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동성당 게시판

★ 묵시 3장 해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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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호 [austin] 쪽지 캡슐

2002-02-02 ㅣ No.8716

 

5. 사르디스 교회에 보내는 말씀(3,1~6)

사르디스는 티아디라에서 약 30마일 가량 떨어진 도시로서, 고도 450미터의 3면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벼랑으로 요새를 이룬 난공불락의 도성이었다. 기원전 6세기경만 해도 이 도시는 강력한 지배자인 ‘크로에수스’ (Croesus)왕이 다스리던 ‘리디아왕국’의 수도였다. 그러나 천연적인 난공불락 요새로 일컬어졌던 이 도시가 경계를 게을리 한 나머지 우선 546년에 페르시아의 ‘고레스’ (Cyrus)왕에게, 그리고 218년에 그리스 제국의 ‘안티오쿠스 3세’ (Antiocus III)에게 두 차례나 점령당했던 쓰라린 역사를 지닌 곳이기도 하다. 그나마 정면 공격을 받아서가 아니라 소수 특공부대가 절벽을 기어올라 보초병 하나 세우지 않고 무방비 상태로 있는 도성을 삽시간에 함몰시켰던 것이다.

 

“하느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분”(3,1)이라는 호칭은 이미 언급된 바 있는 1,4의 ‘하느님의 일곱 영’과 1,16의 ‘일곱 별’에서 유래한다. 그러므로 사르디스 교회에 말씀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을 주는 바로 그 영(靈)인 (요한 6,63) 하느님의 영을 충만하게 가지고 계신 분이시며, 당신 손에 교회들의 영광스러운 운명을 쥐고 계신 분이시다.

사르디스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나타나는 두 가지 특징은 생명과 소행이라는 기본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심판이 가혹하게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더욱 필요한 것이다. 사르디스 교회는 사르디스 도시와 마찬가지로 이름뿐, 실상은 ‘죽어있는 교회’이다. “네가 살아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이름뿐, 실상 너는 죽어 있다” (3,1).

 

“네가 살아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이름뿐, 실상 너는 죽어있다”(3,1) : 사르디스 교회는 이미 죽은 교회였다. 그러나 사르디스 교회가 죽은 교회로서 이제 교회라는 호칭을 잃어버리게 되었으므로,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고 언급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사르디스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손에 그 교회를 (별로 상징됨) 쥐고 계시고, 그분의 천사가 거기에 현존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아직도 교회인 것이다.

사르디스 교회가 죽은 교회라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말씀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시는 성령께서 더 이상 사르디스 교회의 신자들의 행동을 이끌어 가시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르디스 교회에 보내는 편지 자체가 그들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질책하지 않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그들의 그리스도교적인 삶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하느님의 눈으로 볼 때, 그들이 보여준 행동들은 전혀 실속이 없었고, 그 결과 그들의 실체 자체가 없어지게 되었다는 데서 불행이 닥치게 된다. 사르디스 교회를 죽음으로 이끌게 한 것은 관습과 인습을 따르는 관례추종주의 즉 습관주의적인 신앙생활이었다.

 

“깨어나라”(3,2) : 죽음 가운데서 첫 번째로 부활하신 분이 죽은 자에게 깨어 있으라고 요구하신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특별히 밤 시간에 깨어 있으라고 요구한다 (마태 24,42~43; 26,38~41). 밤 시간은 그리스도께서 부재하시는 순간이지만 그러나 단호한 행동을 취하도록 그리스도께서 ‘도둑처럼’ 갑작스레 찾아오실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하다. 사르디스는 자신의 고유한 역사를 통해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난공불락의 성을 쌓고 있다고 자만하면서 밤에 깨어 지키지 않으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아직은 남아 있지만 죽어가는 것을 굳건하게 하여라”(3,2) : 사르디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자신들의 품위를 인식하고, 그 품위를 다시 세우는 일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은 죽음에 처해지게 될 것이다. 사르디스 교회에는 비록 적은 숫자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교 신자로서의 삶을 끈기 있게 살아온, 참으로 충실한 자들이 있었다. 그들을 따로 떼어내어 다시 새로운 교회로 일으켜 세우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비록 열심한 사람들이 적은 숫자라고 할지라도, 교회 전체와 함께 깨어 있을 필요를 더 이상 느끼지 않는다면 교회론적으로 볼 때 미래가 없는 교회인 것이다.

 

“네 소행이 내 하느님 앞에서 완전하다고 내가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3,2) : 사르디스 교회는 소행에 있어서도 신뢰를 얻지 못했다. 그들의 소행은 하느님의 눈에 낱낱이 파헤쳐졌다. 결코 신뢰를 얻을 수 없는 그들의 소행으로는 하느님께 바칠 것이란 하나도 없었다. 이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어떻게 가르침을 받았고 어떻게 들었는지를 떠올리며 그것을 굳게 지키고’ (3,3) 실행에 옮기는 일 뿐이다. 사르디스는 죽은 문자로서의 성서를 가지고 있었다. 사르디스는 더 이상 겸허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 않았으며, 말씀을 매일 듣지도 않았다. 사르디스 교회는 우선 겸허한 모습을 간직하고 성서의 말씀을 들어야만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깨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옷을 챙겨 입을 시간조차 갖지 못한 채 도주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빠져 버릴 것이다 (16,15)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3,4) : ‘옷을 더럽히다’라는 말은 ‘악에 물들다’라는 말의 비유적 표현이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옷은 구약성서에서 자주 그러하듯이 인간 자체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1사무 18,3~4). 그러므로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 몇몇이 있다’라는 표현은 거의 빈사 상태에 처한 이 교회 안에 몇몇 충실한 신앙인들이 악에 물들지 않고 순수한 신앙을 지켜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악에 물들지 않은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흰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살게 될 것이다. 성서에서 “흰옷”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을 상징하며, ‘흰옷을 입다’라는 것은 그 영광에 참여한다는 뜻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거닐다’라는 것은그리스도의 행동에 동참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또한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흰옷은 2고린 5,4에 나오는 썩지 않는 옷을 상기시켜 준다. 즉 그리스도를 입는다는 의미와 새로운 창조물로 변화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골로 3,10 참조).

 

“그의 이름을 안다고 말할 것이다”(3,5) : 글자 그대로의 뜻으로 본다면 ‘내가 그의 이름을 증언할 것이다’로 번역할 수 있다. ‘이름의 삭제’와 ‘생명의 책에서 이름을 짚어 읽음’ 사이에는 ‘생사(生死)의 현저한 대조’가 이루어지고 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루가 12,8)라는 말씀이 묵시록의 이 대목과 일맥상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름”이란 70인역 성서에서처럼 ‘인간 또는 인격’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생명의 책” (3,5)에 관한 주제는 구약성서에서 따온 것이다 (출애 32~33장; 다니 7,10; 12,1). 이 생명의 책이 선택된 자들 곧 승리한 자들의 이름을 모두 담고 있다고 해서 철저하게 결정론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믿는 사람들의 이름들이 그 책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 이름들은 믿는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믿는 이들이, 선택된 자로서의 모습을 간직하지 못한다면 즉 승리하는 자들이 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심판이 이루어질 때, 그 이름들은 그 책에서 지워지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승리한 자의 이름이 생명의 책에 기록된 채 보존되어 있다면, 그 이름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 앞에서 장엄하게 증언하시게 될 살아있는 이름이 될 것이다.

 

에페소 교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2,5), 사르디스 교회 역시 전해받은 가르침을 떠올리고 과거의 모습을 다시 생각하도록 초대받고 있다 (3,3). 빈사상태에 처한 이 교회가 다시 생명을 얻고자 한다면, 치유할 수 있는 길은 그것뿐이다. 여기서 사르디스 교회에 요구하는 것은 상상이나 독창력을 동원해서 그 무엇인가 자랑삼을 만한 것을 만들어 내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사르디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삶의 원천인 “말씀”에로 되돌아가는 것뿐이다. 예전에는 사르디스 교회 신자들의 행동을 유발하게 했던 복음이었고, 그 복음은 그들 안에서 동적인 역할을 수행했었다. 그러나 지금 현시점에서는 복음이란 것이 그들의 습관적인 신앙생활에 밀려나고 말았다. 사르디스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삶의 원천인 “말씀”을 다시 살아나게 하라는 것도 아니고, 그 말씀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라는 것도 아니다. 단지 굳어진 마음을 다시 활력 있게 하시는 그 “말씀”이 삶의 한 가운데 자리 잡게 하라는 것뿐이다.

사르디스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지난날을 뒤돌아보며 끊임없이 깨어 있는 모습을 간직하며 살아간다면, 사르디스 교회는 자신이 지니고 있던 거짓 이름을 (3,1) 버리게 될 것이고,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는 참 이름을 받게 될 것이다 (3,5).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는 이름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선포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이름은 ‘그리스도화’ 된 이름이 될 것이다. 그 때에 사르디스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입을 것이요, 더럽혀진 옷은 사라져 버릴 것이다.

 

 

 

6. 필라델피아 교회에 보내는 말씀(3,7~13)

‘필라델피아’ (Philadelphia)란 말은 ‘형제애 (형제적 사랑)’라는 의미의 그리스어다. 그러나 ’필라델피아’란 지명은 ’아탈로스 2세 필라델포스’(Attalos II Philadelphos : 베르가모 왕으로서 자기 형제 Eumenes에 대한 우애가 두터웠던 인물)가 이 도시를 세우고 자기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이 도시는 묵시록의 일곱 도시 중 가장 역사가 짧은 도시로서 사르디스 남동쪽 28마일에 위치한다. 이 도시는 ’불에 탄 땅’이라는 뜻인 ‘카타케카우메네’ (Katakekaumene)라는 대평원 한 끝에 위치해 있으며 화산으로 이루어진 평원의 탓으로 항상 지진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거룩하신 분”(3,7) : 그리스도를 ‘거룩하신 분’이라고 부르는 것은 여기를 제외하고는 묵시록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 ‘거룩하신 분’이란 원래 하느님의 칭호이다 (4,8; 6,10).

필라델피아 교회에 보낸 편지 바로 앞에 위치한 사르디스 교회에 보내는 편지가 그리스도와 성령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드러내고 있다면, 필라델피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는 그리스도와 하느님과의 친교의 관계가 강조되고 있다. 그 점은 3,12에서 “내 하느님”이라는 표현이 4번이나 반복해서 사용되고 있는 사실을 통해 더욱 확실해진다. 한편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진실하신 분”이시다. 진실한 분이라는 말은 정통성, 충실성, 견고성, 보증의 의미를 떠올리게 하는데, 그 이유는 그 용어가 “아멘”이라는 히브리어 어근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사 65,16 참조).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계신 (1,18)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열쇠 또한 소유하고 계신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3,7) : 이런 표현은 묵시록 1장에 나오는 그리스도 환시에 대한 묘사 가운데 들어있지 않은 새로운 문구다. 이제까지 다섯 교회에 보낸 편지에 묵시록 1장에서 사용된 그리스도 환시에 대한 묘사들을 한두 개씩 적절히 재인용하는데 전부 사용되었다. ?이제 나머지 제 6,7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는 새로 추가된 묘사들이 등장한다. ‘열쇠’에 관한 언급은 묵시 1,18에서도 이미 있었지만 그것은 ‘죽음과 지옥의 열쇠’로서 본 대목의 ‘다윗의 열쇠’와는 성격을 달리한 것이었다. 이 ‘다윗의 열쇠’라는 표현은 이사야서에서 끌어낸 것이다. “내가 또한 다윗의 집 열쇠를 그의 어깨에 매어주리니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으리라” (이사 22,22). 그러나 이사야서에서의 ‘열쇠를 쥔 사람’은 그 당시 왕실 회계 장관이었던 ‘엘리아킴’을 직접적으로 지칭하는 것이었지만, 묵시록의 본 대목에서 ‘열쇠를 가지신 분’은 ‘새로운 다윗 도성, 새로운 예루살렘에로의 입장 여부를 판가름해주실 유일한 존재이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분의 열쇠는 다른 용도로도 사용될 것인데 그 점에 관해서는 묵시록 3장 8절에 암시되고 있다.

 

“나는 네 소행을 알고 있다”(3,8) : 필라델피아 교회에는 그 어떤 질책도 전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관습적인 인사에 뒤이어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그 교회를 위해서 하신 일, 즉 ’아무도 닫을 수 없는 문을 열어두신 일’을 지적해 주고 계신다는 점은 상당히 의미가 있는 것이다.

 

“문을 열어 두었다”(3,8) : ‘문을 열어둔다’라는 것은 ‘나는 놓아두었다’라는 것에 대한 히브리적 표현이다. 열려진 문으로 표상되는 교회의 상징은 이중적일 수 있다.

첫째, 사도 바오로는 이 지역에서 교회의 선교적 개방을 지칭하기 위해 그런 표현을 사용했었다 (1고린 16,9; 2고린 2,12; 골로 4,3 참조). 우리는 복음 선포에 대한 그러한 개방이 하느님 아버지의 역사하심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기에 활짝 열린 문은 바로 ‘증거할 기회로서 주어진 문’이다. 실제로 1고린 16,9에서 그리스어 원문은 ‘활짝 열려져 있는 문’이라고만 되어 있지만, 이것을 다른 사본(NEB)은 ‘효과적인 일을 하기 위해 주어진 커다란 기회’라고 원문을 크게 의역해놓고 있다.

둘째, 묵시록 본문에서 열려진 문은, 필라델피아 교회 신자들의 사도적 열정이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도시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열려진 천상 예루살렘의 문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필라델피아 교회가 지니고 있는 능력이나 힘은 빈약하기 그지없다. 필라델피아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수적으로도 열세였고 스미르나에서처럼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지도 못했던 것 같다. 별 볼일 없는 그러한 모습이 말씀과 이름에 충실했던 (3,8) 필라델피아 교회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데 결코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필라델피아 교회는 그리스도께 대한 열정을 가진 대가로 그분으로부터 보호와 사랑의 언약을 받고 있다. 선교적 활동은 더욱 큰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필라델피아 교회 안에는 교회를 반대하고 교회를 새로운 이스라엘로 보기를 거부하는 유다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선택된 백성의 구성원들로서의 고유한 부르심을 거부하고 있다 (2,9 참조). 그들 가운데 일부는 연약하기 그지없는 필라델피아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와 하느님께서 사랑을 베풀어주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고 감명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필라델피아 교회의 발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인데, 그렇게 함으로써 이사 60,14의 말씀이 성취되게 될 것이다.

 

“사탄의 모임”(3,9) : 묵시록 2,9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다인들의 모임을 가리킨다. 그리스도 교회가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 (갈라 6,16 참조)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유다인이라고 지칭하는 자들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자격을 박탈당한 셈이 되었다. 비록 그들이 그들의 회당 (會堂 시나고가)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기는 하지만 ‘사탄의 무리(회당)’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적대적인 표현의 이유는 묵시 2,9의 해설을 참조하기 바람].

 

“참고 견디라는 내 명령”(3,10) : 이 표현은 ‘인내하도록 부추기는 말’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교회는 언제 어디서나 시험과 유혹을 받게 될 것이지만, 필라델피아 교회는 시험과 유혹에 쓰러지지 않을 것이라는 언약을 받고 있다.

 

“온 세계에 닥쳐올 시련”(3,10) : 묵시 7,14에 언급된 ‘큰 환난’과 마르 13,19~20 (다니엘 12,1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여짐)의 “지금까지 없었고 또 (앞으로도) 없을 큰 환난”과 동일한 것이다. 이 환난의 기간은 묵시 13,5~15에 나오는 ‘반(反) 그리스도’의 득세기간인 3년반(42달 = 1260일 / 그 의미에 대한 해설은 나중에 묵시 12,6 참조 바람)과 일치한다. 이런 환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소극적인 도피행위로서는 불가능하며 오직 그리스도의 권능에 힘입어 적극적으로 튼튼한 영적인 대비(對備) - 예컨대 죄로부터의 탈피- 를 해야 한다.

 

“월계관”(3,11) : 묵시 2,10의 의미와 동일하다.

 

“하느님의 성전 기둥”(3,12) : 기둥은 견고성과 받쳐주는 힘을 상기시켜 준다. 그리고 필라델피아 교회 신자들이 승리자가 될 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하느님의 성전 기둥으로 삼으심’으로써 하느님의 견고하심에 (‘야훼는 내 성채, 내 바위’) 참여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안전을 찾아 도시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갈라디아서에 나타나는 “기둥처럼 존경받던 야고보와 게파와 요한....”(갈라 2,9)이라는 표현에서처럼 ‘기둥’이라는 용어를 볼 수 있다. 필라델피아 도시는 지진이 자주 일어났고 그때마다 주민들은 자기 집을 뛰쳐나와 도시 밖 안전지대로 피신해야 했다. 지진에 익숙해진 시민들은 오히려 큰 지진이 일어났을 때는 용기와 침착성을 가지고 대처하게 되었으나, 시민들이 더 언짢게 생각하는 것은 장기간에 걸쳐 되풀이해서 나타나는 미진(微震)이었다. 이 지진으로 말미암아 도시의 모든 건물, 땅들에 균열을 초래했다. 이런 지질학적 여건을 참작할 때 필라델피아 주민들은 어떤 큰 지진에도 끄떡하지 않는 튼튼한 기둥과 허물어지지 않는 건물을 가져 지진이 일어나도 굳이 도시 밖으로 피신하지 않아도 되었으면 하는 염원이 강했을 것이고, 이런 주민들의 바람이 묵시록에도 반영되어 ‘기둥’이니 ‘떠나지 않을 것이다’ 등의 문구가 들어왔으리라고 본다.

 

“내 하느님의 이름과 내 하느님의 도시... 나의 새로운 이름”(3,12) : 승리자는 그의 심오한 정체성을 형성시켜 줄 세 개의 이름을 받게 될 것인데, 첫째는 하느님의 이름이요. 둘째는 자신이 시민이 될 하느님 도시의 이름이며, 셋째는 완전하게 알려진 그리스도의 이름이다.

이 ‘이름을 써둔다’라는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구약의 관습을 살펴보아야 한다. 구약에서 대제관은 순금으로 패를 만들고 거기에 인장을 새기듯이 ‘야훼께 봉헌된 성직자’라고 새겨, 이 패를 이마(혹은 모자)에 부착했었다 (출애 28,36~38 참조). 구약의 이런 관습이 이 구절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신약의 새로운 하느님 백성들은 구약에서 대제관들만이 누리던 특전 - 대제관의 품위 - 을 모두가 공유하게 되었다고 본다. 비슷한 구절이 묵시 22,4에서도 또 나온다. 또 당시의 로마 관습도 살펴볼 수 있는데, 켄(J. Koenn) 교수는 묵시록 연구에서 다름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성전 기둥의 이미지는 당대의 관습을 암시해 주는 것인데, 그 당시 관습에 따르면 제국 의식의 최고봉에 자리한 황제는 임기가 끝날 때 자신의 얼굴과 이름, 자기 아버지의 이름과 출생 장소, 통치에 관한 것을 적어 넣은 성전 기둥을 세우게 하고 했었다.”

 

“새 예루살렘”(3,12) :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로운 도성 예루살렘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묵시록 21장에 나온다.

 

“새 이름”(3,12) : 묵시 2,17에 나오는 ‘흰 돌과 새 이름’의 설명을 참조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게다가 필라델피아 주민들에게는 ‘새 이름’이라는 용어가 다른 의미에서 실감나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즉 기원후 17년에 있었던 대지진으로 도시가 완전히 파괴되었을 때 당시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Tiberius)가 조세감면 특혜와 도시 재건 비용을 원조해준 일이 있었는데 이를 고맙게 여긴 필라델피아 주민들은 감사의 표시로 이 도시의 이름을 바꾸어 ‘네오카이사르’ (Neo-caesar : ‘황제로 말미암은 새로운 도시’라는 의미를 포함)로 바꾼 적이 있었고, 그 후에도 역시 기원후 69~79년에 통치하였던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가 그들에게 관대했을 때 베스파시우스 황제의 성(姓)인 ’플라비우스’(Flavius)를 본따 도시 이름을 ’플라비아’(Flavia)로 개명한 사례가 있었다. 물론 이 두 개명(改名)은 오래 지속되지는 않고 ‘필라델피아’라는 원래 이름으로 환원되었지만 필라델피아 주민들에게 있어서는 ‘새 이름’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쉽게 이해될 수 있었으리라고 본다.

 

필라델피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주님으로부터 어떤 질책도 받지 않았던 가난한 스미르나 교회에 보내는 편지와 많은 점에서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두 편지들은 동일한 주제들을 다루되 상이한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상호 보완적인 것처럼 보인다. 두 편지들은 두 개의 가난한 교회들을 그러나 상이한 관점에서 상대하고 있다. 스미르나 교회의 궁핍은 고통과 박해의 결과였지만, 필라델피아 교회의 가난은 기대하지 않은 선교적 활동의 결과였다. 다시 말하자면, 필라델피아 교회에게 있어서의 가난 즉 궁핍은 고통과 박해의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눈과 귀를 설득시킬 수 있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받아들여져야 하는 선택인 것이다.

필라델피아 교회는 경제적으로도 가난했고 “너는 적은 힘을 가졌다”라는 8절에서 알 수 있듯이 수적으로도 가난했다. 또한 이 교회는 도시밖에 있었기에 힘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그러한 힘을 간청하지 않았고, 능력이 없음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지켜 온 하느님의 말씀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추구하지 않았고, 완고하게 지켜온 그러한 충실성은 가난과 궁핍의 또 다른 관점이기도 했다. 즉 가난한 자는 새로운 것들을 장만할 방법도 없고, 새로운 사상이나 새로운 환경을 일구어 낼 방법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와 같이 필라델피아의 가난한 신자들은 아첨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사랑만으로 만족하려 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그러한 사랑밖에 의지할 것이 없었다. 가난한 자는 스스로 문을 열지도 못한다. 누군가 그에게 문을 열어주면 그저 감사할 뿐이다.

별로 대수롭지 않은 그 모든 것들이 필라델피아의 교회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그 교회의 선교가 성공할 것임을 보증해 주고 있다. 사실 선교적 활동은 실제적이고 영성적인 가난을 받아들임에 근거하고 있다. 필라델피아 교회가 그런 길을 간다면, 다른 어떤 교회도 필라델피아 교회에게서 월계관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그러한 삶의 태도야말로 그리스도께 동참하는 최고의 삶이기 때문이다. 자기의 이름조차도 지켜나갈 능력이 없는 이 도시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그들의 주인이신 분의 이름을 지켜나가고 있고,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시고 위험이 닥칠 때 모든 악으로부터 그들을 지켜 주고 계신다. 그러므로 가난과 충실성은 교회로 하여금 선교적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해 준다. 역설적으로, 가난과 충실성은 교회를 새로운 예루살렘인 하느님의 도시, 하느님의 성전의 받침대가 되게 한다. 그곳에 그 나라의 시민으로 가장 먼저 받아들여진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복음을 지키고 선포하는데 뒤따르는 불안과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인 것이다.

 

 

 

7. 라오디게이아 교회에 보내는 말씀(3,14~22)

라오디게이아는 ‘골로사이’에서 약 10마일 가량 떨어진 도시인데 이곳에는 은행업, 의류제조업이 번창했으며 고대의학 특히 안약, 고약 등이 유명했다. 많은 유다인들이 이 도시에 이주해 와서 살고 있었다. 사도 바울로는 골로사이 4,15~16에서 ‘라오디게이아’에 살고 있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도 따로 서간을 썼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바오로가 썼으리라고 추정되는 라오디게이아 서간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아마도 에페소 교회에 보낸 서간이 그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

 

스미르나 교회에 보내는 말씀(묵시 2,9)에서는 스미르나 교회가 물질적으로는 환난과 궁핍을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는 부유하다고 지적한 데 반해서, 라오디게이아 교회에 보내는 말씀(묵시 3,17)에서는 라오디게이아 교회가 물질적으로는 풍요함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는 불쌍하고 비참하며 가난한 처지에 있다고 질책한다. 즉 라오디게이아 사람들과 그곳의 신자들은 외적으로 풍족함만을 자랑삼고 있을 뿐, 자신들이 영적으로 얼마나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부끄러운 처지에 있는 지를 깨닫지 못했다. 라오디게이아가 ‘물질적 풍요함’으로 유명해진 이유는 3가지 요소가 있었다.

첫째로, 그 당시 동양과의 교통요지로서 많은 상거래가 이루어졌고 오늘날의 수표와 같은 신용제도, 은행업의 발전을 이루고 있었으며,

둘째로, 의류제조업 특히 양털로 짠 검보라색 모직류가 유명했고,

셋째로, 라오디게이아의 ‘멘’ (Men)이라는 신전에 아주 유명한 의학파가 있었고 그중에서도 ‘제욱시스’ (Zeuxis)와 ‘알렉산더 필랄레테스’ (Alexader Philalethes)라는 두 사람이 유명했다. 이들은 ‘테프라 프리지아’ 안약(tephra Phrygia : 작은 빵 모양의 정제안약)을 제조해냈다.

하지만 그들의 재산은 하느님과 연결되지 않은 이상 헛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참된 재산을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에게서 불로 단련된 금을,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지 않으려면 그들이 생산하는 검보라빛 모직이 아니라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하느님의 흰 옷을 사서 입고, 진정한 의미에서 눈이 밝아지려면 단순히 그들의 의술이 만들어낸 프리지아 안약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적인 혜안을 가져다 주는 하느님의 안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생활 때문에 야기된 라오디게이아 신자들의 미적지근한 신앙을 지적하고 질책하는 대목이 묵시 3,15~17에 기록되어 있다.

 

“아멘이시요 믿음직하고 참되신 증인”(3,14) : 그리스도께 붙여진 ‘아멘’이라는 호칭은 유일무이하면서도 특이한 호칭이다. 기도할 때 끝맺음으로 따라붙는 이 ‘아멘’이라는 말은 원래 히브리어로서, 충실하면서도 흔들림 없이 동참한다는 의미를 드러내 주는 것으로서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서 전례를 거행하기 위해 모인 공동체가 응답하는 ‘그렇게 되게 하소서’라는 외침이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본래의 의미 보다는 오히려 뒤이어 나오는 ‘믿음직하고 참되신’이라는 뜻이다. 이사 65,16에서도 이런 의미로 히브리어 원문에 ‘아멘의 하느님’으로 되어 있는 것을 신구약 공동번역성서에서 ‘미쁘신(진리의) 하느님’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아멘이시요 믿음직하고 참되신 증인’ 이라는 표현은 결국 동일한 ‘아멘이시요’의 이중 삼중적 강조 표현방법이라고 하겠다. 즉 동의반복어(同意反復語)인 것으로 “믿음직하고 참되신 증인”이라는 의미 강조표현이다.

 

“하느님의 창조의 근원이 되시는 분”(3,14) : 이 구절 역시 묵시록 1장의 그리스도 환시에 대한 묘사에는 속하지 않은 새로운 묘사다. 창조에 있어 ‘하느님 아들의 역할’이란 개념은 요한복음 1장 1~18절과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8,16의 “모든 것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다”는 사랑과 조화를 이룬다.

 

“나는 네 소행을 알고 있다.”(3,15) : 그리스도께서는 라오디게이아 교회의 분위기를 살피고 계신다. 라오디게이아 교회 공동체에서는 열기가 사라져 버렸고, 믿음에 있어서 조금도 칭찬 받을 것이 없다. 그 교회의 믿음이 열렬했다면 그 교회는 더 좋은 일을 했을 것이고, 그 결과 긍정적인 판단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라오디게이아 교회는 불감증에 걸려 있었으며 자신을 직시하지도 않을 정도로, 나태하기 이를 데 없는 상태에 빠져 있었기에, 어느 누구로부터도 무엇인가를 전혀 기대하지 않았었다. 그보다 더한 것은 라오디게이아 교회가 미지근했다는 것인데, 그것은 오히려 죽은 것(3,1)보다도 더 심각한 것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미지근함은 스스로 만족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라오디게이아 신자들의 눈으로 볼 때는 모든 것이 아무런 문제없이 진행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미지근함 때문에 차라리 뱉어내겠다고 말씀하신다. 즉 그러한 모습의 라오디게이아 교회는 그 교회를 완성하게 하신 분의 말씀으로 저버림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라오디게이아 교회의 미지근함은 다양한 형태로 주석될 수 있을 것이다. 라오디게이아는 스미르나와는 달리 (2,9) 실제로 가장 불행한 자이면서도 스스로가 부자라고 믿고 있다. 라오디게이아는 자신의 실상을 올바로 바라보지 못함으로써 필요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래서 모든 희망에 문을 닫아걸고 있는 것이다. 상업도시였던 라오디게이아는 자기 도시에서 금(富를 상징)을 캐낼 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그 금에는 불순물이 섞여 있을 뿐이다. 그들의 옷(품위의 상징)은 벌거벗겨져 수치를 당하게 되었으며, 거기서 생산되는 안약은 더 이상 효과가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결국 라오디게이아 교회 공동체는 거기서 생산되는 자랑스런 물건들이 궁핍과 수치를 야기시키는 원인이 되고, 자신을 드려다 보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하느님의 영광의 표상인 순수한 금 (21,18.21)과 새로운 창조를 단장하게 하는 옷 (3,5)과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 볼 수 있게 하는 안약을 그리스도에게서 사야만 한다.

 

“내가 사랑하는 자일수록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3,19) :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오디게이아 교회는 필라델피아 교회처럼 그리스도께서 들려주시는 사랑의 표현을 듣게 된다. 굳이 말하자면 두 개의 교회에 대해 사용하는 ‘사랑하다’라는 동사는 서로 다르다. 필라델피아 교회에 대해서는 신학적인 의미의 사랑(αγαπω)을 뜻하는 동사를 사용하고, 라오디게이아 교회에 대해서는 인간적인 의미의 사랑(φιλεω)을 뜻하는 동사를 사용한다.

그리스도께서 라오디게이아 교회에 보여주시는 사랑의 표현은 잠언 3,12의 내용과 유사하다. 그리스도께서 이 교회를 질책하시고 잘못된 행동들을 바로잡아 주고 계시다면, 그것은 경고나 질책을 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 이 편지 속에는 경고나 질책에 대한 것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너는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3,19) : 그리스도께서는 경고나 질책보다는 ‘열성을 다하라’는 권고의 말씀을 주신다. 라오디게이아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결국 이 교회를 다시 뜨겁게 달구어 놓으시려는 결정을 내리시게 하는 근거가 된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고 있다”(3,20) : 그리스도께서는 열쇠를 가지고 계신 분이시고 (3,7), 문이신 분이시며 (요한 10,7) 그리고 오시는 분이시지만 (2,5.16.25; 3,3.11) 마치 가난한 사람처럼 수줍은 모습으로, 스스로를 부자라고 말하는 이 교회의 문을 강제로 열게 하시지는 못하신다. 그분께서는 그 교회에 들어가시기 위해 문을 두드리고 계시고, 애원하고 계신다. 게다가 그리스도께서는 빈손으로 다가오신다. 만나를 주시겠다고 언약해 주신 (2,7) 그분께서는 함께 만찬을 들자고 다가오신다.

 

“나는 그와 함께 만찬을 나누고 그도 나와 함께 [만찬을 나눌 것이다]”(3,20) : 이 귀절은 반드시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말씀으로만 보아서는 안 되며, 바로 지금 현재에도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미사성제의 전례에서 이 묵시록의 말씀을 매일매일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승리하는 이는, 나와 함께 내 옥좌에 앉게 해 주겠다”(3,21) : 승리자는 옥좌를 상징하는 특권을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나누어 갖게 될 것이다. 옥좌는 심판과 판단을 내리는 장소이다. 예수님처럼 세상을 이기게 될 사람들이 (1요한 5,4) 그 옥좌에 앉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묵시록 저자는 시선을 하느님과 어린양의 옥좌가 자리하고 있는 천상 도시로 향하게 하는 (22,3 참조) 마지막 편지가 종결되고 있다.

 

“나는 아무 것도 필요한 것이 없어.”라는 표현은 라오디게이아 교회의 실상을 완벽하게 요약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라오디게이아 교회는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자족하고 있으며, 외면적으로 볼 때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를 가지고 있다고 보여진다. 박해가 그 교회를 위협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그 교회는 현재의 위치에서 무리하지 않고도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도 점차적으로 안락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어느 정도의 부를 향유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풍족함이 라오디게이아 교회를 실제적으로 가난과 궁핍에 빠져들게 했다. 필요한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희망이 자리할 곳이 없었고, 무엇인가에 대한 열망도 자리할 곳이 없었다. 누구에게 요청할 것 역시 하나도 없었기에, 누구에게 간청할 이유도 없었다. 모든 점에 있어서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생각했기에 누구에게인가 무엇인가를 베풀어 줄 이유도, 그럴 만한 마음의 너그러움도 없었다. 하루하루의 삶을 그저 편안하게 지내는 일만이 그들이 하는 일이었기에, 그리스도와 하느님을 향해 시선을 돌릴 필요조차도 느끼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 그 교회에 주실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교회를 멀리하실 것이고, 그 교회를 내뱉어 버리실 것이다.

자기 만족에 빠져드는 것을 경계하고, 매 순간 열렬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 가는 사람들이 라오디게이아 교회와 같은 상황에 대해 아마도 준엄한 심판을 하게 될 것이며, 반(反)복음적인 그런 교회의 모습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그런 교회는 사라져 버려야 할 것이라고 말할 지도 모른다. 그런 교회는 부유한 교회요, 부자들의 교회이기 때문에 더 이상 교회로서 존속할 가치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처럼 반응하시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교회의 모습을 역겹게 생각하시지만, 그들이 회개하고 새로운 삶으로 변화되기를 간절하게 바라신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 교회를 사랑하시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교회가 당신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교회를 사랑하고 계신다. 마르꼬 복음서는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 청년에게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르라 하시지만, 그 청년은 너무 부자였기에 그분을 따를 수 없었다. 그런 그 청년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그를 사랑 (αγαπω) 하셨다고 복음서는 전해준다 (마르 10,21).

예수께서 사랑하시지 않는 교회는 하나도 없다. 비록 그 교회가 부유하고 나태한 교회라 하더라도 그렇다. 물론 교회는 회개하도록 요청 받고 있다. 그 교회는 다시 불을 지펴야만 한다 (루가 12,49). 그 교회는 희망을 다시 찾아야만 한다. 그리고 기다림의 필요성을 다시 느낄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만 한다. 그 교회가 행하는 일들은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되면, 그리스도께 합당한 존재가 될 수 있는 방법으로 행해져야 하며 (흰 옷의 상징), 라오디게이아 교회가 지니고 있던 보화가 될 수 있는 은총으로 나타나야만 한다 (정련된 금의 상징).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회개의 길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마치 구걸하는 사람처럼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자가 되어 찾아오시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아멘, 오소서 주님!” (22,20)이라는 황급한 외침과 희망을 위해 필요한 것이 성체성사 안에 자리하고 있음을 기억하라고 촉구하신다 (3,20). 다른 어떤 교회들보다도 라오디게이아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며 초대된 자들의 궁핍을 드러내시는 마지막 만찬을 생각해야만 할 급박한 상황에 놓여져 있다. 라오디게이아 교회는 끊임없이 성체성사를 기억함으로써 열성을 다시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라오디게이아 교회가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동안, 그 어느 누구도 가난한 부자인 그 교회에 대해 감히 언급해서는 안 된다. 그 교회는 오히려 회개를 통해, 심판이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옥좌에 앉도록 초대받고 있는 것이다. 이토록 넘치는 하느님의 심판의 자비로우심을 라오디게이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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