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사순 제5주일(가해) 요한 11,3-7.17.20-27.33ㄴ-45; ’23/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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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3-03-18 ㅣ No.5336

사순 제5주일(가해) 요한 11,3-7.17.20-27.33-45; ’23/03/26

 

우리는 살면서 주위의 눈치를 많이 봅니다. 내가 이렇게 행동해도 되는가 하는 탐색 외에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과 같이 보조를 맞추고 함께 살기 위해 눈치를 봅니다. 그렇게 또 눈치 보고 사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려, 이제는 마음의 병처럼 나를 망설이게 하고 주저앉게 합니다. 그런가 하면, 사랑해야 하는 줄 알면서도 사랑하지 못하는 내 모습과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워하는 나의 또 다른 모습이 마치 영혼의 병처럼 이중의 십자가를 안겨 주는 듯합니다.

 

실제로 또 나이가 들면서 여기저기 아파오고, 또 조금이라도 무리하면 마치 약속이나 초대라도 받았다는 듯이 찾아오는 감기나 몸살 같은 몸의 이상 증상들이 우리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도록 경고합니다. 이러 저러한 몸과 마음 그리고 영적인 일들과 사정들이 우리가 주님께 헌신하고자 하는 영적 전선에 장애와 벽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장애와 벽 같은 한계에 갇혀 있다면 그 장애와 벽은 우리에게 한계가 되겠지만, 그 장애와 벽을 극복하고 넘어서면 그것은 우리를 새 생명의 길로 인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라자로는 죽음이라고 하는 인간의 대표적인 한계에 갇힙니다. 그리고 그 한계에 갇힌 라자로의 주변인들, 특히 가족인 마리아와 마르타는 커다란 슬픔에 잠겨 심히 아파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께서 즉시 달려가시지 않고, 라자로가 그 병에 완전히 갇혀 죽을 때까지, 그리고 마치 그 가족들의 슬픔이 깊어질 수 있을 만큼 깊어질 때까지를 기다리시기라도 하듯이 뜸을 들이셨다가 라자로를 찾아가십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요한 11,4)

 

예수님께서 라자로의 집을 찾았을 때 이미 라자로는 죽어 무덤에 묻혔고, 그 가족은 눈물에 잠겨 있었습니다. 이 한계 상황에서 마르타는 예수님께 한탄하듯 하소연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21)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곁에 계셨으면 하느님께 기도하여 자기 오빠를 죽지 않게 해 주셨을 것이라고 전제하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빠 라자로가 죽은 후에야 도착하신 예수님께 아쉽고 야속한 마음을 담아 하소연한 것입니다.

 

이러한 마르타의 원망에 대해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23) 주님께서는 마르타가 그저 사람이 죽기 전에, 사람의 살아 생전에 병에서 구해줄 수 있는 의사이거나 예언자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었던 예수님을 의사나 예언자를 넘어서는 우리 삶의 주인으로 제시하십니다.

 

그러나 아직 예수님을 주님으로까지 믿지 못하고, 그저 사람이 그 생을 다하고 죽은 후, 마지막 날 하느님의 심판 때에 죽은이들이 다시 살아나리라고 했던 유다교의 믿음에만 충실한 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24) 라고 대답합니다.

 

주님께서는 정확히 알아듣지 못한 마르타에게 재차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25-26) 그리고 물으십니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26)

 

그제야 마르타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게 되고 주님께 신앙을 고백합니다. “,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27)

 

그러나 아직 다른 이들은 주님을 믿지 못하고, 라자로의 죽음만을 안타까워하며 울고 있습니다.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33) 라고 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직접 보여주시기라도 할 양으로 그들에게 묻습니다.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34) 그들은 절망적으로 대답합니다. “주님, 와서 보십시오.”(34)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답답해서 그런지, 라자로를 잃고 슬퍼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동하셔서 그런지, 사랑하는 라자로가 죽음에 갇혀 무덤에 묻혀있는 모습이 안쓰럽고 불쌍해서 그런지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러자 유다인들은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36)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는 엉뚱하게도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저분이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해주실 수는 없었는가?”(37) 라고 하며 빈정거리듯 말합니다.

 

복음사가는 반신반의하며 친지가 죽었다는 사실에만 몰두하여 전혀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는 그들의 대응을 바라본 예수님께서는 다시 속이 북받치시어 무덤으로 가셨다.”(38) 라고 전합니다. 급기야 예수님께서는 돌을 치워라”(39)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머리와 말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27) 라고 고백했지만, 아직 마음으로는 아니 현실에서 그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자신의 오빠를 다시 살려주시리라는 사실을 상상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결과적으로 믿지 못하는 마르타가 예수님을 제지합니다.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39)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안타까워하시면서도 부드럽고 강력하게 마르타를 일깨워 주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40) 드디어 사람들이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치웠습니다. 무덤 앞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머리와 말로만 예수님을 믿고 있는 마르타와 추종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다 죽고 난 저 마지막 날, 심판의 날, 부활의 날 때가 되어야만 이루어질 뿐이지 과학적 진리라고 하는 현실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재생의 신비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래서 그들이 믿게 하기 위해서 표징을 보이는 것이오니 아버지께서 들어주십사 하고 청합니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41-42) 아버지의 응답에 힘입어, 아니 아버지와 온전히 일치해 있는 주님께서 아버지께서 내려주신 권능에 힘입어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43)

 

그러자 죽은 라자로가 다시 살아나서 무덤 밖으로 걸어 나옵니다. 그러자 아직도 그를 묶고 있는 수의들을 걷어 내어 주라고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44) 그제서야 마리아와 마르타 자매 그리고 죽었다고만 생각했던 라자로를 문상 왔던 친지들과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게 됩니다. 이상이 오늘 복음에서 살펴본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라자로의 이야기입니다.

 

그럼 오늘 다시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서 헤아려봅시다. 우리가 알면서도 또 하고 싶으면서도 주님께서 바라시는 좋은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우리의 미련이 크거나, 지금까지 해왔던 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것을 실천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에게 그러한 미련과 두려움을 안겨주는 것을 영적으로는 죄악 또는 죄악의 지배 아래, 죄악의 노예 상태에 놓여있다고 하며 그것을 빗대어 우리의 삶 속에 죄악의 뿌리가 그처럼 깊이 박혀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죄악의 뿌리를 다 뽑아내고 희망도 없는 이 어둠과 죽음의 그늘 아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몰이해와 자기 중심적이며 이기적인 이해와 사고방식을 깨우쳐 주고 치워줄 신앙의 형제자매인 교회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마치 사람들의 눈에는 죽어 무덤에 묻힌 라자로를 다시 살리기 위해 무덤을 막았던 돌을 치워줄 가족과 친지들이 필요했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라자로가 다시 살아나 그를 묶었던 수의로 대표되는 우리 삶의 거품들과 껍질들을 벗겨줄 신앙의 형제 자매들인 교회 공동체가 필요하고, 그 신앙의 형제 자매들인 교회 공동체가 바로 여기 앉아 있는 우리 자신들입니다.

 

우리 신앙의 형제 자매인 교회 공동체의 역할은 바로 죄악에 묶여 있는 형제 자매들을 주님 말씀의 힘으로 되살리도록, 그러기 위해 주님께 나아가 주님 말씀의 힘으로 새로 태어나도록, 그를 막아 놓았던 장애와 돌을 치워주는 일이며, 신앙 안에서 새로 (태어)났을 때 그에게 신앙 안에서 더욱 더 앞으로 성장하고 성숙해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일입니다.

 

그런가 하면 죄악에 묶여 있는 이는 우리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르타처럼 머리와 말로만 주님을 믿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늘 여기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고자 결심을 하고 실제로 실천해 나갈 때 새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 때 비로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25-26) 라는 말씀이 라자로에게서처럼, 지금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가운데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러분, 하느님께서 자유롭게 살도록 창조하신 여러분을 죄악에 묶어 놓고 있는 장애는 무엇입니까? 어떤 장애와 죄악이 여러분의 자유를 구속하고 선행을 못하도록 막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죄악의 뿌리에서 헤어나 주님의 영광스러운 새 생명의 빛으로 나아오도록. 부활이요 생명이며 주님을 따르는 우리 모두를 영원히 죽지 않고 살리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43)

 

그리고 신앙 안에서 새로 태어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신앙 안에서 죄악의 어둠과 죽음의 그늘 아래 묶여 있는 형제 자매들을 구하러 나가라고. 형제 자매들을 사로잡고 있는 허망한 꿈과 그릇된 취득과 분배방식이라는 돌을 치워라.”(39) 그리고 그를 묶고 있는 꺼풀을 벗겨 그를 풀어주어 걷게 하여라.”(44) 라고 초대하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죄악과 세상의 죄라는 어둠 속에 갇혀 있다고 여기신다면,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헤어나고 싶다면, 주님을 향해 희망의 눈을 뜨고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이 장애에서 해방되어 다시 주님의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장애에서 벗어나 여러분과 같은 장애로 헤매는 여러분 친지들의 돌을 치우고 풀어주어 걸어가도록 주님께 청하고 도와줍시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43)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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