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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piety 2 -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 아테네 1444_piety [소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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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07 ㅣ No.1635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질문 1: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였던 아테네(Athens)에서 "impiety [asebeia, 불경죄/신성모독, 즉, 아테네의 잡신(gods)들을 향하여 정당한(due) piety[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의 제시(提示) 불이행(不履行)(failure to show)]" 라는 죄목으로 아테네로부터 비난을 받았거나, 추방을 당하였거나 혹은, 사형 선고를 받은 자들이 소크라테스(Socrates, 기원전 470-399년) 이외에 또 있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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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부의 말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글들은 어떤 특정인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하여 마련된 글들이 결코 아니기에, 다음의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1) 지금까지 필자의 글들을 읽고서 필자에 대한 "분노(anger)" 혹은 "질투(envy)"를 가지게 된 분들은, 혹시라도 그분들께 "걸림돌(stumbling block)"일 수도 있는, 많이 부족한 죄인의 글들을 더 이상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2) 그리고 위의 제(1)항의 당부의 말씀을 읽고도 굳이 이 화면의 아래로 스스로 이동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의 아래의 본글을 읽는 분들은, 필자에 대한 "분노(anger)"와 "질투(envy)" 둘 다를 가지지 않을 것임에 동의함을 필자와 다른 분들께 이미 밝힌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3) 그리 길지 않은 인생 여정에 있어, 누구에게나, 결국에, "유유상종[類類相從, 같은 무리끼리 서로 사귐 (출처: 표준국어대사전)]"이 유의미할 것이라는 생각에 드리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 찬미 예수님!

 

 

 

질문 1: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였던 아테네(Athens)에서 "impiety [asebeia, 불경죄/신성모독, 즉, 아테네의 잡신(gods)들을 향하여 정당한(due) piety[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의 제시(提示) 불이행(不履行)(failure to show)]" 라는 죄목으로 아테네로부터 비난을 받았거나, 추방을 당하였거나 혹은, 사형 선고를 받은 자들이 소크라테스(Socrates, 기원전 470-399년) 이외에 또 있었는지요?

 

1. 들어가면서

1-1. 다음의 주소를 클릭하면, 소크라테스(Socrates, 기원전 470-399년)의 경우가 어떠하였는지에 대한 글[제목: impiety - 에우티프로(Euthyphro), 부제: 사형 선고를 받은 소크라테스의 죄목은 무엇? -에우티프로(Euthyphro)]을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클릭한 후에, << 부록 >>을 또한 꼭 읽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30.htm <----- 필독 권고

 

1-2. 이번 글의 제2-1항에서는, 바로 위의 주소에서 다룬 주제에 이어지는 글로서,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였던 아테네(Athens)에서 "impiety [asebeia, 불경죄/신성모독, 즉, 아테네의 잡신(gods)들을 향하여 정당한(due) piety[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의 제시(提示) 불이행(不履行)(failure to show)]" 라는 동일한 죄목으로 아테네로부터 비난을 받았거나, 추방을 당하였거나, 혹은 사형 선고를 받은 자들 중에 어떠한 자들이 있었는지를 함께 고찰하도록 하겠습니다.

 

1-3. 그런 다음에, 아래의 제2-1항에서의 고찰을 배경으로하여, 사도행전 17,15-18,1에 기록된 성 바오로(St. Paul)아테네 선교에 대하여 아래의 제2-2항에서 함께 고찰하도록 하겠습니다.

 

게시자 주 1-3: 이번 글에서의 고찰의 주된 이유는, 성경 용어인 "piety [pietas, eusebeia, 즉,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의 자구적 의미(literal sense)를 보다 더 분명하게 이해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2.

2-1. 아래의 제3항에 발췌된 글에 의하면, 다음의 인물들이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였던 아테네로부터  "impiety [asebeia, 불경죄/신성모독, 즉, 아테네의 잡신(gods)들을 향하여 정당한(due) piety[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의 제시(提示) 불이행(不履行)(failure to show)]" 라는 동일한 죄목으로 아테네로부터 비난을 받았거나, 추방을 당하였거나, 혹은 심지어 사형 선고를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2-1-1. Xenophanes(크세노파네스)(기원전 570-475년) - 철학자, 신학자, 시인, 사회 및 종교 비판자. 그는 호메르(Homer, 기원전 9세기(?)-750년)와 다른 시인들에 의하여 묘사된 바와 같은 올림피아 산의 잡신(Olympians gods)들윤리성(morality)을, 그들의 처신이 수치스럽다고 주장하면서, 비판하였습니다.(#) 이것은 그에 반하여 atheism (impiety)이라는 불평들을 초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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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이러한 주장을 또한 소크라테스(Socrates, 기원전 470-399년)도 하였음은, 다음의 플라톤(Plato)의 저술인 "에우티프로(Euthyphro)"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답변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30_Euthyphro.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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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Aeschylus(기원전 525-456년)

 

2-1-3. Anaxagoras(아낙사고라스) of Clazomeae (기원전 510-428년) - 철학자. 소아시아에서 태어난 그리스인이며, 아테네로 철학을 도입하였던 고대 그리스의 첫 번째 철학자로 알려진, 자연 철학자였던 그는, 예를 들어, [아테네 산의 잡신들 중의 한 명인 아폴로(Apollo)의 품위에 반하는 주장인] 태양이 한 개의 뜨거운 바위(a hot rock)라고 이미 주장하였으며, 그리하여 "impiety [asebeia, 불경죄/신성모독, 즉, 아테네의 잡신(gods)들을 향하여 정당한(due) piety[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의 제시(提示) 불이행(不履行)(failure to show)]"  라는 죄목으로 기소되었고, 아테네로부터 추방을 당하였으며 그리고 유배의 상태에서 람프사쿠스(Lampsacus)에서 죽었습니다.

 

아낙사고라스에 대한 소개의 글[제목: mind(nous, 마음)이라는 단어의 기원/유래와 정의(definition)]은 다음에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99.htm <----- 필독 권고

 

2-1-4. Protagoras(기원전 490-420년) - 유명한 소피스트/궤변론자였던 그는, 플라톤(Plato)에 의하여 "절대적인 진리(absolute truth)는 전혀 없고, 오로지 개인들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진리뿐이다" 라고 해석되었던, "사람이 모든 사물들의 척도이다" 라는 자신의 말(remark) 때문에 "atheisms" 라는 죄목으로 비난받았으며, 아테네로부터 추방되었고 그리고 그의 책들의 일부는 불태워졌습니다.

 

2-1-5. Phidias(기원전 480-430년)

 

2-1-6. Euripides(기원전 480-406년)

 

2-1-7. Socrates(소크라테스)(기원전 470-399년) -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철학자 플라톤(Plato, 기원전 428-348년)이 남긴 소크라테스의 죄목인 "impiety [asebeia, 불경죄/신성모독, 즉, 아테네의 잡신(gods)들을 향하여 정당한(due) piety[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의 제시(提示) 불이행(不履行)(failure to show)]" 에 대한 대화 형식의 저술인 에우티프로/에우티프론(Euthyphro)은 다음의 주소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30.htm

 

2-1-8. Phryne(기원전 4세기 초반) "impiety" 로 기소된 여성 예술가였으나, 변론 과정에서 방면되었음.

  

2-1-6. Aristotle(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년) - 철학자, 과학자. 그리스 마케도니아 출신의 철학자로서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기원전 356-323년)의 스승이었던 그는, 알렉산더 대왕이 기원전 323년에 죽자마자 마케도니아에 반기를 들었던 아터네 시민들에 의하여 "impiety [asebeia, 불경죄/신성모독, 즉, 아테네의 잡신(gods)들을 향하여 정당한(due) piety[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의 제시(提示) 불이행(不履行)(failure to show)]" 라는 죄목으로 기소되었으나, 그러나 "아테네인들이 철학에 반하여 두 번씩 죄를 지을까 염려하여" 몸을 피하였습니다(fled).

 

2-2. 다른 한편으로,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매년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제1독서(사도행전 17,15.22-18,1)로 듣게 되는 바는. 성 바오로(St. Paul)의 두 번째 선교 여행 기간(기원후 50-52년) 중에 발생하였던, 성 바오로에 의한,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의 선교 내용의 일부입니다.

 

특히 성 바오로가 사도행전 17,22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듯이, 위의 제2-1항에서 고찰하였던, 고대 그리스 시인(poets)들에 의하여 창조되었던, 따라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올림푸스 산의 잡신(gods)들에 대한 아테네 시민들의 종교심(religion)이, 소크라테스의 죽음 후 약 450년 이후인 기원후 50년 경까지도, 계속하여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2-1. 다음은 "새 번역 성경"사도행전 17,15-18,1"주석 성경"에 주어진 이 본문의 특정 용어들에 대한 주석들입니다:

 

출처: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missaid=6554&gomonth=2015-05-13 그리고 "새 번역 성경" 및 "주석 성경"

(발췌 시작)

15 바오로를 안내하던 이들은 그를 아테네까지 인도하고 나서, 자기에게 되도록 빨리 오라고 실라스와 티모테오에게 전하라는 그의 지시를 받고 돌아왔다.

 

16 바오로는 아테네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동안, 그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 찬 것을 보고 격분하였다.7) 17 그래서 그는 회당에서 유다인들과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과 토론하고, 또 날마다 광장에8) 나가 그 곳에 모인 사람들과 토론하였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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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로마 제국 시대에 아테네는 정치력을 완전히 상실하였으면서도 여전히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이 도시는 그야말로 '우상들의 숲'이라고 불릴 정도로 갖가지, 때로는 외설적인 신상(神像)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러한 아테네에서 이재 복음과 이교의 수준 좊은 사상의 만남이 처음으로 이루어진다(16-34절).

 

(8) "광장" 에 관해서는 16,19 각주 잠조. 특히 아테네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었던 이 "광장"(아고라)은 지금도 남아 있는 아크로폴리스 북쪽에 있었는데, 사방을 둘러싼 그 주랑(柱廊)은 오래전부터 만남의 장소로 애용되었다. 

 

(9) 바오로는 유다인들에게도 이야기하고 또 같은 날 이교인들에게도 이야기한다. 이렇게 전혀 다른 두 청중을 상대로 선교하는 것은 새로울 뿐만 아니라 유일하기도 하다(13,46 각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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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에피쿠로스학파스토아학파10) 몇몇 철학자도 바오로와 대담을 나누었는데, 어떤 이들은 “저 떠버리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바오로가 예수님과 부활에 관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고 “이방 신들을 선전하는 사람인 것 같군.” 하고 말하였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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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는 당시에 가장 널리 퍼져 있던 철학 학파였다.

 

(11) "부활" 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아나스타시스로 여성 명사이다. 그래서 바오로의 말을 들은 이들은 이 낱말을 예수님과 관련된 새로운 여신의 이름으로 오해한 것 같다. 그리스 사상에서는 사후 생존의 영적인 불사(不死)로만 생각하였기 때문에, 육체의 부활이라는 것은 전혀 낯선 개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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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그들은 바오로를 아레오파고스로 데리고 가서 물었다.12) “당신이 말하는 그 새로운 가르침을 우리가 자세히 알 수 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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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아레오파고스는 '아레스 언덕' 이라는 뜻이고, 아레스는 그리스 사람들이 섬기던 전쟁의 신이었다(로마 신화에서는 마르스라고 불린다). "광장"(아고라)으로 장소를 옮기기 전에는, 이곳이 아테네의 정치와 사법을 관장하는 최고 의회의 자리였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는 아테네인들이 단순히 바오로와 조용히 대담하려고 그를 이 언덕으로 데려갔는지, 아니면 종교 문제까지 다루던 최고 의회 또는 어떤 위원회가 당시에도 더러 열리던 그곳의 법정으로 연행의 성격을 띠고 데려갔는지 확실하지 않다. 후자의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보인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이 행정이나 사법 당국자들 앞에서 하는 증언을 즐겨 이야기한다(4,8-12; 5,27-33 등. 그리고 9,15; 루카 21,12 참조). 그리고 이 경우에는, 의회 의원들이 정식 재판을 열려는 의도 없이, 단순히 바오로가 말하는 새로운 교리를 알아보고(34절에 따르면 이들 가운데 한 명이 개종한다.) 그것이 미치게 될 영향도 가늠해 보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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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당신은 우리가 듣기에 생소한 것을 전하는데,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싶소.” 
21 사실 아테네인들과 그곳에 머무르는 외국인들은 모두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이야기하고 듣는 일로만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었다.

 

22 바오로는 아레오파고스 가운데에13) 서서 말하였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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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앞에" 로 옮기기도 한다.

 

(14) 사도행전에 들어 있는 바오로의 여러 대설교 가운데에서(13,16-14; 20,18--35; 22,1-21; 24,10-21; 26,2-33), 이제 시작되는 설교가 이교도들에게 한 가장 전형적인 것이다(14,15 각주; 1테살 1,9-10; 히브 6,1-2 참조). 바오로는 설교의 첫머리에서(22-23절) 제시하는 "알지 못하는 신" (이미 리스트라의 이교인들에게 선포한 것처럼: 14,15 각주)이야말로 창조주이시며 섭리자이신 하느님이라고 밝힌다(25-29절). 그리고 상당히 특이한 관점에서(31절 각주) 곧바로 복음을 제시한다(30-31절). 이러한 그의 설교에는, 유다인들이 다른 민족들에게 하는 설교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들도 여러 개 들어 있다(24절 각주; 25절 각주; 그리고 지혜 13-14; 로마 1,19-25; 에페 4,17-19 참조). 그러면서도 청중을 "무지" (30절 각주)에서 벗어나게 해 주기 위해서, 바오로는 가기가 선포하는 메시지와 이교 사이의 비슷한 점들을 발견해 내려고 애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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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대단한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23 내가 돌아다니며 여러분의 예배소들을 살펴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도 보았습니다.15)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숭배하는 그 대상을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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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신들이 하도 많아 잊어버렸거나 미처 알지 못하는 신들에게서도 은혜(#)를 받기 위해서, "알지 못하는 신들" 에게 제단을 만들어 바친 것이다. 그런데 바오로는 여기에서 이 표현을 단수로 사용한다. 고고학적으로 이렇게 단수로 쓰인 것이 아직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단수형도 가능할 수 있다. 또는, 바오로가 의도적으로 자기 목적에 맞게 단수로 말하였을 수도 있다. 곧 청중이 지금까지 알지 못하면서도 어떤 식으로든 숭배해 온 신이 이스라엘과 예수님의 하느님 한 분이심을 미리 시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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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여기서 말하는 "신들"은 당연히 "잡신(gods)들"을 말하며,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은혜" 는, 선물(gift)을 말하는 것이지, "은총(grace)" 을 말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차용 번역 용어들인 "은혜" 와 "은총" 각각이 나타내는 개념들 사이의 커다란 차이점은 다음의 글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55.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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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는 살지 않으십니다.16) 25 또 무엇이 부족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도 않으십니다.17)(#) 하느님은 오히려 모든 이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26 그분께서는 또 한 사람에게서 온 인류를 만드시어 온 땅 위에 살게 하시고18), 일정한 절기와19) 거주지의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27 이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게 하려는 것입니다. 더듬거리다가 그분을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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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본디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이 논쟁적인 주제는(1열왕 8,27; 이사 66,1-2) 이미 유다교에서도 이교인들에게 설교할 때에 이용되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이교인들에게 하는 설교만이 아니라, 때로는 유다인들에게 하는 설교에서도(7,48 각주 참조) 이 주제를 활용한다. 비슷한 주제를 스토아학파에서도 볼 수 있다.

 

(17) 하느님께는 부족함이 없다는 것 역시 구약 성경의 주제인데(시편 50,9-13; 51,18; 예레 7,22), 이는 당시 세네카라는 로마의 철학자가 발전시킨 스토아학파의 사상과도 일맥상통한다.

 

(#) 게시자 주: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였던 아테네의 잡신(gods)들의 경우에 그러할 것이라는 표현은 일찍이, 예를 들어, 플라톤(Plato)의 저술인 에우티프로(Euthyphro)에서 등장 인물인 소크라테스(Socrates, 기원전 470-399년)에 의하여서 함축적으로(implicitly) 언급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제목: 에우티프로(Euthyphro)]을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30_Euthyphro.htm <----- 필독 권고

 

(18) 아담과 관련된 성경의 전통이 여기에서는 인류의 단일성에 관한 스토아학파의 사상과 맞닿게 된다.

 

(19) "절기" 대신에 (각 민족이 살아갈) "시대" 로 옮기기도 한다. 곧 바오로가 자연의 질서보다 세상의 역사를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슷한 본문인 14,17을 생각하면 "절기" 의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판단된다. 스토아학파에서도 자연 질서가 핵심 사상 가운데 하나이다.

 

(20) 바오로의 이 말은 이교인들도  피조물을 통하여 하느님을 "찾아낼 수" 있음을 시사한다. 비슷한 생각을 로마 1,19-20에서도 볼 수 있지만, 로마서에서는 그것이 더욱 사실적이고 비판적인 관점에서 전개된다(로마 1,20 각주). 이와 관련하여 30절 각주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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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 몇 사람이 ‘우리도 그분의 자녀다.’21) 하고 말하였듯이, 우리는 그분 안에서22)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23) 29 이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인간의 예술과 상상으로 빚어 만든 금상이나 은상이나 석상을 신과 같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24) 30 하느님께서 무지의 시대에는 그냥 보아 넘겨 주셨지만,25) 이제는 어디에 있든 모두 회개해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명령하십니다. 31 그분께서 당신이 정하신 한 사람을 통하여 세상을 의롭게 심판하실 날을 지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리시어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증명해 주셨습니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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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아래의 게시자 주 2-2-1을 꼭 읽도록 하라.

 

(21) "자녀다" 대신에 "족속이다" 로 옯기기도 한다. 이는 기원전 3세기의 킬리키아 지방 출신 아라토스의 말로서, 역시 기원전 3세기의 스토아학파의 철학자인 클레안토스의 생각과도 가깝다. 바오로는 이를 창세 1,26의 하느님의 "모습" 에 따라 인간이 창조된 것과 연결시키는 것이다(2베드 1,4; 1요한 3,2 참조).

 

(22) "그분 안에서" 대신에 "그분 덕분에" 로 옮기기도 한다.

 

(23) 이 후반부는 기원전 6세기 크레타 출신으로 아테네에서 활약한 에피메니데스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 같다.

 

(24) 바오로는 매우 폭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던 "신" 이라는 용어로써, 이교인들의 많는 신들에서부터 유일하신 하느님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모습에 따라 신들을 상상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반대로,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되었음을 생각해야 한다.

 

(25) 유다인들의 "무지" 는 구약 성경의 예언을 이해하지 못한 데에서(3,17 각주; 13,27 각주), 다른 민족들의 "무지" 는 피조물을 통하여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 데에서 유래한다. 바오로가 여기에서 사용하는 말투는 이교인들의 이러한 무지가 본디 유죄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26) 이교인들에게 하는 이 설교에서(14,15 각주 참조), 바오로는 예수님의 삶도 죽음도 이야기하지 않은 채(유다인들에게 하는 설교에 관해서는 2,14 앞 소제목 각주; 13,16 각주 참조). 그분을 곧바로 세상 심판의 장본인이 되실 "사람" (2,23 참조)으로 소개한다(24,42 각주 참조). 부활도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부여하신 재판관으로서의 사명에 대한 보증으로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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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하여 듣고서, 어떤 이들은 비웃고 어떤 이들은 “그 점에 관해서는 다음에 다시 듣겠소.” 하고 말하였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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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아테네인들의 이러한 자세에 관해서는 18절 각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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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이렇게 하여 바오로는 그들이 모인 곳에서 나왔다. 34 그때에 몇몇 사람이 바오로 편에 가담하여 믿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아레오파고스 의회 의원인 디오니시오28) 있고, 다마리스라는 여자와 그 밖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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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디오시니오에 관해서는 명백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후대의 전통에서는 그가 아테네의 주교였다고 이야기한다. 아무튼 그는 여기에서 엘리트 계층 개종자의 전형으로 제시된다(13,12; 17,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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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그 뒤에 바오로는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1)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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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코린토는 기원전 146년에 로마군에게 완전히 파괴되었다가, 기원전 44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 황제(#)에게서 로마 식민지로 재건되어(16,12와 각주 참조) 제국의 속주인 아카이아 지방의 수도가 된다. 이 코린토는 항구를 두 개나 갖춘 교역의 중심지였다. 주민은 이탈리아 출신들이 바탕을 이루는 가운데 다양한 민족들이 뒤섞여 살았는데, 특히 아프로디테스라는 여신 숭배로 평판이 좋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교가 여기에서는 아테네에서보다 쉽게 대중 속에(1코린 1,26) 뿌리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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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1) 로마 공화정(Roman Republic) 말기의 위대한 장군이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기원전 100-44년)가 황제(Emperor) 혹은 임금(King)의 자리에 등극(登極)한 적이 결코 없었으므로,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분명한, "황제" 라는 바로 이 차용 번역 용어는 명백한 번역 오류이다. 따라서, 이 주석에서 "황제" 로 번역된 표현은, 예를 들어, "장군(General)" 등으로 바로잡아져야 할 것이다.

 

(2) 지금 바로 위에서 지적한 바에 대하여서는, 예를 들어,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초등학교 4학년 쯤에 읽었던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읽도록 하라. 그리고, 로마 제국(Roman Empire)의 첫 번째 황제는 그의 양자였던 옥타비아누스/옥타비우스(Octavian/Octavius), 즉, 신약 성경의 루카 복음서 2,1에서 그 이름이 언급되고 있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재위기간: 기원전 27년-기원후 14년]이다. [주: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27년부터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통치함] 그리고 로마 제국의 두 번째 황제는 "티베리우스(Tiberius)[재위기간: 기원후 14-37년]" 였다.

 

혹시라도 로마 제국 초기의 첫 두 명의 황제들이 누구였는지에 대하여 더 확인하고자 할 경우에는, 다음에 있는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들을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xmasmidn.htm [루카 복음서 2,1에 대한 해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c_adv_2.htm [루카 복음서 3,1에 대한 해설]

 

그리고 다음의 자료도 또한 읽도록 하라:

http://en.wikipedia.org/wiki/Augus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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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2-2-1:

(1) 바로 위에 발췌된 성경 본문을 읽으면서, 특히 바로 이 본문 중에 등장하는 몇 개의 특정한 용어들에 주목하십시오. 예를 들어, 신약 성경 본문 전체에 걸쳐, 아테네에 대하여 언급할 때애만 오로지 시인(poets)들이라는 단어가 단 한 번 사용되고 있음은 다음을 클릭하면 직접 확인할 수 있다(*):

http://info.catholic.or.kr/bible/view.asp?ctindex=new2&prindex=0&Keyword=시인 

 

(2) 사도행천 제17장의 서술로부터 우리는, 로마 시민권자이기도 하였던 성 바오로(St. Paul)가 성장 과정에서 그리스 문화 및 철학에 대하여서도 좋은 교육을 받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생각에, 그는 플라톤(Plato)의 저술들 중의 하나인 "에우티프로(Euthyphro)" 도 또한 읽었으며, 따라서 어떠한 죄목으로 소크라테스(Socrates, 기원전 470-399년)가 사형 선고를 받았는지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러한 추정을 하게 되는 근거는, 플라톤(Plato, 기원전 429-327년)이 자신의 저술인 국가[Republic (III)]에서 구체적으로 이미 제안하였던 "자유인들에게 적합한 기술들(liberal arts)"을, 기원후 1세기에 살았던 인물인 성 바오로(St. Paul)가 성장하는 과정에 이미 학습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지적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제목: 지성덕들과 전통적 교육체계 외]제2-3항제3항을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21.htm <----- 필독 권고

 

(3) 그리고 바로 위의 제(2)항에서의 필자의 지적 전반에 대하여서는, 아래의 제2-2-2항에 발췌된 사도행전 17,18에 대한 NAB(New American Bible)의 주석을 또한 읽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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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다른 한편으로, 구약 성경 본문 전체에 걸쳐 "시인(poets)들" 라는 용어는 민수기 21,27에서 단 한 번뿐임은 다음의 주소들을 클릭하면 직접 확인할 수 있다:

http://www.vatican.va/archive/ENG0839/A/R9.HTM [NAB]

http://info.catholic.or.kr/bible/view.asp?ctindex=old2&prindex=0&Keyword=시인 [새 번역 성경, 구약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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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게시자 주 2-2-1 끝)

 

2-2-2. 다음은, NAB(New American Bible)에 주어진 사도행전 17,15.22-18,1에 대한 주석들 입니다. 특히, 소크라테스(Socrates, 기원전 470-399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사도행전 17,18에 대한 주석을 꼭 읽도록 하십시오: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839/__PYB.HTM

(발췌 시작)

[16-21] Paul's presence in Athens sets the stage for the great discourse before a Gentile audience in Acts 17:22-31. Although Athens was a politically insignificant city at this period, it still lived on the glories of its past and represented the center of Greek culture. The setting describes the conflict between Christian preaching and Hellenistic philosophy.

 

[18] Epicurean and Stoic philosophers: for the followers of Epicurus (342-271 B.C.), the goal of life was happiness attained through sober reasoning and the searching out of motives for all choice and avoidance. The Stoics were followers of Zeno, a younger contemporary of Alexander the Great. Zeno and his followers believed in a type of pantheism that held that the spark of divinity was present in all reality and that, in order to be free, each person must live "according to nature." This scavenger: literally, "seed-picker," as of a bird that picks up grain. The word is later used of scrap collectors and of people who take other people's ideas and propagate them as if they were their own. Promoter of foreign deities: according to Xenophon, Socrates was accused of promoting new deities. The accusation against Paul echoes the charge against Socrates. 'Jesus' and 'Resurrection': the Athenians are presented as misunderstanding Paul from the outset; they think he is preaching about Jesus and a goddess named Anastasis, i.e., Resurrection.

 

[18] 에피쿠로스학파스토아학파(Epicurean and Stoic philosophers): 에피쿠로스(Epicurus, 기원전 342-271년)의 추종자들의 경우에, 삶의 목적(goal)은, 온건한 추론 행위(sober reasoning) 및 선택(choices)들과 회피(avoidances)들 모두의 동기들에 대한 추구 행위(searching out)를 통하여 획득된, 행복(happiness)에 있었습니다. 스토아 학파들은, 알렉산더 대황의 한 명의, 더 젊은, 동시대인이었던, 제노(Zeno)의 추종자들이었습니다. 제노(zeno)와 그의 추종자들은, 신성에 기인하는 불꽃(the spark of divinity)이 모든 실재(reality) 안에 현존하고 있음을 그리하여, 자유롭게 되기 위하여, 각 인격(person)은 "본성에 따라(according to nature)" 반드시 살아야 함을 견지하였던 범신론(汎神論, pantheism)의 한 형태 쪽으로 믿었습니다(believed in). 저 떠버리[This scavenger(청소부)]: 글자 그대로, 알곡식을 부리로 집어 올리는 한 마리의 새의 경우에서처럼, "씨앗 줍는 자(seed-picker)" 를 말합니다. 이 단어는 이후에, 발췌 수집자(scrap collectors)들에 대하여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관념(ideas)들을 취하고 그리고 [이 관념들의 정확한 출처의 구체적인 제시 없이] 마치 이 관념들이 자신들의 고유한 것인양 보급시키는, 사람들에 대하여, 사용됩니다. 이방 신들을 선전하는 사람(Promoter of foreign deities): [잘 알려진 플라톤 이외의 또한 잘 알려진 또 한 명의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크세노폰(Xenophon, 기원전 437-355년)에 따르면, 소크라테스(Socrates, 기원전 470-399년)는 새로운 잡신(new deities)들을 선전하는 행위로 기소되었습니다. 바오로(Paul)에 반하는 이 비난은 소크라테스(Socrates)에 반하였던 그 고발(the charge)을 반향합니다(echoes). '예수님과 부활': 아테네인들은 처음부터 바오로를 오해하였던 것으로 제시되고 있으며, 그리고 그들은 그가 예수님과 아나스타시스(Anastasis), 즉, 부활(Resurrection) 이라고 명명된 한 명의 잡신에 관하여 설교하는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19] To the Areopagus: the "Areopagus" refers either to the Hill of Ares west of the Acropolis or to the Council of Athens, which at one time met on the hill but which at this time assembled in the Royal Colonnade (Stoa Basileios).

 

[22-31] In Paul's appearance at the Areopagus he preaches his climactic speech to Gentiles in the cultural center of the ancient world. The speech is more theological than christological. Paul's discourse appeals to the Greek world's belief in divinity as responsible for the origin and existence of the universe. It contests the common belief in a multiplicity of gods supposedly exerting their powers through their images. It acknowledges that the attempt to find God is a constant human endeavor. It declares, further, that God is the judge of the human race, that the time of the judgment has been determined, and that it will be executed through a man whom God raised from the dead. The speech reflects sympathy with pagan religiosity, handles the subject of idol worship gently, and appeals for a new examination of divinity, not from the standpoint of creation but from the standpoint of judgment.

 

[23] 'To an Unknown God': ancient authors such as Pausanias, Philostratus, and Tertullian speak of Athenian altars with no specific dedication as altars of "unknown gods" or "nameless altars."

 

[23] 한 분의 알지 못하는 신에게: 파우사니아스(Pausanias), 필로소트라토스(Philostratus), 그리고 테르툴리아노(Tertullian) 등과 같은 고대 저자들은 "알지 못하는 잡신들의" 제단들 혹은 "이름이 없는 제단들" 로서 아무런 구체적인 헌정(dedication)을 전혀 갖지 않는, 아테네의 제단들에 대하여 말합니다.

 

[26] From one: many manuscripts read "from one blood." Fixed . . . seasons: or "fixed limits to the epochs."

 

[28] 'In him we live and move and have our being': some scholars understand this saying to be based on an earlier saying of Epimenides of Knossos (6th century B.C.). 'For we too are his offspring': here Paul is quoting Aratus of Soli, a third-century B.C. poet from Cilicia.

 

[28]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바로 말이 크놋소스의 에페메니데스(Epimenides of Knossos, 기원전 6세기)의 더 초기의 말에 근거하고 있다고 이해합니다. ‘우리도 그분의 자녀다.’: 여기서 바오로는, 한 명의 기원전 3세기, 킬리키아 출신의,  시인인, 소리의 아라토스(Aratus of Soli)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상, 발췌 및 일부 문장들에 대한 우리말 번역 끝)

 

2-2-3. 그리고 사도행전 17,15.22-18,1 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대단히 좋은 내용의 해설은 다음에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east_6_wed.htm <----- 필독 권고

 

3.

다음은, Encyclopedia of Ancient Greece (Nigel Wilson, Editor)에 주어진 "Censorship(검열)"에 대한 설명 전문입니다:

 

"Aristotle" "impiety"

 

출처: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발췌 시작)

Censorship

 

검열

 

Cebsorship is a means of preventing the expression of ideas, speech, or behariour. Social, religious, political, military, and other authorities practise censorphip in the name of the common good of society, seeking to protect it from heresy, obscenity, treason, or idological error. In one form or another censorship has existed universally throughout Greek history.

 

     Most of the censorphip among the ancient Greeks occurred over religious and political ideas. The common charge was impiety (asebeia). Since they believed the goods could actively help or harm the city state, impious behaviour that might invoke divine wrath was punished. Sparta imposed a rigid system of cencorship to protect its militarism: books, music, and even learned men were banned. Greek tyrants exercised censorship to silence and eliminate their opponents. Generally speaking, under the tyrants, and many other rulers, censorship was identical with harsh repression.

 

     Artists were not unually censored, but one notable exception in the first half of the 4th century was the case of the Athenian courtesan Phryne, who was charged with impiety because she modelled for a nude statue of Aphrodite by Praxiteles. Hyperides, pleading her case, tore her clothes off at the height of his defence, and asked the all-male jury if there was anything about her body that was offensive to the gods or man. She was rather quickly acquitted.

 

     Censorship of playwrights occurred on a number of accasions. Euripides, who played no active political role, was charged with acebeia by Cleon, as ware other dramatists including Aristophanes. Humour was sometimes used to censure behariour through the weight of public opinion, becoming thereby an unofficial form of censorship to those afraid of being satirized. Those mocked would occasionally seek to punish the jokers. Plato in the Laws advocates censoship of those forms of comedy that are cloaks for vicious personal attacks. Tragedies could also be banned. In 493 BC a tradegy written by Phrynichus and produced at the Dionysia on the theme of the failure of the Ionian revolt, and the fall of Miletus deeply moved the audience; fearing turmoil, the authorities fined Phrynichus and banned the play.

 

     Athens, though democratic, censored many thinkers, artists, and intellectuals; and they were exiled, imprisoned, or executed, or they took flight. Aeschylus was accused of violating the secrecy of the Eleusinian mysteries. Phidias was also accused of impiety and fled to Olympia. Protagoras, the famous sophist, wad censored for his remark "Man is the measure of all things." Accused of atheisms, he was banished from Athens and certain of his books were burned.

 

     The beliefs of the Greek philosophers laid them open to various charges. Xenophanes criticized the morality of the Olympians gods as portrayed by Homer and other poets, arguing that their behaviour was shameful. This generated complaints of atheism (impiety) against him. Similarly, Anaxagoras of Clazomeae (c. 500-428 BC) had argued that the sun was a hot rock. Convicted of impiety, he was banished from Athens and died in exile at Lampsacus. The real motive for the prosecution was probably to embarrass his patron Pericles.

 

     The most famous case of censorship of a philosopher was the trial of Socrates on charges of corrupting youth (the moral charge) and impiety (the religious charge). The resulting judicial murder on these trumped-up charges was to have a profound infulence on many including his most famous pupil, Plato. Oddly it is Plato who in the Apology stated the implications of a refusal to accept censorship, and later in the Republic himself instituted a system of censorship.

 

     Plato's Republic has been widely read since it was first written and it has influenced many who would seek to impose censorship. Plato believed that whatever entered the soul would either develop it of corrupt it. In his utopian Republic a system of censorship is described that would mould the minds of all citizens, but  expecially the Guardian class, through a system of censored education. This included censorship of music, for Plato believed that music could haave a profound impact on the soul and that it was important that the right music be heard at the right time. It should be noted that on several occasions intellectuals sought to censor those they disagreed with; Plato, for instance, wanted to burn the works of Democritus.

 

     Aristotle also advocated a form of educational censorship in his Politics. Following the death of Alexander the Great, Aristotle himself became a victim of censorship. He was charged with impiety, but fled "lest Athens sin twice against philosophy".

 

     During the Hellenistic period many stated adopted a policy of punishing external political threats quickly, but they usually left native populations and cultures alone. One notable exception was the Seleucis policy of forced Hellenization, which censored any opposition to assimilation. This policy was violently resisted by conservative Jews, whose resistance and success in arms is described in the books of Maccabees and still celebrated at the festival of Hanukkah.

 

     The establishment of great libraries at Alexandria and elsewhere led to two forms of literary censorship. When editors collated manuscripts, they often found vriants in the copied and decision had to be made about which was the "correct" version. Editors could also make important changes when issuing new editions of older works and thereby influence the interpretation of the text.

 

     The other form of literary censorship wad mob rule. On a number of occasions mobs or conquerors sacked and burned libraries. The library at Alxandria was damaged and burned during Julius Caesar's siege in 42 BC, by Christians in AD 391, and by Muslims in AD 642. In the Christian era political charges were brought against missionaries and other Christians. Because the worship of the emperor was equated with political loyalty, the Christian refuasl to comply led to the presecution - in effect a fiolent form of censorship. St. John wad exiled to the island of Patmos and some scholars believe that the apocalyptic style of the book of Revelation was a religious cover that enabled the book to get past the censors.

 

     With the conversion of the emperor Constantine and the legitimization of Christianity, a brief period of toleration occurred, which ended with the triumph of Christianity as the only licit religion. Under the emperor Theodosius I pagan religions were proscribed, sexual regulations were imposed, and the Olympic Games stopped. Theodosius, like Constantine before him and others after him, repressed unorthodox beliefs. The union of Church and state meant that heresies contrary to the Nicene Creed were viewed as political opposition and thus deserving of censure. The emperor Justinian I, seeking political unification through theological orthodoxy, also persecuted heresies, and he closed the philosophical schools in Athens (AD 529).

A.J.L. Waskey, Jr.

See also Atheism

 

Further Reading

(이하 발췌 생략)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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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업에 소요된 시간: 약 10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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