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십리성당 게시판

배티 성지 순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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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애 [sophia1008] 쪽지 캡슐

2005-09-28 ㅣ No.3601

 

 

배태 성지의 입구에 들어서서 왼쪽으로 올라가면 최양업 신부 기념성당이 있고 그 옆으로 14처가 세워진 오솔길이 보인다.

 

14처는 모두 연자방아 맷돌에 새겨져있다.
이것을 볼때 순교자들의 체취와 함께 심한 박해 상황을 실감할수가 있었다.

 

14처가 끝나는곳에 나무 밑둥을 잘라 만든 야외성당이 있고 그 산기슭에 성모마리아상이 서 있다.
자연석으로 만든 제대위의 촛대 역시 14처와 같이 맷돌로 만들어져있다.
야외성당 한쪽으로 무명 순교자 묘로 가는 길이 등산로로 이어져있다.


배티라는 지명은 동네 어귀에 골배나무가 많은 배나무 고개라서 이치(梨峙)라 부르던 것이 순수 우리말로 바뀌어 배티가 되었다고 한다.

 

이곳 산골짜기에 천주교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한국천주교회사>를 보면 신유박해때 순교한 충남 결성현 덕머리 출신인 원 베드로가 박해를 피해 진천의 질마로라는 곳으로 피신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유박해 이후 순교한 남인 양반들의 가족과 몰락한 양반들이 이곳으로 피신하여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다가 병인박해를 맞아 순교자를 내면서 와해되었고 신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을 것이다.

1873년 대원군의 실각으로 박해가 그치자 신자들이 다시 모여 새 복음의 터전을 일궜으리라 여겨진다.

 

기록을 보면 이 시기에 공소로 설정된 교우촌은 배티, 용진골, 새울,
삼박골, 평사 등 다섯군데였다.

그 중에서 배티공소는 1890년 이래 교리신학교가 개설된 중심지였다.


일제시대 초기에는 이곳 공소 한군데에 적게는 20~30명,
많게는 70~80명의 신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생활터전을 마련한 신자들이 하나 둘씩 떠남으로써 현재 신자들은 별로 많지않다.


그러나 이들 교우촌은 순교자들로 인해 복음의 터전이 되었던 곳이며 최양업 신부나 외국 선교사들의 고난 어린 발자취가 스며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교회사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최양업 신부의 고귀한 업적이 일구어진 터전이고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전교에 힘쓰다가도 6월 중순부터 8월 초순까지 장마철에는 이곳 산골에 머물러 각종 자료도 정리했다.

 

기도서 <천주성교공과>를 번역하고 순교자의 기록을 정리한 것도 큰 업적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박해 때 순교자들을 조사하여 프랑스어와 라틴어로 번역하고 이를 다블뤼주교에 전달케 함으로써 훗날 순교자 103위가 복자위를 거쳐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음은 그의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할것이다.

 

최양업 신부가 활동하던 시기는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등 세 차례에 걸쳐 큰 박해를 겪은 뒤라 신자들의 교리지식은 거의 백지에 가까웠다.

성직자와 전교회장 등 지도자급 인물들이 모두 순교한 뒤였기에 신앙생활 또한 온전치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신앙의 자유도 없었고 드러내 놓고 집회를 갖기도 어려운 상황에 종교행사 또한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에 치러야했던 때였다.

이런 상황을 안타깝게 여긴 최양업 신부는 짧은 시간에 많은 신자들에게 기본 교리를 알수있게 가사체로 만들었다.
이것이 <천주가사>이다.

 

최양엽 신부의<천주가사>는 모두 19편으로 되어있고 이 천주가사를 곡조에 맞추어 노래한 것은 1900년대 부터이고 성가에 본격적으로 도입된것은 1920년경이었다.

 

천주가사가 서구적 그리스도 사상을 우리나라 사람의 전통사상과 의식구조에 토착화한 작품으로 신자들의 신앙생활과 국문학사에도 크게 이바지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곳 배티에서 이런 업적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귀한것이다.
청주 교구는 그의 탄생175주년을 맞아 이 곳에 기념성당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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