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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의 삶 - 송봉모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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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필 [sjpmari] 쪽지 캡슐

2002-12-13 ㅣ No.2213

 임마누엘의 삶 - 송봉모 신부  

 

..  어떤 마음으로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릴 것인가?

 

성모님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친밀함’에 대해서 얘기해 보자.

 

동부아프리카의 한 부족에서는 생일을 태어난 날이 아닌 어머니가 아기를 낳기로 결심한 날로 한다고 한다.

한 여인이 사모하는 남자가 생기면 그 남자에게 가서 아기를 찬미하는 노래를 불러준다고 한다.

상대 남자가 그 노래를 받아들이게 되면 그 두 남녀는 합방을 하게 되는데 그 날이 태어날 아기의 생일이 되는 것이다.

즉, 함께 아기 노래 부르면서 자는 날이 생일이 되는 것이다.

산모는 임신기간동안 배속 아기를 위해서 계속해서 그 노래를 불러준다.

아기는 태어나면서 자기 노래를 듣는다.

성장하면서, 죽을때 그 노래를 듣는다.

이것이 친밀감이다.

 

성모님이 뱃속 아기 예수에게 아래의 노래를 불러준다

 

예수 내 사랑하는 예수

죽으나 사나 내 사랑

영원한 내 사랑

 

성모님과 아기는 한 몸이다.

혼연일체된 관계

우리 모두 이번 대림 기간 24일 동안 성모님과 이 기도를 하자.

좀 더 사랑하는 자기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노래를 나의 기도로서 만들자

 

크리스마스 축제는 몇 일동안 가는 것일까?

성모님은 한 평생 이 사실을 곰곰히 기억하셨다.

크리스마스 축제는 일년내내 지속되어야 한다.

예수님과 함께 2003년을 보내야 한다.

 

임마누엘이 무슨 뜻인가?

임-함께

마-우리

엘-하느님이

즉, 임마누엘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라는 뜻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이름이다.

 

예수님은 33년 공생활동안 우리와 함께 있다는 말은 자주 하셨다.

그 분은 우리와 함께 있기 위해 태어나셨다.

우리가 그 분과 함께 있지 않는다면 2003년도 힘들 것이다.

임마누엘,주님과 함께 살아야 한다.

도대체 함께 산다는 것이 뭔가?

 

예를 들어보자.

리빙스턴이라는 선교사가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청춘을 다 받쳤다.

오른팔은 사자에게 물려 잘려나갔다.

그 선교사가 노인이 되었을 때 모국인 영국 황실에서 작위를 수여하기로 했다.

작위를 수여받기 위해 영국에 도착하였을 때 기자들이 그 선교사에게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아프리카에서 한 평생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

“그 비결은 마태오복음 맨 마지막 줄에 있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때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열병이 나고, 오른팔이 잘렸을 때에도 함께 있는 예수님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이런 태도로 2003년을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는 한 성탄은 무의미하다.

 

잔포엘 이라는 시카고 심리학 교수님이 계시다.

이분은 예수회 신부님이시다. 이 분이 박사과정을 받을 때 독일 수녀원에 계셨다.

그 수녀원에 83세된 수녀님이 손님방을 매일같이 정성을 다해 청소를 하셨다.

그 젊은 잔포엘 신부님이 보시기에 그 나이드신 수녀님이 그러시는 모습이 안 스러워

“ 수녀님, 어떻게 매일 그렇게 청소하십니까? 대충대충하세요”

그러자, 수녀님이 말씀하시길

“신부님, 하느님 나라 건설은 대충대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수녀님에게 걸레질은 하느님 나라 건설이었기 때문에 대충대충 할 수 없었다.

이것이 2003년 그 분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어야 한다.

아침 이부자리 갤 때부터 도서관에서 공부할 때, 친구를 대할 때도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으로 대하여야 한다.

사소한 일에 정성을 다하는 것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사소한 일, 일상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담아야 한다.

 

로렌스 수사님이 계셨다.

이 분은 55세에 수도원에 입회하셨다.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사고로 부인과 자녀를 잃어버리고 입회하셨다.

그 분은 매일 설거지하고 밥하는 것이 일이었는데, 그것을 항상 주님과 함께 하셨다.

“나는 프라이팬에 계란을 뒤집을 때도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했다.”

 

그 분이 24일 태어나신 것은 우리와 함께 있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분과 함께 있지 않았다.

 

사소한 일, 작은 일에 그 분과 함께 하는 것이 쉽지 않다.

우리의 욕심이 그 분과 함께 있는 삶을 살지 않도록 만든 것이다.

 

프랭크로마라는 분이 계셨다.

하느님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굳게 굳게 붙잡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 사소한 일에도 정성을 다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열심히 했더니 1년 뒤부터는 내 생활에 그것이 몸에 베기 시작했다.

 

성탄을 맞이해서 그 분과 함께 살기 위한 결심을 해야 한다.

 

이것을 방해하는 시각들에 대해서 설명해보자.

첫째, 우리안에 영적인 자리와 세속적인 자리를 구분하는 마음이 있다.

그런 삶은 살기가 힘들다.

성당안에서는 그 분과 함께 있지만, 성당밖을 나서면 아닌 삶을 살게 된다.

이중적인 시각으로는 임마누엘 삶을 살 수 없다.

주일미사,성소안에서 우리는 그 분과 함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야구장에 있을 때, TV,신문을 볼 때, 친구와 놀 때 우리는 그 분과 함께 있다는 생각을 못 한다.

그러면 우리는 한 발만 임마누엘의 삶을 사는 것이다.

실제 주일 하루만 그 분과 함께 사는 것이며, 나머지 6일은 다른 삶을 사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먹던지, 마시던지, 무얼하던지 오로지 하느님 영광위해서 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다.

 

로렌스 수사님은 세속적,영적인 삶을 구분 안 했기에 가능했다.

꼭 성당에 있다고 그 분과 함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마음안에 상처,적개심,분노가 있다면 미사 볼 때 불만을 가지게 된다.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한 마음으로 소리칠 때 그 자리는 철저히 영적인 자리가 된다.

우리의 시각을 고쳐야 한다.

 

우리가 평생 살아가면서 일하는 시간이 88,000시간이다.

이것은 깨어있는 시간의 40%에 해당한다.

그 중에서 평생 기도하는 시간이 4,000시간, 즉, 깨어있는 시간의 2%만 기도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깨어있는 시간의 2%만 주님을 느끼는 것이다.

 

두 번째로 방해하는 시각은 숙명적인 시각이다.

우리 삶을 부정적으로 보게 한다.

100명의 신자에게 물었다.

“요즘 어떻게 사십니까?”

 

1위, 그럭저럭 살아요.

2위, 마지못해 살아요.

3위, 죽지못해 살아요.

 

이런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다.

이것이 숙명론적인 시각이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다.

 

레몬을 입에 대고 한 입 깨무는 상상을 하면 지금 침이 고이게 된다.

부정적이고 숙명론적인 생각을 갖고 있으면 내가 실제로 그렇게 된다.

 

내 스스로 승리자로 여길 때, 다른 사람도 나를 승리자로 보게 되고

내 스스로 구제불능이라고 여길 때, 다른 사람도 나를 구제불능으로 보게 된다.

이 세상이 아무리 썩어도 우리는 임마누엘 시각을 가져야 한다.

 

앞으로 1년 동안 두 가지 시각-이중적인 시각과 숙명론적인 시각-을 조심하자.

 

그럼, 임마누엘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

내일 모레를 보지말고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하루하루만 사시는 분이시다.

성서에도 근거가 있다.

 

하느님의 이름이 “야훼”이다. 이 뜻은 나는 있는자로서이다.

현재형이다.

나는 있을자, 있었던 자가 이닌 있는 자이다. 현재형이다.

오늘도 지금 이 순간을 살아야 한다.

구약에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맛나를 내려주실때도

항상 하루치만 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혹시 다음에 안 주실까 해서

맛나를 긁어 모았다. 그 다음날이 되자 맛나에 구더기가 붙었다.

 

또한, 예수님의 주의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오늘의 하느님 이시기 때문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내일에 대해 준비만 하지 걱정은 하지 말자.

오늘만 살아갈 때 아무리 힘겨워도 임마누엘 삶을 살 수 있다.

예를 들어 집에 중풍환자가 집에 있다고 하자.

오늘 하루만 똥을 받는다면 웃을 수 있다.

그러나, 한 평생 똥을 받을 생각을 하면 못 웃는다.

오늘을 산다는 것이 임마누엘 삶을 가능하게 한다.

 

둘째로, 하루를 살면서 나와 함께 계시는 그 분의 뜻을 헤아려야 한다.

매일 짜증내면 그 분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다.

항상 선택해서 행위하는 것이다.

그 분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다.

이런 것은 <선택>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때로는 친구들이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할 때가 있다.

때로는 내가 억울하게 누명을 쓸 때도 있다.

이런 경우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그 분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 분이 뭘 원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사람은 작은 일에도 선택을 해야 한다.

인사하는 거 이부자리 개는 거

큰 일은 누구나 선택할 수 있다.

 

 

- 서강대 교목처 대림 특강 요약

 

- "젊은이의 피정" 카페에 올려 놓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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