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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렬 신부님의 논문[제목: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덕골], 수원가톨릭대학교, 이성과 신앙, 제68호, 2020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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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31 ㅣ No.2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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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미 예수님!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수원가톨릭대학교, 이성과 신앙, 제68호, 2020년 여름호에 게제된 김학렬 신부님의 논문[제목: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덕골] 전문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성 김대건 신부님의 행적 전반에 대하여, 이 논문만큼 엄밀하게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증/입증하는 과정을 거쳐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는 논문은 여태까지 없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cb/2020_성_김대건_안드레아_신부와_한덕골_김학렬_신부.pdf <----- 필독 권고 

 

1. 위의 본문의 각주들 중에 안내된 인터넷 주소들로의 접속은, 다음에 발췌된 위 논문의 각주들에서, 손쉽게 할 수 있습니다:

 

(발췌 시작) 

9) 참조: 『일성록』 1839.08.07. 죄인 김제준의 진술. 59대 金從壽와 1864년 면천 출신 金秉植의 급제 등에 대하여, 아래 주소의 인물종합정보 참조: http://people.aks.ac.kr/index.aks.

 

15) 참조: 대한성교사기, 『보감』 1권 17호, 경향잡지, 1907, 136(이하 『보감』으로 표기하며, 보감 출처에 대하여서는 참조: http://zine.cbck.or.kr/newzine/view/ageview.asp.); 『순교사화』 제4권 4권, 12.

 

47) 『한국의 성지와 사적지』의 “당진 솔뫼 성지”의 글에서 김귀조의 후손들은 정읍 집안이라고 한다. 참조: http://www.paxkorea.kr/bbs/view.php?id=1001&category=3&no=389; 김판술, 『천진암성지 자료집』 96, 2003, 192.

 

52) 참조: 이석원, 『1834-1836년 여항덕 신부의 조선 대목구 사목 활동』, 한국교회사연구소, 2019, 각주 44에서, 모방 신부가 1836년 4월 4일에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부에게 보낸 서한(부산교회사연구소 제102회 학술발표회); “모방 신부 서한 5”, 최제구 신부 역, 『상교우서』 56호, 2017년 가을, 35-36. 모방 신부의 편지는 소순태의 2006번 글 참조: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06.htm.

 

60)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까지도 경교를 천주교로 이해하였다. 앵베르 주교도 심문에서, “조선에 입국한 까닭은 경교를 전하기 위함(出來朝鮮之由 則爲傳景敎)”이라고 대답한다. 경교에 관한 소순태의 문답 글을 참조: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846.htm.

 

109) 이승훈의 손자 이재의(1808-1868) 순교자는, 1845년에 김대건 안드레아 부제와 함께 배를 타고 중국 上海에 가서, 동료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 현석문, 최형, (이의창) 등, 모두 12명이 3개월이라는 긴 기간에 걸쳐 상해에 머물러 있었다. 프로테스탄트 목사들이 중국어로 된 성서 꾸러미를 들고 와서 건네주기도 하자, 김대건은 그들의 주장과 비방에 대해 반박을 하기까지 했다. 관련 문헌은 소순태의 1991과 1996번 글 참조: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96.htm.

 

상해에서 쓴(1845.06.04.자) 김대건 부제의 13번째와 14번째 서한 끝에서만 조선인(Coreanus) 김 안드레아라고 서명하는데, 朝鮮國(人)金安德(利亞)이라고 표현하는 성교요지 좌수본을 참조: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754-1785_이벽/성교요지_좌수_필사본.htm.

(이상, 발췌 끝)

 

2. 그리고 위 논문에 담긴 전반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서론 전문 발췌 시작)

서론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정기총회에서,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2020년 11월 29일부터 2021년 11월 27일까지를 한국 천주교회 희년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정작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에 관해 쓴 이제까지의 글을 읽어보면, 많은 오류가 섞여 있어, 독자들이 혼란을 일으키게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세히 읽을수록 오히려 더많은 혼란을 일으키게 되고, 김대건 신부와 그 가족들의 관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만든다. 족보에 기록된 보명과 자, 아명과 초명 등이 일관성 없이 서술되기 때문이다.

 

          아날로그 시대에 쓴 김구정 선생의 『성웅 김대건전』(1961)이라는 글을, 디지털 시대에 와서도 교회사학자들이 사실을 확인하지 않은채, 선생의 이른바 소설식으로 기술한 오류를 반복한 나머지, 가톨릭 대사전의 김대건 항목에서도 오류가 그대로 답습되었다.1) 근거 자료를 제대로 찾아내어 분석하고 확인하지 않음으로써, 김구정 선생의 글 가운데 어떤 것이 사실이고 어떤 것이 꾸밈(Fiction)인지를 구별해 내지 못하였다.

 

          따라서 연구자들의 이와 같은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하여, 김대건 신부와 그 집안에 관한 근거 자료를 명확히 제시하고 종합 분석함으로써, 근거 없이 기술된 속설을 이 글에서 새롭게 바로잡고자 한다. 복잡한 족보를 큰 종이 한 장에 그려놓고, 보명, 아명, 초명, 자, 호, 세례명, 출생과 사망년도 등을 표기하여, 알아보기 쉽게 정리하고자 한다. 사실이 왜곡된 내용에 대하여서는 여기서 진실을 밝혀 정리하나, 역관 유진길(奧斯定) 성인이 1830년 10월에 제시한 육로입국방법의 활용과 마카오 유학 시기를 포함하는 ‘김대건 년보’ 등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로 정리할 계획이다. 논문의 제목처럼, 김대건 신부의 가문과 한덕골 생활을 중심으로 연구하며, 유학 시기의 자세한 상황, 순교와 이장 부분, 은이 성지에 관련된 내용은 기존의 연구된 글들로 대신하고자 한다.

 

          본 논문은 엄밀한 실증적인 고증을 통하여, 위에서 이미 지적한 왜곡된 역사적 사실들을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하성래 교수의 2004년 논문2)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던 상태에서의 글이었다. 따라서 독자적 및 독립적으로 수행된 본 논문의 연구 결과, 하성래의 논문에서 제시된 몇 가지 유의미한 의문점들과 그 답변들과 관련하여, (i) 일부 미진한 기술들의 경우에는 그 내용을 보강하였고, (ii) 일부 추정/결론들의 경우에는 교회사학적으로 실체적 진실에 더 가까운 새로운 결론들을 도출하였다. 그리고 특히 (iii) 1845년 여름 석 달 동안 김대건 부제/신부와 11명 평신도들의 중국 상해 지역 방문에 대한 더 자세한 기술을 담은 유관 사료들 등, 다수의 유관 사료들 사이에 존재하는 유의미한 관계들을 찾아내어, 시계열(時系列)적으로 구체적으로 적시(摘示)함으로써, 이미 입증된 교회사학적 사실들에 부합하는 범위 내에서, 김대건 신부의 생전 활동 반경의 폭을 체계적 및 종합적으로 확장하는 등, 현재까지 알려진 성 김대건 신부 일대기의 핵심 내용들을 보강하고자 하였다.

 

          제한된 지면 관계로, 본 논문에서는 근거 자료를 바로 제시하지 못하고 각주로 처리하는 대신, 제시된 근거 자료 원문을 찾아볼 수 있도록 인터넷 주소를 달아놓았으니,(『보감』, 『경향잡지』, 서한 원문 등) 수고하여 찾아서 참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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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조: 김구정, 『성웅 김대건전』, 경향잡지사, 1961, 1163.

2) 하성래, “성 김대건 신부와 굴암 및 은이”, 『교회사 연구』, 제23집,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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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끝)

 

3. 특히, 위의 제1항에 발췌된 각주 109)에 안내된 첫 번째 주소, 즉,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필자의 졸글/논문들[제1991번 글 제목: 세 번(1863, 1897, 1910년)에 걸쳐 중국 상해에서 마틴Martin에 의하여 출판된 책 The Analytical Reader의 본문들의 비교분석과 그 결과들; 제1996번 글 제목: 성교요지의 외유(外遊)(중국, 미국 등)의 실증적 증거(positive evidences)들]이, 사실은, 위의 제2항에서 언급된 선교/전교/복음화 관련 "김대건 신부의 생전 활동 반경의 폭"을 중국 본토 및 미국 등에까지 대폭 확장하고 있음을 다루고 있음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91.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96.htm <----- 필독 권고

 

4. 다른 한편으로,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김대건 신부님의 복사였던 이의창의 세례명이 결코, 라틴어 세례명 "Venantius"의 우리말 직역 음역 음값인, "베난시오"일 수가 없음을 엄밀하게 실증적으로(positively) 입증/고증하는 필자의 졸글/논문[제목: 성 김대건 신부 등의 복사였던 이의창李宜敞의 영세명/세례명은 라틴어 이름 Venantius의 직역 음역인 베난시오 일 수가 없었다; 최초 게시일자: 2020-04-01]을 읽을 수 있는데, 특히,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사 연구자들의 필독을 권고드리고 또 요청합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39.htm <----- 필독 권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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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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