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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복음서 13,32에 대한 교부들의 전통적 해석 [성경공부] [무화과나무] 947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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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7 ㅣ No.947

 
질문:
 
어느정도 의미를 이해하겠습니다.  성실한 답변에 감사를 드립니다. ^^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이해한 삼위일체란, 성부 성자 성령의 실체는 신성으로 하나이며 같다라는 것이며,사랑으로 하나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종말의 때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1. 그 때는 그 누구도 모르고, 예수님 자신도 모르고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분만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2. 그리고 모든 권한을 아버지로 부터 부여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위격이란 지위와 품격을 말합니다. 관계성을 뛴 의미로 알고 있습니다.

1번을 봤을 때 성부 하느님께서는 성자 하느님보다 종말의 때에 관하여 알고 있는 것은 왜 그런 것입니까?

 높음도 낮음도, 앞서지도 뒷서지도 않고 다 똑같은 능력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라면

성자 예수님께서는 왜 종말의 때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느님과 완전히 같은 위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실체 내지 본성은 신성으로 하나요, 위격으로는 엄연히 차이가 있는 것 아닙니까? 

물론 누가 높고 낮음 그 자체를 아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다만 성부성자성령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완전히 하나가 되심을 알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이 많이 궁금해서 질문 드립니다. 이 부분(성부만이 종말을 아신다, 성부로부터 성자께서 권한을 부여받고, 성부께서 성자를 영광스럽게 한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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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 찬미 예수님
 
우선, 주신 질문 2번에 대한 답글은 여기에 있습니다. (클릭하십시오). 클릭하신 후에, (iii)과 (iv), 즉 (iii)(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설명)과 (iv)[16세기 중반에 있었던 트리엔트 공의회 직후에 가톨릭 보편 교회가 처음으로 발행하였던, 트리엔트 교리서(즉, 로마 교리서)]의 가르침을, 차분히 여러 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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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드리는 강력한 부탁의 말씀: 이 글은, 주신 질문 1번에 대하여 마련한 답글로서, 가톨릭 교회의 교부들의 전통적 해석을 전달해 드리고자 마련한 것이지, 결코 제가 여러분을 가르치기 위하여 마련한 것이 아니므로, 제가 다른 분들을 가르친다고 이미 주장하였거나 혹은 속으로 생각하시는 분들께서는, 더 이상 이 글을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그러한 분들이 이 글 및 그동안 제가 마련하여 이곳 굿뉴스 게시판에 올려드린 글들을 읽는 것 자체를, 전달성 글들의 작성자인, 제가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견해를 가진 분들께서는 자기 자신의 마음의 평화를 위하여서도 제가 올려드리는 글들을 읽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smart)는 생각이며,
 
그리고 지금까지 그랬을 리가 절대로 없었겠지만, 절더러 가르친다고 이미 주장하였던 분 그리고 지금도 주장하고 계신 분으로서, 지금까지의 전달성 저의 글을 읽고서는 저의 글을 읽음으로서 비로소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을 알게 된 내용에 근거하여, 다른 분들과 대화 중에 혹은 답글(한줄답변 글 포함)을 달면서 "아는 척 하는 일체의 행위"는, 전달자에 대한 질투와 시기의 단계를 훨씬 넘어, 저 뿐만이 아니라 다른 분들을 "기만하고 속이는 행위"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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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음은,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성경"의 마르코 복음서 13,32 전문입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다음은,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진, "성경"의 마태오 복음서 24, 36 전문입니다:
 
"그러나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로지 아버지만 아신다."
 
 
1-1. 찾아 보았더니, 이들 절들에 대한 NAB의 주석은 주신 질문 1과 관련하여 도움되는 내용이 없었습니다.
 
1-2. 마찬가지로, 또한 찾아 보았더니, 성요셉출판사가 발행한, 주석성서 신약의 해당 절들에 대한 주석들도 주신 질문 1과 관련하여 도움되는 내용이 없었습니다.
 
 
2. 다음은 나해 연중 제33주일 복음말씀(마르코 복음서 13,24-32)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에 주어진 마르코 복음서 13.32에 대한 해설입니다:
 
32. Referring to this verse, St. Augustine explains ("On the Psalms", 36:1): "Our Lord Jesus Christ was sent to be our Master, yet He declared that even the Son of Man was ignorant of that day, because it was not part of His office as Master to acquaint us with it."

32. 이 절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성 아우구스티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On the Psalms", 37(36):1]: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스승(Master)으로 보내지셨으나, 그러나 당신께서는 심지어 사람의 아들마저도 바로 그 날을 모른다고 선언하셨는데, 이는 우리에게 그 날을 알려 주는 것이 스승으로서의 당신의 직무의 일부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Regarding the knowledge Christ had during His life on earth, see the note on
Luke 2:52.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의 당신의 삶 동안에 가지셨던 지식에 관하여서는, 루카 복음서 2,52에 있는 주석을 보십시오.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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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절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이,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의 짧은 주석 한 개뿐인데, 예상밖으로 상당히 짧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설명이 부족하여 시편 37(36),1에 대한 성 아우구스티노의 주석을 더 살펴 보기로 하였으며, 다음과 같습니다. 

다음은, 아래의 출처를 클릭하시면 읽을 수 있는시편 37(36),1에 대한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의 해설 전문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굵은 녹색 글자에 대한 추가 설명으로 이어지는, 아래의 파란 색칠을 한 부분을 읽어 보시면 위의 나바르 성경 주석서에서의 성 아우구스티노의 마르코 복음서 13,32에 대한 해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1. With tenor do they hear of the coming of the last day, who will not be secure by living well: and who fain would live ill, long. But it was for useful purposes that God willed that day to remain unknown; that the heart may be ever ready to expect that of which it knows it is to come, but knows not when it is to come. Seeing, however, that our Lord Jesus Christ was sent to us to be our "Master,"(6) He said, that "of the day not even the Son of Man knew,"(7) because it was not part of His office as our Master that through Him it should become known to us. For indeed the Father knoweth nothing that the Son knoweth not; since that is the Very Knowledge of the Father Itself, which is His Wisdom; now His Son, His Word, is "His Wisdom." But because it was not for our good to know that, which however was known to Him who came indeed to teach us, though not to teach us that which it was not good for us to know, He not only, as a Master, taught us something, but also, as a Master, left something untaught. For, as a Master, He knew how both to teach us what was good for us, and not to teach us what was injurious. Now thus, according to a certain form of speech, the Son(8) is said not to know what He does not teach: that is, in the same way that we are daily in the habit of speaking, He is said not to know what He causes us not to know.(9) ...

왜냐하면 성부께서는 성자가 알지 못하는 어떠한 것도 실제로 알지 못하기 때문인데, 이는 성부의 거룩한 지혜(His Wisdom)가 바로 성부 당신 자신에 대한 지식이며, 그리고 당신의 말씀이신 당신의 성자께서 바로 "당신의 거룩한 지혜(His Wisdom)"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실제로 오셨던 당신께 비록 그것이 알려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아는 것은 우리의 선(good)을 위한 것이 아니기에, 스승으로서, 어떤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실뿐만이 아니라, 또한, 스승으로서, 어떤 것을 가르치지 않고 남겨 두신다. 이는, 스승으로서, 당신께서 우리를 위하여 선(good)인 바를 어떠한 방식으로 가르쳐야 하는지, 그리고 해로운 바를 어떠한 방식으로 가르치지 않아야 하는지, 둘 다를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이제 그러므로, 말하기의 특정 형식에 따라, 성자께서는 당신께서 가르치지 않으시는 바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게 되셨던 것, 즉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습관에 있어서의 바로 그 꼭 같은 방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알게 되지 않도록 하시고자 하는 바에 대하여 당신께서는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게 되셨던 것이다. ...

출처: http://www.clerus.org/bibliaclerusonline/en/byv.htm#gy

  

3. 다음은 저의 졸저서인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나해-II (출판사: 가톨릭출판사, 엮은이: 소순태) 연중 제33주일 복음말씀(마르코 복음서 13,24-32)에 대한 해설입니다. 13,32에서의 말씀만을 꺼집어 내어 단순히 그 의미를 이해하고자 하다가는 자칫 엉뚱한 생각으로 빠질 수 있기에, 13,32 전후의 절들의 문맥 안에서 이해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복음 - 마르코 13,24-32
 
     오늘 우리는 또한 마르코 복음서를 통한 우리의 학습을 끝마친다. 이 시기는 성 목요일과 최후의 만찬 바로 직전이다. 이 독서는 종말론적 묘사(apocalyptic description)이며 그리고, 예수님께서 (기원후 70년에 발생하였던) 성전의 파괴에 대하여 말씀 중이신, 마르코 복음서 13,3-8과 함께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13,3 예수님께서 성전 맞은쪽 올리브 산에 앉아 계실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아가 따로 예수님께 물었다. 4 “저희에게 일러 주십시오.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너희는 누구에게도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6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하면서 많은 이를 속일 것이다. 7 그리고 너희는 여기저기에서 전쟁이 났다는 소식과 전쟁이 일어난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불안해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아직 끝은 아니다. 8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곳곳에 지진이 발생하고 기근이 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통의 시작일 따름이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구약 성경의 묘사(images)들 안에서, 앞으로 올 그 어떤 것에 대하여 설명하시는데, 이 설명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자신들을 준비할 것을 요구한다.
 
24 “그 무렵 환난에 뒤이어
 
어떤 특정한 시기와 직접적으로 관련지울 수 없는 커다란 환란(tribulation)의 시기.
 
“우리는 성경에 언급된 바의 연대에 대하여 과도하게 집착하여서는(fix upon) 안 되는데, 이는 자주 성령께서, 최후의 시기들에 대하여 말씀하시고는, 그러고는 다시 이전 시기에 대하여 언급하기 위하여 되돌아가시어, 그리고 그전에 말하지 않고 남겨두었던 바를 채우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말론적 환시에 있어 구체적인 연대를 찾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예언된 것들의 의미를 따라야 한다.” [페타우의 성 빅토리노(Saint Victorinus of Pettau, 280년경), Commentary on the Apocalypse, 7].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25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사람의 아들의 도래(coming)에 앞서는 우주적 전조(cosmic portents)들은 다음의 구약 성경 본문들을 반향한다: 이사야서 13,10; 에제키엘서 32,7; 아모스서 8,9; 요엘서 2,10; 3,4; 3,15; 이사야서 34,4; 하까이서 2,6.21. 구약 성경 어디에 있어서도 이 사건들이 사람의 아들의 도래를 앞서지 않고 있다. 전조들의 나열은 모든 피조물들이 그의 도래의 조짐이 될(signal) 것임을 말하는 한 방식이다. 이와 같은 동기(motif)가 또한 외경들인 에녹(Enoch) 80,4-7과 2Esdras 5,5와 같은 종말론적 책들에서 사용되고 있다.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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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5) 다음의 자료들을 참고하라:
   참고 자료 1:
http://ch.catholic.or.kr/pundang/4/apocrypha/enoch80.htm (에녹 80,4-7)
   참고 자료 2:
http://ch.catholic.or.kr/pundang/4/apocrypha/2esdras.htm (2Esdras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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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 묘사는 다니엘서 7,13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 사람의 아들은 분명히 예수님이시나, 그러나 사람의 모습을 한 천사의 형상(angelic figure)은 아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당신의 말씀, ‘이제부터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마태오 복음서 26,64)에 따라 지금 계속하여 오시듯이, 구름을 타고 교회로 오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위대한 권능 및 위엄과 함께 오시는데, 이는 당신의 전능하신 권능과 위엄이, 당신께서 위대한 힘을 베풀어 주실 거룩한 백성(the saints) 안에서 나타날 것이며, 그 결과 이들이 그러한 박해에 의하여 압도당하지(overcome) 않도록 하고자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오실 다른 방식은, 당신의 지체(His body, 즉 교회) 안에 오실 것인데, 바로 이 교회 안에서 당신께서는 성부의 오른쪽에 앉아 계시며(마르코 복음서 16,19; 로마서 8,34; 콜로새서 3,1), 또한 바로 이 교회 안에서 당신께서는 죽으셨고 다시 부활하셨으며 그리고 승천하셨다.”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Saint Augustine of Hippo, 418년), Letter to Hesychius, No.199,41].
 
27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하느님의 전령(messengers)들.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선택된 자(the elect)들(신명기 30,4; 이사야서 11,11.16; 27,12).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이 세상 도처로부터.
 
28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예수님께서 저주하셨던 그 무화과나무(마르코 복음서 11,21)가 아니라, 다음의 구절에 있는 원예(horticulture)에 대한 간단한 가르침. 봄과 여름에 있어 무화과나무의 자연적 성장 과정이 사람의 아들의 도래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과 비교되고 있다. 그대가 이들 표징(signs)들을 보게 되면, 사람의 아들이 조만간 올 것임을 알도록 하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 29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한 세대는 40년이다. 이 구절은 기원후 30년에 말해졌으며, 40년 후인,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이 파괴되었다. 성전은 이 세상의 구조(construction)에 대한 유다교 개념의 축소 모형(miniature)이었다. 그들의 세상이 파괴되었던 것이다.

기원후 1세기의 유다인 역사학자인 요세푸스(Josephus)는 로마 군대에 의한 예루살램의 포위 공격에 있어 투석기(catapults)들의 사용을 묘사할 때에 다음을 기록하였다:
 
“이제 던져진 돌들은 1탈렌트(75파운드, 0.453 x 75 = 33.98kg)의 무게였으며, 그리고 2 펄론(furlong)(1/8 x 2 = 1/4마일, 약 402.34meter) 그리고 그 이상 (투석기에 의하여) 도달 되었다(were carried). 이 돌들이 주었던 타격은, 이 돌들의 이동 경로에 있어 첫 번째로 서 있었던 것들뿐만이 아니라, 상당한 거리로 이들의 경로 밖에 있는 것들까지도, 결코 버티어 낼 수가 없었다. 유다인들에 관하여 언급하면, 그들은 처음에 이 돌이 오는 것을 지켜보았는데, 이는 이 돌이 흰 색깔이었기 때문인데, 그리고 따라서 그들은 이 돌이 만드는 커다란 잡음에 의하여 인지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이 돌이 그 밝음과 함께 또한 도착하기 전에 볼 수 있었다. 따라서 망루에 앉아 있던 초병들이 투석기(catapult)가 작동하기 시작하면 그들에게 알려 주었고, 그리고 이 기계로부터 돌이 날아오기 시작하면, 이 돌의 경로에 있는 자들이 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 고유의 지방 언어(country language)로 ‘아들이 온다(THE SON IS COMING).’라고 크게 외쳤다.” [요세푸스(Josephus), The Wars of the Jews, 5.7.3(270-273)].
 
이 기록의 번역자의 주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초병들이 투석기로부터 날아오는 돌을 보았을 때에, ‘아들이 온다(THE SON IS COMING).’라는 신호 혹은 표어(watchword)의 의미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혹은 번역(reading)에 있어 무슨 실수가 거기에 있었는지에 대하여, 나는 말할 수가 없다. 그리스어 및 라틴어 둘 다의 사본들 모두는 이 번역과 일치하기에 나는 이 본문에 대하여 근거가 없는 추측의 어떠한 변경(alteration)도 허락할 수가 없다.” [Whitson, William, The Works of Josephus, Hendrickson Publisher, Peabody, MA, 1987, page 710].
 
31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32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언제나 주의 깊게 지켜야 하며(vigilant) 그리고 준비되어 있어야(prepared) 한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이 구절은 어떤 자들에 의하여 예수님의 신성(divinity)에 반하는 논거(argument)로서 사용되어 왔다. 세 위격들 안에 유일하신 하느님(One God)께서 계신다. 이들 세 위격들 사이에서의 의무(duties)들/지식에 대한 분할(partition)은 왜 삼위일체(Trinity)가 하나의 신비라고 불리는 이유들 중의 하나이다.
 
“유일하게 나신(begotten) 하느님께서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셨다는 것이 가끔은 이 분께 반하는 비난(reproach)으로 변하였다. 그들은, 비록 하느님으로부터 나신, 하느님이시나, 당신께서는 신성(divine nature)이라는 완벽(perfection) 안에 계시지 않는데, 이는 무지(ignorance)라는 한계에, 즉 당신의 결점(weakness)을 이기는, 말하자면 당신 자신보다 강한 외적 힘(external power)에, 당신께서 종속되어 있기(subjected)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이단자(the heretics)들은 자신들의 발작(frenzy) 상태에서, 따라서 당신께서는 이 외적 한계(external limitation)에 붙잡혀(captive) 계시므로, 이것이 당신께서 그러한 고백을 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한다는, 신성 모독적 해석(blasphemous interpretation)으로 우리를 몰아넣으려고 시도할 것이다. (제32절의) 이 말씀들은 주님이신 당신 자신의 말씀들이다. 당신의 명백한 단언(express assertion)이, 이 단언을 잘 설명하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에 의하여 전와(轉訛)되는(corrupt) 것보다 도대체 무엇이 더 불경스러울(unholy)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우리는 묻는다. 그러나 이 말씀들의 의미와 이유(occasion)에 대하여 우리가 연구하기(investigate) 전에, 우리는 우선 상식(common sense)의 판단에 호소하도록 하자. ‘모든 것들에 대하여 이것들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창조자(author)로서의 입장으로 계신(stand) 분이신(히브리 1,2) 당신께서 모든 것들을 알고 계셔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는 신뢰할만(credible) 하다. ... 자신의 원천(origin)에 있어 오직 하느님으로부터 유래된 모든 것들은, 오직 당신 안에서 자신의 현재의 상태와 미래의 발전에 대한 동력인[efficient cause, 動力因, 작용인(因)]을 가지고 있다. 존재하고 있는 그리고 존재하여야만 하는 모든 것들이, 당신의 본성의 범위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그리고 당신의 본성 안에 포함되어 있기에, 당신의 본성(nature)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 존재할 수가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현재의 동기(motives)들에 의하여 뒤섞여지는 지금의 상태로서의 마음의 생각(the thoughts of the mind)들과, 그리고 미래의 욕구들이라는 마음의 충동(impulse)에 의하여 일어나게 되는 내일의 상태로서의 마음의 생각들을 알고 계신다. ... 당신께서 알지 못한다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실 때마다, 당신께서는 무지(ignorance)를 진실로 단언하시나(professes),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당신께서 무지라는 결함(defect) 아래에 계시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당신께서 모르신다고 하는 무지의 연약함(infirmity) 때문이 아니라, 아직은 말할 때가 아니거나 혹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행동할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인식(knowledge)은 무지로부터의 어떤 변화(change)가 아니라, 예정된 때(fullness of time)의 도래(coming)에 관한 것이다. 당신께서는 알고자 여전히 기다리고 계시나, 그러나 (이것을 두고서) 우리가 당신께서 알고 계시지 않다고 추정할(suppose) 수는 없다. 그러므로 당신께서 아시는 바에 대하여 당신께서 모르시는 것, 그리고 당신께서 알고 계시지 아니한 바에 대하여 당신께서 알고 계시는 것은, 단지 말씀과 행위 안에서의 하느님의 섭리(divine economy)일 뿐이다.” [포이테르의 성 힐라리오(Saint Hilary of Poiters, 356-359년 사이), The Trinity, 9,58-62].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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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신 질문 1)과 관련하여,

(i) 위의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의 해설과
 

(ii) 바로 위에 있는 포이테르의 성 힐라리오(Saint Hilary of Poiters)의 해설을
 
잘 읽어 보도록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기본적으로 "너희들이 구체적으로 알 바가 아님"을 매우 분명하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인데, 이것은 이어지는 절들에서의 말씀을 묵상하시면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다음의 제4항에 있는 마르코 복음서 13,33-37을 읽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혹시 다음의 제4항을 읽고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분들께서는, 아래의 제6항에서 말씀드리는 실제 예제(Example)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4. 다음은 저의 졸저서인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나해-I (출판사: 가톨릭출판사, 엮은이: 소순태) 대림 제1주일 복음말씀(마르코 복음서 13,33-37)에 대한 해설입니다. 13,32에서의 말씀만을 꺼집어 내어 단순히 그 의미를 이해하고자 하다가는 자칫 엉뚱한 생각으로 빠질 수 있기에, 13,32 전후의 절들의 문맥 안에서 이해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복음 - 마르코 13,33-37
 
     마르코 복음서는 모든 복음서들 중에서 가장 간결한(compact) 복음서로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닌 당신의 위격(person)의 신비에 대하여 집중하고 있는 점진적인 방식인데, 이 방식 안에서 제자들은 당신에 대한 이해(understanding)에 도달하게 되나, 그러나 당신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군중들로부터 감추어진 상태로 머물러 있다. 예수님께서는 성부(Father)와 악령(evil spirits)들에 의하여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정받게 되나,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인들의 지도자들에 의하여 당신이 거부되고 또 심지어 당신 자신의 제자들에 의하여 잘못 이해되는(misunderstood) 것은 역설(paradox)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새로운 전례주년을 경축함에 따라, 우리의 주님께서 오실 날을 우리는 기다리고 있다. 오늘의 복음 말씀에서, 우리가 주님께서 오실 날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당신께서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경고하신다. 
 
33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경각심에 대한 이 권고는 모든 시대들에 있어 진실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지적을 한 개의 비유와 함께 제시하신다.
 
“사람은 그가 전혀 모른다는 것을 알 때에는 길을 잘못 들게 되지 않으나, 그러나 그가 모르는 어떤 것을 안다고 생각할 때에 길을 잘못 들게 된다.” [힙포의 성 아우구스티노 (Saint Augustine of Hippo, 400년 경), Letter to Hesychius 52].
 
34 그것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
 
이 비유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경계심을 주인이 여행을 떠났을 때에 문지기에게 요청되는 경계심에 비유하고 있다: 언제 집 주인이 돌아올 것인지에 대하여 그대는 모른다. 정확한 시각이 알려져 있지 않기에, 지속적인 경계가 요청된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 35 그러니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밤을 (각 각 세 시간씩 묶어서) 네 개로 구분하는 것은 로마인(the Romans)들에 의하여 습관적으로 사용되었다. 유다계 팔레스티나 사람들의 관습은 [루카 복음서에 있는 비유 이야기에 의하여 예시되어 있듯이(루카 복음서 12,38)] 밤을 세 개의 시간대[watches, 3경(更)]들로 나누었다.
 
36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37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이 문장은, 앞으로 있을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성전9)의 파괴가 유다인들과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미할 좁은 시각의 위기의 범주(limits)를 뛰어넘어, 전체 설교를 들어올린다(lift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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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다음에 있는 예수님 공생활 시기의 팔레스티나 지역 지도와 기원후 20-70년 시기의 예루살렘 지도를 참고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map/PalestineChristHR.htm 
   (사진을 확대하여 보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map/Jerusalem3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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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여러분은 죽음으로 잠들지 않도록 깨어있고 또 기도하라(루카 복음서 21,36을 보라). 이는 만약에 여러분의 삶의 끝에 있어 여러분이 참된 믿음으로부터 길을 잃게 되면 여러분의 이전의 선행들이 그대에게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400년경), Apostolic Constitutions, 7,2,31].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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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상, 저의 졸저서들 및 졸저서들의 인터넷 각주를 통하여,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의 주석(위의 제2항)과 포이테르의 성 힐라리오의 해설(위의 제3항)로 안내해 드렸는데, 이들 구절들에 대한 좀 더 많은 교회의 교부들의 해설들을 읽으시고자 하는 열정(?)이 넘치는 분들을 위하여 다음의 자료들을 추가로 안내해 드립니다.
 
5-1. 교황청에 계신 성직자들(교황님, 추기경님들, 주교님들, 사제들 및 부제들 포함) 그리고 평신자들을 위하여 마련된 자료인, 마르코 복음서 13, 32-37에 대한 교부들의 주석들의 모음은 다음에 있습니다:
 
 
5-2. 교황청에 계신 성직자들(교황님, 추기경님들, 주교님들, 사제들 및 부제들 포함) 그리고 평신자들을 위하여 마련된 자료인, 마태오 복음서 24, 36-44에 대한 교부들의 주석들의 모음은 다음에 있습니다:
 
 
 
 
6. 쉬운 예제(Example) 한 개
 
제가 알고 지내는 교수님 한 분께서는 중간고사 시험 날짜와 시간을 구체적으로 사전에 알려 주지 않습니다. 요즈음은 시말고사와는 달리 중간고사의 경우에는 시험 기간이 별도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16주가 한 학기(Semester)를 이루는 학기의 시작 후에 7-9주 쯤에 적당한 날을 잡아, 수업시간 중에 혹은 오후 5시 이후에 별도의 시간을 잡아 중간고사 시험을 과목별로 치르고 있습니다. "중간고사"도 한참 전부터 이름이 바뀌어 "수시 시험"으로 불립니다.
 
이 교수님께서는 우선 학기가 시작하고 나서 약 5주쯤 되면, "시험은 시험을 칠 준비가 되었을 때에 치는 것이지, 시험을 칠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험을 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라고 학생들에게 호소(?)하기 시작합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무슨 말씀이신지요???" 하므로,
 
"예를 들어, 과거에 한양에 과거를 보러 올라 갈 때에,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선비가 무작정 상경하여 과거를 본다고 하면, 낙방할 것이 분명하듯이, 마찬가지로 시험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험을 보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라고 또 설득(?)을 합니다.
 
그러고 나서 이 교수님께서는, "수시 시험 기간 중의 수업 시작 때 마다, 여러분들께 오늘 밤에 시험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물어 보아, 과반수의 학생이 "예"하고 대답을 하면, 그 날 오후 5시 이후에 시험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수의 학생이 아직 시험 치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경우에는, 수업 시간 중에 계속 진도 나가며, 당연히, 수업 시간 중에 배운 것은 시험 범위에 포합됩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쯤하여, 이 교수님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도 가졌을 만한 질문들을 또한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 드립니다:
 
질문 1: 그런데... 이 교수님께서는 왜 이러한 "수시 시험" 방식을 도입하셨을까요?
 
질문 2: 이 교수님께서 "수시 시험"이 조만간 있을 것임을 모르고 계실까요?
 
질문 3: 그리고 학생들도 "수시 시험"이 조만간 있을 것임을 모르고 있을까요?
 
질문 4: 이러한 수시 시험 방식은 결국에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질문 5: 정확한 수시 시험 날짜와 시간을 정하면, 무슨 일이 대다수의 학생들에게 있게 될까요? 약 2주일 전부터 계획을 세워 시험 준비를 차근 차근 할까요... 아니면, 시험치기 하루 전날, 혹은 당일에야 비로소 시험 준비를 시작할까요?
 
 
저도 궁금하여 이 교수님께 여쭈어 보았더니, 다음과 같이 답변하셨습니다:
 
"요즈음 대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노트 필기를 제대로 하는 학생도 드물고, 중간 고사 시험 날짜와 시간을 사전에 정하면, 적어도 2주일 혹은 1주일 이전부터 날마다 시간을 내어 차근 차근 시험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 날짜 하루 전 혹은 기껏 3-4 시간 정도 직전에 시작하여, 어디서 구하였는지 출처도 알 수 없는 "족보" 등의 복사물을 달달 외우는, 이상한 시험 준비를 한 후에, 시험을 치는 나쁜 학습 습관을 중/고등학교 시절에 가지게 되었는 모양인데, 이것을 바로 잡고자 그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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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예수 재림의 날이 언제인지 알게 되면, 위의 예제에서와 꼭 같은 일들이 벌어질 것임을 예수님께서 당연히 아셨을 것이니, 당신께서 언제 오실 것인지를 말씀해 주시지 않았다는 생각입니다. 
 
 
작성자: 소순태 마태오 교수
작성에 소요된 시간: 약 6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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