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재울성당 게시판

9월 순교자 성월을 맞이하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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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유선 [yu1214] 쪽지 캡슐

2000-09-05 ㅣ No.1350

9월은 순교자 성월 입니다.

 

저를 포함한 일반 신자들이 우리나라 103위 순교자에 대하여

 

너무 모르는 것이 아닌가 하여 103분에 대한 내용을 올려볼까 합니다.

 

그저 옛날 이야기 읽어보신다고 생각하고 그분들의 뜻을 다시 새겨 봄도 좋을 듯합니다.

 

아무래도 사무실에서 일하다 보면 일반적이 교리 상식이나~

 

성인에 대한 지식도 필요할 때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세례명에 대하여 문의할 때도

 

우리나라 성인의 이름을 추천해 주는 것도 좋겠지요?

 

(발췌: 계성출판사, 1987, 가톨릭성인사전)

 

 

 

1.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金大建, 1821-1846),  군문효수

 

 

 

2. 정하상 바울로, 신학생(丁夏祥, 1795-1839), 참수

 

 

 

정하상 바울로는 남인 양반의 후예로 경기도 양근 지방 마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정씨 가문에서 최초로 신앙을 받아들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이며, 1801년에 그의 맏아들 정철상 가롤로와 함께 순교하였고, 어머니 유체칠리아는 1839년 11월에 순교하였던 것이다. 아버지가 순교할 때에 그는 겨우 일곱 살로 그의 모친과 누이 정 엘리사벳과 풀려났다. 그러나 가산이 모두 몰수당하자 살길이 막연하여 경기도 양근 마재에 있던 그의 숙부인 정약용 요한에게 의지하고 살았다. 그러나 숙부가 전라도 강진에 귀양가 있던 때엿음으로 외교인 친척들로부터 천대와 냉대를 받았지만, 바울로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기도와 교리를 배웠다. 그러나 외교인들 틈 바구니 속에서 신자의 본분을 지키기가 어려워 20세 때에 서울로 올라와 조증이 바르바라의 집에 머물면서 목자없는 조션교외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교회 재건을 모색하였다. 그는 함경도에 귀양가 있던 한학자 고동섬 유스티아노에게서 한문을 배우고, 자신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양반 신분을 감추고 어떤 역관의 집에 하인으로 들어가 살다 북경에 가서 성세와 견진과 성체를 받고 주교에게 성직자 한분을 요청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실망하지 앟고 계속해서 북경까지 9회, 변문까지는 11회나 왕래하였다. 그는 유진길, 조신철 그리고 강진에 유배 가있는 삼촌 정약용의 자문과 후원으로 끊임없이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들은 로마 교화에게 탄원서를 보내는 한편, 북경 주교에게도 서신 등을 보냄으로써, 마침내 조선교회가 빠리 외방전교회에 위임되고, 동시에 조선 독립교구가 설정됐던 것이다. 마침내 그는 우방제 신부를 모셔들이고, 모방, 샤스땅 신부와 앵베르 범 주교까지 모셔들여 자신의 집에 모셨다. 앵베르주교는 바울로가 사제가 되기에 적당하다고 여겨 라틴어와 시학을 가르치던 중, 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주교를 피신시키고 순교의 때를 기다렸던 것이다. 이 때 그는 체포될 경우를 대비하여 상재상서를 작성했는데, 이것은 조선 최초의 호교론이다. 그는 이 속에 박해의 부당성을 뛰어난 문장으로 논박했기 때문에 조정에서까지 이 글에 대하여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1839년 7월 11일, 포졸들이 바울로의 집에 달려들어 그와 노모 그리고 누이를 잡아 포도청에 압송하여 바울로와 4대 조상까지의 이름을 면부에 올리고 옥에 가두었다. 이튿날 상재상서를 포장대리에게 주니 사흘 후 문초를 시작하였다. 바울로는 무서운 고통을 강인하게 참아 나갔고 배교하라고 엄명 하였으나 거절하자 옥에 가두었다. 며칠 뒤에 다시 끌려나와 톱질형을 받아 살이 떨어져 나가고 골수와 피가 쏟아져 나왔다. 또한 샤스땅과 모방 신부의 은신처를 대라고 했으나 입을 열지 않고, 그 후 두 신부가 자수한 다음 또 심문을 받고 세 차례의 고문을 받았다. 이리하여 1839년 9월 22일, 서양신을 나라에 끌어들인 모반죄와 부도의 죄명으로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니,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3. 이호영 베드로, 회장(李호영 1802-1838), 옥사

 

 

 

이호영베드로는 경기도 이천땅 구월에서 가난한 시골 양반의 자제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친을 여읜 후, 모친과 누이 아가타와 함게 서울 한강 북쪽 문막이라는 곳에서 살 때, 유방제 신부를 만났다. 신부는 그의 충실성을 보고 아직 젊은 그를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말과 행동에서 절제가 있었고, 여러 교우와 외교인을 항상 권면하여 자기으 직분을 성실히 수행하던 중, 하루는 과거 보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왕의 총신과 아는 사이가 되어 급제를 하게 된 꿈을 생각하며 순교를 예감하였다는 것이다. 1835년 2월 어느 날, 베드로와 그의 누이 아나타는 붙잡혀 옥에 갇혔다. 그는 수없이 심문과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포기 하지 않았다. 재판관이 "만일 네가 말로 천주를 배반하기가 싫거든 커다란 글자 하나를 써줄 터이니 거기에다 점 하나만 찍든지 침을 뱉든지 하면 배교하는 표로 인정하고 너를 놓아주겠다"고 하였으나, 그는 "만 번 죽어도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단호히 말하였다. 이리하여 베드로는 사교를 믿는다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나는 칼 밑에 치명하기가 원이었다. 그러나 천주의 명령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고 하였던 것이다. 4년 동안이나 옥중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갖은 고문과 병고를 잘 참나냈고, 항상 대재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양순한 표양이 외면에 드러나니 옥졸들조차 칭찬하였다고 한다. 이윽고 그는 옥중에서 병으로 순교하니, 때는 1838년 11월 25일이요, 그의 나이는 3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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