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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의 기나긴 기다림을 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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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봉 [bb04] 쪽지 캡슐

2008-06-07 ㅣ No.6516

 

 지난 5월 24일 토요일 오후였다.

 부회장님과 함께 본당의 CCTV를 점검하고 있었다.


"18 년 동안이나 미사는 참례하지만 성체를 모시지 못하는

 자매님께서 오늘 갑자기 관면혼배를 하게 되었는데,

 형제님께서 증인이 되어 주실 수 있나요?"

"..."

 

 "자매님 증인은 제가 하는데 형제님 증인이 없어요!"
" 그래요. 그럼 제가 해 드려야죠!"


  증인이 한번도 되어 본 적이 없었고, 갑자기 주문을 받으니

 당황스럽기도 하였으나, 18년의 기다림에 힘겹게 응답하시는

 그 형제님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빨리 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기나긴 세월 동안 남들이 주님을 우리 몸안에 모실 때

 자매님께서는 조용한 기다림과 간절한 기도를 모셨을 것이다.  


  결혼식을 며칠 앞 둔 아름답고 젊은 예비부부 한 쌍은 혼배성사를,

 그리고 또 나이 들었지만 아름다운 우리 팀의 한 쌍은 관면혼배를 했다.


" 내려가셔서 좀 기다리세요. 차 한 잔하고 가시게요."

 

  갑작스레 인연이 된 그 분들과 마주 앉았다.


"18 년이나 버티셨어요? 참으로 대단하시군요!

 전 집사람이 영세 받고 3년을 버티다 못해 입교 했었죠."

" 그럼 내일 입교도 하시나요?"

" 아뇨, 아직은 좀."

" 아무튼 오늘 형제님께서 자매님에게 정말로 큰 선물을 하신 겁니다!

 내친김에 내일이 우리본당 예비자 환영식인데, 입교 하시는 게 어떨까요?"

" 집사람이 성당 올 때 차량봉사는 가끔 하는데, 매 주 다닌다는 게

 아무래도 좀 아직은 부담스럽고 힘들 것 같아서요."


  난 지난 해 교리를 받다 포기하고 있던 한 형제를 가까스로 회생시켜

 영세시키고 레지오 단원으로 입단시켰던 기억이 났다.


  그 때 그 형제를 구제하기 위해 애쓰는 나를 보며,

 혹시 잘 안되면 아직은 주님과의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하라고 하던 아내에게

" 주님과 연결되어 있던 인연을 다른 사람들이 잘라 놓았는데 다시 이어야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리고 이 형제님의 부담을 좀 들어 드려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글쎄요. 주일을 지키는 것을 저 역시 가장 부담스럽게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전 그 점에 있어서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네요.


 신앙생활이란 어떠한 측면에서 보면, 동호인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하면

 한결 부담이 적을 거예요. 동호인들의 모임도 매 번 참석하지는 못하지 않습니까.

 혹시 일이 있어 부득이 빠져야 한다면 '미안하지만 이 번에는 모임에

 못나갈 것 같아요. 다음 번 에는 꼭 나갈게요.' 하고 말하지 않습니까?


 미사 역시 마찬가지예요. 일요일에 일이 있으면 토요일 오후에 참례해도 되고,

지방을 가면 그 지방의 성당을 찾아도 되고, 일요일에도 6시, 9시, 11시, 7시

 이렇게 다양하고 편리한 시간대가 있는데, 그것도 못 맞춰 부득이 빠지면 신부님께

'이 죄인이 죽을죄를 졌습니다. 지난 주일에 아버님을 찾아뵙지 못하였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하지만 동호인들 중에서도 신앙이 같은 동호인이란 다른 어떠한 동호인 보다 각별한 것입니다.


 이 곳도 사람 사는 곳입니다.

 시간 너무 끌지 말고 빠른 시간 내에 오세요.

내일 예비자 환영식에 참여 해 보시고 결정하세요."


 그리고 다음 날 교중미사 중에 예비자석을 힐끗힐끗 둘러보았지만,

 그 형제님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난 "그래 18년 동안 미뤄온 혼배성사를 한 것만도 대단한 거야.

때가 되면 오시겠지!" 하며 자신을 위로했다.


 그리고 오후에 절두산으로 자전거 하이킹 성지순례를 떠났다.


 그리고는 며칠 지나자 그 일이 점점 희미해지기 시작하였다.


 주일 교중미사 독서를 위해 좀 일찍 성당으로 가던 중 함께 증인 역을 했던 자매님과 마주쳤다.

 애들과 중고등부 미사를 마치고 돌아가던 자매님은 아주 반갑게


" 지난 주 그 형제님께서 입교 하셨대요! 지금 교리를 받고 있어요."

" 지난 주 예비자 환영식에 안 오신 것 같던데요."

" 아니에요. 예비자 환영식에도 오셨대요."

" 그래요. 정말 다행이네요."


  이제는 주님께 "이 형제님이 세례를 받고 함께 봉사 할 수 있도록 은총을 내려주세요!" 하고 기도한다.


  그리고 그 형제님께서는 사랑받고 행복해야 할 자신의 사랑에게

 참으로 많은 아픔을 주었었다는 걸 지금은 느끼지 못하겠지만 머지않아 깨닫는 날이 올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아픔은 본인이 세례를 받으므로 인해 말끔히 치유되는 상처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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