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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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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희 [shl1980] 쪽지 캡슐

1999-10-16 ㅣ No.497

<아빠의 일기장>

 

 아빠는 환경미화원이셨다. 새벽1시,가족 들이 깰까 봐 조심스럽게 나가시는 아빠의 구부정한 어깨를 몰래 지켜볼 때면 나는 ’하필이면 왜 쓰레기 치우는 일을 하실까’ 하며 내심 아빠를 원망했다. 등교길에 혹시나 쓰레기를 치우고 있는 아빠를 만날까봐 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걷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빠는 몸이 자꾸만 야위어 병원을 찾았는데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진단을 받았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당신의 얼굴을 보기 싫어했던지 더 이상 거울 앞에 서지 않는 아빠를 보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소리 없이 울었다. 그리고 날마다 ’제발! 오늘 하루만 더’ 를 수없이 하나님께 기도 드렸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아빠의 50번째 생신날, 언제나 작업복에 운동화 차림이셨던 아빠에게 나는 처음으로 예쁜 꽃무늬 넥타이를 선물했고, 엄마는 검정색 구두를 선물했다. 그리고 친구에게서 빌려 온 사진기로 침대에 힘들게 걸터얹은 아빠의 팔장을 끼고 애써 웃음 지으며 사진을 찍었다. 한 달 뒤에 있을 내 졸업식에 아빠가 꼭 그 넥타이를 메고, 새 구두를 신고 참석하실 수 있기를 바라며. 그러나 2월 어느 날, 내 졸업식을 앞두고 아빠는 결국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신사복 차림의 멋쟁이 아빠와 함께 교문을 힘차게 걸어나오고 싶었는데. 서러움에 복받쳐 나는 울고 또 울었다. 아빠는 마치 이별을 예감하신 것 처럼 떠나기 며칠 전에 내게 아빠의 일상과 가족에 대한 걱정이 잔잔하게 적힌 일기장을 건제주셨다. 아빠를 떠나보낸 뒤 우리는 많은 아픔을 겪었지만 다시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살고 있다. 엄마는 지금 시장에서 작은 야채 가게를 하신다. 바구니에 담긴 푸른 야채들처럼 엄마와 내 앞에 놓인 시간도 푸르리라 믿는다. 나는 가끔 아빠가 그리워질 때면 아빠가 남긴 일기장과 수첩 속에 끼워 둔 그날의 사진을 꺼내 본다. 사진 속의 아빠는 여전히 나를 보며 환하게 웃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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