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동성당 게시판

★ 묵시 2장 해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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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호 [austin] 쪽지 캡슐

2002-01-30 ㅣ No.8681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묵시 2~3장)는 흥미 있는 연구과제이다. 일곱 편지의 구조가 거의 동일한 구조 형태를 가지고 있다.

 

 

에페소

2,1~7

스미르나

2,8~11

베르가모

2,12~17

티아디라

2,18~29

사르디스

3,1~6

필라델피아

3,7~13

라오디게이아

3,14~22

 

써보내라

1a

8a

12a

18a

1a

7a

14a

말씀하신다

1b

8b

12b

18b

1b

7b

14b

알고 있다

2

9

13a

19

1c

8a

15a

들어라

7a

11a

17a

29

6

13

22

언약

7b

11b

17b

26.28a

5

12

21

 

1) 메시지 전달 명령

묵시록 저자는 자신이 본 환시를 각 교회에 편지를 통해서 써 보내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 명령은 절대적인 것이고 의무적인 것이다. 묵시록 저자가 전해야할 메시지는, 주어진 것이지 청해서 얻은 것이 아니다. 이 점은 인간 역사 안에 자유로이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모습과 명령형이 지니는 절박성과 필요성을 염두에 둘 때 그리스도의 도래 순간이 눈앞에 다가왔음을 인식하게 해 준다.

 

2) 말씀하시는 분의 소개

묵시 1,12~16에서 묘사되고 있는 인자에 관한 환시 체험 내용을 각각의 편지 서두에 몇 가지씩 다시 나열하면서 “…분이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런 식의 문장 형태는 메시지 전달을 위한 문체로 흔히 사용 된다 (아모 1~2장).

 

3) 반성 촉구

각 교회에 보내는 편지 속에서 보면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알고 있다”라는 표현을 통해 각 교회의 반성을 촉구하신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지고의 권위를 가지고, 편지를 받아볼 교회의 사정을 이미 알고 있으며 적절한 평가를 내리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표현방식이다.

- 그리스도께서 책망 받아 마땅하다고 여기시는 교회들, 이들은 정신을 차려야만 한다.

  에페소, 베르가모, 사르디스, 라오디게이아 (4 라는 상징적인 숫자)

- 칭찬 받고 있는 교회들

  스미르나, 티아디라, 필라델피아 (3 이라는 상징적인 숫자)

칭찬받고 있는 교회들이 책망 받고 있는 교회들 사이에 자리 잡음으로써, 칭찬과 책망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칭찬받고 있는 교회들과 책망 받고 있는 교회들 그리고 위험 주에 있는 교회들과 아무런 위험 없이 살아가는 교회들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에페소 교회는 책망 받는 교회들 속에 속하고 있기는 하지만 8가지나 되는 칭찬을 받고 있다. 소행과 수고와 인내(2,2),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이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발견한 일(2,3), 인내심을 갖고 있는 모습(2,3), 용기를 잃지 않은 모습(2,3)

② 베르가모 교회는 “내 이름을 굳게 지켜 왔고 내게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2,13)라는 칭찬을 듣는다.

③ 사르디스 교회는 칭찬을 받고 있지는 못하지만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 몇몇이 있다”(3,4)는 말을 듣는다.

④ 라오디게아 교회는 가장 준엄한 질책의 편지를 받은 교회이다. “나는 네 소행을 알고 있다. 너는 차지도 덥지도 않다. …너는 자신이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자 일수록 나는 책망도 하고 경계도 한다. 그러므로 너는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 (3,15~19)

또한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은 2장 5절(에페소 교회)과 16절(베르가모 교회)와 3장 3절(사르디스 교회)와 19절(라오디게이아 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묵시록 전체의 내용을 통해 신앙인들은 끈기 있게 신앙을 지켜 나가도록 초대받고 있으며 회개하지 않는 신앙인들에게는 가차 없는 질책이 가해지고 있다 (9,20~21; 16,9~11).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신앙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계시는 것이다.

특히 반성을 촉구하는 3,19은 매우 중요하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준엄하게 말씀하신다면 그것은 사랑을 가지고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그분은 사랑하는 것만큼 그렇게 준엄하게 말씀하신다.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라는 권고는 ‘문 앞에서 서서 기다리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더욱더 강한 의미를 띠게 된다 3,20).

이와 같이 책망 받고 있는 교회들에 관한 내용들을 비교해 보면, 에페소와 베르가모 그리고 사르디스와 라오디게아 순으로 칭찬이 줄어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무죄하다고 여겨지면서 칭찬을 받고 있는 교회들은 반대로 그 충실성을 점점 더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⑤ 스미르나 교회는 그가 당한 환난과 궁핍을 알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 (2,9).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영적인 부(富)에 대해 말씀하신다.

⑥ 티아디라 교회는 사랑과 믿음과 봉사와 인내라는 4개의 덕목을 갖추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 (2,19).

⑦ 필라델피아 교회는 충실성에 대한 상급과 같은 월계관을 이미 받은 것처럼 소개되고 있다 (3,11). 게다가 ‘필라델피아’라는 이름은 ‘형제적 사랑’이라는 뜻이다.

결과적으로 불충실성의 증대 순서는 준엄한 질책의 증대순서에 상응하고 있으며 충실성의 증대 순서는 칭찬의 증대 순서에 상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성령의 메시지를 듣도록 초대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이 말마디가 앞의 세 편지들(에페소, 스미르나, 베르가모)에서는 승리자가 받을 보상 문구 바로 직전에, 뒤의 네 편지들(티아디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게이아)에서는 편지 맨 끝말로 나타난다.

각 편지들은 각 지방 교회의 사정에 따라 적절한 지침으로서 제시되고 있음도 아울러 짐작할 수 있다.

 

5)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언약

각 교회에 보내는 편지 속에서, 박해의 시련 속에서도 항구하게 인내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승리가 약속되어 있으며, 승리자가 받을 보상이 명시되어 있다.

 

 

1. 에페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 (2,1~7)

에페소는 소아시아의 각 지역과 교역이 빈번한 교통의 요충지로써, 소아시아 지역의 수문장 구실을 하던 도시였다. 에페소는 바울로 사도가 3년 동안이나 머물면서 다른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전교의 중심지이기도 했다(사도 19장 참조). 이 도시는 훗날 그리스 사람들이 섬기던 아르테미스와 동일시 되게 될, 프리기아 신화에 나오는 다산(多産)의 대 여신인 큐벨레에게 제의를 바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드는 중심지였으며, 여기에 세워졌던 ‘아르테미스(다이아나) 신전’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꼽힐 만큼 번성한 도시였다.

에페소는 영원한 숙적 베르가모와 오랫동안 패권 다툼을 해 왔다. 기원전 129년에 로마가 에페소를 지방 수도로 정함으로써 패권 다툼은 끝을 맺게 되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시점(기원후 70년경)을 전후로 에페소의 그리스도 공동체는 소아시아에서 모교회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런 이유로 훗날 에페소가 ‘아시아의 빛’이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요한 묵시록 써진 시대 (기원후 94~95년경)에 에페소 교회는 번창 일로에 있었으며, 아르테미스에게 바치는 종교의식에 대항해서 격렬한 싸움을 싸워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묵시록의 첫 번째 편지는 바로 그런 상태에 있던 에페소 교회에 보내지고 있는 것이다.

 

세속적인으로 화려하고 번성한 도시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에페소 교회는 자신의 행동 양식을 보다 품격 있게 해 나가기 위해서 시선을 하늘로 향해야만 하고, 지상에서의 번영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참다운 교회의 모습인 것이다. 정치적으로 또 그리스도교적으로 중심지에 위치한 에페소 교회에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는 당신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고 계신 분이고, 밤낮으로 당신의 오른손을 비추는 첫 번째 촛대의 품위를 그 교회에 맡기시는 분이시다 (출애 25,31~40; 레위 24,1~3 참조).

에페소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 어떤 능력과 그 어떤 특권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에페소는 정치적으로는 로마 황제 카이사르로부터 아시아의 중심지가 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로서의 에페소 교회는 오로지 그리스도로부터 영예의 자리를 부여받고 있을 뿐이다. 교회의 최고 책임자 곧 그리스도께서 교회들 가운데서 에페소 교회를 첫 번째 자리에 올려놓으신 것은 그 교회가 지니고 있었던 다음의 여섯 가지 특징들 때문이라 할 수 있다.

① 업적 (너의 행한 일)

“너의 행한 일”이라는 표현은 에페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 속에 3번 나온다 (2절, 5절, 6절: 행한 일의 중요성을 드러내는 표지로서 소개됨). 에페소 교회가 행한 일이란 능동적이고 실천적인 믿음이요, 세상에서 예수에 대해서나 사탄에 대해서, 빛에 대해서나 어둠에 대해서 보여준 가시적이고 공개적인 믿음의 행동을 말한다 (요한 5,36; 3,19~21).

② 수고

에페소가 보여준 수고는 어떤 일이든지 전혀 권태감을 느끼지 않고 지속해 나가는 그런 수고가 결코 아니다. 여기서는 마치 에페소 교회가 선교적 열정을 지닌 공동체였으며, 아직도 그런 공동체로 남아 있는 것처럼 사도적 수고나 선교적 활동에 무게를 실어주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요한 4,6.38 참조).

③ 인내

인내라는 말이 묵시록 안에 7번 나오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교적 덕목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시련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누구나 지녀야 할 태도인 것이다. 특별히 인내심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게 될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마르 13,13). 인내는 주님의 사도가 지녀야 할 전형적인 덕행이다 (2고린 6,4). 그것은 실망과 좌절을 이겨낸다.

위에서 언급한 업적과 수고와 인내, 이 세 가지 특징들은 신앙을 증언하는 일에 연계시킬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④ 악한 자들에 대한 태도

에페소 교회는 예수의 이름 때문에 악한 자들의 소행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악한 자들이란 ‘악마의 일을 하는 자들’ 또는 ‘어둠의 일을 하는 자들’이다.

⑤ 거짓 사도들에 대한 경계

여기서 말하는 사도들이란 ’12제자를 가리키는 사도들’ (Apostles)이 아니고 단순히 ’선교사들’ (missionaries)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거짓 사도들’은 ’거짓 선교사들’이란 뜻이며 아마도 6절의 ’니골라오파’를 지칭하는 것이리라.

니골라오파(2,6)에 대해 기원후 1세기의 어떤 문서에도 이 종파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이 전혀 없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이 파에 대해서 확실히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교부들의 반(反)이단론 가운데 이 파에 대한 비평의 글이 써 있다. “니골라오파는 제멋대로 방종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레네오,’반이단론’, I,26,3). “니골라오파는 바른 교리를 외면하고 사람들에게 아무 음식이나 먹고 어떤 난잡한 행동을 해도 관계없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히폴리토, ’이단론’, 7,24). 오늘날 성서 학자들은 본 대목의 ‘니골라오파’와 묵시 2,14~15에 나오는 ‘발람을 추종하던 무리들’을 동일시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따라서 본 대목에서 밝히지 않은 니골라오파의 소행은 아마도 묵시 2,14~15에 나오는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게 하고, 또 음란한 짓을 하게 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한 편으로는, 일반적으로 큰 항구 도시에서는 윤리적으로 문란한 행동이 아무런 문제없이 자행되어 왔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이 도시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특히 아프테미스에게 바쳐진 다산(多産)을 기원하는 종교의식 속에서 나타나는 외설스런 행동을 생각한다면, 니콜라오파의 소행은 아마도 육체란 영이 입고 있는 옷에 불과하기에 육체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믿으며 그리스도교의 교리에 어긋난 행동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한다.

⑥ 예수의 이름 때문에 고통을 참아냈고 용기를 잃지 않았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살려고 할 때에, 숱한 박해와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요한 15,18~19 참조).

 

에페소 교회 안에서 보여진 6개의 소개된 내용들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교회들에 앞서 첫 번째 자리에 에페소 교회를 올려놓으신 것이다. 그러나 에페소 교회는 그들이 지니고 있던 덕목들만큼이나, 부족한 것도 지니고 있었으니 그것은 첫 번째 사랑을 저버렸던 점이다. 이 부분은 예레 2,2를 연상하게 한다.

 

“네가 처음에 가졌던 사랑”(2,4)이라는 표현에서의 사랑(agape)은 요한 복음서와 요한 서간에서 볼 때 그리스도교 계시의 본질 자체라 할 수 있다. 신약성서 전체 안에서 사랑이란 말이 지니고 있는 의미는 바로 형제적 애덕, 사랑과 자비 그리고 상호 협력에서 비롯된 조건 없는 행위를 지칭하는데, 그것들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달아야만 한다. 이 편지는 에페소 교회가 예전에 지녔던 사랑을 기억하고, 타인에 대한 그 같은 사랑에 기초해서 새롭게 일을 시작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지난 기억을 회상케 한다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고유한 역사로 여기서는 선교를 수행하던 일을 기억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요한 14,.26). 회상한다는 것은 또한 행동을 요구하는데, 첫 번째 사랑에서 가졌던 감격을 되새기며 현재의 빗나간 삶을 바꾸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귀 있는 자는 영이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라”(2,7)라는 표현은 두 가지 어감을 내포하고 있다. 우선 그 말은 ‘귀 있는 자는’ 이라는 단수형으로 소개되고 있으므로, 개인적으로 신앙인 각자가 회개를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는 세례 받은 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거기서 각 신앙인은 하느님 백성의 거룩함(聖性)에 참여하게 된다. 또 다른 한 편으로는 ‘교회들’이라고 복수형을 써서 “영이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라” (2,7)라고 당부하고 계시는 것처럼, 각 자신이 속한 지역 교회만이 아니라 다른 개별 교회에 보내진 메시지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비록 그것이 어떤 특정한 지역 교회에 꼭 필요하거나 아니면 그 교회에 특별히 요구하는 내용을 간직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교회에만 해당하는 메시지만은 아니다. 각 지역 교회는 하나의 하느님 백성을 이루고 있기에 총체적인 의미를 담고 있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증진할 수 있도록 협력해야만 한다.

 

어찌되었든 개인적이거나 총체적이거나 승리는 가능하다. 그 승리자에게 보상이 언약되어 있다. 보상의 내용은 “승리하는 이에게는 하느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의 나무에서 먹을 것을 따주겠다”(2,7)는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의 나무’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세 가지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당대의 통용되던 동전에 새겨진 아르테미스의 거룩한 나무를 암시해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요한 묵시록이 우상숭배의 상징인 아르테미스의 거룩한 나무를 언급할 리가 없다. 둘째는, 에덴 동산에 심어졌던 나무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요한 묵시록은 잃어버린 낙원으로 돌아가는 것을 설파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보상에 관한 이야기의 근거를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하는데,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마지막 환시 속에서 생명의 나무는 거짓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거부될 그런 생명을 양육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22,2.14~15). 그러므로 에페소 교회에 주어진 언약은 가장 위대한 사랑(agape; 요한 15,13 참조)이 계시된 십자가 나무의 열매를 언젠가 맛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2. 스미르나 교회에 보내는 편지 (2,8~11)

스미르나 역시 에페소처럼 큰 상업도시로서 각 곳으로 무역이 뻗어나가는 아름다운 항구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는 이 도시에 대한 언급이 일절 나오지 않는다. 현재 터어키의 두 번째 항구이며, 세 번째로 큰 도시인 이즈미르를 지칭한다.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분”(2,8)께서 스미르나 교회에 말씀하시는 분으로 소개되고 있다. ‘처음이요 마지막’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신비를 암시하는 표현이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겪으시고 나서 새로운 생명을 얻으신 분이시기에 (1,18 참조),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조건과 하느님의 영원성을 당신 자신 안에 모아 놓으신다. 그리스도께 부여된 반대 명제적인 모든 호칭들은, 예를 들어 ‘시작이요 마침’ ‘알파요 오메가’와 같은 호칭들은 그러한 총체성을 표명해 준다. 처음이요 마지막이라는 호칭은 스미르나 교회를 위협하는 죽음 때문에 선택된 호칭임에 틀림없다.

 

“환란”(2,9)이란 대부분 그리스도교 신자를 예수의 수난에 동참하게 하는 ‘박해’와 동의어이다 (1,9 참조). 가난한 자는 성서적 언어 표현 속에서 억압받는 자 이므로 그는 강하고 힘센 자의 희생물이 되어 환란을 겪고 있는 자이며, 가난한 자는 그 어떤 도움도 청할 곳이 없기에 그러한 가난함의 결과가 박해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으므로, 환란은 스미르나 교회 공동체가 안고 있는 궁핍의 원인이며 결과이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말하는 역설적인 내용은 그러한 인간적 궁핍이 하느님의 눈에는 부유한 것이기에, “그러나 너는 부유하다”(2,9) 고 선언하신다. 스미르나 교회는 마태 5,3에서 말하는 첫 번째 행복을 실제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중이며,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 온전히 받아들여지고 있는 중이다.

 

“자칭 유다인이라는 자들”(2,9)에게 스미르나 교회가 비방을 당하고 있다는 언급으로 보아 유다인들이 앞서 말한 환란의 원인 제공자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말하는 비방은 흔히 중상이나 모략으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 경우 비방의 의미를 축소시키게 된다. 중상이나 모략은 인간을 겨냥하는 것이고, 비방은 하느님을 반대하는 직접적인 행위이다. 그런 의미가 묵시록 안에서 이 ‘비방’이라는 단어가 지니고 있는 의미이다 (13,1.5.6; 16,9.11.21; 17,3).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 공동체를 위협하는 박해의 주동자가 된다는 것은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비난하는 것이며, 하느님 자신을 협박하는 것이고, 하느님을 다시 한번 고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비난을 일삼는 자들은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유다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이다. 당시의 스미르나에는 유다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이제 유다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자격을 박탈당한 셈이 되었다. 비록 그들이 그들의 회당(會堂 συναγωγα시나고가)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기는 하지만 “사탄의 모임” (2,9)에 불과하다고 단호하게 선언하는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사탄의 모임’ (συναγωγη του σατανα)이라는 희랍어에서 ‘모임’이라는 말에 바로 회당(συναγωγα)과 동일한 단어를 쓰고 있다. ‘사탄의 모임’이라는 표현이 여기에 삽입된 것은 ‘너는 부요하다’라는 표현을 직설적으로 삽입했던 경우에서처럼 직설적인 형태로 교회를 박해하는 일에 동참함으로써 구원의 매개체가 되어야만 했던 유다인으로서의 성소와 존엄성을 포기한 (요한 4,22) 스미르나 유다인 공동체 구성원들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사탄의 모임’라고 표현할 정도로 묵시록 저자가 유다인들에게 갖는 이런 적대감정은 아마도 유다인들이 외교인들 못지않게 그리스도인들을 거슬러 박해하는 입장에 서 있었던 상황에서 기인한다고 하겠다. 예컨대 ‘데살로니카의 유다인들’은 바울로 사도가 ’제1차 전도여행’ 때 ’마케도니아’를 거쳐 ‘베레아’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그곳까지 쫓아와서 무리를 선동하여 소란을 피우며 박해한 일이 있었다 (사도 17,13 참조).

 

“두려워하지 말라”(2,10)는 것은 일반적으로 공포에 떨게 하는 하느님의 현현을 특징적으로 표현해 주는 말이다. 물론 여기서는 장차 당할 고통이 문제시 되고 있다. 여기서 이해해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는 역설적으로 장차 당할 고통 속에서 당신 자신을 현현하실 것이라는 점이다. 비록 ‘고통을 당하다’라는 동사가 신약성서에서 많은 경우 ‘죽는다’라는 의미를 지니지만 (특별히 히브리서와 베드로 전서), 여기서는 그런 의미로 이해하기 어렵다. 악마는 사탄의 모임으로부터 교사 받아 그리스도교 공동체인 교회를 괴롭히기 위해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감옥에 가두는 일을 하려 한다 (2,10).

 

“너희는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할 것이다”(2,10)라는 표현은 동사의 수동태를 사용하고 있다. 이런 경우 하느님께서 주체가 되시어 행동하시는 모습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즉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의 충실성을 ‘시험해 보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악마가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감옥에 가두게 될 것이라는 어감을 품고 있다. 스미르나 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서두에서 언급된 ‘환난’이라는 용어를 다시 사용하면서 끝맺음 하고 있다. 환난이 닥치겠지만 “열흘 동안”만 지속될 것이다.

 

여기서 “열흘 동안”(2,10) 이라는 말은 한정되지 않은 기간을 의미하지만 구체적인 경우에 적용되는 경우 대개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민수 11,19 참조). 또한 10이라는 숫자가 ‘꼭 채워짐, 충만함’을 뜻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말하는 ‘열흘 동안’이라는 기간은 ‘꼭 채워짐’을 뜻하는 동시에 시간적으로 ‘아주 짧은 기간’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박해로 인한 환난이 ‘아주 짧은 시간’ 동시에 ‘아주 혹심하리라’는 뜻을 암시해준다.

 

“생명의 월계관”(2,10)은 묵시 3,11에서 한 번 더 나온다. 스미르나는 또한 운동경기로 널리 알려진 도시였다. 아마도 묵시록 저자는 스미르나에서 자주 벌어진 운동경기를 상상하며 승리자에게 화관을 씌워주던 당시의 풍습을 이 대목에 끌어들였으리라고 본다. 스미르나 교회에 대한 최종적인 언약에는 월계관 이외의 다른 것이 전혀 첨가되어 있지 않다.

 

“둘째 죽음”(2,11)에 대하여 묵시 21,8에 설명이 나온다. ’첫째 죽음’은 자연적으로 육체가 죽는 것을 말하며, 누구든지 이 죽음을 면할 수 없다. 그러나 ’둘째 죽음’은 일단 첫째 죽음 후 심판과 천벌을 받게 될 일부 사람에게만 해당된다. 또한 ’둘째 죽음’은 ’그리스도와의 영원한 단절’이라는 의미에서 관찰될 수 있다. 묵시록 저자가 "승리하는 이는 둘째 죽음에서 화를 입지 않을 것이다" (20,6)고 말한 것은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로마 8,38~39 참조)과도 일치한다. 전통적인 유다사상이나 초대교회 사상에서는 사람이 일단 ’첫째 죽음’ 후 어떤 대기소 같은 곳에 들어가 거기서 마지막 심판날까지 기다리는 중간상태가 있다고 믿었다. 그러한 전승을 바탕으로 두 가지의 죽음이 언급되고 있는 것이며, 첫 번째 죽음은 누구나 맛보아야 할 ’육신의 죽음’이고, 두 번째 죽음은 세상에서 하느님께 불충했던 죄인들이 최후심판 후에 맛보게 될 ’영혼의 죽음’이라 하겠다.

 

에페소 교회 공동체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좋은 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처음에 가졌던 사랑을 저버렸기 때문에 혹독한 질책과 준엄한 경고를 받고 있다. 그런데 스미르나 교회 공동체는 궁핍하다는 것 하나 때문에 화를 면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여기에서처럼 다른 많은 곳에서도 백성들 가운데서 가장 버림받은 계층 속에서 뿌리를 내렸다는 사실이다.

스미르나는 가난한 교회가 되기 이전에 우선 가난한 자들의 교회였으며, 갓 형성된 스미르나 교회 공동체는 사회적으로 부유층에 속하는 계층과는 이미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이 공동체는 로마의 황제숭배와 만신전을 거의 인정하지 않으려 함으로써 스스로 박해를 자초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유다인 회당은 로마 권력층으로부터 종교의식을 거행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카이사르를 어느 정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다인들의 그 같은 행동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무신론자’로 고발하는 하나의 구실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더욱이 유다교 회당은 로마 권력 앞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인 교회를 고발함으로써 (사탄이라는 말은 고발자라는 뜻이기에) 고발자 즉 ‘사탄의 모임’이라 불리게 되었다. 결국 스미르나 교회는 박해를 피할 수 없었고, 그 결과 궁핍의 운명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 같은 모든 점을 알고 계시다는 사실 (2,9)만으로도 스미르나 교회는 상당한 위로를 얻게 되는 것이다. 박해는 인간들이 빚어낸 악의 결과이며,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함으로써 이미 박해를 가한 적이 있다. 박해는 인간의 자유가 행사되는 시?공간이다. 그러나 스미르나 교회를 강타한 박해의 시련은 한정된 기간 겪어야만 할 시련에 불과하다. 하느님께서는 스미르나 교회가 시련을 겪는 동안 지켜주실 것이라는 언약을 해주고 계시는 것이다.

스미르나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그리스도처럼 고통을 겪고 있는 스미르나 교회는 자기의 충실성을 입증해야만 한다. 그것이 그 교회가 처한 시련의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스미르나 교회는 하느님께서 충실하신 분이시며 당신의 불변하심을 나누어주실 것임을 알고 있다. 이와 같이 환난과 궁핍을 겪고 있는 스미르나 교회 공동체는 하느님께서 함께 나누어주실 생명을 만끽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3. 베르가모 교회에 보내는 편지 (2,12~17)

베르가모 도시는 앞의 에페소나 스미르나 같은 상업도시가 아니고 문화의 중심도시였다. 이 도시에 있는 도서관에 20만 권 이상의 양피지 두루마리가 소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지중해로부터 약 15마일밖에 떨어지지 않은 도시로서 소아시아 지방의 행정 중심지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양피지’(parchment)라는 낱말은 바로 이 도시 이름(Pergamum)에서 유래한다. 기원전 2~3세기 무렵 ’에우메네스’(Ermenes)라는 베르가모 왕이 대규모 도서관 건립을 계획하고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사서(司書)였던 ’비잔티움의 아리스토파네스’라는 대학자를 초빙하려 했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이집드 황제가 ’아리스토파네스’를 감금하고, 그 당시 유일한 필기장으로 사용되었던 이집트산 ’파피루스’의 수출을 금지시켰다. 결국 베르가모 왕과 학자들은 파피루스 대신 동물의 가죽(양이나 소의 가죽)으로 필기장을 만들어 썼는데 오히려 글을 쓰기에도 좋았고 보관하기도 수월해서 수세기가 지나면서 파피루스는 사라지고 양피지가 더 널리 사용되었다. 이것이 양피지의 유래다. 베르가모 도시는 지식과 문화로도 유명하지만, 소아시아 지방 가운데 최초의 황제숭배 중심지였다는 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끌게 된다. 13절에서 베르가모를 가리켜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이라고까지 신랄하게 꼬집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쌍날칼”(2,12)이라는 그리스도론적 호칭은 이미 1,16에서 언급된 것을 다시 가져다 쓴 것이다. 쌍날칼이라는 이미지는 전통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지칭하는 이미지인데 (이사 49,2; 에페 6,7; 히브 4,12), 그 이미지가 베르가모 교회에 보낸 편지의 서두와 말미에 자리잡고 있다 (2,12.16). 게다가 당시 로마제국에 속하는 식민지에는 로마인 총독들이 파견되어 통치했는데 이들은 황제로부터 식민지 원주민들의 생사권을 위임받았다는 것을 상징하는 ‘유스 글라디이’ (Jus Gladii)라는 검(劍)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총독들은 식민지 그리스도인들의 생사 여부를 이 검으로 판가름하곤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전(全)인류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생사 여부는 오직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쌍날칼’에 달려 있음을 묵시록 저자는 암시해주고 있다.

 

“증인”(2,13)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마르티스’ (martys)다. 초대교회에서는 신앙을 증거하는 사람은 거의 전부가 순교까지 겸했었기 때문에 이 그리스어가 순교자를 가리키는 낱말로도 쓰이게 되었다. 원래 신약성서에서는 그리스어의 이 말이 언제나 증인, 증거, 증언이라는 의미로만 사용되었던 것인데, 2세기 중엽부터는 ’증거’와 ’순교’의 두 가지 의미로 혼용하게 되었다.

 

베르가모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칭찬 부분은 “저버리지 않았다” (2,13)라는 동사를 통해 특징적으로 서술되고 있다. 베르가모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권좌를 가지고 있던 고발자 사탄의 공동체가 공존하던 도시였다.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권좌라는 용어는 도시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제우스의 제단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공존한다는 것은 어려우면서도 위험성을 안고 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예수의 이름을 굳게 지켜온 것에 대해 칭찬을 받고 있다. 사탄의 족속들의 태도를 지칭해 주기 위해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칭찬하기 위해 사용된 “굳게 지켜왔다” (2,13)는 동사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굳게 지켜왔다”와 “고집하고 있다”라는 말은 같은 동사이다). 베르가모에는 아직 일반적으로 박해가 가해지고 있지는 않지만, 박해를 예고하는 표징이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몇 가지 나무랄 것이 있다”(2,14)는 표현에서 ‘몇 가지’란 중요한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베르가모 공동체에게 질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베르가모 공동체는 발람을 진정으로 신봉하는 자들과 니골라오파 사람들이 그토록 굳건하게 고집하고 있는 가르침을, 공개적으로 반대하여 대적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관대하게 내버려두고 있었던 것이다.

 

“발람”(2,14 Balaam) 이라는 말은 히브리말의 ’벨라’(bela, 정복하다)와 ’하암’(ha’am, 백성) 이라는 두 단어가 합성된 복합어로서 ’백성을 정복하여 나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 경우는 그리스어의 ’니칸’(nikan, 정복하다)와 ’라오스’(laos, 백성) 이라는 두 단어가 합성되어 ’니골라오스’나 히브리어에서 유래한 ’발람’은 동의어(同意語)라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당시 성행하였던 이교 잡신숭배 사상의 영향으로 알게 모르게 ’타협적 신앙’, ’간접적인 우상숭배’에 빠지게 될 위험이 있었고, 묵시록에 나오는 ’발람’이나 ’니골라오’ 같은 인물은 ’교회에 몸담고 있으면서 남에게는 신앙을 입버릇처럼 강조하면서도 실제에 있어서는 반(反)교회적, 반(反)신앙적, 반(反)그리스도적 소행을 조장하는 거짓교사(지도자)’들을 지칭하는 대명사라 하겠다(2베드 2,15; 유다 1,11 참조).

 

승리자에게는 두 가지 보상이 언약되어 있다. 첫 번째 보상은 “감추어진 만나”(2,17)를 주겠다는 것이다. “감추어진 만나”라는 표현은 쌍날칼의 이미지와 비교해 볼 때 대조적인 모습으로 부각되고 있다. 쌍날칼은 거짓된 가르침을 구분하고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상징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쌍날칼이 날카롭기 때문에 (민수 21,24) 원수를 쳐죽인다고 말한다 (창세 34,26). 빵 역시 전통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상징한다 (아모 8,11; 이사 55,1~5). 천상적 빵인 만나는 더 더욱 그렇다 (신명 8,2~3; 요한 6,31). 그러므로 만나인 말씀은 아직 감추어져 있으나 승리자에게 주어질 것으로써, 그것을 통해 승리자는 하느님으로부터 생명 자체를 보장받게 될 것이다.

 

또 다른 언약은 새로운 이름을 새겨 놓을 수 있는 “흰 돌”(2,17)이다. ’흰 돌’에 대해서 학자들마다 의견이 서로 다를 뿐 아직까지 명확한 설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다만 유다 관습에는 축제에 앞서 그 축제에 참여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입장권 구실을 하는 하얀 조약돌을 미리 나눠주곤 했다. 차츰 이 흰 돌은 현세에서의 축제뿐만이 아니라 천상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이 흰 돌은 특별한 행운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그 ’흰 돌’ 위에 기쁨의 날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런 식의 설명이 묵시록에 나오는 "흰 돌에는 새로운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하는 구절을 결코 만족하게 설명해주시는 못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 흰 돌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시비를 가려줄 때마다 아론이 착용하였던 ’가슴받이’ 속에 넣어둔 ’우림과 둠밈’ (출애 28,30)이라는 것과 어떤 관련이 있지 않은가 생각하기도 한다. 아마도 대사제들이 백성들의 시비를 가려줄 때 착용했던 가슴받이에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기록한 돌들이 달려 있었으리라고 본다. 실제로 유다의 민간전승에 의하면 하느님의 이름도 이 ’우림과 둠밈’에 써져 있다는 것이다. 이 학설은 아직 완전한 증거를 제시해주지는 못하지만 ’흰 돌’과 ’새로운 이름’이라는 두 가지 문제를 어느 정도 논리에 맞게 동시에 연상시켜주는 실마리가 되고 있다.

 

베르가모 교회에 보낸 편지는 그다지 가혹한 내용으로 되어 있지는 않으나, 매우 확고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한 편 베르가모 공동체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위험하고도 어려운 상황 속에서 살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믿음을 견고하게 지켜왔다는 것은 크게 칭찬받을 만한 것이다. 황제숭배의식을 비롯해서 ‘관능적인’ 문화와 예술의 환상을 거치면서 고도로 세련된 호화스러운 사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견고하게 지켜 온 신앙을 내팽개칠 수도 있었다. 신약성서 다른 책들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신앙 즉 믿음을 단지 이성적인 행동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믿음은 투신이요 행동인 것이다.

한 가지 부족한 것은 가르침의 진위성에 관한 것이다. 신학, 가르침, 이것들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있어서 쓸데없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들은 신앙을 바쳐주는 것이며 동시에 신앙의 결론인 것이다. 니콜라오파의 소행을 미워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들의 열교적인 잘못된 가르침을 고발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 맞서 싸워야한다. 믿음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충실한 자가 되기를 원하는 한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거기서 그쳐서는 안 되고, 올바른 가르침을 전해야 한다. 그 이유는 그러한 가르침으로부터 다른 이들의 믿음이 생겨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 10,14.17).

우상 숭배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베르가모 교회에 보낸 편지는 바오로의 편지보다 어감이 약한 것이 사실이다 (1고린 8,1~13). 그렇기에 베르가모 교회에 보내는 편지가 내포하고 있는 우상 숭배에 관한 관점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베르가모 교회에 보낸 편지와 바오로의 편지는 모두가 우상 숭배의 문제를 앎의 문제에 연계시키고 있다. 바오로는 지적(知的)으로 무장된 그리스도교 신자는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가 자신에게는 결코 우상 숭배가 되지 않기에 그것을 먹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연약한 신앙인은 의혹에 시달릴 수도 있을 것이므로 먹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편 묵시록 저자는 다른 각도에서 보고 있다.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그것을 먹으라고 가르치는 자들의 말을 먹는 것이라고 묵시록은 말한다. 그것은 죽음의 말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렇기에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이나 만나의 음식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 다시 말해서 헛된 가르침을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그 점이 중요하다. 여기서의 관점은 지금 이 순간부터 미리 참여해야만 하는 (베르가모 교회의) 천상적 운명에 관한 것이다.

 

 

4. 티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편지 (2,18~29)

티아디라는 묵시록에 나오는 일곱 도시 가운데 가장 보잘 것 없는 도시로서, 베르가모 남동쪽 40마일에 위치하고 있다.  이 도시는 당시에 귀하던 자색 옷감으로 유명하였으며, 사도 바울로가 필립비에 머물러 있을 당시에 바울로의 설교에 감동하여 온 집안 식구와 더불어 세례를 받은 다음 바울로를 자기 집으로 모셔와 머물게 한 적이 있는 ’리디아’라는 여인은 바로 이 티아디라 출신으로 역시 자색 옷감 장수 였다고 기록되어 있다(사도 16,14 참조). 티아디라에는 상인들의 동업조합(同業組合)들이 여러 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자들 사이에 말썽을 빚은 악폐들이 이런 상인 동업조합이라든가 음행으로 끝맺어지는 이교도 축제들에 참여함으로써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하느님의 아들”(2,18)이라는 호칭은 묵시록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서문인 1,6과 티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종결문인 2,28에서 그리고 3,5.21; 14,1에서 하느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 부르고 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최고의 칭호로써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일곱 가운데 네 번째) 티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편지 속에서 나타난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2,23에서 말하듯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불꽃 같은 눈을 가지신 분으로 특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불꽃 같은 눈”(2,18)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묵시록 속에서 눈은 성령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묵시 5,6은 즈가 4,10의 영향을 받은 것임). 그리고 불은 전통적으로 성령께 연계되어 있다 (마태 3,11; 사도 2,3~4).

 

“놋쇠로 된 발”(2,18)은 견고성, 안전성, 굳건함을 상기시켜 준다.

 

“나는 너의 소행과 너의 사랑과 믿음과 봉사와 인내를 알고, 또 네가 나중에 행한 일이 처음보다 더 훌륭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2,19) 라는 칭찬을 티아도라 교회는 듣는다. 에페소교회가 주님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질책을 받았던 사랑과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열정을 통한 성장이 티아디라 교회 안에서는 이미 실천되고 있는 것이다. 티아디라 교회 안에는 봉사의 정신이 자리잡고 있다. 봉사라는 용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처럼, 묵시록 전체 안에서 오직 여기서만 사용되고 있는데, 그것은 에페소 교회에 내리신 책망과 견주어 볼 때 더욱 그 의미가 두드러진다. 또한 에페소 교회 공동체가 ‘처음 가졌던 사랑을 저버렸다’ (2,4)는 책망과는 대조적으로  티아디라 교회 공동체는 “네가 나중에 행한 일이 처음보다 더 훌륭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2,19) 라는 칭찬을 받는다.

 

“이세벨”(2,20)은 소아시아의 다른 교회들 안에서의 니골라오파나 발람처럼 문제를 야기 시키고 빗나가게 하는 존재이다. 그는 티아디라 교회에 속해 있던 여예언자로서 신자들을 (음행,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게 하는) 악폐로 이끈 장본인이다. 그녀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는 매우 어렵고, 다만 그녀의 이름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구약성서상의 ’음행과 술수’로 악명을 떨친 ‘이세벨’을 연상해봄으로써 묵시록의 여예언자 ‘이세벨’이라는 인물을 어느 정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구약의 이세벨은 이교도 국가인 시돈의 왕 ‘에드바알’의 딸로서 이스라엘 왕 ‘아합’의 부인이 되었다. 그녀는 왕 아합을 충동질해서 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신을 섬기도록 갖은 술책을 부렸으며, 야훼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몰살시켜 버리고 바알을 섬기는 예언자들을 자기의 식탁에 불러 모았다. 그 때문에 이스라엘은 타락과 수상숭배로 전락되었으며, 참 예언자 ‘엘리야’와는 원수지간이 되었던 악녀다(1열왕 16~18장 참조).

그런 이유로 해서 이세벨이라는 여인은 창녀인 것이며 (2열왕 9,22), 그래서 그녀의 후손은 죽음에 처해지게 될 것이다 (1열왕 21,20~24). 결국 이세벨이라는 인물은 티아디라를 타락시킨 여인으로 규정하기에는 매우 적합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악의 세력이 한 교회에서 다른 교회로 점증적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에페소 교회에서는 니골라오파 사람들의 소행만이 문제시되었고, 에페소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그들의 소행을 미워했다. 베르가모에서는 세련된 가르침이 문제시 되었고, 그것을 거부 내지 공박해야만 했다. 티아디라에서는 티아디라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행한 일들이 인간적인 가르침에 근거하지는 않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찬탈하는 것에 근거했다. 하느님의 아들 안에 거처하시는 성령께서는 자기 자신을 예언의 영으로 자처하는 것에 대해 분노 하신다 (1열왕 22,21). 자신을 성령으로 자처하는 것이야말로 타락의 극치를 이루는 것이다.

 

“나는 그 여자에게 회개할 시간을 주었으나 그는 자기 음행에서 돌아서려 하지 않았다”(2,21) 는 표현은 성령께서 역사 하시지 않으셨다거나 성령께서 관용을 베풀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너그러우심에 대한 표징들인 것이다. 현재 시점에서 간음한 여인은 아파서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병상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마태 9,2.30 참조).

그리스도께서 내리시는 처벌은 우선 간음한 여인과 간음하는 자들에게 미치게 된다. 여기서 간음한 여인과 간음한 자들이란 간음한 여인이 설파한 거짓 예언들을 고지식하게 믿게 함으로써 실제적으로 음행을 하게 하는 자들을 말한다. 음행은 간음한 여인이, 자신이 설파한 신탁들을 퍼트리도록 자기의 추종자들로 만든 사람들에게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의 왕비를 추종하던 자들이 그러했듯이 (2열왕 10,7), 죽음에 처해지게 될 것이다.

 

“그의 자식들도 죽음으로 덮쳐 없애 버리겠다”(2,23)는 표현은 ‘어머니’의 수태불능을 표명하는 한 방식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내리시는 처벌들은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교회들 모두에게는 위로가 될 것이다.

 

“생각과 마음을 꿰뚫어보고 있다”(2,230는 표현은 무녀(巫女)의 신탁에 있어서도 좋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영지주의적 형태의 표현이다. 신성(神性), 마술, 여자 점쟁이의 도움을 빌어 인간들에게는 감추어져 있는 신들의 세계의 비밀들을 꿰뚫어 보고, 미래를 간파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영지주의의 사고이다. 이 표현을 통해 묵시록 저자는 참으로 오직 성령만이 사탄의 깊이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깊이까지도 샅샅이 살피실 수’ (1고린 2,10 참조) 있을 뿐이라고 역설적으로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사탄의 깊이’를 알지 못하는”(2,24)이라는 구절에서 “알지 못하는”으로 표현되는 ‘비밀지식’은 영지주의자(Gnostics; 그 어원이 되는 그리스어로 gnosis는 ‘지식’이란 뜻이다)인 거짓교사들에 의해 자주 언급되는 말이었다.

영지주의자들은 이 비밀지식을 앎으로써 구원을 자력성취(自力成取)할 수 있다고 선전했다. 이들 영지주의자들은 영혼과 육신의 완전분리를 주장하는 이원론을 펼침으로써, 인간에게 있어서 영혼만이 신성한 것이고 육체는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라고 단정한다. 따라서 육체로 저질러지는 어떤 행위도 (물론 간음행위도 포함해서) 영혼에는 아무런 손상도 끼칠 수 없다는 궤변을 전개했다. 더구나 그들은 한 술 더 떠서 영적 존재인 그리스도인은 어떤 윤리법에도 구속받지 않게 되었다고 허황된 주장을 펼침으로써 초기 그리스도교 사회에 혼란을 야기 시키기까지 했다. 이들의 주장은 그리스도교의 생활규범과 제사의 순수성에 위협적인 존재였음에 틀림없다. 묵시록 저자는 영지주의자들의 이런 가르침을 하느님의 것이 아닌 ‘사탄의 비밀’이라고 혹평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탄의 깊이”라는 표현은 아마도 영지주의자들이 ‘하느님의 깊이 (신비)’를 깨달았다고 자랑하는 것에 대해서 묵시록 저자는 그것이 사실은 ‘사탄의 깊이 (비밀)’이라고 비꼬고 있는 듯 하다. 또한 이단자들이 악과 싸우기 위해서는 ‘사탄의 깊이’를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을 가능성도 있다.

 

2,26~27의 승리자에게 주시겠다고 하는 첫 번째 언약은 시편 2,8~9에서 가져다 쓴 내용으로 되어 있다. 소도시였던 티아디라는 충실성을 간직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생명에 동참할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다스리시는 민족들의 통치에도 참여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티아디라 교회 공동체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아들이신 예수에게 내려주시는 것과 똑같은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쇠지팡이” (2,27)는 놋쇠로 된 발을 견고하게 지탱하게 하며, 이방 민족들을 지칭하는 질그릇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티아디라 교회가 강하고 강력한 교회로 바뀌게 된다. 더 나아가 승리자는 ‘샛별’을 받게 될 것이다.

 

“샛별”(2,28)은 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여명을 알리는 사자(使者)’로 간주되었으며,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샛별이 ‘희망의 성령’을 상징한다고 믿었다. 묵시록 22장 16절에서도 이 ‘샛별’이라는 단어가 또 나온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샛별의 이미지에서 보면 여명이 밝아오기 이전에는 꺼져 있었던, 그러나 다른 별들보다 더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샛별이 한때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바빌론을 상징하기에 걸맞는 것이었다 (이사 14,12). 그와는 반대로 신심이 깊은 벤 시라에게서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제의 이미지를 찾아볼 수 있다 (집회 50,6). 하지만 묵시록에서는, 예수 자신이 바로 그 샛별이라고 선언 하신다 (22,16). 예수는 새로운 창조의 아침이신 분으로써, 그분이 이루신 새로운 창조는 더 이상 황혼이 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샛별을 주겠다’는 언약은 아마도 충실한 그리스도도인들이 그리스도의 통치권에 참여할 뿐 아니라 영생의 새날에 동참하게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느님의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만이 교회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하신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성령의 면전에서 분명한 태도를 취해야만 한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성령의 이름으로 말하는 자들과 예언의 영을 찬탈하는 거짓 예언자들을 구분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거짓 예언자들은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열매를 맺지 못해 사라져 버리게 될 것인데, 그런 징표를 통해 그들은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이다. 한편 하느님의 영은 일과 생명과 능력에 영감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그리스도교 신자들 역시 거짓 영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그들의 가면을 벗겨내는 창조적 능력을 행사해야만 하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촉구하신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어둠이 지배하는 암흑의 세계 속에서, 꺼지지 않는 빛을 비추는 샛별의 광채가 되도록 불리움을 받고 있다.

티아디라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처음에는 티아디라 교회가 행한 일 (2,19), 다음으로 이세벨의 소행 (2,22), 그 다음으로는 세례 받은 사람 하나 하나가 행한 일 (2,23), 끝으로 ‘예수의 일’ (2,26)이 문제시 되고 있는데, 그 중에 26절의 ‘예수의 일’은 신앙인들이 끝까지 지켜 행해야만 한다. 위와 같은 문제들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불안을 가중시키는 현실에 대한 문제임에 틀림없다.  불안을 가중시키는 현실이란 복음적 신앙과 직업적 선택 사이에서 계산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말한다. 즉 회개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업주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직업의 수호신들을 숭배하기 위해 종교의식을 거행하는 공동모임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 신자로서의 충실성 때문에 그들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기 전까지 행해오던 방식을 역행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또 자신을 보호해 주는 수호신들을 경시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고용했다고 의심받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이방인 주인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채용하려 하지 않았다. 세례 받은 신자들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 과감하게 우상숭배의 요구를 거부하는 삶을 살아야만 했다.

이 문제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도 난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신앙인이라 말하면서도 현실적 유혹 즉 돈과 명예에 관계된 문제에 봉착하게 되면, 순간적으로 신앙인이기를 포기하는 것 같은 우리의 우유부단한 행동들은 끝까지 어떤 경우에도 지켜가야 할 그리스도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이상 우리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 이외에, 다른 어느 것에도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신앙인의 모습과 비 신앙인의 모습을 수없이 바꾸어가며 자신의 현실적인 안위와 이득을 추구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시는 그리스도께서 과연 언제까지 참아주고 계실 것인가? 깊이 묵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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