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가난한 자인 라자로가 실천하였을 선행들 - 루카 16,19-31 #<다연중26주복음> #<사순2주목복음> 1444_piety [_배은망덕] good_wor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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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14 ㅣ No.1459

 

질문 1:

루카 복음서 16,19-31에 등장하는 라자로(Lazarus)라고 불리는 가난한 자가 살아있는 동안에 실천할 수 있는 선행(good works)들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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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부의 말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글들은 어떤 특정인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하여 마련된 글들이 결코 아니기에, 다음의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1) 지금까지 필자의 글들을 읽고서 필자에 대한 "분노(anger)" 혹은 "질투(envy)"를 가지게 된 분들은, 혹시라도 그분들께 "걸림돌(stumbling block)"일 수도 있는, 많이 부족한 죄인의 글들을 더 이상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2) 그리고 위의 제(1)항의 당부의 말씀을 읽고도 굳이 이 화면의 아래로 스스로 이동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의 아래의 본글을 읽는 분들은, 필자에 대한 "분노(anger)"와 "질투(envy)" 둘 다를 가지지 않을 것임에 동의함을 필자와 다른 분들께 이미 밝힌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3) 그리 길지 않은 인생 여정에 있어, 누구에게나, 결국에, "유유상종[類類相從, 같은 무리끼리 서로 사귐 (출처: 표준국어대사전)]"이 유의미할 것이라는 생각에 드리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답변:

+ 찬미 예수님!

1. 들어가면서

1-1.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다해 연중 제26주일 매년 사순 제2주간 목요일 복음 말씀루카 복음서 16,19-31의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missaid=5658&gomonth=2013-09-29

(발췌 시작) 

19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20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21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22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23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25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26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27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29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30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31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이상, 발췌 끝).

1-2. 그런데 위의 성경 본문은 위의 질문에 대한 어떠한 직접적인 언급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간접적으로 라자로는 죽은 후에,  "아브라함의 곁"에,  즉 "아브라함의 품"에 있다고 언급함으로써, 라자로가 죽은 후에 "위로"를 받고 있음을 분명하게 명기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다들 잘 알고 계시겠지만, 아브라함 살아있을 동안에 부자였습니다.

1-3. 결국에, 위의 질문은 다음의 질문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질문 2: 종기투성이의 몸을 가진 가난한 자인 라자로는 도대체 어떠한 선행(good works)들을 살아있는 동안에 실천하였기에 죽은 후에 "위로"를 받고 있을까요?

2.
잠깐만 생각을 하더라도, 위의 성경 본문으로부터 우리는 다음을 연역적으로 추론할 수 있을 것입니다:

2-1. 언뜻 보기에, 종기투성이의 몸을 가진 가난한 자인 라자로가 살아있는 동안에 아무런 선행을 실천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자신의 종기투성이의 몸 때문에라도 라자로는 살아있는 동안에 아마도 하느님께 참으로 간절한 기도(prayers)들을 날마다 열심히 바쳤을 겄입니다. 아닐까요? 이 글을 읽으시는 분 누구라도, 라자로처럼 종기투성이의 몸을 자신이 지금 가지고 있다면, 자신의 질병에 대하여 죽는 날까지 하느님을 계속 원망만 할까요... 아니면, 철들고 나서부터는, 죄인인 자신에게 치유와 자비의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을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날마다 간절하게 기도할까요? 아마도 정말 열심히 기도할 것입니다. 아닐까요?

2-2. 거동이 불편한 종기투성이의 몸을 가진 가난한 자인 라자로가 자주 끼니를 걸렀을 것임을 우리는 위의 성경 본문으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즉, 라자로는 단식(fasting)에 대단히 익숙하였을 것임을, 즉, "라자로는 살아있는 동안에, 식사 때마다, 단식(fasting)을 밥 먹듯이 하였을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아닐까요?

게시자 주:
(1) 영적인 가난의 영성을 추구하는 대부분의 가톨릭 수도회 생활이 기도와 단식을 일상 생활화하고 있음으로부터 우리는, 특히 배고픔이 영성적으로 부끄러운 일 혹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3년 10월 30일]

(2) 일반적으로, 가난한 자의 경우에, 자신의 이웃에게 자선 제공(almsgiving)까지 하여야 할 의무가 없음은 다음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Ia IIae, q32 에 주어져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62.htm <----- 필독 권고

그러나 이와는 달리, 자신의 이웃들에게 자선 제공의 실천이 여유가 있는 분들에게 한하여 의무지워진 규범(precept)이라는 가르침은 바로 위의 주소에 있는 신학 대전에 주어져 있습니다.

[이상, 내용 추가 끝].

2-3. 그리고 이 병들고 가난한 라자로에게 그의 이웃들이 자선을 베풀었을 때에, 이 라자로는 자신의 이웃들에게 감사의 예를 갖추었을 것이고 그리고 또한, 이들 이웃들의 선행들을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실 것을, 즉 그들의 선행을 적정 공로로 인정해 주실 것을 하느님께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특히, 이 병들고 가난한 라자로가, 질병과 배고픔으로부터 올 수도 있는 유혹(temptation)절망/자포자기(despair)먼저 물리쳐야만, 이웃의 도움에 대하여 하느님뿐만이 아니라 이웃에게도 감사할 수 있었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닐까요?

2-4. 다른 한편으로, 가톨릭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세 개의 (윤리적) 탁월한 선행들(the three eminent good works)"로 불리어 온 바는 "기도(prayer), 단식(fasting), 그리고 자선 제공(almsgiving)"으로 구성되어 있음은 다음에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44.htm <----- 필독 권고

병들고 가난한 자인 이 라자로는, 아무튼, 이들 세 개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piety), 즉 이들 세 개의 의로운 일들에서  "기도(prayer), 단식(fasting), 이들 두 개에 충실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2-5. 비록 이 라자로가 자신의 질병과 가난 때문에, 다른 이들을 물질적으로 도와주는 자선 제공(almsgiving)을 몸소 실천할 수는 없었을 것이나, 그러나 라자로는 다른 이들이 그에게 자비를 베푸는 선행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결과적으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정할 수도 있는 공로, 즉 적정 공로를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을 인데, 이것도 또한 윤리적 행(morally good works) 중의 하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말씀드린 바에 대하여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분들께서는, 예를 들어, 소속 본당 주임신부님 등의 성직자들의 경우를 생각해 보도록 하십시오. 우리들이  평소에 "세 개의 (윤리적) 탁월한 선행들(the three eminent good works)"를 실천하는 삶을 살도록 사목적으로 인도하는, 특히 자선 제공(almsgiving)을 실천할 수 있도록 도움이 필요한 다른 본당, 수도회 등에 십시일반으로 물적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를 한 번씩 제공해 주심을 생각하도록 하십시오. 힘들고 가난한 이웃을 도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힘써 돕지 않는, 소위 말하는, "태만의 죄(the sin of ommission)"를 저지르지 않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라자로는, 예를 들어 성직자들처럼, 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레위기 21,8은 다음과 같이 명기하고 있습니다: "사제는 너희에게 거룩한 사람이다.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나 주님이 거룩하기 때문이다."

게시자 주: 성경 본문에서 말하는 "거룩함(holiness)"은 곧 "의로움(righteousness)"을 말한다는, 다해 연중 제4주일 복음 말씀(마태오 5,1-12, 진복팔단)제6절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은 다음에 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a_ot_4.htm <----- 필독 권고

(발췌 시작)
6. The notion of righteousness (or justice) in Holy Scripture is an essentially religious one (cf. notes on Matthew 1:19 and 3:15; Romans 1:17; 1:18-32; 3:21-22 and 24). A righteous person is one who sincerely strives to do the Will of God, which is discovered in the commandments, in one's duties of state in life (social, professional and family responsibilities) and through one's life of prayer. Thus, righteousness, in the language of the Bible, is the same as what nowadays is usually called "holiness" (1 John 2:29; 3:7-10; Revelation 22:11; Genesis 15:6; Deuteronomy 9:4).

6. 성경에 있어 의로움(righteousness) [혹은 정의(justice)]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신앙적 의로움(religious one)[즉, 경신덕(the virtue of religion]을 말합니다(마태오 복음서 1,19 그리고 3,15; 로마 1,17; 1,18-32; 3,21-22.24를 참조하라).(*) 의로운 이는, 계명들 있어, [사회적, 직업적 그리고 가족 부양 의무(family responsibilities)들 등의] 삶에 있어 지위에 기인하는 각자의 의무(one's duties of state in life)들에서 그리고 각자의 기도의 삶(one's life of prayer)에서 발견되는, 하느님의 뜻(the Will of God)(**)을 행하려고 진실로 노력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경 언어에 있어, 의로움은 오늘날 보통 "거룩함[holiness, 성덕(聖德), sanctity, sanctitas]이라고 불리는 바"와 
동일합니다
(1 요한 2,29; 3,7-10; 요한 묵시록 22,11; 창세기 15,6; 신명기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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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1) 여기서 말하는 "신앙적 의로움[즉, 경신덕(the virtue of religion)]"은 사람의 "하느님에 대한 정의(justice)" 를 말하며, 이에 대한 자세한 글은 다음에 있으니 필독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799.htm 

(2) "경신덕" = "거룩함" (성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 대전) = "애덕이라는 완미" 에 대한 자세한 글은 다음에 있으니 필독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333.htm 

(**) 번역자 주: 
(1) "하느님의 뜻(the Will of God)" = "하느님의 사랑(the love of God)" 에 대한 글은 다음에 있으니 필독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70.htm 

(2) "하느님의 사랑(the love of God)의 공정함" = "하느님의 정의(justice)" 에 대한 글은 다음에 있으니 필독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799.htm 

(***) 번역자 주: 다음에 있는 글들을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holy_vs_sacred_concept_confusio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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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St. Jerome comments ("Comm. on Matthew", 5, 6), in the fourth Beatitude our Lord is asking us not simply to have a vague desire for righteousness: we should hunger and thirst for it, that is, we should love and strive earnestly to seek what makes a man righteous in God's eyes. A person who genuinely wants to attain Christian holiness should love the means which the Church, the universal vehicle of salvation, offers all men and teaches them to use--frequent use of the Sacraments, an intimate relationship with God in prayer, a valiant effort to meet one's social, professional and family responsibilities.

성 예로니모(St. Jerome)가 주석하듯이["Comm. on Matthew", 5, 6], 네 번째 참 행복에서 우리의 주님께서는 의로움(righteousness)을 위한 모호한 바람을 단순히 가질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것을 갈망하고 목말라 하여야만 할 것을, 즉 하느님의 눈들에 있어 사람을 의롭게 만드는 바를 추구하는 것을 사랑하여야만 하고 그리고 진지하게 추구하여야만 함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을 진실로 얻고자 하는 자는, 구원의 보편적 수단(the universal vehicle)인 교회가 모든 사람들에게 제공하며 그리고 그들에게 활용하도록 가르치는 수단들인, 성사들의 빈번한 활용을, 기도 안에서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자신의 사회적, 전문적 그리고 가족에 대한 책임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용감한 노력을 사랑하여야만 합니다.
(이상, 발췌 끝)
(이상, 게시자 주 끝)

게시자 주: 여기까지가 질문 1에 대한 답변입니다. 지금부터는 하느님과 이웃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가짐, 성향(disposition)에 대하여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
3-1.
가난하고 병든 자인 라자로가 위의 제2-1항제2-2항에서 말씀드린 바들을 설사 실천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하느님과 이웃들로 구성된 "너(you)", 즉 "상대방들"에 대한 라자로의 마음가짐(성향, disposition)과 라자로 고유의 자유 의지(free will)의 행사와 관련하여,

(i) 하느님을 원망하면서 그러나 끼니 때마다 배고픔의 해소라는 현실적 이유 때문에 피동적으로(passively), 혹은

(ii) 자신에게 물심 양면의 도움을 제공해 준 자신의 이웃들을 향하여, "자신이 받은 도움들에 대하여 또 하나의 "너"인 하느님께 이미 감사의 기도를 바쳤으므로, 도움을 준 당사자들에게는 굳이 감사의 표현을 할 필요/이유가 없다"는 사람의 행위에 대한 자의적인 판단(judgment)에 따른 생각, 말, 혹은 행동을 하였는데도,  즉 위의 제2-3항에서 말씀드린 바를 실천하지 않았는데도,

라자로가 죽은 후에 "아브라함의 품"에 머무르는 것을 하느님께서 그에게 당연하게 허락하셨을까요?

아마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해 보더라도, 그러한 종류의 생각, 말, 혹은 행동을 하는 가난한 라자로는,

(1) 우선적으로, 하느님과 자신의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자이며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새 계명으로 주신 사랑은,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고, 서로 사랑하여야 하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2) 사람의 행실에 대한 심판/판단(judgment)이라는 하느님의 고유 권한(authority)을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이미 침범/훼손한 자이기 때문이며, 또한

(3) 여기를 클릭하면 더 자세한 내용을 읽을 수 있는, 하느님의 평화(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 요한 복음서 14,27)가 이 세상에 널리 퍼지는 것을 방해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4) (제안 한 개) 특히 (ii)의 경우에, 그러한 종류의 생각, 말, 혹은 행동을 하는 가난한 라자로는 이미 "의로운 자(the just)"인 "영적으로 가난한 자(poor in spirit)"가 아니며, 그는 "약한 자", 즉 "나약한 자(the weak)" 즉, "의롭지 않은 자(the unjust)"아니고,  그는 더 나아가, 소위 말하는,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piety)"을 존중하지도 않고 준수하지도 않는 "악한 자(the evil)", 즉 "습관적으로 윤리적으로 악한 자(the morally evil)", 즉 "사악한 자(the wicked)" 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라자로를 두고서, 우리는 "배은망덕(背恩忘德)한 라자로" 라고 부를 것을 제안합니다.

게시자 주: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piety)" 이라는, 정의(justice)라고 불리는 윤리덕에 부속되는, 윤리덕(moral virtue) 및 성령의 선물(the gift of the Holy Spirit)에 대한 글들은 다음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piety_concept_error.htm <----- 필독 권고

질문 3: 여러분들 생각에, 상대방의 관용(generosity)과 자비(benevolence) 마저도 자신의 잇속을 챙기기 위하여 계산하여 파 먹는 이기주의자들에 포함되는,  자신에게 도움을 준 이웃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을 가지지도 않는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piety)"을 존중하지도 않고 준수하지도 않는  "배은망덕(背恩忘德)한 라자로"여러분들의 주변에 그리고 우리 사회에 점차 늘어나는 것을, 당신의 심판(Judgment)에 있어 공의로운 분이신 하느님께서, 원하실 것으로 생각하시는지요???

아마도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piety)"을 존중하지도 않고 준수하지도 않는 "배은망덕(背恩忘德)한 라자로"가 우리 사회에 점차로 늘어나고 있는 데에 있을 것입니다. 

3-2. 이 글에서 들여다 보고 있는 루카 복음서 16,19-31에 기록된 비유 [소제목: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예수님으로부터 자신들의 귀로 직접 들었을 청중들인 예수님의 동시대인들인 유다인들은 다음의 집회서 12,1-7의 내용을 대단히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루카 복음서 16,19-31에 기록된 비유 [소제목: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의 의미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집회서 12,1-7의 내용 아래에서 학습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출처: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발췌 시작)
선행의 규칙 
1 선을 행할 때에는 누구에게 하는지를 알아라. 그래야 너의 선행에 고마움이 돌아오리라. 
2 경건한 이에게 선을 행하여라. 그러면 보상을 받으리라. 그에게서 보상을 받지 못하면 지극히 높으신 분에게서 받으리라. 
3 악행을 고집하는 자에게는 좋은 일이 없다. 자선을 베풀지 않는 자도 마찬가지다. 
4 경건한 이는 도와주고 죄인은 돕지 마라. 
5 겸손한 이에게 선을 행하고 불경한 자를 돕지 마라. 불경한 자에게는 음식을 감추고 주지 마라. 그가 음식을 먹고 너를 제압할까 두렵다. 네가 그에게 한 모든 선행의 대가로 악행이 두 배로 너를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6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죄인들을 미워하시고 불경한 자들에게 징벌로 되갚아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징벌의 날까지 그들을 지켜보신다. 
7 선한 이는 도와주고 죄인은 돕지 마라.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위의 본문은, 혹시라도 우리가 할 수 있다면, 우리가 무엇을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불경한 자, 죄인, 그리고 악한 자를 도와야 하는지에 대하여서도 또한 언급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3-3. 예를 들어, 집회서 12,4-6이 인용되고 있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Ia IIae, q32 almsdeeds(자선 행위들), a9는 다음에 있습니다. 반론 1에 대한 답변읽도록 하십시오:

http://www.newadvent.org/summa/3032.htm#article9 [신학대전 본문]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62.htm <----- 필독 권고 
[신학 대전의 입문서인 "신학대전여행" 번역문 및 신학 대전 본문]

(발췌 시작)
Reply to Objection 1. We ought not to help a sinner as such, that is by encouraging him to sin, but as man, that is by supporting his nature.

반론 1에 대한 답변. 우리는 한 죄인(a sinner)을 죄인으로서, 그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조장(助長)함(encouraging)으로써, 도우지 말아야 하며, 그러나 사람(man)으로서, 그의 본성(nature)을 향상시킴(supporting)으로써, 도와야 합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게시자 주:
(1) 그런데,
루카 복음서 16,19-31에 바로 이어지는, "남을 죄짓게 하지 마라"는 소제목을 가진, 루카 복음서 17,1-3ㄱ이 지금의 전후 문맥 안에서 또한 유의미하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죄인에게 죄를 짓도록 조장(助長)하는 일체의 행위는 남을 죄짓게 하는 행위들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2)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그의 본성을 향상시킴(supporting his nature)"에는 가톨릭 윤리 교육 포함될 것입니다.
(이상, 게시자 주 끝).
 

3-4. 가톨릭 윤리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용어들인, "윤리(morality)", "윤리적 선(moral good)", "윤리적 악(moral evil)", "윤리적으로 선한 행위들(morally good acts, 선행들)" 등의 용어들의 정의(definition)는 다음에 있으며, 되도록 많은 분들께서(여기에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닌 분들도 포함됨) 필독하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284.htm <----- 필독 권고

3-5. 예를 들어, 바로 위의 제3-4항에 안내된 글[(3-2)]에서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질병(disease)의 한 종류인 라자로의 몸의 는, 이 비유에 등장하는 라자로가 하느님께 반하는 어떠한 죄도 짓지 않았다고 가정할 때에, 라자로의 자유 의지와는 무관한 따라서 윤리적 악(moral evil)이 아닌, 즉 죄(sin)아닌,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범하였던 원죄(original sin)의 결과로 존재하게 된, 아픔(pain)과 동등시 될 수 있는 물리적 악(physical evil, 형이하학적 악)이며, 그리고 예수님의 경우에서처럼 실제로 어떤 악이 어떤 특정인에게 하느님에 의하여 허락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피조물인 사람들의 유한한 지성으로는 그 까닭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섭리(攝理, Providence)입니다. 또한 이에 대하여서도 바로 위의 제3-4항에 안내된 글[(3-1)]에 있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10항을 읽도록 하십시오.

4.
4-1.
질문 4: 성직자 및 수도자들을 포함하여, 상대방을 향하여 정의(justice, 의로움)를 독점적/배타적으로 자주 외치는 분들께 묻습니다. 정의(justice, 의로움)를 자주 외치는 주된 이유가
(i)
 마태오 복음서 6,1-18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의로운 일들"이라고 거명하면서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신  개의 탁월한 선행들"기도(prayer)", "단식(fasting)", 그리고 "자선 제공(almsgivings)" 을 항상 우선적으로 몸소 충실하게 실천해 왔기 때문입니까? 즉, 자신이 의로운 자(거룩한 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까? [교만에도 정도가 있는데, 그 정도가 한참 지나쳐 심판의 주관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무시하고, 자기 자신이 이미 의로운 자라고 생각/판단한 분들은, 예를 들어,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다해 연중 제30주일 복음 말씀(루카 18,9-14)에 포함되는 루카 복음서 18,10-12을 겸손한 마음의 자세를 회복하기 위하여 여러 번 읽으면서 차분히 묵상하도록 하십시오]. 아니면,
(ii) 자신이 주장하는 바가 논리적 진리(logical truth,
), 윤리적 진리(moral truth, 즉 윤리적 선, ), 혹은 존재론적 진리(metaphysical truth, 즉 아름다움, )
이기 때문입니까? 즉, 자신이 주장하는 바가 옳다(참, true)고 생각하기 때문입니까? [자기 자신의 주장이, 논리적으로, 윤리적으로, 혹은 형이상학(존재론)적으로 옳기에 자신의 의롭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여기를 클릭한 후에, 성경 본문에 근거하여 가톨릭 보편 교회가 전통적으로 정의해(define) 온 정의(justice, 의로움, righteousness)정의(definition)를 겸손한 마음의 자세와 함께 차분히 읽으면서 묵상하도록 하십시오. 정의(justice)가 오로지 상대방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덕(virtue)임을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무지(ignorance) 때문에 심판의 주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의로운 일들, 즉 개의 탁월한 선행들에 대하여서 전혀 모르면서도 상대방을 향하여 정의(justice, 의로움)를 그동안 어떤 분이 독점적/배타적으로 외쳐왔다면, 혹시라도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piety)"을 존중하지도 않고 준수하지도 않는, 하느님께로 중심 이동이 되지 않은, "배은망덕(背恩忘德)한 라자로"들이 그 분의 절친한 친구들은 아닐까요?

4-2.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piety)"을 존중하지도 않고 준수하지도 않는, 하느님께로 중심 이동이 되지 않은, "배은망덕(背恩忘德)한 라자로"는 자신의 이웃들에게 정직하지도 않고 또 겸손하지도 않기에, 결코 "영적으로 가난한 자(poor in spirit, 마태오 복음서 5,3)", 즉 "하느님의 가난한 자"일 수가 없습니다. "영적 가난"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글을 읽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34.htm <----- 필독 권고

4-3. 여러 가지 다른 이유들 때문에 윤리 교육은 필요할 것이지만, 특히 최근에 들어와 우리 사회에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바로 이 "배은망덕(背恩忘德)한 라자로"들의 숫자를 줄이기 위하여서라도, 윤리 교육의 강화가 매우 절실한 시점에 와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는 "개인 윤리", "공동체 윤리", "직업 윤리", "국가 윤리" 등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더 추상적 개념인  윤리(morality)의 정의(definition)를 모르는 자들로 구성된 사회는 그 건정성(soundness, healtiness)을 상실하여 결국에, 세대간의 가치관의 차이 그리고 더 나아가 급격한 가치관의 전도 때문에, 내부 갈등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서서히 붕괴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윤리(morality)정의(definition)를 제대로 알고자 하는 분들께서는 위의 제3-4항에 안내되어 있는 글을, 별도의 시간을 내어서라도, 여러 번 차분히 읽도록 하십시오.

4-4. 지금까지 이웃으로부터 물적 도움을 받는 경우에 대하여 말씀드린 것인데, 마찬가지로, 이웃으로부터 "영적 도움들"을 받고서도 도움을 준 이웃에게 감사할 줄 모르는 자들도 또한, 하느님 보실 때에,  "배은망덕(背恩忘德)한 라자로"일 것입니다.

5. 끝으로,

질문 5: 혹시라도 무지하여 "배은망덕(背恩忘德)한 라자로"의 처신을 하였을 경우에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고해성사만 보면 될까요?

질문 5에 대한 답변: 결코 아닙니다. "경솔한 판단(rash judgment)"을 포함하는, 다음에 있는 "사실에 대한 무지(無知)의 정의(definition)와 그 결과들" 제목의 글을 읽도록 하십시오. 심지어 가톨릭 신자이면서도 (여기에는 성직자 및 수도자들 포함) 함부로 다른 이를 의심하는 분들이 더러 있는데, 이런 분들을 위하여 가톨릭 교회 교리서 본문 중에 "이러한" 내용들이 있는 줄 모르고 계신 분들이 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394.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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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Ph.D.)
작업에 소요된 시간: 약11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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