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리성당 장년게시판

한국의 103위 순교자(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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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jenya] 쪽지 캡슐

2000-09-16 ㅣ No.1987

 

20. 이매임 데레사, 부인(李梅任, 1787-1839), 참수

 

이매임 데레사는 어느 양반 집에서 태어났고, 순교자인 이영희 막달레나와 이정희 바르바라의 고모이다. 외인 시절에 결혼하나 이매임은 스무살에 과부가 되어 친정으로 돌아왔을 때, 같은 동리의 한 여교우로부터 성교회를 알고 입교하였는데, 이때부터 집안 식구들에게도 열심히 전교하였다. 그리하여 이영희 막달레나의 어머니가 우선 입교하였고, 또한 어머니는 딸들을 입교시키게 되었다. 이매임은 판공성사 때가 오면 올케 허계임과 함께 상경하여 성사를 보곤하였다. 기해년에 들어서자 박해가 크게 일어났는데, 이 때 남평혁, 이광헌 등의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되자, 함께 모였던 김성임, 김루치아, 허막달레나, 이막달레나, 이바르바라 등 6명이 천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로 하고 자수를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4월 11일에 그들은 자수하였으나 포졸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포장은 기가 막혀서 이와같이 물었다. "너희들은 천주교 도리가 옳은 것이라고 믿느냐?" "물론입니다. 만약 거기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의심을 가졌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지 아니할 것입니다." "배교하고 천주교 책을 바쳐라." "차라리 죽을지언정 배교는 못하겠습니다." 여기서 주리 4차례를 당하여도 굴복하지 않으므로 포청으로 보냈다. 5일 후 포장이 다시 불러 내어 "너희들이 당한 형벌과 옥중의 무서움이 너희들의 혼미함을 깨우치지 못하였을까? "저희들더러 배교하라고 권하시는 것은 시간을 허비하시는 것뿐입니다. 저희들이 자수를 한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함인데 그를 배반하라고 하신단 말씀입니까? 아니올시다. 참된 교우는 천주를 위하여 살고 천주를 위하여 죽는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나라법이 저희들을 사형에 처한다면 즐겨 죽겠습니다. 그러나 저희교를 배반한다는 것은 절대로 안될 말입니다. 이리하여 형조로 이송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1839년 7월 20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치명하니, 그의 나이는 52세였다.

 

 

 

 

21. 김장금 안나, 과부(金長金, 1789-1939),참수

 

김장금 안나는 서울 출신이며, 교우 집안에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했다. 중년에 이르러 과부가 된 후로는 늙은 친정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어머니에게 지극한 정성으로 효도하였다. 어머니는 다행히 신부 입국하는데까지 살아서 성사를 타당하게 받고 선종하였다고 한다. 김장금은 이광렬 요한의 집결에 살았는데 두 집안이 화목하기로 한 집안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그러한 관계로 그 해 4월 7일, 이광렬과 같이 체포되어 문초와 고문도 같이 받았다가, 형조로 옮겨져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녀는 옥에 있은 지 석달만인 7월 20일에 서소문 밖에서 참수치명하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51세였다.

 

 

 

 

 

22. 이영희 막달레나, 동정(李英喜 1809-1839), 참수

 

이영희 막달레나는 시흥군 봉천리에 살던 가난한 양반 집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허막달레나와 언니 이바르바라와 고모 이데레사는 모두 열심한 신자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완고한 외교인이라 부친 몰래 신앙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장성하자, 아버지는 딸을 출가시키려고 하였고, 막달레나는 동정을 지킬 것을 결심하였기 때문에 집을 떠나기로 작정한 것이다. 집에는 젊은 여신자 한 사람이 하인으로 있었는데 어느날 저녁, 막달레나는 자신의 결심을 알린 후, "여기서 서울까지는 30리 길이고, 나는 길을 모르지만 아버지가 내일 서울로 가실테니, 네가 그 뒤를 잘 따라가 자취를 잃어 버리지 않도록 해라. 그러면 나는 또 네 뒤를 따라가겠다"고 말하였다. 집은 숲이 우거진 산 가운데에 있었으므로 막달레나는 숲 가운데로 뚫고 들어가 고의적으로 몸에 몇 군데 상처를 내어 옷에 피를 묻힌 다음 옷을 찢어서 여기저기 흩어놓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이리하여 하녀와 막달레나는 계획대로 부친의 뒤를 따라 고모인 이데레사의 집으로 갔다. 딸이 범에게 잡아 먹힌 줄 알고 실의에 빠진 아버지는 눈물로 세월을 보내다가, 아내로부터 막달레나가 살아있다는 말을 듣고 서울로 달려가 딸이 무사한 것을 보고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이제는 너 하고 싶은데로 하라"고 말하면서 그녀가 서울에 머무르며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게 하였다고 한다. 막달레나는 고모인 이 데레사와 다른 여교우들과 함께 살면서 성교회의 교리를 지키고, 박해를 만나면 끝까지 항구하자고 서로 위로 격려하며 지내던 중,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원의가 간절하여, 마침내 1839년 4월 11일에 포졸들에게 가서 자수하였다. 닷새 후에 포장이 "이제는 옥의 괴로움을 맛보았으니 생각을 바로 돌렸느냐?"고 물으며 배교하기를 독촉하자, 막달레나는 "만일 천주님을 배반하고 우리 교를 버릴 생각이었다면 스스로 자수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포장님 앞에서 제가 어떻게 오늘은 이렇게 말하고, 내일은 저렿게 말하겠습니까. 저의 결심은 변함이 없으니 나라 법대로 죽여 주십시오"라고 대답하였던 것이다. 막달레는 주리를 틀리고 곤장을 맞고 여러 번 문초를 당하였으나 조금도 마음이 흘들리지 않고 용감히 참아 받았다. 이리하여 막달레나는 형조로 이송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녀는 1839년 7월 20일에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하여 순교하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3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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