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마태오 복음서 25,31-46는 가해 그리스도 왕 대축일 복음 말씀 및 매년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복음 말씀으로 발췌되고 있습니다.
[주님이 아닌 다른 사람들한테 베푼 것을 왜 바로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신건가요????]
<----- 이 질문에 대하여 제대로 답변을 하려면, 우선적으로, 마태오 복음서 25,40이 우리말이 아닌 다른 지역 언어본에서 어떻게 번역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음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별도의 시간을 내어, 들여다 본 결과들입니다:
2-1. RSV(Revised Standard Version) 마태오 복음서 제40절과 제45절에서 "to Me(나를 향하여)" 로 번역된 표현들이 NAB(New American Bible), NIV(New International Version), GNB(Good News Bible) 등의 해당 절들에서 "for me(나를 위하여)" 로 번역되었습니다.
2-2. 그리고 DRB(Douay-Rheims Bible)에서는 "to me(나를 향하여)"로 번역되었으며,
1611년판 KJV(King James Version)에서는 "unto me(나에게까지)" 로 번역되었습니다.
여기서 "unto" 가 "to" 의 고어임을 또한 상기하십시오.
2-3. 다른 한편으로,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Ia IIae, q101, a4, Reply to Objection 3에는 다음과 같은 용례가 주어져
있습니다:
출처: http://www.newadvent.org/summa/3101.htm#article4
(발췌 시작)
Whatever we give our parents out of piety is referred by us to God; just as other works of mercy which we perform with regard to any of our neighbors are offered to God, according to Matthew 25:40: "As long as you did it to one of . . . My least . . . you did it to Me."
우리가 [정의(justice)에 부속되는 윤리덕인]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piety)(*)에 기인하여 우리의 부모들에게 제공하는 바 무엇이든지 하느님에게까지 우리에 의하여 돌려지는데, [이것은] 다음과 같은 마태오 복음서 25,40에 따라, 우리의 이웃들 중의 임의의 한 사람에 대하여 우리가 수행하는 자비(mercy)에 기인하는 다른 일(works)들이 하느님에게까지 봉헌되는 것과 꼭 마찬가지입니다(just as):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나에게까지 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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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이 윤리덕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다음의 글들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972.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piety_concept_error.htm (자구적 어의/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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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2-4. 그리고, 여기를 클릭하면, 교황님들조차도 "이렇게" 동일하지 않게 번역되고 있음에
대하여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를 클릭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전치사 "to" 가, 주어진 문맥 안에서, "toward(향하여)", "up to(에게까지)", 혹은 "for(위하여)" 등의 의미를 또한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2-5. 그러므로, 거의 대부분의 영어본 성경들의 마태오 복음서 제40절과 제45절에서 "to me". "unto me", 혹은 "for me" 로 번역되고 있는 표현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에, 다음의 어원 사전에 주어진 설명들을 또한 참고하여, "바로 나에게" 로 번역하는 것보다는 "나를 향하여", "나에게까지", 혹은 "나를 위하여" 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은 번역임을 알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http://www.etymonline.com/index.php?term=unto
http://www.etymonline.com/index.php?term=to
3.
3-1. 따라서, 지금까지의 설명에 따라, 마태오 복음서 25,40 및 25,45에서 "바로 나에게" 를, 예를 들어, "나에게까지" 로 대체하면, 신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피조물인,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강조가 그 정도를 넘어, 논리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동일하다는 주장까지 할 필요가 전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3-2. 그리고 혹시라도, 특정 지역의 언어로 번역된 성경의 본문에서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으며, 예를 들어, NAB(New American Bible)를 포함하는 다수의 영어본 성경들에서 이러한 문제의 발생을 원천적으로 제거하기 위하여, 마태오 복음서 25,40에 있는 해당 문장이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출처: http://old.usccb.org/nab/bible/matthew/matthew25.htm#v40 [옛 주소]
https://www.vatican.va/archive/ENG0839/__PVY.HTM [2023-11-25: 새 주소]
(발췌 시작)
'Amen, I say to you, whatever you did for one of these least brothers of mine, you did for me.'
(이상, 발췌 끝).
3-3. 더 나아가, 어떠한 경우에도, 어떤 수사학적 강조 자체는, 강조의 대상인 해당 자구의 자구적 의미(literal meaning)와 논리적으로 전적으로 무관하므로, 어떤 수사학적 강조 자체가 "동일하다는 주장까지의" 영성적 의미(spiritual sense)의 도출을 위한 논리적 근거가 결코 될 수 없음을 반드시 유념하도록 하십시오.
[내용 추가 일자: 2013년 12월 30일]
예를 들어, 이어지는 제3-4항을 잘 읽어 보십시오:
3-4. 다음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786항으로부터 발췌한 것입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015/__P28.HTM
(발췌 시작)
786 Finally, the People of God shares in the royal office of Christ. He exercises his kingship by drawing all men to himself through his death and Resurrection.211 Christ, King and Lord of the universe, made himself the servant of all, for he came "not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212 For the Christian, "to reign is to serve him," particularly when serving "the poor and the suffering, in whom the Church recognizes the image of her poor and suffering founder."213 The People of God fulfills its royal dignity by a life in keeping with its vocation to serve with Christ.
786 끝으로, 하느님의 백성은 그리스도의 왕직에 참여합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분 자신께로 모든 사람들을 끌어당김으로써 자신의 왕직을 행사하십니다. 우주의 왕이고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모든 이의 종으로 만드셨는데, 이는 그분께서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마태오 20,28).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에, "다스리는 것은 그분을 섬기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특히 "그들 안에서 교회가 자신의 가난하고 그리고 고통받는 창립자의 모습을 알아차리는(recognizes the image of), 가난한 자들과 고통받은 자들을 섬길 때"에 그러합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그리스도와 함께 섬기고자 하는 자신의 소명과의 일치 안에 있는 어떤 삶에 의하여 자신의, 왕으로서의, 품위를 구현합니다.
The sign of the cross makes kings of all those reborn in Christ and the anointing of the Holy Spirit consecrates them as priests, so that, apart from the particular service of our ministry, all spiritual and rational Christians are recognized as members of this royal race and sharers in Christ's priestly office. What, indeed, is as royal for a soul as to govern the body in obedience to God? and what is as priestly as to dedicate a pure conscience to the Lord and to offer the spotless offerings of devotion on the altar of the heart?214
(이상, 발췌 및 일부 단락의 우리말 번역 끝)
게시자 주 3-4: (번역 오류/미숙) 그런데, 바로 위의 우리말 번역문과 바로 아래의 번역문을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도록 하십시오. 아래의 번역문에서 파란 색칠을 한 부분 그 자체는 번역이 잘 되었지만, 그러나 전후 문맥이, 정확한 내용 전달에 장애가 있을 정도로, 깨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출처: http://www.albummania.co.kr/gallery/view.asp?seq=157803&path=110610121307&page=336
(발췌 시작)
786 끝으로 하느님의 백성은 그리스도의 왕직에 참여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모든 사람을 당신께 이끄심으로써 당신의 왕권을 행사하신다. 218) 왕이시며 우주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셨다. 그분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마태 20,28) .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다스리는 것이다.” 219) 교회는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자기 창립자의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습을 알아본다(recognizes the image of her poor and suffering founder).” 220) 하느님의 백성은 그리스도와 함께 봉사하는 이 소명에 따라 삶으로써‘ 왕의 품위’를 실현한다.
그리스도 안에 새로 태어난 이들은 모두 십자가의 표시로 왕이 되고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사제로 축성됩니다. 그래서 우리 직분의 특수한 봉사 직무 외에도, 영적이고 이성적인 모든
그리스도인이 왕다운 겨레와 사제직에 참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 속한
영혼이 자기 몸을 다스리는 것 이상으로 더 왕다운 것이 있겠습니까? 주님께 깨끗한
양심을 바치고 마음의 제대 위에서 신심의 티 없는 제물을 바치는 일보다 더 사제다운
일이 있겠습니까?`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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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 요한 12,32 참조.
219. 교회 헌장, 36항.
220. 교회 헌장, 8항.
221. 성 대 레오, 「설교집」 , 4, 1: CCL 138, 16-17(PL 54, 149).
[이상, 내용 추가 끝].
4.
4-1. The Great Biblical Commentary of Cornelius a Lapide (1567-1637년)에 주어진 마태오 복음서 25,40에 대한 해설 중에는 다음의 언급이 있습니다:
출처: http://www.corneliusbiblecommentary.faithweb.com/25matth.htm
(발췌 시작)
Well says S. Cyprian in his Treatise on Almsgiving, “What more could Christ declare unto us? How could He do more to provoke to works of justice and mercy, than by pronouncing that whatever is done to the poor and needy is done to Himself? That he who is not moved by the consideration of his brother in the Church may be moved at least by considering Christ. And that he who does not think of his fellow-servant in labour and need, may at least think of his Master, who stands in the place of him whom he despises.”
성 키프리아노(St. Cyprian of Carthage, 258년에 죽음)는 자신의 저술인 Treatise on Almsgiving 에서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well) 말합니다: "더 이상 무엇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선포하실 수가 있을까? 정의와 자비의 일(works of justice and mercy)들을 자극하여 행하게 하도록(provoke) 하기 위하여 당신께서, 가난한 자들과 곤궁한 자들에게(to) 행하여진 바 무엇이든지 당신 자신에게까지(to) 행하여진 것이라고 선포함으로써보다, 어떻게 더 많이 행하실 수 있을까? 교회 안에 있는 자신의 형제들에 대한 고려에 의하여 움직여지지 않는 바로 그자도 그리스도를 고려함으로써 적어도 움직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노동 중이고 곤궁한 상태에 있는 자신의 동료 봉사자들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는 바로 그자도, 그가 경멸하는 자의 자리에 서 계신(stands in place of him), 자신의 스승님(Master)에 대하여 적어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4-2. 다음은 마태오 복음서 25,31-46에 대한 NAB 주석의 앞부분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출처: http://old.usccb.org/nab/bible/matthew/matthew25.htm [옛 주소]
https://www.vatican.va/archive/ENG0839/__PVY.HTM [2023-11-25: 새 주소]
(발췌 시작)
[31-46] The conclusion of the discourse, which is peculiar to Matthew, portrays the final judgment that will accompany the parousia. Although often called a "parable," it is not really such, for the only parabolic elements are the depiction of the Son of Man as a shepherd and of the righteous and the wicked as sheep and goats respectively (Matthew 25:32-33). The criterion of judgment will be the deeds of mercy that have been done for the least of Jesus' brothers (Matthew 25:40). (이하 생략)
[31-46] 마태오 복음서에 고유한(peculiar) 이 담화의 결론은 예수 개림(the parousia)을 장차 수반 할 최후(the final judgment)의 심판을 묘사합니다(portrays). 비록 한 개의 "비유(parable)" 이라고 자주 불리기는 하나, 이것은 실제로 그러한 것이 아닌데, 이는 오로지 비유적 요소(parabolic elements)들이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을 한 명의 목자(a shepherd)로서 그리고 의로운 자(the righteous)들와 사악한 자(the wicked)들을 각각 양과 염소들로서 묘사하는 것(마태오 25,32-33)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심판의 기준은 장차 예수님의 형제들 중의 가장 작은 이를 위하여 이미 행하여진 자비의 행위(the deeds of mercy)들일 것입니다(will) (마태오 25,40). (이하 생략).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4-3. 다음은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가해-II" (출판사: 가톨릭출판사, 엮은이: 소순태), 그리스도 왕 대축일 복음 말씀(마태오 25,31-46)의 제35-36절에 대한 해설을 발췌한 것입니다. 제35-36절과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발췌 시작)
35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36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이 절들은 자비(mercy)가 신체에(corporal) 작용하는 일곱 개의 일들(즉, 자비의 일곱 개의 신체적 자선 행위들, the seven corporal works of mercy) 중에서 여섯 개를 나열한다: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게 마실 것을 주었고, 내게 입을 것을 주었고, 나를 따뜻이 맞아들였고, 나를 돌보아 주었고, 나를 방문하였다.(*) 한 개의 빠진 덕(virtue)은 죽은 자를 묻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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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예를 들어, 또한 자비의 일곱 개의 영적 자선 행위들도 나열되어 있는, 다음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CCCC)”의 제일 마지막을 보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va2005cccc.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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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끝).
4-4. 끝으로,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가해 그리스도 왕 대축일의 복음 말씀(마태오 25,31-46)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은 다음에 있습니다. 바로 위의 제4-3항에서 언급된 저서의 인터넷 각주로서 제공되고 있으며, 대단히 좋은 내용입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a_king.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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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업에 소요된 시간: 약7시간 (자료 조사 및 우리말 번역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