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교황 프란치스코: 신앙(신덕)은 [위선의] 궤변이 아니다 #<짝수해연중6주간금1독> [번역오류] [결의론] 912_faith

인쇄

. [218.55.90.*]

2014-04-21 ㅣ No.1543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당부의 말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글들은 어떤 특정인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하여 마련된 글들이 결코 아니기에, 다음의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1) 지금까지 필자의 글들을 읽고서 필자에 대한 "분노(anger)" 혹은 "질투(envy)"를 가지게 된 분들은, 혹시라도 그분들께 "걸림돌(stumbling block)"일 수도 있는, 많이 부족한 죄인의 글들을 더 이상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2) 그리고 위의 제(1)항의 당부의 말씀을 읽고도 굳이 이 화면의 아래로 스스로 이동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의 아래의 본글을 읽는 분들은, 필자에 대한 "분노(anger)"와 "질투(envy)" 둘 다를 가지지 않을 것임에 동의함을 필자와 다른 분들께 이미 밝힌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3) 그리 길지 않은 인생 여정에 있어, 누구에게나, 결국에, "유유상종[類類相從, 같은 무리끼리 서로 사귐 (출처: 표준국어대사전)]"이 유의미할 것이라는 생각에 드리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4) 아래의 사진은 제1530번 글을 공개한지 30분도 경과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에, 동일한 ip(인터넷 접속 주소)를 사용하면서, 한 명이 한 개 이상의 id를 사용하여, 반대적어도 두 번하였음을 보여준다는 생각입니다. 조회 2건반대 3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누군가 한 명이 동일한 ip(인터넷 접속 주소)로 접속하게 되는 단체 혹은 자신의 컴퓨터에서 한 개 이상의 자신의 가족들 혹은 단체 구성원들의 id을 사용하여 고의적으로 이런 행동을 하였다면, 악의적 의도를 지닌 자가 아니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서로의 얼굴을 대면하지 않는 인터넷 게시글 대화의 환경이므로 다른 이들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전혀 알 수가 없을 것이라는 대단히 잘못된 판단과 무지 때문에 여전히 어둠 속에 갇혀서 위와 같은 추한 행동을 하는, 악의적인 의도를 가진 자 때문에라도, "유유상종[類類相從, 같은 무리끼리 서로 사귐 (출처: 표준국어대사전)]"은 유의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꼬리가 길면 밟힌다(표준국어 대사전: 나쁜 일을 아무리 남모르게 한다고 해도 오래 두고 여러 번 계속하면 결국에는 들키고 만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는 속담이 빈말이 아니라는 생각을 또한 하게 됩니다.

 

 

 

+ 찬미 예수님!

 

 

 

 

1. 들어가면서 

지난 2014년 2월 21일은,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짝수 해 연중 제6주간 금요일이며, 다음은 이날의 제1독서(야고보 2,14-24.26) 전문입니다:

 

출처: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missaid=5808&gomonth=2014-02-21

(발췌 시작)

14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15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16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7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18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대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실천이 있소.” 나에게 실천 없는 그대의 믿음을 보여 주십시오. 나는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 주겠습니다. 19 그대는 하느님께서 한 분이심을 믿습니까?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마귀들도 그렇게 믿고 무서워 떱니다. 20 아, 어리석은 사람이여! 실천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싶습니까?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사악을 제단에 바칠 때에 실천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까? 22 그대도 보다시피, 믿음이 그의 실천과 함께 작용하였고, 실천으로 그의 믿음이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 23 그렇게 하여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그것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느님의 벗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24 여러분도 보다시피,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됩니다. 26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이상, 발췌 끝)

 

이날 매일 미사에서 교황 프란치스코께서는 이날의 제1독서(야고보 2,14-24.26)에 대하여 강론을 하셨으며, 그리고 이 강론의 요약은 아래의 제2항에 발췌되어 있습니다.

 

1-1. 그런데 이 강론의 제목에서 사용 중인 용어 "casuistry"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여야 하는데, 우선적으로, 다음은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 주어진 casuistry 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 용어 설명의 첫 문장이 이 용어의 정의(definition)입니다:

 

출처: http://www.therealpresence.org/dictionary/c/c101.htm

(발췌 시작)

CASUISTRY

 

The theological science of applying general moral principles to particular cases of conscience. It began in the post-Apostolic age and found early expression in the penitential books, which dealt with a variety of moral failings and their appropriate forms of satisfaction. Later on came the Summas on Penance, which formed complete legal digests. St. Alphonsus Liguori (1696-1787) systematized casuistry in modern times. Although the term has taken on some unsavory meanings, due mainly to critics of Roman Catholic moral practice, casuistry is an integral part of the Church's moral tradition. Its purpose is to adapt the unchangeable norms of Christian morality to the changing and variable circumstances of human life. (Etym. Latin casus, case, problem to be solved.)

 

결의론[決疑論, casuistry, 是非心鑒別法(시비심감별법), 是非鑒別學(시비감별학)]

 

일반적인 윤리 원리(moral principles)들을 양심의 특정한 경우들에 적용하는 신학 과학(theological science)을 말합니다. 이 과학은 사도 시대 뒤에 시작하였으며 그리고 참회의 책들에 있는 초기의 어구(語句, expression)의 기초를 세웠는데, 이 책들은 윤리적 실패들 및 이들에 대한 보속(satisfaction)의 적당한 형태들로 구성된 갖가지를 다루었습니다. 나중에 참회에 대한 대전(大全)(Summas on Penance)들이 되었는데, 이들은 완전한 법령 요람(complete legal digests)을 형성하였습니다. 리구오리의 성 알퐁소(St. Alphonsus Liguori, 1696-1787년)는 근대 시기들에 있어 결의론을 체계화하였습니다.(*) 비록 이 용어가, 주로 로마 가톨릭 윤리 실천(moral practice)에 대한 비난자들 때문에, 어떤 향긋하지 않은 의미들에 이미 염색되었기는 하나, 결의론(決疑論, casuistry)은 교회의 윤리 전통의 없어서는 안 될(integral) 일부이며, 그 목적은 그리스도교 윤리의 불변의 기준들을 인간의 삶의 변하는 그리고 다양한 여건들에 적응시키는(adapt) 데에 있습니다. [어원: Latin casus, case, problem to be solved.]

 

-----

(*) 번역자 주:
(1) 가톨릭 교회의 35명의 교회의 박사들로 불리는 분들 중의 한 분인 리구오리의 성 알퐁소(St. Alphonsus Liguori, 1696-1787년)는 성모 신심의 대가였다. 예를 들어, 다음의 글의 제2항의 게시자 주를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304.htm

 

(2) 이 체계화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바로 아래의 게시자 주 1-1, 제(2)항에 안내되어 있는 영어 가톨릭 대사전에 주어진 결의론(決疑論, casuistry)에 대한 설명의 제일 마지막 항[제목: Midele of the sixteenth sentury to the present time]의 마지막 부분에 주어져 있으니 필독하라.

-----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1-1:

(1) 따라서, 위의 사전에 제시된 결의론(決疑論, casuistry)정의(definition)에 의하여, 결의론이 자연법(natural law)의 범주에 속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 2,14-24.26에서 말하는, 초자연덕들인 향주삼덕(the three theological virtues)들 중의 하나인, 믿음(faith,신덕, 신앙)은 결코 결의론(決疑論, casuistry)의 범주에 포함될 수가 없습니다.

 

(2) 그리고 영어 가톨릭 대사전에 주어진 결의론(決疑論, casuistry)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다음에 있으며, 다음은 이 설명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출처: http://www.newadvent.org/cathen/03415d.htm

(발췌 시작)

When Jansenistic rigorism seemed to have attained a permanent triumph, especially in France and Spain, relief was obtained through Alphonsus Maria de Liguori (d. 1787), the saintly founder of the Congregation of the Most Holy Redeemer. By recalling casuists to the study of their classic authors he restored casuistry itself to the place its importance and dignity demanded. His first publication was the "Medulla Theologiae Moralis" of Hermann Busembaum, S.J., with annotations. In eight successive editions this work was enlarged and improved, until it became a synopsis of casuistical literature. The last edition, entitled "Theolgia Moralis", was published in 1785, and received the approbation of the Holy See in 1803. In 1871 Pius IX proclaimed the saintly author a Doctor of the Church. The after-history of casuistry is one of peace and development along the lines laid down by St. Alphonsus.

 

[이단인] 얀센주의적 엄격주의(Jansenistic rigorism)가, 특별히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어떤 항구적인 승리를 이미 성취한 것처럼 보였을 때에, 구제(relief)가, 가장 거룩한 구세주 수도회(the Congregation of the Most Holy Redeemer, 구세주회)의 성인다운(saintly) 창립자인, 리구오리의 알퐁소 마리아(Alphonsus Maris de Ligouri(1787년에 선종, 1816년 시복됨, 그리고 1839년 시성됨)을 통하여 획득되었습니다. 결의론자들을 그들의 고전적 저자들에 대하여 상기시킴으로써 그는 결의론(決疑論, casuistry) 자체를 그 중요성 및 품위가 요구하였던 자리로 회복시켰습니다. 그의 첫 번째 출판은, [그가 마련한] 주석들을 가진, Hermann Busebaum S.J. "Medulla Theologiae Moralis" 였습니다. 여덟 개의 이어지는 판(版, editions)들로 이 작업은. 이 작업이 결의론 문헌의 한 개요(a synopsis, 대의)가 될 때까지, 증보(增補)되었고 그리고 개선되었습니다. "Theolgia Moralis(윤리 신학)" 라는 제목이 붙여진 마지막 판(版)은 1785년에 출판되었으며, 그리고 1803년에 교황 성하의 공식 인가(approbation)을 받았습니다. 1871년에 [교황] 비오 9세께서는 이 성인다운 저자를 한 명의 교회의 박사(a Doctor of the Church)로 선포하셨습니다. 결의론(決疑論, casuistry)의 이후 역사는, 성 알퐁소(St. Alphonsus)에 의하여 규정된 윤곽들을 따라, 평화와 발전으로 이루어진 [이전 역사와는 다른] 하나의(one) 역사입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3) 다음의 주소에 있는, 굿뉴스 서버 제공의, 리구오리의 성 알퐁소 마리아(Alphonsus Maris de Ligouri(1787년에 선종, 1816년 시복됨, 그리고 1839년 시성됨) 성인전들을 또한 되도록 많은 분들께서는 읽도록 하라:

http://info.catholic.or.kr/saint/view.asp?ctxtSaintId=1713&Orggubun=101

 

그리고 그의 대표적 저서들 중의 하나인 "마리아의 영광들(the Glories of Mary)"이 언급되고 있는 다음의 글[제목: 성모 찬송 기도문의 유래 외]제2항의 게시자 주도 또한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304.htm

 

(4) 참고입니다만, 리구오리의 성 알퐁소 마리아(Alphonsus Maris de Ligouri(1787년에 선종)가 또한, 2014년 부활 제2주일(하느님 자비 주일)에 시성되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대 교황님 처럼, 토미스트(Thomist)였다는 다수의 구체적인 증거들 [여기에는 영어 가톨릭 대사전에 주어진 "Thomism(토미즘)" 에 대한 설명 포함]은 다음의 글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46.htm

(이상, 게시자 주 1-1 끝)

 

2.

다음은,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2014년 2월 21일자 교황 프란치스코의 매일 미사 중의 강론의 요약문 전문입니다: 

 

출처 1: http://www.osservatoreromano.va/en/news/faith-not-casuistry#.Uwj68c6s9w1

출저 2: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cotidie/2014/documents/
papa-francesco-cotidie_20140221_faith-not-casuistry.html

 

(발췌 시작)

POPE FRANCIS

MORNING MEDITATION IN THE CHAPEL OF THE
DOMUS SANCTAE MARTHAE

Faith is not casuistry

Friday, 21 February 2014

 

 

(by L'Osservatore Romano, Weekly ed. in English, n. 9, 28 February 2014)

Pope Francis reflected on the day’s first Reading from the Letter of St James (2:14-24, 26), which states that just as the body apart from the spirit is dead, so also faith apart from works is dead. “The teaching of the Apostle James is a commentary on faith: he wants to explain well what faith is”. Therefore, “he plays on this contrast between faith and works”. The Apostle’s statement “is clear”, the Pope said. “Faith that does not bear fruit in works is not faith”.

 

“So often, we also make mistakes on this point,” the Pope continued. “We hear it said: I have great faith!”, or “I believe everything!”; however, at times “the person who says this leads a lukewarm, weak life”. So much so that “his faith is like a theory, but it is not alive in his life”.

“When he speaks about faith, the Apostle James speaks precisely about doctrine, about the content of the faith”. It is as though he were saying to each of us: “you can know all the commandments, all the prophecies, all the truths of the faith, but if this” does not translate into “practice and works, it is useless”.

 

Thus, “we can recite the Creed theoretically even without faith,” he said, “and there are many people who do so! Even the demons!”. In fact, he added, “the demons know very well what the Creed says and they know it is the truth. The Apostle says that ‘they tremble’, because they know that it is the truth” even though they do not have faith. The demons “know the whole of theology, they have Denzinger memorized, but they do not have faith. Having faith is not a matter of having knowledge: having faith means receiving God’s message brought to us by Jesus Christ, living it out and carrying it forward”.

 

Pope Francis then pointed to “the signs” by which we can recognize “a person who knows what we are to believe but who does not have faith”. The Pope noted two particular signs that we find in the Gospel. A first sign is “casuistry”, and he recalled all those who approached Jesus to present him with cases such as: is it lawful to pay taxes to Caesar?” Or the case in which “a woman was widowed, poor thing, who according to the law had to marry the seven brothers of her husband in order to have a child”. This “is casuistry,” the Pope said. And “casuistry is precisely the place to which all those people go who believe they have faith” but only have a knowledge of its content. Thus, “when we find a Christian” who only asks “if it is licit to do this and if the Church could do that,” it either means “that they do not have faith, or that it is too weak”.

 

그러고 나서 교황 프란치스코께서는 그것에 의하여 "우리가 참이라고 믿어 보아야(believe) 하는 바를 알고 있는 자이나 그러나 신앙(faith, 신덕)을 가지지 못한 한 인격(a person)" 을 우리가 알아차릴 수 있는 "표지(標識 signs)"들에 대하여 언급하셨습니다.(*) 그 첫 번째 표지는 "[위선의] 궤변(詭辯 casuistry)/율법주의(律法主義)" 이며,(**) 그리고 이 교황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경우들을 예수님께 제시하기 위하여 예수님께 다가갔던 자들 모두를 상기하셨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적법한지요(lawful)?" (마태오 22,15-22 참조) 혹은 거기서 "가엾게도 미망인이 된 한 여인이 아이를 가지기 위하여 율법에 따라 자신의 남편의 일곱 형제들과 혼인하여야 하였던" (마태오 22,23-33 참조) 경우. 이 교황님께서는 "이것이 바로 [위선의] 궤변(詭辯, casuistry)/율법주의(律法主義)입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위선의] 궤변(詭辯, casuistry)/율법주의(律法主義)는 정확하게, 거기를 향하여 자신들이 신앙(faith, 신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believe) 자들 모두가 나아가는," 그러나 오로지 그 내용에 대한 어떤 지식만을 가지고 있는, "바로 그 장소를 말합니다." 따라서, 오로지 "이것을 행하는 것이 합법인지 아닌지 그리고 교회가 저것을 행할 것인지 아닌지" 만을 묻는 "한 명의 그리스도인을 우리가 발견할 때에," 이 발견은 "그들이 신앙(faith, 신덕)을 가지지 못하였거나, 혹은 그들의 신앙(faith, 신덕)이 너무 나약한 것" 둘 중의 하나를 의미합니다.

 

-----

(*) 번역자 주: 초자연덕(supernatural virtues)들인 향주삼덕(the three theological virtues)들 중의 하나인 신앙(faith, 신덕, 믿음)과 믿음(belief, 신념, 확신)의 차이점은 다음의 글들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faith.htm

 

(**) 번역자 주: 신약 성경의 본문에서 채택된 이어지는 예들의 문맥에 비추어 볼 때에, 여기서 영어로 "casuistry" 로 번역된 이탈리아어 표현은, 위의 제1항에 안내된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 그 정의(definition)가 주어진 "결의론(決疑論, casuistry)"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579항에서 말하는 "위선의 궤변(詭辯)(hypocritical casuistry)",(1) (마태오 15, 3-7 ; 루카 11, 39-54 참조) 즉, 소위 말하는, "율법주의(律法主義, legalism)/율법제일주의(律法第一主義, legalistic style)" 를 말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탈리아어로 주어진 교황 프란치스코의 강론 말씀을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선택된 영어 번역 용어 "casuistry"가 부적절하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

(1) 번역자 주: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579항은 다음에 있다: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015/__P1N.HTM (영어본)

(발췌 시작)

579 This principle of integral observance of the Law not only in letter but in spirit was dear to the Pharisees. By giving Israel this principle they had led many Jews of Jesus' time to an extreme religious zeal.334 This zeal, were it not to lapse into "hypocritical" casuistry,335 could only prepare the People for the unprecedented intervention of God through the perfect fulfilment of the Law by the only Righteous One in place of all sinners.336

 

579 글자(letter)에 있어서 뿐만이 아니라 정신(spirit)에 있어서도 [모세] 율법(the Law)에 대한 결여된 부분이 없는(integral) 준수라는 바로 이 원리는 바리사이들에게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이 원리를 이스라엘에게 제공함으로써 그들은 예수님의 시대(time)의 다수의 유다인들을 어떤 극단적인 종교적 열의(熱意, zeal)(2)로 이미 인도하였습니다. 이 열의는, 만약에 이 열의가 "위선의" 궤변(詭辯)("hypocritical" casauistry)(3)으로 빠지지 않았더라면(were it not), 이 백성으로 하여금, 모든 죄인들 대신에 유일하게 의로운 분(the only Righteous One)에 의한 율법의 완미(完美)한 구현(perfect fulfilment)(4)을 통한 하느님의 전례(前例)가 없는(unprecedented) 개입을 위하여, 오로지 준비하게 하였어야 합니다(could only).

 

(2) 번역자 주: "사랑(love)" 이라는 정(情, passion)의 한 정변(情變)인 "열의(熱意, zeal)"에 대한, 즉, 사랑하는 자들 중에서만 오로지 열의(熱意, zeal)를 가진 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필자의 설명은 다음의 글의 제3항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15.htm <----- 필독 권고

 

(3) 번역자 주: 

(3-1)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579항에서 "hypocritical" casaustry로 번역되는 표현을 여기서 "위선의" 궤변(詭辯)으로 번역한 것은, 다음에 있는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프랑스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579항 에서의 프랑스어 번역 표현 및 중국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579항에서의 중국어 번역 표현을, 글자 그대로, 따른 것이다:

http://www.vatican.va/archive/FRA0013/__P1K.HTM (프랑스어본 CCC)

http://www.vatican.va/chinese/ccc/ccc_zh-t-0571.pdf (중국어본 CCC)

 

그러나 바로 아래의 제(3-2)항에 발췌된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579항에서, "위선의" 궤변(詭辯)으로 번역하는 대신에, "위선적인" 결의론(決疑論)으로 번역된 것은, 가톨릭 교회의 윤리 신학 분야의 전통적 용어인 결의론(決疑論, casuistry)의 신학적 의미를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훼손시킬 수 있기에번역 오류/미숙이라는 생각이다.

 

(3-2) 다음의 주소에 있는 한국 천주교/주교회의 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579항과 위에 제시된 많이 부족한 죄인의 우리말 번역문 사이에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차이가 있는지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도록 하라. 예를 들어,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579항의 세 번째 문장의 우리말로의 번역 과정에서, 강조를 하기 위하여 사용된 가정법 문장을 제대로 살리면서 직역 번역하지 못한 것은 번역 미숙일 것이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579.htm (우리말본)

(발췌 시작)

579 율법은 그 문자뿐만이 아니라, 그 정신까지도 전체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은 바리사이들에게 소중한 원칙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 원칙을 강조함으로써 예수님 시대의 많은 유다인들을 극단적인 종교적 열성으로 몰아갔다. 359) 이 극단적 열성은 ‘위선적인’ 결의론(決疑論) 에 떨어지거나, 360) 아니면 오로지, 모든 죄인을 대신하여 한 사람의 의인에 의해 율법이 완성되는 새로운 하느님의 개입에 대비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준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361)

 

-----

359. 로마 10,2 참조.
360. 마태 15,3-7; 루카 11,39`-54 참조.

361. 이사 53,11; 히브 9,15 참조.
-----

 

(4) 번역자 주: 가톨릭 그리스도교 신학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perfect" 라는 용어의 의미가 우리말로의 번역 과정에서 소실된 것은 중대한 번역 오류일 것이다. "perfect(완미한)""complete(완전한)" 의 커다란 차이점에 대한 글은 다음에 있으니 필독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94.htm  <----- 필독 권고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

-----

 

The second sign is ideology. We cannot be “Christians who think of the faith as a system of ideas, as an ideology,” Pope Francis said. It is a risk that “also existed in Jesus’ time” and was set forth by the gnostics. “The Apostle James says that ideologues of the faith are the Antichrist”. Thus, the Pope explained, “those who fall into casuistry or ideology are Christians who know doctrine but who lack faith. Like the demons, with the difference that the demons tremble, whereas these do not: they live in peace”.

 

그 두 번째 표지는 이데올로기[ideology, 이념(理念)]입니다. 우리는 "신앙(faith, 신덕)을 관념(ideas)들로 이루어진 한 개의 체계로서, 한 개의 이데올로기[이념(理念)]로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 일 수 없습니다 라고 교황 프란치스코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시대(time)에 있어 또한 존재하였던" 그리고 영지주의자(gnostics)(*) 의하여 말해졌던 한 개의 위험(a risk)입니다. "신앙(faith, 신덕)에 대한 특정 이념의 창도자(唱道者, ideologues)들은 적그리스도(the Antichrist)들이라고 사도 야고보(the Apostle James)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예를 들면(thus), 이 교황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위선의] 궤변(詭辯, casuistry)/율법주의(律法主義) 혹은 이데올로기[ideology, 이념(理念)]에 빠진 자들은 교리(doctrine)를 알고 있으나 그러나 신앙(faith, 신덕)이 결여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마귀(demons)들은 무서워 떠나(tremble)(야고보 2,19 참조), 이에 반하여, 이들은 그렇지 아니한, 차이점을 가진 마귀들 처럼, 그리고 그들은 안온하게 살아갑니다(live in peace)." 

 

-----

(*) 번역자 주: 영지주의(靈智主義, gnosticism) 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는 다음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18.htm

 

(**) 번역자 주: 유일한 계시 종교인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신앙(faith, 신덕, 믿음) 이라는 대신덕(theological virtue)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혼에 주입시켜주시는 덕, 즉, 주부덕(infused virtue)인 초자연덕(supernatural virtue)을 말하나, 그러나, 결코 계시 종교가 아닌, 다른 종교들에서 말하는 믿음(faith)은 자연덕(natural virtue)이기에,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생각이다. 이와 같이, 초자연덕인 "신학적 믿음(theological faith)" 이 자연덕인 "비그리스도인들의 믿음(non-Christian faith)" 과 본질적으로 다름에 반드시 주목하라. 그리고 이 지적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글의 각주 222)를 또한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946.htm

-----

 

Pope Francis then proposed three figures taken from the Gospel, who “do not know doctrine but who have great faith”. First, he spoke about the Canaanite woman, who was a pagan but who had faith in Jesus “because the Holy Spirit had touched her heart”. She “bore witness to her faith: this is the key word”. Then there was the Samaritan who “beforehand did not believe anything” or whose belief was misguided, but who came to believe “once she encountered Jesus”: that is, prior to encountering Jesus she had a “casuistic way of thinking”, she wondered if she had to worship God “on this mountain or that”. But after having “spoken with the Lord, she felt something” in her heart and in haste “went away to say: I found a man who told me all that I ever did!”. She had faith “because [s]he encountered Jesus Christ and not abstract truths”.

 

그러고 나서 교황 프란치스코께서는 복음서로부터 발췌된, "교리(doctrine)를 모르나 그러나 커다란 신앙(faith, 믿음)을 가지고 있는", 세 명의 인물들을 제시하셨습니다. 첫 번째, 이 교황님께서는 가나안 여인(Canaanite woman)에 관하여 말씀하셨는데 [마태오 15,21-28; 마르코 7,24-30], 그녀는 한 다신교인(a pagan)이었으나 그러나 예수님 쪽으로 신앙을 가졌는데(had faith in Jesus)(*) "왜냐하면 성령께서 그녀의 심장(heart)을 이미 건드리셨기(touched)" 때문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신앙(faith, 믿음)에 대하여 증언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전에 아무 것도 믿지(believe) 않았던" 혹은 그의 믿음(belief, 신념, 확신)이 잘못 지도되었던, 그러나 "일단 그녀가 예수님을 만나자" 믿게 되었던(came to believe), 사마리아인(Samaritan)이 있었으며 [요한 4,1-42], 즉, 예수님을 만나기(encountered) 전에 그녀는 어떤 "궤변(詭辯)적(casuistic)/율법주의(律法主義)적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녀는 "이 산 혹은 저 산 위에 있는" 하느님을 경배하여야 하는지 의아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이야기를 한 이후부터, 자신의 심장 안에서 "그녀는 그 무엇을 느꼈으며" 그리고 급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기 위하여 떠나갔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행하였던 모든 것을 저에게 말하였던 한 사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녀는 신앙(faith,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녀가 마주쳤던(encounter) 것은 예수 그리스도였지 추상적 진리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

(*) 번역자 주: "have faith in Jesus" 를, "예수님에 대하여 믿음을 가지다" 로 번역하는 대신에, "예수님 쪽으로 신앙을 가지다" 로 번역한 이유와, 더 나아가, "believe (.., 을 믿다)" 와 "believe in (... 쪽으로 믿다)" 의 커다란 차이점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글들을 읽도록 하라. 특히 두 번째 글을 필독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49.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48.htm <----- 필독 권고

-----

 

The third Gospel figure which the Pope put forward is the “man born blind who went to Jesus to ask him for the grace to see”. And “then, poor thing,” the Pope said, “he became involved in a battle between the Pharisees, the Sadducees and the doctors of the Law: he and his parents were called upon to give an account after this annoying and bothersome episode”. The Gospel tells us that “the Lord looked at him and said to him: ‘Do you believe?’”. The man born blind “did not know theology, perhaps he knew the commandments”, and yet he recognized in Jesus the Son of God “and falling to his knees he worshipped the Lord”.

 

These are the two contrasting realities: on the one hand, there are “those who have doctrine and know things”, and on the other there are “those who have faith”. Between them stands a certainty: “faith always leads to witness. Faith is an encounter with Jesus Christ, with God”. And this encounter “leads to witness”, as the Apostle James emphasizes in his Letter, stating that “faith without works, faith that does not really involve you and that does not lead you to bear witness, is not faith. It is words and nothing more than words”.

 

The Pope concluded his homily by inviting those present to consider these three figures and to ask for “the grace to have a faith that bears fruit and that leads to proclamation and to witness”.  

(이상, 발췌 및 일부 문장들에 대한 우리말 번역 끝)

 

3.
끝으로,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짝수 해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제1독서(야고보 2,14-24.26)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은 다음에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횡님의 위의 강론 말씀 중에서 언급되고 있는, 향주삼덕들 중의 하나인, "신앙(faith, 신덕)"에 대하여 대단히 잘 설명하고 있는 좋은 해설이므로, 되도록 많은 분들께서 읽으실 것을 권고드립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ot_6_fri.htm <----- 필독 권고

  

----------

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업에 소요된 시간: 약7사간 (자료 조사 및 비교/분석 포함)

 



1,378 1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