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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속에 숨은 폭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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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수 [landpia21] 쪽지 캡슐

2008-08-24 ㅣ No.7932

익명 속에 숨은 폭력성
`기게스의 반지` 낀 네티즌, 야수로 돌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지은 '국가'라는 책을 보면 '기게스의 반지(Ring of Gyges)'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리디아의 왕을 섬기던 순박한 목동 기게스가 양을 치고 있던 어느날 천둥 번개와 함께 폭우가 내리고 커다란 지진이 일어났다. 지진이 일어난 자리에는 땅이 갈라져 있었고 기게스는 호기심이 생겨 갈라진 구멍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구멍 안에서 기게스가 발견한 것은 커다란 청동말이었다. 청동말에 난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그 안에는 거인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시체에는 반지만 손가락에 끼워져 있을 뿐 몸에는 아무 것도 걸친 게 없었다. 기게스는 거인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들고 밖으로 나왔다.

기게스가 반지를 손에 끼고 이것을 돌리자 자신의 몸이 보이지 않게 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요즘으로 치면 투명인간이 된 것이다. 그동안 왕에게 성실하게 복종했던 기게스는 자신의 힘을 발견하게 되자 나쁜 마음을 품게 된다.

그는 투명인간으로 변해 왕궁으로 몰래 들어가 왕비를 유혹한다. 이어 기게스는 왕을 죽이고 본인이 왕이 되어 왕국을 차지한다. 플라톤은 기게스의 반지를 익명성에 숨어서 사람들이 처벌을 받지 않고 나쁜 짓을 할 수 있는 '은밀한 자유'의 상징으로 해석했다. 그는 "가장 의롭지 못한 사람이 더 정의롭게 비친다"며 이를 비난했다.

최근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사이버폭력 사태를 보면 기게스의 반지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많다. 기게스의 반지를 끼고 익명성에 숨은 네티즌들이 남의 명예를 훼손하고 모욕ㆍ비방하는 일을 거림낌없이 하는 것이다.

지난해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사이버폭력 피해 상담 건수를 보면 70%가량이 명예훼손이나 모욕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숫자는 매년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사이버 폭력이 급증하는 이유로 많은 전문가는 익명성을 꼽고 있다. 정부가 지난해부터 제한적 본인 확인제를 실시하고 있지만 이는 진정한 의미의 인터넷 실명제와는 거리가 멀다. 실명 대신 필명과 아이디(ID)를 쓰도록 하고 있는 데다 대상 사이트도 내년 4월부터 하루 평균 10만명 이상 방문자로 확대되지만 충분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양윤 이화여대 심리학과 교수는 "익명성에 숨을 경우 자기를 억제하지 못하는 심리가 생긴다"며 "여기에 인터넷 같은 군중에 속하게 되면 사이버폭력 같은 부정적인 측면이 두드러지게 된다"고 지적했다. 다음의 토론방인 아고라도 초기에는 순수한 의미가 있었지만 익명성과 군중심리가 결합되면서 변질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심리학적으로 익명성의 부정적인 측면이 입증된 사례는 많다. 미국 스탠퍼드대 필립 짐바르도 교수의 실험이 대표적이다.

짐바르도 교수는 실험자를 2개 그룹으로 나눠 한 쪽이 다른 쪽에게 전기충격을 가하도록 시켰다. 처음에는 양 그룹이 서로 인사를 하고 이름도 알려주도록 했다. 실명집단의 실험이다. 두 번째는 전기충격을 주는 사람이 얼굴을 두건으로 가리고 익명성을 철저히 보장받는 익명 집단 실험이었다. 실험 결과는 놀라왔다. 익명집단이 실명집단보다 상대방에게 2배 이상의 전기충격을 준 것으로 나타난 것. 익명성이 보장될 때 인간의 폭력성이 강하게 드러난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1960년대 예일대학 스탠리 밀그램 교수의 실험도 이와 비슷한 결과를 보여줬다.

최근 한 언론매체의 설문조사를 보면 인터넷 규제를 찬성하는 사람이 61.8%로 반대하는 쪽 23.3%를 압도했다. 특히 인터넷에 많이 접하는 젊은층일수록 규제의 필요성에 동감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20대가 67.5%으로 가장 높게 조사된 반면 40대는 63.8%, 60대 이상은 48.8%로 뚝 떨어졌다.

[이승훈 기자 / 최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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