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납동성당 게시판

[자료]풍납동 본당10년사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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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 K. LEE [pnc339] 쪽지 캡슐

2001-07-20 ㅣ No.1231

안녕하세요!

 

지난날 우리의 신앙이 어떠한 변화를 거쳐 왔는지

다시금 그때의 추억과 정열과 사랑을 되돌아 보며

사귐, 섬김과 나눔을 통한 대희년을 거쳐온 현재의 신앙을

어떻게 승화 시킬 것인가를 잠시만이라도 묵상을 가져 보았으면 하는 뜻에서

작년 8월에 발간된 풍납동 본당 10년사 책자에 기록된 글을 순서대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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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납동 본당 10년사   

 

    - 차 례 -

 

 1부 풍납동 교회사

   1장 풍납.성내동의 여명기

 1) 유래

 2) 신앙공동체의 형성   

 

 -------- 1장 -----

 

   2장 초기 공소 시절

 1) 공소 설정 배경과 경위

 2) 공소추진위원회의 구성과 활동

 3) 초기 공소활동 및 성전건립의 꿈

 

   3장 풍납동 본당설립

 1) 초대 이재철 신부의 부임과 활동

 2) 초기의 사목조직과 복음생활

 3) 이웃과 함께하는 공동체

 4) 사목협의회의 구성과 신심단체의 활성화

 5) 성전건축 추진위원회

 

   4장 성전신축을 위한 노력

 1) 주상배 신부의 부임과 소공동체 활성화

 2) 부임 초기의 사목 조직과 활동

 3) 성전 착공을 위한 노력과 성전건립기금 모금

 ① 신립금 모금

 ② 바자회 모금

 ③ 주임신부의 모금강론

 ④ 폐품 수집

 4) 청소년사목과 여름캠프

 5) 난항을 겪은 초기 건립 공사

 

   5장 새성전 축성과 대희년의 준비

 1) 임시성전에서의 첫미사

 2) 신자배가운동

 3) 새성전의 축성 및 봉헌식

 

  2부  풍납동 성전 건축약사

   1장 당시의 상황과 성전건축의 취지

   2장 성전건축의 준비-성전건축의 횃불이 타오르다

 1) 성전부지 구입과정

 2) 성전부지의 조건

 3) 형질변경

 4) 성전 건축설계 지침 결정

 5) 설계의 공모

 6) 시공회사의 선정

 

   3장 성전의 착공

 1) 기공식

 2) 토목 공사와 주변민원 발생

 3) 골조 공사와 설계변경

 4) 부분입주와 공사일정

 5) 성전건축상의 세부문제

 6) 성탄미사

 7) 성전의 내부장식과 성물들

 

   4장 축성미사와 본당설정 10주년 기념

 

  3부  사진으로 보는 풍납동 본당 10년

 

  4부  우리 본당의 단체사

 

  5부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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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풍납동 교회사

 

제1장 풍납 .성내동의 여명기

 

1) 유래

풍납동은 예로부터 이곳에 바람드리성, 즉 풍납리토성(風納里土城)이 있어

바람드리 또는 풍납리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이 토성을 사성(蛇城)이라고도 하는데, 사(蛇)는 ’뱀=배암’으로 ’바람’과 음이 유사하고, 또 ’드리’는 받아들임(納)의 뜻이 아니라 평야의 뜻인 ’들’을 의미하며, 평고성(坪古城)이라는 명칭도 여기에서 생긴 듯하다.

그리하여 백제 시대에는 ’배암드리’를 사성이라고 한자표기했지만, ’배암드리’가 구두로 전해져 방언으로 사용되다가 바람드리로 정착된 것같다고 한다.1)

한편, 성내동은 풍납리토성 안쪽에 위치한 마을인 까닭에 자연스럽게 붙여진 이름으로서 ’성안말’ ’안말’ 또는 성내리 등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2)

 

현재의 풍납동과 성내동은 조선시대에 경기도 광주목에 속해 있다가, 갑오개혁 때인

고종 32년(1895년) 5월 1일에 한성부 11군 가운데 광주군에 속했으며, 1896년 8월 4일 광주부에 소속되었다. 이어서 1906년 10월 1일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龜川面) 풍납리가 되었고 일제의 강점 하에 있던 1914년 3월 1일, 경기도 구획확정을 할 때 웃바람드리와 아랫바람드리로 나뉘어져 있던 지역을 합해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九川面) 풍납리로 정해졌으며, 한편 성안말, 골말, 안말, 벌말로 나뉘어 있던 지역을 병합해 성내리로 그 지명이 확정되었다.

 

그 후 이 지역은 1963년 1월 1일, 서울시 행정구역의 확장에 따라 광주군 구천면에서 서울특별시 성동구로 편입되어 천호출장소 관할 성내사무소에 속해있었다.

그 당시 성내동의 인구는 남자 2,854명, 여자 3,139명으로 총 5,993명이었다.3)

그러나 인구가 증가하게 되면서 1975년 10월 1일에는 성동구에서 강남구가 구분되었고 풍납동과 성내동은 강남구에 소속되었다.

그 뒤 계속되는 인구증가로 1977년 9월 1일 성내동과 경계를 정하면서 풍납동사무소가 신설되었으며 그 당시 풍납동의 인구는 17,292명이었다.

그 후 1979년 10월 1일 천호출장소가 강동구로 승격됨과 동시에 풍납동은 강동구에 소속되었으며 1988년 1월 1일 신설된 송파구에 소속되었다.4)

 

성내동은 1979년 10월 1일 천호출장소가 강동구로 승격되면서 강동구에 소속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99년 12월 현재 풍납동과 성내동의 인구는 각각 58,830명, 51,077명에 이른다.5)

 

풍납동과 성내동 지역은 예로 부터 한강의 범람으로 질이 좋은 흙이 퇴적한 까닭에 조선시대의 이곳 주민들은 농업과 도료업(陶窯業)을 생업으로 삼아왔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멀지않은 곳에 송파시장이 번창하여 옹기상품은 이 시장에서 단단히

한 몫을 보기도 했다. 한 예로 1925년 대홍수때에는 풍납리에서 왕십리까지 물이 차서 배로 왕래해야 할 정도로 피해가 컸다고 당시 동아일보 기사는 전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옹기를 굽던 200채가 넘는 집이 모두 강물에 잠겼다는 보도는 이 일대의 도료업의 번성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번성은 광복후에도 여전하여 성내동을 중심으로 풍납동 등지에는 각종 공장들이 자리를 잡아 옹기, 기와, 벽돌, 토관, 화분 등을 제조해내는 많은 군소공장들이 들어섰다. 그것은 재료의 풍부함 이외에도 한강수와 광나루다리를 이용한 교통의 편리에도 있었고 6?25전쟁 이후에는 피난민의 풍부한 노동력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 공장들은 1960년대에 접어들어 더욱 발전했고 1970년대 초에 이르러서는 그 절정기를 이루기도 하였다. 그 당시 이 지역은 사실상 영등포 다음가는 준공업지대로 일컬어졌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이후 풍납동, 성내동 일대의 공업은 점차 하향세로 가게 되었다.

그 이유는 인구의 급증과 함께 야기된 일련의 상황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인구의 증가로 넓었던 빈터는 점차 주택가로 변모되어 갔고 학교, 은행을 비롯한 공공시설들이 자리를 잡게되자 넓은 면적을 필요로 하는 벽돌공장이나 기와공장은 모두 외곽지대인 상일동, 하일동 등지나 경기도 성남시 등지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와 더불어 성동구에 한양대가 들어서고 난 후 건국대, 세종대 등이 잇달아 들어서면서 파급된 강동구쪽의 도시화는 광나루다리를 건너 이 지역 근방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풍납동은 위치상으로 한강과 마주보고 있고 성내동 또한 한강에서 멀지않아 항상 수재의 위험을 안고 있었다.

1925년(한강수위 12.26m)과 1972년(11.4m)에 이 일대가 침수되었는데 1984년 9월 2일(11.3m)에 한강 수위가 높아지면서 성내천이 역류하였고 잠실에서 풍납동, 암사동으로 가는 올림픽대로, 풍납로, 선사로가 두절되었으며, 천호대교까지 차량통행이 차단되어 천호지역 전체가 고립되기도 하였다.

게다가 1990년 9월 11일(11.27m)에는 강우량 486.2mm가 내려 1925년 대홍수 이래 엄청난 피해를 당하기도 했다.

 

한강연안이라는 자연조건과 더불어 급격한 도시화의 영향 속에서 공장지대와 주택지역이 어지럽게 혼재하는 상태가 진행되었던 이 지역의 상황은 1988년 초 당시만해도 그리 달라지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가령 풍납동은 구획정리가 완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풍납토성 복원 등 도시계획 미시행 지역으로 도로기능이 미흡했고 주택보급율이 26.65%로 세입자가 다수 거주하는 지역이었다.6)

그러나 올림픽대로의 개통과 올림픽공원 조성 등은 점차 이 지역의 주거조건과 생활환경을 향상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최근에 들어서 이 지역은 한강 연안과 천호중심권에 접한 생활환경이 양호한 지역으로 구분되고 있다.

 

2) 신앙공동체의 형성

좁게는 한강변의 풍납,성내동 지역에, 그리고 넓게는 강동 및 송파 지역에 어떤 방법으로 천주교가 전파되었으며,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이 어떻게 신앙을 받아들였는지 또는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서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1909년 광나루 공소가 설립되면서 이 지역의 신앙공동체가 차츰 자리잡게 되었다는 사실이며, 그러한 맥락에서 우리 땅에 가톨릭신앙이 전파되었던 당시의 역사를 부연 설명할 필요가 있다.

 

1784년 조선에 처음으로 가톨릭신앙이 전파된 이후 1세기에 걸친 박해를 통해 조선의 가톨릭교회는 혹독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피의 순교와 박해 속에서도 신앙의 선조들은 믿음을 지켜냈고 구한 말에 이르러 자생적인 신앙의 터전을 바탕으로 조선의 가톨릭교회는 성장하게 되었다.

프랑스선교사들이 주축이 되어 특히 블랑주교의 시기에 조선전국에 선교사들이 파견되었으며 1882년 종현본당(명동본당)이 설립되었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후 약현본당(1891년), 행주본당(1909년)이 세워지면서 서울의 성문 안밖과 서쪽지역 및 경기도 지역을 관할하였다.

그러나 서울의 동쪽과 북쪽, 그리고 경기도 고양군, 양주군, 광주군 일대에 거주하는 신자들을 관할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던 차에 1909년 독일의 베네딕도 수도회가 지금의 혜화동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과 동성학교 일대에 백동수도원을 차리면서 인근의 신자들이 수도원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교구를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이 지역이 백동본당(1927년, 현재의 혜화동본당)으로 모습을 바꾸게 되었으며, 서울의 동쪽과 북쪽, 경기도 남부지역이 그 관할하에 들어갔다. 즉, 백동본당 설립당시의 관할구역은 동대문, 이화동, 연건동을 경계로 그 북쪽지역과, 아울러 멀리는 경기도 고양군의 숭신면과 양주군 지역까지, 그리고 한강 이남쪽에서 경기도 광주군 일대까지가 속해있었던 것이다.

 

한편, 관할구역 상으로는 백동본당에 속하면서, 한강 이남부터 경기도 광주군 일대에는 작은 신앙공동체들이 형성되어 비록 작지만 엄청난 의미를 지니는 신앙의 선조로서 자리잡고 있었다.

더군다나 1909년 광나루공소가 설립되었고 1912년 현재 63명의 신자들에 대한 기록7) 이 존재하는 것으로 볼 때, 이미 그 이전부터도 서울 동쪽의 한강변에 신앙의 선조들이 생활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즉 1890년부터 1911년 사이에 서울 동쪽과 북쪽 그리고 이 지역과 경계를 같이 하는 경기도 지역에 있었던 구산(1890년), 조은이(1894년), 조곡(1895년), 퉁점골(1900년), 둔전말(1900년), 가락골(1903년), 숫골(1908년), 광나루(1909년), 게리(1911년) 공소가 그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광나루공소는 이후 계속해서 백동본당의 관할 하에 있었고 1948년에 가서는 신당동본당의 관할로 들어갔다. 당시 신당동본당의 관할구역은 신당동 일대를 포함해 왕십리, 금호동, 행당동, 옥수동 등지였고 천호동 일대도 포함되었다. 당시 본당에 편입된 신자수는 모두 1,400명이었다.8)

 

신자수가 이렇게 현격하게 적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당시의 어려운 상황에서 기인한다.

이 시기는 일제의 흉폭한 강점에서 벗어났으나 해방정국의 혼란으로 나라 전체가 어려웠던 때라 그 누구를 막론하고 조선의 민중은 고통중에 있었다.

 

그러나 적은 숫자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신자들은 정기적으로 모여 공소예절을 지켰다.   

1950년 6?25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서 천호동 지역에 큰 변화가 있었다.

즉, 광나루 쪽에 살던 교우들이 천호동 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공소의 위치도 광나루에서 천호동으로 이전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955년 봄 천호동공소가 설정되면서 천호동 지역에 인구가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나자 천호동 지역에 성당을 짓자는 의견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1958년 봄 100여 평의 부지를 매입하는 것을 시작으로 천호동성당은 본당 건립에 착수하였다. 원래 규모가 작은 건물이어서 그해 6월 말에 이미 성당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7월 8일 천호동본당이 설립되었다.

 

천호동본당은 관할지역이 매우 넓어, 지금의 강동구와 송파구, 하남시 그리고 성남시 일부 지역의 사목까지 맡았다.

 

천호동본당은 강동지역에 널리 산재해 있는 여러 본당들의 모본당으로 천호동본당에서 거여동(1917년), 암사동(1981년), 둔촌동(1981년), 길동(1985년), 고덕동(1986년), 명일동(1987년)과 풍납동 본당(1989년)까지 7개 본당이 파생되었다.

 

천호동본당은 여러 본당이 분리될 때마다 새로 생겨난 본당들의 기초를 닦는데 절대적인 도움을 주는 한편, 성당분리로 야기되는 계속적인 신자이동 가운데서 매번 사목협의회와 구역 및 반조직을 개편해야만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한 천호동본당이 오랫동안 송파와 강동지역 교회사에 있어 못자리로서 매우 중대한 역할을 해왔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풍납동본당의 형성과정을 설명하는데 있어 천호동본당의 역할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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