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동(구 미아3동)성당 게시판

흙을 만지며

인쇄

상지종 [sjjbernardo] 쪽지 캡슐

2000-05-22 ㅣ No.2249

오늘은 월요일, 저에게는 휴일입니다.

 

말끔히 방 청소를 하고(그래서 기분이 몹시 좋습니다), 분양하기 위해서 가지 치기 해 놓았던 파피루스를 심었습니다. (참고로 파피루스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지요. 파피루스는 이집트가 원산지로서 고대 성서 필사본들을 파피루스 종이에 썼기 때문에 유명해 풀입니다. 갈대처럼 생겼지요. 제가 키우고 있는 것은 종이를 만들 정도로 크지는 않지만, 그런데로 잘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기후 조건에서는 이집트의 것처럼 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파피루스는 기다란 줄기 끝에 긴 잎사귀가 사방으로 퍼져 있는데, 잎이 붙어 있는 줄기를 잘라서 물에 담가 놓으면 잎과 잎 사이에 새 줄기가 나오고 그 밑으로 실뿌리들이 나옵니다. 이렇게 나오면 다시 흙에 심게 되지요. 그러면 온전한 파피루스 하나가 된답니다.)

 

제가 이 곳에 와서 처음으로 흙을 만졌죠. 촉감이 너무 좋았습니다. 만질 수 있는 흙이 있는 우리 본당이 너무나도 좋습니다.

 

PET병을 반으로 잘라서 만든 간이 화분 6개에 실뿌리와 여린 가지가 안쓰럽게 느껴지는 새끼 파피루스를 정성스럽게 심었습니다. 지금은 작고 보잘 것 없지만, 조금 지나면 무성하게 자라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면서 말이지요.

 

신학교 다닐 때는 흙을 참 많이 만졌습니다. 제가 겉보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아니 마당쇠같은 제 모습과 잘 어울리게, 꽃과 나무를 가꾸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생명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뿌린 만큼, 가꾼 만큼 자신을 드러내는 자연의 솔직함 때문입니다. 살 때와 죽을 때를 알고, 다른 것의 양분을 먹고 자란 만큼 다른 것을 위해서 자신을 양분으로 내어 놓을 줄 아는 더물어 사는 모습이 좋기 때문입니다.

 

신학교 들어가기 전에 시골에 가서 평생을 살고자 했던 때도 있었지요. 물론 생각처럼 되지는 않았지만, 신학교에서 조그마한 텃밭을 가꾸기도 하고, 이런 저런 것들을 심고 기르면서 대리만족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첫 본당인 이 곳에 와 보니 전혀 짬이 나지를 않았습니다. 어쩌면 핑계일지도 모르지만 말이지요. 그러던 중에 오늘 드디어 흙을 만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무 기쁩니다. 앞으로 종종 시간나면 이것 저것 가꾸어 보렵니다.

 

여러분도 한번 화초를 가꾸어 보십시오. 각박한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지고, 생활이  활기차게 변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화초를 키우는 기쁨에 비하면 화초를 바라보는 기쁨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뿌리를 내리고 있는 억센 풀잎이 지닌 생명의 아름다움이 뿌리 잘린 꽃꽃이 꽃의 화려한 아름다움보다 참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참, 앞에 제가 새끼 파피루스 화분 6개를 만들었다고 했는데, 원하시는 분에게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조금 더 자란 후에 말이지요. 우선 아버지 같고 형님 같으신 자상한 주임 신부님께 하나를 드릴 것이고, 드러나지 않게 본당 식구들을 위해 헌신하시는 수녀님들께도 하나 드릴 것이고, 우리 성당의 얼굴 사무실에도 하나, 오늘 작업할 때 모종삽을 빌려주신 고마우신 바오로 아저씨에게도 하나 드리고 나면, 두 개가 남네요. 고로 선착순 2분에게 드리겠습니다. 저에게 먼저 연락을 주시는 분 2분을 당첨자로 하겠습니다. 원하시는 분은 이 글을 읽는 순간 전화를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또 파피루스 가지 3개를 잘라서 물에 담가 놓았으니까, 이것도 시간이 좀 지나면 간이 화분에 옮겨 심을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그 때 여러분께 알려드릴께요.

 

여러분께 부탁하나 드려도 될까요. 오늘 심은 6개의 파피루스가 하나도 죽지 않고 튼튼하게 자라나도록 기도해 주시겠어요. 고맙습니다. 매일 복음 묵상만 올리다가(광중 항쟁 기간에는 '분노보다는 슬픔이'라는 글을 연재하고 있지만) 모처럼 일상 생활 이야기를 올리니까 기분이 색다르네요. 모두 행복하세요.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주님 안에 사랑담아 여러분의 벗 상지종 베르나르도입니다.

 

  



40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