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북한관련

부시, '촛불'의 시작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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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규 [vegabond] 쪽지 캡슐

2008-08-06 ㅣ No.6919

 

부시, '촛불'의 시작과 끝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이 방한(訪韓)한 5일 서울 광화문 거리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다시 충돌했다. 지난 5월 2일 이후 88번째 '촛불'이 켜졌다.


   석 달 전 국민 건강을 염려하며 '미국 쇠고기 반대' 집회에 나섰던 시민들은 대부분 퇴장했다. 아직까지 거리에 남은 극렬 시위꾼들은 '촛불'을 반미(反美) 장사의 밑천으로 돌려 보려는 좌파 세력들이다. 우파는 우파대로 부시 대통령 환영 집회로 맞불을 놓았다. 서울 시내 중심가가 또 한 차례 두 쪽으로 갈렸다.


'좌파=반미, 우파=친미'는 글로벌 현상이고 우리나라에서도 공식처럼 돼 버렸지만 10년 전만 해도 상황은 달랐다. 분단국이라는 특수 현실 때문에 대한민국 짝짓기의 1차 기준은 북한이다. 한국 좌파는 "김정일 정권과 한편이면 무조건 내편"이고, 우파는 그 반대라고 보면 된다.


   한국에선 보수, 미국에선 진보가 각각 집권했던 '김영삼·클린턴' 시절 미국 정부는 대북 포용을 통해 북핵 해결을 모색했고, 한국 정부는 대북 압박을 주장하는 정반대 입장이었다. 한국 진보 진영은 미 정부와 한편이 되고, 보수 진영은 그 반대편에서 불만스러워하는 구도가 짜졌다.


   배역이 뒤바뀐 것은 2001년 1월 25일 부시 행정부가 출범하면서부터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갓 취임한 부시 대통령과의 첫 통화에서 '햇볕정책'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부시 대통령은 전화통을 손으로 막고 옆에 있던 참모들에게 말했다. "이자가 도대체 누구야. 이렇게 순진하다니 믿을 수 없군(Who is this guy? I can't believe how naive he is!)." 미국 네오콘(신보수) 정부와 한국 진보 정부 간의 8년 불화를 예고해주는 사건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대북 포용을 주장하는 한국 정부와 끊임없는 마찰을 빚었다. '김정일 정권 수호'가 지상 명령인 한국 좌파에 부시 대통령은 불구대천 원수일 수밖에 없었다.


2002년 11월 광화문에 원조 촛불이 켜졌다. 불쏘시개는 좌파가 2년 동안 숙성시켜 놓은 반(反)부시 정서였다. 미선·효순양을 장갑차로 치어 숨지게 한 미군 병사들에게 미국 법정이 무죄 선고를 내리자 국민 감정은 폭발하고 말았다. 부시 행정부가 "단순 교통사고 아니냐"는 법 논리로 서둘러 밀어붙인 것이 문제를 키웠다.


   이후 '부시 때리기'는 한국 좌파 세력의 도깨비 방망이 구실을 했다. 동력이 떨어질 때마다 새 에너지를 충전해주는 고마운 존재였다. 그러나 그 약발도 무한정 지속될 수는 없는 일이다. 반(反)부시 정서의 원천은 미국적 질서로 전 세계를 재편하겠다는 '메시아적 환상'에 있었다. 이 같은 오만함은 2006년 11월 중간선거 패배로 심판을 받았다. 부시 정부의 대북 정책 기조는 북한 목 조르기에서 끌어안기로 전환됐다. 한국 내 국민 정서를 배려하는 겸양도 깨쳤다. '30개월 이상 쇠고기 수입 금지' 요구를 추가협상을 통해 받아들인 것이 그 첫 번째요, 독도 표기를 원상 회복시킨 것이 그 두 번째다. 부시 대통령 방한의 폭발력도 자연스레 사그라졌다.


   100일도 남지 않은 미대선 후엔 부시 대통령은 아예 무대에서 내려오게 된다. 더구나 만일 민주당 오바마 후보가 당선되면 '한국 보수―미국 진보' 구도가 10년 만에 복원된다. 북한 정권은 미국 정부와의 밀월(蜜月)이 그리웠던지 벌써부터 통미봉남(通美封南) 세레나데를 부르고 있다. 한국 정부도 불편한 입장이겠지만 국내 좌파 세력도 이를 즐길 처지는 못 된다. 좌파가 끌어안고 사는 철 지난 이념 목록 중 그나마 반미(反美)가 먹혔던 것은 '불친절한 부시씨(氏)'가 있었던 덕분이다. 좌파는 그리 멀지 않은 세월에 부시 행정부 시절을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때는 우려먹을 게 있었는데…"라며.


▒ 조선일보 김창균·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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