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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이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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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구 [cygnus209] 쪽지 캡슐

2000-06-26 ㅣ No.1155

경향신문 26일자 [시론]에 실린 예수살이 박기호 신부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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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바가 있는데, 그 이면을 보면 사회적 해결 과제를 동시에 담고 있다. 가령 보릿고개 넘기가 버거웠던 시절에는 경제문제 해결이 시대적 과제였다. 해방과 자유를 추구했던 식민과 군사독재의 시절에는 민주화가 시대의 과제였다. 사상 처음으로 기억되는 의사들의 파업은 우리 시대의 징표와 과제가 무엇인지 성찰케 해준 화두였다. 죽어가는 생명 앞에서 단호하게 가운을 벗어놓고 구호를 외치는 모습은 이 시대가 이기주의의 극치에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다.

 

 

이기주의는 공동체의 파괴를 가져온다. 그것은 생태 환경 파괴로 나타나는 소비주의와 함께 죽음으로 가는 마차의 두 바퀴이다. 왜곡된 경제 성장과 산업화는 우리 사회의 전통적 덕목들을 해체시켜 버렸다. 정치인에게서 지사정신을 볼 수 없고, 학자에게서 선비정신을 볼 수 없고, 기업인에게서 장인정신도 기업윤리도 볼 수 없고, 교육자에게서 사도를 볼 수 없고, 성직자에게서 모성애와 도덕적 압력자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의사들에게서 인술을 볼 수 없음도 물론이다.

 

 

우리는 오랜 대결의 세월을 살아왔기 때문에 시위나 파업이란 말이 낯설지 않다. 그래서 웬만한 불편함에도 관대했다. 그들의 요구에 대해 어느 정도 도덕적인 공감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풍요를 누리고 정치적으로 민주화가 됐다.

 

 

그래서 새로운 풍경들을 보게 되니 중산층들의 시위가 그것이다. 독재시대에 민주화를 외치던 젊은이들이 분신과 의문사로 죽어갈 때 소리 한번 못 지르거나 좌경, 혼란 운운하던 계층들이 무서운 용기와 결속으로 나서고 있는 것이다.

 

 

이번의 진짜(?) 사회적 혼란을 보면서 생각했다. “그런대로 말썽 없던 의약제도에 왜 손을 대 혼란을 자초한 걸까?”. 그러나 내 책상 서랍만 보아도 그렇지만, 약봉지와 연고들이 쌓여있지 않은 집이 없다. 후손을 위한 건강사회를 위해서도 의·약분업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실시도 해보기 전에 의사들이, 또 다음엔 약사들이 번갈아 반란을 일으키는 것일까. 경제적, 사회적으로 중·상류층에 속하는 이들인데 찾아오는 환자를 돌려보낼 만큼 절박한 이유는 솔직히 수익성일 게다. 돈 말고 무엇인가?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은 치유자 예수의 십자가는 로마 총독과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성전 상인조합의 합작품이었다. 자신들의 밥그릇을 위협하는 것만은 용납할 수 없었던 단호함이 메시아를 처형한 것이다. 의·약사들의 어떤 명분과 주장에도 국민들 눈에는 밥그릇 싸움 이상은 아니다. 자신들의 몫을 뺏기지 않기 위해 환자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다.

 

 

생명은 하늘로부터 왔다. 그래서 진료를 거부하는 것은 하늘을 거부하는 것이다. 중국과 북한같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의료인들의 수입은 유치원 교사와 같은 등급이다. 한약분쟁도 의사들의 파업도 없다.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것이 ‘인간’이요, 의약인의 소명은 병을 낫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북한보다 잘 산다고 우쭐댈 것도 없다.

 

 

파업 의사들의 모습은 우리 모두의 얼굴이기도 하다. 끝을 모르고 치닫는 소비와 이기주의로 이제 사회가 위기에 처해 있음을 드러내는 시대의 징표다. 이대로 간다면 돈과 물자는 넘치되 인간은 없는 흉물스런 종말을 향해 갈 뿐임을 보여 준다. 이제 소비를 행복으로 삼는 자본주의적 가치관을 수정하고, 무엇보다 의료와 교육만은 완전 무상의 정책을 추구해야 할 때이다.

 

 

그래도 절망하지 않는다. 의사들의 파업 중에도 인술을 베풀고 있던 의사들에게서 희망을 보기 때문이다. 소비주의를 거슬러 생활의 불편함을 받아들이고, 이기주의를 거슬러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는 이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껍데기는 가고 알맹이들이 역사를 주관하는 아름다운 시대가 오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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