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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와 구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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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민 [mandrew] 쪽지 캡슐

2004-05-20 ㅣ No.4410

                              포도와 구슬

 

                                                                      오 호 선

 

제가 나가는 공부방은 미아리 돌산 공부방이에요. 이제 1년 반 되었나 봐요. 일 주일에 한 번 책 읽어 주러 가는데 아이들은 놀이터에 나가서 노는 걸 더 좋아해요. 그래서 날씨가 좋은 날은 짧은 글 잠깐 읽고 밖에 나가 놀 때가 많아요. 아이들은 바깥에서 마음껏 소리지르고 저 놀고 싶은 대로 놀 때 가장 행복해 보여요.

지난 학기 돌아보니까 아이들이 많이 힘들어했어요. 실무 담당 선생님이 또 바뀌었고 목사님 사모님이 공부방을 돌보지 못하게 되셨거든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들이지만 싸우는 일이 더 잦고 소리를 더 지르고 산만한 걸 보면 아무래도 마음을 잡지 못하고 힘든 게지요. 사람이 바뀌지 않고, 떠나지 않고 오랫동안 아이들 곁에 있어 주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일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어요. 아이들이 바라는 건 오직 그것뿐이 아닐까. 저도 몰래 고민해요.

아이들이 좋아했던 이야기가 뭐더라 생각하니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현덕의 〈포도와 구슬〉(《너하고 안 놀아》, 창작과비평사)이에요. 5학년 정미, 두리, 6학년 광현이도 저학년 아이들하고 같이 들었는데 모두 좋아했어요. 아이들이 늘 겪는 이야기겠구나 싶어요. 남이 가진 거 갖고 싶고, 남이 먹는 거 먹고 싶어 애타는 마음은 아이든 어른이든 똑같을 거 같아요.

이야기 읽기 전에 그림을 보여 주면서 노마, 기동이 얘기 해 주었어요.

“얘 노마는 구슬 있대. 얘 기동이는 포도 있대. 포도가 좋아 구슬이 좋아?”

아이들이 모두 “포도! 포도!” 소리질러요.

“포도 좋은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하니 제 아들 창환이만 빼고 다 들어요. 창환이가 씩 웃어요.

“구슬 좋은 사람!”

창환이 혼자 멋쩍게 손을 들어요. 아이들이 보면서 웃어요. 이제 공부방 아이들하고 제 아이들하고 가까워져서 안 데리고 가면 “선생님 애들 왜 안 데리고 왔어요?” 하고 물어요. 저희끼리는 서로 좋은데 저는 창환이, 수경이 데려가면 “이거 읽어 줘, 이거 읽어 줘.” 하고 자꾸 언니 오빠들 책 읽는 데 방해를 해서 될 수 있으면 안 데리고 다녀요.

‘이런 먹콩 같으니’ 할 때마다 녀석들 머리통을 한 번씩 쥐어박는 시늉 했지요. “이러어언” 하고 길게 빼고 뒤에 “먹콩 같으니”는 잽싸게 해야 더 재미난 거 같아요. 쥐어박는 시늉 하면서 “먹콩 같으니” 하다가 “일 없어” 할 때는 찬바람이 쌩 돌게 ‘흥’ 하는 얼굴로 쌀쌀맞게 말해요. 아이들이 피식 웃어요.

앞에 읽을 때 달리 말은 없었어요. 나중에 기동이가 포도 딱 한 알 남겨서 노마 구슬 다하고 바꾸자고 하잖아요. 노마가 그렇게 달라, 달라 할 때 하나도 안 주더니 참 이러언 고약한 놈이 다 있어요. 정말 욕심이 산 같은 놈이지요. 기동이가 “구슬 다허구 말야.” 하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이들이 한목소리로 소리를 질렀어요.

“우와아, 바보다!”

“진짜 바보다, 한 알 남겨 놓고…….”

어째 아이들은 모두 바보라고 말하나 몰라요. 욕심쟁이라는 말은 하나도 안 하고 그저 다 바보래요. 맨 끝장 그림 볼 때는 기동이 보고 돼지라고 누가 한 번 말했어요. 끝장에 노마는 구슬 굴리고 기동이는 포도 먹는 그림에서 아이들은 노마 쿡쿡 찌르면서 “얜 거지.” 또 기동이 쿡쿡 찌르면서 “얜 바보!” 하더라고요. 그때 영로가 기동이 손가락을 쿡쿡 찌르면서 “돼애지!” 이랬어요.

아이들이 노마를 불쌍하게 여기지는 않는 것 같아요. “얜 거지.” 이러면서도 불쌍하게 여기지도 않고, 한심하게 여기지도 않는 거 같아요. 아이들은 기동이 얘기를 많이 했어요.

“우리도 이런 일 많지?”

“예에에에!”

먼저 말한 사람은 두리예요. 제 친구가 통닭을 혼자 맛있게 먹어서 달라고 했더니 안 줘서 엄청 패 버렸더니 주더래요. 그런데 두리 말이 정말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두리는 몸집이 크지는 않지만 손가락 하나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아주 탱탱해요. 얼굴도 아주 탱탱해요. 둥글넓적하고 탱탱한 얼굴에 눈은 가늘어서 탱탱한 볼에 밀려 눈 꼬리가 올라갔잖아요. 그래서 얼굴 보면 사나워 보여요. 전에 그래요. 자기가 반에서 짱이라고요. 다른 애들도 두리가 학교에서 짱이라고 그래요. 공부방에서도. 자기가 이야기 들으려고 하는데 애들이 떠들고 왔다갔다하면 인상을 엄청 무섭게 쓰면서(정말 살벌해요) “야, 조용히 못 해!” 소리치거든요. 동생들이 대꾸하거나 그러면 “너 죽을래?” 주먹을 올렸다 내렸다 씩씩거려요. 제가 암만 조용히 하자고 해도 시큰둥하면서 두리가 그래 놓으면 아이들이 조금 조용해요. 그것 보면 짱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해요. 아무튼 두리가 통닭 이야기를 그렇게 했고 처음부터 혼자 다 썼어요.

 

통닭과 나!

             이두리

 

하루는 내 친구가 혼자 통닭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통닭을 너무 먹고 싶었다. 그래서 친구보고 같이 먹자 그러니까 일 없다 그래서 화가 나서 친구 멱살을 잡고 “너 맞고 줄래 아니면 그냥 줄래.” “맞고 줄래.” 그래서 나한테 엄청 맞고 주었다. 그런데 친구가 꼭 기동이를 닮았다. 그런데 기동이는 마지막에 포도 하나와 구슬 다와 바꾸자고 하였다. 기동이를 만나면 죽여 패 버릴 것이다.(2월 10일)

 

이런 글은 정말 살벌하지요? 그래도 두리가 집에 엄마가 없을 때 혼자 김치찌개도 끓이고 집 청소도 하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얼마나 따뜻해지는지 몰라요. 저번에 김치찌개 잘 끓인다고 해서 저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눈을 똥글거리면서 “선생님 못 끓여요?” 해요. “응, 맛있게 못 해.” 그러니까 줄줄 말한 거예요. 두리 말 그대로 받아썼지요.

 

처음에요, 물을 먼저 끓인 담에요, 파랑, 햄이랑, 오뎅이랑, 김치랑 딱딱 썰어 가주구요, 물이 끓으면 다음에요, 깨소금을 일단 너요. 쫌 저어 가주구요. 물이 더 끓을 때까지 기다린 담에요, 맛을 보구요. 맛이 쩝쩝하면 소금을 좀 넣구요, 맛이 간이 딱 맞으면요, 불을 끈 다음에 식탁에 가져와서요, 밥에 비벼 먹어요.(1월 20일)

 

다른 녀석들은 책 이야기 끝나자마자 벌써 놀려고 엉덩이 들썩거리고 떠들고 왔다갔다해요.

“종합장에 하고 싶은 말들 적고 놀아!”

했더니 영로랑은 이렇게 한 줄 쓰고 도망 가서 뛰어놀아요.

난 노마가 진짜 잘했다. 포도 1알 나맏스면 누가 바꾸냐. 바보 크크.(이영로, 3학년)

 

난 기동이가 바보 같다. 자기가 포도 다 먹고 싫다 그래 놓고 구슬 바꾸자 그러니까 바보 같다. 진작 처음부터 바꿀 것이지……. 그래서 난 기동이가 바보 같다.(김지은, 2학년)

 

노마가 포도를 가졌으면 기동이하고 같이 나눠 먹고 구슬하고 포도하고도 바꿀 것 같다.(박주희, 2학년)

 

서희는 재밌어요. 영로가 노니까 저도 얼른 하고 놀려고 처음에 ‘포도가 있으면 나도 그랬겠다.’ 그러고는 튀어나가는 걸 제가 잡았어요.

“이리 와 봐아! 포도 있으면 서희는 어떻게 할 건데?” 다시 물었지요.

“나 혼자 먹을 거야.”

“그렇구나. 너무 맛있어서 나도 그러고 싶을 거 같애. 혼자 먹는다고 써야지, 그러엄. 쓰고 가서 놀아, 응?”

겨우 앉아서 또 한 줄 써요. ‘친구가 먹고 싶어도 주지 않고 나 혼자 먹어.’ 그래서 보고 제가 막 웃었어요.

“너무 재밌다. 끝까지 혼자서 다 먹을 거야? 아니면 나중엔 좀 줄 거야?”

“나 혼자 야금야금 다 먹고 하나 남으면 배가 부르면 너 먹을래 해서 먹을 꺼면 주고 안 먹을 꺼면 내가 또 먹어.”

저도 막 웃어요. 천진한 모습이 예뻤어요.

“서희 마음을 정말 잘 말하네. 지금 한 말 뒤에다 그대로 쓰면 좋겠다. 정말 잘 하는데.”

그래서 뒤에 서희가 붙인 거예요. 읽을수록 좋아요.

 

포도가 있으면 나도 그랬겠다. 친구가 먹고 싶어도 주지 않고 나 혼자 먹어. 그리고 또 나 혼자 야금야금 다 먹고 하나 남아 있을 때 배가 부르면은 “너 먹을래?” 그리고 먹을 꺼면은 주고 안 먹을 꺼면은 내가 또 먹는다.(장서희, 3학년)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쏟아 놓기만 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느냐고 뭘 더 배워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지만 저는 아니에요. 이렇게 스스로 돌아보고 부끄럽지 않게 말할 수 있는 것만도 우리 어른이 따라 배워야 할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나눠 먹어야지.” 강요하면 나눠 먹는다고 쓰거나 나눠 먹겠다고 다짐하거나 그런 척하겠지만 그렇다고 아이들이 진짜로 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 나눠 먹고 싶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하거든요.

이 작품의 뜻도 그런 거라 생각해요. ‘나눠 먹어야 한다’는 걸 강요하면 뻔한 교훈만 남아요. 그렇지만 사람의 진짜 마음속엔 얼마나 여러 빛깔의 마음이 출렁거리는지. 그게 사람이고 그게 삶이고 그게 사회라는 걸 저절로 느끼게 해 주는 것이 문학이지 싶어요. 그래서 저는 얼마나 먹고 싶은지 실컷 이야기하고 자기 많으면서 남 안 주는 놈 얼마나 미운지 실컷 쓰게 하고 싶어요.

광현이는 기동이가 싸가지가 없어서 죽여 패 버리고 싶대요. 6학년인데도 혼자 쓰기 너무 싫어해서 광현이 이야기 받아적어 주었어요.

 

기동이가 싸가지가 없고 자기만 많이 먹고요. 한 알 남은 것 갖다가 구슬 바꾸자 그래요. 싸가지 없어요. 나 같으면 기동일 패요.(전광현, 6학년)

 

정미는 나한테 써 달라고 하더니 애들 묻는 거 여기 대답하고 저기 대답하고 꾸물거리니까

“어유, 답답해! 내가 쓰는 게 낫지!”

종합장 펴고 한달음에 써요. 완전히 글씨는 날아가고. 받침도 난리 났어요. ‘5학년인데…….’ 이런 소리 했다간 또 정미하고 한바탕 붙게 되지요. 아무튼 글이 재밌어요.

 

기동이는 후회하는 것 같다. 왜냐 하면 노마가 구슬 다하고 바꾸자 그랬을 때 바꿀걸 후회하는 것 같다. 노마는 그까짓 포도 먹고 싶어 가지구 달라구 그랬는데 안 주니까 구슬 준다는데 안 주니까 짜증나서 그냥 돈 많이 모아서 사지 그까짓 포도 하나 산다고 머가 덧나냐고. 나 같으면 먹고 싶어도 대충 살고 아니면 돈 모아서 산다.(이정미, 5학년)

 

정미가 자존심이 얼마나 강한 아인지 잘 보여요. 정미는 선생님들하고 심심치 않게 한바탕씩 하거든요. 선생님들 모두 정미를 힘들어해요. 정미도 역시 힘들겠지요.

처음엔 ‘머가 덧나냐고.’ 하고 끝이었어요. 제가 궁금해서 더 물었어요.

“그럼 정미는 어떻게 할 건데?”

바로 말이 튀어나와요.

“그냥 먹고 싶어도 참고 그냥 대충 살아요.”

놀랐어요. 많이 준비해 온 말처럼 튀어나오는 말이 삶 속에서 오래 단련된 말 같았어요. 정미가 그 동안 참고 대충 살아야 했던, 제가 하나하나 다 알지도 못하는 정미의 삶이 저를 덮치는 것 같았어요.

아이들이 자기 마음과 자기 삶이 그대로 들여다보이는 말을 하고 글을 쓸 때 전 아이들한테 더 해 줄 말이 없어요. 그저 아이들 말을 되풀이해서 떠올리고, 아이들이 쓴 글을 되풀이해서 읽을 뿐이지요. 그러다보면 제가 부끄러워져요. 저도 혹시 모르는 사이에 기동이로 살고 있는 건 아닐까요?

                                      (오호선 님은 독서문화위원회에서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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