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십리성당 게시판

이 가을 밤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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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하 [domini0727] 쪽지 캡슐

2005-09-08 ㅣ No.3578

몇해 전에 저희 지역신문과 문학지 그리고 졸작 "진실한 바보가 그립다"라는 책에 싣고자 쓴 글인데 읽어주세요. 컴에 소장돼 있어서 올려봅니다.

가을 밤, 도드라의 스베니루, 가녀린 바이올린 선율을 곁들여서.....    

 

 

이 가을 밤에


 이 가을 밤 당신의 침실은 어떻습니까? 보일러를 켜긴 아직 이르잖아요.

 이불 곁에 사랑하는 이 있어 따뜻함이 남아 있다면 좋으련만.....

 섬돌 가에 귀뚜라미 소리는 밤이 깊을수록 높아가고

 창 틈으로 스며드는 허허로운 냉기로

 이 밤 혼자 잠들기엔 너무 적적하지 않습니까?

 정 그러시다면 촛불을 켜 보세요.

 초 녹이 흘러내리면 눈물이라 생각하셔요.

 이제 쯤 잊혀져도 좋을 사람이

 지금 쯤 잊었노라 생각했던 사람이

 이 밤에 불현듯이 떠오르거든

 그를 위해 기도하셔요.


 가을엔 고독해야 합니다.

 가슴이 시리도록 고독해야 합니다.

 노란 은행잎이 내려앉은 거리를

 넓다란 플라타너스 잎이 바람에 뒹구는 거리를

 당신 혼자서 걸어 봐야 합니다.

 그러면서 살아온 날,  걸어온 길,

 헉헉거리며 뛰어 온 길을

 다시 한번 뒤돌아보는

 조용한 시간을 가져 보십시오.


 얼마나 후회가 많습니까?

 얼마나 실수가 많았습니까?

 얼마나 허물이 많았습니까?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내가 있지 못했고

 내가 없어야 할 자리에 내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까?

 남 앞에 내 이름을 세우려 하고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지는 않았습니까?

 가진 것 있다고 으스대고

 가진 것 없다고 남을 깔보지는 않았습니까?

 남에게는 손가락질을 하면서

 나 자신을 탓하는 데는 인색하지 않았습니까?


 이 밤, 당신의 침실에

 혹 남쪽으로 향한 창이 있거든

 촛불을 끄고 달빛을 방안으로 맞아 들이십시요.

 비록 햇볕처럼 따사롭진 못해도

 당신은 우주의 빛을 안을 테지요.

 달빛을 안고 거울을 보셔요.

 거울 속에 비친 당신과 마주 하셔요.

 거울 속의 당신과 눈을 맞추고

 “××야 너 지금 무얼 하고 있느냐?” 물어 보셔요.

 거울은 외모만 비추는 게 아니랍니다.

 이 세상 살아가며 당신께서 뭔가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때 있거든

 이 세상 살아가다 뭔가 양심에 걸리는 일 있거든

 거울 속의 당신과

 “××야, 너 지금 무얼 하고 있느냐?” 하며 상의하여 보셔요.

 아무리 잘 살아도 삶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程子께서 이르시기를 「有過中 求無過」라

 허물 있음에도 허물없음을 구하는 것이 인간이라 하였습니다.

 허물 있음을 창피스럽게 여기거나 부끄러이 생각지 마십시오.

 과감히 내게 허물 있음을, 내가 부족함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조건 많이만 가지려 말고 쪼개고 나눔으로써 당신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가을처럼 짧은 것입니다.

 봄이 오면 마른 가지에 새잎은 돋아나지만

 우리의 생은 한번 가면 다시 오지 않습니다.

 거지 시인 천상병 님은 인생은 소풍이라 하였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하였습니다.

 이 가을 밤 당신의 외로움을 만끽하소서.

 이 가을 밤 당신의 작음을 깨달으소서.

 이 가을 밤 당신의 부족함을 인식하소서.

 그리하여 진정 후회하지 않는 풍요로운 가을을 얻으소서.

 오늘 밤 당신의 침실에

 달빛이 비추이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2001년 9월 25일 권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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