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동성당 게시판

★ 묵시 13장 해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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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호 [austin] 쪽지 캡슐

2002-01-30 ㅣ No.8682

 

666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여 13장을 앞당겨 실었습니다. 다음에 묵시 3장을 이어 올리겠습니다.

 

 

묵시 13장에서는 새로운 두 주역을 소개하게 되는데, 그들은 두 짐승들로서 묵시 20장에 이르기까지 문제의 핵심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두 짐승들의 행동을 묘사해 주는 내용들은 두 짐승이라는 이미지에 상대적으로 구체적인 역사적 실재가 감추어져 있음을 제시해 준다. 그리고 묵시 13,1~10과 13,11~18속에서 소개되고 있는 두 짐승 사이에는 상호연관성 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13,1~10) : 우선 첫 번째 짐승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눈에 띄는 것은 이 짐승이 용의 피조물이라는 점이다. “뿔이 열 개이고 머리는 일곱”(묵시 13,1)인 이 짐승의 모습은 용과 이 짐승과의 유사성을 돋보이게 해 준다(묵시 12,3 참조). 이 짐승은 용으로부터 권세를 부여받고 있다(묵시 13,2). 그 짐승의 영광은 용을 경배하게 한다(묵시 12,4). 그 짐승은 마흔두 달(3년반) 동안 권세를 휘두르는데(묵시 13,5), 그 기간은 용에게 허락되었던 기간과 같다(묵시 12,6~14 참조). 그 짐승은 용처럼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싸운다(묵시 12,17; 13,7). 여기서 우리는 하늘에서 쫓겨난 용이 취한 공격의 연장선상에 있다. 우리는 묵시 13장을 묵시 12장과의 논리적이고 유기적인 연관성 안에서 살펴볼 때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묵시 12장에서는 사탄의 패망을 기뻐하면서 하느님의 통치와 그분 그리스도의 권세 그리고 순교자들의 승리를 선포했다(묵시 12,10~11).

 

“머리 하나에 치명상을 입어서 거의 죽게 되었었지만”(묵시 13,3)라고 첫 번째 짐승의 상태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공동번역성서에서 ‘치명상을 입어서’라고 번역한 것은 ‘난도질을 당했음’을 나타내는 말로서 “상처 입은” 모습을 의미하며, 그때 사용된 ’os esphagmenen (’ωs ’εσφαγμ?νην) 이라는 용어는 묵시 5,6에서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양의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된 용어와 동일하다. 묵시록 저자는 동일한 용어가 사용하기는 하지만 서로 상반되는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지적해 주기 위해 묵시 13,8에서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양의 책 속에 이름이 기재된 사람들만이 짐승을 경배하는 것을 과감하게 거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그러한 상처가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첨가해서 언급함으로써(묵시 13,3 참조) 그 짐승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모방하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렇기에 누가 참다운 권세와 진정한 승리를 쟁취하고 있는가, 하느님인가 아니면 그 짐승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사람들은 현혹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탄은 패배했지만, 그에게는 어느 정도의 현재 시간이 남아 있다. 그는 그 시간을 제대로 이용하고 있다. 용은 짐승을 일으켜 세워 그 짐승을 통해서 권세를 휘두르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하며,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죽게 함으로써 적어도 외적인 승리를 거두려 하고 있다. 그 짐승이 행사하는 보편적 권세는 인간성 전체로부터 정중한 흠숭을 받으려 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묵시 13장의 핵심은 진정한 승리자가 누구인지를, 이 지상에서 누가 그런 권세를 행사하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즉, 그리스도이신지 아니면 그 짐승인지를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제 사탄의 행동을 분별해 내고, 그 가면을 벗겨내고, 그가 더 이상 행동을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승리를 선포하는 것은 어린양과 그분으로부터 선택된 종들의 몫이 될 것이다(묵시 17,14).

바다에서 올라온 첫 번째 짐승과 땅에서 올라온 두 번째 짐승을 소개하는 문학적 양식의 유사성은 교회의 두 적대자들이 신학적으로 유사성을 띠고 있음을 알려주는 표징이라 할 수 있다.

첫 번째 짐승이 체류하고 있는 “바다”는, 성서적으로 볼 때, 악과 죽음의 본거지이다. 지형적으로 볼 때, 여기서의 바다는 소아시아의 서북쪽에 위치한 지중해일 수밖에 없다. 이 첫 번째 짐승은 ‘열 개의 뿔과 일곱 머리’를 가지고 있다. 묵시 12,3에서는 용이 ‘일곱 개의 머리와 열 개의 뿔’을 가지고 있다고 전한다. 즉 소유하고 있는 것의 순서가 바뀌었다. 그런데 그 짐승은 머리들 위에가 아니라 뿔들 위에 열 개의 관을 가지고 있다. 머리가 명령과 조직의 상징이고 뿔이 권세와 힘의 상징이며 관이 정치적 통치의 상징이라고 할 때, 용에게서 드러나는 것은 명령과 10개의 뿔로 표상되는 대단한 힘을 바탕으로 일곱 머리로 표상되는 절대적인 통치권이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난폭하고도 공격적인 힘을 소유하고 있기에 그 앞에서는 굴복해야만 한다(머리보다 먼저 언급하고 있는 10개의 관의 모습이 그 점을 표상해 준다). 한편 그는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폭군처럼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자다. 용을 묘사해 주는 내용들과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묘사해 주는 내용들이 그처럼 동일하다면 강조점은 바뀌게 된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머리들에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묵시 13,1)는 표현을 통해, 바다에서 올라온 이 짐승이 하느님만이 가지고 계시는 절대적인 왕국을 강탈하고 그의 폭압적인 권위는 하느님과 그분 그리스도의 교회를 거슬러 행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 짐승에 관한 환시는 다니 7장에서 영향을 받고 있는데, 다니 7,2~8에서 묘사하고 있는 네 짐승들 가운데 세 짐승들이 이 환시 속에 섞여 있다. 그러나 다니엘서에서는 사자-곰-표범 순으로 소개되지만, 묵시록에서는 그와 반대 순서로 표범-곰-사자의 순으로 소개되고 있다. 어쨌든 그것들 전체가 바다짐승들인데, 그 짐승은 행동이 무척 빠른 것으로 알려져 있던 표범과 흡사하고(하바 1,8참조), 먹이를 찾아내는 데 있어서 능숙한 솜씨를 보여주는 표범과 흡사하다(예레 5,6 참조). 그러나 그 짐승의 발은 힘과 잔인성에 있어서 악명이 높은 곰의 발과 같다(시편 17,12; 2사무 17,8). 히브리말로는 곰을 dob라고 하는데, 그것은 ‘슬그머니 스며들다’라는 의미를 지닌 어간 dabab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마치 그의 걸음걸이가 음흉한 것과 같은 모습을 표명해준다. 그 짐승의 입은 포효하는 울음소리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사자의 입과 같다(아모 3,8; 잠언 19,12; 20,2 참조). 포효하고 난도질 할 수 있는 입을 가진 이 바다짐승은 능란하고, 예측 불허하고, 기운이 넘치고, 음흉하지만, 자기 스스로는 어떤 권세도 가지지 못한다. 이 짐승에 대해 “권세가 그에게 주어졌다”고 여러 번 언급되고 있듯이, 그가 가지고 있는 것 즉 힘과 왕위와 권세는 모두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베르가모에 사탄의 ‘권좌’가 있었음을 알고 있고(묵시 2,33), 그 왕국의 종말에 대해서는 묵시 16,10이 서술해 주고 있다.

성서 주석학자들은 다니 7장이 전해주는 의미와 방금 지적된 구체적인 내용들의 도움으로 여기서 지칭하는 짐승이 로마 제국이라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묵시 17,11에서 보면 그 짐승은 여덟 번째 왕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여덟 번째 왕이라면, 그는 81~96년 통치했던 도미시아누스 황제일 것이다. 그리고 그 짐승은 자신을 “Dominus et Deus”(주님이시며 하느님)이라 불렀던 그 황제였을 것이다. 스스로에게 붙인 그와 같은 호칭은 두말할 여지없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로마 황제는 에페소에 그의 성전을 가지고 있었고, 로마는 그의 성전을 스미르나에 가지고 있었으며, 베르가모에서는 죽음에 처형할 수 있는 권리를 표상해 주는 권좌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비록 지금은 그 막강한 힘을 과시하고 있다할 지라도, 그 제국은 결코 영원히 지속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묵시록 저자는 전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종족과 백성과 언어와 민족을 다스릴 권세를 받았다”(묵시 13,7)는 표현에서 암시하듯 제국의 지배는 보편적이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무력과 박해를 통해서만 지배의 권세를 펼칠 수 있을 뿐이다.

9~10절에서는 지금까지 언급된 내용의 중요성을 나름대로 강조해 주는 교훈적 권고가 나타난다.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 들으십시오. ‘잡혀 갈 사람은 잡혀 갈 것이며 칼을 맞아 죽을 사람은 칼을 맞아 죽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박해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자신의 믿음이 아무런 손상도 입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 인내하는 모습을 보여줄 줄 알아야 하며, 복음과 제국(세상)이 서로 융화할 수 없음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결과들을 기꺼이 감수하고 인내할 수 있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그래서 믿음 때문에 유배를 떠나야 한다고 한다면 기꺼이 가야하고, 칼에 맞아 죽어야 한다면 도 그렇게 맞아 죽어야 한다. 여기서의 권고는 40년 전 사도 바오로가 한 권고보다(로마 13,1~7 참조) 더욱 가혹한 권고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만큼 박해와 시련이 더 컸었기 때문이다. 이미 유다인 회당과의 결별이 이루어졌으며, 권력과의 투쟁은 불가피한 것이 되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하느님의 절대적인 왕권을 수호하고 “예수의 증언을 간직하기 위해”(묵시 12,7), 즉 복음적 가치들로 살아가기 위해 세상의 권력자를 반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그들은 박해를 감수하고 인애해야만 했던 것이다. 바로 거기서 세상의 권력자가 행하는 방식으로 구사된 정치 권력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옛 뱀의 권모술수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믿음 안에서 인내하고 정치 권력의 명령을 과감하게 거부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무기가 없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정치 권력이 얼마나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인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땅에서 올라오는 두 번째 짐승이 그런 모습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땅에서 올라온 두 번째 짐승"(13,11~18) : 두 번째 짐승은 외형상으로 첫 번째 짐승과 전혀 구분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두 번째 짐승의 외모가 첫 번째 짐승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은 확실하나, 그의 행동에 영감을 주는 것과 행동이 지향하는 목적은 동일하다. 그의 목소리는 그가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즉 그는 용과 같이 말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용의 영역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 짐승은 첫 번째 짐승의 모든 권세를 행사하며, 첫 번째 짐승을 경배하도록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본문에서는 두 번째 짐승이 가지고 있는 부차적이며 종속적인 특성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다. 묵시록 저자는 첫 번째 짐승에 관한 내용이 13,12~17에서 8번씩이나 언급함으로써, 두 번째 짐승이 실존하는 유일한 이유가 바로 첫 번째 짐승을 위해 봉사하는 것임을 드러낸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행하다”라는 동사가 빈번하게 사용되는데, 이 “행하다”라는 동사를 8번 중 7번이나 두 번째 짐승에 대해 사용함으로써 두 번째 짐승이 매우 구체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 구체적인 활동은 세 가지인데, 먼저 두 번째 짐승은 표징과 이적들을 행하여 하늘로부터 땅에 불을 내리게 한다(묵시 13,13). 그리고 그 짐승은 첫 번째 짐승을 경배하게 하기 위해 첫 번째 짐승의 우상에게 숨을 불어넣는다(묵시 13,15). 12절에서는 첫 번째 짐승의 권세를 경배하는 것이었지만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적 또는 미신적 영역으로 들어가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묵시록 속에서는 이 두 번째 짐승이 거짓 예언자로 불리게 된다(묵시 16,13; 19,20; 20,10). 다시 말해서 두 번째 짐승은 종교적 특성을 분명하게 지닌 존재로 불리게 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두 번째 짐승은 그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을 표시하는 숫자의 낙인이 찍힌 사람 외에는 아무도 사거나 팔거나 하지 못하게 하며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 숫자를 풀이해 보라고 하는데, 두 번째 짐승의 그와 같은 행위는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영역에 관계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 두 번째 짐승의 외적인 모습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머리를 한 메뚜기의 모습처럼(묵시 9장 참조), 위장된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짐승은 어린양인 체 가장하고 있지만 용처럼 말한다. 그런 점에서 그 짐승은 두말할 여지없이 거짓 예언자 인 것이다.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이미지는 “여러분은 거짓 예언자들을 경계하시오.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여러분에게 오지만 속으로는 약탈하는 이리들입니다”(마태 7,15)라는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땅에서 올라온 이 짐승은 두 개의 뿔만을 가지고 있으나, 마치 열 개의 뿔을 가지고 있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일체성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기에 10개의 뿔에다 2개의 뿔을 더해 12개의 뿔이 됨으로써 모든 권세를 쥐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다. 이제 세상은 두 짐승을 합쳐 생긴, 누구도 정복할 수 없는 힘에 종속된 것처럼 보인다.

첫 번째 짐승은 용으로부터 권세를 부여받았다(묵시 13,2). 그 권세가 이제는 첫 번째 짐승을 움직일 수 있는 존재라 할 수 있는 두 번째 짐승에 의해서 행사되고 있다. 바다에서 올라온 첫 번째 짐승의 특징은 전적으로 용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데 있다. 그 이유는 모든 것이 용으로부터 주어졌기 때문이다. 두 번째 짐승은, 본문에서 ‘짐승’이라는 용어가 10번 나오는데 그 중 9번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지칭하고 오직 한 번(묵시 13,11) 땅에서 올라온 짐승을 지칭하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첫 번째 짐승의 경우와는 다르다. - 신약성서의 희랍어 원문에서는 13,11을 제외하고는 모두 두 번째 짐승을 언급하면서 단지 ‘그는’이라는 지시대명사를 쓰고 있을 뿐이지만 공동번역에서는 그 짐승이라고 풀어서 번역하고 있다. -  앞서 언급한 것처럼 두 번째 짐승의 목적을 지칭하기 위해 끊임없이 사용되고 있는 동사는 “행하다”라는 동사다. 실제적으로 이 괴물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국에 봉사하기 위해서 포악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 짐승이 경배하게 하고(묵시 13,15), 내적인 의식을 바치게 하는 대상은 바로 제국인 것이다. 여기서는 죽음을 초래하게 하는 상처 그러나 치유된 상처에 대해서 다시 상기되고 있는데, 그것은 묵시 13,3에서처럼 첫 번째 짐승의 머리들 가운데 하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즉 구체적인 한 로마 황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첫 번째 짐승 자체인 지상에서 군림하는 제국을 지칭하는 것이다.

물론 두 번째 짐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확하게 밝혀내기가 결코 쉽지는 않다. 이 두 번째 짐승은 첫 번째 짐승 곧 제국, 정부, 정치조직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고 있으며 그를 위해 모든 행동을 하고 있다. 두 번째 짐승이 용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그 짐승이 말하는 모습을 통해 입증된다(묵시 13,11). 계속되는 묵시록의 내용은 그 짐승을 거짓 예언자의 표본이 되게 하고 있으며, 거짓 예언자는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지게 되는데, 거짓말이란 결코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신명 18,22 참조). 어떤 의미에서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입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제국을 선전하고, 권세의 논리를 변론하는 자로서 이념적 주장을 하며, 사람들을 강요된 깃발 아래로 끌어 모으는 데 앞장 서는 그 짐승의 모습을 연상해 볼 수 있다.

 

이 짐승은 “큰 표징(기적)들”(묵시 13,14)을 행하여, 의문을 제기하게 하기 보다는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사실, 묵시 12,1에서의 여인의 표징과 15,1에서의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의 표징 이외에 다른 큰 표징은 없다. 묵시록에서 언급하고 있는 그 외의 다른 모든 표징들은 거짓 예언자들이 행하는 표징들이며(묵시 13,13.14; 16,14; 19,20), 묵시 12,3에서처럼 자신이 커다란 존재임을 드러내는 용 자신인 것이다. 성서적으로 볼 때, 하느님의 예언자들은 거짓 예언자들 못지않게 표징들을 통해서 관심을 집중시키게 되지만, 전자는 회개하도록 촉구하기 위해서이고 후자는 여기에서처럼 타락하게 하고(묵시 12,9 참조) 갈 길을 분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고 있다. 이 짐승이 행한 큰 표징은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오게 한”(묵시 13,13) 것인데, 그것은 엘리야 예언자를 떠올리게 한다(2열왕 1,10). ‘하늘에서 내린 불’은 일반적으로 처벌을 의미하는 이미지이지만, 여기서 추구하는 목적은 사람들을 타락하게 만드는 수단일 뿐이다. 첫 번째 짐승이 죽음을 표절하고, 죽음을 초래케 하는 그가 입은 상처, 난도질을 당한 것 같으나 치유된 상처의 모습을 통해 부활을 표절했다면(묵시 13,3; 12,14), 우리는 여기서 일종의 오순절 사건(성령 강림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었던 일)을 표절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짐승의 선교는 예언의 은사와 천사들의 은사를 소유하고 있는 체 가장하고 있는 엄청난 기만을 일삼는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이 본문에서 눈에 띠는 용어는 짐승에 대해서 10번이나 사용하고 있는 “우상”이라는 용어이다(10번 중 4번은 여기서, 나머지 6번은 14,9.11; 15,2; 16,2; 19,20; 20,4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 짐승의 선동을 받아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가 권력을 표상하는 우상을 만들어 그를 경배해야만 한다. 괴물인 그 짐승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우상에게 숨을 불어넣어 ‘말을 하게’(묵시 13,15) 하려 한다는 점에서 다시 한 번 오순절을 표절하고 있는 모습을 대하게 된다. 여기서 짐승이 선전하는 것은 교활하고 효과적이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스스로 그들이 경배할 우상을 만들게 하고 있는데, 그것이 인간들에게는 그들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이 믿는 우상은 숨도 쉬고 말도 하는 듯하기에,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경배는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경배와는 분명 다르다. 하늘에서의 경배는 사랑에서 기인하지만, 여기서의 경배는 강제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경신례를 모방하고 있는 모습과 모든 종교의 대용품을 보게 된다.

만일 모든 사람들이 예수께서 가져다주신 구원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된다면(묵시 11,18 참조)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떤 처지에 있든(“낮은 사람이나 높은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할 것 없이”) 용의 탐욕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묵시 13,16). 그 짐승은 모든 사람들에게 낙인을 받게 하는 것이다. 묵시록에서 ‘낙인을 받다’라는 의미의 동사인 χαραγμα(kharagma)라는 용어가 7번(13,16.17; 14,9.11; 16,2; 19,20; 20,4) 사용되고 있는데, 낙인이라는 용어는 제국의 서류에 찍힌 공식적인 일, 특별히 상업문서에 찍힌 낙인을 지칭하는 전문용어이다. 이러한 낙인의 표시는 모세의 율법의 표지가 남아 있어야만 했던 몸의 두 군데 중 한 곳에, 즉 “오른 손이나 이마”에 받아야만 한다(출애 13,9.16 참조). 오른손은 행동한다는 것의 상징이요, 이마는 인격과 성격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며, 일반적으로 소유의 표시는 이마에 새겨져 있다(출애 28,38; 묵시 7,3 참조). 낙인이 찍혀 있다는 것은, 사고파는 상거래와 장사 그리고 돈과 사회생활에 연계되어 있는 모든 활동을 가능하게 한다. 낙인이 없다는 것은 자동적으로 사회에서 소뢰되게 하는 것이고, 사거나 파는 일에 동참하지 못하는 자들의 축에 끼게 된다. 정치적 권력과 이념적 교조주의 속에서 탄생한 용과 여인의 남아 있는 후손과의 투쟁은 이율배반적인 이 두 집단의 형성을 통해 가시화되고 있는데, 한 집단은 정치적?이념적?경제적 시스템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집단이고 다른 한 집단은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그것을 거부하거나 거기에 얽매여 있지 않는 집단이다.

 

낙인의 경우, 그것 자체가 짐승이나 그 짐승이 지니고 있는 숫자의 이름이다(묵시 13,17). 여기서 나오는 666(’εξακοσιοι ’εξηκοντα ’εξ)이라는 숫자의 해석은 무척 다양하게 나타났지만, 당시에는 요즘 우리가 쓰고 있는 것과 같은 아라비아 숫자가 통용되지 않았고, 히브리어 알파벳과 희랍어 알파벳의 모든 글자들을 숫자 대신에 사용하기도 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전통적인 의미로 이해되고 있는 몇 가지 가능성 있는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 가정으로는, 6이라는 숫자의 기능에 기초하여 6은 12의 절반이고 6이 세 번 반복되고 있기에 계약의 단절 내지 파괴를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666이 악(惡)과 반(反)계약의 과장된 의미라는 것은 666이라는 숫자가 모두 문자로 쓰여졌을 경우 맞는 말이다. 그러나 숫자가 666이라는 숫자의 의미로 졌을 경우에는(히브리말이나 희랍어에 있어서 666이라는 숫자가 6이라는 가치를 지니고 있는 세 문자가 연속적으로 나열된 경우, 즉 본문에서처럼 600과 60 그리고 6을 의미하는 서로 다른 문자들이 사용된 경우) 그런 의미로 보기가 어렵다. 한편 숫자가 지니고 있는 성서적 상징주의에 있어서 우리는 3이나 7을 동반함으로서(나란히 배열하거나 더하기를 함으로써) 6을 또 다른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즉 666은 6을 세 번 연속해서 배열해 놓은 것은 6x7 즉 42(3년반, 1260일)와 같은 값을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숫자는 그의 시대, 다른 말로 우리의 시대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짐승은 아직도 포효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두 번째 가정으로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견해로서 삼각측량에서 나온 가설인데, 그것은 n{(n+1)2}에 상응하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절대성과 전체성의 형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666은 36의 삼각측량법에 기인하는데[36{(36+1)2}=666], 여기서 36은 또한 8의 삼각측량법에서 기인한다[8{(8+1)2}=36]. 여기서 8이라는 숫자는 24로서 지상적이고, 창조된, 불완전한 것만을 지칭하기 위한 것일 수 있다. 그런데 본문에서 666은 분명 누군가의 숫자이며 그런 점에서 고유한 이름들과 시공간에 관계된 숫자로서 짐승을 묘사하는 것과 상응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앞서 제시한 가설은 별 관심을 끌지 못한다고 하겠다.

세 번째 가정으로는, 히브리적 해결 방안으로 히브리 알파벳의 자음들로 계산된 것이다. 묵시록은 희랍어로 스여졌는데, 로마 황제 네로(Qesar Neron)를 히브리어로 표기하여 그 자음만 적어보면, Q(=100)S(=60)R(=200)N(=50)R(=200)W(=6)N(=50)이 된다. 이 숫자를 합하면 666이다.

참고로 개신교의 몇몇 일파에서는 비슷한 방식으로 666이라는 숫자가 로마 교황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로마 교황을 ‘성자의 대리자’로 칭하여 라틴어로 표기하면 VICARIVS FILII DEI가 된다. 여기에서 숫자로 사용되는 알파벳을 숫자로 환산하여(V=5, I=1, C=100, I=1, V=5, I=1, L=50, I=1, I=1, D=500, I=1) 모두 합하면 666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묵시록이 쓰여질 당시에는 교황을 ‘성자의 대리자’로 지칭하지 않았기에 악의를 담고 있는 억지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묵시록에서 하느님의 결정과 그분께 속한 인간들을 특징적으로 표현해 주는 완전한 숫자는 7이기에 6은 7에서 하나 부족한 숫자로서 사탄의 행위와 주도권의 돌이킬 수 없는 불완전성을 지칭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탄은 하느님을 모방하여 거룩함을 상징하는 3의 의미로 세 번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기에, 제국적인 짐승의 사탄적 특성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다.

 

묵시록 12장과 13장은 참으로 일체성을 형성하고 있다. 묵시 12장은 일종의 종합명제적 환시를 전해주었다. 그것에 따르면 역사는 여인과 하느님의 백성 그리고 용과의 투쟁 속에 요약되고 있다. 묵시 13장은 역사란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이방 제국의 권세와의 투쟁 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그런 차원에서 666의 의미를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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