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성당 게시판

묻어둔 아픔(주일학교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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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경 [lsk55] 쪽지 캡슐

2001-10-12 ㅣ No.2961

 

 

묻어둔 아픔(소제: 30여년전 학창시절의 회고)

(위 사진은 고3 재학시절 때이며, 가운데 폼잡고자 약간 셔츠 카라를 세워 불량스럽게 보이는 자가 쪽스럽지만, 상기 본인임을 밝히고자 합니다.)

 

 나는 30여년전인 1970년대, 중고교시절 강릉 임당동 소재 성당의 주일학교에서 남다르게 유난을 떨면서 "학생회 활동"을 하였던 관계로 그때의 그 추억을 오늘날까지도 잘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가끔은 나이를 잊고, 마치 아직도 18세의 고교학생인냥 착각하여, 아이들처럼 옷을 입고, 머리는 비교적 짧게 깍고 다니며, 특히 머리에 찌꾸나 무스조차 바르지 않는 습관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누라로부터 "도데체 당신 지금 나이가 몇인줄이나 알아요!, 애들처럼 그게 뭐예요? 앞 이마도 좀 훤~하게하고 다니고, 머리에 기름도 칠하고..."라는 핀잔을 비교적 자주 듣는 아주 못난 놈이랍니다.

학창시절 공부도 잘 못했던 놈이 왜?그리도 성당에는 잘 갔고 거기서 살다시피 했는지...

그 이유는 아마도 이쁜 여학생들이 많았던 탓이 그 주된 원인이었을 꺼라고 추론됩니다.

어찌되었든, 난 학창시절 성당의 학생회 대빵으로써 그들을 떼거리로 인솔하야, 태권도 시범을 보인다고 미군부대(강릉비행장에 주둔)에 위문가 그들에게 "미제 버터와 빵도 얻어 멕이고", 또 성당의 여학생들에게 강제로 수예로 뜬 손수건을 만들게 하야, 그걸 학교에 갖고가 친구들에게 강매해서 만든 자금으로 또다시 인근 모산에 위치한 "동방사 예하 훈련단의 군부대에 찾아가 위문공연과 쇼"도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덕분에 당시의 군인아자씨들로부터 겁도없이 군대 기름(등유 MF고급용)을 몇드럼 얻어서 성탄절을 맞아 몇개월 전부터 벌집난로를 펴놓고 성탄맞이 연극연습도 했던 참으로 웃기던 학생이었습니다.

참! 성탄연극의 팃켓을 팔아서 "강릉 보육원"에도 수차례 주일학교 학생회를 이끌고 방문을 했었당께요.

그땐 지도교사도 없었고, 신부님과 수녀님들도 한개도 안도와 줬던 때였고, 특히 성당에 학생들이 모이면, 노랑머리 외국신부님이 우릴 쫓아 냈던 시절이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끼는, 오직 자급자족하는 시대의 풍운아였답니다.

(재학시절 모교의 유명한 밴드부학생들을 몽땅 끌어들여 군부대 위문공연을 갈 수 있었던 것은, 놈들에게 우리 성당에 얼매나 이쁜여학생들이 많은지 아느냐?고 살살 꼬디켰기 때문임.)

그런디...

정작 이몸은 이쁜 여학생들에게 눈길조차 한번 보낸적이 없답니다.

왜냐하면, 학생회의 회장이 얼레리꼴레리한다면, 조직이 깨질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지라우~

당시는 주일학교에 선생님이란 없었당께요. 단지 멋쟁이 수녀님이 한분계셨는데 그분은 우리들에게 "포크댄스"를 가르쳐 줄 때도, 나는 전기가 통할까봐, 여학생의 손도 제대로 못잡았던 그런 순또라이였어요.

고교졸업후 곧바로 군에 입대했을 때, 그땐 뒤늦게나마 왜? 학창시절 여자친구하나 맹글지 못했는가를 당시 엄청 후회 했던 바도 있었지만,

어떻든 오늘날, 30여년전의 학창시절, 성당에서 함께했던 당시의 학생회 그 여학생들이 지금은 50세에 이르는 아줌씨가 되었지만, 그녀들은 그때의 그 늠름했던 상기본인의 기상이 좋았었다고 추켜세우며, 그땐 와~ 눈길한번 주지않았느냐?고 약간의 푸념과 농담을 하며, 날 너무 너무 이뻐해 준다니께요. 그래서 요사이는 좀 살맛이 납니다.

그리고 30여년전 주일학교 학창시절의 친구들을 우리는 지금도 분기에 한번씩은 정기적으로 만난답니다.

기래서 그들과 옛날 얘기도 하고, 인생 얘기도 하고, 자식들 커가는 얘기도 하고 또 함께 노래방에도 가고...

참! 노래방 얘기가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디...

며칠전 나는 옛날 옛날의 그 까까머리와 단발머리시절의 성당 친구들과 남한산성에서 1차로 한잔 빨고, 노래방에 갔뎄시요.

분위기가 아주 좋았답니다.

그래서 그동안 생전 부르지도 않았던 "문밖에 있는 그대(박강성)"라는 노래를 내 순서가 왔길래 한번 땡겼구만요.

그랬더니만 그자리에 있던 많은 아줌씨들이 난리가 났다는 것 아닙니까?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어쩔 수 없이 이번에는 "아직도 못다한 사랑(솔개 트리오)"을 발사 시켰습니다.

그랬더니만, 의자에 올라가는 아줌씨, 벽에 머리를 박는 아자씨들이 속출하데요.

어떻든 그들은 분위기 있는 노래를 불러 주었다며, 날 치켜세워 주었소!

특히 아줌씨들은 신세대 오빠, 역시 용산 오빠가 세련됐다고 하며, 재차 앵콜 송을 요구해와서

상기 본인은 주책없이 이번에는 이미 오래전 우리가 노래방에 갔을 때,

이건 박자가 잘 않맞으니까 부르지도 말라고, 학창시절 쬐끔 속으로 날 좋아했다던 그 아줌씨의 우정어린 몇차례의 걸친 경고와 구박도 받은바 있었던 그 노래인 "묻어둔 아픔(김동환)"을 술김에 악을 쓰며 내리 재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노래방기기가 놀라서인지 마! 100점을 확! 때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빵빵" 울리지 않겠습니까?

결국 그날 난 가수왕으로 표창을 수상했소이다.

머리 털나고 처음으로 화려하게 음악계에 데뷔하는 기쁜 순간이었습니다.

성가대에도 그동안 노래에 자신이 없어서 못들어 갔었는디...

음치에게도 이런 빛나는 날이 있다는 사실에 난 스스로 감격하였소이다.

그런데 이를 시셈하는 듯 째려보는 동료 아점씨들이 눈초리가 뒤통수를 때리는 것 같아

얼픈 술값과 노래방 비용을 내곤, 나는 총알같이 집으로 돌아 왔쌈니다.

집에 도착하니 새벽 2시였답니다.  

역시 나는 "바보 같은 사나이"인가 봅니다.   

그래도 이나이에 그런 좋은 학창시절의 성당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에 난 마냥 행복하답니다.      -끝-

 

참고사항

그리고 아래내용은 참고사항인디...

학창시절 성당에서 이 엉아와 함께 온동네를 누비고 다녔던,

당시 같은 학년이었던 친구 김남철(베드로)아자씨는 현재 국립삼척병원의 관리부장으로서 삼척본당의 사목회장을 하고있고,

1년 후배인 김홍래(라파엘)아자씨는 현재 이태리 대사관의 공보관으로 재직중이며, 그동안 수많은 이태리 번역글과 더불어 "어린이 성당교재"를 만든 인물로 성장했고,

또 1년 후배인 최순영(요한)아자씨는 현재 한국통신의 총무부장으로 잘 나가고 있는데, 특히 하남시의 촌 본당에서 사목회장을 한다나? 어쩐다나?하는 소리가 들리고 있으며,

또 1년 후배인 김희태(바오로)아자씨는 현재 대우건설의 부장으로 재직중인데, 지 마누라가 한술 더 떠서 성당일에 미쳐있다는 첩보가 있습니다.

그외 많은 당시의 친구와 후배들이 평신도 활동을 모범적으로 하고 있는 것은 큰 자랑이 아닐 수 없당께요.

아줌씨들에 대해서는 보안상 그 이름을 밝힐 수 없는 것이 매우 안타까울 뿐입니다만,

모두들 성당에서 한칼씩하고 있음을 알려 드리는 바입니다.

그중 유명한 "오 뭐시기" 불리우는수녀님도 한분 탄생된 것은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편 우리 마누라는 상기본인과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만, 초등학교 2학년때에 첫영성체를 같이 받은바 있고, 6학년때쯤인가에는 견진도 함께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먼훗날 나중에 사진에서 확인하였음) 그런데 우리 마누라는 중고교 학창시절에 약간 뺀질이었기에 주일학교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성당 학생회때 얼레리꼴레리로 만난 것이 전혀 아님을 분명히 밝히는 바입니다.

부디 오해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 더이상은 생략(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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