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연중 제24주일(나해) 마르 8,27-35; ’21/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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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1-09-09 ㅣ No.4775

연중 제24주일(나해) 마르 8,27-35; ’21/09/12





 

 

제가 보좌 신부 시절에 모셨던 주임 신부님이 계십니다. 그 신부님은 한 달에 반 이상을 밖으로 활동을 나가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신부님이 그렇게 자리를 비우셨어도, 성당에는 이렇다 하게 큰 어려움이 없었고, 그야말로 큰일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이유를 그 신부님이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성체조배를 하면서 성당과 교우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모습에서 찾았습니다. 그 신부님은 기도 중에, 그날 하루 신부님이 활동하실 수 있도록 함께하시며 힘을 주시고, 또 그 신부님이 활동하시는 동안 성당과 교우들에게 안 좋은 일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도록 지켜 주시라고 기도하시기 때문이라고 깨달았습니다. 그 덕분인지 본당 신자들도 우리 신부님은 늘 좋은 일을 하시고 다니신다!”라며 믿고 의지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각박하고 경쟁이 하도 심해서, 한 번이라도 더, 한 걸음이라도 더 뛰어야만 그나마 간신히 먹고살 수 있다고 생각하여, 하루 종일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활동합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노력한다고 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프라도 사제회 창설자 안뜨완 슈브리에 신부님은 성탄 밤 구유 앞에서 기도하면서 이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나는 그동안 홍수가 났을 때나 고아들에게 먹을 것을 찾아 얻기 위해 분주하게 여기저기 쫓아다녔지만, 정작 살려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구나!“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바치느냐 안 바치느냐의 여부에 따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시거나 안 주시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인간적인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고, 아무것도 안 하면서, 기도만 한다고 해서 먹을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기도를 한다고 해서 죽을 사람이 살아나거나 기도를 안 바쳤다고 해서 살 사람이 죽을 운명에 빠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바치는 이유는 우리를 살게 해주시고 오늘 아침 눈을 뜨며 숨을 쉬게 해주시도록 배려해주신 주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과 감사를 올려 드리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자녀다운 찬미를 주 하느님께서는 즐겨 들어주십니다.

 

우리가 기도를 바치는 이유는 주 하느님께서 오늘 나와 함께하시면서, 우리가 하는 일을 주님의 뜻에 맞도록 이끌어 주시고, 주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사 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바치는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시고, 우리가 그 뜻에 따라 활동함으로써 우리가 하는 일을 축복해주시고 열매를 맺어 주시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고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좋은 의도로 많은 노력을 기울여도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 신학생 시절 8시에 공동 저녁기도를 마치면 대침묵 속에서 10시까지 공부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개별적으로 성당에 남아 8시부터 9시까지 복음묵상을 더 하고 나면, 공부 시간은 9시부터 10시까지로 한 시간 밖에 안 됩니다. 하지만 한 시간 기도하고 한 시간 공부하면, 두 시간을 하는 것보다 더 집중하게 되어서 그런지, 하나를 봉헌하면 열 배로 갚아주시는 주님의 은총이 있어서 그런지, 충분한 공부를 하게 되었다는 경험이 저 자신을 오늘까지 기도하게 해주고 지탱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카리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걸으시면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7) 그러자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28) 라고 답합니다.

당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에게 비유한 내용을 보자면, 세례자 요한이 메뚜기와 들꿀만 먹고 광야에서 청빈하고 무결점으로 살면서, 헤로데 왕이 동생의 아내를 데려다가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는 사실을 죽음을 무릅쓰고 직언을 하다가 헤로데가의 눈 밖에 나서, 잡혀 죽을 정도로 순결하고 고귀한 영혼이 예수님으로 다시 왔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엘리야에 비유하는 내용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농사를 지으며 정착하면서부터, 야훼 하느님 말고 농사의 신이라고 하는 바알 신께 제사 지내는 농사풍습을 따르는 백성들에게, 과연 농사를 잘 짓게 해주고 진정 백성들을 살리시는 참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가뭄이 깊어지자 가르멜 정상에서 바알의 예언자들과 누구에게 기도를 해야 하늘에서 비를 내려 주시는지 기도 내기를 하여 밝힌 예언자였고, 마지막 날 죽지 않고 다시 살아 돌아오리라고 믿었던 데에서 기인합니다.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내용은 모세와 같이 이스라엘을 식민세력에게서 해방시킨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하는 모습이며, 그 역시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 마지막날 다시 살아오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현실구조 안에서 살아가면서도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주 하느님의 뜻을 찾는 이들을 그리워하고 그분들이 자신들과 같이 나약한 백성들을 구하러 다시 오실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말을 들으시다가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자며 활동하던 제자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하문하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29) 베드로는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29) 라고 고백합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남들이 말하는 나 말고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며, 무엇을 기대하며, 어떻게 해주리라고 알고 있느냐?

 

남들이 경험하고 만났다고 하는 나 말고, 너는 나랑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 교회에서 말하고, 교리서에 서 있는 나 말고, 너는 진짜 나를 어떻게 알고 있느냐? 네가 아는 나는 누구냐?

 

내가 너에게 늘 다가가고, 너와 함께하면서 나를 드러내기 위해 보내는 메시지를 받아 듣고, 그 말씀에서 힘을 얻고, 그 말씀을 실현하면서 나를 만나며 경험하고 있느냐?

 

그렇게 고백을 했으면서도, 베드로는, 머리와 입으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서도, 실제로 그리스도의 사명과 본질에 대해서는 망각한 채, 자신과의 개인적인 관계만을 강조하며 머무르는 어리석은 우를 범합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시자, 베드로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구세주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섬기며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잡혀 죽어야 한다는 점도 인정할 수 없었겠지만, 무엇보다 자신들의 곁을 떠나 그냥 그렇게 죽어버리신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구원사업보다는 현세의 연과 자신과의 관계에만 매달려 있는 베드로에게 호통을 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33) 그러시고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와 사명에 대해 더욱더 강조하시면서 이야기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34-35)

 

어쩌면 내가 살아있어야 내가 믿는 하느님도 나와 함께하시므로, 내가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와의 이해관계 속에서만 살아 계시지 않고, 나와 우리 모두의 구원을 향한 열린 지평에 살아 계십니다. 내가 나만의 이해관계와 나와 내 가족, 내 친지들만의 신분 상승과 물질적인 풍요를 꿈꾸며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하고, 내 생각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예수님을 붙잡는다면, 예수님은 우리 곁을 쓸쓸히 떠나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고 기도하며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너와 우리 모두의 구원을 향한 주님의 뜻에 맞추어 살아간다면, 주 예수님께서는 진정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주님 구원사업을 이루실 것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입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 성인분들 그리고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순교 복자분들이 목숨을 걸고 주님의 뜻을 따랐던 순교 정신을 오늘 우리 가슴 속에 되새깁시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이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또 그렇게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도록,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을 찾고 또 실현하면서, 주님의 나라를 세워나가기로 합시다.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 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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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4주일 꽃꽂이

http://bbs.catholic.or.kr/home/bbs_view.asp?num=4&id=184265&menu=frpeterspd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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