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사동성당 게시판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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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 [zizibe76] 쪽지 캡슐

2002-07-23 ㅣ No.10239

먼지가 뽀얀 밭길을 따라

몸집이 작은 여자가 오고 있었다.

꽤 나이가 들어 보였지만

걸음걸이는 가벼웠고 순진무구한 소녀처럼

신선한 광채가 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길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형상이

곁에까지 온 여자는 멈춰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길가 먼지 속에 앉아 있는 존재는

거의 형체가 없는 듯이 보였다.

인간의 윤곽을 지닌

회색 플란넬 덮게 이불이 생각났다.

작은 여자는 몸을 살짝 굽히고 물었다.

 

"당신은 누구세요?"

생기라곤 찾기 어려운 두눈이

피곤한 듯 올려다보았다.

 

"저요? 저는 [슬픔]이에요."

목이 메이는 듯 띄음띄음 말했다.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낮은 소리였다.

 

"아하, 슬픔!"

작은 여자는 오랜 친구라도 만난 듯이 기뻐 소리쳤다.

 

"저를 알고 계신가요?"

슬픔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되물었다.

 

"물론 알고 말고요! 종종 내 길동무를 해주지 않았나요?"

 

"음. 그렇지만..."

슬픔은 의심이 가는 듯 물었다.

 

"그런데 왜 내게서 도망치지 않지요?

 겁나지 않아요?"

 

"왜 내가 당신으로부터 도망쳐야 하지요?

 도망쳐도 소용이 없다는 걸

 당신 자신도 잘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대체 왜 그렇게 힘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거죠?"

 

"나... 나는 슬퍼요."

잿빛 형체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몸집이 작은 여자가 [슬픔]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슬프시다고요?

 무엇 때문에 그렇게 괴로워하는지

 내게 말해 보세요."

이렇게 말하며

그녀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슬픔]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는 정말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만난 것일까?

얼마나 바라고 바라던 일인가?

 

"아! 그런데..."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망설이는 [슬픔]은 무척 당혹스럽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건...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사람들에게 다가가 얼마간 그들과 함께 머물러야 하는 것이

나의 운명이에요.

그런데 내가 다가가기만 해도,

사람들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는 거예요.

사람들은 나를 두려워하고,

내가 무슨 병균이라도 되는 듯이 피하지요."

[슬픔]은 흐느껴 울었다.

 

"사람들은 내가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주문까지 만들었어요.

 [파페르라팝!]하고 주문을 외면

 다시 즐거워지는 거예요.

 그렇지만 그건 거짓된 웃음이어서

 위경련이나 호흡곤란을

 일으키곤 하지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지요.

 강한 사람이 복을 받는다!

 그렇지만 그러고 나서 가슴앓이를 하지요.

 또 사람들은 [긴장을 하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고

 말하고 나서는 어깨나 등에 통증을 느끼지요.

 그리고 허약한 사람이나 우는 법이라고 생각해요.

 사실은 다들 가득 차오른 눈물때문에

 머리가 터질 지경이면서요.

 [슬픔]을 느낄 수 없도록 술이나 마약으로

 자신을 마비시키는 사람들도 있고요."

 

"아하, 그 때문이군요. 나도 그런 사람들을 알아요"

나이든 여자가 맞장구를 쳤다.

 

[슬픔]은 조금 더 무너져내렸다.

"그렇지만 난 그저 사람들을 도우려 할뿐이에요.

 내가 그들 가까이 다가가야 그들은 자신을 만날 수 있어요.

 나는 그들이 자신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도록

 보금자리를 짓게 돕지요.

 슬퍼하는 사람은 특히 피부가 아주 얇아요.

 제대로 치유되지 않은 상처처럼 다시 불거져나오는

 고통도 꽤 있어요.

 그럴 때는 무척 아프지요.

 슬픔을 허락하고

 참았던 눈물을 흘리는 사람만이

 상처를 제대로 치료할 수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상처를

 제대로 치료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조금도 허락하지 않아요.

 그 대신 상처 위에 진한 웃음을

 덧칠하는 거예요.

 냉소로 된 두꺼운 갑옷을 입는 사람들도 있고요."

이제 [슬픔]은 말을 멈췄다.

 

[슬픔]의 흐느낌이

조금 잦아드는가 싶더니,

점점 더 커졌고

결국에는 절망적인 흐느낌으로 변했다.

 

몸집이 작고,

나이가 든 여자는 조그맣게 오그라든

[슬픔]을 위로하듯 품에 안았다.

 

매우 연약하고 부드러운 촉감이

전해져 오는 것을 느끼며,

여자는 떨고 있는 [슬픔]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마음껏 우세요."

그녀는 사랑스런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였다.

 

"푹 쉬세요. 그러면 다시 힘이 생길 거예요.

그리고 이제부터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내가 당신과 함께 다닐 거예요.

비겁함이 더 이상 날뛰지 못하도록 할 거예요."

[슬픔]은 울음을 그치고

몸을 곧추세우더니,

놀란 눈으로 새로운 반려자를 보았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대체 당신은 누구세요?"

 

"나요? 나는 희망이에요."

몸집이 작은, 나이 든 여자가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린 소녀처럼 근심 걱정을 모르는 환한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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