드시 보복하라."고 명령했다고 합니다. 북한
해군은 보복 역량을 기르는 데에 시간과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1년안에 그 지시를 이행하지는 못하
고, 3년이 지난 후에야 그 명령을 정확히 수행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임동원씨가
서둘러 북한을 감싸고 돈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가 간첩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임동원씨가 맹목적으로 북한을 감싸고 돈 것은 비단 그 때만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셀 수
도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1999년 서해교전시에도 임동원씨는 북한의 의도적인 '영해 침범'을 굳
이 '단순 월선'이라고 의미를 축소시키면서, 북한의 도발을 호도하기에 급급했습니다. 지난해 6월, 육
사 교수모임에서도 한반도 긴장고조의 책임을 미국의 전쟁협박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미국에게 책임
을 전가시키고 김정일을 두둔하였습니다. 예를 들자면 끝도 한도 없을 정도입니다.

한편, 임동원씨는 김정일을 비난하고 북한의 민주화운동을 주장하는 황장엽 선생에게는 거의 연금상태
나 다름 없는 처지로 몰아 넣으면서, 일체의 외부 활동을 금지시키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황 선생님
은 그동안 가고 싶은 곳을 갈 수도 없었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도 없었으며, 하고 싶은 말도
할 수 없는 철창 없는 감옥생활을 강요 당해왔습니다. 소위 노벨상을 수상한 인권대통령이라는 이 정
권아래에서 황선생님의 기본적 인권은 철저히 짓밟혀 왔습니다. 국정원은 관리와 보호라는 미명하에,
철저한 감시와 통제를 가했던 것입니다. 지난번 황 선생께서 미국에 가서 증언하겠다는 하자, 임동원
씨는 "국정원에서 나가라."고까지 협박하면서, 죽음으로 내모는 조치조차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어찌
하여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벌어 졌을까요?


# 박지원의 워커힐 호텔 난동 사건

제가 임동원씨를 결정적으로 의심하게 된 것은, 퇴사할 무렵 동료에게서 전해들은 에피소드에서 비롯
되었습니다. 2000년 9월, 북한의 김용순이 전격 방문했을 때, 워커힐 호텔에서 환영 만찬이 벌어졌습
니다. 그 자리에는 박지원 문화부 장관도 초청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찬이 끝나갈 즈음, 잔뜩 만취한
박지원씨가 갑자기 난동을 부려 행사장이 난장판으로 변하였습니다. 그는 거의 인사불성인 상태에
서 "국정원에는 빨갱이 새끼가 두 놈 있다. 너희 놈들은 정권이 바뀌면 청문회에 서게 될 꺼다." 라
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박지원이 말한 "빨갱이 새끼 둘"이란, 두 말할 나위 없이 임동원씨와 김보현씨
를 지칭합니다. 그가 그렇게 난리친 이유는 남북 정상회담 협상과정에서 얼굴마담 노릇을 하면서 임동
원씨와 김보현씨의 언동에서 간첩의 냄새를 맡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박지원 난동 사건의 배경에 대해 제 나름대로 좀 더 부연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당시 박지원은 한빛은
행 대출비리 사건으로 코너에 몰려 있었고, 실제로 워커힐 난동사건이 있은지 약 10일후에 문화부 장
관에서 해임되었습니다. 이 일이 있기 전, 이미 국정원에서는 "민심 수습을 위해 박지원을 잘라야 한
다."고 청와대에 보고 했었습니다. 박지원은 이러한 동향을 잘 알고 있었기에, 당시 임동원 원장에 대
해 감정이 극히 좋지 않았던 것입니다. 박지원씨의 입장에서는 임동원씨가 자기에게 칼을 겨누었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 전에도 임동원씨와 박지원씨를 비롯한 동교동계는 사이가 좋지 못했습니다. 남북 정상회담
후 임동원씨의 정치적 위상이 올라 가자, 동교동쪽에서는 2000년 8월경, 의약분업 실패 등을 이유로
대면서, "국내 정보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국정원장을 동교동계 핵심 측근으로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
했었습니다. 이 즈음, 실제로 임동원이 통일부 장관으로 되돌아가고, 국정원 직원 30여명이 통일부로
옮기는 방안이 논의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김대중이 직접 "남북 정상회담의 후속조치가 더
욱 중요하다."고 교통 정리를 하는 바람에, 이 문제가 유야무야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후속조치란 것이 북쪽으로 뇌물 잔금을 보내는 작업이었던 것입니다.

임동원씨와 동교동과의 관계를 시사하는 또 다른 에피소드도 소개하겠습니다. 1999년 12월, 임동원씨
가 국정원장으로 부임했을 때, 당시 원장 비서실장이던 최기춘씨(현 대공정책실장, 정규 10기, 전주
고)에게 "왜 이 주위에는 왜 전라도 사람 밖에 없나?" 라고 언급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기조실에서는
부랴부랴 이영O 강원지부장을 비서실장으로 불러 올렸습니다. 이야기가 좀 벗어 납니다만, 이영O 라
는 분은 강원도 출신으로 국내 부서에서 경제분석에만 전념한 책상물림이라 비서실장 자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영O 실장은 2001년 4월 신건 원장이 취임한 후에는 감찰실장으로 자
리를 옮겼다는데, 그 자리 역시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자리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임동원씨와 박지원씨를 비롯한 동교동계는 서로 사이가 좋지 못했던 것입니다. 저는 지금 다
허물어져가는 이 정권의 권력의 주축을 떠받치고 있는 그 두 사람이 서로 말이나 주고 받고 있는지 궁
금합니다. 어쨌거나 그 날 워커힐 호텔에서 박지원씨가 벌였던 해프닝은 불문에 붙여졌습니다. 내가
짐작하기론 이 사건은 청와대에도 보고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일은 우리 직원끼리만 쉬쉬하는 문제
가 되었습니다만, 저는 이 일로 인해 임동원을 본격적으로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 임동원씨에 대한 수사국의 내사 동향

퇴사후 저는 우연히 수사국 선배에게서 "임동원은 간첩이다."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선배의 말에
의하면, 자기가 잘 아는 수사국의 어느 동료 직원이 오랫 동안 임동원을 내사해 왔는데, 1999년 12월
임동원이 갑자기 원장으로 부임해 오자 담당 과장과 상의한 후, 보관하고 있던 파일을 정리하고 지방
으로 몸을 피했다는 것입니다. 그 후 저는 그 수사국 직원 이름이 하세O 이며, 부산출신으로 1986년
경 수사 기본과정으로 입사하였고, 현재는 사무관(5급)이며, 실지로 1999년 12월말, 본부에서 경기지
부로 전근한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본부에 근무하는 수사국 사무관 직원이 이유 없이 지방으로 전출
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왜냐하면, 수사국의 경우, 지방에서는 서기관 진급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
문입니다.

저는 하세O 직원을 만나 임동원씨에 대한 내사자료의 존재여부와 내사시기, 내사진행 정도, 소환조사
를 하지 않은 이유 등을 확인하고 싶었으나,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설
사 그가 개인적으로 자료를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나같이 퇴사한 후배에게 극비에 속하는 보안사항
을 털어 놓을 리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은밀히 알아본 바에 의하면, 하세O 직원이 임동원씨를 내
사해 왔다는 사실 자체를 아는 수사국 직원이 거의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저는 임동원씨의 내사 동향
에 대해 더 이상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가 없었습니다만, 임동원씨의 간첩 협의에 대한 의혹을 더욱 깊
이 가지게 되었고, 혼자서라도 이 일을 파헤쳐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임동원과 북풍사건

그 후 저는 공개된 자료를 찾아 보면서, 임동원씨의 행적에 대해 검토해 보았습니다. 저는 우연히 지
난 1998년 월간 신동아에 실린 권영해 전부장의 공소장에서 임동원씨의 대북접촉에 대한 언급을 발견
할 수 있었습니다. 권영해 부장은 1998년 소위 북풍사건의 법정 진술에서 "임동원은 아태재단 사무총
장 신분으로, 1995년 10월경부터 중국의 장성호텔 등지에서 안병수 등 북측 아태위 인사들을 수차례
접촉해 왔다."고 진술했습니다. 저는 이 공소장을 보면서, 이 정권이 출범하자마자 1998년 4월, 소위
북풍사건이란 것을 일으켜서 한나라당을 쳐죽일듯이 난리를 치다가, "왜 갑자기 덮어 버렸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추측하기로는 당시 권영해 부장 등 관련 피고인들의 입에서 임동원의 간첩행각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나오자 청와대에서 이 문제를 더 이상 파고 드는 것이 이롭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검찰에
게 "사건을 덮어라." 라고 지시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제가 듣기로는 당시 수사 검사들은 안기부의 공
작파일 등 핵심 증거자료는 참조하지 못하고, 외부 자료 없이 오로지 관련 인사들의 증언에 의존했다
고 합니다. 당시 수사 검사들은 "솔직히 우리도 대북관련 문제는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다."고 토
로했다고 하며, 그래서 대북관련 사항은 덮어 두고, 선거법 위반 등으로 기소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북풍 사건에 대해 제가 국정원에서 알아본 바에 의하면 당시 대북조사국에서는 임동원씨의 대북접촉
첩보를 여러차례 입수했다고 합니다. 북풍 사건의 공판장에서 권영해 부장이 북한의 간첩이 틀림없다
고 주장했던 허동웅이라는 자의 입에서 "임동원이 북한 쪽을 돕고 있는 사람이다." 라는 진술이 수차
례 있었다고 합니다. 대북조사국은 1997년초 임동원씨에 대한 이러한 혐의점을 정리하여 수사국으로
관련 자료를 이첩했다고 합니다. 이런 와중에 수사국에 근무하는 모 전라도 출신 직원이 이러한 동향
을 민주당으로 유출시켰다고 합니다. 소위 북풍 사건을 둘러싸고 안기부와 민주당간의 정보 전쟁은 이
미 1997년초부터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민주당에서는 천용택과 정동영이 이 정보 전쟁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의 짐작으로는 수사국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자체적으로 임동원씨의 간첩혐의에 대해 내사를 진행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대북조사국으로부터 임동원에 대한 공작자료를 이첩받았을
것입니다. 권영해 부장은 수사국과 대북조사국으로부터 이러한 정보를 보고 받아 임동원씨의 간첩활동
에 대해 비교적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권영해 부장이 소위 북풍사건이란 것에 휘말렸
던 것도 자기 나름대로는 확신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처럼 선거 직전
에 무모한 짓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후 권영해 부장이 조기에 석방된 것도 석연치
않는 점입니다. 사실 저는 그후 권영해 부장과 김대중간에 엄청난 거래가 있었다는 사실을 들은 적은
있지만 확인되지 않은 내용이라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 임동원씨의 의심스런 여러 행적들

사실 이 정권이 들어서기 전, 임동원의 역할이 이렇게까지 막중하게 되리라고 짐작한 사람은 거의 없
었습니다. 이 정권에서 대북정책에 관한한 임동원씨는 과히 무소불위의 힘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는 청
와대 외교 안보수석에서 시작하여 통일부장관, 국정원장, 다시 통일부장관, 그리고 탄핵을 받고서도
다시 외교안보통일특보로 청와대로 재입성하는 저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안보관련 수장을 완전히 한바
퀴 사이클링한 것입니다. 그는 통일부 장관으로 되돌아간 이후에도 국정원의 대북 부서를 마치 제 부
하 다루듯 취급했습니다. 그 힘의 원천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북한과의 '특별한 관계'가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는 일일 것입니다. 황장엽 선생님도 김대중과 임동원을 "북한과 깊숙히 결탁한
관계" 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정권 초기, 이종찬 원장과 나종일 차장은 햇볕정책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시각을 보여 임동원씨와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가지 않아 안보라인에서 완전히
배제되고 말았습니다. 이들을 제거하고 난 후, 임동원씨는 아무런 견제도 받지 않고, 이른바 햇볕정책
이라는 허울아래 가히 굴욕적이라고 할 대북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였습니다. 박재규, 홍순영, 정세
현 등 역대 통일원 장관뿐 아니라 모든 안보관련 수장들을 자기 사람으로 임명하면서 절대적인 힘을
보여 주었습니다. 지난 2000년 4월, 엄익준 차장이 죽기 전, 임동원씨는 엄차장의 손을 잡으며, "이
다음에 장관으로 천거하려 생각했는데, 이렇게 가면 어떻하느냐?"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장관자리
하나 정도는 언제든지 임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정권 초기, 대북 첩보수집 부서에서는 "남북관계가 잘 풀릴려면, 임동원이 책임 있는 자리에 나서
야 한다."는 북한쪽의 첩보가 수시로 입수되었습니다. 북한이 남쪽과 대화할 때, 남쪽 대표가 북한 출
신이기를 선호한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의사
를 전달하는 것은 아주 의외의 일이었습니다. 사전에 북한과 입을 맞추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임동원씨가 간첩이 아니면 설명되지 않는 일입니다.

잠시 시계를 꺼꾸로 돌려, 임동원씨의 옛날 행적을 몇 가지만 더듬어 보겠습니다. 임동원씨는 지난
1991년 남북합의서 체결시, 우리측 실무 대표로 북한을 십여차례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때 북한측에
서 그에게 누이와의 만남을 몰래 주선해 주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이 때부터 임동원씨의 심경
에 무슨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며 임동원과 북한간에 모종의 합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합
니다. 그 후 임동원씨는 이른바 훈령조작사건을 언론에 흘려 대북 강경론자인 이동복 특보를 낙마시
킨 것은 우리가 모두 아는 대로 입니다.

1994년초, 임동원은 김대중이 설립한 아태재단의 제2대 사무총장으로 앉았습니다. 1994년 7월, 북한
의 김용순은 마치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아시아 태평양 평화 위원회' 라는 것을 발족시키고 공개적
으로 아태재단과의 교류를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북한이 이러한 용어를 선택한 점에 주목합니
다. 왜냐하면, 이 때만 하더라도 북한은 주체사상을 주장하던 시절로, '아시아 태평양'이라는 용어는
그들에게는 생경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하필이면 '아시아 태평양'일까요? 사전에 서로 입을 맞추
지 않고는 붙이기 힘든 명칭이 아닐까요?

임동원이 아태재단의 사무총장으로서 비밀리에 북한과 접촉한 것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습니다. 임
동원과 김용순은 1995년에서 1997년까지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임동
원과 김용순은 동갑 나이이지만 서로 개인적인 스타일은 판이합니다. 그런데도 둘 사이는 대화가 아
주 잘 통합니다. 저는 또한 임동원씨가 북한의 대남문제를 실질적으로 총괄하고 있는 임동옥(춘길) 아
태위원회 제1부위원장과도 모종의 관계가 있을 것이란 의심을 짙게 가지고 있습니다. 임동옥은 임동원
씨보다 나이가 한 살 아래입니다. 저는 이 시기의 임동원씨의 대북 커넥션을 밝히는 것이 그의 간첩혐
의를 입증하는 데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고 난 후 임동원의 행적에는 너무나도 의심스런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는 항상
결벽증에 걸린 사람처럼 병적으로 보안에 신경쓰면서 뭔가 숨기는 듯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의 과
잉 보안의식은 많은 사람들의 의구심을 자아 내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는 부하직원은 물론이고 심지어
자신이 수족처럼 부리는 보좌관에게조차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김대중 정권초 이종찬 원장 시절, 임동원씨는 이상스럽게도 손발을 맞추어야 할 안보관련 고위 인사들
에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석연치 못한 행동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
환해야 할 안보 장관들이 자신의 의견을 정확히 드러내지 않는 이상한 광경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 때
부터 김보현 대북전략국장은 직속 상관인 나종일 차장과 이종찬 원장을 제치고 임동원 청와대 외교안
보 수석과 직거래하는 일이 잦아 졌습니다. 명령과 복종을 중시하는 국정원의 분위기로 볼 때, 이러
한 일은 아주 이례적인 것이었습니다. 어찌하여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일까요?

1999년 하반기 천용택 원장 시절, 당시 통일부 장관이었던 임동원은 미국을 방문하여 페리 전 장관
등 미측 인사들을 만나 한반도 문제 등을 논의했습니다. 그 때에도 임동원씨는 자신의 행적과 협의내
용을 극비에 부치고, 국정원 파견관을 의도적으로 따돌렸습니다. 당시 최덕O 샌프란시스코 파견관은
임동원의 방미 활동을 제대로 파악, 보고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천용택으로부터 "철수하라." 라는 질
책까지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 당시 임동원씨는 자신의 통역관에게 "누구에게도 통역내용을 발설하지
말하."고 엄명을 내렸다고 합니다. 여담입니다만, 최덕O 영사는 해외조사국 (1국) 북미과장시절 일을
너무 깐깐히 열심히 하는 탓에 부하 직원에게 인기가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지난 2001년, 저는 그 분
이 위장암으로 별세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는데, '직업병으로 돌아가셨구나' 하고 생각했을 정도였습
니다. 왜 그런 분이 동향을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임동원씨는 극비리에 행동해야만 했을까요?

2000년초, 임동원은 국정원장으로 부임하자마자 모든 해외 파견관들에게 대북 비선 접촉라인을 개척하
라고 특별 지시하였습니다. 그 당시 북경에 파견된 통일부 직원(통일관)이 국정원 몰래 대북 비선라
인 구축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통일관은 대북 브로커인 최수진 흑민경 사장이란 자를 통해 아태
위의 김완수 참사와 연계해 일을 진행했었습니다. 이때 이러한 동향을 보고받은 임동원씨는 필요 이상
으로 격노 했었습니다. 한 달 전까지만해도 자신의 부하 직원이었던 통일부 직원이 당연히 해야할 일
을 했을 뿐인데 말입니다. 임동원씨의 그러한 과잉 반응은 도무지 의아스러울 뿐이었습니다.

임동원씨가 국정원장으로 재직할 동안 가장 고통을 받았던 직원들은 단연 북한국 분석관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북한국 동료들로부터 "도대체 원장을 이해할 수 없다." 라는 푸념을 수도 없이 들었습
니다. 북한과 관련하여 객관적인 정보 보고서를 올려도, 북한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한 내용이면, 어김
없이 질책이 떨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임동원이 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에는 북한국의 분석관들은 제
대로 된 보고서를 전혀 생산할 수 없는 분위기였습니다. 그가 우리 나라 정보기관의 수장이 맞는지 의
아스러울 지경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 했을까요?


# 임동원씨의 대북 커넥션 의혹

저의 견해로는 , 2001년 3월에서 8월까지의 기간 동안은 임동원씨와 북한과의 관계를 유추해 볼 수 있
는 의미 있는 기간이라고 생각합니다. 2001년 3월초, 김대중 대통령은 성급하게도 한반도 팀이 채 구
성되지도 않은, 준비 안된(?) 미국을 방문하여 처참한 외교적 실패를 안고 돌아 왔습니다. 뒤에 알려
진 바를 참고해 볼 때, 김대중 대통령은 이 때 김정일의 3월 남한방문과 평화선언 문제 등에 대해 미
국의 양해를 구하려고 무리하게 방미를 추진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여기서 제가 주목하는 점은, 김대중 대통령의 방미가 실패하고 있는 것을 본 북한은, 즉시 계획되었
던 "장관급 회담을 무기한 연기한다."는 통보를 발표했으며, 3월 27일 임동원씨가 국정원장에서 밀려
나자마자, 이틀 후인 3월 29일 모든 남북 관계를 일방적으로 중단한 점입니다. 3월중순 방북했던 김한
길 장관에게 오사카 탁구 단일팀 구성에 합의했던 북한이 임동원씨가 국정원장직에서 경질되자마자 일
체의 남북접촉을 완전히 차단해 버렸던 것입니다. 중앙일보 최원기 기자의 보도에 의하면, 이 시기에
북한에서도 김용순이 체포되는 등 심상치 않은 일들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저는 이 시기에 남북간에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 지는 잘 알지는 못하지만 숨가쁘게 진행된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임
동원씨가 사태의 중심에 있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후에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2001년 3월말 임동원씨는 이임하면서 당시 대북 전략국 김만O 1단장에
게 남북 정상회담 녹음 테이프를 파기하라고 지시 하였다고 합니다. 김만O 단장은 자신의 부하 직원
인 박모 과장, 윤모 팀장 등에게 자료 파기를 지시했으나, 이들이 "책임질 수 없다"고 버티는 바람에
당시에는 이를 파기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 테이프들이 아직도 존재하는 지, 아니면 결국 파
기 되었는 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저는 이 테이프를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전O 1과에서 잠시
근무하던 중 정상회담 녹취록은 읽은 적은 있습니다. 이 녹취록은 1급비밀로 분류되어 5~6부 정도 발
간되었고, 청와대 등에 배포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녹취록이 테이프의 내용을 정확하게 기록한 것
이 아니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지만, 어쨌거나 저는 이렇게 중요한 자료를 서둘러 파기하려고 한 임동
원씨의 저의가 아주 궁금합니다.

남북 정상회담의 내용에 관해서는 그동안 언론에 간헐적으로 흘로 나온 것도 있고, 보안을 요하는 사
안이기도 하여 제가 길게 언급하진 않겠습니다. 다만, 제가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점은, 정상회담이라
면 당연히 남북 정상인 김대중과 김정일이 모든 사항을 직접 논의해야 옳을 것인데, 녹취록의 대부분
은 임동원씨의 발언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남북 정상간에 허심탄회한 의견 교환은 보이
질 않고, 마치 임동원씨가 남북 양쪽의 중개인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진 걸까요?

2001년 4월, 김대중은 신임 신건 원장에게 "북한이 남북 관계를 전면 중단한 이유를 분석 보고하
라"고 지시, 대북전략국의 안태O 종O 과장이 중심이 되어 보고서를 작성했다고 합니다. 안 과장은 국
정원에서 가장 젊은 나이에 부이사관으로 승진한 사람으로 유능한 직원이었는데, 그 즈음 미국 대사
관 직원에게 보안을 누설했다는 이유로 파면되어 유명해진 인물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김대중은
그 당시 북한이 남북관계를 단절한 이유를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일부러 국정원에 그런 지시를 내린
것으로 짐작됩니다. 김대중은 '김정일이 이미 받을 것 다 챙기고, 이제 아쉬울 것이 없는 상태' 라는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김대중은 자신이 방미하여 북한과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돌파구를 마련해 주지 못한 데 대해 김정일이 실망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국정원의 대북 관련 직원들만 감쪽같이 속아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히
김대중의 악마적 통치술이 발현된 예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쨌거나 임동원씨가 통일부 장관으로 되돌아간 2001년 4월 이후, 남북 관계는 표면적으로는 완전히
중단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이 때부터 몇 달간 임동원씨의 북한에 대한 자세도 예전과 같
지 않았습니다. 텔레비젼에 출연해서는 대북 전력 지원이 불가능한 이유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기도
하는 등, 지금까지의 일방적인 '퍼주기'와는 상당히 다른 자세를 취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2001년 5
월, 김정남의 일본 밀입국 체포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지난번 편지에서, "이 때 김정남이 일본에
서 김한정을 만나기로 약속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고 말씀드린 일이 있습니다.

2001년 6월, 김정일은 북한 상선이 우리 영해와 제주해협을 통과하도록 지시하여, 의도적으로 한반도
의 긴장을 유발하였습니다. 아마도 김정일은 우리 정부가,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해군이 어떻게 대
응해 나오는가를 떠보려고 그랬을 것입니다. 저의 판단으로는, 이 시기 임동원씨는 북한의 파트너인
김용순의 입지를 강화해 주려고 딴지를 걸고 있었고, 김정일은 임동원씨의 입지와 태도를 시험해 볼려
고 의도적으로 저강도 도발을 감행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풀어서 설명드리자면, 간첩과 간첩을 부리
는 자간에 의사 전달이 이런 식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2001년 8월, 8.15 방북 대표단 문제에에도 임동원씨는 예상외로 대표단 파견에 반대하였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그 말썽 많았던 대표단 파견은 김대중이 북측의 전화를 받고 직접 결정하여 임동원 장관에
게 지시한 것입니다. 2001년 8월 14일 아침까지만도 대표단 파견에 대해 아무런 조치가 없다가 임동원
이 오전에 청와대에 들어가 직접 지시를 받은 후 대표단을 구성한 것입니다. 8월 14일 오후에 부랴부
랴 대표단을 구성하다 보니, 온갖 "오싸리 잡놈"이 다 끼인 대표단이 구성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방북시 행동요령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시행할 여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급조된 대표단이 북한에 가
서 벌인 행각은 아직도 국민 여러분들이 잘 기억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제가 한가지 지적하고자 하는 중요한 점은, 대표단 파견 과정에서 당시 북한쪽 일꾼들 사이에서는 "이
제 임동원이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라는 말들이 오갔다고 하는 점입니다. 그 말을 뒤집어보면 그
이전까지는, 또는 그 이후에는 임동원이를 믿을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말이겠지요. 참으로 희한한 일
이 아닐 수 없습니다.


# 맺음말

국민 여러분, 이상으로 제가 임동원씨를 간첩이라고 의심하게 된 이유들을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저
는 아무런 직접적인 증거 없이 저의 주관적인 판단을 공개하는 데 많은 부담을 느끼면서 글을 썼습니
다. 그러나, 이 문제가 우리나라의 안보와 직결되는 사안인지라 무리인 줄 알면서도 이렇게 글을 발표
하게 됨었음을 국민 여러분들께서 이해해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여러분 들에게는 아마도 국가 안보를 책임져야 할 국정원의 수장이 간첩일지도 모른다는 저의 주장이
무척 황당하게 들릴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정권에서는 이러한 엽기적인 일들이 심심치 않게
일어 났었다는 사실을, 지난 번 저의 편지에서도 확인하셨을 줄 압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아마도 그동
안 김정일이 우리를 그렇게 "우습게 보고, 깔본 이유"를 짐작하시리라고 봅니다.

국민 여러분,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나라의 안보상황에 대해 대단히 우려하고 있습니다. 마치 백척간두
에 있는 듯 하기도 하고 누란의 형국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김정일은 "미군만 없다면, 3일이면 남한
전체를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고 있는데, 대다수의 우리 국민들은 안보 불감증에 빠져 있습니
다. 김정일은 "통일은 내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느스레를 떠는데, 우리 국민들은 안보 거부감에 오염
되어 있습니다. 어떤 놈이 이런 상황을 초래했을까요?

저는 임동원씨가 서독의 브란트 수상의 개인 수행비서였던 권터 기욤이나, 지난해에 죽었다던 베트남
의 부응옥 냐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상상해 보기도 합니다. 임동원씨의 위치와 역할로 볼 때 그들보다
도 훨씬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 것으로 봅니다. 며칠 전, 임동원씨는 "햇볕정책의 모든 업적은 대통령
에게 돌리고 책임은 자기가 지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아직도 그가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
는지 제대로 알고나 있는지?"에 대해 의심스럽습니다.

저는 김대중의 간첩혐의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 정권의 권력 핵심에는 크고 작
은 간첩들이 너무나도 많이 우글거리고 있습니다. 최근 이 정권의 최고 핵심 실세의 할아버지가 해방
직후 빨갱이로 활동하면서, 자금조달을 위해 위조지폐를 제조하다 검거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습니
다. 또한, 이 정권 내내 모든 경제정책을 책임졌던 한 핵심 인사의 형이 북한에서 고위층으로 있으
며, 오래 전부터 김대중과 활발히 연계하고 있다는 정보도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정보를 검증하지는
못했지만, 정황으로 보아 근거없는 말은 아닐 것으로 믿습니다. 심히 우려스럽고 개탄할 만한 일이 아
닐 수 없습니다.

몇 해 전에 국군 기무사의 모 간부가 청와대의 모 인사의 간첩혐의를 조사하다, 강제로 전역 조치되었
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제가 아는 국정원 수사국의 모 직원도 청와대의 모 인사의 간첩 혐의에 대
해 수사 계획을 작성해 올렸지만, 부서 상관으로부터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는가?" 하는 질책을 받
고 사건을 덮었다고 합니다. 이 정권에서 간첩이 검거되지 않고 있는 이유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
니다. 간첩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아니 득실 득실거립니다. 문제는, 간첩 떼거리들이 권력에 앉아 있
기 때문에 못잡는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간첩을 검거할 수 있겠습니까?

국민 여러분, 다시 한 번 호소합니다. 조국의 안보가 극히 위태롭습니다. 저는 지난 2000년 7월 월간
조선에 실린, 이대용 공사가 쓴 '월남 적화과정과 요즈음 한국사회' 라는 글을 한 번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그 글에는 우리와 일란성 쌍둥이라 불리는 월남이 어떻게 패망하게 되었는지 자세하게 기록
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 글의 내용이 진실하다고 믿습니다. 저는 언젠가 "수사국의 간부들도 그 글을
회람하고 있다." 말을 듣고 "아직도 영 희망이 없는 건 아니구나." 하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지난해 말, 북한의 땅굴을 밝혀내기 위해 힘쓰시던 어느 애국자가 수원 부근에 있는 땅굴 현장에서 과
로로 숨졌다고 합니다. 땅굴을 밝혀내야 할 국방부와 국정원은 오히려 갖은 방법으로 민간 땅굴 탐사
자들을 방해하고 박해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남침용 땅굴을 발견하고자 하는 분들이 운영하는 인터
넷 싸이트(www.ddanggul.org)가 저들의 방해로 인해 접속조차 안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이러한 일들
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국민 여러분, 우리 모두 깨어나야 합니다. 자유는 공기나 물처럼 그냥 주어지
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는 애국 시민의 피를 먹고 자랍니다. 지키려는 의지가 있는 국민만이 자유를
향유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저의 이 외침이 부질 없는 메아리로 그칠 때, 우리 조국의 운명은 보장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들의 현명한 판단을 간절히 기원합니다.


2003년 2월, 전직 안기부 직원 김기환 올림.



추신:

사랑하는 국정원 동료 여러분,

저는 오늘, 지난 번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악마적 초상을 공개한 데 이어, 우리가 원장으로 모
셨던 임동원씨의 가증스러운 초상을 세상에 공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에서는 아마도 제가 조직에 누를 끼치는 철없는 배신자 라고 생각하는 분이 없지 않
을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저는 퇴사한 후에도 국정원 직원이었다는 자부심으로 살아 왔습니다. 저
는 지금도 조직을 지키고 싶고, 조직이 바로 선 모습을 보고 싶기에 필요 최소한의 내용만 공개하려
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저의 심정을 이해해 주시기를 감히 요청드립니다.

존경하는 국정원 동료 여러분,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들 사이에서는 "조국의 안보를 조선일보에 맡기고 있다."는 자조적인 말들이 오
고 갔습니다
. 조국의 안보니 통일이니 하는 거창한 구호는 남의 이야기인양 치부하고, "월급봉투와 월
초수당에 목을 메는 초라한 월급쟁이의 쪼들린 삶"을 살아 온 우리들을 발견해 왔습니다.

저는 대의에 목숨을 거는 자랑스런 국정원 직원의 모습을 단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습니다. 조국의 운
명을 책임지는 당당한 자세를 지니는 국정원 직원의 모습을 단 한 번만이라도 보기를 소원합니다. 저
를 비난하기에 앞서,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 보는 겸손한 국정원 직원의 모습을 보기를 원합니다
.

저는 저의 행동이 아무런 말로도 변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길을 갈 것
이며, 저의 결심을 후회하지 않으렵니다. 여러분들의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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