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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2,10-20에서 만약에 아브람이 거짓말장이라면 [교리용어_lie] [성경해석] 782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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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29 ㅣ No.1358



+ 찬미 예수님

1. 창세기 12,10-20을 읽고서, 창세기 20,12-13에 기록되어 있는 바를 읽지 않았는지, 어떤 분(A)

"아브람이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거짓말을 하였다"

주장을 하는데,

질문 1: 만약에 이와같이 아브람이 거짓말을 하는 자, 즉, "거짓말장이"라는 것이 사실(참, true)이라면, 그의 손자인 야곱이, 예를 들어, 창세기 27,24에서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듯이, 자신의 아버지인 이사악에게 하였던 "명백한 거짓말"을 우리가 도대체 어떻게 이해하고 또 어떻게 "말로 표현"하여야 할까요? 예를 들어, "기막힌 거짓말"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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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이글에서 필자가 말하는 "거짓말" 이라는 용어의 의미 혹은 정의(definition)는 다음의 글에 있으며,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신학 대전(Summa Theologica)에 주어진 정의(definition)를 따르고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95.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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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창세기 20,12-13 전문이며, 아브람이 파라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음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성경 구절들입니다:

(발췌 시작)
12 "더구나 그 여자는 정말 나의 누이입니다. 아버지는 같고 어머니가 달라서 내 아내가 되었습니다. 

13 하느님께서 내게 아버지 집을 떠나 떠돌아다니게 하셨을 때, 나는 그 여자에게 말하기를, ‘당신에게 당부하는데, 우리가 어느 곳으로 가든지 내가 당신의 오라비라고 말하시오.’ 하였습니다.” 
(이상, 발췌 끝).

     그리고 다음은 창세기 27,24 전문이며, 야곱이 자신의 아버이지인,특히 눈이 먼이사악에게 "분명한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성경 구절입니다:

(발췌 시작)
이사악이 “네가 정말 내 아들 에사우냐?” 하고 다져 묻자, 그가 “예,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상, 발췌 끝).

2. 다른 한편으로, 동일한 어떤 분(A)이, 창세기 27,1-4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듯이,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의 친형인 에사우에게 제시한 절차에 따라 에사우에게 직접 내리려고 하였던 "아버지의 축복"을, 나이가 많아져 눈이 멀게 된 자신의 아버지인 이사악에게, 예를 들어, 창세기 27,24에서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듯이, "명백한 거짓말"까지 하면서 속여/기만하여, 결국에 가로채는 데에 성공한, 이사악의 둘째 아들인 야곱에 대한 이야기인 창세기 제27장을 읽고서, 

특히, 창세기 27,5-17에서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i) 요셉 및 (ii) 둘째 아들인 요셉을 사랑하였던 그의 어머니 레베카(창세기 25,28) 둘 다잘못들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이,

첫째 아들인 에사우를 사랑하였던(창세기 25,28) 이사악에 대하여, 창세기 27,1-4에 기록되어 있는 바를 읽지 않았는지,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사악이, 둘째 아들에게 자신의 축복을 내리기 위하여, 그러나 첫째 아들인 에사우를 사랑하였기에 오로지 에사우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하여, 자신의 첫째 아들인 에사우를 속였다"는 내용의,

정말로 납득할 수 없는, 대단히 이상한 주장을 또한 하는데,

질문 2: 혹시라도 이러한 주장이 그리스도교 윤리적/도덕적으로 올바르기 위하여서는, 자식을 속이는/기만하는 아버지의 행위가, 자연법적으로 혹은 초자연법적으로, 때로는 윤리적/도덕적으로 올바를 수도 있는 행위라고 가르치는 성경 구절들 혹은 가톨릭 교회 교도권의 문헌들이 있어야 할 것인데, 그러한 근거 문헌들이 어디에 있는지요? 

     다음은, 창세기 27,1-4 전문이며, 이사악이 자신의 첫째 아들인 에사우에게 구체적으로 지시한 바 입니다:

(발췌 시작)
1 이사악은 늙어서 눈이 어두워 잘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큰아들 에사우를 불러 그에게 “내 아들아!” 하고 말하였다. 에사우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 그가 말하였다. “네가 보다시피 나는 이제 늙어서 언제 죽을지 모르겠구나. 
3 그러니 이제 사냥할 때 쓰는 화살 통과 활을 메고 들로 나가, 나를 위해 사냥을 해 오너라. 

4 그런 다음 내가 좋아하는 대로 별미를 만들어 나에게 가져오너라. 그것을 먹고, 내가 죽기 전에 너에게 축복하겠다.” 
(이상, 발췌 끝).

     그리고 다음은 이어지는 창세기 27,5-17 전문인데, 둘째 아들인 야곱과 그의 어머니 레베카가, 나이가 많아 눈이 멀어진, 가장인 이사악을 속이기 위한 계략을 함께 공모하였으며, 그리고 특히 이 공모의 주역이, 요셉아니라이사악의 아내인 레베카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발췌 시작)
5 레베카는 이사악이 아들 에사우에게 하는 말을 엿듣고 있었다. 그래서 에사우가 사냥하러 들로 나가자, 
6 레베카는 아들 야곱에게 일렀다. “얘야, 너의 아버지가 네 형 에사우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7 ‘사냥한 고기를 가져다가 나를 위하여 별미를 만들어라. 그것을 먹고, 내가 죽기 전에 주님 앞에서 너에게 축복하겠다.’ 
8 그러니 내 아들아, 내가 너에게 말하는 것을 듣고 시키는 대로 하여라. 
9 가축 있는 곳으로 가서 좋은 새끼 염소 두 마리를 나에게 끌고 오너라. 내가 그것을 가지고 네 아버지가 좋아하는 대로 별미를 만들어 줄 터이니, 
10 너는 그것을 아버지께 가져다 드려라. 그러면 아버지가 그것을 잡수시고, 돌아가시기 전에 너에게 축복해 주실 것이다.” 
11 그러자 야곱이 어머니 레베카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형 에사우는 털이 많은 사람이고, 저는 살갗이 매끈한 사람입니다. 
12 혹시나 아버지께서 저를 만져 보시면, 제가 그분을 놀리는 것처럼 되어 축복은커녕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13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말하였다. 내 아들아, 네가 받을 저주는 내가 받으마. 너는 그저 내 말을 듣고, 가서 짐승이나 끌고 오너라.” 
14 그가 가서 짐승을 끌고 어머니에게 왔다. 그의 어머니는 그의 아버지가 좋아하는 대로 별미를 만들었다. 
15 그런 다음 레베카는 자기가 집에 가지고 있던 큰아들 에사우의 옷 가운데 가장 값진 것을 꺼내어, 작은아들 야곱에게 입혔다. 
16 그리고 그 새끼 염소의 가죽을 그의 손과 매끈한 목둘레에 입힌 다음, 
17 자기가 만든 별미와 빵을 아들 야곱의 손에 들려 주었다.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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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 당시의 상황들을 대단히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유관 창세기 성경 본문들 몇 개를 구체적으로 들여다 보았으며, 특히 개인적으로, 위에 발췌 인용된 성경 구절들이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바들이,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16항에서 가르치고 있는 바에 따라, 자구적 의미/어의(literal sense)로서(**), 모두 사실(true, 참)임을,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는 받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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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여기를 클릭하면, 성경 해석에 있어,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16항에서 가르치고 있는 "자구적 의미/어의(literal sense)"에 대하여 학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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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자 주: 지금까지, 성경 해석에 대하여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09-119항에 주어진 가르침들에 따라, 성경 해석에 있어 세 개의 "영성적 의미들"의 근거/바탕이 되는, "자구적 어의/의미(literal sense)"를 중심으로 고찰하였습니다.

     지금부터는

(i) 이 공모의 주역레베카의 잘못이 무엇인지 그리고 레베카가 어떠한 저주를 받았는지,

(ii) 가톨릭 교회측의 핵심 문헌들과 주석서들에서 이들 유관 성경 성경 본문들에 대하여 어떠한 해석들 혹은 주석들을 그동안 해 왔는지,

(iii) 그리고 이러한 비극이, 노년에 눈이 멀게 된이사악의 가정 내에서 발생하게 된 세속적/인간적 이유, 그리고 더 나아가, 근본 원인

등에 대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이 이미 찾아본 바를, 필요시 약간의 내용 요약과 함께, 전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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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1.
우선적으로, 창세기 12,10-20창세기 20,12-13은,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주일 혹은 주간 제1독서로 발췌되고 있지 않는 것으로 파악이 되고 있습니다.

3-2. 창세기 27,1-5.15-29는,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제1독서로 발췌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이 되고 있습니다.

3-3. 다른 한편으로, 창세기 12,10-20창세기 20,12-13"가톨릭 교회 교리서" 본문 중에서 인용되고 있지 않는 것으로 파악이 되고 있습니다.

3-4, 또 다른 한편으로, 창세기 제27장도 "가톨릭 교회 교리서" 본문 중에서 인용되고 있지 않는 것으로 파악이 되고 있습니다.

4.
그런데, 창세기 본문 중에는,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직접 예언의 말씀들을 하시는 경우들이 더러 있으며, 그리고 이 예언의 말씀들 중의 일부는 그 완미한 의미들을 아직까지 우리가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예를 들어, 창세기 3,15와 같은 창세기의 특정 구절에 대한, 유다교측의 해석과 그리스독교측의 해석이 완전히 다른 경우가 아직까지 존재하고 있음을 또한 유념하여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위의 제1항제2항에서 발췌한 창세기의 구절들에 대한 해석 또한, 유다교측에서의 해석과 그리스도교측에서의 해석이 상당히 다를 수도 있음을 예상하여야 할 것입니다.

4-1. 창세기 12,10-20에서 아브람이 파라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은 것은, 우선적으로, 이미 성경 본문 자체(즉, 창세기 20,12-13)가 독자들을 위하여 대단히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밝히고 있으므로, 그리고 가톨릭 보편 교회가 수용한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신학 대전(Summa Theologica)에서 주어진 "거짓말"정의(definition)를 따르고 있는 Modern Catholic Dictionary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있는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95.htm <----- 필독 권고

영어 가톨릭 대사전들에 주어진 "거짓말"의 정의(definition)에 의하여서도, 창세기 12,10-20에서 아브람이 파라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므로, 더 이상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 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게시자 주: 혹시 시간이 있으신 분들께서는 창세기 26,1-11을 또한 읽어보십시오. 장면과 등장 인물만 바뀌었지, 창세기 12,10-20과 대단히 유사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4-2. 창세기 제27장에서 다루고 있는 "인간적 갈등들"에 일정 부분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는 주된 인간 등장 인물(human characters)들은, 가장이며 나이 때문에 눈이 멀어버린 이사악(Isaac)과 그의 아내 레베카(Rebekah), 그리고 이들의 첫째 아들인 에사우(Esau)와 둘째 아들인 야곱(Jacob)으로 이루어진, 이사악의 가족들이므로,

(i) 이들의 이름들이 고유하게 나타내는 의미를 살펴보고, 그리고

(ii) 가족들이 다 함께 모여서 가족 회의를 한 것이 아니라, 이들 중의 일부들이 따로 모여서 도대체 어떠한 내용의 자신들 의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그리고 이러한 대화들이, 동일한 대화에 참석하지 못한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을 얼마나 배려하고 있는지 등을 살펴보는 것은, 

창세기 제27장의 전반적인 "자구적 의미/어의(literal sense)"를 추가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필수적일 것입니다. 

게시자 주: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아담과 하와의 원죄 이후의 결과로 사람들이 상실한 것들이 여럿 있는데, 바로 이러한 상실들 때문에, 특히 죄를 짓는 경향(즉, 사욕편정, 즉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욕망)을 가지게 되었고, 그리고 실제로 죄를 범하는 모습들이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러나, 하느님께서 모세(Moses)를 통하여 당신의 율법을 주실 때까지는, 사실은, 죄(sin)의 분명한 기준이 없었기에, 하느님께서 보실 때에 과연 사람들의 어떠한 행위가 윤리적 악(moral evil)으로 불리는 죄(sin)를 범하는 것인지를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한참 뒤인 이후의 모세의 시대에 들어와 처음으로, 하느님의 백성이기 위한 하느님과의 계약(covenant)의 형태로 도입되는 윤리적 규범들을 주된 잣대로 하여 창세기의 본문에 대하여, 창세기 본문에 대한 "자구적 의미/어의(literal sense)"에 근거하여,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17항 2조에서 말하는, 창세기 본문에 대한 "윤리적 의미/어의(moral sense)"를 무작적 획일적으로 추구하는 시도는, 그러한 접근 자체가, 이성적 접근이 아니기에, 적절하지 않으며, 상당히 무의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5.
5-1.
이미 다들 잘 알고 계시겠지만,

5-1-1. "이사악(Isaac)"이라는 이름은 "웃음"를 뜻한다고 하며(창세기 17,19와 이 절에 대한 "주석 성경"의 주석 참조),

5-1-2. "레베카(Rebekah or Rebeccah)"라는 이름은 "묶다(tie) 혹은 연결/합류하다(couple or join)"를 뜻한다고 하고,

5-1-3. "에사우(Esau)"는 "털이 많은(hairy)"을 뜻한다고 하며(창세기 25,25 와 이 절에 대한 "주석 성경"의 주석 참조), 그리고

5-1-4. "야곱(Jacob)"은 "발뒤꿈치(heel)"를 뜻한다고 합니다(창세기 25,26). 그런데, 대단히 특이하게도, 창세기 27,36"야곱"이라는 이름이 "속이는 자"라는 의미를 또한 가지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다음은 창세기 27,36의 첫 번째 두 문장들입니다:

(발췌 시작)
그러자 에사우가 말하였다. "이제 저를 두 번이나 속였으니, 야곱이라는 그 녀석의 이름이 딱 맞지 않습니까?"12)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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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주석 성경"의 주석] 25,26과 각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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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끝) 

그리고, 다음은 창세기 25,26 의 첫 번째 문장과 이에 대한 "주석 성경"의 주석 전문입니다:

(발췌 시작)
이어 동생이 나오는데, 그의 손이 에사우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있어,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다.16)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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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주석 성경"의 주석] 야곱이라는 이름은 기원전 이천 년대의 메소포타미아 문헌들과, 천 년대의 시리아와 팔에스티나 문헌들 속에서 그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야곱은 본디 '하느님께서 보호해 주시기를!' 이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여겨지나, 창세기에서는 이 구절의 야켑(발뒤꿈치)27,36야캅(속이다)이라는 두 용어와 관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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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그런데,

(1) 1611년에 초판 발행된 King James Version(KJV 1611)의를, 영어권의 가톨릭측 및 개신교측 성경 신학자들이 함께 협업하여, 현대 어법에 맞도록 마련하여 1950-60년대에 발행하였던, RSV(Revised Standard Version)의 창세기 27,1 앞에 "Jacob Obtains Isaac's Blessing by Cunning[야곱이 교활(Cunning)로써 이사악의 축복을 획득하다]" 라는 소제목이 주어져 있습니다. 창세기 제27장의 주된 내용들이 "야곱의 교활함"의 결과임을, 바로 이 소제목이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2) 더 나아가, "속이는 자"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야곱"이라는 이름은, NAB의 창세기 27,1-40에 대한 내용 요약이기도 한, 이 구절들에 대한 소제목"Jacob's Deception(야곱의 속임)"에 반영되어 있다는 생각이며, 이것은, 사실은, 창세기 27,1-40에 있는 이야기를 요약하면, "야곱의 속임"에 대한 이야기이지, 결코 "이사악의 속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님을, 1970년에 초판 발행된 NAB(New American Bible)의 번역자들이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5-2. 창세기 27,1-40에는 다섯 개로 구분되는, 대화들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특별한 것이 아니고, 소장 중인 "새 번역 성경"창세기 27,1-40 본문을 잘 들여다 보면, 다섯 개의 단락(paragraphs)들이 이미 잘 나누어져 있음으로부터 누구든지 알 수 있는 바입니다.

5-2-1. 나이가 많아 눈이 멀어버린 이사악이사악이 사랑하는 첫째 아들인 에사우 둘 사이의 대화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창세기 제27장의 첫 번째 단락(창세기 27,1-4)은 이미 위의 제2항에서 발췌하여 함께 읽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첫 번째 단락은, 에사우의 나이가 적어도 마흔 살이 지난 이후에 발생하였음을 또한 기억하십시오 (창세기 26,34).

성경 본문의 전후 문맥에 비추어 볼 때에, 이 대화의 자리에, 이사악의 아내인 레베카와 둘째 아들인 야곱의 참석이 허락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는 생각입니다.

이는, 만약에 이사악의 아내인 레베카의 참석이 허락되었더라면, 창세기 27,5에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발췌 시작)
레베카는 이사악이 아들 에사우에게 하는 말을 엿듣고 있었다.
(이상, 발췌 끝).

그런데 이 "엿듣기"의 문제의 심각성은, 다음과 같은, 창세기 25,28을 또한 유념하면서 읽어야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발췌 시작)
이사악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여 에사우를 사랑하였고, 레베카는 야곱을 사랑하였다.
(이상, 발췌 끝).

그리고 이 절은, 이사악이 첫째 아들인 에사우를 사랑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으나, 그러나 이와는 달리, 이사악의 아내인 레베카가 둘째 아들인 야곱을 사랑하는 이유는 전혀 밝히지 않음에 대하여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이는, 아마도 레베카가 어떠한 인성(human nature)의 소유자인지를 간접적으로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창세기 본문의 인간 저자의 노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게시자 주: 어느 집안에서든, 남편이 아내를 제외시키고 자신의 특정 아들 한 명만 대화의 상대로 삼아 어떤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설사 그 내용이 별 것 아니라고 하더라도, 대화에 참석하지 못하는 다른 가족들이 예상 밖의 의심을 할 수 있기에, 바로 이러한, 즉, 창세기 27,5에서 처럼, 비 윤리적인, "엿듣기"를 야기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력이 떨어진 노 부부들의 경우에 있어, 자녀들을 대할 때에 특히 조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5-2-2. 창세기 제27장의 두 번째 단락 또한 위의 제2항에 발췌하여 이미 함께 읽어 보았습니다. 특히 다음의 두 개의 절들은 레베카야곱이사악을 속이기 위하여 함께 공모를 하였고 또 이 공모주연레베카임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다음의 대화는, 야곱이, 비록 나이가 적어도 40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나이까지 아직 혼인도 하지 못하였고, 더 나아가, 시쳇말로, "마마 보이"였음을 또한 우리에게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발췌 시작)
12 혹시나 아버지께서 저를 만져 보시면, 제가 그분을 놀리는 것처럼 되어 축복은 커녕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13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말하였다. 내 아들아, 네가 받을 저주는 내가 받으마. 너는 그저 내 말을 듣고, 가서 짐승이나 끌고 오너라.” 
(이상, 발췌 끝).

5-2-3. 다음은 창세기 제27장의 세 번째 단락이며, 나이가 많아 눈이 멀어버린 이사악과 그의 둘째 아들인 야곱이 서로 대화를 하고 있는 모습니다.

바로 이 대화의 자리에, 이사악의 첫째 아들인 에사우는 들로 사냥하러 나갔기에, 없었습니다. 야곱어떠한 수준의 "명백한 거짓말"을 자신의 아버지인 이사악에게 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특히 아래의 제19절제24절에서의 야곱의 답변들은 "명백한 거짓말"이며, 제20절에서의 답변은, 야곱이 자신의 어머니인 레베카의 지시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창세기 제27장의 내용으로는 그 진위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여기에 대하여서는, 가톨릭 보편 교회가 수용한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에 주어진,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의 가르침에 근거한, 가르침을 전달해 드릴 때에 더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발췌 시작)
18 야곱이 아버지에게 가서 “아버지!” 하고 불렀다. 그가 “나 여기 있다. 아들아, 너는 누구냐?” 하고 묻자, 
19 야곱이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저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사우입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이르신 대로 하였습니다. 그러니 일어나 앉으셔서 제가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저에게 축복해 주십시오.” 
20 그래서 이사악이 아들에게 “내 아들아, 어떻게 이처럼 빨리 찾을 수가 있었더냐?” 하고 묻자, 그가 “아버지의 하느님이신 주님께서 일이 잘되게 해 주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이사악이 야곱에게 말하였다. “내 아들아, 가까이 오너라. 네가 정말 내 아들 에사우인지 아닌지 내가 만져 보아야겠다.” 
22 야곱이 아버지 이사악에게 가까이 가자, 이사악이 그를 만져 보고 말하였다. “목소리는 야곱의 목소리인데, 손은 에사우의 손이로구나.” 
23 그는 야곱의 손에 그의 형 에사우의 손처럼 털이 많았기 때문에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에게 축복해 주기로 하였다. 
24 이사악이 “네가 정말 내 아들 에사우냐?” 하고 다져 묻자, 그가 예, 그렇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25 그러자 이사악이 말하였다. “그것을 나에게 가져오너라. 내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먹고, 너에게 축복해 주겠다.” 야곱이 아버지에게 그것을 가져다 드리니 그가 먹었다. 그리고 포도주를 가져다 드리니 그가 마셨다. 
26 그런 다음 아버지 이사악이 그에게 말하였다.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입 맞춰 다오.” 
27 그가 가까이 가서 입을 맞추자, 이사악은 그의 옷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였다. “보아라, 내 아들의 냄새는 주님께서 복을 내리신 들의 냄새 같구나. 
28 하느님께서는 너에게 하늘의 이슬을 내려 주시리라. 땅을 기름지게 하시며 곡식과 술을 풍성하게 해 주시리라. 
29 뭇 민족이 너를 섬기고 뭇 겨레가 네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 너는 네 형제들의 지배자가 되고 네 어머니의 자식들은 네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에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으리라.”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나이가 많아 눈이 멀어버린 이사악과 그의 둘쨰 아들인 야곱 사이에 위의 대화가 진행되고 있을 동안에, 레베카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생각에, 혹시라도 야곱의 거짓말들이 발각되면, 야곱에게, 이들 두 모자가 함께 노리고 있는 "아버지의 축복" 대신에 내릴, "아버지의 저주"를 자신이 낚아채기 위하여 레베카는, 야곱의 바로 옆에, 조용히 숨소리까지도 죽이면서, 내내 함께 있었다는 생각입니다. 나이가 많아 눈이 멀어버린 이사악을 속이는 일은, 야곱뿐만이 아니라 레베카에게 있어, 식은 죽을 먹는 것보다 더 쉬웠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5-2-4. 다음은 창세기 제27장의 네 번째 단락인데, 나이가 많아 눈이 멀어버린 이사악과 그의 첫째 아들인 에사우가 서로 대화를 하고 있는 모습니다.

게시자 주: 여러분들 생각에, 어떤 분(A)이 주장하였듯이, 나이가 많아 눈이 멀어버린 이사악이, 몸까지 벌벌 떨면서, 에사우속이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래서, 에사우는, 너무도 기뻐서 혹은 너무도 슬퍼서, 목 놓아 울었습니까?

질문 2: 그런데, 나이가 많아 눈이 멀어버린 이사악과 그의 첫째 아들인 에사우가 만나서 대화를 하고 있는 바로 이 자리에, 이사악의 아내인 레베카이사악의 둘째 아들인 야곱이 또한 함께 하였을까요?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생각에, 이들 두 모자는 자신들이 원하였던 바를 속임수와 거짓말로 이미 챙겼기에, 대단히 슬퍼하는 에사우를 위로하기는 커녕, 에사우를 위로하는 일마저도 나이가 많아 눈이 멀어버린 이사악의 몫으로 남겨두고서, 어디엔가에 가서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있을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가정이 다 있는지요? 하는 생각을 인간적으로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발췌 시작)
30 이사악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나서 야곱이 아버지 앞에서 물러나자마자, 그의 형 에사우가 사냥에서 돌아왔다. 
31 그도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에게 들고 가서 말하였다. “아버지, 일어나셔서 아들이 사냥해 온 고기를 잡수시고, 저에게 축복해 주십시오.” 
32 그의 아버지 이사악이 그에게 “너는 누구냐?” 하고 물으니, 그가 “저는 아버지의 아들, 아버지의 맏아들 에사우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3 그러자 이사악이 깜짝 놀라 몸을 떨면서 말하였다. “그렇다면 사냥을 해서 나에게 고기를 가져온 자는 누구란 말이냐? 네가 오기 전에 나는 이미 그것을 다 먹고, 그에게 축복해 주었다. 그러니 그가 복을 받을 것이다.” 
34 에사우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비통에 차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저에게, 저에게도 축복해 주십시오.” 
35 그러나 이사악이 말하였다. “네 동생이 와서 나를 속이고 네가 받을 축복을 가로챘구나.” 
36 그러자 에사우가 말하였다. “이제 저를 두 번이나 속였으니, 야곱이라는 그 녀석의 이름이 딱 맞지 않습니까? 저번에는 저의 맏아들 권리를 가로채더니, 보십시오, 이번에는 제가 받을 축복까지 가로챘습니다.” 그러고서는 “저를 위해선 축복을 남겨 두지 않으셨습니까?” 하고 묻자, 
37 이사악이 에사우에게 대답하였다. “얘야, 나는 그를 너의 지배자로 세웠고, 그의 모든 형제들을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술을 그에게 마련해 주었다. 그러니 내 아들아,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겠느냐?” 
38 그러자 에사우가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아버지께는 축복이 하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까? 아버지, 저에게, 저에게도 축복해 주십시오.” 그런 다음 에사우는 목 놓아 울었다.  
(이상, 발췌 끝). 

5-2-5. 다음은 창세기 제27장의 다섯 번째 단락인데, 나이가 많아 눈이 멀어 버린 이사악이 그의 첫째 아들인 에사우절망의 절규를 듣고서, 그에게 내린 축복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발췌 시작)
39 그러자 아버지 이사악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네가 살 곳은 기름진 땅에서 저 위 하늘의 이슬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리라. 
40 너는 칼을 의지하고 살면서 네 아우를 섬기리라. 그러나 네가 뿌리칠 때 네 목에서 그의 멍에를 떨쳐 버릴 수 있으리라.” 
(이상, 발췌 끝).

5-2-6. 그리고 창세기 제27장의 마지막 단락은 다음과 같습니다:

(발췌 시작)
41 에사우는 아버지가 야곱에게 해 준 축복 때문에 야곱에게 앙심을 품었다. 그래서 에사우는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게 될 날도 멀지 않았으니, 그때에 아우 야곱을 죽여 버려야지.’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42 레베카는 큰아들 에사우가 한 말을 전해 듣고는, 사람을 보내어 작은아들 야곱을 불러 놓고 그에게 말하였다. “얘야, 너의 형 에사우가 너를 죽여서 원한을 풀려고 한다. 
43 그러니 내 아들아, 내 말을 듣고 일어나 하란에 있는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달아나라. 
44 네 형의 분이 풀릴 때까지, 얼마 동안 그분 집에 머물러라. 
45 너에 대한 네 형의 분노가 풀리고, 네가 형에게 한 일을 형이 잊을 때까지만이다. 그러면 내가 사람을 보내어 너를 그곳에서 데려오게 하겠다. 내가 어찌 한 날에 너희 둘을 다 잃을 수 있겠느냐?” 
46 레베카가 이사악에게 말하였다. “나는 히타이트 여자들 때문에 살기가 싫어졌어요. 만일 야곱마저 이 땅에 사는 저런 히타이트 여자들 가운데에서 아내를 맞아들인다면, 내가 어찌 살겠습니까?”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1)
위의 본문에서, 이사악의 첫째 아들인 에사우마음속으로 생각을 하였는데, 이사악의 아내인 레베카는 자신의 첫째 아들인 에사우가 한 말을 전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에사우가 자신의 첫째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이미 장성한 자식의 마음속 생각이, 어떻게, 레베카가 전해 듣게 되는, 이 될 수가 있는지요???

전후 문맥에 비추어 볼 때에, 에사우가 그러한 자신의 마음속 생각을 레베카에게 직접 말해 주었다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기에, 납득하기 힘듭니다.

(2) 다른 한편으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아는 한, 창세기 27,46에서 레베카가 한 말은 성경에 기록된 이사악의 아내인 레베카의 말들 중에서 마지막 말입니다. 그런데, 레베카이사악에게 한 이 말도, 창세기 27,45의 마지막 문장에서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자신의 생각을 사실대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즉, 창세기 27,45에서 레베카가 한, 성경에 기록된 마지막 말은, 거짓말이라는 생각입니다.

(3) 이사악의 죽음은 창세기 35,29에 기록되어 있으며, 아들 에사우야곱이 그를 [막펠라 동굴에] 안장하였다고 합니다. 

(4) 그러나 성경 본문에는 레베카의 죽음과 장례식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다만 있다면, 야곱이 임종 직전에 창세기 49,31에서 레베카가 막펠라 동굴에 묻혔다는 언급을 한 것이 전부입니다.

(5) 야곱은 자신의 외삼촌인 라빈의 집으로, 지팡이 하나만 짚고 빈손으로 가서(창세기 32,11) [즉, 야곱은 자신의 외삼촌 라빈이 살고 있는 하란 땅으로 나그네살이를 떠나면서 아버지인 이사악으로부터 아무런 재산도 상속받지도 못하였음], 그곳에서 20년 동안 나그네살이를 하였고(창세기 31,38), 그런 다음에 자신의 가족들과 가축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되돌아 왔으며, 다른 한편으로, 야곱의 아버지인 이사악백여든 살까지 한껏 오래 살았는데(창세기 35,29),

질문 3:
 이사악레베카 둘 중에서, 과연 누구가 더 오래 살았을까요?

게시자 주: 그런데 에사우야곱이 태어났을 때에 이사악의 나이가 예순 살이었다고 하니 (창세기 25,26), 이사악은, 글자 그대로, 한껏 오래 살았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제27장의 비극이 발생한 시점은 에사우적어도 마흔 살이 넘었고 (창세기 26,34), 따라서 그의 아버지인 이삭악적어도 백 살이 되었을 때에 발생하였습니다 . 그리고 야곱은 자신의 외삼촌인 라빈이 살고 있던 하란에서 이십 년을 나그네살이를 하였으니 (창세기 31,38), 야곱이 하란에서 돌아왔을 때에 그의 아버지인 이사악의 나이는 적어도 백이십 살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미 적어도 백 살의 나이 때에 이미 눈이 멀어버린 이사악은, 야곱이 하란으로부터 돌아오고 난 이후에 많게는 육십 년을 더 살아, 백팔십 살에 죽었다고 하니 (창세기 35,29), 이사악은, 정말 글자 그대로, 한껏 살았다는 생각입니다.

6.
지금까지 말씀드렸던 바는, 창세기 본문들에 주어진 문장들을 서로 비교/검토하여 드렸던 것인데,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항상 충분하지가 않다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바로 위의 질문 3에 대하여, 창세기 본문에만 근거하여 답변을 드리는 것이 참으로 힘들다는 생각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창세기 35,8에서 "레베카유모 드보라가 죽어" 라는 언급이 갑자기 등장하는데, 설사 창세기 24,59"그리하여 그들은 누이 레베카와 그의 유모아브라함의 종과 그 일행과 함께 보내면서" 라는 부분을 기억하고 있더라도, 바로 위의 질문 3에 대하여, 창세기 본문에만 근거하여 이성적으로 납득할 만한 답변을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혹시 유다교측의 용도로 마련된 구약 성경 본문에 대한 주석서들인 탈무드(Talmud) 혹은 미드라쉬(Midrash) 등을 참고한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기원후 200년 이후에 비로소 마련된, 라삐들의 문헌들이기에, 역사적 가치를 전혀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지적이, 이사악의 아내인 "레베카"에 대한 설명이 별도의 항으로 주어져 있지 않은, 영어 가톨릭 대사전에 실린 "Isaac(이사악)"에 대한 설명의 제일 마지막에 주어져 있습니다:

출처: http://www.newadvent.org/cathen/08175a.htm

(발췌 시작)
The legends and various details concerning Isaac which are found in the Talmud and in Rabbinical writings are of no historical value.

탈무드에서 그리고 라삐의 저술들에서 발견되는 이사악에 관한 전설들과 다양한 세부 사항들은 어떠한 역사적 가치도 없습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하물며 "이사악"에 대하여서도 이러한데, 유다교측 용도로 마련된, 탈무드, 미드라쉬 혹은 라삐들의 다른 저술들에서 발견되는 "레베카"에 대한 이야기들은 어떠하겠는지요?

그리고, 영어 가톨릭 대사전에 주어진 "Jacob"에 대한 설명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갔습니다:

출처: http://www.newadvent.org/cathen/08261a.htm

(발췌 시작)
The Talmudic legends concerning Jacob are the acme of fancy.

야곱에 관한 탈무드 전설들은 공상의 절정입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질문 4: 칭세기 27,13에서 "레베카 스스로 받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저주(curse)"는 무엇일까요?

질문 4에 대한 답변: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i) 만약에 창세기 35,8에서 언급되고 있는 레베카유모가, 창세기 27,45에서 "내가 사람을 보내어 너를 그곳에서 데려오게 하겠다"에서 말해지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일 경우라면, 레베카는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의 얼굴을 거의 20년 동안(창세기 31,38) 보지 못하였는데, 이것은, 유다인들의 전통에 있어, "하느님의 축복(blessing)" 혹은 "하느님의 저주(curse)"대단히 현세적임을, 즉 하느님으로부터 이를 수여받는 해당 당사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 주어짐을, 고려할 때에, 분명히 저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자신의 남편인 이사악은 이미 눈이 멀어 버렸고 또 자신의 첫째 아들인 에사우는 절망의 절규를 이미 하였고, 그리하여 자신의 동생인 야곱에 대한 자신의 친모인 레베카의 편애를 증오하였을 것이기에,  레베카는 요셉이 없는 나머지 3명의 가족들 사이에서 적어도 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외톨이"가 되어버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ii) 만약에 (i)의 경우가 아니라고 한다면창세기 27,13에서 "레베카 스스로 받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저주(curse)"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창세기 본문만을 들여다 보고서는 제대로 알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상 이 두 가지 경우들에 있어, 레베카는 죽은 뒤에 가족 묘지인 막펠라 동굴에 묻힌 것만을, 세월이 상당히 흐른 뒤의 이야기인 창세기 49,31에서, 지나가면서 슬쩍, 레베카의 둘째 아들인 야곱이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러나 구약 성경 본문 어디에서도 언제, 어디에서 몇 살에 죽었는지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는 레베카는, 죽은 후에 공적인 애도의 장례식 없이 묻혔거나 혹은 공적인 애도의 장례식을 하지 못하고 묻혔다는 생각이며, 이둘 둘 다는 레베카는 죽고나서도 유족들로부터 외면을 당하였음을 뜻하기에, "불명예"이고, 더 나아가, "저주"에 해당한다는 생각입니다.

게시자 주: 그리고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생각에는, 아마도 유다교측에서는 (i)의 경우가 타당하다고 주장해 왔을 것인데, 설사 유다교측의 성경 외적 여러 문헌들에서 (i)의 경우를 지지한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그러한 지지와 충돌하고 있는 구약 성경 본문들이 구체적으로 있기에, 제대로 정당화 될 수 없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어지는 아래의 글 중에서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질문 5: 창세기 제27장에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는 공모의 주연인 레베카는 무슨 이유/근거로, 자신의 둘째 아들인 야곱에게, "내가 너에게 말하는 것을 듣고 시키는 대로 하여라" (창세기 27,8), "너는 그저 내 말을 듣고, 가서 짐승이나 끌고 오너라" (창세기 27,13), 그리고 "내 아들아, 내 말들 듣고 일어나 하란에 있는 내 오라버니 라빈에게로 달아나라" (창세기 27,43) 등의 명령을 하였던 것인지요?

질문 5에 대한 답변: 다음과 같은 창세기 25,22-23 입니다:

(발췌 시작)
22 그런데 아기들이 속에서 서로 부딪쳐 대자, 레베카는 "어째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서, 주님께 문의하러 갔다.

23 주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너의 배 속에는 두 민족이 들어 있다. 두 겨레가 네 몸에서 나와 갈라지리라. 한 겨레가 다른 겨레보다 강하고 동생을 섬기리라."
(이상, 발췌 끝)

그런데, 여러분들 생각에,
 
질문 6: 레베카 잘못이 어디에 있는 것 같습니까?

질문 6에 대한 답변: "동생을 섬기리라" 라는 것을 주님으로부터 듣고서, 레베카는, 나중에 태어날 동생(즉, 야곱)이 자신의 남편인 이사악으로부터 "장자의 권리""아버지의 축복" 등을 물려받는 것이 창세기 25,23에서 말해지고 있는 "주님의 뜻"이라고 굳게 믿고 또 예단하여, 따라서, 이것이 하느님의 주도로 이루어지도록,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성모님처럼, 자신의 둘째 아들인 야곱에게 "하느님께서 시키는 대로 하라"고 명령하였던 것이 아니라, 이것을 자신이 직접 구현하기 위하여 레베카는, 하느님께 문의하지도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의지와 방식대로, 창세기 제27장에서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인 야곱과 함께 하였던 공모의 주역을 스스로 떠맡았던 것인데, 이러한 자의적/임의적/작위적 접근이 바로 레베카잘못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바는,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생각에, 다음과 같습니다: (i) 야곱이 하란으로 도망을 갈 때에 "지팡이 하나만 짚고" (창세기 32,11) 요르단 강을 건넜으며, 즉 자신의 아버지인 이사악으로부터 아무런 재산 상속을 받지 못하였고(ii) 창세기 어느 구절에도 둘째 아들인 야곱이 자신의 친형인 에사우에 대하여 장자의 권리를 실제로 행사하였다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으며, 그러나 대신에(iii) 야곱이 이십 년 동안의 하란에서의 나그네살이 이후에 자신의 형인 에사우를 처음 만나게 될 때에, "주인이신 에사우께" (창세기 32,19) 라고 구체적으로 밝힘으로써, 야곱 스스로 에사우의 장자의 권리를 오히려 인정하였다는 생각입니다.

질문 7: 창세기 27,38에서 에사우는 "목 놓아 울었다"고 하는데 전후 문맥에 비추어 볼 때에, 이 울음은, 크게 슬퍼하는 절망의 절규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혹시라도 야곱 "목 놓아 울었다" 는 경우가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지요? 만약에 그러한 기록이 구약 성경 본문 중에 있다면, 야곱은 왜 "목 놓아 울은" 것인지요? 에사우처럼 커다란 슬픔과 절망 때문입니까?

질문 7에 대한 답변: 우선,

여기를 클릭하면, <----- 반드시 클릭하여 확인하십시오.

구약 성경 본문 중에서 "목 놓아 울었다" 는 표현이 있는 절들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굿뉴스 서버 제공의 성경 본문 검색 엔진은, 구약 성경 본문 중에 총 9개의 절들에 이 표현이 등장함을 검색 결과로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창세기 29,11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발췌 시작)

※ 총 9절에서 "목 놓아 울었다"이(가) 검색되었습니다
1 구약성경 창세기 21:16 활 한 바탕 거리만큼 걸어가서 아기를 마주하고 주저앉았다. ‘아기가 죽어 가는 꼴을 어찌 보랴!’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그는 아기를 마주하고 주저앉아 놓아 울었다.
2 구약성경 창세기 27:38 그러자 에사우가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아버지께는 축복이 하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까? 아버지, 저에게, 저에게도 축복해 주십시오.” 그런 다음 에사우는 놓아 울었다.
3 구약성경 창세기 29:11 그런 다음 야곱라헬에게 입 맞추고 놓아 울었다.
4 구약성경 판관기 2:4 주님의 천사가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을 하자, 그들은 놓아 울었다.
5 구약성경 사무엘상 11:4 전령들은 사울의 기브아에 가서 백성에게 소식을 전하였다. 그러자 백성은 모두 놓아 울었다.
6 구약성경 사무엘상 30:4 다윗과 그의 수하 군사들은 더 이상 울 기운조차 없을 때까지 놓아 울었다.
7 구약성경 사무엘하 13:36 그가 막 이 말을 마쳤을 때, 왕자들이 도착하여 놓아 울었다. 임금과 신하들도 몹시 슬프게 울었다.
8 구약성경 사무엘하 15:23 이렇게 그 모든 사람이 지나갈 때 온 세상이 놓아 울었다. 임금이 키드론 시내를 건너고, 사람들도 모두 그곳을 건너 광야로 난 길을 향하였다.
9 구약성경 에즈라기 3:12 사제들과 레위인들과 각 가문의 우두머리들 가운데에서 주님의 옛집을 보았던 많은 노인들은, 자기들의 눈앞에서 이 주님의 집 기초가 놓인 것을 보고 놓아 울었다. 그러는가 하면 다른 많은 이들은 기뻐하며 청껏 환호성을 올렸다.

창세기 29,11에서의 야곱의 경우를 제외하고, 나머지 "목 놓아 울었다" 는 모두가 "크게 슬퍼하여 목 놓아 울었다" 임을 독자들 누구라도 전후 문맥 안에서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생각에, 창세이 29,11에서 야곱도 또한 "크게 슬퍼하여 목 놓아 울었다" 고 생각하십니까? 전혀 이것이 아니라는 것이, 다음에 있는, 창세기 29,11에 대한 NAB(New American Bible)의 주석입니다:

출처: http://old.usccb.org/nab/bible/genesis/genesis29.htm

(발췌 시작)
[11] Burst into tears: literally "raised his voice and wept," i.e., for joy.

[11] 목 놓아 울었다: 글자 그대로 "자신의 목소리를 키웠으며 그리고 눈물을 흘렸다," 즉, 기쁨 때문에.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즉, 야곱창세기 29,11에서 장차 자신의 아내가 될 "라헬"을 처음 만났을 때에, "라헬"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라헬"에게 제대로 설명도 하지 않은 채, 일단 "라헬"에게 입맞춤부터 먼저 하고 나서, 곧바로 이어서 "크게 기뻐하여 목 놓아 울었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보았듯이, 구약 성경의 몬문들에서 다른 사람들은 "크게 슬플 때에 목 놓아 우는데", 이와는 정반대로, 야곱 "크게 기쁠 때에 목 놓아 우는" 자이니, 따라서 창세기 29,11야곱다른 유다인들과 얼마나 다른 심리(psychology)와 성격(character)을 지녔는지를 잘 알려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상, 질문 7에 대한 덥변 끝).

게시자 주: 다음은 유다 백과사전에 주어진, 라삐 문헌에 있는 "레베카의 가족(the family of Rebehak)"에 대한 언급입니다. 여기서 "가족"이란 레베카의 친정 가족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사악이 의로운 자라고 또한 직전에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처: http://www.jewishencyclopedia.com/articles/12610-rebekah

(발췌 시작)
Isaac's prayer alone was answered (comp. Gen. xxv. 21), because he was a righteous man, and the son of a righteous man, while Rebekah's whole family was wicked (Yeb. 64a; Gen. R. lxiii. 5).

이사악의 기도만이 응답을 받았는데(창세 25,21 참조), 왜냐하면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으며, 그리고 의로운 사람의 아들이었으나, 이와는 달리 레베카의 전체 가족은 사악하였기(wicked) 때문이다 (Yeb. 64a; Gen. R. lxiii. 5).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유다 백과사전에서 레베카의 전체 가족이 사악하였다는 것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생각에,

(i) 레베카에 대하여 창세기에 기록된 바들 뿐만이 아니라, 

(ii) 창세기에 기록된 야곱의 외삼촌이며 또한 야곱의 장인인 라반의 교활함, 그리고 

(iii) 라반의 딸로서 야곱의 두 명의 아내들 중의 한 명인 "라헬"의 도둑질 (창세기 31,30.34) 등을 또한 고려하였다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이 라삐 문헌은, 비록 레베카가 의로운 자인 이사악과 혼인을 하였으나, 레베카 자신은 여전히 사악하였다(wicked)고 말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상, 게시자 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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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여태까지는 창세기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는데, 지금부터는, 가톨릭 주석서들에 근거하여, 창세기에, 특기 창세기 제27장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야곱의 처신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창세기 이외의 성경 본문들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7-1. "주석 성경"창세기 27,35의 두 번째 문장인 (이사악의 말) "네 동생이 와서 나를 속이고 네가 받을 축복을 가로챘구나." 의 옆에 에제 9,3-4를 명기하고 있습니다.

7-2. 그리고 "주석 성경"창세기 27,36의 세 번째 문장인 (에사우의 말) "야곱이라는 그 녀석의 이름이 딱 맞지 않습니까?" 의 옆에 호세 12,4를 명기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7-3. 창세기 27,1-45에 대한 NAB(New American Bible)내용 요약 주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위의 "주석 성경"의 주석들에서 언급하고 있는 동일한 구약 성경의 구절들을 또한 언급하고 있음을 우선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출처: http://old.usccb.org/nab/bible/genesis/genesis27.htm

(발췌 시작)
[1-45] What Jacob did in deceiving his father and thereby cheating Esau out of Isaac's deathbed blessing is condemned as blameworthy, not only by Hosea (Hosea 12:4) and Jeremiah (Jeremiah 9:3), but also, indirectly, by the Yahwist narrator of the present story, who makes the reader sympathize with Esau as the innocent victim of a cruel plot, and shows that Jacob and his mother, the instigator of the plot, paid for it by a lifelong separation from each other. The story was told because it was part of the mystery of God's ways in salvation history--his use of weak, sinful men to achieve his own ultimate purpose.

[1-45] 자신의 아버지를 속임(deceiving)에 있어 그리고 바로 그것에 의하여 이사악(Isaac)의 임종 축복(deathbed blessing)을 에사우(Esau)를 속여 빼앗음(cheating)에 있어 야곱(Jacob)이 행하였던 바는, 호세아(호세 12,4)예레미야(예레미야 9,3)에 의하여서 뿐만이 아니라, 또한 간접적으로, 독자로 하여금 에사우에 대하여 한 개의 잔혹한 음모(a cruel plot)의 결백한(innocent) 희생자로서 동정하게 만드는, 그리고 이 음모의 유발자(instigator)인 야곱과 그의 어머니가 서로로부터 오랜 기간 동안의 이별(離別, separation)에 의하여 이 음모에 대하여 대가를 치렀음(paid)을 보여주는, 현재의 이야기에 대한 야훼계 이야기하는 사람(the Yahwist narrator)에 의하여마땅히 비난을 받을 만하다고 단죄됩니다(is condemned as blameworthy).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게시자 주: 제가 지금까지 들여다 본 유다교측의 문헌들 어디에서도 위와 같은 언급을 하고 있는 경우들을 읽지를 못하였습니다만, 그러나 이들 두 예언자들의 예언활동 당시에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처하였던 상황 안에서 호세아서 12,4와 전후 문장들과 예레미야서 9,3와 전후 문장들, 그리고 이사야서 43,27과 전후 문장들을 직접 읽어보면, 위의 NAB의 주석이 대단히 적절함을 알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7-4.

7-4-1. NAB(New American Bible)호세아서 제12장"Infidelity of Israel(이스라엘의 불충성)"이라는 소제목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새 번역 성경"호세아서 12,3-7에 "야곱의 자손들아, 회개하여랴" 라는 소제목을 붙였습니다.

(발췌 시작)
새 번역 성경 호세아서 12,4: 그는 모태에서 제 형을 속이고 어른이 되어서는 하느님과 겨루었다.
(이상 발췌 끝)

(발췌 시작)
NAB 호세아서 12,4: In the womb he supplanted his brother, and as a man he contended with God;
(이상, 발췌 끝)

열두 명의 소 예언자들 중의 두 번째인, 예언자 호세아는 북쪽 왕국인 이스라엘 왕국의 예로보암 2세(재위기간: 기원전 783-743년)의 통치 시기에 자신의 예언 임무를 시작하였으며 그리고 아마도 기원전 721년에 아시리아 제국의 군대에 의한 사마리아(Samaria)의 함락, 즉, 북쪽 왕국인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 바로 직전까지 계속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바알 신 등의 잡신들을 섬기는 예식을 하느님의 경배 예식에 도입하는 등, 타락한 이스라엘 왕국의 몰락에 즈음하여, 예언자 호세아는 이 불충실한 왕국의 근본적 잘못이 어디에 있는지를 고발하였다는 생각입니다.

7-4-2. "새 번역 성경"이사야서 43,22-28"배은망덕한 이스라엘"이라는 소제목을 붙였습니다.

(발췌 시작)
새 번역 성경 이사야서 43,27: 너의 첫 조상부터(*) 죄를 지었고, 너의 대변자들도 나에게 반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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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 성경 주석] 여기에서는 하느님의 "벗" (41,8) 아브라함이 아니라 야곱을 가리킨다 (창세 25,26; 27,36; 호세 12,3).
-----
(이상, 발췌 끝).

(발췌 시작)
NAB 이사야서 43,27: Your first father sinned; your spokemen rebelled against me.
(이상, 발췌 끝).

다음은, 위의 이사야서 43,27과 관련하여, "주석 성경"이사야서 입문, 제2085쪽에 주어진 설명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발췌 시작)
자기들의 정성에도 고마워하실 줄 모른다고 주님을 탓하는 몰염치한 자들에게 (43,22-24) [이사야] 예언자는, 고마워할 줄 모르는 자들은 바로 스스로 불행의 원인인 죄악을 쌓아 온 그들 자신이라고 반박한다(43,24-28).
(이상, 발췌 끝).

7-4-3. "새 번역 성경"은 예레미야서 9,1-5"진실이 사라지다" 라는 소제목을 붙였습니다.

(발췌 시작)
새 번역 성경 예레미야서 9,3: 누구나 제 이웃을 조심하고 어떤 형제도 신뢰하지 마라. 형제들이 모두 사기꾼이요 이웃들이 모두 중상꾼이 되어 돌아다닌다.
(이상, 발췌 끝).

(발췌 시작)
NAB 예레미야서 9,3: Be on your guard, everyone against his neighbor; put no trust in any brother. Every brother apes Jacob, the supplanter [모든 형제들이, 속이는 자인, 야곱을 흉내낸다], every friend is guilty of slander.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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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자 주: 지금까지는 주로 구약 성경 본문에 의존하면서 살펴 보았기에, 유다교측의 해석과 그리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성경 본문의 해석에 있어, 지금까지 들여다 본 "자구적 의미/어의"에 근거한, 그리스도교측의 "영성적 해석"에 더 치중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작성된 글의 크기 때문에, 부득불 두 개의 글들로 나누어야 하였습니다.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이 글의 후반부를 읽을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361.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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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업에 소요된 시간: 약 30시간 (자료 조사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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