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비스산업의 자동화
한 때 제조업에서 감소되는 인력을 유통과 서비스업을 주측으로 한 3차 산업이 흡수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다. 우리나라 정부도 3차산업을 살린다며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 그러나 생산라인의 자동화와 함께 곧 유통과 서비스업의 자동화가 시작되었다. 바코드의 도입으로 대형매장에서 물건값을 계산하는 서비스 인력이 대폭 줄어들었다. 계산기를 두드리거나 손으로 계산을 하는 대신 바코드를 계산대에 스윽 지나치는 것으로 계산이 손쉽게 처리됨으로써, 줄어든 시간만큼 계산대 앞에 세워두어야할 인력은 더 감소하게 된 것이다. 아직은 좀 더디지만 앞으로 모든 생산초기단계부터 유통과정까지 전과정에 도입될 RFID 카드는 물건값 계산부터 카드 결재까지 일괄처리함으로써 물건값을 계산하는 과정 자체를 생략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대형매장에서 바코드를 찍던 인력조차도 쫒겨나야한다는 말이다. 가까운 장래에...
유통과 서비스업의 자동화 과정은 이미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와 이TEk. 돈 계산하는 곳에 서있는 단 한명의 비정규직 아르바이트생을 제외하고는 모든 과정이 무인화된 세차장이 즐비하다. 무인 주차장은? 무인 고속도로 톨게이트는? 심지어 무인 러브호텔도 등장했다. 산업이 발달함으로써 서비스산업 영역이 커지기는 하겠지만, 서비스업에서도 필요인력이 줄어들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즉 일자리는 점점 줄어든다. 2차 산업에 이어 3차 산업도 많은 부분이 ‘노동없는’ 형태로 재편될 것이다.
그럼 도대체 무슨 일을 하지? 자영업? 오늘자(11월 29일) 동아일보는 자영업의 44%가 극빈층이라는 사실을 당당하게(!) 보도하고 있다. 그건 단지 경기 탓만이 아니다. 일자리에서 쫒겨난 사람들이 소규모 점포를 열고, 그게 포화상태가 되니 이제 최소한의 유지도 안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경기가 풀리면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고?
자본주의는 기술의 발달이 꿈의 세계를 가져다 줄 것으로 묘사한다. 모든 사람들은 보다 더 풍족한 물자를 소비하며 더 많은 여가시간을 가지게 되리라... 그러나 기술의 발달로 일자리가 줄어들어 돈을 버는 사람들이 줄어들면 무슨 돈으로 물건을 사고 무슨 돈으로 여가를 즐기지?
고용없는 성장!
이전의 경제학 체계에서 성장은 곧 고용의 창출과 등치되었다. 즉 경제를 양적으로 팽창시키면 고용이 늘어나고 돈 쓸 사람이 많아지면 경제는 더 좋아진다는 논리. 그러나 이제는 선진국에서조차 ‘고용없는 성장’을 우려하고 있다. 미국의 FRB 상임의장인 그린스펀은 “경기회복이 즉각적인 고용으로 연결되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미 한국에서도 한국은행 총재가 ‘고용없는 성장에 대한 우려’를 표명(2004년 1월)했으면 7월 삼성경제연구소는 한국사회가 고용없는 성장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11월 6일 재정경제부와 한국은행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실질 국내총생산(GDP) 10억원당 취업자수를 나타내는 고용계수가 지난 90년대초 60을 넘어섰으나 10여년만에 33.4를 기록함으로써 절반수준으로 떨어져 이른바 '고용없는 경제성장'이 가시화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심지어 ‘고용없는 성장’을 넘어 ‘고용감소 성장’이 논의되고 있을 정도이다.
7-80년대 개발독재 시대처럼 파이를 키워서 나눠먹자는 논리는 현실성을 잃었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매스컴에서도 “낙관적인 파이론”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여차하면 중국으로 동남아로 공장들고 튈 것이니, 웬만하면 참으라는 협박성 논리가 더 많아졌다.) 지금보다 더 열심히 일해서 더 많은 재화를 생산하면 더 많은 부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더 많은 재화를 생산해도 소비할 사람이 없다. 어떤 사람이 일하면 어떤 사람은 필연적으로 놀아야하는 상황에 직면했다는 것이다. 즉 더 많은 투자, 더 많은 회사, 더 많은 공장, 더 많은 생산, 더 많은 상품이 더 많은 고용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국경제가 많은 고용을 보장하는 노동집약적인 산업으로, 굴뚝공장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현실을 직시하자!
우리는 솔직해야할 시점에 와 있다. 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자본주의도, 그리고 그 자본주의가 발달시킨 첨단기술도 절대로 실업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니 현대자본주의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많은 실업자들을 양산해낼 것이다. 그런데 권력을 쥔 자들은 이 문제를 알고 있지만 누구도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니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권력자들은 자신들이 사회를 운영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더 이상 이 사회에 희망을 줄 수 없다는 것을 공언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제레미 리프킨이 심각하게 경고한 바 대로, 우리는 필연적인 역사적 상황에 직면해 있다. 20명이 일하고 80명은 놀 수밖에 없는 사회로 우리는 한발 한발 다가가고 있다. 지금의 사회구조는 실업자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없다. 실업문제 혹은 백수 문제를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안된다. 현재 자본주의의 구조에서, 그리고 한국자본주의가 세계자본주의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에서 볼 때 실업자 문제는 필연적인 것이다. 물론 한가지 방법은 있다. 노동시간을 대폭 줄이고, 일자리를 나누고, 부동산과 교육문제를 해결하여 노숙자가 아닌 형태로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존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비용을 확 낮추는 것. 그러나 여차하면 외국으로 나갈 고민을 하는 우리나라 기업들에게 이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사회적 양극화가 심각하다는 진단에도 끊임없이 노동의 유연성만을 강조하는 기업들에게, 그리고 그런 기업들을 너무도 충실하게 뒷받침해주고 있는 정부에게 이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백수들은 죄가 없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다. 현재의 실업문제는 구조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취직을 못한 개인의 책임도, 취업을 포기한 개인의 책임도 아니라는 것이다. 매스컴과 정책 담당자들은 더 노력하고 눈높이를 낮춰보라고 하지만, 냉정하게 이야기해서 대졸자가 청소부로 취직하는 마당에 고졸자는 더 이상 어디로 내려가란 말인가? FTA(자유무역협정)으로 싼 농산물이 밀려들어올 마당에 농촌에라도 내려갈 용기가 생길까? 이미 일자리가 부족한 상황 속에서 아무리 비집고 들어간들 갈 곳 없는 사람들에게 무능하다고 비난을 퍼부은들 비관하며 자살하는 사람들밖에 더 늘어나겠는가? 답없는 이 안에서 더 고민을 해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어짜피 일자리가 대량으로 모자른 것이 사회적인 대세라면, 자발적 실업자들, 굳이 자본주의 노동시장에 편입되지 않고 살아보려는 백수들의 판단이 오히려 더 현실적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백수들을 예찬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적어도 그들이 받지 않아도 될 비난은 그만 퍼붓자는 것이다. 구조적 문제들을 개인에게 돌리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마치 역사의 종착역처럼 여겨졌던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여기까지라는 것을 직시한다면, 우리는 자의에 의해서 혹은 타의에 의해서 자본주의를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또 다른 생존법을 찾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미 우리 사회에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 된 백수들에게서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