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동성당 게시판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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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민 [h-mingo] 쪽지 캡슐

1999-10-13 ㅣ No.484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기’는 책 제목이에요.

방송작가 김미라씨가 KBS라디오의 ’노래의 날개 위에’라는 방송 에세이에 썼던 글을 엮어 책으로 만든 것이지요.

제가 오래 전부터 방송으로만 듣다가 책을 빌렸거든요. 그래서 그 글들을 올리려고 합니다.

아무래도 저는 많이 배울 것 같습니다. 이 분의 글에서.......

그리구요. 이 책의 앞머리에 김미라씨가 이런 말씀을 하셨더군요.

"제가 존경하는 분께서, ’책이란 나는 이만큼 할 수 있다고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겨우 이 정도 밖에 하지 못한다고 고백하는 것’이러고 말씀해 주신 것에 힘입어서 두번째 책을 세상에 보낼 수 있었습니다."라구요..

 

이제 여러분께 글 올립니다.

 

 

사랑 때문에 행복했습니다.

 

 그 여자는 서점을 둘러보고 나오다가 아직도 우리 주변에 가장 흔한 단어도 사랑이고, 가장 귀한 단어도 역시 ’사랑’이라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사랑이란 너무 낡고 낡은 단어가 되었지만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그 단어를 대체할 다른 단어를 찾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도 서점의 많은 책들은 사랑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거나, 혹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사랑이라는 단어로 가득한 서점을 나서면서 그 여자는 한 남자를 떠올렸습니다. 그 여자가 사랑했던 남자가 아니라 그 여자의 친구를 사랑했던 한 남자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던 것이지요.

 

 

   학창시절, 그 여자와 가장 친했던 친구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니, 친구를 사랑한 남자가 있었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 되겠지요. 그 남자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는 집의 맏이인, 기댈 곳 없는 남자였습니다. 첼로를 전공하는 친구는 부잣집 딸이었고, 아직은 겉으로 보기에 멋진 사람, 겉으로 보기에 멋진 조건을 가진 남자에게 마음이 끌리던 여대생이었습니다. 그 남자는 친구가 첼로를 켜는 모습을 보면서, 머리카락을 나풀거리며 스쳐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가끔은 첼로 대신 책을 들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친구를 무척이나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난의 티가 줄줄 흐르는 그 남자를 친구는 그다지 사랑하지 안았던 것 같습니다. 때때로 만나고 차도 마셨지만, 친구는 말쑥한 다른 남학생들가 팔장을 끼고 그 남자의 곁을 지나가기도 했으니까요.

  친구는 음대 대학원으로 진학했고 결국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 남자는 대학을 졸업하고 건설회사에 취직을 했습니다. 그렇게 한 남자의 애틋한 사랑은 엇갈린 채로 막을 내리는 듯 했습니다. 그저 깊이 사랑한 남자와 그 사랑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엇갈린 연애로 끝났다고 그 여자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83년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뜻밖에도 친구를 사랑했던 남자가 그 여자를 찾아왔습니다. 회사 지하에 있는 커피숍에서 만난 남자는 그 여자에게 흰 봉투를 하나 내밀었습니다. 그 안에는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액수였던 20만원이 들어있었지요. 봉투와 그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는 그 여자에게 남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돈을 가지고 있다가 그 사람이 대학원 졸업연주회를 할 때 드레스를 맞추는데 써주세요. 부족할 지도 모르지만 그저 내 마음이니 내가 주었다고 하지 말고 그 사람 드레스 준비하는데 보태주세요."

  그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떠났습니다.

봉투를 받아들고 돌아온 그 여자는 한동안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봉투 속에 담겨진 남자의 마음을 헤아려 보면서, 그토록 한 여자에게 마음으로 헌신적인 그 남자가 안스럽고도 아름다워서 눈물이 솟았습니다.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가난하고 어려운 여건 때문에 자신의 사랑을 거부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아직도 그렇게 지순한 마음으로 사랑했던 여자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눈물겨웠습니다. 한 가족의 생계를 떠맡아야 하는 가난한 남자가 막막한 사막으로 떠나면서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 그러나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어있는 여자를 위해서 드러나지 않게 표시했던 그 마음이 헤아려져서 울었습니다.

  그러나 그 돈은 드레스를 맞추는 일에 쓰여지지 못했습니다.

친구의 남편이 드레스를 이미 맞추어 주었는데 거이에 그 남자의 돈을 보태는 것이 어쩐지 망설여졌기 때문이었지요. 그 남자가 남기고 간 돈은 대신 훨씬 뒤에 쓰여졌습니다.

  남편과의 사이가 원만치 않았고, 결국은 아이들과 나와서 자립을 해야했던 친구가 경제적인 어려움을 처음 겪던 무렵이었습니다.

친구는 그 여자를 찾아왔지요.

  "순위고사를 봐야겠는데 학원비마저도 막막하다."

  친구가 한숨을 쉬면서 그렇게 말했을 때, 그 여자는 그제서야 오래 전에 받았던 봉투를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봉투 하나를 더 내놓았지요. 놀란 얼굴로 바라보는 친구를 향해 그 여자가 말했습니다.

  "학원 등록비로 써. 절대로 갚을 필요도 없는 돈이야. 전부터 너를 위해서 쓰려고 준비해 둔 돈이었어. 흰 봉투 속의 돈은 원금이고, 그 옆의 봉투 속 돈은 이자라고 생각하면 돼. 그리구 말이야. 네가 꼭 잊지 말아야할 것이 있어. 너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라는 사실을 잊지마."

  15년 전에 받아둔 돈을 그제서야 내놓으면서 그 여자는 비로소 홀가분한 마음이 되었었지요. 남자가 주고 간 봉투 곁에 놓인 또 하나의 봉투는 물론 그 여자가 친구를 위해서 준비한 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것을 친구를 위해서 자기가 준비한 돈이 아니라, 그 남자의 사랑이 만든 이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남자의 돈을 맡아둔 동안 그 여자의 마음 안에서 자란 사람에 대한 신뢰, 사랑에 대한 믿음이 만든 이자라고 말이지요.

  결국 끝까지 그 여자는 친구에게 그 돈의 내력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래 전에, 오직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맡겨두고 간 한 남자의 눈물겨운 사랑이 거기 담겨 있다고 말하지 않났습니다. 그것이 그 나자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지요. 친구는 그 돈으로 학원에 등록을 했고, 단 한 번에 순위고사에 합격했고, 그리고 이듬해 봄에는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재기하는데 쓰였던 그 학원비가 오래 전에 자신을 그토록 사랑했던 남자가 졸업연주 드레스를 위해서 남겨두고 간 아픈 사랑의 마음이라는 것을 모르는 채로 말이지요. 비록 그 남자가 뜻하던 대로 친구의 영광스럽고 화려한 순간을 위해서 그 돈이 쓰여지지는 못했지만, 오히려 어려운 시기에 잭기하는데 그 돈이 쓰인 것을 그 남자는 더 기뻐하리라고 그 여자는 생각했습니다.

 

  그 남자를 떠올려보는 동안 한동안 잊고 있던 ’사랑’이라는 단어가 그 여자의 가슴 안에서 되살아나고 뚜벅뚜벅 걸어와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것 같았습니다. 눈물 어린 눈으로 자신을 찾아와서, 한때 사랑했던 여자의 드레스를 맞추는 일에 쓰라고 봉투를 맡기고 간 남자. 그 남자의 사랑법을 떠올리면서 그 여자는 문득 잊고 산 것이 너무 많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 이제는 너무 낡고 흔해진 이름이지만 여전히 그 말을 대체할 다른 이름을 찾지 못한 ’사랑’은 지금 이 지상의 어느 곳에 피곤한 몸을 누이고 있을까. 우리들에게 ’정다운 고통’인 사랑은 어디에서 차가운 바람을 피하고 비를 피하고 있을까.... 집으로 오면서 그 여자는 그런 생각들을 해보고 있었습니다. ’사랑 때문에 괴로웠습니다.’하고 써둔 시인의 마음이 절절히 이해되는 것처럼, 오늘은 ’사랑 때문에 행복했습니다.’라는 말도 절절히 이해가 되는 오후였습니다.

 

 

 

여기까지구요. (좀 길었지요?) 여러분 우리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평화의 기도를 읽을 때의 느낌처럼 우리..........그저 아름다운 기도로 생각하지 말고 실천할 수 있는 그런 여유와 용기를 갖고 살아요.

모두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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