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리성당 장년게시판

한국의 103위 순교자(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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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jenya] 쪽지 캡슐

2000-10-16 ㅣ No.2127

 

9 순교자 성월을 맞아서 시작했던 한국의 103위 순교자 시리즈가 오늘로 끝이 납니다.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순교성인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하시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길 바라면서 마지막 세분 올라갑니다.

 

 

 

101. 안 주교 다블뤼 안토니오 (安敦伊, DAVELUY ANTOINE, NIC-OLAUS, 1818∼1866) 군문효수

 

안토니오 다블뤼 안주교는 프랑스 아미앵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그 당시 프랑스의 전통적인 가정답게 모범적인 신앙생활과 덕행의 꽃을 피웠던 집안이다. 부모는 그의 억세고도 침착지 못한 성격을 고치려고 다소 완고한 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그는 사제직에 뜻을 두고 1834년10월, 성 슐피스 신학교에 입학하여 1841년에 사제로 서품되어 뢰이본당의 보좌신부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오래 전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던 전교 신부로서의 뜻을 펼치기 위해 1843년에 외방 전교회에 입회했고, 1844년2월에는 우선 류우꾸 지방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1844년9월 '마카오'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때 마침 제3대 조선교구장에 임명되어 조선으로의 입국을 시도하고 있던 고 페레올 주교의 권유를 받아들여 조선 선교사에 임명될 수 있었다. 그는 고주교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기 위해 1845년7월 상해에 도착했고, 같은 해 10월12일에는 서품을 받은 지 몇 달 안 되는 김대건 신부와 함께 세 신부가 충청도 강경 황산포에 도착하였다. 이때부터 1866년3월에 순교하기까지 21년동안 그는 당시 가장 오랫동안 조선에서 활동한 선교사가 되었으며, 아울러 조선의 언어와 풍습에도 능통하게 되었다. 조선에 입국한 이듬해인 1846년부터 전교활동을 시작한 그는 갖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7백 여 명의 교우들을 돌보았고, 1846년 김대건 신부가 순교하게 되자 일단 활동을 중단하고 습기가 심한 불결한 방에 숨어살아야만 했기에 안신부의 건강은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1848년 박해가 뜸해지자 건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전교할동을 시작하여 1850년에는 생명의 위협까지 있게 됐다. 이에 고주교는 안신부로 하여금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전교활동을 금하게 하므로, 안신부는 그 동안 신학생들을 지도하기도 하고 틈틈이 [한한불자전](漢韓佛字典)을 편찬하는 등 교우들이 손쉽게 볼 수 있는 신심서 및 교리서를 번역, 저술하기도 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성교 교리문답], [천주교 예규], [천당직로]등의 번역서라든가, [신명초행], [회죄직지], [영세대의], [성찰기략] 등의 저서들은 모두 그의 노력에 의한 것들이었다. 특히 한국 천주교회사와 순교사의 정리는 그의 두드러진 업적들 중의 하나이다. 조선 천주교회사 편찬을 위해 조선사에 관한 비망기와 조선 순교사에 대한 비망기를 저술하여 모두 1862년 '빠리'에 보냄으로써 후세의 아주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이것이 달레신부의 [한국 천주교회사] 저술을 가능케 했다. 1861년에는 그가 경상도 지방에서 활동하기도 하고, 1865년부터는 내포 지방에서 전교활동을 시작했었는데, 1866년에 박해가 더욱 가혹해져 마침내 같은 해 2월23일에 장주교가 잡혀 3월7일에 참수 치명하게 되니, 보좌주교인 안주교는 주교직을 계승하여 제5대 조선 교구장이 되었다. 그러나 곧 안주교도 체포되어 당시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고 있던 민 마르띠노신부와 오 베드로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 의금부에 갇힌 안주교는 심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천주교에 대한 훌륭한 호교론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3월23일, 그가 사형에 처해질 것이 결정되어 충청도 보령(保寧) 수영(水營)으로 이송되게 되었는데, 그들은 죄수복을 입고 고문으로 상한 다리를 질질 끌면서 이송되는 도중, 처형 예정 날짜인 3월30일 성 금요일보다 처형날이 연기될 기미가 있음을 알고 "성 금요일날에 죽게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그의 소원대로 3월30일인 성 금요일 날 안주교는 사형을 받게 되었는데, 처형이 시작되자 맨 먼저 안주교가 칼을 받게 되었다. 이때 희광이들이 안주교의 목을 칼로 한번 내리친 다음 그대로 버려둔 채 처형의 품삯을 흥정하기 위해 한참동안 꾸물거리다가, 그 흥정이 결정되자 다시 안주교의 목을 두 번째 내리쳤다고 한다. 그후 그의 시신은 얼마동안 군문효수되었다가 교우들의 손에 의하여 홍산 땅에 안장되었다.

 

 

 

 

102. 민신부 위앵 마르띠노(閔神父, HUIN MARTIN, LUCAS, 1836∼1866) 군문효수

 

마르띠노 루까 위앵 민신부는 프랑스 규용벨 지방에서 태어났다. 포도밭을 경작하는 그의 부친은 항상 그의 가문에서는 성직자와 수도자가 많이 배출되었음을 자랑하면서 9남매를 모두 훌륭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교육시켰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막내로 태어난 위앵은 1851년에 랑그르 소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1856년10월에는 랑그르 대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861년6월29일, 그는 사제서품을 받고 랑그르 교구 사제가 되었다. 그후 그는 봐세본당에서 활동하면서도 선교사제의 꿈을 키우다가 마침내 1863년6월8일, 위앵신부는 주교의 허락을 받고 그 해 8월20일 빠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1864년6월13일에 전교 해야 될 지방이 한국이란 것을 알았을 때, 그는 기뻐하며 부모님에게는 물론 옛날 본당 신부님에게도 편지를 썼다고 한다. 1864년7월15일, 위앵신부는 브르뜨니에르 백신부, 볼리외신부, 도리 김신부와 함께 전교지 한국을 향해 빠리를 떠나 홍콩, 상해를 거쳐 요동까지 바쁘게 왔으나, 한국과 쉽게 연락이 되지 않아 그곳에서 한문공부와 한국어 공부를 하며 그 해 겨울을 나게 되었다. 그 이듬해인 1865년5월27일이 되어서야 위앵신부를 위시한 일행은 내포지방에서 안주교의 환영을 받으면서 한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 후 위앵신부는 6월18일까지 안주교와 함께 내포지방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며 지내다가, 그후에는 내포지방에서 20리쯤 떨어진 당진 합덕 지방에 세거리 공소로 떠났다. 1866년2월, 벌써 위앵신부는 교우들의 고백성사를 듣고 신자들을 가르칠 수 가 있었다. 위앵신부는 박해 직전까지 5백 여 명에게 고해성사를 주었고, 15명 내지 20명에게 병자성사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몇몇 교우들에게 혼배성사도 집전해 주었다. 1866년3월12일, 그는 안주교의 편지를 받고 순순히 체포되어 안주교, 오신부와 함께 3월19일 서울로 압송되어 의금부에 수감되었다가, 1866년3월30일 수영 갈매못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이때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내 마음에 아픈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이토록 젊은 나이에 죽는다는 것도 아니요, 이곳과 같은 처절한 장소에서 죽게 되기 때문만도 아니라, 이 나라 불쌍한 백성들의 구령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죽게 되니 그것만이 마음 아플 뿐이오."

 

 

 

103. 오신부 오매트르 베드로(吳神父, AUMAITRE PETRUS, 1837∼1866) 군문효수

 

피에르 오매트르 신부는 앙굴렘의 에제크라는 조그만 시골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조그만 농지를 경작하며 신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꾸려갔는데, 모두 5남매를 키우고 있었다. 오매트르가 성실은 하였지만 공부 성적이 뛰어나지는 못하여 그가 신학교에 입학할 때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그가 사제가 되고자 했을 때 본당 신부는 그의 성품에는 감동했지만 성적을 보고는 반대했던 것이다. 이런 어려운 과정을 거쳐 그는 소신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공부의 부족함을 극복할 뿐만 아니라, 우등생이 되기까지 하였다. 그는 1857년10월에 앙굴렘 대신학교에 전학했고, 1859년에는 소속 교구를 떠나 선교 신부가 되어도 좋다는 주교의 허락을 받았으므로 1862년6월14일에 선교 신부로서 사제서품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전교지가 조선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박해로 조선 입국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는 중국 어선으로 연평바다를 거쳐 무사히 조선 땅을 밟게 되니 때는 1863년6월23일이었다. 조선에 입국한 오메트르신부는 우선 1개월 동안 베르뇌 장 주교와 함께 서울에서 지낸 후, 샘골로 자리를 옮겨 조선말을 익히게 되었다. 그후 1864년9월에는 경기도 지역의 한 구역을 맡아 사목할 수 있게 되었다. 입국한 지 2년 남짓 지날 때, 박해 소문이 나돌았고, 장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할 때인 1866년 당시에 오메트르신부는 수원 지방 새암골에 있었다. 여기서 오메트르신부는 안주교를 만나기 위해 일단 교우들을 진정시키고 격려하면서 미사 예절용 물건을 모두 치워버리고 안주교가 있는 신리마을로 갔다. 이것은 오메트르신부가 교우들에게 더 큰 피해가 없도록 하기 위해 자수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하여 안주교의 집에 있던 포졸들은 안주교 뿐만 아니라 다른 신부들도 체포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포졸들은 안주교를 위시하여 민 위앵신부와 오메트르신부를 홍주 옥에 일단 끌고 갔다가 다시 서울로 압송하여 투옥시켰다. 문초를 받는 동안 주리 틀림 등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고백하였으므로, 결국 오메트르신부를 포함한 세 선교사들은 모두 사형선고를 받고 2백50리나 떨어진 충청도 수영(水營)의 갈매못 사형장으로 끌려가 1866년3월30일 참수치명하니, 바로 그 날이 예수 수난일로 그때가 예수께서 운명하신 시간이라고 전하여 진다. 그때 그의 나이 29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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